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申單券譜序
갑신단권보서(甲申單券譜序)
조씨(趙氏)는 본래 한양(漢陽)의 명망있는 종족(宗族)이다. 어느 대(代)에서부터 일어났는지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8세조(8世祖)에 지수(之壽)라는 이가 있어 총관(摠管) 휘(暉)를 낳았으며 그가 휘(諱) 양기(良琪)를 낳았는데 양기가 나이 十三歲 때에 아버님의 벼슬을 물려받아 총관이 되었다. 충렬왕 7년(一二七七)에 원 세조(元 世祖)가 천하를 통일 하였는데도 왜(倭)만 홀로 복종하지 않으므로 이에 도원수(都元帥) 흔독다구(忻篤茶丘)에게 명하여 몽고, 중국, 고려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일본을 정복하게 되었다. 고려왕은 총관과 김방경(金方慶)을 시켜 각각 본국의 병사를 이끌고 정벌하는데 따라가게 하였으나 조정의논이 “총관은 아직 어리고 약하여 대병을 거느리고 원정할 수 없다”하므로 총관(摠管)이 꿇어 앉아 왕과 원수(元帥)에게 아뢰기를
“기(琪)가 비록 연소하나 이미 습작(襲爵)하여 부귀를 누리고 있으면서 어찌 이제 전란(戰亂)을 피하겠나이까! 만약 나를 유약(幼弱)다하면 청컨대 군문(軍門)에서 싸워서 잘하고 못함을 시험해 보겠습니다.”하였더니 왕과 원수가 크게 기특히 여겨 그대로 군사를 거느리고 따라가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원수(元帥)는 크게 패하였으나, 총관과 김방경은 함께 적을 이기고 군사를 보전하여 돌아왔음으로 원제(원제)가 기특히 여겨 옥대(玉帶)와 금포(錦袍)를 하사(下賜)하면서 이르기를 “그대는 아직 장가도 들지 않았는데 나는 그대의 공을 아름다이 여기노라. 이 옷을 입고 동으로 돌아가 착한 아내에게 장가들고 아름다운 자손을 낳아 대대로 나의 자손에게 힘쓸 것을 그대가 오늘날 나를 섬기듯 하라”하였다.
그 후 동으로 돌아와 박씨(朴氏)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으니, 림(琳)은 용천부원군(龍川府院君)이고 돈(暾)은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이라. 돈(暾)은 네 아들을 낳았으니 인벽(仁璧)은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이며, 시호(諡號)는 양열공(襄烈公)이고, 인경(仁瓊)은 검찬성(檢贊成)이고, 인규(仁珪)는 한성윤(漢城尹)이고, 인옥(仁沃)은 개국일등훈(開國一等勳)으로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지고 시호(諡號)는 충정(忠靖)이라 하였으며 태조묘정(太祖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용성(龍城)은 양열(襄烈)을 거느리고 등주(登州)등 12성(十二城)을 회복하였으니 즉, 지금의 안변(安邊)이북의 모든 고을이다. 또한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과 더불어 서쪽지방까지 회복하였으니 백년동안 침범당했던 강토가 하루 아침에 다 수복(收復)되었다.
양열(襄烈)은 다섯아들이 있었으니, 온(溫)은 개국(開國), 정사(定社), 좌명(佐命)공신으로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이고, 시호는 양절(良節)이니 이이가 나의 증조부이고, 연(涓)은 좌명(佐命)공신으로 우의정(右議政)이며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이고 시호는 양경(良敬)이라하고, 후(候)는 지돈령(知敦寧)이며, 사(師)는 중추원사(中樞院事)이고, 부(傅)는 동지돈령(同知敦寧)이라. 양절(良節)은 다섯아들을 낳았는데 의(儀)는 첨지(僉知)이고, 완(琓)은 자헌(資憲)이고, 하(河)는 별장(別將)이고, 흥(興)은 부사(府使)이고, 육(育)은 고사(庫使)이니 이이가 나의 조부(祖父)이다. 한평(漢平)은 네아들이 있으니, 모(慕)는 총제(摠制)이고, 자(慈)는 돈녕(敦寧)이고, 혜(惠)는 숭정(崇政)이고, 련(憐)은 동지돈령(同知敦寧)이다.
나의 선친은 휘(諱)가 충손(衷孫)으로 일찍이 가승(家乘)을 닦을 일에 뜻을 두어 매양 문중의 장로(長老)인 호참공(戶參公) 욱생(旭生)과 대사성(大司成) 강로(姜老,양열공의 사위 황길원의 외손자)와 집의(執義)민(岷)과 더불어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그 소첩(小牒)에 손수 적었었는데, 나는 비록 어린 나이로 옆에서 지켜보았으나 바야흐로 과거공부에 열중하고 부터는 이 가첩(家牒)에는 마음을 두지 못하였고,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출근(卯簿)하기에 분주하여 가보(家譜)를 닦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또한 갑자년(甲子年,1504 연산군十一年)난리에는 외지로 귀양을 갔었고, 조금있다가는 집을 뜯기는 화(禍)까지 입으므로 문중의 소중한 원고인 소첩(小牒)도 거의 흩어져 잃어 버렸다. 지금 나이 칠십(稀年)이 가까웠는데 매양 선군자(先君子)의 손수 적던 것을 생각하면서 가져가지 못하고 흩어져 잃어버린 것을 절실히 탄식하는 바이다. 말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조상의 아름다운 업적을 전(傳)하는 것을 반드시 먼저하고, 그 번성함을 전하는 것은 뒤로하라”하였는데 나는 이에 위로는 조상의 행실과 업적이 인몰(湮沒)할 것을 뒤로하고, 아래로는 백명 천명으로 셀 수 있는 후손들이 혹여 그 부리와 근원의 나온 바를 알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삼사 어렸을때의 듣고 본 것을 근본삼아 사방으로 널리 찾고 물어 대강을 만들고 요항(要項)을 기입하여 한질을 엮어 만들었는데 득성질(得姓姪) 함창수령(咸昌守令) 세정(世楨)에게 빠진 것을 보충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간행(壽梓)하여 전하게 하였다. 한편으로 나는 생각컨대, 대대로 족보(族譜)가 있는 것은 크게는 한 나라에 관계되며, 작게는 한 가정에 관계되므로 대를 이어 온나라와 대대로 벼슬하는 집은 대대로 각각 족보가 있으니 집에 족보가 있는 것은 나라에 전적(典籍)이 있는 것과 같다. 만약 전적을 갖추지 못한다면 나라라 할 수 없으며, 갖추어 있더라도 충실하지 못하면 그 폐단은 진실로 더욱 심할 것이다. 생각건대 집에서도 또한 마찬가지로 문족의 성쇠로서 자손이 착하고 그렇치 않음을 알 수 있으며 족보가 있고 없는 것도 마찬가지 관계가 되는 것이다. 옛적 성현(聖賢)의 세상에 모범이 될만한 시설이 중고(中古)에 이르러서 모두 폐지 되였으며, 후세의 선비들이 혹 일어나 힘써 정돈하여 다행히 그 남긴 뜻을 잃어버리지 않는 자도 있었으니 대개 종법(宗法)의 제도가 없어지면서부터 족보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이것이 비록 옛 제도와 비슷(伯仲)하다 할 수는 없을 것이나 요컨대 이것도 또한 삼조(夏,殷,周나라 三朝)때의 법(餼羊:제사에 날것의 양고기를 바치던 옛법)이므로 후세에 있어 그 없어지지 않았던 뜻을 인연하여 다시 그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그 누가 예측할 수 있단 말인가?
수(隋), 당(唐) 이전은 보국(譜局)을 두어 찬술(撰述), 혼인(婚姻), 선거(選擧)를 맡았으므로 보첩(譜牒)을 바탕 삼았었는데, 세보(世譜)를 만들지 않고부터는 보국(譜局)도 두지 않았으니 족보를 만드는 자들이 간혹 망녕됨을 무릅쓰고 억지로 갖다가 붙여 영화롭고 귀함을 흠모하고 한미함을 숨김으로 군자는 이를 믿지 않았으며 진실한 자도 아울러 의심을 받게 되었다. 무릇 족보는 장래에 전해가면서 믿게 하려는 것인데 도리어 의심하게 되면 그 폐단은 족보가 없는 것보다 더 심할 것이다. 옛사람 순현행(荀玄行)이 문헌을 지을 때에 곽승도(郭崇韜)가 분양(郭汾陽)의 묘에 절한 일을 적지 않았으므로 그가 의리를 본래부터 잘 지켰다고 칭찬하였으니 군자의 행신하는 것은 마땅히 가려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집에는 진실로 족보가 없어서는 않될 것으로 생각하며, 진실을 상고하는 것보다 더 긴요한 것이 없으니 만약 족보가 없더라도 자신이 나온 곳을 안다 하더라도 후세에 많은 자손들이 자립하지 못하는 자는 자기가 명현의 자손임을 알지 못하므로 스스로 그 몸가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며 남들도 또한 천대하고 조상에게 욕이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경백(慶伯)이 사환으로 내려 앉는 것과 숙향(叔向)이 진(晋)나라를 위하여 근심하듯이 하지 않는 자가 드물다.
하물며 만물은 하늘에 근본하였고 사람은 조상에서 근본하였으니 세상에 많은 성씨(姓氏)중에서 나와 같은 성씨를 찾으며 우리 종족 수천명으로부터 한 사람에게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더욱 멀수록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족보에 함께 실려 있는 자는 위로는 근원의 나온 곳을 알 수 있고, 아래로는 파계(派系)의 갈려져 나간 것을 알게 되어 아무리 오래되어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즉, 내가 소자출(所自出)을 존중하여 무궁한 장래까지 인도(引導)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한갓 그 이름만으로써 설제를 힘쓰지 않으면 소위 부자형제에게도 또한 후하게 할 줄 모를 것인데, 하물며 대수도 멀어지고 수천명으로 많아 졌을 때 가르켜 말하기를 “아무개가 조상이 되며, 아무개가 조상에서 나왔다”하더라도 누가 따라 믿을 것이며, 누가 따라 후하게 대우하겠는가! 그리고 문중사업은 반드시 창시한 자가 있은 후에야만 이것을 발전할 수 있고 잘 지켜야만 이어갈 수 있고 유지하면서 진흥하여야만 오래 갈 수 있는 것이니 후세의 많은 자손들에게 이 족보만 보면 조종(祖宗)의 이름, 계통, 행실, 업적을 상고하여 알 수 있으며 이 족보에 의거하여 선조님들의 유훈을 지킬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백숙곤계(伯叔昆季)가 다 우리 조상의 소자출을 알게 되면 그 정은 반드시 친근하여질 것이며 그 의리도 잊지 못하리라. 비록 그 근친간이 아니므로 복을 입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쁠때 경축함과 상사(喪事) 때 조문하는 일들은 절로 안할 수 없는 것이니 무릇 수천명의 동족이 한사람의 몸에서 시작된 것이므로 그 은혜를 잊을 수 없으며 그 이름과 행적도 또한 몰라서는 않될 것이다. 그 이름을 알고 그 소자출을 생각하여 내 조상의 훈업(勳業)을 밝히고 명망과 지위가 높고 무거웠음을 우러러 사모하면 어찌 한갓 효제(孝悌)할 마음이 구름 일 듯이 우러러 나올뿐이리오! 그 가업을 보존하려는 자도 또한 조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자손들이 의지하여 전하는 바로서 어찌 조상이 자손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겠는가?
예전에 범문정공(范文正公)이 자제에게 이르기를 “나의 종족이 매우 많으니 나와는 진실로 멀고 가까운 이(親疎)가 있으나 나의 조종(祖宗)이 볼 때는 다 같은 자손으로 멀고 가까움이 없다”하였으니 내가 이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도 또한 뿌리와 물의 근원을 생각하는 뜻으로 또한 문정공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족보를 엮을 때에는 양렬공(襄烈公)이하로는 자세히 하면서 용성군(龍城君)이상은 간락히 한 것은 한갓 그 알지 못함을 뺏을 뿐아니라 옛날 성현의 말씀에 “조상이 남긴 은혜는 5대에 그치고 복제(服制)를 마련하는데는 4대로 한정한다”하였으니 마음은 비록 무궁하나 예(禮)는 지나칠 수가 없다. 하물며 친족은 아들에게서 비롯하였으며 조상은 현손(玄孫)에서 마치는 것이니 구양씨(歐陽氏)의 5세와 소씨(蘇氏)의 6세도 또한 이것을 따른 것이다.
살펴 보건대 조씨의 조상에는 왕씨(汪氏)의 네가지 의심나는 일과 한가지 이상한 점 같은 것은 없으며(趙之先無汪氏四疑一異之辨),
1)총관공(摠管公)이라는 이가 있어 나이 20(十四世)도 못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이겼으므로 특히 황제가 내려주는 상을 받았고 이름이 천하에 떨쳤으니 고금(古今)에 드문 일이며,
2)용성군(龍城君)과 용원군(龍源君)이 전조(前朝)에 있어 모두 나라의 근심을 없애고 강토를 회복한 공이 있으며,
3)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충정공(忠靖公), 양절공(良節公), 양경공(良敬公)이 모두 나라의 원훈(元勳)이 되었고, 충정공(忠靖公)은 선왕의 묘정(太祖廟廷)에 배향까지 되었다.
4)양절공.양경공은 효성과 청렴과 충성과 정성스럼으로서 모두 훌륭한 시호를 얻었으며, 양절공은 세가지 큰 공(開國定社佐命)을 세웠는데 다 의리에 맞았고 훈공으로 얻은 것은 모두 여러 궁족(窮族)에게 나눠 주면서 집은 초가 두어칸으로 말을 돌릴만 한 곳도 없었으며 다른 맛나는 음식도 없었고 요를 포개놓고 앉지도 않아 나이 거의 팔십인데도 시종 한결같이 하였으니 이것이 우리 집에서 대대로 지키는 업이다.
나의 선대부에 이르러 일찍이 대과(龍榜)에 올라 공(功)은 사문(斯文)에 무거웠으나 벼슬은 덕에 맞지를 않았으며 그 효성과 청렴하기는 양절공에게 못지 않았었다. 일찍이 여러 자제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관복을 입으면서부터 비록 양절공의 뜻을 사모하였으나 급히 다가온 고질(痼疾:단종폐위사건)로 인하여 뜻이 있으면서도 펴지 못하였다. 우리 문호의 여러 자제로서 능히 자립하지 못하는 자는 어쩔 수 없거니와 만약 우뚝하게 서 있으면서도 혹 양절공의 뜻을 저버린 자가 있으면 내가 비록 구천(九泉) 아래에 가 있을 지라도 마땅히 말없는 가운데 벌을 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돌아 보건데, 족보를 믿고 닦은 바이며 그 밖에 높은 벼슬(貂璫)로 귀하고 드러난 자를 쉽게 다 닦지 못하였으니, 후일에 여러 집안과 동족들이 선대의 업을 이을 뜻이 있는자는 오늘날 노부(老父)가 한 말을 늙은이의 망령된 말로 돌리지 말고 그 아름다움을 계승할 것을 생각하고 계속하여 변치말고 마땅히 이 족보를 살펴 보면서 제각기 힘쓸 지어다.
가정(嘉靖)삼년(三年,一五二四:中宗十九年)갑신정월일(甲申丁月日)한양후손(漢陽後孫)자헌대부지중추부사(資憲大夫知中樞府事)원기(元紀)이지(理之)는 서(序)하다.
※조원기(趙元紀)
1457(세조 3)∼1533(중종 2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고사공파. 자는 이지(理之), 호는 돈후재(敦厚齋). 정랑 충손(衷孫)의 아들이며, 광조(光祖)의 숙부이다. 9세 때에 장기를 두고 놀이에만 치중하자 그의 어머니가 한탄하는 말을 듣고 반성한 뒤 학문에 정진하여 1483년(성종 14)사마시를 거쳐, 1496년(연산군 2)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정언·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사관(史官)으로 재직중 임금이 생존시에는 아무도 열람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사초(史草)를 연산군이 보고자 제출을 명하였으나 이에 불응하여 파직되었고, 곧 복직되어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이 되었다. 그러나 1504년에 전자의 사초관계로 다시 횡성으로 유배되었고,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사성이 되었다. 그는 목민(牧民)하는 데 자상하고 무관의 일도 잘 아는 까닭에 경원부사로 나갔는데, 그곳에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그 공으로 대사간에 승진되었고, 이어 좌부승지로 재직중 청백리에 녹선되고 이어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515년(중종 10)에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 대사헌·이조참판을 역임하고, 형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을 지냈다. 1523년 명나라 황태후가 상을 당하매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1526년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의 조카 광조의 명성이 지나치게 높아 그는 심히 근심하며 편지를 보내어 경계하였다.저서로는 《돈후재유고惇厚齋遺稿》가 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늦은 나이(40세)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조원기는 연산군의 史草열람을 반대하다 벼슬에서 쫓겨나 강원도 횡성에서 귀양을 살았습니다. 중종반정 이후 재차 조정에 나간 조 원기는 경원부사로 있으면서 선치수령으로 이름이 높았고, 재상의 반열에 오른 후에도 비바람 피할정도의 초가에서 살면서도, 신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아 모든 백성이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생질 홍 언필(후일 영의정)과 조카 조 광조(후일 영의정 추증)가 있었는데 어느해 홍언필이 좌천되어 좋지 않은 자리로 나가게 되자 벼슬에 대한 충고를 잊지 않았습니다.
“네가 탐탁지 않은 한직으로 옮긴 것은 네게는 실로 좋은 일이다. 좋다는 자리에 오래 있으면 사람들의 원망이 쌓이게 되니 어찌 그것이 좋겠느냐? 호랑이를 탔다가 내리기를 잘하는 것이 예로부터 어렵다 하였거늘 항차 한가하고 아담한 직책이야 자신에게 더 좋은 것이 아니겠느냐?”
또한 조카 조 광조에게도 경계하며 살아가기를 숙부로서 당부하길
“세상일에는 기쁜 일에도 항시 근심이 따르는 법이다. 좋은 벼슬에 있더라도 늘 행동을 삼가고 위태한 말과 교만으로 제 몸을 해치고 실패할 것을 경계하여라.------ 마땅히 재주는 숨기고 모난 것은 둥글게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가 닥칠 것이니 매사에 신중하고 경솔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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