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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행주기씨 금강문중과 기탁 고문헌♠
|- 4 - 『백석헌집』으로 본 기양연의 문학 세계 : 김기림(조선대학교)
1. 들어가는말
2. 백석헌 기양연의 생애 및 생각들
3. 기양연의 작품들과 문집 양상- 백석헌집 이본들
4. 기양연의 문학 세계
5. 나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진정한 의미의 지역 문화는 그 지역 사람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면밀하게 고찰하여 그 의의를 밝히는 일이 수반될 때 형성된다. 호남의 문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과거 호남에서 삶을 영위했던 사람들의 유산을 집적하여 고찰하고 각 유산들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밝히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호남의 문화유산 가운데 과거 문인들의 문학 유산은 어느 정도 수집, 정리되어 그 존재 양상을 일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연구자들에게 자료 안내의 선두적 역할 및 연구의 초석을 놓았다고 할 수 있는 작업이 수행되었다.
1) 아울러 호남에 살던 문인들이 저술한 문학 장르, 작품, 문학과 관련한
1) 김대현·김미선, 「호남문집 정리의 현황과 과제」, 호남문화연구 54, 호남학연구원, 2013; 김대현, 「‘20세기 근대 호남 문집’의 조사와 정리에 대하여」, 대동한문학회 학술대회논문집, 대동한문학| 장성 행주기씨 금강문중과 기탁 고문헌 |- 5 -
유산 등에 대한 개별 연구, 문학 및 문화유산의 현재적 활용방안에 관한 연구 성과들이 꽤 많이 축적되어 있다.2) 문학 유산 측면에서 볼 때, 현재 개인 문집의 존재 양상을 어느 정도 한눈에 볼 수 있어 문인 개인에 관한 연구가 좀더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호남 문학의 다양한 면모를 재구축하고자 한다면 호남 문인들의 개별적 문학 양상이 많이 축적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고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본 글에서는 백석헌 기양연의 문학을 살피고자 한다. 기양연은 1827년에 장성에서 태어나 1895년에 지리산 우사(寓舍)에서 생을 마쳤다. 노사 기정진 문하에서 공부했고, 20대부터 과거 시험공부에 매진하여 41세에 문과에 합격하고, 약 7~8년 간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다. 당시 조선이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상태에 직면하자 관직을 그만두고 귀양했다가 말년에 지리산에 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글은 영성하여 문학 세계의 전반적이고 다양한 면모, 그의 인식 등을 드러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는 장성을 중심으로 영호남 지역 문인들과 활발하게 교유했고, 평소 ‘임금을 잘 보필한 인재’로 평가되었으며, 그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향당의 의표’을 잃었고 ‘스승을 잃었다.’회,
2016; 김대현·김미선, 「호남유배인의 문헌자료와 문화콘텐츠」, 한국시가문화연구
41, 한국시가문화학회,
2018.2) 김미선, 「호남문집 소재(所載) 일기류 자료의 현황과 가치」, 국학연구
31, 한국국학진흥원,
2016; 구사회, 「근대전환기 호남유학자 우고(又顧) 이태로(李泰魯)의 『우고선생문집』과 시세계」, 호남문화연구
59,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2016; 김순영, 「호남 유산기의 자료적 특징과 의의」, 국학연구논총
13, 택민국학연구원,
2014; 진유라, 「重記를 통해 본 호남지역 郡·縣의 기록물 분석」, 서지학연구
63, 한국서지학회, 2015; 권수용, 「광주·전남의 근대 누정 연구」, 민족문화논총
45,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2010; 안동교, 「문중고문서를 통해 본 호남지역의 사회와 문화: 간찰에 나타난 학술적 교유의 양상들 -홍대용과 서유구의 간찰을 중심으로-」, 고문서연구
38, 한국고문서학회, 2011; 오준호·박상명, 「해남의 유의 조택승(曺澤乘)·조병후(曺秉侯) 부자(父子) 연구」, 호남문화연구
52,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2012; 권수용, 「기우만의 수신 간찰과 교유의 성격」, 영남학
24,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2013; 양승천, 「송천 양응정의 생애와 우국충정 영사시 일고」, 동아인문학」
43, 동아인문학회, 2018; 김덕진, 「소쇄원사실발간과 그 의의」, 역사학연구
35, 호남사학회, 2009; 김덕진, 「전라도 곡성현 향안 연구」, 역사학연구
60, 호남사학회, 2015; 홍영기,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의 의병전(義兵傳) 저술과 후학 양성」, 역사학연구45, 호남사학회, 2012; 박종우, 「盤谷 丁景達의 漢詩 硏究 -주제의 특징적 국면을 중심으로-, 남도문화연구32, 순천대 남도문화연구소, 2017; 박명희, 「錦湖 林亨秀의 從事官 시절 시에 표출된 思惟 양상」, 국어국문학
177, 국어국문학회, 2016; 이연순, 「미암 유희춘의 유배기 문학 연구」, 동양고전연구
32, 동양고전학회, 2008; 김미선, 「호남기록문화유산을 활용한 문화영재 교육」, 용봉인문논총
45, 전남대 인문학연구소, 2014; 김경옥, 「조선시대 유배인의 현황과 문화자원의 활용 –전남지역을 중심으로-」, 역사학연구
40, 호남사학회, 2010. 이 외 호남의 문인, 학자들에 대한 연구 성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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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애달파하였다.
3) 그 만큼 지역에서의 그의 영향은 컸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남아 있는 작품은 많지 않으나 단편적인 면모라도 드러내어 호남 문학 유산 속에서 그가 차지하는 의미 고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기양연의 시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백석헌 기양연의 생애 및 생각들기
양연의 자는 자민(子敏), 호는 백석(柏石)이다. 1827년 4월에 태어났다. 본관은 행주이고, 아버지는 기윤진(奇允鎭), 어머니는 반남 박씨로 박종한(朴宗漢) 딸이다. 행주 기씨는 본래 행주(幸州)에 살았다. 장성으로 오게 된 것은 기원(奇遠) 때이다. 기원의 동생인 복재 기준(奇遵, 1492~1521, 성종23~중종 10)이 중종 때 기묘사화(1519년)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 그 화가 집안에까지 미치자 기원은 가족들을 데리고 장성으로 와 살았고 이후로 장성 부근은 행주 기씨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기양연의 조상을 보면, 기원의 손자 기효간(奇孝諫)은 금강 선생으로 불렸고 참의에 추증되었고, 기정익은 송암 선생으로 불렸다. 기양연의 고조는 기종상이며 증조는 기태온(奇泰溫), 조부는 기재의(奇在懿)이다. 어려서 총명함이 뛰어나 학숙의 아동들이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줄줄 외웠다고 하며 10여 세에 이르렀을 때 이미 경전과 백가들의 글을 이해했다고 한다. 문학적 재능도 뛰어나 일찍부터 과거(科擧)문장을 익혔고 명경과 공부도 동시에 했다. 당시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였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 그의 숙부였으므로 그 문하에서 배웠고, 1862년 무렵부터 문과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과 고향을 오가며 생활하면서 과거 준비를 했다4). 그 사이 아버지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았으며 기정진도 조카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기정진은 공부 방법을 일러주면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 공부하며 육경을 공부하면서 주자의 저서를 참고하여 읽을 것을 권하였다. 특히 서울의 풍속에 물들지 말고 교유에 신중하라고 부탁하였다.5) 이후 41세 되던 해(1867년, 3) “公 …(중략)…在鄕黨則爲儀表”(윤태헌, ), “夫復凶音傳到耳 仰天痛哭喪吾師”(이석구, )
4) 권수용, 「간찰을 통해 본 長城 유생 奇陽衍의 과거 합격 과정」, 남도문화연구 25, 순천대 남도문화연구소, 2013, 146쪽.
5) 노사집권16, , “最初事。宜先自立課程。課程非專讀書之謂。自寢興喫著以上。須於心裏辦得畫一規矩。期勿放過違越…(중략)…每日旅邸晨興。攝衣而坐。默念先儒千萬人中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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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4)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전적, 정언이 되었다가 지헌(持憲), 장헌(1869년, 고종 6), 사복시 정(1873년, 고종 10)에 임명되었는데 대체로 낮은 직급에만 머물러 당시 사람들 사이에 아깝다는 말도 들었다. 7여 년 동안 서울에서 관료생활을 했고, 1874년 아버지 상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3년상을 치렀다. 어머니도 일찍 돌아가셔서 봉양할 부모님이 모두 계시지 않아 굳이 벼슬길에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으나 이후 장령(1878년), 부교리(1879년), 부수찬(1880년) 등에 제수되었고 1885년 정도까지 관직 생활을 했다.6)그가 벼슬하던 전후 시기는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어수선하던 때였다. 국제적으로 유럽 및 미국이 식민지를 개척하는 데에 열을 올렸고 이에 일본도 가세했다. 조선의 외교나 교린 대상은 대개 청과 일본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그나마 국가 관리하에 놓여 있었다. 1863년 대원군이 국정을 운영하면서 대외적으로 쇄국정책을 펼치면서 조선은 국제 정세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1866년(병인년) 7월에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호가 강화도로 와 상호 통상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고, 같은 해 10월에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로 들어와 전투를 했으며, 1871년(신미년) 미국 함대가 들어와 공격하자 어재연 장군의 지휘 아래 전투를 벌였다. 1875년(고종 12)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강제적으로 인천, 부산, 원산 등을 개방했다. 기정진, 이항로, 김평묵 등 비롯한 유교 성리학자들은 ‘척사양이’를 주장하며 외국 세력의 유입, 통상을 반대했고, 조정 신료 중 김병학 같은 이도 ‘이양선이 무역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이익 추구’ 때문이라고 하면서 가세했다.7) 반면 신헌(申櫶) 같은 이는 개방에 중점을 두고 외교 정책을 펴나갔고, 김옥균 및 박영효 같은 일부 양반과 상업종사자들은 조선의 개화를 강조했다.8) 이 과정에서 병자수호조규 체결, 일본의 개화된 문물을 배우기 위해 수신사 파견 등의 일이 진행되었다. 이후 갑신정변 등이 발생하면서 외국 세력, 특히 일본에게 조선 침탈의 계기를 열어주게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1862년 진주와 단성 지역을 시작으로 농민들의 항쟁이 시작하여 삼남 지방으로 확산되었고, 최제우가 동학교를 창도하여 민중의 도덕성을 知有己之說。細心思量 …(중략)…六經以後滂沛明白。無如朱書。案上急宜置朱節要一袠…(중략)…愼勿效都下風俗。俾夜作晝也。日間接人。爲一大事。交遊不可不愼”
6) 권수용, 앞의 논문.
7) 박성순, 「丙寅洋擾와 李恒老의 斥邪上疏,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9,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2, 8쪽.
8) 박은숙, 「갑신정변 참여층의 신분과 정변 참여동기」,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1,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2000.| 장성 행주기씨 금강문중과 기탁 고문헌 |- 8 -
내세우며 신분질서를 정당하게 여겼던 당시 인식에 틈을 만들었고
9) 그 아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은 소요하고, 민정(民情)은 어수선하고 불안했고, 대외 정책에 대해 쇄국과 개국 논의가 맞서 정국이 불안했다. 이 때 기양연은 나라 안팎의 불안한 정세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제안하고자 하였으나 체직되는 바람에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귀향했다. 황룡면 아곡리에 농소를 짓고 농사를 지어 직접 생계를 해결하고자 했다. 수찬에 제수되기는 했으나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고향에 계속 머물면서 독서와 농사를 겸행하였다. 1894년 동학 농민 항쟁이 일어나자 ‘윗사람을 잘 섬겼던 백성들이 이처럼 극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이는 모두 위에 있는 사람이 도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한탄했다. 그런데 조정에서 일본 군대의 힘을 빌어 동학 농민들을 진압하려고 하자 ‘그들도 모두 임금의 백성인데 왜구들로 하여금 토벌하게 한다,’고 분노했고, ‘장차 조선은 이것이 단초가 되어 국가의 괴변이 생길 것이며 그렇다면 산속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탄식하였다. 결국 1895년 조정에서 일본 군대로 동학 농민을 진압하자 가족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기양연은 과거 급제를 위한 공부 기간보다 실제 관직에 있었던 기간이 훨씬 짧았다. 관직도 주로 하급에 머물러서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도 거의 없었고, 시세(時勢)에 대해 상소하고자 할 때 체직되어 자신의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 , 등을 통해 그의 경세 사상의 일면을 가늠할 수 있다. 은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에 관한 논의이다. 1862년(철종 13) 진주와 단성에서 백성들이 과중한 세금과 관리의 착취에 저항하여 민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박규수를 내려보내 사정을 살피라고 했고, 현지 사정을 살펴 본 박규수는 삼정의 문란함이 그 요인이었음을 간파했다. 이에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을 설치하여 공식적으로 논의하자고 건의했다. 철종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삼정에 대한 의견 및 해결책을 묻는 책문(策問)을 내려 전국의 진신(搢紳), 유생(儒生)들에게 글을 올리라고 했다.
10) 조정에 있는 관료부터 재
9) 최천식, 「최제우가 제시하는 유학 극복의 논리-同歸一體와 不然其然을 중심으로-」, 태동고전연구
38, 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 2017.10) 구언과 試策으로서 전국적으로 삼정구폐안을 수합하기로 하고, 2품 이상은 獻議를, 3품 이하와 재야의 유생에게는 시책에 응시하도록 한다. 6월 10일 철종은 구언교로 殿試을 통해 삼정책을 제출하도록 하고, 이틀 후인 6월 12일 殿試의 형식으로 策問을 내리고 직접 참여하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책제를 등서하여 八道四都에 내려 보내 모두 모아 제출하게 조치하였으며, 거리가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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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지식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제출되었다.
11) 당시 명망 있던 기정진, 유중교, 김윤식 등도 이에 부응하여 삼정에 대한 의견을 제출했다. 이 때 기양연은 과거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유생의 신분으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12) 기양연은 삼정(三政)에 대해 원래 전·군·곡(田軍穀)이 하나였는데 후대에 셋으로 갈라지고 그 이름도 각각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전(田)은 왕정의 시작이며 백성과 나라가 의지하는 것이므로 천하의 근본이라고 했다. 군(軍)은 성인이 부득이하게 만든 것이고 糴은 후대에 임시방편으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성왕(聖王)의 제도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삼정의 폐단이 생긴 원인은 ‘호리지습(好利之習)’이라고 했다. 사대부들이 염치가 없어져 호리지습이 들불처럼 번지고 이로 인해 백성의 고통은 끝이 없다고 하였다. 아전과 수령들이 서로 용인하면서 자기들 재산 불리는 연수(淵藪)로 삼고 있다고 하였다. 반면 백성들의 고통은 늘어간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삼정 폐단은 ‘이두개(利竇開)-이익의 구멍이 열림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이익의 구멍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삼정의 제도적 개선보다는 탐풍(貪風-탐욕스런 풍조), 호리지습부터 개혁하기를 강조하면서 특히 사대부, 수령, 아전들의 탐욕에 대해 통렬하게 질타했다. 그러면서 백성의 고통을 살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위에 있는 이들-사대부, 수령, 아전-의 청렴과 정직이 우선되어야 제도도 잘 운용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동학 민중 항쟁이 일어났을 당시 ‘위에 있는 이들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즉 그는 젊은 시절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목민관으로서의 사대부, 수령들이 백성의 삶을 우선시하고 백성들의 고통 관점에서 정사를 펼쳐야한다는 경세 사상을 일관되게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은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난 직후에 쓴 글이다. 당시 성균관에먼 곳은 이정청의 공문을 받은 후 70일의 제출 기한을 주었다. 그 결과 수백 명이 제출한 시권이 만여 장이나 되었다(강혜종, 『임술(1862)년 조선 삼정구폐론의 형상 양상과 성격 고찰』, 연세대 박사논문, 2017, 18쪽).
11) 삼정책1, 2에 당시 제출된 36명의 글이 실려 있다. 당시 관료나 학자로서 명망이 있었던 이들의 글이 실려 있다(송양섭, 「임술민란기 부세문제 인식과 삼정개혁의 방향」,
한국사학보 49, 고려사학회, 2012, 9쪽).
12) 백석헌유집에는 이라고 되어 있으나 초고본에는 이라고 쓰여 있다. 이것이 기양연 본인이 직접 쓴 제목인지 초고 쓸 때 쓴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다만 당시 기정진은 시권의 형식을 갖추기를 원하지 않아 이름을 쓰지 않고 불에 태워버리려고 했다. 대체로 기정진 문하 및 그의 학파와 관련 있는 사람이거나 전라도 지역에 연고가 있는 인물들이 ‘의작(擬作)’이라고 쓴 경향이 강하다(강혜종, 앞의 논문, 3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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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외세에 대한 생각을 묻는 글로 시험을 치렀을 때 썼다. 그는 사설(邪說)의 폐해가 얼마나 심한 것인지, 현재 외세에 대한 정책이 엄준한지 관용적인지와 같은 문제에 너무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우선 정학을 잘 닦아 밝혀 사악한 것을 배척하는 근본을 세워야 하는 문제에 관해 더 신경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현실적인 타개책으로 금단양물(禁斷洋物)과 군대가 더 강하게 대응해야한다는 방안을 제안했다. 조선에 왔던 서양 열강국들은 식민지 개척이 목적이었고 상품 판매 및 생산 원료 확보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13) 기정진, 유인석, 최익현 등은 서양 외세를 사(邪)로 규정했고, 그들의 통상 요구의 의도 또한 바르지 않다고 보았다. 또 외국과의 교역으로 조선의 경제가 폐해를 입을 것이라고 하면서 한결같이 반대했다. 기양연의 척사 논의 또한 노사 및 화서학파가 견지했던 화이구분, 척사위정의 맥락에 있었던 것이다. 은 효행 풍조를 이루려고 한 데에 대한 대책이다. 기양연은 효는 백행(百行)의 근원이며 인(仁)도 여기서 나온다고 하였다. 효의 방법은 혼정신성부터 입신양명하여 부모님 이름을 후세까지 전하는 일 등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람이라면 효를 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실천에 있어서 무엇이 효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효행인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효행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효를 하나의 좋은 풍조로 만들고자 한다면 ‘효에 대해 배우게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즉, 효가 무엇이며 효행이 무엇인지 배워야 잘 알 수 있고 ‘자식으로서의 도리(子職)’을 제대로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양연은 책문(策文)을 통해 자신의 경세 포부를 드러냈다. 그러나 관료 생활 기간도 짧았고 그나마 한직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포부를 펼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에 대해 기우만도 ‘삼정에 관한 책략이 있었고 집안에서는 효우(孝友)가 순수하게 갖춰져 있었으므로 나라에 대해서는 그렇게 했을 것’14)이라고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3. 기양연의 작품들과 문집 양상- 백석헌집 이본들
현재 기양연의 문집인 백석헌집은 석판본과 필사한 것, 두 가지가 전한다. 석판본 서명은 백석헌유집이며 2권 1책이다. 책 앞쪽에 권용현(權龍鉉)이
13) 유성선, 「華西學派衛正斥邪論의 義理精神一考察」, 화서학회논총 7, 화서학회, 2015, 194쪽.
14) 기우만, 송사집 권47, , “雖若爲公致慨。而施措方略。三政有策。惟孝友于。家政純備。自家而國。亦不過若是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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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 쓴 서문, 뒤쪽에 1975년 안종선(安鍾善)이 쓴 발문이 있다.
15) 제1권에는 시14제 19수, 서(書) 55편, 잡저 6편, 제2권에는 서(序) 5편, 기(記)3편, 발(跋) 1편, 제문 5편, 묘갈명 1편, 행장 4편이 있으며 부록이 있다. 필사한 이본은 여러 개가 전한다. 에는 시 13제 18수, 책 1편(壬戌擬策), 논 1편 (斥洋邪論), 서 4편, 기 3편, 제문 4편이 있다. 는 편지만 들어 있는데 사위 허극에게 보낸 편지 38통, 사돈(許璿)에게 보낸 편지 11통이 있다. 또 다른 책에는 표지에 서명이 없다. 백석헌기와 백석헌 시, 백석헌 시에 대해 26명이 차운한 시. 기우만이 쓴 기양연 행장, 농소기(奇宰가 썼다.) 농소시 3편과 이 시에 대해 14명의 차운시, 농소가 완성된 후 기홍연이 써 준 시에 화답한 것과 24명의 차운시 등이 있다. 또 다른 하나에도 역시 표지에 서명이 없다. 7명이 쓴 만장, 7명의 제문, 행록 1편, 서 1편, 기 1편, 묘갈 1편이 있다. 1975년에 인쇄된 백석헌유집은 기존의 필사본 작품 가운데 선별하여 출판한 것으로 보인다. 석판본 백석헌유집에는 사위 허극에게 보내는 편지 5통, 사돈인 허선에게 보내는 편지 3통이 있는데 비해 필사본에는 각각 38통, 11통이 있다. 백석헌 시와 농소 시의 경우 백석헌유집에는 기양연의 시만 실려 있을 뿐 차운한 사람들의 시는 싣지 않았다. 한편 백석헌유집에는 이 실린 반면 필사본에는 없으며, 시 의 경우 백석헌유집에는 부가된 시가 없는데 필사본에는 하석15) 이 책의 출판 사항을 보면 1978년에 대동인쇄소에서 인쇄, 발행했으며 발행인은 변시연(邊時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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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石)이란 사람의 시가 부가되어 있다. 석판본과 필사본에 실린 시들은 다음과 같다. 『백석헌유집』(석판본) 『백석헌집』
(필사)謹次蘆沙先生六十除夕韻 3수 謹次蘆沙先生六十除夕韻 3수次梅塢壁上韻 次梅塢壁上韻洛館會話 洛館會話 (*付河石韻)輓安進士 重燮 輓安進士 重燮洛舍偶吟 洛舍偶吟次閔都事 致元 大人回甲韻 次閔都事 致元 大人回甲韻洛社會吟 洛社會吟贈人 贈人京友晬宴 京友晬宴柏石軒 柏石軒農巢 農巢農巢旣成 四從弟弘衍 遂以四律賦事 相贈仍以其詩爲原韻從以和之農巢旣成 四從弟弘衍 遂以四律賦事 相贈仍以其詩爲原韻從以和之次東塢亭韻 次東塢亭韻別趙月皐 性家
4. 기양연의 문학 세계
한 문인의 작품이 풍부할수록 그 문인이 가지고 있던 문학에 대한 인식, 문학 작품의 특성을 드러내기가 용이하다. 하지만 기양연의 경우 현재 남아 있는 문학 자료는 영성한 편이다. 문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한 글도 없고, 시도 겨우 14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에 기양연의 문학 인식 양상이나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논의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본 글에서는 단편적으로나마 고찰하고자하며 특히 그의 시에 주목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한 문인의 문학에 관한 생각은 대체로 다른 사람의 문집에 부치는 서(序), 발(拔)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양연은 단 한편의 문집 서문만 남아 있어 극히 단편적인 면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기양은 문학(문장)을 덕과 함께 논하면서 문학은 그 사람의 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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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남긴 시와 문이 겨우 약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격률이 간이하고 밝으며 체제는 부섬하고 통창하다. 전중하고 온화한 맛이 있고 뜬 이슬이나 속된 모습들이 전혀 없으니 한번 보면 그 덕이 있는 사람의 말임을 알 수 있다. 스승으로부터 얻은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와 같겠는가? 후에 공의 덕을 알고자 한다면 이것만 보아도 족하다. 이 글은 춘파 강인회(姜寅會, 1807~1880)의 유집(遺集)에 쓴 서문이다. 강인회는 노사 기정진의 문하생이었다. 기정진은 강인회의 문장에 대해 칭찬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런데 기양연은 강인회의 문장 자체에 주목하기보다 먼저 강인회가 덕이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강인회의 작품에 대해 ‘격률이 간이하고 밝다.’ ‘체제는 부섬하고 통창하다.’ ‘전중하고 온화한 맛이 있어 속된 모습이 없다.’ 등의 말로 평가했다. 그리고 강인회 작품들이 이러한 특성을 지니게 된 근본으로 ‘덕(德)’이 있음을 말했다. 즉, 안에 덕(德)이 있어야 훌륭한 문장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한편 내면의 덕은 배움과도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기양연은 강인회에 대해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며 문예를 일찍부터 성취했다.’라고 하면서 강인회가 뛰어난 자질을 갖추었고 특히 문예적 재능이 있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의 문학 작품이 속된 기미가 없이 ‘덕 있는 사람의 말’과 같은 수준에 이를 수 있었던 데에는 스승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런 생각은 서문 첫머리에서도 나타난다. ‘노사 선생은 도학과 문장이 으뜸이었고 그 문하의 선비들이 많았는데 그 덕의 향기를 가장 오래 입은 사람은 춘파 강공이었다’라고 하였다. 강인회 문학에 대해 쓰면서 노사 기정진의 도학과 문장을 첫 머리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기정진의 도학과 문장이 강인회 내면의 덕 형성에 기여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강인회 작품이 이른바 ‘덕 있는 사람의 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기양연의 시는 14제 19수이다. 서울에서 지낼 때 쓴 시, 귀향하여 농사지으면서 쓴 시, 스승인 기정진 및 친구에게 준 시들이다. 본 글에서는 내용에 따라 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고향-일상 속 수양기양연은 1880년 이후 서울에서의 관료 생활을 접고 귀향하여 살았다. 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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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곡리에 농소를 짓고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농소를 지은 이유를 밝히면서 ‘원래 가난했는데 흉년까지 만나니 생활하기가 어려워 농사를 짓고자’ 했다고16) 하였다. 그리하여 살던 곳-산 중턱에 있던 집-에서 들판으로 내려와 조그만 농소를 짓고 농사짓는 생활을 하였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가난해지기는 쉽고 가난 벗어나기는 어려운데 得貧容易脫貧難
계책 세우느라 온갖 수고 할 것은 없으니 計策不須費百般
도롱이 비옷 술 마신 후 입은 들 어떠리 襏襫何妨酒後着
벼, 마 등 빗속에서 보기도 좋구나 禾麻正好雨中看
척박한 밭이어도 힘껏 하면 가을에 응당 잘 여물 테고 薄田竭力秋應熟
누추한 집이어도 몸 들이니 분수에 맞게 편안하네 陋屋棲身分可安
아침 저녁 농사 이야기에 세상일 잊으니 日夕農談渾忘世
눈 앞 띠끌 속 옥당관이 꿈 속과 같네17) 前塵如夢玉堂官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한 후 마주친 현실 속에서 깨달은 건 ‘가난해지긴 쉽고 거기서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택한 방법은 농사짓는 일이었다. 땅은 척박하고 힘들지만 있는 힘을 다하여 열심히 하면 가을에 수확할 것이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또한, 누추한 집이어도 자신의 분수에 맞아 마음이 편안하다고 하였다. 그는 시에서 농소와 옥당관 두 곳을 동시에 떠올린다. 옥당관은 서울에서 근무하면서 임금과 가까이 있고, 관료들과 함께 일을 하던 곳이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과거 20여 년을 공부에 매진하였다. 옥당관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옥당관의 일은 ‘열심히 힘껏 한 만큼 수확’하기에는 어려운 공간이며 그래서 마음이 편치 않은 공간이다. 반면 농소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하찮은 곳이지만 노력한 만큼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다. 세속의 선망이 되는 옥당관을 뒤로하고 누추한 농소에 기거하지만 그 편안함의 가치를 깨달았음을 보여준다더 나아가 농사짓는 일은 일상 삶 속에서 수양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16) 백석헌유집 권1. “余素貧 歉荒後尤索然 欲爲廣農計 而所居腰於山遠於野 耕種耘穫擧多妨礙 乃於洞口外 數帿地 借得一小屋 挈老妻來寓”
17) 백석헌유집 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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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때 농사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人言暮境不堪農
가난한 집은 농사에 힘써야 한다고 나는 말하지 我謂寒家所務農
밭가는 이여 내가 세상 잊었다고 괴이히 생각지 마시오 耕夫休怪吾忘世
다만 가난을 구하려고 이 농소 지었으니 只爲救貧設此農
남은 생애 농사에 취미 부치니 殘年趣味付之農
스무 개 입 생애가 다만 농사에 달렸구나 廿口生涯只在農
밭 갈고 꼴 베는 늙은이 모두 좋은 친구들이어서 耕翁樵叟皆良友
밭 가운에 늙은 농부 되는 것도 아주 좋다네 好是田間作老農
마음 밭 다스리는 일 또한 농사이니 經理心田亦一農
이 농사 야인 농사보다 나은 듯하구나 玆農勝似野人農
인으로 밭 갈고 의로 김 매기를 열심히 하는 것 仁耕義耨孜孜地
가히 인간의 최상 농사라고 할 수 있다네18) 可做人間最上農
농사짓는 일은 젊은 사람들도 견뎌내기 쉽지 않은 노동이다. 나이 들어 농사를 짓고자 하는 기양연에게 사람들은 감당하기 힘들 거라고 말한다. 그도 잘 알고 있지만 농사를 그만 둘 수 없다. 왜냐하면 가난하기 때문이다. 그가 농소를 짓고 농사일에 직접 뛰어든 것은 생계를 위해서이다. 양반 사대부이며 서울에서 중앙 관료로서 지냈다가 농부가 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터이지만 그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생계임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자신이 살 작은 집에도 ‘農巢’라는 이름을 붙인다. 관료 생활을 접고 귀향하여 온 사대부들은 세속에 대한 미련을 버렸음을 드러내고자 하며 ‘은일’의 의미를 부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기양연은 자신의 귀향을 ‘은일’과 연계하지 않는다. 자신의 경세 포부를 펼칠 수 없는 정치 현실에 좌절하고 귀향하였는데 그의 앞에 닥친 현실은 가난, 생계 챙기기였고, 그는 그것을 부정하는 않는 솔직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모습에 대해 김녹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옛 사람들은 노년을 위해 계획하면서 등과 같은 글자로 호를 짓고 시도 지어서 그 풍격이 저절로 별다르도록 하였다. 지금 친구 자민은 녹봉을 사양하고 물러나와 농사지었다. …(중략)… 폐려를 떠나서 가까운 밭으로 가니 머무를 데가 없을 수 없고 18) 백석헌유집 권1, | 장성 행주기씨 금강문중과 기탁 고문헌 |- 16 -머무를 데를 마련하니 이름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실심으로써 실사를 행하니 부끄러울 것이 없을 뿐이다. 평소 행동과 평소 말이 또한 실질에 힘을 썼다.19)많은 이들이 은일을 표방하면서 당호에 어(漁) 초(樵) 등의 글자를 넣고 시도 지으면서 남다르게 보이려고 하는데 기양연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솔직하게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것을 ‘실심, 실사’라고 하였다. 이는 기양연이 일상 속에서도 말과 행실을 일치하고자 하는 수양의 한 면모, 그 실천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농사짓는 일이 생계로서 당연한 일인 만큼 현실 속에서 생계를 위해 몸소 일하는 이들 곧 경옹(耕翁), 초수(樵叟)들은 그의 동료가 된다. 함께 농사지으며 농사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은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들을 ‘좋은 친구’ 라고 함으로써 들판의 농부로 함께 하는 즐거움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기양연은 단순히 농사짓는 일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시상은 야전(野田)에서 심전(心田)으로 확장된다. 실제 땅을 경작하여 수확물을 거두어들이는 일과 마음을 잘 다스려 진리를 얻는 일이 동일함을 깨닫는다. 땅을 일구는 데에는 쟁기나 호미 등의 도구를 쓰는 반면 마음의 밭을 일구는 데에는 인의(仁義)라는 도구를 쓴다고 하였다. 실제 농사나 마음의 농사는 꾸준함과 열심히 노력한 만큼 많이 얻을 수 있다. 기양연은 인의로 밭 갈기와 김매기를 성실히 하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농사라고 단언한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생계를 꾸리기 위한 농사였지만 그것을 수양의 자료로 전환하여 사유하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늙은 잣나무 정연하고 오래된 바위 푸르러 老柏挺然老石蒼
뜰을 지탱하고 집에 그늘 드리우네 撑吾庭砌陰吾堂
올곧은 자태 어찌 닳고 갈라지랴 貞姿豈肯受磨泐
굳센 가지 눈 서리도 능히 업신여길 수 있네 勁榦偏能傲雪霜
바르고 곧음은 두보가 읊은 데서 연유했고 正直由來吟杜老
오래고 기이함은 가히 미원장이 절하게 하네 古奇可使拜元章
누헌 지음에 물을 취함은 우연이 아니니 楣軒取物諒非偶
19) 김녹휴, “古人語晩計 每稱漁樵以號以詩 風格自別 今吾友子敏 辭祿退耕 田是靑氊 業是箕裘 何稱說之有卽其詩離弊廬 就近田不可無巢 有巢不可無戱題 噫 以實心行實事 無愧怍而已 庸行庸言 亦其務實歟 謹次其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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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애의 좋은 두 벗일세 棲息殘年二友良이 시는 자신의 호인 ‘백석’에 대한 해명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집 뜰에 오래된 잣나무가 올곧은 모습으로 있고, 나무 아래 오래된 바위가 있었다. 잣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항상 푸르고 바위는 풍설우(風雪雨)에도 전혀 변함도 없고 갈라짐도 없다. 이 둘은 시절 변화, 환경 변화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잣나무의 바르고 곧은 덕에 대해 두보는 그것이 ‘조물주의 공덕이며 잣나무의 재목이 너무 커서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쓰지 못할 것’20)이라고 하였다. 미불은 세속의 평판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큰 바위를 보고 기뻐하며 절을 하고 형이라고 불렀다.21) 그들은 잣나무와 바위가 변함없음을 칭송한 것이다. 기양연 또한 두 가지가 지닌 덕을 수양의 자료로 삼고 있다. 가까이 있는 자연물을 마음을 닦는 조력자로 상정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수양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2) 서울-활기찬 생활과 세상에 대한 포부백석헌유집에는 기양연이 서울에서 생활하던 때의 시가 실려 있다. 그의 서울 생활 모습은 아버지와 주고받았던 편지에서 그 일면을 볼 수 있다. 주로 과거 공부를 위해 서울 생활을 하던 때의 모습으로서 서울 소식, 서울에서 맺은 인맥 관리를 위한 비용 마련에 대한 고민, 각종 시험에 대한 정보 등이 들어 있다.22) 시로는 , , 등의 작품이 있다. ‘洛社’라는 표현을 보면 당시 서울 사람들과 모임을 하면서 창작활동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시들이 과거 시험공부 시기에 쓴 것인지, 관직 생활 때 쓴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장부 또는 사대부로서 세상에 대한 포부를 드러내고 있다. 무슨 일로 고향 멀리 떠났냐고 내게 물으며 問余何事遠離鄕뜬 세상 꽃다운 이름 한바탕 꿈과 같다고 하네 浮世榮名似夢場20) 두보, , “扶持自是神明力 正直元因造化功 大廈如傾要梁棟 萬牛回首丘山重 …(중략)…志士幽人莫怨嗟 古來材大難爲用” 21) 송사 권444, 203, 6-미불. “州治有巨惜狀奇醜 芾見大喜曰 此足以當吾拜 具衣冠拜之 呼兄 又不能與世俯仰 故從士數困” 22) 권수용은 기윤진과 기양연이 1862년부터 1874년까지 주고받았던 편지를 살폈다. 편지 내용은 부자의 일상 내용, 과거시험 공부 과정, 관직 생활 모습, 국내의 여러 상황, 향촌의 상황 등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권수용, 앞의 논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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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있어 전날 밤 시를 잠시 그만 두었는데 有病前宵詩暫廢
구름 없는 오늘 밤 달빛 더욱 휘황하구나 無雲今夜月尤光
여러 달 동안 친구 이야기 보고 듣고 數朔耳擩良友話
십 년의 몸은 주인 집에 익숙하네 十年身慣主人堂
나그네 근심으로 내 마음 흔들이 마소 莫把羈愁擾我意
장부의 바다 같은 마음 먼 데까지 포용하는 게 귀하다네23) 丈夫胸海貴包荒
초고본 백석헌집을 보면 이 시 아래 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그 시의 시인은 ‘성 안에서 살지만 한적하여 마치 궁벽한 시골 같으며 청운의 뜻도 다 이루지 못했고, 시 짓는 솜씨도 졸렬하여 태반이 볼 것이 없다.’고 하였다.24) 기양연의 시는 이에 대한 응답이었던 듯하다. 서울에 와 있는 기양연에게 누군가 ‘왜 고향을 떠나왔느냐?’고 물었다고 했다. 기양연은 이 질문에 그동안 서울 생활을 이야기 한다. 여러 달 동안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하여 익숙해졌고 무엇보다 자기가 살고있는 집 주인과는 이미 10여 년이 되어서 친숙하다고 하였다. 묻는 이는 ‘타향인 서울’이라고 여기는 반면 기양연은 서울이 이미 ‘익숙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그네 근심’으로 자기의 마음을 흔들지 말라고 요청한다. 기양연 입장에서 볼 때 진정한 장부라면 나라의 궁벽진 곳까지 다 포용해야하므로 서울과 고향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포황(包荒)’은 대개 왕이나 관료가 먼 곳 백성까지 모두 보살펴야하는 마음과 관계가 있다. 사대부로서 백성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잘 챙기고자 하는 경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당시 기양연의 포부였다. 그의 이러한 포부는 이라는 시에서 ‘지조와 절의는 험함과 평이함을 하나로 여기면서 장부라면 공업을 쌓아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 전해져야 한다.’는25) 말에서도 나타난다. 변하지 않는 절의를 바탕으로 삼아 힘든 때나 태평한 때나 한결같이 세상을 위해 자신의 경륜을 펼쳐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공업을 이루어 훗날 영원히 이름을 드날릴 것이라는 큰 포부를 보여준다. 세상에 나아가 경세의 뜻을 펼치려는 희망을 품고 있어 기운찬 모습은 다른 시에서도 드러난다.
23) 백석헌유집 권1, 24) . “城市閑居似僻鄕 琴書看作利名場 平生未了靑雲志 今夕何遲皓月光 當世炎涼都屑屑 丈夫意氣自堂堂 病餘强欲成詩話 鈍拙還兼太半荒” 25) 백석헌유집 권1, .“志節無如一險夷仁時麟鳳勇時熊 …(중략)… 丈夫做得甚功業 百載流傳萬口碑” | 장성 행주기씨 금강문중과 기탁 고문헌 |- 19 -
더운 때 성 안에 들었다 차가운 바람 부는 때 되니 署令入闉到冷飆
정처없이 분주히 사는 심사 어수선하기만 하네 捿遑心事正搖搖
산 언덕 단풍으로 치장하여 이슬 머금은 꽃같이 빛나고 岸粧楓葉霜華映
술잔에 든 국화 향기 술맛을 조절하네 樽泛菊香酒味調
가을날 가장 좋은 건 이런 날 많은 것 秋景最欣多此日
밤 이야기하며 날 새는 걸 꺼리지 않는데 夜談莫憚達明朝
좋은 날 적적하게 보낼까 저어되니 更怕良辰寂寞過
호탕하게 노래하고 퉁소도 불어보네26) 爲放浩歌且弄簫
이 시는 서울에서 사람들과 가을 단풍 경치를 즐기면서 쓴 시이다. 더운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기운이 도는 가을에 접어들자 온 산에 단풍이 들고 이슬까지 내려 햇살에 반짝인다. 그 아래에서 국화 향기 가득한 술잔으로 흥을 돋우며 밤새 이야기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가을 좋은 날을 맞아 경치에 젖어 맘껏 즐기는 호탕함을 보여준다. 이 시에서는 세상일에 대한 근심이나 가을을 맞이하는 쓸쓸한 정서는 전혀 없다. 이처럼 서울 생활 중에 쓴 시는 타향에 온 나그네로서의 향수, 근심보다는 임금 곁에서 세상을 다스려 공업을 쌓으려는 희망을 보여주며 서울을 이미 익숙한 공간, 친구들과 가을날의 아름다운 경치를 맘껏 즐기면서 호탕한 정회를 보여주고 있다. 3) 스승에 대한 존경, 벗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백석헌유집 속에 있는 시들은 그의 스승과 친우에 대한 존경과 친밀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늙은 나이에도 부모 그리니 고인의 풍도라 衰齡孺慕古人風
선생의 덕 무궁함을 더욱 믿게 되네 益信先生德不窮
이날 슬픔 더하니 정씨의 마음 此日倍悲鄭氏志
금년에 능히 거원의 공을 이루었네 今年能化蘧瑗功
한 표주박 누항에 가난해도 즐기니 一瓢巷陋貧而樂
아홉 길 높은 산과 긴 연세 또한 같구나 九刃山高壽亦同26)
백석헌유집 권1, 2수 중 제2수.| 장성 행주기씨 금강문중과 기탁 고문헌 |- 20 -
내가 다행히 친히 가르침 받는 자리를 더럽히며 小子幸忝親炙地 옷자락 걷고 몇 달 동안 그 자리에 앉았었네27) 摳衣幾月坐春中 이 시는 노사 기정진이 60세 되는 해 제야(除夜)에 쓴 시에 대한 차운이다. 기정진은 세월 흐름 속에서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살피며, 부모님 은혜를 조금도 갚지 못하는 부끄러운 마음을 토로했다.28) 기양연은 기정진이 정자와 거백옥의 마음과 같음을 칭송했다. 정자는 ‘부모가 없는 사람은 자기 생일날이면 갑절이나 더 슬프다.’고 했다. 자기를 낳고 길러 준 부모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몸’이 존재하는데, 생일날 부모님이 안 계시므로 그 공을 보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백옥은 50이 되어서야 그동안 살아온 행적이 그릇되었음 알았다. 제자였던 기양연의 입장에서 볼 때 스승이 60세에도 여전히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모습은 효의 실천이며 고인의 풍모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덕이 무궁함’이라고 칭송했다. 또한, 누추한 곳에서 가난함을 즐겁게 여기며 사는 모습도 덕의 한 모양이다. 기정진의 효심, 안빈낙도하는 덕 등은 장수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에게 기정진은 ‘효행으로 시작하여 그 안에 문장과 덕업이 함께 있는’ 큰 스승이다. 기양연은 그러한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드러내며 스승의 덕과 행실에 대해 무한한 존경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은거지 한 조각 동쪽 언덕에 마련하고 菟裘一片卜東岡
한가히 지내니 말년의 취미 좋구려 薖軸殘年趣味長50
여 년 동안 황권을 어루만지더니 半世摩挲黃卷裏
백운 근처에 정자 지어놓고 數椽結搆白雲傍
벗 불러 아욱 고사리 삶아 먹이며 爲延朋友烹葵蕨
아이와 손자 함께 뽕나무 가래나무도 심는구나 留與兒孫植梓桑
한 번 신선 집 문 두드리려하나 오랫동안 하지 못하고 一叩仙扉久未遂
산 사이에 십 리 떨어져 다만 향기로운 소문만 듣고 있다네29) 隔山十里但聞香
이 시는 조의곤(曺毅坤, 1832~1893)의 동오정을 대상으로 하였다. 조의곤은 27) 謹次蘆沙先生六十除夕韻28) 노사집 권2, , “光陰六十去如風。此歲將除感不竆。百事長遊悔吝地。一毫無報劬勞功。面皮體髮都來變。日月天星胡乃同。咫尺應通歸侍路。餘生且付淵冰中” 29) 백석헌유집 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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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출신으로 노사 기정진 문하에서 공부했고 평생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조의곤은 기정진의 상을 다 치른 후 고창으로 돌아가 월산리에 있는 반등산에 정자를 짓고 학문에 몰두했다.30) 정자를 완성하고 나서 시를 짓자 최익현, 조성가, 정재규, 오준선 등 기정진 문하 동문들이 차운했다. 기양연은 동오정의 위치, 경치, 동오정에서의 독서 등과 관련한 내용을 시에 담지 않았다. 대신 조의곤이 황권을 만지작거리더니 결국 신선이 살 만할 듯한 좋은 공간에 생활 장소를 만들어낸 것을 부러워한다. 그곳에서는 벗에게 아욱, 고사리나물 대접하기, 손자들과 뽕나무 가래나무 등을 심어 후손을 위해 준비하는 조의곤의 모습 등을 담아냈다. 이러한 일들은 일상적인 삶의 연장이다. 직접 농사를 지어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기양연의 입장에서는 동오정에서 행하는 일들이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그 곳을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배어난다. 그리하여 동오정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통해 동오정에서 여유있는 만년 생활을 보내는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큼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5. 나가는 말
이상과 같이 백석헌 기양연의 생애, 경세에 관한 생각, 시세계를 살펴보았다. 그는 당시 신분상 위에 있는 사대부들의 잘못을 통렬하게 질책하며, 백성의 처지를 우선시하는 경세 인식을 갖고있었다. 시에서는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농부로서의 생활을 그려내는 진솔성을 보였다. 또한, 서울에서의 시는 대체로 사람들과 교유하는 즐거움과 경세에 대한 포부를 그려내고 있으며, 아울러 스승에 대한 존경, 친구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본 글은 기양연 문학 세계 중 지극히 미미한 면모만을 서술했을 뿐이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글들은 기양연 문학 및 사상을 상세하게 드러내기에30)는 충분하지 않다. 그와 관련한 자료 즉 가족 및 친지들과 주고받은 편지나 글들-시, 산문-, 그에 관한 주변 사람들이 기록한 자료들이 더 수집, 축적되고 그에 대한 면밀한 고찰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야 그에 대한 전반적이고 다양한 면모들을 드러내 그 의의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며,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할 뿐이다.
□ 참고문헌백석헌유집, 대동인쇄소, 1978.권수용,
「간찰을 통해 본 長城 유생 奇陽衍의 과거 합격 과정」, 남도문화연구 25, 순천대 남도문화연구소, 2013박성순,
「丙寅洋擾와 李恒老의 斥邪上疏,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9,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2유성선,
「華西學派衛正斥邪論의 義理精神一考察」, 화서학회논총 7, 화서학회, 2015최천식,
「최제우가 제시하는 유학 극복의 논리-同歸一體와 不然其然을 중심으로-」, 태동고전연구 38, 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 2017
기우만, 송사집 권47, . “己卯冬。先生疾革。…(중략)… 公若喪父。殯殮葬祭。誠信兩摯。心喪三年。治任而歸。卜築東岡。不求聞達。簞瓢自樂。同門推先進。後生學者欲聞先生之道者。求之於公。庠舍不能容。而公推明先生之道” 조의곤은 동오에 정자를 짓기 시작할 때 기정진의 기문을 받아 두었다. 기정진 사후에 동오정을 완성했다(조의곤, 東塢集 권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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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매(金强梅) (장성군 진원면 산정리 매화마을 행주기씨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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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구원투수에서 새로운 왕조의 주인공이 된 ‘이 사람 이성계!’ (1) | 2024.07.25 |
◐황산대첩비문(荒山大捷碑文)◑ (43) | 2024.07.22 |
<데스크 칼럼> 강감찬·이순신·장태완 장군의 충심 (32) | 2024.07.22 |
1959년(己亥年)에 영흥조씨(永興趙氏)들과 제주조씨(濟州趙氏)들간에 모종의 완의문(完議文) (42) | 2024.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