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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贈吏曹參判趙公一軍殉義碑증이조참판조공과일군의순의비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17.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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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兵將山西趙公慶男事蹟碑

의병장산서조공경남사적비

의병장 조헌(趙憲)과 중[僧승려] 의장(義將) 영규(靈圭) 금산(錦山)전지비(戰地碑)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과 중[僧승려] 의장(義將) 영규(靈圭) 등이 금산(錦山)에서 적을 치다가 패하여 죽다. 그 뒤 만력 23년 을미년(1595, 선조 28)에 전지(戰地)에 비를 세우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贈吏曹參判趙公一軍殉義碑

嗚呼。此贈參判趙公殉節地。而麾下同死士。葬其體魄之所也。萬曆壬辰。倭難猝起犯我境。我軍所在輒崩潰。無敢嬰其鋒者。倭遂乘勝長驅。直渡漢水。三京俱不守。乘輿西遷。絶無勤王者。公時在沃川村舍。獨投袂而起。沫血移檄。召募義旅。巡察及守土者競沮撓之。公乃與同志門生全承業金節等。馳往湖右則前參奉李光輪及士子申蘭秀,張德盖,高擎宇,盧應晫等。慕公義爭來會。遂募兵與糧。或造戰械。以七月四日。建旗鼓于公州而提衡。其師凡千有六百。是時倭賊方據淸州。而防禦使李沃軍潰。公進兵淸州。以八月一日直搗城西門。外與僧將靈圭連陣。公親冒矢石。竟日督戰。賊大衄。遂焚其屍宵熸。自是湖左諸屯之賊亦遁。公方簡輕銳。直趨行朝。行至溫陽。而倭之據錦山者復猖獗。將侵軼兩湖。巡察介公同義者請見公。議討錦賊。幕佐亦多謂國家疆域盡爲賊據。只兩湖不中兵。意者天其默相我。以開中興乎。今棄而西上。是無兩湖。必先剪錦倭。絶賊之議後者。然後北行勤王。未晩也。公乃還公州。與巡察議又相迕。蓋起兵之初。公移書貴其擁兵自衛。無意勤王。而抑忠臣義士之氣。巡察嗛之。至是文移列邑。凡應募在公麾下者。囚繫其父母妻子。且下令官軍使不相應援。麾下兵旣集而還散。只有七百義士願從公死生者而已。將以八月十六日。移兵向錦。有一別將。力言賊懲乙卯湖南之敗。今之據錦者。特精銳。數亦數萬。奈何以烏合衆當之。宜按兵觀勢。且俟朝家命令也。公泣誓君父安在。敢言利鈍。主辱臣死。吾知一死而已。遂與靈圭聯兵而進。曾與湖南巡察權慄。約以十八日齊擧夾攻。巡察馳書改期。未到。公已抵錦郡之十里地。以待南師。賊詗而逆之。乘我未陣。分其衆爲三。迭出薄我。公乃下令軍中。今日只有一死。死生進退。毋愧義字。士皆唯命莫敢違。力戰良久。賊三北。僅能軍。而我兵已矢盡。賊遂闌入。帳下士挽公請跳。公笑曰丈夫死耳。不可臨難而苟活也。遂援桴督戰益急。士爭趨死。至張空拳相搏而猶不離次。竟與公俱死。卒無偸生幸免者。賊死亦相當。勢遂挫。收餘兵還陣。哭聲雷震。運其屍三日猶不盡。乃積而焚之。賊遂與茂朱屯賊皆遁。以故湖西南得全而國家賴以有今日。則公雖敗歿。其蔽遮沮遏之功。爲如何哉。公起兵凡數月。未嘗用斧質鞭笞。而士皆用命。所至肅然整而無擾。聞公擧義。遠近趨募。雖被當事者力沮。妻孥繫獄。而亦有愛悅公。不忍捨去者。及聞其敗。巷哭相聞。陣亡之家不致私怨。而惟以公死爲悲。後而不死者。不以得免爲幸。而但以疇依爲恨。湖右人下逮賤隸。皆食素。公德之感人深者可見已。事聞。當寧爲震悼。特贈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春秋館事。錄其子完堵泰陵參奉。月廩其家。嗚呼。此可以觀君臣矣。噫。士方居平大言。及臨小利害。畏避前却者多矣。若公者。前日抗章。言事 屢請朱游之劍。直聲振一時。里居退處而聞難卽奮。首先揭義。雖成敗在天。而矢身以殉。其視嚮所論說。有如執券而讐。要以自靖於心。且國家無文吏臨陳責。而公又時無官守。徒以義起。按兵觀勢。以俟朝命。如或者之云。誰曰不可。而乃提單師抗勍敵。死之而靡悔。豈不烈烈男子哉。公當辛卯倭使之來。輒上 章請 斬其使。以告天朝。其凜色毅辭。直與日月爭光。胡邦衡封事之後。乃見公一疏。而又於天文特精。一日東南有聲如巨雷。公泣謂此乃天鼓。倭衆今必渡海矣。其言果驗。日亦不爽。公非異人而何哉。至斥逆賊姓鄭者疏中。比之羿浞。其後言若燭照龜卜。此則國人之所傳誦者也。其他事行。卓絶震耀。誠不可以莫之傳。而今最其死節一事則有未暇及者云。公之八代祖諱天柱。當紅巾賊之亂。再捷於博州。而兵敗效節於安州。公嘗慷慨擊節。追慕而喜道之。今竟克肖。亦異矣哉。公諱憲。字汝式。重峯其號。丁卯文科。家貧甚。妻子不免飢寒。而奉母甘毳未嘗乏。躬耕以給。而暇則輒對聖賢書。伊吾不絶。非古所謂朝耕夜讀者耶。誦說倫義。必期見之行事。晢於死生。素定於心。故倉卒之際。能卓然自樹立如此。可敬也夫。行朝聞公起兵。賜敎書拜奉常僉正。而公亦不及見。師敗翌日。公弟範冒死入戰所。則公死于旗下而將士皆死其側。範乃負公屍歸沃川。至四日而殯。顔色若生。怒氣勃勃。張目掀髥。人不覺其死已久也。至於從公陣亡七百。蓋皆慕公之烈。得之見聞而激勸者而捐軀恐後。擧一軍盡作忠義之鬼而不辭。非特用兵以來他軍之所未有。徵諸往牒。亦罕聞矣。又就其尤較著者。則參奉李光輪仲任。孝友天植慷慨有節槪。募鄕兵數百。實贊公終始。竟與公 同死。褒贈司憲府執義奉事。任廷式。賦性樸直。且有弓馬才。將斥候在陣外。望見勢急。策馬突進。格殺數倭而死。士人金節。首從義旅。戰功居多。李勵。及故首相鐸之孫也。好學篤行。世其家風。聞公起兵。仗義從之。俱歿於陣。又有萬戶邊繼溫,縣監楊應春,奉事郭自防,武人金巘,金仁男,李養立,鄭元福,姜忠恕,姜仁恕,朴鳳瑞,金希哲,李仁賢,黃三讓,朴春年,韓琦,朴贊。皆以偏裨。或先登摧堅。或殺賊過當。勇烈焯人耳目者也。士人朴士振,金善復,卜應吉,申慶一,徐應時,尹汝翼,金聲遠,朴渾,趙敬男,全忠男,高明遠,姜夢祖。俱以或文或行聞。生遊公門而戰同公死者也。公之子完基。狀貌魁偉。性度邁倫。及敗。故華其冠服。蘄代公死。賊認爲主將而矺其屍。賊旣退。公之門徒朴廷亮,全承業卽往收七百義骨。聚作一塜。廷亮奇士。力行古誼。承業端雅。通經飭行。適自幕下受任出外。不與於難。嘗倡立樂石以示永永。不幸相繼病歿。其同門閔昱。嗜義士也。惜其齎志未就。續而經紀之。與湖西人士及錦山耆老。議以克合。方伯守,宰亦助以贖。鍰石旣具。而進士宋邦祚來謂余。知參判心事者。若而人而皆不在世。敢以屬之子。余獲習參判。當其死事之初。余在行朝。聞而特悲之。相望千里。無因一酹於就義地。以償夙心。今乃屬事比辭。得相玆役。寧敢以不文辭。但衰落之餘。其何以張大其事。慰七百忠魂於九原。而使之瞑目也哉。噫嘻。傷乎傷乎。旣紀之而係以詩。其辭曰。

臣有大綱。授命酬分。志士所程。利害奪之。允蹈者鮮。臨難乃明。侃侃趙公。學期實踐。含忠履貞。昔歲龍蛇。運屬陽九。島夷構兵。金湯失險。莫敢儲胥。直抵漢京。鑾輅西遷。公泣其血。義重身輕。振袂一呼。義旅齊奮。如響赴聲。慷慨枕戈。誓無留陣。覆賊于淸。兇焰孔熾。盤據錦溪。孰剪奔鯨。公激我師。滅此朝食。直前敢攖。血戰逾時。矢盡途窮。桴鼓猶鳴。殺賊過當。以報主恩。雖敗亦贏。殉君胡避。從帥胡恫。烈哉一營。事聞行朝。褒忠錫秩。特軫宸情。人亦有云。有碎而完。有殞而榮。競毁其魄。實全其天。其神上征。騰氣奔音。爲雷爲霆。殷殷轟轟。掃彼攙搶。以扞南紀。疆場載寧。陣雲莽蒼。野鳥哀吟。毅魄同坑。西臺凌雲。震岳在傍。竝表所塋。有來千秋。讀此豐碑。其人若生。

 

증이조참판조공과일군의순의비〔贈吏曹參判趙公一軍殉義碑〕

아! 여기는 증 참판(贈參判) 조공(趙公)이 순절한 땅으로서 부하와 함께 죽은 병사들이 매장된 곳이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 25)에 왜란이 갑자기 일어나니, 우리 땅을 범하였다. 우리 군사가 닿는 곳마다 번번이 붕괴되어 감히 그 칼날을 막는 자가 없었다.

   왜적이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고 마구 몰아서 바로 한강을 건너오니 삼경(三京 한양(漢陽)ㆍ개성(開城)ㆍ평양(平壤))이 모두 지켜지지 못하고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나 근왕(勤王)하는 자가 전혀 없었다. 이때에 공이 옥천(沃川)의 시골집에 있다가 홀로 분연히 일어나서 피를 뿜으며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순찰사와 수령들이 모두 방해하였다. 공이 잉에 동지와 문생인 전승업(全承業)ㆍ김절(金節) 등과 더불어 충청 우도로 달려갔더니 전 참봉 이광륜(李光輪)과 선비 신난수(申蘭壽)ㆍ장덕개(張德盖)ㆍ고경우(高擎宇)ㆍ노응탁(盧應晫) 등이 공의 의기를 사모하여 앞다투어 와서 모였다.

   드디어 군사와 군량을 모집하고 혹은 기계를 주조하여 7월 4일에 공주(公州)에서 기(旗)를 세우니 군사가 1천 7백이었다. 이때에 왜적이 공주를 점령하매 방어사 이옥(李沃)의 군사가 붕궤되었다. 공이 청주(淸州)로 진군하여 8월 1일에 바로 성의 서문 밖을 두드려서 승장(僧將) 영규와 진(陣)을 연합하였다. 공이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종일토록 독전(督戰))하니 적이 크게 패하여 마침내 저들의 송장을 태우고 밤에 달아났다. 이로부터 충청 좌도 여러 둔(屯)의 적이 모두 도망하였다.

   공이 바야흐로 날랜 군사를 가려서 바로 행조(行朝)로 달려가려고 온양(溫陽)까지 이르자, 금산에 있는 왜적이 다시 창궐하여 장차 충청ㆍ전라도를 침범하려 하였다. 순찰사가 공의 동지를 소개로 하여 공을 만나 금산의 적을 치는 것에 대해 의론하자고 청하였다. 부하 장교들도 역시 대부분 말하기를,

   “국가의 땅이 모두 적에게 점령당하고 오직 충청ㆍ전라도만이 침범당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하늘이 우리를 도와서 중흥의 열려 함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버리고 서울로 올라간다면 이것은 충청ㆍ전라도가 없어지는 것이요, 또 먼저 금산의 적을 무찔러서 뒤를 밟을 적을 끊은 뒤에 북으로 가서 근왕하여도 늦지 않다.” 하므로, 공이 이에 공주로 돌아왔더니 순찰사와 뜻이 또 서로 틀어졌다. 대개 의병을 일으킬 처음에 공이 순찰사에게 글을 보내어, 그가 군사를 끼고 스스로 호위하고 근왕하는 데는 뜻이 없어 충신과 의사(義士)의 기운을 누른다고 책하였더니 순찰사가 사감을 품은 것이었다. 이에 이르러 순찰사가 각 고을에 공문을 돌려 무릇 공의 취하에 모집되어 있는 자에 대해 그의 부모와 처자를 잡아 가두고 또 관군에 영을 내려 서로 응원하지 않게 하니, 휘하의 군사가 이미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고 다만 의사 7백 명이 공을 따라 사생을 같이하려는 이가 있을 뿐이었다.

   8월 25일에 군사를 옮겨 금계(錦溪)로 가려 하니 별장(別將) 한 사람이 극력 말리기를, “적이 명종(明宗) 을묘년(1555)에 호남에서 패한 것을 징계하여 지금 금계를 점령한 자는 특히 정예한 부대요 수효도 수만인데, 어찌하여 우리의 오합(烏合)한 군사를 가지고 당적하겠습니까. 마땅히 군사를 멈추고 기회를 보고 또 조정의 명령을 기다립시다.” 하다.

   공이 울면서 맹세하기를, “임금께서 지금 어디 계시건대, 감히 승패를 말하리오.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가 죽어야 하는 것이니 나는 한번 죽음을 알 뿐이다.” 하고, 드디어 영규와 군사를 연합하여 진군하였다. 일찍이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과 27일에 일제히 협공(夾工)하기를 약속하였었는데 권율이 글을 보내어 기일을 변경하였으나, 글이 도착하기 전에 공이 이미 금산군에서 10 리의 거리에 당도하여 전라도 군사를 기다렸다.

   적이 정찰해 알고 맞아 공격하여 우리가 미처 진을 치기 전에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번갈아 나와서 우리에게 대들었다. 공이 이내 군중(軍中)에 영을 내리기를,

   “오늘에는 다만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니, 생사와 진퇴에 있어 의(義) 자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 하니, 군사들이 모두 명을 따라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힘껏 싸운 지 한참 만에 적이 세 번 패하여 겨우 다시 정돈하였는데, 우리 군사는 이미 화살이 다되었다. 적이 드디어 막하로 몰려 들어오자, 군사가 도망가기를 청하였다. 공이 웃으며, “장부가 죽으면 죽었지, 위태로움에 이르러 구차히 살 수는 없다.” 하고 드디어 북채를 들고 독전하기를 더욱 급히 하니, 군사들이 죽음을 각오로 달려들어 맨주먹으로 적을 치면서도 오히려 행오(行伍)를 이탈하지 않고 마침내 공과 함께 죽어서, 삶을 바라고 요행히 면한 자가 없었다. 적도 역시 그만큼 죽어서 세력이 드디어 꺾이자, 남은 군사를 거두어 진중으로 돌아가면서 곡하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고 그 송장을 사흘 동안 운반하여도 오히려 다하지 못하여 이내 쌓아서 불태웠으며, 마침내 무주에 있는 적과 함께 모두 도망하였다.

   그러므로 충청ㆍ전라가 보존되어 국가가 그 덕에 오늘날의 중흥이 있게 되었으니, 공이 비록 패하여 죽었으나, 충청ㆍ전라를 보존하여 왜적을 꺾고 막은 공이 어떻다 하겠는가. 공이 군사를 일으킨 몇 달 동안 일찍이 형벌을 쓴 적이 없었으나, 군사들이 모두 명령에 복종하여 이르는 곳마다 숙연히 정제하여 시끄러움이 없었다. 공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는 멀고 가까운 데서 달려와 모여서, 비록 관에게 극력 방해를 당하여 처자가 옥에 갇혔으면서도 또한 공을 사랑하고 사모하여 차마 버리고 가지 못한 자가 있었다. 그의 패함을 듣자 거리에 곡성이 서로 들리며 전사한 집에서도 사사로운 원망을 하지 않고 오직 공의 죽음을 슬퍼하며, 뒤에 처져서 죽지 아니한 자도 자기의 죽음 면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만 의탁할 데가 없음을 한탄하여서 충청 우도의 사람들은 천한 하인까지도 모두 소식(素食)을 하였으니, 공의 덕이 사람에게 감동됨이 깊었던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일이 위에 알려지자, 임금께서 매우 애도하시어 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의금부 춘추관사로 증직하고 그 아들 완도(完堵)를 태릉 참봉(泰陵參奉)으로 제수하였으며 달마다 집에 곡식을 내렸으니 아! 이로써 군신 관계를 보겠도다. 아! 평상시에는 큰 소리를 하다가 작은 이해에 임해서는 두려워하고 피하여 앞으로 갔다가 물러갔다가 하는 자가 많은데, 공과 같은 이는 전일에 곧은 상소를 올리고 국사(國事)를 말하여 여러 번 주운(朱雲)의 칼을 청하였으니 곧은 말을 한다는 명성이 일시에 진동하였고, 한가히 물러나 처하다가 국난을 듣고는 곧 분발하여 먼저 의병의 깃발을 날려 비록 성패가 하늘에 달려 있어 몸에 화살을 맞고 순국하였으니, 그가 전날 말한 바와 맞추어 보매 부절(符節)이 합한 듯 스스로 마음에 편안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또 국가에 문관으로서 전쟁에 달려가야 할 책임이 없고 공은 또 당시에는 관직도 없었는데도 한갓 의로써 일어났으니, 군사를 멈추고 기회를 보아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린다 하더라도 누군들 불가하다 하리오마는,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강한 적에게 항거하여 죽어서 후회가 없었으니 어찌 열렬한 남자가 아니랴.

   공이 신묘년(1591, 선조 24)에 왜적의 사신이 왔을 때에 문득 조정에 글을 올려 그 사신을 베어 천조(天朝)에 보고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늠름한 기색과 의연한 말이 바로 해나 달과 더불어 빛을 다투었으니, 호방형(胡邦衡)의 봉사(封事) 뒤로 공의 한 장의 상소를 보겠다. 또 천문에 특히 밝아서 하루는 동남쪽에서 큰 우레 같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공이 울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천고(天鼓)라는 것이니, 왜적이 이제 반드시 바다를 건널 것이다.” 하였다. 그 말이 과연 증험되어 날짜도 틀리지 않았으니, 공은 이인(異人)이 아니고 무엇인고. 역적 정(鄭)가를 배척하면서 예(羿)와 착(浞)에게 비하였는데 그 뒤에 그 말이 마치 촛불로 비추고 거북으로 점친 것 같았으니, 이것은 사람마다 전해 외우는 바이다.

   기타 사적과 행실이 탁월하고 빛나는 것도 진실로 전하지 아니할 수 없지마는, 이제 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한 가지 일은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이다. 공의 8대조 휘(諱) 천성(天性)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당하여 박주(博州)에서 두 번 이기고 안주(安州)에서 패하여 순국하였는데, 공이 일찍이 그 조상의 충절에 강개하여 탄복하고 추모하며 칭도하기를 좋아하더니 지금 마침내 능히 닮았으니, 또한 기이하도다. 공의 휘는 헌(憲)이요, 자는 여식(汝式)이요, 호는 중봉(重峯)이다. 정묘년(1567, 명종 22)에 문과에 올랐다. 집이 가난하여 처자는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였으나 모친을 봉양하는 데는 맛난 음식과 따뜻한 옷이 부족함이 없게 하였고, 몸소 밭 갈아 끼니를 대면서도 여가에는 항시 성현의 글을 대하여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아니하였으니, 옛날에 이른바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글 읽은 것이 아닌가.

   인륜과 의리를 외우고 말하여 반드시 행사에 나타나기를 기약하였고, 생사에 분명하여 본래 마음에 정한 까닭에 창졸의 즈음에 능히 우뚝하게 스스로 성취함이 이와 같으니, 가히 공경할 만하도다. 행조에서 공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을 듣고 교서를 내려 봉상시 첨정(奉尙寺僉正)을 제수하였으나, 공이 또한 미처 보지 못하였다. 군사가 패한 이튿날에 공의 아우 조범(趙範)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지에 들어가니, 공은 기(旗) 밑에서 죽었고 장수와 군사들은 모두 그 옆에 죽어 있었다. 조범이 곧 공의 시체를 지고 옥천으로 돌아와서 4일 만에 빈(殯)하였는데, 안색이 살아 있는 듯하여서 성낸 기운이 발발(勃勃)하여 눈을 부릅뜨고 수염이 흐늘거리므로 사람들이 그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된 줄을 몰랐다. 공을 따라 전사한 7백 명은 대개 공의 열렬함을 사모하여 듣고 보면서 격동된 자들로서 몸을 버리는 데 뒤질까 두려워하여 온 군사가 모두 충의의 귀신이 되기를 사양하지 않았으니, 특히 이번 전란 이래로 다른 군중에서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옛 역사에 상고 하여 보아도 또한 듣기 드문 바이다.

   또 그 중에 더욱 드러난 이로 참봉 이광륜 중임(仲任)은 효도와 우애가 타고났으며 강개히 절개가 있어 향병(鄕兵) 수백을 모집하여 실로 시종일관 공을 돕다가 마침내 죽음을 함께 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되었다. 봉사 임정식(任廷式)은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한데다가 활 쏘고 말 타는 재주가 있어서 척후병을 거느리고 진(陣) 밖에 있다가 형세가 급한 것을 바라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돌진하여 왜놈 두엇을 쳐 죽이고 죽었다. 선비 김절(金節)은 의병을 모집하는 데 맨 먼저 따라서 전공이 많았다. 이려(李勵)는 바로 고(故) 수상(首相) 이탁(李鐸)의 손자로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이 돈독하였으며, 그의 가풍을 계승하더니 공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을 듣고 의기로 따라왔다가 진중에서 함께 죽었다.

   또 만호(萬戶) 변계온(邊繼溫), 현감 양응춘(楊應春), 봉사 곽자방(郭自防), 무인(武人) 김헌(金獻)ㆍ김인남(金仁男)ㆍ이양립(李養立)ㆍ정원복(鄭元福)ㆍ강충서(姜忠恕)ㆍ박봉서(朴鳳瑞)ㆍ김희철(金希哲)ㆍ이인현(李仁賢)ㆍ황삼양(黃三讓)ㆍ박춘년(朴春年)ㆍ한기(韓琦)ㆍ박찬(朴贊)은 모두 편비(偏裨)로서 혹은 선등(先登)하여 견고한 적을 꺾고 혹은 적을 죽이기를 많이 하여 용맹과 열렬함이 남의 이목에 빛난 자들이다. 선비 박사진(朴士振)ㆍ김선복(金善復)ㆍ복응길(卜應吉)ㆍ신경일(辛慶一)ㆍ서득시(徐得時)ㆍ윤여익(尹汝翼)ㆍ김성원(金聲遠)ㆍ박혼(朴渾)ㆍ조경남(趙慶男)ㆍ고명원(高明遠)ㆍ강몽조(姜夢祖)는 모두 혹은 문학으로 혹은 행실로 알려진 이들인데, 살아서는 공의 문하에 출입하였다가 전장에서 공과 죽음을 같이한 자들이다. 공의 아들 완기(完基)는 씩씩한 용모에 체격이 듬직하였으며 성질이 남보다 뛰어났었는데, 군사가 패하자 일부러 그 의관을 화려하게 하여 공의 죽음을 대신하려 하니 적이 대장인 줄 알고 그 시체를 부숴버렸다.

   적이 이미 물러가자, 공의 문도(門徒) 박정량(朴廷亮)ㆍ전승업(全承業)이 곧 가서 7백 의골(義骨)을 수습하여 모아 한 무덤을 만들었다. 정량은 기특한 선비라 옛 도리를 힘써 행하고 승업은 단아하여 경학(經學)에 통하고 행실을 다듬었는데, 공의 막하에 있다가 마침 임무를 받아 밖에 나갔었기 때문에 난에서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비석을 세워서 영원히 전하기를 선창하였더니 불행히 연달아 병들어 죽었다. 동문(同門) 민욱(閔昱)은 의를 즐기는 자라, 그들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겨 그 뜻을 이어 경영하여 충청도 선비들 및 금산의 기로(耆老)들과 의론이 합하였다.

   방백(方伯)과 수령들이 또한 비용을 보조하여 돌을 다듬기를 이미 마치자, 진사 송방조(宋邦祚)가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참판 조헌의 마음과 일을 아는 이가 몇 분인데 모두 세상에 살아 있지 아니하니 감히 자네에게 부탁하네.” 하였다. 내가 참판을 잘 알았는데 그가 순국한 초기 내가 행조에 있다가 듣고 특히 슬퍼하였다. 그러나 천 리에 서로 바라보면서 순국한 그 자리에 술 한 잔을 부어서 예전 마음을 풀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 글을 짓고 사적을 적어서 이 일을 돕게 되었으니 어찌 글이 훌륭하지 못하다는 핑계로 사양하리오마는, 다만 노쇠한 나머지에 어찌 능히 그 사적을 빛나게 써서 땅 밑에 7백의 충혼을 위로하여 그들로 하여금 눈을 감게 할 수 있으랴. 아! 상심된다. 일을 기록하고 시를 지어 끝에 부치노라, 하고, 그 시에,

臣有大綱신하는 큰 강이 있으니 / 授命酬分목숨을 바쳐 직분을 갚음은 / 志士所程지사의 당연함이건만 / 利害奪之이해가 그것을 빼앗아 / 允蹈者鮮진실로 실천한 이가 적으니 / 臨難乃明난에 임해서야 나타나네 / 侃侃趙公강직한 조공은 / 學旣踐實학문이 이미 실천되어 / 合忠履貞충성에 합하고 바른 것을 밟았네 / 昔歲龍蛇전년 용사의 해가 / 連屬陽九운이 양구를 당하여 / 島夷構兵섬 오랑캐가 침범하였네 / 金湯失險금탕이 험함을 잃어 / 莫敢儲胥감히 막아내는 이 없어 / 直抵漢京바로 한경에 처들어 왔네 / 鑾輅西遷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파천하매 / 公泣其血공이 피눈물을 흘리니 / 義重身輕의는 중하고 몸은 가벼웠네 / 振袂一呼팔을 걷고 한 번 외치매 / 義旅齊奮의병들이 일제히 분발하여 / 如響赴聲소리에 메아리가 따르듯 하였네 / 慷慨枕戈강개히 창을 베고 자면서 / 誓無留陣군사를 멈춤이 없이 / 覆賊于淸청주에서 적을 멸하기로 맹세하였네 / 兇焰孔熾흉한 기세가 심히 치성하여 / 盤據錦溪금계를 차지하였는데 / 孰剪奔鯨누가 그 고래를 잡아 죽일꼬 / 公激我師공은 우리 군사에게 / 滅此朝食이 놈들을 멸한 뒤에 조반을 먹자고 맹세하고 / 直前敢攖바로 나아가 감히 공격했네 / 血戰逾時혈전하기 한참 만에 / 矢盡途窮화살은 다되었으나 / 枸鼓猶鳴북소리는 오히려 울렸네 / 殺賊過當적을 많이 죽여서 / 以報主恩임금의 은혜를 갚았으니 / 雖敗亦嬴비록 패했으나 오히려 이긴 것이네 / 殉君胡避임금 위해 죽는데 어찌 피하며 / 從師胡惘장수 따르는데 어찌 두려워하랴 / 烈哉一營열렬하다! 한 군영이여! / 事聞行朝일이 행조에 알려지자 / 褒忠錫秩충의를 표창하고 벼슬을 내려 / 特軫震情특별히 임금의 정을 표시하셨네 / 人亦有言옛사람이 말하기를 / 有碎而完부서져서 완전함이 있고 / 有殞而榮떨어질수록 꽃이 핌이 있다고 하였네 / 竟毁其魄마침내 그 몸은 죽었으나 / 實全其天실로 그 천성을 온전히 하여 / 其神上征그 신령이 위로 올라가리 / 騰氣犇音끓어오르는 기운과 울려 퍼지는 소리가 / 爲雷爲霆우레가 되고 벼락이 되어 / 殷殷轟轟우루루 쿵쾅쿵쾅 / 掃彼欃槍저 요망한 기운을 소탕하여 / 以桿南紀남방의 기강을 지키니 / 彊塲載寧국토가 편안케 되었네 / 陣雲莾蒼진 터의 구름은 아득하고 / 野鳥哀吟들새는 슬피 우는데 / 毅魄同坑충의의 넋이 한 구덩에 묻혔구나 / 西臺陵雲서대는 구름에 솟고 / 震岳在傍진악이 옆에 있어 / 幷表厥塋아울러 이 무덤을 표시하누나 / 有來千秋오는 천추에 / 讀此豐碑이 큰 비를 읽으면 / 其人若生그 사람들이 살아 있는 듯하리라 /

하였으니,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가 지었다. 그 뒤 권필(權鞸)의 시에,

幾折雲臺檻몇 번이나 운대의 난간을 꺾었으며 長吟楚水醒초수에서 깨어 있음을 읊었으니 從知大君子종래로 큰 군자는 不處小朝廷작은 조정에 처하지 않음을 알겠네 直氣斬天地곧은 기운은 천지를 베고 孤忠炳日星외로운 충성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崔嵬錦山色높디높은 금산의 빛은 萬古只摩靑만고에 이렇듯 푸르네

하였으니, 중봉을 위해 지은 것이다.

 

 

贈吏曹參判趙公一軍중봉조헌순의시(重峰趙憲殉義詩)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의 시

권필(權鞸)의 시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憲先生一軍殉義碑)’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시(重峰趙憲先生一軍殉義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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