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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지 순 례 ♥

「십자군전쟁 ▶ 중동전쟁」 통해 세계사 흐름을 본다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15.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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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전쟁 ▶ 중동전쟁」 통해 세계사 흐름을 본다

십자가군병 | 2015.11.09 22:11 목록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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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중국 무협영화에서 이소룡이 혼자서 깡패들을 제압한다.

1:N의 싸움이다.

다수가 이기면 기존 질서가 유지되지만

다수가 지게 되면 큰 파문이 일어난다.

십자군전쟁과 중동전쟁은 공통점이 많다.

1) 하나님을 믿는 종교집단 간의 전쟁이고

2) 이스라엘(예루살렘)점령이 전쟁 목표이며

3) 1:N의 싸움인데 다수(N)쪽이 패배했다

윈스톤 처칠은 ‘전쟁은 역사의 진로를 변경시킨다’고 했는데

11~13C 십자군 전쟁과 20C 중동전쟁을 통해

세계사 흐름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알아보자.

참고: 이슬람교는 구약성경중 모세오경까지만 믿는다. 즉 하나님을 믿되 모함마드의 예언서(꾸란)를 따른다.

유대교는 구약성경까지만 믿는다. 즉 하나님을 믿으며 구세주 메시야를 기다린다.

기독교(카톨릭, 개신교 포함)는 구약과 신약성경을 믿는다. 즉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믿는다.

* 기독교인이 아닌 분은 '종교전쟁을 통한 세계사 공부한다' 생각하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2. 십자군 전쟁(CRUSADE)

가. 십자군 전쟁이란?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국가에 빼앗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하여

11~13C 로마교황 주도하에 유럽각국이 참전한 대규모 군사원정이다.

참전 주요 국가는 프랑스, 신성로마제국(독일), 영국,

비잔틴제국(그리스), 이탈리아 도시국가 등으로

서유럽 대부분의 봉건 제후들이 참전했으며

기사들이 가슴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십자군이라 부른다.

그림 출처 http://juny0505.tistory.com/14

나. 당시 배경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애를 보냈던 예루살렘 성지의 순례를 중요시하였는데

이슬람세력이 7세기들어 세력을 확장하면서 638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719년 아프리카 북부, 스페인까지 정복하여 거대한 우아미야 왕조를 건설한다.

1171년 이슬람의 셀주크 투르크가 동로마 제국의 팔레스타나를 점령, 예루살렘 성지 순례자를 박해한다.

따라서 교황과 유럽 각국은 성지를 이슬람의 영향에서 해방시키기를 원하였다.

참고: 이슬람이 세운 우아미야 왕조는 셀주크(사라센 제국) →오스만 제국(1299~1923)으로 이어지면서

거대한 단일 이슬람국가로 1300년을 이어왔고, 20세기에 현재처럼 이란 이락 등 단일국가로 나누어짐.

다. 전쟁의 전개과정

비잔틴(동로마) 황제는 셀주크 투르크에게 영토 일부를 빼앗기자, 로마 교황에게 도움 요청했고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동원령을 선포함으로서 십자군 전쟁은 시작된다.

‘그리스트 교도들이여! 신은 그대들을 인도하실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성지는 신이 그대들에게 내린 토지이다.

이 땅에서 가난한 자는 그 땅에서 번영할 것이다.

신의 정의를 위하여 싸우다 쓰러지는 자는 죄 사함을 받을 것이다!’

제1차 원정 (1096~1099년)

교황의 요청에 따라 전쟁에 참여한 당시 십자군들은,

내비게이션도 없이 수천 수만리 길을 말을 타거나 걸어야했고,

후방보급이 원할치 못하여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여러 나라가 모인 연합군이기에 결집력도 약한,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이슬람 측이 내분으로 분열된 상태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정복에 성공하고

예루살렘왕국을 포함한 4개의 십자군 국가를 세운다.

신의 정의를 위해 순교를 마다하지 않은 전쟁이였다!

 

 

그림출처 http://study.zum.com/book/11810

제2차 원정 (1147~1148년)

십자군이 세운 4개국 중에서 에데사 국(Edessa, 안티옥 북쪽지방)이 이슬람 측에 점령당하자

교황의 호소로 십자군이 다시 결성되어

프랑스, 신성로마제국(지금의 독일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십자군이 참가하지만

이슬람군에게 패배하고 철수한다.

실패한 전쟁! 그러나 예루살렘 왕국은 아직 십자군 국가로 존속 중.

제3차 원정 (1189~1192년)

예루살렘국가를 세운 지 90년, 이슬람 세계의 영웅 살라흐 앗 딘(일명 살라딘)에 의해 함락된다.

그래서 교황은 예루살렘 재탈환을 위해 십자군 동원을 호소했고

잉글랜드(지금의 영국),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등이 참가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하고 살라딘과 휴전협정을 체결,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를 보장받는다.

절반의 성공이다!

제4차 원정 (1202~1204년)

교황의 요청에 따라 이슬람권의 본거지인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원정을 했으나

십자군들이 지중해를 건너는데 필요한 도항(渡航)비용이 부족하여

선박수송을 하청받은 베네치아 국(國)의 요구대로 기독교 국가인 항가리 왕국을 공격하고

동로마제국의 황제 계승문제에 돈받고 용병으로 참전, 동로마 영토를 공격해서 국가를 세우기도 한다.

십자군이 권력과 돈으로 인해 거룩함을 잃었다!

십자군전쟁이 역사적 비판을 받게 되는 최악의 원정이다!

제5차 원정 (1218~1221년)

예루살렘 왕국의 후신인 악콘 왕국의 군사들이 소규모 병력으로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략하였으나 실패한다.

제6차 원정 (1228~1229년)

교황이 십자군 파병을 조건으로 신성로마제국(지금의 독일) 황제를 임명했는데 그가 약속대로 원정을 이행하지 않자 그를 파문한다. 1228년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된 채로 십자군을 일으켜 당시 이집트의 술탄과 평화조약을 체결,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이양받는 성과를 올린다.

그러나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가 원정으로 제국을 비운 사이에 이를 제거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지만

교황군대가 격퇴당하면서 평화협정을 맺어 관계를 회복한다

그 후에도 이 둘의 암투는 계속된다.

누가 우군이고 적인지? 무엇이 정의인지? 혼란스럽게 되다!

제7차 원정 (1248~1249년) 제8차 (1270년)

이집트의 술탄 알 카밀이 죽은 후 1244년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에게 함락되고, 2000여명의 기독교도들이 학살당한다. 이에 프랑스의 루이 9세가 1248년 원정하지만 살라딘 2세에 패배하고 포로가 되어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된다. 20년후 다시 출병하지만 도중에 병사하고 만다

그후에도 1291년 루이 9세의 동생 샤를 왕은 잉글랜드과 연합하여 예루살렘 탈환을 시도했고

그외에도 의료십자군 종교기사단 등 향후 100여 년간 성지 회복 시도가 있었다.

참고: 역사가들은 십자군전쟁을 8차 원정까지 보기도 하고 1400년대 까지 연장해서 보기도 함.

라. 십자군 전쟁에 대한 평가(소결론)

1:N의 전쟁에서 다수(N)쪽이 졌으니 파문이 크게 일어났다.

1) 기독교계가 폭력집단으로 인식되다

십자군 운동은 처움에는 순수한 열정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교황은 교황권 강화에, 영주들은 영토 확장에 목적을 둠으로서

거룩한 성전(聖戰)의 모습을 잃고 침략전쟁으로 각인된다.

더욱이 원거리 이동 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후방지원이 제대로 안되고,

이로 인해 참전자들은 극심한 고생을 하게 되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현지 약탈과 주민 학살을 자행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이에 반해, 이슬람의 살라딘은 피정복민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큰 지지를 받게 된다.

십자군 전쟁이 200년간 지속되면서 불신과 적대감이 심화되고 지금까지 그 불씨가 이어진다.

중동전쟁, 9.11테러 등도 십자군 전쟁에서 불씨가 이어진 것으로 본다.

결국 십자군전쟁으로 기독교계는 거룩함을 훼손했고 기독교계를 폭력적 종교로 보는 시각이 생겼다.

그래서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를 방문하여

4차 원정에 의한 침략과 학살, 약탈행위 등에 대해서 사과한 바 있고,

심지어 영국의 청교도들이 북미로 건너가 미국을 건국했는데,

이 건국역사를 '기독교인이 인디안들을 죽이고 땅을 빼앗아 기독교국가를 세웠다'는,

부정적 평가가 나오게 하는데도 일조한다.

2) 교황권은 약화되고 유럽 각국의 왕권이 강화되다

교황의 권한이 강할 때는 유럽 통합성이 강하게 나타나, 하나의 기독교국가처럼 움직였지만

십자군전쟁 실패로 교황권이 약화되면서 각국은 독립국가로서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교황권 절정기인 1215년 「교황은 태양, 군주는 달」에 비유할 정도로 강력하였으나

십자군전쟁 실패후 1305년 프랑스 황제는 교황을 납치 감금하고 새로운 교황을 임명하여

프랑스 아비뇽에서 70년간을 머물게 했다 (아비뇽 유수, 幽囚 그윽한 곳에 가둠)

3) 기독교내 교파 갈등은 고착되고 종교개혁을 앞당기게되다

교회 역사 측면에서 보면,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분열된 후

교황은 교회통합을 기대하며 십자군전쟁을 일으켰지만

4차원정에서 서방교회(로마 카톨릭) 소속 십자군들이 비잔티움제국까지 공격하여

그곳의 국교인 동방교회(=그리스 정교회) 교인 학살과 약탈을 자행함으로 인해

두 종파 (로마카톨릭 : 동방정교회) 간의 대립을 더욱 고착시켰다.

또한 십자군전쟁 실패는 교황의 권위 실추와 함께 면죄부 판매 등 교회의 부패로 이어지면서

로마 카톨릭은 자체 개혁으로 변화를 모색하게 되고

루터, 칼뱅 등에 의해 '개신교 탄생'이라는 종교개혁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4) 유대인은 박해와 학살의 대상이 되다

유대인은 기독교국가 및 이슬람국가 모두에게 이방인으로 취급당했고 무단 점유자로 인식되어

학살의 대상이 되었는데 결국 십자군전쟁 중의 유대인 불신이

향후 1,000년간의 유대인 박해와 학살로 이어진다.

5) 십자군전쟁은 긍정적인 영향도 크다

유럽과 중동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교통 무역 문화 과학 공업 등이 발달하고

인간중심의 문화의 꽃인 르네상스 시대를 앞당기는데 기여한다

참고 : 르네상스(Renaissance)란?

중세기 유럽은 기독교적 가치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기독교국가이며, 봉건제후에 의해 통치되던 시대이다.

르네상스는 14세기~16세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일어난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화혁신운동인데,

이 운동으로 인해 교황 등의 교회권력, 봉건 귀족, 지주 중심의 문화적 암혹시대로 불리우는 중세가 끝나고

인간중심의 근세로 넘어가는 계기가 됨

3. 중동 전쟁(Arab-Israeli wars)

가. 중동 전쟁이란

이스라엘의 독립을 계기로 이를 반대하는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으로

1948~49 이스라엘 독립 직후 일어난 전쟁을 시작으로, 1956 1967 1973 4차례의 전쟁을 말한다.

참고 : 중동(中東 middle east)이란 동양과 서양의 중간정도개념으로, 아시아 남서부와 이프리카 북동부 지역을 지칭함.

나. 중동 전쟁의 원인

유대인들은 AD70년 로마군에 의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추방되어 '디아스포라 (Diaspora 흩어진 사람들)'가 되어 힘들게 살아왔다.

이들은 기독교(基督敎)화된 유럽에서 "예수를 팔아넘긴 죄인"이라며 박해와 차별 속에 살아왔고

안정된 삶을 보장받을 수 없었기에 부동산보다 기독교가 금지하는 포주나 고리대금업 등에 종사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시에는 양쪽 모두로 부터 더욱 불신을 받았다.

20세기들어 세계적 흐름인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시오니즘(zionism) 운동을 제창하며

고대 이스라엘의 언어와 풍습들을 되살려 국가건설을 위해 힘을 모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싸우게 된 직접적 원인을 보면,

영국은 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군사동맹을 맺은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고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현지인들의 협조를 구하게 되는데,

1) 1915년 아랍인들에게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들에게 돌려주겠다는 맥마흔 선언을 발표하고,

2) 1917년 시오니즘 운동의 수장격인 로스 차일드에게 이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국을 약속하는

벨푸어 선언을 한다.

결과적으로 아랍측과 이스라엘 양측에 이중 계약을 한 것이 역사적인 중동 분쟁의 씨가 된다.

1922년 팔레스타인 지역의 종교분포를 보면

무슬림 589,200명, 유대인 83,800명, 그리스도인 71,5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 유대인이 계속 증가하여 기존에 있던 아랍인들과 마찰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시오니즘 운동에 의해 건국을 준비하고

팔레스타인은 YMMA(젊은 무슬림 협회)가 주축이 되어 시온주의 운동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렸는데

양측은 ‘합의는 불가능하고 오로지 군사력을 통해서만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6년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 지역에서 물러나면서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를 비롯하여 중동지역의 모든 아랍 국가들이 독립을 맞이했다.

특히 UN는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과 유대인으로 분리하여 독립시키는 안건을 의결했다.

이 결의안을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환영하여 이듬해에 이스라엘 국가를 탄생시키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들을 비롯하여 주변 아랍국가는 반대했다.

다. 전쟁의 전개과정

제1차 중동전쟁 (1948. 5 ~ 49. 7) 이스라엘 건국을 반대하며 일어남

이 전쟁을 이스라엘은 '독립전쟁'이라 부르고, 팔레스타인 측은 ‘재앙의 시작’이라고 부른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국가수립을 선포하자

이집트·요르단·이라크·시리아·레바논에서 출병한 아랍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스라엘군의 반격을 받아 오히려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사이의 옛 국경에 이르는 네게브 지방을 빼앗기고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제2차 중동전쟁 (1956. 10~ 1957. 3) 스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으로 인함

이집트의 민족주의자 나세르 대통령이 영국 프랑스 소유의 수에즈 운하를 점령함으로써 야기된

국제적 위기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영국과 프랑스의 편을 들어

아랍의 군사기지들을 파괴하기 위해 시나이 반도를 공격했다.

이스라엘군은 5일 만에 시나이 반도를, 영국 프랑스 군대는 스에즈 운하지역을 점령하지만

결국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국제연합 긴급군(UNEF)에게 이 지역을 인계하고

1957년 3월 철수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스에즈 운하 소유권을 이집트에 돌려준다.

이 전쟁은 세계의 주도권이 영국 프랑스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옮겨진 것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제3차 중동전쟁 (1967. 6. 5 ~ 10일) 6일 전쟁

제 1차 중동전쟁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을 획득했지만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로 여겨지고 있는 예루살렘의 구(舊) 시가지를 포함한 동 예루살렘은

요르단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구 시가에 있는 '통곡의 벽'에서 유대교의 의식을 올리는 것이 불가능해서 정통파 유대교인을 중심으로 불만이 높아져 있었다.

1967년 5월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에서 정전 감시중이던 국제연합 긴급군(UNEF)을 철수시키는 등,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이스라엘은 국가소멸의 위기감을 느끼고 아랍측보다 먼저 선제공격을 준비중이었다

이런 시기에 시리아 군이 골란고원에서 이스라엘 영내로 포격을 가하자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 공군기가 초저공 비행으로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영내로 침범하여 각국의 공군기지에서 총 410기에 달하는 항공기를 파괴했다.

6일간의 전격작전으로 이스라엘 군은 아랍측으로부터 구 예루살렘 시, 시나이 반도, 가자 지구, 요르단 강 서안, 이스라엘-시리아 국경지대의 골란고원을 빼앗아, 점령지역은 전쟁 전의 4배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그후 2년간 아랍 각국은 명예회복을 위해 소모전을 벌렸지만 성과를 얻지 못하고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사진은 통곡의 벽 앞에선 이스라엘 병사

제4차 중동전쟁 (1973. 10. 6 ~ 25일) 아랍측이 이길 수 있었던 마지막 전쟁

6일전쟁에서 압도적 승리한 이스라엘은 아랍에 대해 방심하게 된다.

이집트 대통령이 된 사다트는 소련과 북한의 군사고문단 지원아래 치밀한 전쟁준비를 한다.

4차 전쟁은 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되고 이락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요르단 리비아 알제리 튀니지 수단 모로코 등 전 아랍국가들이 국지전 또는 전투지원에 참가했으며

북한이 이집트를 도와서 북한 비행사들이 공중전투에 참가했다는 기록도 있다.

1973년 10월 6일 아랍측의 선공으로 4차 중동전쟁이 시작된다.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건너고, 시리아가 골란 고원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해 들어왔는데,

이날은 유대인의 성일(聖日)인 대속죄일(욤키푸르)였기 때문에, 이 전쟁을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 부른다.

아랍군은 과거와는 달리 강력한 공격과 전투력으로 기습해 들어왔고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의 일부를 상실하고 자국 본토까지 침공당할 위험에 놓였다.

4차 전쟁후 이스라엘 영토

(진한 갈색땅에서 연한 갈색까지 확대됨)

 

다행히 미국에서 병기를 지원받는 등, 전선을 재정비하여

반격에 나선 이스라엘 군은 반격에 성공,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수도 카이로 100km앞까지 진격했고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 근처까지 진격하는 상황이 되자

미, 소 강대국의 중재로 휴전한다.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또 다시 지구상에서 없어질 수도 있었던 전쟁이었다.

전쟁 초기 아랍군이 주도권을 잡았던 4차전쟁의 인명 피해를 보면

이스라엘은 2,688명이 전사하고 314명의 이스라엘 병사가 항복했고

아랍측은 19,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며 8,738명이 이스라엘 군에 포로가 되었다.

4차례의 중동전쟁 이후 평화조약

1978년 미국은 이집트, 이스라엘로 부터 평화합의를 이끌어 냈다.

일명 캠프 데이비드 합의에서,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화해 뿐만 아니라 과거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빼앗겼던 시나이 반도(사진의 아랫쪽 연한 갈색지역)를 돌려받는다. 이 공로로 이스라엘 수상 베긴과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림출처 http://blog.daum.net/pds2402/14647310

라. 중동전쟁에 대한 평가(소결론)

이스라엘은 우리나라 경상북도 크기와 비슷하고 인구는 280만 명에 불과했는데

아랍 14개국 1억500만 명과 4차례에 걸쳐 싸워 모두 이겼다.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기에 '하나님께서 구원해 준 기적'인가?

(이 부분은 좀 더 연구가 필요함)

기적이 아니라면, 이스라엘 군대가 아랍 군대보다 강해서인가?

군사전략적 시각으로 판단하면

1,800년 전 로마에 의해 강제로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에게 4차례의 전쟁은 사생결단의 문제였다.

즉 '온 국민이 군대'라는 총력전(總力戰) 체제로,

죽음을 각오한 장병들의 전승의지(戰勝意志)가 4차례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왔다.

십자군전쟁 시대는 걷거나 말타고 원거리 행군하던 시대이기 때문에 공격하는 측이 불리했지만

중동전쟁은 비행기 전차 등의 공격무기와 이동수단 발달로 공자에게 유리한 시대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공자의 이점을 살려 1~3차 전쟁에서 선제공격을 감행, 승리했고,

4차전쟁에서는 기습을 당해 어려움에 처했었다.

반면 이랍측은 이슬람종교국가들의 집합체로서 반(反)이스라엘이라는 명분 아래 일시적으로 뭉쳤을뿐

실제로는 시아파 수니파 등 종파 간에, 각 국가 간에 복잡한 이해관계로 인해 통합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연합작전을 위한 어떤 노력도 없었고 결과적으로 숫적 우세는 무의미했다.

1:N의 싸움에서 다수 쪽이 패배했으니 파문이 크게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아랍국가들은 모두 이슬람의 가치를 최우선으로하는 종교국가들이지만,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분열에 분열으로 이어졌다.

아랍측의 분열 예

리더격이던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자, 리비아와 시리아는 단일국가수립을 선언하며 분열 시작

1980년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 전투가 일어남

1981년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이 이슬람 과격파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아랍측 혼란 가중

2003년 이락이 쿠웨이트를 침범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전쟁을 벌렸으나 미국 등 연합군에 패배.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게 땅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조직하여 테러 수준의 저항을 계속하였지만 외부지원을 못받아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음

4. 「십자군전쟁 ▶ 중동전쟁」 통해 본 세계사 흐름

1:N의 싸움에서 N이 지면 큰 파문이 일어나는 법인데

두 전쟁 모두 N이 졌다.

주된 이유는 십자군전쟁과 중동전쟁에서 다수(N)쪽은 명분에 의한 참전이었을뿐

자신들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사생결단의 의지가 부족했다.

그래서 다수 쪽이 실패했는데 세계사 흐름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가. 십자군전쟁과 중동전쟁의 원인과 영향을 정리하면,

이슬람교가 624년 모함마드에 의해 새로운 종교로 등장하면서 그 세력이 급격히 팽창한다.

638년 유대교 및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이로인해 11세기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다.

십자군 전쟁은 성과없이 끝나지만 그 결과,

1) 기독교는 이슬람교도들에게 폭력단체로 인식되는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2) 유럽은 교황권이 약화되어 종교개혁이 앞당겨지고

3)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문화적 암흑시대에서 인간중심의 르네상스로 이어지고

4) 유럽 각국은 기독교적 가치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기독교국가로서 독립을 유지하며 강국으로 성장한다.

패배했는데도 긍정적인 파문이 더 크게 일어났다!

한편 7세기후반 예루살렘 정복이래로 이 지역에서 무슬림으로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에 동조한 아랍 국가들이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을 반대하면서 중동전쟁을 4차례나 벌렸지만 .

이스라엘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하면서 오히려 영토를 잃고 자중지란(自中之亂 같은 편끼리 싸움)에 빠졌다.

패배한 쪽에 부정적인 파문이 크게 일어났다!

나. 예루살렘의 주인이 바뀌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에게

성지로 여겨지는 곳으로 모두에게 중요한 곳이다.

유대교도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잔해로 남아있는 '통곡의 벽'이 순례의 대상이고

기독교도는,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당하신 '골고다 언덕'으로 가서 예배 드리며

이슬람교도는, 메카 메디아에 이어 3번째 성지인 예루살렘에 '알 아크사 사원'을 지어 예배를 드린다.

예루살렘은 638년 이슬람의 정복으로 1300여년간이나 이슬람 장악 아래 있었다.

그만큼 이슬람 세력이 강력하여 기독교국가들이 피해를 감수하면서 대항할 수 없었던 곳이다.

20세기 들어와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이 세계1차대전을 통해 독일과 함께 세계 제패를 시도했지만 패배하여

1923년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고 조그만 나라들로 분할되면서 이슬람권 세력은 크게 약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패하며 예루살렘 구 시가지를 내어준다.

이스라엘은 '통곡의 벽'이 있는 동 예루살렘을 서 예루살렘과 통합하여 이스라엘 영토로 전환시키고

실효지배 중이며 오늘날까지 '알 아크사 사원'(통곡의 벽'과 인접)의 출입을 감시 통제하고 있다.

11세기 셀죽크 트르크족이 기독교도들의 성지 순례를 통제하듯이

이제는 이스라엘이 무슬림의 성지순례를 통제하게 된 것이다

다. 전쟁을 통해 세계사 흐름이 기독교 쪽으로 흐르고 있음을 알게 한다

십자군전쟁으로도 빼앗지 못했던 예루살렘인데, 중동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이 차지했다.

이처럼 기독교계와 이슬람계 간의 세계의 주도권 다툼도 기독교쪽으로 기울었다.

세계사 속의 기독교:이슬람교간 주요 전쟁결과를 요약하면

1) 732년~ 11세기 : 급팽창하던 이슬람이 프아티에 전투에서 저지당하면서 유럽은 기독교국가로 성장

2) 11~13세기 : 십자군전쟁은 이슬람의 저지로 실패했으나 양대 세력간 균형은 유지

3) 13~19세기 : 기독교국가와 이슬람국가 간 세력 균형 유지

* 예) 오스만제국이 서유럽으로 진출하려다 1571년 레판토 해전(海戰)에서 스페인 및 교황의 연합함대에게

패배하면서 좌절하여 인도 방향으로 진출함.

4) 1923년 : 세계1차대전에서 오스만제국아 패배하여 이슬람 세력은 열세 위치로.

5) 1947~1973년 : 중동전쟁의 패배로 이슬람의 세력은 급속히 쇠락의 길로.

6) 21세기~: 미국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기독교국가들이 절대 강자 위치에.

반면에 이슬람국가들은 서로 반목하며 테러를 통해 저항하는 수준으로 전락!

이러한 세계사 흐름을 보면서 이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고 계신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5. 이 글을 마치며 (미래을 향한 제언)

십자군 전쟁의 패배로 교황권이 약화되면서

유럽의 기독교국가들이 교회권력 귀족 지주 중심의 문화적 암흑시대에서 벗어나

인간중심의 시대를 앞당기게 되었고 계속 번성하여 강국이 되고

또한 초강대국인 미국이 세계 선교를 주도하면서

기독교 세력은 역사이래 가장 강력한 시대를 누리고 있다.

한편 이슬람국가들은 중동전쟁 패한 후 내분이 계속되고 심지어 자기들끼리 전쟁하면서

오늘과 같이 테러와 시리아 난민문제 등으로 세계가 골치를 앓고 있는 지경까지 전락했다.

하지만 유의해야 할 심각한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다.

첫번째 유의해야 할 현상(現狀) :

20세기 과학 발달과 함께 민주주의, 개인주의, 무신론이 퍼지면서

기독교국가들이 기독교적 가치를 모든 가치에 우선하지 못하고 있다.

신심(神心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대신 민심(民心)을 따라 간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터키 의회에서 '미국은 기독교국가도 유대인 국가도 이슬람국가도 아니다'라고 했다.

중세기처럼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이슬람국가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있다.

여전히 이슬람국가에서는 이슬람의 가르침이 모든 것에 우선하고, 종교가 정치 위에 있다.

참고 : 이슬람교도(무슬림)의 자존감은 대단하다

무슬림은, 이슬람교가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며 진리라고 배운다. 세상종교 위에 상위종교라고 믿고 있다.

꾸란에 의거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을 당연시 하고, 성전(지하드)에서 순교를 소망하며 자랑으로 안다.

두번째 유의해야 할 현상 :

세계 4대 종교 분포를 보면(참조 : 세계선교저녈 IBMR)

기독교 24억명 (천주교 12.2 개신교 4.4 정교회 2.7 독립교회 3.7 성공회 1억)

이슬람교 16억명 힌두교 9.8억명 불교 5.1억명

아직은 기독교인구가 많지만, 성장을 멈추고 세계적으로 감소 추세에 있다.

미국의 저명한 여론조사기관 Pew Research Center에 의하면

미국의 기독교 인구(천주고 개신교 등 포함)는 2007년 78.4%에서 2014년 70%로 감소했다 한다.

미국 최대 개신교단 남침례교가 해외선교사 파송을 15% 줄이기로 했다. 경기침체와 교세 위축으로 인한 재정난 극복을 위한 결정이라 한다. (월 스트리트 저녈 2015.10)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기독인구 감소는 없었다.

16C 종교개혁은 기독인구 감소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기본에 더 충실하기 위함이었다.

요즘의 감소추세가 더 심해지기 전에 대책이 필요하다.

한펀 이슬람교도 세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터키, 인도네시아 등 건전하고 견고한 이슬람 국가들이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선교에 열중하고 있으며

유럽과 남미에서 무슬림이 계속 늘어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9.11 테러 이후 위축된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한다.

기독교는 절대 강자적 위치에 있을 때 문제점들을 개선해야 한다.

그러나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 시대가 '기독교적 암흑시대'라는 인식이 없으면

기독교는 쇠락의 길을 내려 간다. 빠르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길을 원하고 계실까?

중세기 문화적 암흑시대을

종교개혁과 인간중심의 르네상스로 벗어났듯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해법이 '종교개혁'인가?

구약성경 시편 83편을 보자

말하기를 가서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그들이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이스라엘을 멸하려고 동맹을 맺는 에돔, 이스마엘인, 모압, 하갈인 등은 오늘의 무슬림이다.

바로 중동전쟁의 모습이다!

이런 전쟁이 앞으로 더욱 큰 규모로 다시 발발할 것이라고 예언되어있다.

셩경에서 최후의 전쟁으로 예언하고 있는 '곡과 마곡의 전쟁' '아마겟돈 전쟁'이다.

언제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 믿음의 눈으로 깨어 지켜보자!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중략) 세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등을 모으더라(요한계시록 16: 14~16)

천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오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요한계시록 20: 7~8) 감사합니다. 글쓴 이 고태영

P.S. '이슬람교 질풍에 맞선 1300년전 위기의 기독교, 푸아티에 전쟁'에 관한 아래 글을 보시면

이슬람에 맞선 기독교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http://blog.daum.net/koting/1580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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