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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竹石館遺集 册二 / 跋 《정암집》 사본 뒤에 쓰다〔書靜菴集寫本後〕

by 晛溪亭 斗井軒 2024.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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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집》 사본 뒤에 쓰다〔書靜菴集寫本後〕

竹石館遺集 册二 / 跋

書《靜菴集》寫本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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榮輔叨守寧邊,到府之三日,謁靜菴先生書院。蓋先生嘗隨其大人監察公於魚川郵館,而時則寒暄先生謫煕川。先生從而受業,卒傳寒暄之學,實爲我東道學之淵源。二州之士慕其德而懷其躅,建祠而俎豆之,煕之兩賢祠、寧之藥峯書院是已。

先生遺文梓行于世,而院無所藏,自弦誦於斯院者,已不知先生爲學、立朝之本末。於是慨然求得漢城知舊家藏本而移寫之。榮輔首寫五版,餘悉分屬於府之人士,士皆樂趨,數旬而訖,遂謹藏于院。

且念本集附記先生祠院者備矣,而寧之院不見焉。蓋院之建以肅廟戊辰,而後二十年丁亥,始賜額,集之成先於建院三年乙丑,此其所以未該也歟。遂牽連書,以備先生祠院掌故云。

聖上二十年丙辰秋,後學寧邊知府達城徐榮輔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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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외람되게 영변(寧邊)의 수재(守宰)가 되어 부임한 지 3일 만에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서원(書院)을 참알(參謁)하였다.

대개 선생이 일찍이 선생의 대인(大人)인 감찰공(監察公)을 수행(隨行)하여 어천(魚川)의 우관(郵館)에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 선생이 희천(煕川)에 유배 중이었다. 그래서 선생이 거기에 나아가 수업(受業)하여 마침내 한훤의 학통을 전함으로써, 실로 우리 동방의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이 되었다. 이에 두 고을의 선비들이 그 덕을 흠모하고 그 자취를 회고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향을 올렸으니, 희천의 양현사(兩賢祠)와 영변의 약봉서원(藥峯書院)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선생의 유문(遺文)이 간행되어 세상에 유행하는데도 서원에 소장된 것이 없어서, 여기에서 글을 읽으며 공부하는 자들 자신이 선생의 학문의 경지와 조정에서 활동한 본말(本末)을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에 개연(慨然)히 한성(漢城)에 있는 지구(知舊)의 가장본(家藏本)을 구해서 옮겨 쓰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맨 먼저 5판(版)을 베껴 쓰고, 나머지는 모두 부내(府內)의 인사에게 나누어 맡겼는데, 그들이 모두 기꺼이 참여하여 수십 일 만에 끝냈으므로, 마침내 서원에 삼가 보관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건대, 본집(本集)의 부록에 선생의 사원(祠院)을 갖추 기록해 놓았는데 그중에 영변의 사원이 보이지 않는 것은, 대개 사원이 숙묘(肅廟) 무진년(1688, 숙종14)에 세워지고 그 뒤 20년이 지나 정해년(1707)에 비로소 사액(賜額)되었는데 반하여, 문집은 사원이 세워지기 3년 전인 을축년(1685)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여기에 미처 수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마침내 이 사실도 함께 써서 선생의 사원에 대한 장고(掌故)의 자료로 제공하는 바이다.

성상(聖上) 20년 병진년(1796, 정조20) 가을에, 후학(後學) 영변지부(寧邊知府) 달성(達城) 서영보(徐榮輔)는 삼가 쓰다.

 

書靜菴書院搢紳禮請帖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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靜菴趙先生寧邊書院刱建也。朝之搢紳大夫相其事。而時則肅廟戊辰也。賢士之多於斯爲盛。榮輔高祖考晩靜公與湖堂諸賢。如西坡吳公,定齋朴公皆與焉。其帖單 尙留於院。撫玩興感。遂謹加裝贉。樻之而藏于院。

정암서원의 〈진신예청첩〉 뒤에 쓰다〔書靜菴書院搢紳禮請帖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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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靜菴) 조 선생(趙先生)의 영변(寧邊) 서원(書院 약봉서원(藥峯書院))을 창건할 적에, 조정의 진신(搢紳) 대부(大夫)들이 그 일을 도왔으니, 때는 숙묘(肅廟) 무진년(1688, 숙종14)이었다.

이때 현사(賢士)들이 많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뤘는데, 나의 고조고(高祖考)인 만정공(晩靜公 서종태(徐宗泰))을 비롯해서, 호당(湖堂 독서당(讀書堂))의 제현(諸賢)인 서파(西坡 오도일(吳道一)) 오공(吳公)과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 박공(朴公) 같은 분이 모두 이 일을 함께하였다. 그 첩단(帖單)이 그대로 서원에 남아 있어서 어루만지며 완상(玩賞)하노라니 감회가 일어나기에, 마침내 삼가 장정(裝幀)하여 궤(樻)에 넣어서 서원에 보관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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