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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달래주는 향기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2. 25.

이탈리아의 축구인

이름
로베르토 바조
Roberto Baggio
출생
1967년 2월 18일 (56세) /
이탈리아 베네토 주 비첸차 도 칼도뇨 시
국적
신체
 174 cm | 체중 73 kg
직업
종교
주발
오른발
소속
선수
비첸차 칼초 (1983~1985)
ACF 피오렌티나 (1985~1990)
유벤투스 FC (1990~1995)
AC 밀란 (1995~1997)
볼로냐 FC 1909 (1997~1998)
인테르나치오날레 (1998~2000)
브레시아 칼초 (2000~2004)
행정가
이탈리아 축구 연맹 (2010~2013 / 기술위원장)
국가대표
 56경기 27골 (이탈리아 / 1988~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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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평가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5.3. 수훈5.4. 클럽 기록

6. 어록7. 바조에 대한 말말말8. 델피에로와의 비교9. 기타

9.1. 외모9.2. WAGs

1. 개요[편집]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로 1990년대를 풍미한 비운의 판타지스타로 유명하다. 뛰어난 기량으로 유벤투스 소속이던 1993년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상을 독식했으며, 1년 후 열린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는 토너먼트 스테이지부터 엄청난 활약으로 이탈리아의 결승 진출을 이끈 공격수이다.[1]

 


참고로 '바지오'는 표기법상 잘못된 표기이고, '바조'가 맞는 표기다.[6] 최근에는 표기법에 맞춰 '바조'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여전히 '바죠'나 '바지오'로 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표기법이야 아무래도 좋은 것이 말총머리한마디면 다 알아듣는다. 동시기 국가대표 동료 미드필더 디노 바조(Dino Baggio)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말총머리가 주목받았다.

공격수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과 특유의 헤어스타일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의 기억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선수다.

애칭은 '로비(Robi (or "Roby)'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고향 비첸차의 유소년 팀을 시작으로, 1983년 6월 5일[7] 세리에 C 비첸차 팀에 데뷔했다. 1984/85 시즌엔 12골을 넣으며 활약하면서 팀이 세리에 B로 승격하지만, 1985년 5월 오른무릎의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는다.[8][9]

 


그런데 그런 큰 부상중임에도 바조는 그 해 여름에 당시 세리에 A 리그 팀인 ACF 피오렌티나로 이적하게 된다. 재활을 마치고 1986년 1월 복귀한 바조는 컵 대회로 복귀를 알렸고, 가을에 리그에 정식으로 데뷔 했는데 곧장 무릎 부상 재발로 7개월 결장.

20살도 되지 않은 바조는 10대 후반의 나이에 벌써 치명적인 부상을 2번이나 당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채 끝나리라고 생각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의학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 그런 우려들도 당연한것이었다. 그러나 바조는 '경기를 뛰고싶다'는 신념하나로 버티며 재활에 성공, 87/88 시즌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세리에 A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등장을 알리게 된다. 바죠의 첫골은 바로 디에고 마라도나가 버티고 있던 나폴리를 상대로, 강등권 위기에 쳐해있던 피렌체를 구해내는 값진 골이었다.

이듬해인 88/89 시즌, 21살의 바조는 40경기에 출전하며 24골을 기록하며 기량이 폭발하기 시작하며 피오렌티나의 에이스로 자리잡게 되었고, 90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통해 슈퍼스타로서 착실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활약으로 인해 그는 1990년, 사상 최고의 이적료를 경신하며 150억 리라[10]의 금액에 유벤투스 FC로 이적한다. 바조는 사실 이적을 원치않았고 큰 부상에도 자신을 믿고 기다려준 피오렌티나에 대해 큰 애정을 지니고 있었으나[11] 당시 피오렌티나가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기때문에 결국 이적하게 된다. [12]

 


유벤투스에서 미셸 플라티니의 10번[13]을 이어받은 바조는 매년 20골 이상을 넣는 준수한 활약을 보인다. 특히 1992/93시즌 리그와 대회를 통틀어 30골, 1993/94 시즌엔 22골을 기록했는데, 시즌이 아닌 연도 즉 1993년 1월부터 12월까지 1년 동안 39골을 넣으며 절정기를 누렸다. 특히 1993년 UEFA컵[14] 결승전 당시 1,2차전을 통틀어[15] 2골을 넣어 유벤투스에게 유럽대항전 트로피를 안겨준 활약으로 해당시즌 FIFA 올해의 선수상 발롱도르를 휩쓸어버린다.

발롱도르를 수상한 바조


그러나 바조는 하술된 1994 월드컵의 실축 이후 크나큰 심적 고통을 겪게 된다. 마르첼로 리피가 신임 유벤투스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공개적으로 바조가 팀 전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주전 자리를 차츰 앗아갔다.

설상가상 그해 11월 무릎 부상 재발로 뛰지 못하는 동안, 하필이면 리피가 직접 데려온 델피에로가 훌륭히 빈자리를 메꾼다. 1994/95 시즌 막바지에 복귀한 바조는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맛보지만, 팀에서 입지는 예전 같지 않았고 결국 잉여 전력외 판정을 받고 팀을 떠난다.

 


이때 인터 밀란으로 이적한다는 루머가 파다했지만 결국 1995년 여름 AC 밀란으로 이적하는데, 파비오 카펠로 감독 역시 판타지스타 바조를 탐탁치 않게 여기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995/96시즌 AC밀란이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유벤투스 FC 때와 같이 바조가 우승에 공헌한 바는 미미했다. 다음해 카펠로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 CF를 맡으면서 숨통이 트이는가 했지만, 결국 아리고 사키 감독이 들어온다. 사키 감독은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이었는데, 노르웨이전에서 골키퍼 잔루카 팔리우카가 퇴장당하자 후보 골키퍼 루카 마르케지아니를 투입하기 위해 바조를 벤치로 불러들이며 바조의 자존심에 흠집을 낸 인물이었다.

1996/97 시즌 AC 밀란은 리그 11위를 기록하는 부진을 보이며 사키 감독을 경질했는데... 후임으로 카펠로 감독이 다시 왔다.

 


결국 카펠로 감독에게 전력외 통보를 받은 바조는 볼로냐로 이적, 리그 30경기 22골을 기록하며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한다. 하지만 여전히 볼로냐 감독과 불화(...)를 일으켰다.

 


1998년 월드컵이 끝나고 바조의 건재함을 확인한 인터밀란이 오퍼를 넣어, 바조는 등번호 10번을 받고 이적한다. 그리고 이때 인터 밀란에 호나우두가 있었다. 축구팬들은 신구세대 최고 공격수 두 사람이 환상의 투톱을 이룬다고 기대와 설레발… 호나우두가 부상크리. 지못미.[16] 이 무렵 인터밀란은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하고 애먼 감독 모가지만 연달아 날렸는데, 결국 작심하고 데려온 승부사가… 마르첼로 리피 감독.[17]

 


결국 바조는 2000년 들어 무소속이 된다. 사실 아직도 슈퍼스타였던 바조를 원하는 해외팀들이 있었지만, 그의 마지막 목표인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참가하려면 세리에 A에서 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판단해 거절했다. 그는 결국 2000년 9월 브레시아에 입단해 선수생활을 계속한다. 서른 세살의 황혼기에 접어든 나이에 00시즌을 앞두고 막 1부리그로 승격한 작은팀으로의 이적을 바라보는 팬들의 반응은 그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브레시아에서 바죠는 마지막 축구인생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탁월한 감각은 변함없어 매 시즌 꾸준히 10골 이상을 넣는 페이스를 보이며 최약체 브레시아를 리그8위로 올려놓기까지 한다.

하지만 월드컵을 코앞에 둔 2001년 10월, 왼쪽 무릎 부상으로 3개월 결장. 재활을 거쳐 다음해 1월 복귀했지만 통증 재발로 끝내 수술대에 오른다. 회복까지 최소한 넉달은 넘게 걸린다는 예상이었지만, 바조는 기자들에게 "나는 기적을 믿는다."고 담담히 밝힌다. 그리고 77일 만에 시합에 복귀했다. 복귀한 김에 두 골을 넣었다.

그러나 그의 불꽃투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트라파토니 감독은 바조의 몸 상태가 100% 올라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탈리아 대표팀에 뽑지 않았고 월드컵의 꿈은 좌절되었다.[18] 그리고 이탈리아는 대한민국에 일격을 맞고 16강 탈락.

월드컵이 끝난 뒤로 줄곧 리그에 전념, 세리에 A 400경기 출장과 통산 200골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시즌이던 03/04 시즌, 바조는 37살의 나이에 무릎 수술, 요통으로 장기간 결장하는 등 이미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기에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시즌 26경기 12골 11도움을 기록하며, 시즌 평점 1위라는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주었고, 5월 시즌 마지막 경기 AC밀란 원정시합에서 8만 관중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브레시아에서는 그를 기리며 등번호 10번을 영구결번 처리했다.

이렇게 한시대를 풍미했던 판타지스타 바조의 긴 여정은 끝나게 되었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1988년 네덜란드를 상대로 등번호 11번을 달고 대표팀에 데뷔했다. 그가 전국구로 이름을 날린 때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으로, 5경기 2골을 기록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 득점왕을 차지한 살바토레 스킬라치를 앞세운 이탈리아는 자국민들의 열렬한 응원을 등에 업고 24강 조예선을 3전 전승으로 가뿐히 통과하고 16강에 진출했는데 바조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에서 첫 골을 기록한다. 이후 16강전 우루과이, 8강전 아일랜드마저 연파하며 4강에 진출했다.

 


4강 상대는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였는데, 1:1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 이 경기에서 바조는 선발이 아닌 교체로 출전했는데, 이를 두고 감독이 기용 실패로 비판을 받았다.[19]

 


3·4위전에서 71분에 잉글랜드 피터 쉴튼 골키퍼를 상대로 골을 넣으며 이탈리아가 2:1로 승리하며 결국 3위를 차지했다.

유로 1992 대회에서는 이탈리아가 지역 예선에서 소련에 밀려 탈락하면서 출전하지 못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선 이탈리아가 조예선 탈락을 걱정할 만큼 초반에 극히 부진했다. 사실 E조 조편성이 노르웨이, 멕시코, 아일랜드, 이탈리아로 어느 팀이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은 죽음의 조였는데,[20] 정말로 네 팀이 똑같이 1승 1무 1패 골득실 0을 기록해 버렸다. 당시 조 예선은 24강 제도였기 때문에, 조 2위까지 본선 진출하고 3위를 차지한 여섯팀 가운데 네팀이 올라가는 방식이었다. 이런 복잡한 경우의 수 놀이 끝에 가까스로 본선에 올라갔으니, 축구에 대한 열성이라면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이탈리아 팬들에게는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21] 팀은 물론이고 예선에서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 바조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22]

 


그런데 토너먼트에서 바조가 해결사 본능을 발휘한다.

1994 미국 월드컵에 참가한 이탈리아의 전력은 프랑코 바레시, 파올로 말디니,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마우로 타소티 등 아예 밀란을 통째로 뽑아온 수비진에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디노 바조의 공수 양면으로 뛰어난 미드필더진 등 매우 탄탄했다. 그러나 바조를 제외한 카시라기, 잔프랑코 졸라, 시뇨리, 마싸로 등의 공격진은 개인기량이야 뛰어났지만 부상 후유증이나 경험 미숙 아니면 국대 징크스나 조직력 등 여러가지 이유로 별로 믿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탈리아가 결승까지 7경기 동안 득점했던 8골 중에 바조는 5골을, 아주 결정적인 순간마다 작렬시켰다.[23]

16강 나이지리아전, 잔프랑코 졸라가 퇴장당한 이탈리아는 후반 40분이 넘도록 스코어마저 1:0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누가 봐도 다음 대회를 기약해야 할 것처럼 보였으나 바조의 발에서 후반 43분 극적인 동점골이 터졌고,[24] 연장전에서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세를 몰아쳐 페널티 킥을 성공시켜 경기를 끝낸다. 8강에서 전통의 강호 스페인과 1:1로 접전을 벌이던 후반 42분, 바조는 다시 한번 극적인 결승골을 작렬한다. 4강 상대는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가 이끄는 불가리아와의 시합에서 바조는 이 대회 최고의 활약상을 선보인다. 전반 20분, 25분에 연달아 골을 터뜨리고, 뒤늦게 스토이치코프가 한 골 만회한 불가리아를 2:1로 누르며 결승에 오른다.이러한 활약으로 바조는 이탈리아에선 구국의 영웅으로 불리며 온갖 찬사와 칭송을 누리고 있었다.

 


운명의 결승전 이탈리아는 브라질과 맞서게 된다. 당시 차례로 득점왕을 차지하며 라리가를 호령하던 호마리우 베베투 등 이탈리아 못잖은 스타플레어들이 포진한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격돌 끝에 스코어는 0:0, 결국 승부차기로 우승국을 가리게 된다. 브라질은 키커 네명 가운데 세명이 성공하고, 이탈리아는 두명이 성공해서 승부차기 스코어는 3:2.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고, 또 바조가 성공하더라도 다음 브라질 키커가 성공하면 패하는 상황에서 바조가 찼던 슛은 크로스 바를 넘어 하늘로 날아갔다.[25]

 


이 실축의 임팩트는 엄청난 것으로 실축 직후 이탈리아에서는 팬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바조의 인형을 불태우고 초상화도 찢어버리기까지 했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해져서, 토너먼트나 경기에서 활약이 좋았던 선수가 승부차기는 실축하는 경우 자주 바조의 이름을 언급하곤 한다. 더구나 이것은 바조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1번 키커이자 주장인 프랑코 바레시도 홈런을 날렸고 바로 앞 키커인 마사로[26] 클라우지우 타파레우에게 막히는 등 심적 부담이 무시무시했을 것이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대회 내내 햄스트링 통증으로 고생했으며, 전반전에도 통증이 올라와 실려갔다가 들어오는 등 경기 내내 다리 부상을 안고 뛰었다. 그냥 아리고 사키의 아쉬운 판단이었다.

그리고 유로 1996에는 아리고 사키 감독과의 불화로 제외되었으며, 이탈리아는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고 만다.

멘탈 공황 상태에서 간신히 벗어난 후 리그에서 활약을 바탕으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에 뽑인 바조는 크리스티안 비에리와 짝을 이뤘다. 조별리그 첫 경기 상대는 남미의 다크호스 칠레였고, 유럽에서 뛰는 살라스와 사모라노 등 걸출한 2명의 공격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경기 초반 바조의 감각적인 패스가 비에리의 발 앞에 정확히 배달되며 가볍게 선취 득점에 성공했다. 손쉽게 경기를 지배하나 했지만, 살라스에게 잇달아 두 골을 내주고 오히려 끌려다니는데...

 

여기서 판타지스타로서의 바조가 지닌 천재성이 발휘된다. 칠레의 밀집 수비에 공격의 활로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페널티 에어리어 측면에서 공을 잡은 바조는 패널티에어리어 안에 있던 칠레 수비수의 손을 공으로 맞혀버린다. 다분히 페널티 킥을 일부러 얻으려 한 동작. 결국 얻어낸 페널티 킥을 후반 40분 바조가 침착하게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27] 동점으로 마무리 짓는다. 바조로 시작해서 바조로 끝난 경기였다. 이 시합에서 골로 바조는 월드컵 3개 대회에서 골을 기록했다. 또한 팽팽하게 전개되던 오스트리아에서도 승리를 확정짓는 쐐기골을 뽑아내며 큰 경기에 강한 면모를 다시 한 번 드러냈고, 이탈리아는 2승 1무 조1위로 무난히 16강 토너먼트에 진출한다.

16강 상대 노르웨이를 꺾고, 마침내 8강에서 홈팀 프랑스를 만난다. 이 경기에서 바조는 후반 교체 멤버로 뛰었으나 득점을 기록하진 못했고, 양팀은 0:0으로 비긴채 승부차기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탈리아 첫번째 키커가 바조... 경악과 불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조는 침착하게 성공한다.

 


이때 킥을 성공시키고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세레모니를 했다. 이를 본 국내 해설진은 "자기 옛날 월드컵 이야기 하지 말라는 걸까요?"하며 웃음을 지었다.[28]

하지만 마지막 키커 루이지 디 비아조가 실축하면서 끝내 이탈리아는 4:3으로 패한다. 이 실축은 4년 전 월드컵 결승전에서의 바조의 킥과는 달리 골대 윗부분을 맞고 튀어나왔다. 망연자실해 그라운드에 누워버린 디 비아조에게 바조가 다가가 위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29]

유로 2000 때는 하향세로 제외되었다. 결국 바조는 유로에서 단 1경기도 뛰지 못했다.

2001년 10월 당한 부상에서 기어코 복귀해내며 의욕을 불태웠던 2002년 한일 월드컵 참가는 트라파토니 당시 감독이 끝내 바조를 외면하며 이뤄지지 못했다. 비에리-토티-델피에로 3각 편대를 너무 과신한 나머지 바조를 외면했으나, 큰 대회에서는 스스로 격이 달라지는 바조를 과소평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이탈리아는 2002년 본선 내내 불만족스러운 경기력 끝에 크로아티아에 패하고 멕시코와도 극적인 동점골 끝에 겨우 비겼다. 에콰도르가 크로아티아를 잡아주는 이변으로 조 2위로 겨우 16강에 진출했고 무엇보다 한국과의 16강전에서 골가뭄 끝에 1:2 역전패까지 당하게 된다. 엔트리 제외에 실망하여 두문불출하던 바조가 2003년 은퇴를 표명하자 그에게 존경을 표하는 뜻으로 2004년 4월 28일 스페인과 친선 경기에 발탁했다. 이 시합이 바조의 대표팀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결과는 1:1 무승부. 시합 후 인터뷰에서 은퇴나 지금까지의 대표팀 생활을 거론하지 않고 당장 오늘 치른 경기에서 골을 넣지 못한게 아쉽다고 발언하며 골잡이로서의 자존심을 드러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바조는 몇 안되는 판타지스타라 불리우는 공격수다. 바조는 최전방에 못박혀 득점을 노리는 득점 기계 타입의 선수가 아니었다. 피치 위에서 포워드가 맡을 수 있는 대부분의 자리들, 그러니까 윙어/최전방/투 톱뿐만 아니라 메짤라까지, 다양한 위치를 소화해 본 경험이 있었지만, 그가 가장 선호한 위치는 공격수들 밑에서 어시스트와 득점을 모두 노릴 수 있는 프리롤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였다고 한다.[30] 미셸 플라티니는 그런 바조를 환상적인 9.5번으로 표현했다. 공격 조율, 침투, 공간 창출, 키 패스, 득점까지 공격수로서 해야하는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 낼 수 있는 말 그대로 트레콰르티스타였던 것이다.

타고난 골잡이로써 박스 바깥에서나 안에서나 득점을 뽑아내었고 박스 바로 앞에서 침착하고 정확하게 감아차는 골에 아주 뛰어났다. 그 뿐만 아니라 발리 슈팅이나 칩슛도 자주 보여주었다. 프리킥 실력도 굉장히 뛰어나 당대에도 디에고 마라도나, 미셸 플라티니, 지쿠와 비교되었고 현재도 역대 최고의 프리키커를 뽑을 때 상위권에 선정된다. 페널티킥도 잘 차는 편이나 그 한 번의 실수로 빛이 바랬다.

피지컬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양발 모두 기술적으로 상당히 뛰어나고 순간적인 가속력과 민첩성이 엄청났기 때문에 수비수을 손쉽게 벗겨낼 수 있는 환상적인 드리블 능력을 가졌다. 지쿠가 기술적으로 완벽하다고 칭찬했을 정도. 순간적인 가속과 감속으로 상대를 벗겨내는 드리블은 리오넬 메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역시 판타지스타로 불리우는 델피에로와 흡사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판타지스타의 정의에 부합되는, 보는 이를 홀리는 플레이라는 관점에서 바조가 훨씬 판타지스타답다. 델피에로는 20대 초반에만 그런 모습을 보였다. 델피에로가 큰 경기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플레이로 팀을 살린 적이 얼마나 있나 생각해보면, 바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건 바조가 왜 그 이후 대표팀에서 제외되었는가와도 관계가 있는데, 카테나치오같은 수비적 전술을 들고 나온다면 바조가 더 맞는 카드다. 토너먼트에서 어떻게든 막고 바조에게 연결하면 어떻게든 해결시켜 주니까. 하지만 전술의 이탈리아가 낳은 많은 이탈리아의 명장들은 판타지스타의 원더플레이와 골에 의존하기 보단 좀더 조직적으로 골을 만들어내고 감독의 계산 하에 안정적인 게임을 하길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체력이 약하고 공격 위치에서 자유로운 움직임을 좋아하는 바조보다는 델피에로가 훨씬 맞는 카드였던 것.[31] 바조가 정말 불운했던 것은 그 당시 바조를 외면했던 감독들이 사키 이후 연이어 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소속팀마저 따라와서 감독을 하면서 바조를 외면했던 것이다.

현대 전술의 흐름에 외면당했지만, 보는 이를 감탄시키는 환상적인 플레이로 많은 팬을 만들고 뇌리에 박히는 판타지스타 중의 판타지스타. 그것이 바로 로베르토 바조였다.

4. 평가[편집]

1990년대를 대표하는 공격수로서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격수 반열에 들어가는 선수 중 한 명이다. 오렌지 삼총사가 휩쓸고 지나갔던 1990년대 초반은 축구계를 지배하는 선수가 없었을 정도로 혼돈의 시대였지만 그들 중에서 가장 선두에 서 있었던 선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바조를 한문장으로 표현할수 있는 말은 한시대를 풍미한 비운의 판타지스타이다. 애초에 판타지스타 라는 단어자체가 바조를 표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말인만큼, 그의 전성기 시절의 플레이는 화려하고 보는 이들이 감탄을 내뱉게 만들만큼 뛰어난 선수였다. 그러나 그를 비운의 판타지스타라고 말하는 이유는, 단순히 월드컵 결승에서의 승부차기 실축만이 아니라, 그의 선수생활은 점차 압박축구와 같은 선수 개인의 힘이 아닌, 조직적인 팀단위의 현대적인 시스템축구가 들어서던 시기였고, 그로인해 너무 자유분방한 플레이를 펼쳤던 그는 커리어내내 이탈리아의 최고 명장들과 꾸준히 불화를 일으켰고, 이곳저곳을 옮겨가는 저니맨 생활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조의 명성에 비하면 그가 이뤄낸 결과물들이 어쩌면 조금 초라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선수생활내내 환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주던 1990년대 판타지스타였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의 바조는 3번의 월드컵에서 준우승 1회, 3위 1회, 8강 1회[32]를 기록했고, 특히 1994 월드컵은 그를 비운의 스타로 만들어준 대회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공격을 홀로 전두지휘하면서 뛰어난 활약으로 월드컵 결승까지 올려보냈으나, 결승전에서의 승부차기 실축으로[33] 아쉽게 준우승을 하며 실버볼을 수상하였다. 반면 그가 아리고 사키와의 불화로 제외된 유로 1996에서는 조별 예선 탈락의 수모를 당했다. 단 유로 2000에서 프란체스코 토티, 알레산드로 델피에로의 맹활약으로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바조를 배제하기에 이르고, 1승 1무 2패라는 부진한 성적으로 16강에서 탈락하게 된다. 특히 비에리를 제외한 공격진의 부진이 심각했는데,[34] 팬들이 바조의 부재를 아쉬워했음은 당연하다. 이처럼 그의 존재감은 1990년대-2000년대 초반 이탈리아에서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 그리고 이탈리아에서의 그의 평가는 토티, 델 피에로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니 사실 우승 커리어를 제외한 선수 개인에 대한 평가는 바조가 토티, 델 피에로를 뛰어 넘는다. 무엇보다도 바조는 1993년에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상 위너로 세계 최고의 선수로 군림한적이 있는 선수다.[35]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뽑는 설문조사에서 바조는 꾸준히 TOP3 안에 들만큼 평가가 높으며,[36] 세계적으로는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로 자주 여겨지고 있다.

오히려 후대에 평가가 더욱 올라가고 있는데, 비록 팀 커리어는 다른 역대 레벨 선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하지만, 부상 이전의 호나우두처럼 그가 보여준 개인 기량과 수상 이력이 고평가 요소가 되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 바조의 위상은 지쿠, 바비 찰튼, 마르코 반 바스텐, 게르트 뮐러와 비슷한 수준으로, 역대 10위권[37] 다음가는 위대한 선수로 여겨진다.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5.2. 개인 수상[편집]

5.3. 수훈[편집]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5등급: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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