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훈문학관지훈예술제★

[단상] 사부곡 효천 조광렬, 청록파 시인 조지훈 탄생 100주년 그 울림은 무엇인가???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1. 9. 5.
반응형
  [단상] 사부곡 효천 조광렬, 청록파 시인 조지훈 탄생 100주년 그 울림은 무엇인가???     2021-09-05 14:25:34
 

[프레스아리랑=고경하 기자]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국어학자로 시대에 저항했던 지훈 조동탁 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포럼이 지난 16일 경북 영양 그의 고향마을에서 열렸다.


올해로 시인 조지훈 탄생 100주년을 맞았으나 관련 문화행사은 대부분 위축되었다. 2020년 정초부터 창궐한 코로나19 감염병 사태탓이다.


이런 와중에 문예지 ‘PEN 문학’ 최근호에서 시인 조지훈의 삶을 장남 조광렬 씨가 쓴 사부곡(思父曲)을 접하고 쓴 장재선 씨의 글을 정리해서 소개한다.


먼저 건축가이자 수필가인 조 씨는 ‘아버지가 남긴 교훈’이라는 글에 절절한 추모의 마음을 담았다.


70대 나이 아들이 반세기 전에 타계하신 아버지 시인 조지훈을 그리워하며 새긴 교훈은 ‘죽음과 더불어 살라’는 것이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것처럼 세상 권력과 이익을 탐하는 모든 것을 지훈은 경계했던 것이다. 조 씨 글을 계기로 지훈의 삶을 살피니 지금도 그 울림이 컸다. 일제 해방 후 조국의 분단으로 정치 · 이념 갈등이 극심한 사회와 나라에서 지식인의 표상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처럼 지훈은 지천명(知天命)을 넘기지 못한 채 48세에 단명으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짧은 생애임에도 시인, 국어학자, 교육자로서 그가 남긴 업적은 방대하고 찬란하며 돌올하다.


지훈의 그 업적들은 어쩌면 어린 시절 백일해를 앓은 이후부터 줄곧 질병과 동행하며 얻은 것이었다. 그는 타계 직전에 시 ‘병(病)에게’를 썼다.


그 중 한 대목이다.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그는 쫓아내도 다시 오는 병을 증오하는 대신에 삶을 성찰하는 촉매로 삼았다. 이 시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동행하게 된 오늘의 우리에게도 인간만의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본 것에 대한 각성을 주며 성찰을 통한 사고의 지평을 넓히게 한다. 시인 조지훈은 지병을 통해 늘 죽음을 벗하며 삶의 허욕을 버리려 했다. 그런 생사관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비극적으로 겪어야 했던 가족사와도 관련이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의 아버지 조헌영은 제헌 의원(이승만 정부 시기)이었는데 6·25 한국전쟁 때 납북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로 인해 울화병을 얻었고 피란지에서 세상을 떠나갔다.


구한말 사헌부 대간을 지냈던 할아버지 조인석은 한국전쟁 중 좌우 이념 진보와 극우대립으로 문중이 갈등을 반복하자 자결로 삶을 끝냈다. 시인 지훈은 참혹한 일들을 겪으며 다음과 같은 지론을 품게 됐다.


“경박한 진보주의보다는 성실한 보수주의가 역사에 더 많이 기여한다.”


동시대 좌파, 진보 지식인들은 지훈의 보수주의를 못마땅히 여겼으나, 지성계에서 그의 위상을 흔들지는 못했다. 그의 좌우이념을 초월한 의로운 지사적 우국충절(憂國忠節)이 그의 생애 내내 일관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시인 조지훈은 20대에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끝끝내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다. 미완의 4·19 혁명 때에는 대학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주도했고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이끌어 냈다. 이후 5·16 군사쿠테타세력에게 잠시 기대를 했지만 군부독재의 길로 접어들자 저항의 철필로 강력히 비판했고, 박정희 정권의 입각 제의에도 일절 응하지 않고 그는 기개를 지켰다.


그는 정부와 권력이 어떤 명분을 내걸더라도 불의를 행한다면 분연히 맞서 싸우는 것이 지식인의 지조이고 양심이라고 했다. 그는 그의 말을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언행일치 삶을 살아가는 시대의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그가 살아 있다면 민심의 저변에서 ‘시무(時務)’ 상소문과 ‘만인소(萬人疏)’가 잇따르는 오늘의 상황을 무엇을 어떻게 바라 볼까? 조국의 분단된 땅을 평화통일로 만들어 가는 평화의제는 뒷전이고 서로 진영의 정치 이익을 위하여 독선과 독점의 논리로 사회공동체를 분열시키고 나라의 분단을 고착화 시켜 나가며 역사를 역행하는 정권의 전횡조차 옹호하는 ‘어용 지식인’들을 그의 맑은 영혼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까?


겉으로는 민주, 개혁, 진보, 정의를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갖은 이득을 챙기며 자기 실리만 추구하는 ‘입 진보’들을 미리 알고 예견이라도 하듯이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살아 있는 세상에서 눈앞의 이익과 명예만 팔리지 말아라. 더러운 이름을 남길 양이면 이름 없이 살다가 죽어가는 것도 얼마나 부러운 일이더냐.”

(출처:프레스아리랑)


<저작권자 ⓒ 국민뉴스>
출처: [단상] 청록파 시인 조지훈 탄생 100주년 그 울림은 무엇인가-국민뉴스

- http

  [단상] 사부곡 효천 조광렬, 청록파 시인 조지훈 탄생 100주년 그 울림은 무엇인가     2021-09-05 14:25:34
 
 



[프레스아리랑=고경하 기자]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국어학자로 시대에 저항했던 지훈 조동탁 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포럼이 지난 16일 경북 영양 그의 고향마을에서 열렸다.


올해로 시인 조지훈 탄생 100주년을 맞았으나 관련 문화행사은 대부분 위축되었다. 2020년 정초부터 창궐한 코로나19 감염병 사태탓이다.


이런 와중에 문예지 ‘PEN 문학’ 최근호에서 시인 조지훈의 삶을 장남 조광렬 씨가 쓴 사부곡(思父曲)을 접하고 쓴 장재선 씨의 글을 정리해서 소개한다.


먼저 건축가이자 수필가인 조 씨는 ‘아버지가 남긴 교훈’이라는 글에 절절한 추모의 마음을 담았다.


70대 나이 아들이 반세기 전에 타계하신 아버지 시인 조지훈을 그리워하며 새긴 교훈은 ‘죽음과 더불어 살라’는 것이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것처럼 세상 권력과 이익을 탐하는 모든 것을 지훈은 경계했던 것이다. 조 씨 글을 계기로 지훈의 삶을 살피니 지금도 그 울림이 컸다. 일제 해방 후 조국의 분단으로 정치 · 이념 갈등이 극심한 사회와 나라에서 지식인의 표상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처럼 지훈은 지천명(知天命)을 넘기지 못한 채 48세에 단명으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짧은 생애임에도 시인, 국어학자, 교육자로서 그가 남긴 업적은 방대하고 찬란하며 돌올하다.


지훈의 그 업적들은 어쩌면 어린 시절 백일해를 앓은 이후부터 줄곧 질병과 동행하며 얻은 것이었다. 그는 타계 직전에 시 ‘병(病)에게’를 썼다.


그 중 한 대목이다.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그는 쫓아내도 다시 오는 병을 증오하는 대신에 삶을 성찰하는 촉매로 삼았다. 이 시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동행하게 된 오늘의 우리에게도 인간만의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본 것에 대한 각성을 주며 성찰을 통한 사고의 지평을 넓히게 한다. 시인 조지훈은 지병을 통해 늘 죽음을 벗하며 삶의 허욕을 버리려 했다. 그런 생사관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비극적으로 겪어야 했던 가족사와도 관련이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의 아버지 조헌영은 제헌 의원(이승만 정부 시기)이었는데 6·25 한국전쟁 때 납북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로 인해 울화병을 얻었고 피란지에서 세상을 떠나갔다.


구한말 사헌부 대간을 지냈던 할아버지 조인석은 한국전쟁 중 좌우 이념 진보와 극우대립으로 문중이 갈등을 반복하자 자결로 삶을 끝냈다. 시인 지훈은 참혹한 일들을 겪으며 다음과 같은 지론을 품게 됐다.


“경박한 진보주의보다는 성실한 보수주의가 역사에 더 많이 기여한다.”


동시대 좌파, 진보 지식인들은 지훈의 보수주의를 못마땅히 여겼으나, 지성계에서 그의 위상을 흔들지는 못했다. 그의 좌우이념을 초월한 의로운 지사적 우국충절(憂國忠節)이 그의 생애 내내 일관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시인 조지훈은 20대에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끝끝내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다. 미완의 4·19 혁명 때에는 대학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주도했고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이끌어 냈다. 이후 5·16 군사쿠테타세력에게 잠시 기대를 했지만 군부독재의 길로 접어들자 저항의 철필로 강력히 비판했고, 박정희 정권의 입각 제의에도 일절 응하지 않고 그는 기개를 지켰다.


그는 정부와 권력이 어떤 명분을 내걸더라도 불의를 행한다면 분연히 맞서 싸우는 것이 지식인의 지조이고 양심이라고 했다. 그는 그의 말을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언행일치 삶을 살아가는 시대의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그가 살아 있다면 민심의 저변에서 ‘시무(時務)’ 상소문과 ‘만인소(萬人疏)’가 잇따르는 오늘의 상황을 무엇을 어떻게 바라 볼까? 조국의 분단된 땅을 평화통일로 만들어 가는 평화의제는 뒷전이고 서로 진영의 정치 이익을 위하여 독선과 독점의 논리로 사회공동체를 분열시키고 나라의 분단을 고착화 시켜 나가며 역사를 역행하는 정권의 전횡조차 옹호하는 ‘어용 지식인’들을 그의 맑은 영혼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까?


겉으로는 민주, 개혁, 진보, 정의를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갖은 이득을 챙기며 자기 실리만 추구하는 ‘입 진보’들을 미리 알고 예견이라도 하듯이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살아 있는 세상에서 눈앞의 이익과 명예만 팔리지 말아라. 더러운 이름을 남길 양이면 이름 없이 살다가 죽어가는 것도 얼마나 부러운 일이더냐.”(출처:프레스아리랑)


<저작권자 ⓒ 국민뉴스>
출처: [단상] 청록파 시인 조지훈 탄생 100주년 그 울림은 무엇인가-국민뉴스 - http://www.kookminnews.com/sub_read.html?uid=30000

://www.kookminnews.com/sub_read.html?uid=30000

 

≪국민뉴스≫ [단상] 청록파 시인 조지훈 탄생 100주년 그 울림은 무엇인가

[프레스아리랑=고경하기자]청록파시인이자지조론의국어학자로시대에저항했던지훈조동탁선생탄생100주년을기리는포럼이지난16일경북영양그의고향마

www.kookminnews.com

조지훈 탄생 100주년에 부쳐

2020.09.29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지식인의 사표’라고 불릴 만한 인물이 우리 현대사에 몇이나 될까. 세태와 타협하거나 시대에 아부하지 않고, 자기 학문과 예술에 평생을 정진하고, 국가와 민족에 공헌하고,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변함없는 존경을 받는 사람, 게다가 멋진 풍모에 자연을 사랑하는 낭만파의 느낌까지 풍긴다면…

세태가 어지럽고 시대가 혼탁하면 더욱 그런 사람이 그리워진다. 그런 묘사에 전혀 부끄럼이 없는 이, 지훈(芝薰) 조동탁(趙東卓, 1920~1968)을 생각함은 올해가 그의 탄생 100주년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기품’ 하나로는 무언가 부족하다. ‘지조’가 따라와야 한다. 그는 시업(詩業)을 떠나 ‘마지막 선비’라는 시대의 평가에 부족함 없이 길지 않은 생을 올곧게 일관하고 1968년 봄날에 떠났다. 12월 3일 그의 100세 생일이 곧 돌아온다.

지훈의 고향은 경북 영양군 일월면에 있는 주실마을이다. 그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그곳에 영양군이 운영하는 깔끔하고 소박한 한옥인 지훈문학관이 있다. 지훈의 유품과 육필, 사진 등이 잘 보존돼 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문을 닫았지만 상황이 좋아지면 10월 17~18일에 탄생 백주년 기념 조지훈예술제가 열린다.

한양 조씨 집성촌인 이 마을은 크게 욕심 없는 가을 나들이에도 딱 좋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마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실마을 숲을 지나야 하는데, 이 숲은 2008년 제9회 아름다운 마을 숲 대상을 받은 곳이다. 마을 주민들이 백년이 넘도록 지극 정성으로 가꾸어온 숲이다.

지훈은 고향과는 한참 떨어진 경기 남양주시 마석역 뒷산에 묻혀있다. 자신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이곳에 왜 잠들었을까. 그는 평소 자신의 어머니 곁에 묻히길 원했다. 사후 10년 만인 1978년에 모친과 나란히 누우면서 남양주시와 인연을 맺게 됐다. 이곳에서도 조지훈 문학제 등이 열린다. 마석역에는 그의 후학들이 세운 시비가 있다.

교과서에 실렸던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시 ‘승무’)를 아직도 암송할 수 있다. 1939년 당대의 시인 정지용의 추천으로 시 ‘고풍의상’에 이어 문장지에 실린 그의 데뷔작은 한국 국민이라면 다 아는 애송시가 됐다.

지훈을 두고 청록파 1인인 박목월은 ‘크고도 섬세한 손’이라고 표현했다. 역사와 민족의식이 뚜렷한 큰 안목에 섬세하고 관조적인 자연의 서정을 지닌 지훈을 잘 가리킨 말이다.

조지훈을 두고 ‘지조론’을 뗄 수가 없다. 그는 해방 후 곧바로 시단의 지도자적 위치에 올라서고 고려대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시인으로, 국학 연구자로, 당대의 논객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많은 지식인과 문인들이 친일 행위에 가담하였지만, 지훈은 절필을 할망정 친일을 하지는 않았다. 20대에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에 참여하다 일본 경찰에 연행돼 고문을 받았으나 일제에 끝내 협력하지 않았다.

자유당 시절 이승만의 송시 청탁을 받고는 “나는 누구든 살아있는 사람의 송시는 쓰지 않는다”라고 거절했다. 4·19혁명 때는 교수 시국선언을 주도했고 5·16 세력이 독재의 길로 접어들자 강력히 비판했다. 정권의 입각 제의에 응하지 않고 사직서를 호주머니에 품고 다녔다.

1960년대에는 한일협정 비준 반대 시위에 나섰다. 시에서는 전통적 순수의 세계를 추구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비판적 지식인의 삶으로 일관했다.

그런 그의 매운 기개와 차가운 지성이 집약된 ‘지조론’은 당대의 명문으로 꼽혔다. 지금 읽어봐도 고졸한 문체이지만 서릿발이 밟힌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요, 냉철한 확집(確執)이다.”

지훈의 선비적 지조는 집안의 유전자다. 지훈의 집안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가장 극적으로 체험했다. 조광조의 후손인 조부 조인석(1879~1950)은 구한말 성균관과 사헌부 대간을 지냈다. 6·25 당시 주실마을이 좌우 이념으로 문중끼리 갈등을 빚자 이를 개탄하며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선친 조헌영(1899~1988)은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 동경유학생 학우회장을 맡아 3·1운동을 기념하는 시위를 이끌다 체포됐다. 귀국 후 신간회 총무간사를 지낸 민족주의자였고, 현대 한의학을 체계화한 선구자였다. 광복 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때 납북되었다. 아버지가 납북되자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고 피란지인 대구에서 화병으로 사망했다.

6·25 때 서울대학생이던 지훈의 남동생은 학도병으로 참전해 전사했다. 소년 지훈에게 문학적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형 동진은 스물한 살에 병사했다.

어렸을 때부터 백일해를 입에 달고 살았던 지훈은 지천명을 넘기지 못한 채 48세에 세상을 떠났다. 영면하기 직전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짧은 생애였기에 그가 남긴 흔적은 더 돌올하다.

그는 타계 4개월 전 죽음을 예감하듯 마지막 시가 된 ‘병에게’를 썼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시 일부)

그가 30년간 살았던 서울 성북동의 한옥은 허물어지고 다가구 주택이 들어서 있다. 집 앞에는 조지훈 집터 표지석만 남아 있다. 집터 근처에는 ‘방우산장’이란 기념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지훈은 집을 ‘방우산장’이라 불렀는데 ‘마음속에 소를 한 마리 방목한다’는 의미다. 그곳 동판에 시 ‘낙화’가 새겨져 있다.

“꽃이 지기로 서니/바람을 탓하랴/주렴 밖에 성긴 별이/하나 둘 스러지고/귀촉도 울음 뒤에/머언 산이 다가서다/촛불을 꺼야 하리/꽃이 지는데/꽃 지는 그림자/뜰에 어리어/하이얀 미닫이가/우련 붉어라/…/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시 일부)

선생의 3남인 조태열(66) 전 유엔대사는 최근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아버지 지훈을 회고했다.

“아버지는 당신 세대에 보기 드문 6척 장신에다 가르마 없이 모두 뒤로 쓸어넘긴 소위 리젠트 스타일의 장발에, 검은 뿔테 안경 속의 시선은 항상 먼 하늘에 두고서 느린 걸음으로 휘적휘적 걸어 다니셨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이시는 모습, 소매 끝을 슬쩍 걷어 올린 줄무늬 와이셔츠에 베레모를 쓰고 한 손엔 스틱을 쥔 채 성북동 산길을 유유히 산책하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집안에 계실 땐 늘 한복 차림이었고 외출할 때도 두루마기를 즐겨 입으셨다. 양복 차림에 종종 나비넥타이를 매고 바바리코트를 걸쳐 입고 나서면 영국 신사도 머쓱할 만큼 훤칠하고 준수한 외모의 멋쟁이셨다.”

지훈이 세상을 떠난 후 한 주간지에 소개된 ‘우리 역사상 최고의 주객(酒客) 명단’에서 그는 김삿갓, 황진이, 변영로에 이어 4등을 차지했다.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으시며 문우, 제자들과 술잔을 나누는 장면이 멋지게 보였던지 지금도 흑백사진처럼 또렷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주흥이 오르면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을 술친구들과 한 소절씩 주고받으셨다.”

◆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정책브리핑의 기고, 칼럼의 저작권은 원작자에게 있습니다. 전재를 원할 경우 필자의 허락을 직접 받아야 하며, 무단 이용 시

저작권법 제136조

제136조(벌칙)①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거나 이를 병과할 수 있다. <개정 2011. 12. 2.>
1. 저작재산권, 그 밖에 이 법에 따라 보호되는 재산적 권리(제93조에 따른 권리는 제외한다)를 복제, 공연, 공중송신, 전시, 배포, 대여, 2차적저작물 작성의 방법으로 침해한 자
2. 제129조의3제1항에 따른 법원의 명령을 정당한 이유 없이 위반한 자 ②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거나 이를 병과할 수 있다. <개정 2009. 4. 22., 2011. 6. 30., 2011. 12. 2.>
1. 저작인격권 또는 실연자의 인격권을 침해하여 저작자 또는 실연자의 명예를 훼손한 자
2. 제53조제54조(제90조 및 제98조에 따라 준용되는 경우를 포함한다)에 따른 등록을 거짓으로 한 자
3. 제93조에 따라 보호되는 데이터베이스제작자의 권리를 복제ㆍ배포ㆍ방송 또는 전송의 방법으로 침해한 자
3의2. 제103조의3제4항을 위반한 자
3의3. 업으로 또는 영리를 목적으로 제104조의2제1항 또는 제2항을 위반한 자
3의4. 업으로 또는 영리를 목적으로 제104조의3제1항을 위반한 자. 다만, 과실로 저작권 또는 이 법에 따라 보호되는 권리 침해를 유발 또는 은닉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자는 제외한다.
3의5. 제104조의4제1호 또는 제2호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 자
3의6. 제104조의5를 위반한 자
3의7. 제104조의7을 위반한 자
4. 제124조제1항에 따른 침해행위로 보는 행위를 한 자
5. 삭제 <2011. 6. 30.>
6. 삭제 <2011. 6. 30.> 닫기

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자료출처=정책브리핑 www.korea.kr>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