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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 목숨 걸고 돕다 광주 전남 / 문화유적 답사 [출처]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 목숨 걸고 돕다|작성자 임도혁 충곡♥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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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처순 유배객 물심양면 후원!
◈사림 기묘제현수필·수첩 숭모!
◈송시열 “글·사람 모두 뛰어나”!

1519년 겨울 안처순(安處順, 1492~1534)은 맹추위를 뚫고 구례에서 능주(지금의 화순)로 발걸음을 향했다. 기묘사화라는 광풍이 불어 닥친 지 겨우 한 달쯤 지난 시기였다. 조광조는 만면에 환한 웃음을 머금고 멀리서 찾아온 벗을 반갑게 맞았다. 안처순은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만나 오래도록 담소를 나누었다.

얼마 전만 해도 조광조 집은 수많은 벼슬아치들로 날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하지만 ‘붕당의 괴수’로 찍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지금 조광조를 찾아오는 이는 거의 없었다. 세상인심을 탓할 수도 없었다. 임금이 언제 죽일지 모를 조광조를 만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안처순은 구례현감이란 현직 신분 아닌가.

 

◇유배지에 스민 한 줄기 햇살

적소(謫所, 귀양지)에는 유배 온 죄인이 일정 거처를 벗어나는지 늘 감시자가 있기 마련이다. 더구나 조광조는 ‘붕당의 괴수’ 아닌가. 그럼에도 안처순은 당당했다. 담대한 용기와 따뜻한 우정의 소유자가 아니었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보통 기묘사화하면 조광조와 김정(金淨, 1486~1521)은 알아도 안처순은 잘 모른다. 조광조와 김정은 개혁을 주도했고 그러다 목숨을 입은 기묘사화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안처순은 조역에 머물렀다. 그러나 안처순에 대해 조금만 더 알아보면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 ‘주연 못지 않은 조연’이란 말이 자연히 떠오른다.

안처순은 위험을 무릅쓰고 유배지를 직접 찾아다니며 벗들을 위로하고 후원했다. 그는 기묘사화 직후 조광조에 이어 김구(金絿, 1488~1534)를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남해까지 찾아갔다. 사림세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던 훈구파의 눈초리가 기세등등한 시기였다. 하지만 이를 겁낼 안처순이 아니었다. 그는 심지어 제주에서 유배 중이던 김정까지 찾아갔다. 순흥안씨 명문가에서 물려받은 재산 덕에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안처순은 그때마다 붓과 종이, 책, 옷감, 음식 등 이것저것 싸 들고 가서 전해주었다.

기묘제현수첩에 들어있는 편지 하나를 살펴보자. 기묘사화(1519년 11월)가 일어난지 8개월쯤 후인 1520년 7월 13일 머나먼 남해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암 김구가 안처순에게 보낸 답장이다.

[이번에 원충이 한라(제주)로 이배된다는 소식을 들으니 정신이 아득해지며 끊임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바로 두보(杜甫)가 말한 ‘황천에서 남은 교분을 다하리라(九重泉路盡交期 구중천로진교기)’ 하는 상황입니다. 참으로 서글픕니다.

그대가 청한 글씨는 그대의 정성에 감복하여 지렁이 같은 글씨라도 써서 보내니 받아주기 바랍니다. 그대가 보내준 붓이 다 뾰족하고 가늘어서 큰 글씨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책상에 있던 나쁜 붓으로 썼더니 궁색하고 졸렬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굳이 따진다면 금지(金紙)와 고정지(藁精紙)에 쓴 글씨 중 고정지에 쓴 것이 조금 낫습니다. 진자(眞字)는 나쁜 붓으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편지를 보면 김구는 남쪽 끝자락 외딴 섬에 갇힌 처량한 신세였지만 충암 김정이 곧 제주로 이배(移配)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알고 있다. 안처순과 주고받은 편지 덕분이다. 안처순은 직접 찾아가 위문도 했지만 수시로 편지를 보내 여러 소식을 전해주었다. 심지어 편지와 함께 필요로 하는 물품도 인편으로 보내주었다. 명필로 이름 높았던 김구는 안처순을 통해 붓과 종이를 받았고, 대신 글을 써서 안처순에게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유용근(柳庸謹, 1485~1528)은 전남 장성에 유배 중일 때 “간절히 바라건대 붓과 먹, 종이를 넉넉히 구하여 보내주고, 부채도 부탁한다”라는 편지를 안처순에게 보낸다.

서슬 퍼렇던 엄혹한 시기 안처순은 언제 사약이 내려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 그리고 고독과 불안에 떨고 있는 젊은 선비들에게 밝고 따뜻한 한 줄기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

전북 남원시 금지면 택내리 마을 입구에 후손들이 세운 기념비. 신도비처럼 안처순의 이력을 적었다.

 

조광조가 전남 화순에 유배 와서 살았던 초가를 1986년 추정 복원한 것이다. 조광조는 능주현 관아에서 일하던 노비의 집에 머물렀다. 당시 조광조는 한양에서 해배(解配) 소식을 기다리며 항상 문을 열어뒀다고 한다.

 

남해에 유배 중이던 1520년 김구가 구례현감 안처순에게 보낸 편지. 기묘제현수첩 제43~45면이다. 안처순은 다른 기묘명현의 소식을 전해주는 것은 물론 귀양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보내주기도 했다. 덕분에 김구는 외딴섬에서 충암 김정이 제주로 이배 예정이라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또한 금지(金紙)와 고정지(藁精紙)를 받았고, 대신 글을 써서 안처순에게 보내주었다.

왼쪽은 대동야승 중 기묘록보유 상_안처순 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오른쪽은 이덕무가 기술한 안처순의 일생.

 

◇안위 돌보지 않은 우정, 기묘제현수첩

순흥안씨 종중에서 기탁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소장하고 있는 국가지정 보물이다.

기묘제현수필은 중종 13년(1518) 안처순이 구례현감을 제수받아 내려갈 때 24명의 동료들이 일시에 석별의 정으로 써준 송별 시문 31편을 한데 묶은 48면짜리 첩(帖)이다. 이에 비해 기묘제현수첩(己卯諸賢手帖)은 기묘사화가 일어난 기묘년을 전후하여 동료들과 소식을 주고받았던 안처순이 자신에게 온 편지를 묶은 것이다. 중종 12년(1517년)에서 중종 26년(1531년)에 이르는 15년간 그의 동료 12명으로부터 받은 편지 39통이 72면에 걸쳐 담겨 있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은 이 첩에 대해 “첫째 글(文 문)이 뛰어나고, 둘째 글씨(筆 필)가 뛰어나고, 셋째 그 사람(其人 기인)이 훌륭하며, 넷째 오래되고 귀하다(其古而稀 기고이희)”라고 평했다. 글의 내용, 글씨 자체, 그리고 그 사람들 모두 드물게 훌륭하다는 뜻이다.

기묘제현수첩은 기묘명현들의 인간적인 면모와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자료이다. 기묘명현은 후대 선비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기에 수필과 수첩 모두 오랫동안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안처순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귀양 간 벗들을 직접 찾아가 위로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힘껏 도왔음을 이 수첩은 고스란히 전해준다. 기묘제현수첩에 실려 있는 편지 몇을 살펴보자.

“멀리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노자까지 챙겨주니 편지를 보자마자 눈물이 흐릅니다. … 저는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때에는 서로 소식을 묻는 것조차 그만두어야 합니다. 세상일을 다시 입에 올리면 절대 안됩니다.”

사화 직후인 1519년 11월 27일 거제도 유배지로 향하던 한충(韓忠, 1486~1521)이 안처순에게 보낸 편지이다. 한충이 갖고 있던 극도의 공포와 불안, 살벌함이 편지에서 여실히 느껴진다.

1년 후인 1520년 12월 한충이 안처순에게 보낸 편지에는 “병이 오래돼 뼈만 앙상하게 남았으니 오래 살 수 없을 것이다, 긴 밤 등불도 없이 잠들지 못하고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견디기 어렵다, 인편이 있거든 들기름과 율무를 보내달라”고 말한다. 삶에 대한 미련이 보이지 않는다. 유배 생활의 고단함과 궁핍함이 잘 드러나 있다. 안처순이 귀양살이하는 벗들의 든든한 후원자 노릇을 하고 있음도 나타난다.

“바다 건너 오신다는 기별을 받았습니다만 저는 기피해야 할 인물입니다. 물론 굳이 오신다면야 거절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자취를 감추어 신중하게 출발해야지 경솔해서는 안됩니다.”

자암 김구가 머지않아 남해를 방문할 것이라는 안처순의 편지를 받고 보낸 답장이다. 당국의 감시를 염두에 두고 몰래 찾아오라는 당부를 담았다. 첩보 영화가 생각날 만큼 긴장감이 넘친다.

전남 화순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최산두(崔山斗)는 1533년 “초여름 철쭉꽃이 필 때가 가장 좋다”며 유배지를 방문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냈다. 또 안처순이 베푼 호의가 고맙고 미안했는지 “저승에서는 교분(交分)을 다하리라”라고 약속했다. “겨우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나 끝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세상일은 다시 입에 올리지 마라.”고 하면서 안처순을 염려하기도 했다.

이처럼 안처순이 받은 편지에는 당시 유배지에서 울분과 외로움을 토로한 기묘 사림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겨져 있다.

안처순은 심지어 천애이역(天涯異域)의 제주까지 험한 파도를 넘어 김정을 찾아간다.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항해였다. 반가운 해후 뒤 돌아가는 안처순을 향해 김정은 이렇게 시를 읊는다. 1521년 10월 그가 사사되기 7개월 전이었다.

“천겹 파도를 훌쩍 넘어와

만리 죄수를 찾아와 만나고

봄이 저물어 돌아가려 하니

이별 걱정으로 길을 잃을 지경이네

남쪽 바닷가에서 서로를 바라보는데

그리운 마음은 떠나는 배를 쫓아가네”

한국학중앙연구원 개최 특별전 당시 전시장 입구 맨 앞에 전시된 기묘제현수첩(보물)과 기묘제현수필(보물)

 

기묘제현수첩 47~48면에 실린 유용근의 편지. 진원(전남 장성)에 유배 중이던 유용근은 안처순에게 “붓과 먹, 부채를 보내달라”라고 간곡하게 부탁한다.

2020년 10월 19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열린 특별전 ‘기묘명현의 꿈과 우정’ 개막식에 참석한 순흥안씨 사제당종중 대표들. 왼쪽부터 안봉섭 감사, 안상현 전 회장, 안도섭 유사, 안상래 관리이사, 안태현 회장. [사진 제공: 안태현 회장]

1521년 안처순이 남원 향리로 돌아와 지은 사제당. 안처순은 이곳에 머물며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자신의 호를 사제당으로 삼았다.

===사재당 앞의 필자===

사제당기념관에 보관, 전시 중인 안처순 유물들

안처순이 남원 사제당에서 지낼 무렵 지은 시. 강에서 물고기를 낚으며 아름다운 경치를 즐길 수 있으니 하늘에게 감사한다는 내용이다.(위)안처순이 오양손의 오괴정에 부친 칠언절구 시판이다. 오괴정에 걸려 있다.(아래)

 

◇석별의 마음 담아, 기묘제현수필

2010년 순흥안씨 중중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했다. 마지막 조인영의 발문(跋文)까지 총 48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처순은 홍문관 박사로 재직하던 중 남원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의 병환이 잦아 근심이 컸다. 이에 중종 13년(1518)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지방관이 되기를 청하였다. 중종은 안처순의 청을 받아들여 남원과 가까운 구례현감으로 제수하였다.

안처순이 서울을 떠나게 되자, 조광조를 비롯한 친한 벗들이 송별의 의미로 시를 짓고 편지를 써서 보냈다. 기묘제현들은 구례현감이 되어 떠나는 안처순에게 석별의 아쉬움을 표현하면서 어머니를 잘 모실 것,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풀 것 등 이런저런 당부를 담아 글을 보냈다. 안처순은 24명의 동료가 써준 31편의 시와 편지를 소중하게 간직했다.

유용근은 안처순에게 써준 편지에서 “어진 그대가 현감으로 가는 것은 어머니에게 효도가 되며, 백성들에게도 다행인 일”이라 적었다. 그는 또 “백성을 무지하다고 무시하지 마라, 목민관과 백성은 본성에 아무런 차이가 없으니 좋은 가르침이 있으면 누구나 선하게 될 수 있다”고 따뜻한 조언을 한다.

 

특이한 것은 기묘제현수필에 담긴 대부분은 신진 사림의 글이지만 남곤(南袞, 1471~1527)의 오언율시 2수도 수록되어 있다는 점. 남곤은 심정, 홍경주와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키는 데 앞장서 기묘삼흉(三凶)으로 불릴 만큼 후대 사림의 지탄을 받는 인물이다. 당시 안처순이 전별시를 요청하여 써준 것으로 안처순의 교류 범위가 꽤 넓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末契容吾老)  나 같은 늙은이를 벗으로 용납하고

(頻過認子情)  자주 들르는 걸 보니 그대 마음 알겠구나

(他時傳尺素)  훗날 서찰을 전할 테니

(雙鯉不辭烹)  두 마리 잉어로 전하는 소식을 사양치 말게나

 

남곤은 특히 송별시 앞부분에 자신의 호 ‘止亭’(지정)을, 뒤에는 이름과 자를 새긴 ‘南袞’(남곤), ‘士華’(사화)를 날인했다. 다른 사람들이 호인(號印), 자인(字印), 성명인(姓名印) 없이 그냥 글만 써서 준 것과 비교하면 온전한 격식을 갖추려 한 남곤의 정성이 담겨 있다. 또 시 한 수에는 성향이 다른 자신을 찾아준 것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편지를 주고받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러나 훗날 누군가 남곤의 성명인 오른쪽 아래 ‘外’(외)자를 가는 붓으로 작게 써놓았다. 남곤의 시가 첩에 실려 있기는 하지만 기묘제현이 아니라는 뜻이다. 단 한 글자에 담긴 질책의 뜻이 서슬 퍼렇다.

한준겸은 서문에서 이와 관련해 “남곤의 시를 첩에서 빼버리지 않은 것은 죄를 무겁게 하기 위함”이라고 일갈했다. 준엄하게 꾸짖는다는 의미에서 일부러 남겨뒀다는 말이다.

기묘제현수첩(왼쪽)과 기묘제현수필. 각기 보물로 지정돼 있다.

전남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 609-1 죽연사(竹淵柌)에서 2021년 3월 열린 향사(享祀). 구례현감이던 안처순을 비롯하여 고효시(1429~1501)와 그의 손자 고원후(1609~1684), 정태서(1609~1685)를 배향하고 있다. [사진출처: 안태현 사제당종중 회장 블로그]
기묘제현수필 제38~39면에 실린 남곤(南袞)의 전별시와 날인된 인장
​사제집(사제선생실기) 1권 [한국학중앙연구원]

 

◇선비들이 앙모한 친필묵적

조선 사대부들은 왕도정치, 도학정치를 꿈꾸며 불꽃처럼 살다 스러져간 젊은 선비들 즉, 기묘명현을 당파를 초월해 한결같이 존경했다. 이 같은 기묘 사림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감정은 두 필첩에 숭모(崇慕)로 이어졌다. 기묘사림이 남긴 친필유묵(親筆遺墨)을 한꺼번에 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두 첩은 개인 간에 주고받은 사사로운 시와 편지이다 보니 거창한 철학적 담론이나 복잡한 정치적인 논제는 없다. 하지만 기묘명현들이 당시 공유했던 우정 그리고 귀양살이를 하면서 가졌던 회한과 좌절 같은 인간적인 면모가 글 하나하나에, 행간 곳곳에 물씬 배어있다.

안처순의 아들 안전(安瑑)은 아버지가 사망하고 15년이 지난 뒤인 1549년 보관하고 있던 글을 하나로 묶어 첩으로 만들기 위해 하서 김인후(金麟厚)에게 보여주며 서문을 부탁하였다.

하지만 서문만 받아둔 상태에서 50여년의 세월이 더 흘러 비로소 첩으로 만들어졌다. 인조 비 인열왕후의 아버지인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이 1601년(선조 34) 김인후 서문에다 자신의 서문을 더했다. 명필 한호(韓濩)가 제묘제현수필, 기묘제현수첩이라고 표제를 썼다. 강복성(康復誠), 이호민(李好閔)은 원본 뒤에 두꺼운 종이를 덧대서 첩으로 꾸미는 장황(粧䌙) 작업을 맡았다.

이렇게 해서 이전까지 그냥 상자 안에 보관되고 있던 시와 편지들은 깔끔하게 2권의 첩으로 완성돼 세상 밖에 나왔다.

1830년(순조 30) 두 첩은 새 단장을 한다. 당시 전라도관찰사였던 조인영(趙寅永, 1782~1850)은 안처순의 후손이 아직 남원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조인영은 안처순 후손의 집을 직접 방문하여 수첩과 수필을 꺼내 보았다.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여기저기 헤진 데가 많았다. 안타깝게 여긴 조인영은 자신의 발문을 더해 수첩과 수필을 보수하여 돌려주었다. 1875년에는 조광조의 후손인 전라도관찰사 조성교(趙性敎, 1818~1876)가 기묘제현수첩을 한 번 더 수리하고 끝에 이 첩의 감회 및 경위 등을 서술한 발문을 달았다.

카메라가 없던 시절이다. 기묘명현을 흠모했던 후대 선비들은 글씨 모양까지 그대로 흉내 내서 베껴 쓰는 임모(臨摸)를 했다. 원본이 아님에도 보배롭게 간직하면서 돌려보았다. 물론 단순히 내용만 베껴 쓰는 경우도 있었다. 임모본 또는 단순히 필사본을 목판에 새겨 인쇄를 하는 등의 방법으로도 널리 보급됐다.

남원시 금지면 택내리 내기마을에 있는 영사정(永思亭)은 안처순 사후 그의 아들 안전(安瑑)이 선친의 산소를 망배(望拜, 멀리서 조상이나 부모 쪽을 바라보고 절을 하는 것)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앞에는 널따란 금지평야를 가로질러 순자강(곡성 일대를 흐르는 섬진강을 가리킨다)이 흐르고 멀리 지리산 줄기가 뻗어있는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전북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 203 영천서원(寧川書院). 안처순(安處順), 정환(丁煥), 정황(丁熿), 이대유(李大㕀) 등 4명을 배향하고 있다.

도경유(都慶兪, 1596~1636)가 장옥, 조광조, 김정의 편지 원본(위)과 이를 임서(臨書, 필체까지 흉내 내서 베껴 쓴 것)한 것(아래). 조선의 선비들은 기묘명현들을 매우 존경하여 그들이 남긴 글을 이렇게라도 간직하려 하였다. [달성 병암서원 소장 복제본]
순흥안씨 문중에서 ‘사제선생실기’ 간행을 준비하면서 만든 목판. 기묘제현 수필·수첩의 원본 글씨 모양까지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이 모각본 덕에 두 첩은 대중에게 더욱 많이 확산된다. 왼쪽은 기묘제현수필의 유용근 송서 앞부분, 오른쪽은 김구의 편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간 ‘기묘명현의 꿈과 우정, 그리고 기억’ 책 p247, 248 촬영]

안처순의 딸과 사위 옥계 노진(盧禛, 1518~1578)이 잠들어 있는 경남 함양군 지곡면 평촌리 묘역. 노진은 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청백리에 뽑히기도 했다. 노진은 안처순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기묘제현수필과 기묘제현수첩의 개장 과정

 

◇온유했으나 굳센 용기의 소유자

안처순의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순지(順之), 호는 기재(幾齋) 또는 사제당(思齊堂)이다. 전북 남원 출신이며, 고려시대 성리학을 처음으로 소개하여 문묘에 배향된 안향(安珦, 1243 ~ 1306)의 9대손이다. 기묘사화 때 사림을 옹호했던 정승 안당(安瑭)은 그의 재종숙이다. 그의 순흥안씨 가문은 학문과 벼슬이 높은 이른바 잠영세족(簪纓世族) 명문세가였다.

안처순은 1493년(성종 23) 5형제 중 귀염둥이 막내로 태어나 1514년(중종 9) 21세 때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다.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동방(同榜) 즉 합격 동기생이었다. 안처순은 이후 벼슬길에 들어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등을 역임한다.

안처순의 사위로 예조판서를 지낸 옥계 노진(盧禛, 1518~1578)이 지은 행장에 따르면 안처순은 성품이 밝고 깨끗하며 단정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이 높았고 덕행이 뛰어났다.

조광조의 도학적 이상국가 만들기에 함께 한 인사 중에는 안처순도 포함된다. 안처순은 정암 조광조보다 꼭 10살 아래지만 문과는 1년 앞선 선배이다. 안처순이 1515년(중종 10) 예문관 검열에 재직하고 있을 때 조광조는 그해 8월 문과에 갓 합격한다. 그리고 조광조는 출세가도를 달린다. 그해 11월 벌써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어 언론을 주도한다. 어느새 사림의 선두에 우뚝 섰고, 그의 휘하에는 신진 관료들이 빨려 들어갔다. 1517년(중종 12) 안처순과 조광조는 홍문관에서 함께 일하기도 했다.

다만 안처순은 천성이 온유하여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다른 기묘명현처럼 관료로서 후세에 큰 명성을 떨치지 않았다. 그는 효심이 깊어 1518년(중종 13) 홀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자청해서 구례현감에 부임했다. 이로 인해 그는 천둥벼락같은 기묘사화를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안처순의 강직한 면모 하나. 왕이 “무릇 사기(史記)는 해독하기 쉬우나, 근사록(近思錄)은 깊이 생각하고 반복해 보지 않으면 풀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전경(典經, 경연청의 정9품 관직) 안처순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사학(史學)은 알기 쉽다’라고 하셨는데, 신의 생각에는 권면(勸勉)과 징계를 삼으려면 역사를 읽을 때 반드시 그 의미를 깊이 파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학이 어찌 알기 쉬운 것이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중종실록 26권, 중종 11년 9월 29일 정미 6번째기사 1516년]

이때 안처순은 불과 23세. 중종은 29세로 이미 왕위에 오른지 10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안처순은 역사책을 쉽게 보지 마라 엄정하게 짚어주었다. 당시 관료가 경연에 임하는 자세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시해한 사건이 있었다. 안처순은 왕에게 통렬하게 자책하여 반성하라 촉구했다. 이에 대해 왕은 “나의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한 때문이니, 더욱 몸과 마음을 엄히 해야겠다”고 대답한다. [중종실록 31권, 중종 12년 윤12월 3일 갑술 4번째기사 1517년]

왕조시대 9품 미관말직이 왕에게 직접 이렇게 말한 것이다. 민주주의 시대인 오늘날 9급 말단 공무원이 대통령은 그만두고 총리(영의정)나 장관(판서)에게 이런 소신을 거침없이 펼 수 있을까? 어림 반푼어치 없는 일이다. 500년 조선 왕조를 지탱한 힘 중 하나는 바로 이런 것 아니었을까?

안처순의 강직한 용기는 훗날 기묘사화라는 엄혹한 시기에 유배 중인 벗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경제적 지원까지 아끼지 않은 그의 행동을 잘 설명해준다 할 것이다.

안처순은 구례현감 재직 시절 향교를 세우고 ‘근사록(近思錄)’을 간행, 보급하여 지방 교육 진흥에 힘썼다. 그는 1520년 벼슬에서 물러나 남원 순자강변에 사제당을 짓고 후학양성에 힘쓰다가 다시 벼슬길에 나갔으나 곧 사직했다. 43살 때 병을 얻어 생을 마쳤다. 임실 영천서원(寧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국보 안향 초상. 영주 소수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안처순의 백패(왼쪽). 1513년(중종8) 안처순이 진사시에서 받은 합격증이다. 1등 제5인의 성적으로, 합격자 100명 가운데 5위를 한 우수한 성적이다.1514년(중종9) 안처순의 문과 급제 홍패(오른쪽). 문과 합격증은 붉은 종이에 쓰기 때문에 홍패(紅牌)라고 한다. 특별히 실시된 별시(別試)였기 때문에 선발인원은 33명이 아니라 16명에 불과했다. 비록 병과(丙科) 제16인의 성적이지만 연이어 소과, 대과를 합격한 것이므로 대단한 쾌거라고 할 수 있다.
후손들이 필자와 함께 안처순의 묘를 찾았다. 왼쪽부터 사제당종중 안상래 관리이사, 안길선 이사, 안태현 회장, 안봉섭 감사(사진 위).
안처순 묘갈에 조광조, 김구 등의 유배지를 찾아 만난 일 등이 기록돼 있다. 송병선(宋秉璿)이 짓고, 이용원이 썼다.
구례현감 시절 안처순이 간행해 보급에 힘썼던 근사록

 

◇안처순의 생애

1492년(성종 23) 출생

1513년(중종 8) 소과(사마시) 합격

1514년(중종 9) 별시문과 병과 급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로 출사

1515년(중종 10) 예문관 검열(檢閱)

1517년(중종 12) 홍문관 박사(博士)

1518년(중종 13) 구례현감 제수, 24명으로부터 전별 시문 받음(이를 묶은 것이 보물 ‘기묘제현수필’)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1520년(중종 15) 구례현감 사직, 남원으로 낙향

1521년(중종 16) 남원에 사제당 짓고 후학 양성

1533년(중종 28) 재등용되어 성균관 학관, 양현고 주부, 봉상시 판관 역임

1534년(중종 29) 별세

 

◇후손 인터뷰

“선조의 용기·배려 본받으려 늘 노력”

김태현 회장 “후손들 자부심 커”

기묘제현수필 등 보물 2점 기탁

장서각, 2020년 말 특별전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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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 사제당종중 : 네이버 카페

순흥안씨종가 참찬공파13세손 기묘명현 사제당 안처순 선조님과 후손들의 기록 종중 소식 공유 및 대화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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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당 선조님의 굳세고 강인한 용기 그리고 남을 위한 따뜻한 배려심은 우리 후손들에게 면면히 전해져 살아 숨 쉬고 있어요. 늘 그 정신을 본받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제당 안처순의 17대손인 안태현(安泰鉉) 순흥안씨 사제당종중 회장은 “할아버지는 우리 후손 모두에게 자랑이며 긍지”라고 말했다.

안 회장은 2014년도 체신 공무원을 퇴직하고 현재 전북 전주시에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사제당 종중 일이라면 만사 제쳐놓고 승용차로 1시간 20분 가량 걸리는 남원으로 달려간다. 종중 회의를 주관하고, 재산을 관리하는 일이다. 유적을 돌아보기 위해 찾는 학계나 언론계 인사, 관광객도 맞아서 안내해주곤 한다.

안 회장은 2005년부터 블로그(https://blog.naver.com/photoan)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안처순을 비롯한 순흥안씨 후손과 관련된 자료를 게재해서 널리 알리는 것이 주 목적이다. 2021년 5월엔 전북 임실군 삼계면 삼은리 산49 ‘오괴정(五槐亭)’에 안처순의 시판이 걸려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가서 사진을 찍어와 알렸다. 오괴정은 이 지역 해주오씨 입향조인 돈암 오양손(吳梁孫)이 지은 정자이다.

안 회장은 종중 일이라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늘 발 벗고 나선다. 얼마 전 안상현 전 회장과 함께 영사정에 걸린 주련을 모두 해석하고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렸다. 주련은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으로 꽤 어려운 내용이다.

2010년 남원을 중심으로 한 순흥안씨 사제당종중은 보관하고 있던 선조의 고문서를 모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탁했다. 전문 보관시설이 없다 보니 변색 변질 등 훼손 문제가 따랐고, 도난 우려도 컸기 때문이다. 실제 2002년 사제당기념관에 도둑이 들었던 적이 있다. 다만 대부분 오래된 고문서뿐이어서 도둑이 가치를 몰라보는 바람에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문중에서 기탁한 문헌은 기묘제현수필, 기묘제현수첩 등 2점의 보물을 비롯해 교지, 문집 등 200여점에 이른다. 장서각측은 이를 한데 실어 고문서집성 98책을 발간했다. 장서각은 이어 두 권의 필첩에 대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2020년 10월 19일부터 12월 19일까지 ‘기묘명현의 꿈과 우정, 그리고 기억’이라는 특별전시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안 회장은 2021년 12월 카페(https://cafe.naver.com/sajedang/)를 새로 만들었다.

“어느 성씨나 문중 일이라면 모두 노인들 차지가 돼버렸지 않습니까? 젊은 분들까지 폭넓게 끌어들이려면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카페가 일단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테니까요.”

안 회장은 “훌륭하신 선조의 업적을 높이 현양하고 학덕을 잘 계승하는 것이 후손된 도리”라며 “틈틈이 공부하고 남에게 베풀려 애쓴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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