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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4현의 꿈과 한 서린 ‘사은정’ 창건 500년을 맞다!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18.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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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隱亭記●

=丁範祖=

 

四隱亭者。文正公靜菴趙先生講道之所也。亭在駒城之治南翠鳳,寶蓋兩山中。有峭壁層巖。淸川曲水之勝。亭名以四隱。耕於隱。採於隱。釣於隱。游於隱。先生之寓隱而樂者也。當中廟御極。則側席求賢。勵精圖治。有大有爲之志。而先生以直道正學。遭遇聖辟。訏謨日贊。以挽回三古爲己任。顧奚暇四隱之爲樂哉。自古。聖賢出處顯晦。何常之有。亦隨時揭厲。適於義而已。故伊尹以阿衡之重而告歸。周公以叔父之親而明農。先生雖身處帷幄。志存經濟。而遐擧之想。未嘗一日忘邱壑。而況陰陽迭消。理亂相乘。群奸傍伺。駭機之發。迫在朝夕。以先生卓識明智。豈不思奉身而退。不俟終日。而感激主知。眷顧宗祊。有低徊未忍訣者。而北門之禍作矣。先生有道義友三人。陰崖李公,宗人方隱,晦谷兄弟二公。是已。先生休沐之暇。與三君子者。講明經旨於四隱亭中。甚相樂也。先生旣受禍。晦谷公以力救士流。亦及焉。悲夫。隱而在下。非君子之願。而與其朝躋顯要。夕陷坎穽。寧隱約以保身。故易曰。天地閉而賢人隱。又曰。遯世而無悶。使先生不得優遊卒歲。以遂隱居之樂。而興受禍敗。爲世所悲者。豈氣數世運使然歟。先生之卒。已歷三百有餘年。而亭亦隨廢。先生之九世孫國仁。悲年代之寢遠。悼先基之永墜。迺與三君子之子孫。合議而重創之。亭旣成。屬範祖爲記。夫進而致澤君民。一變世道。退而讀書講學。樂而忘憂。是二者。先生之志。而卒之有遺恨焉。爲先生之子孫者。率德遵敎。在家在邦。各盡其義。以克成先生未卒之志者。蓋亦先生之有望於子孫者。勉之哉。謹書其語。爲四隱亭記。

 

 

●重修四隱亭記●

=閔鍾顯=

 

隱居以求其志。行義以達其道。斯聖人之論出處也。然間有道未及行而厄於時。身未及隱而罹於禍。若本朝己卯諸賢所値。可謂悲夫。方北門禍作。一時諸賢。騈首就戮。其或幸而得免。亦且流離顚沛。以沒其世。如巖霜一下。百卉不榮。使斯民不復見三代之盛。而志士仁人。齎恨於無窮。若是者。天也。或者。以諸賢名太高。進太早。發太銳。恨未能蓄德用晦。俟時而見。夫豈以諸公之賢。而智有所未周哉。余讀陰崖李先生與趙秀才書。固知諸賢之志。未始不在於隱也。書稱靜菴趙先生,方隱,晦谷兄弟曁陰崖公。爲道義契。相得歡甚。又以其邱墓田園之相近也。卜築于漢南之龍仁。名其亭曰四隱。蓋有取於耕薪釣採四者之樂。爲終老計。而亦以見四賢偕隱之志。未幾。靜菴,晦谷。次第遘禍。方隱下世。幷其詞章筆札。翳然無傳。陰崖沒最後。而流寓湖縣。不克畢命松楸。爲臨死恨。獨是書在集中。敍述遊從。感念存沒。覽者涕下。亭亦間廢。鞠爲荒草。至頃歲。諸賢後孫之居是邑者。相與出力重新之。塗以丹雘。刱書齋。置僧舍以護焉。工役旣完。規模漸備。仍屬余記其事。余惟靜菴先生。以正學倡群賢。陰崖以德望重朝野。晦谷,方隱。於靜菴爲四從。而見推甚盛。雖不克進而大行於時。退猶將講明斯道。以傳諸後。而乃備經厄運。天禍人亡。卽其朋儕盛衰之際。上下往復。無不可悲。嗚呼。茲曷故焉。蓋聞賢之爲敎也。始於事親敬長。終於尊主庇民。輔之以師友講習。仁義是秉。道學是崇。其於禍禍之來。未嘗切切焉計較。故摧敗而名益隆。湮鬱而道益彰。家誦其言。戶服其訓。天理明。人心淑。則向之暫出而行義者。其功化之盛。爲如何哉。始方隱在己卯前。沈晦谷愚。雖靜菴當朝。而卒不能致。禍亦不及焉。可謂隱者也。易曰。君子之道。或出或處。或默或語。同心之言。其臭如蘭。心之同者。未必其迹皆同也。以方隱之不同。而求諸賢之所以異。則異者。不必異。而同者。固自如也。後之人。求觀諸賢之道。不以迹而以心。則其於四隱之義。庶幾有發焉爾。亭在龍仁治南斗巖之上。有溪山之勝。去陰崖先墓。不數里而近。靜菴俎豆之享。若衣履之藏。俱在是縣。亭之重建也。靜菴後孫國仁。陰崖後孫斗演。晦谷後孫弘述。咸得其事。而其中弘述。主張幹事。以終其役。後之觀斯亭者。亦知斯人之有功也夫。

 

 

 

 

4현의 꿈과 한 서린 ‘사은정’ 창건 500년을 맞다!

[1516년~2016년]

 

조광조, 이자, 조광보·광좌 형제 등 4현의 네 가지 즐거움을 위해 건립된 사은정. 시대적 격랑에 이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정암 조광조, 음애 이자 등 한 시대를 풍미하며 정국을 주도했던 핵심세력들이 함께 은거를 꿈꿨던 장소. 도의로서 계를 맺고 도학을 강론하며 농사짓고 땔나무하고 낚시질하고 나물 캐는 네 가지 일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했던 이곳. 조선 중종시기 4현들의 꿈과 한이 서린 사은정이 마침내 창건 500년을 맞이했다. 사은정보존회(회장 이응규)는 이를 기념해 15일, 기흥구 지곡동 사은정 경내에서 전국한시백일장을 여는 등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벌였다.

 

2001년 용인시 향토유적 제50호로 지정된 사은정은 창건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 인물들의 역사적 비중 등이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관심과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기묘명현들의 생존시기인 1516년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는 이 정자는 500년 이어오는 동안 다섯 번의 중수를 거치면서 4현의 고귀한 정신을 면면히 계승해오고 있다. 현재 모습은 대지 73㎡(21.1평)에 25.92㎡(7.9평)으로 지어진 단층목조 와가형태다. 한양조씨 회곡공파 종중과 한산이씨 음애공파 종중의 공동소유로서 사은정보존회를 통해 관리운영하고 있다.

 

사은정 편액 : 전서체로 쓰여진 이 사은정 편액은 약 200여년이 됐다고 전해오며 1차 중수 시(1796년) 제작해 게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정자는 조선 중종조의 학자인 정암 조광조 선생이 종형제인 방은 조광보, 회곡 조광좌 그리고 음애 이자 선생 등과 도의로서 친우를 맺고 은거해 노년의 생활을 즐기기 위해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1796년(정조 20년)에 정암과 음애, 회곡선생의 후손들이 힘을 합해 정자를 중건하였는데 서재를 다시 짓고 방도 만들었으며 단청도 새로 했다. 1876년(고종 13년)에는 지은지 오래돼 훼손됨에 따라 후손들에 의해 중창됐으며 1926년에 다시 중건했다. 그 후 1989년에 현재의 건물을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면으로는 지곡동 들이 펼쳐지고 옆은 야산들이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어 풍광이 매우 좋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인데 방과 대청을 좌우에 나란히 놓았으며 전면에 개방된 퇴칸을 두고 난간을 설치했다. 대청 안에는 중건, 중수기 현판이 걸려있다.

 

이곳에서 약 7㎞ 떨어진 곳에는 정암 조광조의 묘(용인시 향토유적 제2호)와 그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심곡서원(국가사적)이 있다. 남쪽으로 약 1.5㎞ 지점에는 이자의 묘(용인시 향토유적 제8호)와 후손들이 살던 고택(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10호)이 자리하고 있다.

 

기묘명현으로 중종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의 인연과 엇갈린 운명은 지금도 자주 회자되는 역사의 한 단면이자 대표적인 이야깃거리이기도 하다. 용인이 읍향이었던 조광조는 일찍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있었다. 또한 선친묘를 지곡동에 소재했던 음애 이자는 1504년에 문과에 급제해 1516년경 직제학이란 관직에 있었다. 방은 조광보와 회곡 조광좌 형제도 이곳에 살았다. 정암과 10촌 형제간이었다. 네 사람은 도의정신이 같고 학문을 연마하면서 친분이 깊었다.

 

조광조는 중종의 특별한 은총을 받으면서 당대의 실력자였고 음애 이자는 비교적 일찍 출세해 이들 깨끗한 관료의 좌장이 됐다. 회곡 조광좌는 정암의 추천으로 지평이 되었으나 그의 형 조광보는 추천에 따르지 않고 거짓 광인인 척 숨어 살았다 한다. 끝내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조광좌도 무고에 연루돼 28살 나이에 장살을 당했다. 이자는 비록 화를 면했으나 충주 토계로 은거해 15년 후 세상을 떴다.

 

한편 이들 4현의 후예인 한양 조씨 회곡공파와 한산 이씨 음애공파는 이후 500년간 서로 합심해 사은정을 지켜왔고 결의형제로 동성동본과 다름없이 지내고 있다. 현재 사은정보존회를 중심으로 책임을 나눠 문중간의 우의와 친목을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우상표 기자 spwoo@yongin21.co.kr (주)용인시민신문사

 

 

●四隱亭記●

=丁範祖=

 

四隱亭者。文正公靜菴趙先生講道之所也。亭在駒城之治南翠鳳,寶蓋兩山中。有峭壁層巖。淸川曲水之勝。亭名以四隱。耕於隱。採於隱。釣於隱。游於隱。先生之寓隱而樂者也。當中廟御極。則側席求賢。勵精圖治。有大有爲之志。而先生以直道正學。遭遇聖辟。訏謨日贊。以挽回三古爲己任。顧奚暇四隱之爲樂哉。自古。聖賢出處顯晦。何常之有。亦隨時揭厲。適於義而已。故伊尹以阿衡之重而告歸。周公以叔父之親而明農。先生雖身處帷幄。志存經濟。而遐擧之想。未嘗一日忘邱壑。而況陰陽迭消。理亂相乘。群奸傍伺。駭機之發。迫在朝夕。以先生卓識明智。豈不思奉身而退。不俟終日。而感激主知。眷顧宗祊。有低徊未忍訣者。而北門之禍作矣。先生有道義友三人。陰崖李公,宗人方隱,晦谷兄弟二公。是已。先生休沐之暇。與三君子者。講明經旨於四隱亭中。甚相樂也。先生旣受禍。晦谷公以力救士流。亦及焉。悲夫。隱而在下。非君子之願。而與其朝躋顯要。夕陷坎穽。寧隱約以保身。故易曰。天地閉而賢人隱。又曰。遯世而無悶。使先生不得優遊卒歲。以遂隱居之樂。而興受禍敗。爲世所悲者。豈氣數世運使然歟。先生之卒。已歷三百有餘年。而亭亦隨廢。先生之九世孫國仁。悲年代之寢遠。悼先基之永墜。迺與三君子之子孫。合議而重創之。亭旣成。屬範祖爲記。夫進而致澤君民。一變世道。退而讀書講學。樂而忘憂。是二者。先生之志。而卒之有遺恨焉。爲先生之子孫者。率德遵敎。在家在邦。各盡其義。以克成先生未卒之志者。蓋亦先生之有望於子孫者。勉之哉。謹書其語。爲四隱亭記。

 

 

●重修四隱亭記●

=閔鍾顯=

 

隱居以求其志。行義以達其道。斯聖人之論出處也。然間有道未及行而厄於時。身未及隱而罹於禍。若本朝己卯諸賢所値。可謂悲夫。方北門禍作。一時諸賢。騈首就戮。其或幸而得免。亦且流離顚沛。以沒其世。如巖霜一下。百卉不榮。使斯民不復見三代之盛。而志士仁人。齎恨於無窮。若是者。天也。或者。以諸賢名太高。進太早。發太銳。恨未能蓄德用晦。俟時而見。夫豈以諸公之賢。而智有所未周哉。余讀陰崖李先生與趙秀才書。固知諸賢之志。未始不在於隱也。書稱靜菴趙先生,方隱,晦谷兄弟曁陰崖公。爲道義契。相得歡甚。又以其邱墓田園之相近也。卜築于漢南之龍仁。名其亭曰四隱。蓋有取於耕薪釣採四者之樂。爲終老計。而亦以見四賢偕隱之志。未幾。靜菴,晦谷。次第遘禍。方隱下世。幷其詞章筆札。翳然無傳。陰崖沒最後。而流寓湖縣。不克畢命松楸。爲臨死恨。獨是書在集中。敍述遊從。感念存沒。覽者涕下。亭亦間廢。鞠爲荒草。至頃歲。諸賢後孫之居是邑者。相與出力重新之。塗以丹雘。刱書齋。置僧舍以護焉。工役旣完。規模漸備。仍屬余記其事。余惟靜菴先生。以正學倡群賢。陰崖以德望重朝野。晦谷,方隱。於靜菴爲四從。而見推甚盛。雖不克進而大行於時。退猶將講明斯道。以傳諸後。而乃備經厄運。天禍人亡。卽其朋儕盛衰之際。上下往復。無不可悲。嗚呼。茲曷故焉。蓋聞賢之爲敎也。始於事親敬長。終於尊主庇民。輔之以師友講習。仁義是秉。道學是崇。其於禍禍之來。未嘗切切焉計較。故摧敗而名益隆。湮鬱而道益彰。家誦其言。戶服其訓。天理明。人心淑。則向之暫出而行義者。其功化之盛。爲如何哉。始方隱在己卯前。沈晦谷愚。雖靜菴當朝。而卒不能致。禍亦不及焉。可謂隱者也。易曰。君子之道。或出或處。或默或語。同心之言。其臭如蘭。心之同者。未必其迹皆同也。以方隱之不同。而求諸賢之所以異。則異者。不必異。而同者。固自如也。後之人。求觀諸賢之道。不以迹而以心。則其於四隱之義。庶幾有發焉爾。亭在龍仁治南斗巖之上。有溪山之勝。去陰崖先墓。不數里而近。靜菴俎豆之享。若衣履之藏。俱在是縣。亭之重建也。靜菴後孫國仁。陰崖後孫斗演。晦谷後孫弘述。咸得其事。而其中弘述。主張幹事。以終其役。後之觀斯亭者。亦知斯人之有功也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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