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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황산대첩비문(荒山大捷碑文)◑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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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비 [荒山大捷碑]

황산대첩비 [荒山大捷碑] 1963年 1月 21日 史蹟 第104號로 指定된 南原 荒山大捷碑址는 全羅北道 南原市 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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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비문(荒山大捷碑文)◑

황산대첩(荒山大捷)은 이성계(李成桂)ㆍ이두란(李豆蘭) 장군이 고려 우왕 6년(1380)에 지리산 근방 황산(荒山)에서 왜적 아기발도(阿只拔都)군을 물리친 사실을 말한다.

황산대첩비는 승전비(勝戰碑)인데 그 비문(碑文)은 김귀영(金貴榮)이 56살 때인 선조 8년(1575 을해) 8월에 지어 올린[제진(製進)] 것이고, 선조 10년(1577)에 송인(宋寅)이 글씨를 쓰고, 남응운(南應雲)이 각자(刻字)하여 세운 것이다.

비문을 지은 김귀영은 당시,

資憲大夫(자헌대부) 戶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호조판서겸홍문관대제학), 藝文館大提學(예문관대제학). 知成均館(지성균관), 同知經筵(동지경연), 春秋館事(춘추관사). 五衛都摠府都摠管(오위도총부도총관)이었다.

그런데 그 후 선조 25년(1592 임진)에 난리가 나서 73살의 나이에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을 쫓아 함경도(咸鏡道)에 갔다가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으로 임해군(臨海君), 화순군(和順君) 두 왕자와 함께 왜장(倭將) 加藤淸正(카토오 키요마사)의 포로가 되었다. 그 해  7월 23일, 함께 인질(人質)로 잡혀 있던 부인(夫人) 함안이씨((咸安李氏)가 자액(自縊)하여 죽었다.

선조 26년(1593 계사) 봄에, 강화(講和)를 요청하는 왜장(倭將)의 서한(書翰)을 가지고 풀려나 왕을 알현(謁見)하였는데 5월에 금부(禁府)에서 올린 계(啓)로 인하여 희천(熙川)에 유배(流配) 되었다가 풀려 나지 못하고 다음해인 선조 27년(1594 갑오) 5월 29일 희천(熙川)의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이렇게 보면 김귀영에게 황산대첩비는 참으로 끈질긴 악연(惡緣)이라 할 수 밖에 없겠다.

김귀영(金貴榮)의 글을 모은 東園先生文集 卷之三/碑文에 황산대첩지비의 비문 원문이 실려 있으니 다음과 같다.

 

◐황산대첩비문(荒山大捷碑文)◑

荒山大捷之碑 幷頌

萬曆三年秋。全羅觀察使朴啓賢馳啓曰。

雲峯縣之東十六里有荒山。

寔我太祖康獻大王大捷倭寇之地也。

年代流易。地名訛舛。行路躊躇指點。

有不能辨認。誠恐千百世之後。

高者夷。下者湮。益將昧昧而莫知其所。

願樹一大石以識之。縣之耆倪。相與愬于官。

守土之臣。不敢抑以報。謹上聞。上可其啓。

命其道幹其事。仍命臣貴榮文之。臣承命衹慓。謹案。

麗季。國步臲卼。島夷乘之。屠城燒邑。殺人盈野。

所過波血。千里蕭然。殲咸陽。炎雲峯。屯引月。

聲言穀馬北上。中外大震。

 

太祖發南原。踰雲峯抵荒山。登鼎峯之上。相視形便。

指授犄角。盡銳奮擊。十倍之賊。不終日而蕩除。

爾來二百年間。海不揚波。嶺湖奠安。

莫非斯役之所賜。則南民之感戴追慕。

思欲封殖而瞻依者。烏得已也。洪惟我聖祖。

宏功峻烈。昭載國乘。照人耳目。軒天地耀古今。

當與玆山而終始不必區區劉石。爲之形容。

然後可以傳示無窮也。雖然。南方之山。巍然高大者。

無慮百數。而聖祖大勳之集。

適在於玆山。則可與天作高山。美儷竝稱。

而崧高維嶽。萬世仰止者矣。

於戲。岐陽蒐狩。簡車徒也。

而石鼓有勒。淮西削平。定藩鎭也。

而群臣請紀。聖武廓淸之功。巍巍蕩蕩。

萬民永賴。則鑱之貞珉。  

閣之龜龍。使居民行旅。瞻望拜稽。

有以寄沒世不忘之思焉。不亦韙哉。

臣貴榮。謹拜手稽首。獻頌曰。

 

麗運告窮。奸孼內訌。召彼外戎。島夷隳突。

三陲被毒。爲糜爲肉。萬姓暴骨。千里慘目。

執遏亂略。聖祖受鉞。師出爲律。震震爚爚。

神精上格。白虹貫日。勝兆已卜。天與之惎。

地效其利。荒山是界。爰赫一怒。爰奮厥武。

我旆我鼓。凶酋揚鷇。欲抗虓虎。自送其脰。

頂子應發。兜鍪忽側。已洞利鏃。蜂屯蟻雜。

褫氣號笑。萬牛殷谷。策馬先登。四面以崩。

莫我敢承。雷奔電激。竹破瓦裂。胔腦狼藉。

人神協討。會朝迅掃。三韓再造。革面悔罪。

厥篚繹海。垂二百載。南民耕鑿。煦愉事育。

莫非爾極。載慕載祝。銘在心腹。愈久如昨。

明曆五禩。伐石而紀。于山之趾。不鶱不剝。

永世無斁。有如斯石。

 

資憲大夫。戶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 同知經筵, 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臣金貴榮。奉敎撰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전라북도 남원군(南原郡) 운봉면(雲峰面) 화수리(花水里) 소재의 비(碑)로, 1577년(선조 10)에 건립하였다. 구상수립식(龜上竪立式의 석비(石碑)로 1380년 고려 우왕 6) 이성계(李成桂)ㆍ이두란(李豆蘭) 장군이 황산에서 왜적 아지발도(阿只拔都) 군(軍)을 물리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勝戰碑)이다.

   건립할 때 김귀영(金貴榮)이 비문(碑文)을 짓고, 송인(宋寅)이 이 글을 쓰고, 남응운(南應雲)이 이; 글을 새겼다. 비각(碑閣)은 1667년)(현종 8)에 현감(縣監) 허제(許濟)가 건립하였다. 왜정 때 파괴되고 지금은 파편만 남아 있는 것을 1977년 복원하였다. (이홍직 : <국사대사전>)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文集 卷十四 / 跋

▣跋荒山大捷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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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荒山大捷碑〉一帖,卽我康獻大王在龍潛時,出征倭寇,至南原 荒山之谷,殲阿只拔都,遂獲大捷,建碑紀功之文也。昔臣過荒山讀此碑,觀與所謂阿只拔都酣戰處,蓋深豁鉅谷叢林幽險之地也。倭人利於步,而山谿不可馳馬,其勝取神武,非人力也。世稱倭人血流谿谷,石色至今染赤,視之,蓋本赤石,非故血染而然也。臣嘗論:“南路關防,以雲峰爲首,而秋風嶺次之。雲峰失則賊得湖南,秋風失則賊得湖西,兩湖失則畿甸蹙,此必爭之門也。” 向使阿只拔都不踰雲峰,聖祖豈若是勞苦哉?若鳥嶺天險也,廢之益鞏,何以城爲?

131쪽ⓒ 다산학술문화재단 | 2012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에 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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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황산대첩비 한 첩(帖)은, 곧 우리 강헌 대왕(康獻大王 이 태조(李太祖)의 시호)이 잠저(潛邸) 시절에 왜구(倭寇)를 정벌하러 나가 남원(南原)의 황산(荒山) 골짜기에서 왜장(倭將) 아기발도(阿只拔都)를 죽이고, 드디어 큰 승첩을 거두었으므로, 비(碑)를 세워 그 공적을 기록한 글이다.

옛날 내가 황산을 지나다가 이 비문(碑文)을 읽어 보고 또 아기발도와 치열하게 싸웠다는 곳을 보았는데, 대체로 깊고 큰 골짜기로서 숲이 우거진 험악한 지역이었다. 왜인(倭人)은 본디 보전(步戰)에 익숙하였고 우리는 보전에 약하였는데, 더구나 그런 산골짜기에서는 말을 달릴 수가 없는데도 승첩을 거두었으니, 그 승첩을 거둔 것은 신통한 무용(武勇)에서 온 것이지 단순한 인력(人力)으로 된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왜인들이 계곡에 피를 많이 흘려서 계곡의 돌빛이 지금까지도 빨갛게 물들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본래부터 붉은 돌이지 피로 물들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찍이,

“남도(南道)의 관방(關防)은 운봉(雲峯)이 으뜸이고 추풍령(秋風嶺)이 다음이다. 운봉을 잃으면 적(賊)이 호남(湖南)을 차지할 것이고, 추풍령을 잃으면 적이 호서(湖西)를 차지할 것이며, 호남과 호서를 다 잃으면 경기(京畿)가 쭈그러들 것이니, 이는 반드시 굳게 지켜야 할 관문(關門)인 것이다.”

고 논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아기발도가 운봉을 넘어오지 않았더라면 성조(聖祖 이 태조)께서 어찌 그와 같은 노고를 하였겠는가. 조령(鳥嶺)은 천연적인 요새지이니, 그대로 두는 것이 더욱 견고할 터인데, 무엇 때문에 성(城)을 만들었단 말인가?

ⓒ 한국고전번역원 | 장재한 (역) |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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