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漢陽人문화유적❀

◐방산유고(放汕遺稿) / 不亦齋, 花石亭 / 梅巖臺◑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16. 11. 10.
728x90

방산유고(放汕遺稿)

 

序(1975)

金喆熙(1915~2008)가 趙光永과 증손 趙東守의 부탁을 받고 1975년 서울에서 지었다. 조봉원(趙鳳遠)은 당시나 선진의 문장을 모방하는 일반적인 문인들과 다르게 자신의 뜻과 진실을 시문에 표현하여 감명을 준다고 평하였다.

 


卷1

謹次魯山祠板上韻, 孤往梅嵒臺懷古, 達城 旅舍與崔元吉贈別, 偶吟, 往花谷李孟求家與 金明叔李正元共賦, 水落臺同梧溪金文顯武夷 李英夫共賦, 花階偶成, 謝人送新曆得年字, 自 嘲, 三夜夢金可隱輔應, 夜聽漢陽歌, 齋居閒興, 登矗石樓, 春朝觀梅, 次寢屛八疊韻(右瀟湘斑 竹, 右洞庭游魚, 右桂林石筍, 右彭蠡早鴻, 右 孤山梅竹, 右剡溪雪月, 右隆中歸驢), 次金公 弼撥悶韻, 登梅嵒臺遠眺, 和洛東江壬戌七月 旣望會韻, 五言一律, 溪興, 觀燈, 乙卯四月與 金致岳遊河回, 過金烏山憶冶隱先生, 南溪松 石樓謾興, 傷時, 翠竹, 九日與諸益遊孤山亭, 次南極亭韻, 傷時, 星臺秋夜與李順則(晩煃) 柳善初(道黙)朴穉玉(勝振)共賦(丙申八月), 輓三從兄聖養(道遠), 山齋雨日與金輔應李士 勳(秉鎬)共賦, 早秋晩眺, 漢陽城別金致舜(居 丹陽品達), 開和時感, 辛酉正月朔夜夢遇先考 妣於雞龍山隨而忽覺感淚沾枕因以所思罔極 無謂而記焉, 同金輔應崔文卿遊草澗亭, 感金 祉燮渡海韻, 輓族兄通政公(仲彦)五言八韻, 直洞懷古, 登二樂樓(庚辰四月), 晩秋書懷, 與 河上諸益登玉淵亭共賦(庚寅), 率必孫往赴于 紹修書院講學會歷訪涑水李成魯家有感(孫兒 委禽之處), 自警, 除夕吟, 大邱嶠南詩畵會梅 花韻, 次安德咸新居韻(㘾), 甲寅聞變後有感, 春懷, 輓宋文玉(寅珏), 贈金晋叔移寓仁浦之 行, 閏二月初一日病中吟, 三月初三往石坡與 宗人應佑兄弟, 長相思, 代李魯瞻贈別南鵬韻 (代作), 苦夜長, 山亭閒興, 花谷花巖齋韻(幷 小序), 養閒, 與李聖弘李士元金輔應金紀叔同 做山齋, 安命, 過聞慶兎遷淵見漁翁垂釣, 與金 輔應崔文卿共遊龍門寺(庚子四月), 復用漁翁 韻, 秋意, 雨夜, 次蔚珍梅花里尹氏靑嵒亭板上 韻, 八月八日霖雨初晴見月思友, 得中華招諭 書感吟, 秋懷, 息慮, 與諸益遊於溪南松石樓, 次金殷五晬日韻, 次昌原洪主政晬日韻, 與朴 進士星弼同賦, 不亦齋原韻, 南溪石上孤松有 石衣草草被松身早秋爲霜所醉紅綠相映故因 以感興, 喜洪崔二友來訪, 剪綵花(小叙), 夢與 金輔應遊龜鶴亭, 雪夜謾吟, 傷今, 看書, 守約, 輓李秦叟, 輓朴聖克, 冬夜長, 自歎, 松雪, 次高 芝山新居韻, 輓四弟廷玉擧下時, 傷春, 夢遊淸 凉山, 晩歸操, 自適, 旱後憫農, 古松爲今己巳 之旱枯死可惜, 溪亭遣興, 撫琴自和, 白鷗問答, 次寧海觀魚臺板上韻, 過義山訪宋鵬擧, 松鶴 臺, 書懷, 過舊墟, 病脚自嘲, 閒中解嘲, 靜夜偶 感, 輓金明瑞燦奎, 七月念五記夢, 見人歿後廢 宅有感, 見園中桔梗花有二色靑白相雜是必山 家所異也, 梅花硯, 甲寅除夕憶孫婦與垕姪, 花 石亭原韻, 鳳巖黃竹下(基鍾)家會話與宋小下 大中金文顯李石言晋卿黃聖習共賦, 輓權希八 (達鎬), 輓朴月圃公景實(桂樹), 輓金丈樹谷 子士運(輝鳳), 石湖柳都事公(道性)輓, 輓柳 石堂體仁(德榮), 溪居謾興, 輓金文顯(世洛), 輓族兄景輔, 輓朴進士星弼(鎬陽), 響山李丈 (晩燾)輓, 輓金義城英老(洛蓍), 田園柳都事 丈賢民(道獻)輓, 輓金運汝, 輓相國趙(秉世), 梅史朴丈(齊鉉)輓, 輓安參奉(國烈), 輓柳淸 河世卿(喬榮), 輓金碧山鳴玉(燾鉉)永訣韻, 郭俛宇輓(鍾錫), 輓族叔溪雲(仲文), 輓雲樵 李丈而觀(宅華), 輓族兄白窩(朋遠), 輓族兄 姬伯(周遠), 輓李邦彦(在達), 輓朴錦南丈(奎 陽), 輓李進士啓七(光龍), 雲圃李丈(中곤(金 +錕)輓, 輓權博士文五, 輓柳校理(道緯), 輓 持庵金公德夫(在敬), 生輓朴進士聽荷穉玉 (勝振幷小序), 輓尹敬益(夏祥), 輓閔忠正泳 煥, 甲辰四月初三日水落事往于河上與金致岳 過艮山舊僑之里哭金星五追述一挽章, 自警 書抄禮記, 次朴燕巖元朝對鏡韻, 與諸益會寒 天寺, 陶巖臺會話, 樹谷會話, 又留寒天寺, 次 洪主事在璣大人晬韻, 溪舍聽水, 山齋與柳景 賢, 與阿季搜外祖妣失傳墓感吟, 渡永順江宿 野店, 過咸昌以六律吟白鷗, 登覺淵寺二絶與 崔元吉, 憶丙申亂, 和蔡舜祖靑山流水曲, 次李 東籓江居韻, 同吳鶴圃咏山居卽事, 感懷, 花石 亭感舊, 次子規樓趙瑗妻李夫人韻, 次東萊沒 雲臺板上韻, 敬次退陶先生四時朝晝暮夜吟 (又春朝, 又春晝, 又春暮, 又春夜, 又夏朝, 又 夏晝, 又夏暮, 又夏夜, 又秋朝, 又秋晝, 又秋 暮, 又秋夜, 又冬朝, 又冬晝, 又冬暮, 又冬夜), 和金公弼(秉弼)韻, 與諸益會巖泉別墅, 題禪 院寺塔(在梅嵒洞口外), 立石西傾(在梅嵒洞 天), 盆梅三首, 有感, 可笑軒, 次宋參奉文玉後 樂堂韻, 登嶺南樓板上韻, 敬次仙夢臺板上韻, 往寒天寺遇權(大璨), 贈別蔡斗山舜祖, 滯雨 與朴小下(濬陽)共吟, 齋居權(啓明)金(星五) 來訪, 詠竹, 訪友江南, 陶巖臺與李和叔李繼徽 共賦, 不亦齋四時吟(用原韻), 茱萸塢, 索居警 兒曹, 水落臺落成韻, 見臘天盆梅夜拈韻, 次李 靜叟戒子詩難字沒韻, 贈鄭外孫載完, 代金致 岳水落臺落成韻, 棣華亭與李箕述共賦, 種異 國梨名曰太平, 山居感興, 孤往梅嵒臺, 自寬, 次金浩根晬宴韻, 梅下醉醒, 松下盤桓, 玉連環 一段雲體, 登孤芳(一云走馬山), 獨夜無寐, 憫 時, 赴樹谷金晋伯晬宴夜與諸益共賦, 會九老 同庚稧, 己未除夕得時字沒韻, 東臺老松, 述懷, 夢過淸泠浦, 和金錫汝澗樵齋韻, 次金謹夫晬 日韻, 次栗湖亭韻, 遊挹湖亭敬次板上韻, 弄壁 上琴六律, 每誦雙節錄後, 獨夜思友, 過聞慶鳳 翔亭, 閱退溪集有感, 靜夜思, 謹次退溪喜訪友 韻, 謹次老先生陶山梅, 滯雨新灘, 秋懷, 春懷, 南溪松石樓, 送朴穉玉之西間道, 金亨仲共吟, 水落臺石刻後與柳聖邦鄭季由趙汝樂柳直汝 李海應金孝必共賦, 次樂民樓板上韻(在咸興), 庚午八月與季周彦往哭姊氏靈於龜鶴亭夜長 泄不止客苦甚矣日明源仲聞而悶之以獨蔘一 封煎以飮之數三次終日無勞歸家數月而打疊 如此之人如此之世更無其人焉又養老之道可 知感吟一絶, 夢遊京洛, 登榮州駕鶴樓, 兄弟同 嘲, 屛間松鶴二首, 示光永孫, 冬夜偶吟, 漢陽 懷古, 曉起, 閱鷗溪集憶花隱洞古事, 聞襄陽城 下溫井新湧云可怪, 新歷見南門圖, 四時佳景 (右羅峙春花, 搴芝夏雲, 杜李秋月, 蓉城冬雪), 老懷, 臘天十五夜坐, 立春日敬次老先生韻, 輓 權善一, 變風, 早春, 謙菴柳先生緬奉時輓, 次 雲樵李丈宅華居峽韻示兒們, 老去閒興, 初夏 謾興, 偶吟, 臘月初一日夜夢遊三角山白雲臺, 輓族兄而德(基遠), 送客, 贈族姪應禹(鎭九), 八月十一日終夜無寐而感吟, 十四日夜亦無寐, 夢遊, 傷秋, 秋夜, 贈李景昌檍, 次一山春睡足 韻, 秋思, 過金公樹谷子舊居, 漢陽懷古, 和劉 贊文晬韻, 伏次王考梅巖幽居分章韻, 暮春懷 人, 自歎, 居家謾話, 重牢日解嘲老妻, 同日警 示兒曹, 同日兄弟悲喜, 同日感謝賓朋, 重牢後 感吟, 南溪遣興, 又.

 

 

卷2

泉谷書堂重修落成韻, 次安孔善鶴坡小塘韻, 春日卽事, 懷金丈德夫, 除夕吟, 龜湖戰藝後與 朴星弼路上聯句, 與朴月塘星弼共賦西臺, 大 雪因以懷古, 登南漢城西將臺, 苦秋雨長, 松波 江與洛中諸益船遊至垂楊浦下陸共吟, 喜孫讀 書, 春懷, 五更吟(初更, 二更, 三更, 四更, 五 更), 山居述懷, 病中吟, 秋夜拈古詩韻同朴進 士星弼, 松石樓, 苦夏, 花石亭與諸益共賦, 壬 戌七月旣望會話水落臺, 次水落臺板上韻, 敬 次退溪先生咏松韻, 畵屛靑松白鶴, 靑天皓月, 偶成, 輓權啓明, 輓權希八(達鎬), 輓李周應 (在璜), 西山金臺丈輓(興洛), 輓泉石李德政 (敏和), 輓權丈聖文, 輓李丈致根(潤培), 輓族 兄(徹遠), 輓黃(基鍾), 輓金(輝文), 輓柳景賢 (敎榮), 輓金士興(輝杰), 輓金雲應, 輓康由仲 (瓚周), 輓金致雲(龍柄), 輓金敬學(聲博), 輓 柳公淑(翰佑), 輓進士柳(東奎), 聞金祉燮爆 日本二重橋事未過而處獄愛惜而吟一絶, 輓朴 叔寬(華鎭), 輓金衡仲(洛璿), 輓崔俛庵(益鉉), 輓金晋叔, 次吉冶隱先生(再)山居韻, 山齋初 夏朴梅史丈黃竹下宋小雲來訪共賦, 率宅兒宿 報恩館基宋致敬家(壬寅七月), 留玉川正實里 崔司果義淳家, 登幻仙菴(在黃澗黃鶴山), 歸路 宿金山旅館, 宿靑山舟巖周景七家, 暮渡倭關, 敬次善山來格廟板上韻, 歲己亥臘吉盆梅始綻 見愛而吟, 贈別吳鶴圃(行幰), 與金輔應崔文 卿遊於花嶺間北溪書堂, 輓金(舜欽), 輓朴進 士穉玉(勝振)緬奉時, 輓金輔應, 滯雨丹陽金 炳䮲家與宋明老共賦, 贈張景淵, 與金義城英 老(洛蓍)次映湖樓板上韻, 映湖樓別玉山李春 可, 省竽音洞先塋(在豐川), 闋制閱鶴峯集敬 次(己亥三月), 次李孝子行錄韻(居紅峴), 惜 花, 登竹嶺望淸風外王考墳山, 和康由仲晬席 韻, 過石坪見書堂移爲路傍酒店故感吟, 螢火, 鴈信(比西渡江之士), 挽落葉, 聽蛩, 次柳賢弼 百栗園韻, 次權學由能厓草廬韻, 四季花(在德 源郡龍城社漆田洞今北城面新安里我十二代 祖墓前樹也移植枯死), 錦袍玉臺(元世祖賞賜 我十九代祖只今遺傳于宗孫中經廟火而掛 於廟後橘樹後又入大院墓明器因緬禮索還 圖繪譜牒), 晩春訪友, 次安德咸顧諟堂韻, 晩秋 與諸益登水落臺, 獨夜偶吟, 閱鷗溪集讀萬頃碑 銘感吟, 與崔元吉渡金烏江及宅兒宿梅院店(壬 寅八月), 自和放汕琴, 悶聾, 昏眼復明, 老病自 寬, 傷時, 次李進士(慶麟)晬宴韻, 祝髮靑年, 喜 朴舜明來訪共賦, 贈別朴舜明, 慨世, 平泉舊墅 懷古三絶, 山西古意, 悼孫兒必永入地日, 對酒 憶故友, 抄出禮記, 觀變謾成, 落葉, 謾吟

 

 

卷3

偶成, 無言道心長分章韻(無吁扶, 言原存, 道報渡, 心尋今, 長羊腸), 偶感, 登溪南松石 亭, 對鏡, 霜信問答, 答, 感懷, 送鄭士玉之西間 贈別, 霽後望月, 求仁, 思義, 長夜述懷, 同朴舜 明登遏雲坊相別, 重牢日感呼一律, 長夜吟, 次 山窩耳聾韻, 餞春, 憶金輔應, 苛政, 秋懷二絶, 山居春雨逢鄭瑞源(圭淵)留話, 入夜再唱, 喜 得柳世卿柳賢弼柳樂初見訪, 次西菴太先生移 廟奉安韻(廟在慶山松川松栢祠), 輓李舜弼彦 韶, 傷時, 贈別金舜執, 永興雙城閣創建韻(我十 一代祖摠管公遺蹟碑閣也), 登鶴駕山愛蓮寺, 登望海樓次板上韻, 登倚劒樓次板上韻, 與朴穉 玉李景賢遊覽後歸家共話, 戊子臘念二聞國哀 感極, 和南海洲(鵬)遁世洞韻(洞在慶州鵬在寧 德郡寧海面元邱洞), 次五槐巖韻(幷小序), 壬 午秋往鄕試于達城因與慶州崔元吉卯洞舜明偕 玩八公山宿桐華寺共賦, 過洪花圃碑閣, 金陵紀 行(幷小序, 右甘湖, 右周公洞, 右桀溺鄕, 右孔 子洞, 右伯魚洞, 右顔淵臺, 右望瓊樓, 右鳳凰臺, 右耆老洞, 右問道洞, 右鑑湖, 右鏡陽祠, 右慕聖 巖, 右道東書院, 右臨碧臺, 右平田村, 右臥瀑洞, 右龍湫項, 右三聖巖, 右方夏峴, 右金陵摠吟), 夏日喜安星七(斗淵)見訪, 與李(寅九)李元汝 南登潁樂亭共賦, 登臨淵亭(南巽齋亭), 題申病 翁玉舃臺, 與朴聽荷宗人醒山登蜂巖鶴泉亭, 樂 賓吟, 次秦孝子落淚巖韻(在安東洛陽村), 赴京 試滯雨舟中(庚辰七月), 與黃致圭(載鎭)致黙 (靖夏)偕往鳳鳴寺, 次權裕煥晦堂幽居韻, 和裵 天若晩悟標號韻, 水落臺與金文賢鄭季由諸益 共賦, 和孫聖彦新齋韻(右如臨亭, 右考槃澗, 右 知樂臺), 次雲湖樓禊帖韻(幷小序), 宿李魯瞻 家, 無母外孫女隨我同行有感, 別外孫女歸家, 花石亭八詠(右孤山朝旭, 右寒寺暮鍾, 右杜李 春花, 右梅巖秋月, 右鳳城春雪, 右龍巖夏瀑, 右 羅峙晴霞, 右鶴駕歸雲), 慕菴宋孝感韻.


箴(1)


元朝自新箴 16
元朝에 지은 自新箴이다.주희가 五箴을 짓고,이황이 성학십도를 저술한 것은 모두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었다.저자도 고인을 본받아 날마다 새롭게 되도록 부지런히 노력하겠다는 내용이다.



梅巖臺銘(幷小序) 17
예천군 중산리 소재 梅巖臺에 대하여 銘을 짓고 서문을 함께 수록하였다.저자의 조부 醉軒趙徽榮(1805∼1854)이 유람하던 곳에 1897년 석공에게 梅巖臺석자를 새기고, 매화의 淸香한 본질을 본받고 선조의 뜻을 계승하려고 사언체로 명을 지었다.

 

花石亭銘(幷小序) 17
花石亭에 대하여 사언체로 銘을 짓고 서문을 함께 수록하였다.梅巖臺주변에 꽃모양의 바위 위에 화석정을 건립하고 오솔길을 따라 올라 주변의 아름다운 산수를 감상하며 정신을 기르는 곳으로 삼았다.

 


與郭俛宇(鍾錫) 18
俛宇郭鍾錫(1846~1919)에게 보낸 편지이다.저자는 평소에 곽종석의 도의와 덕업이 당대의 최고라고 여겨서 찾아가 배우고자 하였고,또 출처의리를 논하였다. 팔순의 부모가 있어 떠날 수 없었지만 죽기 전에 문하에서 가르침 받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곽면우의 자는 鳴遠,호는 俛宇이다.
答金持菴(在敬) 19
持菴金在敬(1841~1926)의 편지에 답장한 것이다.김재경이 저자에게 보낸 준 글의 내용이 훌륭하고 또 吾道의 의탁할 곳에 門下에 있다고 하였다.

 

與金持菴 19
김재경의 편지에 답장한 것이다. 金承穆으로부터 상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자신의 안부를 전한 내용이다.

 

與金持菴 20
김재경의 편지에 답장한 것이다. 겨울의 안부와 자신의 근황을 전하고 있다. 뒷부분에는 重牢宴에 지은 자신의 시에 화운해 주기를 청하는 내용이다.

 

答金持菴 20
김재경의 편지에 답장한 것이다. 상대의 형제 소식을 묻고, 龜川의 상사에 대하여 듣고 매우 슬퍼한다는 내용이다.

 

答金持菴 21
김재경의 편지에 답장한 것이다. 1월 10일에 보낸 편지를 여름에 받아보고 답한 것으로, 저자가 지은 不亦齋의 命名에 대하여 질정의구하고 있다.

 

答柳參奉鍾溪賢弼(永佑) 21
鍾溪柳永佑(1850~1934)의 편지를 받고 답장한 것이다. 겨울에 방문하여 토론한 것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기회였고, 책을 읽고 古道를 강론하여 古家의 전형을 잃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라고 조언하였다. 류영우의 자는 賢弼, 호는 鍾溪이며, 아버지는 柳驥榮이다.

 

與柳參奉鍾溪 22
참봉을 지낸 류영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千聖의 은미한 뜻을 참고하여 탐색한 뒤 자득한 상대의 학문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重牢宴에 지은 자신의 시에 화운해 주기를 청하는 내용이다.

 

答柳參奉賢弼 23
류영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상대 아들의 죽음에 애도하면서 건강에 유의하여 큰 손상이 없기를 바란다는 위로의 내용이다.

 

答柳參奉賢弼 23
류영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누추한 집을 방문해 준 것에 감사를 표했고, 또 신년에 상대의 안부를 물으며 水竹의 경치가 아름다운 류영우의 거처를 그리워하였다. 류성룡의 유촉지가 있는 수락대에 글자를 새기는 일을 논하고 있다.

 

與李老山景賓(中寅) 23
李景賓에게 보낸 편지이다. 소식이 막혀 꿈속에 그리워한다는 것과 상대의 자식의 안부와 공부를 묻고 있다.
答柳縣監世卿(喬榮) 24
현감 柳喬榮(1854∼1920)의 편지를 받고 병들어 궁벽한 산촌에 거처하는 근황을 전한 답장이다. 류교영의 자는 世卿, 호는 荷堂, 본관 풍산이고, 아버지는 柳道載이다. 금부도사‧통정대부 역임하고 공주군수를 역임하였다.

 

答朴進士穉玉(勝振) 24
진사 朴勝振(1853∼1930)의 편지를 받고 답장한 것이다. 박승진이 관동지방을 유람하고 지은 紀行錄에 대하여, 동유의 진면목을 잘 서술했으므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평하였다. 박승진의 자는 穉玉, 호는 聽 荷, 본관은 반남이며, 아버지는 朴鳳陽으로 영주에 거주했다.

 

與柳國卿 25
柳國卿에게 보낸 편지이다. 6월 6일에 보낸 편지를 받고 노년에 눈이 나빠진 서로의 근황을 전하는 내용이다.

 

與金敬學(聲博) 26
金聲博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성박의 계씨가 세상을 떠났으나 집안의 상사가 급하여 예를 표하지 못하여 미한하다는 내용이다.

 

與柳敬巖(疇榮) 26
敬巖柳疇榮에게 보낸 편지이다. 저자의 重牢宴에 지은 시첩 가운데 저자의 시에 화운해 주기를 청하는 내용이다.

 

與宋文玉(寅珏) 26
宋寅珏에게 보낸 편지이다. 송인각이 보내 준 시에 차운하여 주면서 명관과 달사의 題詠 아래에 이름을 올리기에 부끄럽다고 하였다.

 

與柳晩山(鼎佑) 27
晩山柳鼎佑에게 보낸 편지이다. 류계함의 시가 冲淡하고 老健하며 의취가 悠遠하여 사람의 흉금을 깨끗하게 해준다고 평하였다. 또 수락대 시회에 만나기를 희망하고 있다. 류정우는 柳懿睦의 증손자이고, 柳道性(1823~ 1906)의 삼종질이다.

 

與柳繼咸 27
柳繼咸에게 보낸 편지이다. 하회의 옥연정 앞의 아름다운 경치를 꿈속에서도 그리워하지만 노쇠함이 심하여 가을의 초청에 가는 것이 고민이라고 전하고 있다.

 

答金(胤錫) 28
金胤錫의 편지에 답장한 것이다. 저자가 상중에 있어서 김윤석의 상사에 위로를 하지 못했는데, 먼저 위문하는 편지를 보내 주어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가난과 늙음 그리고 병들었는데, 세상도 혼란하여 슬퍼하고 있다.

 

祭文
祭謙菴柳先生緬奉時文 28
겸암 柳雲龍선생의 묘소를 면례할 때 지은 제문이다.

 

祭金公致中(樂和)文 28
金樂和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다. 김낙화는 훌륭한 가문에서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 태어났으나 산수를 좋아하는 습관이 있어 석실에서 노닐며 가업을 잘 계승하였다.

 

祭金公持菴(在敬)文 29
持菴金在敬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다. 명문 선산김씨의 후예로 태어나 敬과 義를 굳게 지키면서 正脈을 실추하지 않았다고 한다.

 

祭金公致孝文(代家大人作) 30
가대인을 대신하여 金致孝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다. 명문 선산김씨의 후예이고 雙節公의 훌륭한 후손이다. 趙泰翼이 있는 곳에 찾아와 문학을 강습하고 혼인을 맺은 것을 술회하며 애석해하고 있다.

 

祭金公文 31
김공을 애도한 제문이다. 영주의 대표적인 명문가인 예안김씨 집안에 몇 년 사이에 가 혹하게 상사가 일어나 매우 애석해 하고 있다. 망자는 저자의 정자인 매암대에서 시문을 함께 창수할 정도로 세의가 돈독했다고 한다.

 

祭朴進士(勝振)文 31
進士朴勝振(1853∼1930)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다. 망자는 소고 박승임의 후예로 대대로 유업을 익히고 청수한 정신을 가지고 저자와 매우 가깝게 지낸 친구였다. 그러므로 지기의 죽음 앞에 함께 지낸 일을 언급하면서 애통해 하고 있다. 박승진의 자는 穉玉, 호는 聽荷, 본관은 반남이다.

 

祭張公文 32
張公을 애도한 제문이다. 망자는 인동장씨 錦江張璶(1629~1711)의 후예로 태어나 혹독한 喪禍에 효성을 다하고 자손들을 훌륭하게 가르쳤다. 또 저자와 혼인관계를 맺으며 돈독하게 지냈다고 한다.

 

祭金公(龍奎)文 33
金龍奎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다. 망자는 영주의 명족인 예안김씨 文節公金淡과 栢巖 金玏(1540~1616)의 후예로 태어나 일찍이 혹독한 喪亂을 만났으나 정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祭英陽南孺人靑松沈氏墓文 34
저자의 어머니 英陽南孺人의 모친 靑松沈 氏의 묘소에 조창원과 제사를 지내며 지은 글이다.

 

祭金致雲文 34
저자의 사돈 김해김씨 金致雲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祭太白隱孟彦(鎭河)文 35
白隱太鎭河(1843~1922)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다. 망자는 은현의 영순에 세거하는 西庵太斗南의 후예로 태어나 산림에서 충효를 실천하며 가학적 전통을 잘 계승하였다고 한다.

 

祭金公時應文 36
金時應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다. 망자는 영주의 명족인 예안김씨 文節公金淡과 栢巖 金玏의 주손으로 태어나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한 후 산림에서 은거하여 행적이 드러나지 않아 애석하고 하였다.

 

祭金輔應(弼奎)文 36
宣城人可隱金弼奎(1853~1908)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다. 망자는 栢巖金玏의 후예로 태어나 평탄한 마음을 지니고 경전과 서적을 보고 토론하였다. 특히 반학정에서 저자와 시문을 창수하며 교유하고 또 혼반관계도 맺었다고 한다.

 

哀金允卿 37
金允卿의 죽음을 애도한 글이다. 망자는 정자와 50년간 서로 권면하면서 사귄 친구였다. 저자는 십년 사이에 조부, 아들, 손자의 상을 당하고 또 마음을 나누던 친구를 지금 잃게 되어 매우 애통하다고 하였다.

 

告由文 十一代祖考敦勇校尉公墓安石告由文 37
11대조 敦勇校尉趙洽의 묘소에 安石을 설 치할 때 지은 고유문이다.

 

十代祖考奮順副尉公墓安石告由文 38
10대조 奮順副尉趙光國의 묘소에 安石을 설치할 때 지은 고유문이다.

 

七代祖考護軍蘆川公設壇告由文 38
7대조 護軍蘆川趙愜의 묘단을 설치할 때 지은 고유문이다.

 

五代祖考太常公墓安石告由文 39
5대조 太常公趙樞의 묘소에 安石을 설치 할 때 지은 고유문이다.

 

水落臺開基告由文 39
류성룡의 유촉지가 있는 감천면 水落臺에 정자 터를 닦을 때 지은 고유문이다.

 

通文
通文 39
안동 풍천현 관음동에는 청주정씨 정귀녕과 정귀경의 분묘와 저자의 12대조 趙亨琬의 분묘가 같은 산에 있다. 갑오년에 鄭致和 (1609∼1677)가 선조의 분묘를 찾으면서 400년간 청주정씨 분묘에 수호해온 외손 한양조 씨의 일을 언급하지 않는 것을 옳지 못하다고 정씨문중에 통보하는 글이다.

 

答河上水落臺簡通 41
河上에서 보내온 통문을 받아보고, 풍산류씨 집안의 상사를 애도하면서 水落臺 모임을 이번 달 10일에 갖기로 정했다고 알리는 글이다.

 

卷4
行狀
曾王考參判府君行錄 1
저자의 증조 松隱趙顯常(1776~1861)의 행록이다. 고조는 蘆川趙愜, 증조는 趙萬齡, 조부는 趙樞, 아버지는 趙晋貞이고 어머니는 순천장씨이다. 부인 안동김씨와 혼인하여 2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趙徽榮‧趙奎榮이고 딸은 李汝璜에게 출가하였다. 조현상은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고 예기와 소학을 좋아하였고 감천현 서쪽 오의항에 우거하다가 감천현 안으로 이주하고 병신년에 중산리 주마산 아래로 복거하여 후손들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王考醉軒府君行略 4
저자의 조부인 趙徽榮(1805∼1854)의 행략이다. 조휘영은 趙琮의 후예이고 5대조는 蘆川趙悏, 고조는 趙萬齡, 증조는 趙樞, 조부는 趙晋貞, 아버지는 趙顯常이다. 조휘영은 屛州 팔미리에 태어나 어려서 문장이 뛰어나 주변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고 1836년 중산리 고방산 아래로 이거하였다. 그곳 매암의 아름다운 산수를 감상하며 梅巖幽居라는 시를 짓고 醉軒이란 편액을 걸었다. 부인 안동권씨와 혼인하여 3남을 두었는데, 趙泰翼, 趙泰斗, 趙泰榮이다.

 

遺事
先考通政府君遺事 9
저자가 1931년에 부친 趙泰翼(1833~1900)의 일생을 전술한 유사이다. 조태익은 1854년에 아버지 趙徽榮의 상을 당하고 1861년 조모상을 당하는 등 잦은 상사에도 효성을 다하였다. 평소에 경전과 예기 그리고 소학을 즐겨 읽었고 특히 소학의 가언편과 선행편은 필사하여 늘 애독하였다.

 

壙記
四季珽遠壙塼記 11
1921년 5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넷째 동생 趙珽遠의 묘지명이다. 조정원은 저자와 증조부 조현상은 같다. 양자로 들어가 조부는 趙奎榮이고 아버지는 趙泰斗이고 어머니 영양남씨는 남기주의 딸이다. 그는 일생동안 상사가 많이 겹쳤지만 12년 동안 효성을 다 하였다. 반남박씨와 혼인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孫婦孺人眞城李氏行略 13
손부 진성이씨(1895~1914)의 행적을 기록한 전후문자이다. 손부는 온계 이해의 후손이고 진사 李殷和의 손녀이다. 출가하여 시부모와 봉제사를 잘 받들었으나 일점 혈육도 없이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 애통하다고 하였다.

 

上樑文
不亦齋上樑文 14
저자가 매암대 옛터에 不亦齋를 중건하고 지은 상량문이다. 저자는 논어 학이 1장과 도연명의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쪽 산을 바라보네. [採菊東籬下悠 然見南山]”라고 한 정신을 본받아 산림에서 강학과 산수를 즐기면서 살겠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寒天寺重建上樑文 15
1932년 寒天寺를 중건하고 지은 상량문이다. 한천사는 감천현 방고산 아래에 있는데 주지 翠雲李東榮의 부탁을 받고 지어준 것이다.

 


三省齋序 17
權相翊(1863∼1935)의 三省齋에 붙인 서문이다. 논어 학이편에 “나는 매일 세 가지 일로 자신을 반성하나니, 남을 위하여 일을 할 때 충실히 나의 능력을 다하는지, 벗과 사귀면서 성실하지 않은 점은 없는지, 스승이 나에게 전수한 학업을 힘써 익히고 있는지 하는 것이다.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 乎?與朋友交而不信乎?傳不習乎?]”라는 말과 주자의 풀이를 인용하여 글을 지어 忠信 이 지극한 권상익을 권면하였다. 권상익의 자는 贊粹, 호는 省齋, 본관은 안동, 아버지는 權祺淵이다. 金興洛의 문인이다.

 

追遠稧序 18
追遠稧의 연혁에 대하여 설명한 서문이다. 1920년 저자의 7대조 蘆川趙愜의 묘단을 설치하면서 조창원의 건의로 선조를 현양하기 위하여 追遠稧를 결성하고 쓴 서문이다.

 

九老同庚契帖序 19
九老同庚契帖에 붙인 서문이다. 저자와 학문과 문장을 논하던 친구 9명이 1920년에 同庚契를 조직하고 성명을 기록하여 첩을 만든 것에 붙인 서문이다.

 

感慕錄序 20
저자가 1920년에 조창원과 상의하여 선조 의 분묘를 성묘하고 지은 제문이나 만사를 수집하고 感慕錄을 만들고 붙인 서문이다.

 


中山記 21
중산리는 안동과 예천 사이에 있고 고방산의 남쪽과 감천의 위에 있고 梅巖은 마을 입구이다. 저자의 증조부 趙顯常가 이주한 이래 선산이 모두 이곳에 있으며, 조부 趙徽榮이 마을 입구에 소나무를 심고 동쪽은 杜里坊, 서쪽은 遏意坊이라고 하였다. 저자 역시 이곳의 빼어난 산수를 사랑하여 조용히 지내며 수양하는 곳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不亦齋記 22
자신의 제자들이 거처하는 不亦齋에 대하 여 설명한 기문이다. 논어 학이편에, "벗이 멀리서 찾아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에서 不亦이란 명칭을 따온 것이다. 불역재는 저자의 아들 조진학과 조진택이 1915년에 고방산 아래에 건립하여 강학의 공간으로 제공한 것이다. 이 기문에는 저자의 제자 송인각‧장경연과 친구 류교영‧ 박승진 등의 이름이 나온다.

 

艮巖記 24
李孟述이 화산의 북쪽 石串의 서쪽 花谷에 간암정을 짓고 살았다. 간암의 주역 간괘에, “그 그칠 때가 되면 그치고 그 행할 때가 되면 행하여 동정에 그 때를 잃지 않으면 그 도가 밝혀진다. ”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바위에 艮을 붙인 것은 이맹술의 확고한 뜻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寒天寺重修記 24
寒天寺를 중수하고 지은 기문이다. 한천사는 감천현 방고산 아래에 있고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저자가 주지 翠雲李東榮에게 한천사 상량문과 중수전말을 기록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지은 기문이다.

 

水落臺創建記 25
1916년에 감천현 水落臺에 정자를 낙성 하고 그 연혁을 기록한 기문이다. 감천현 수락대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1602년에 빼어난 산수를 감상한 곳인데, 학사 김응조와 목재 홍여하가 인근의 학자들을 불러서 시회를 열었다. 또 石南權大紳이 1879년에 정자를 창건하려고 재물을 모았고, 1915년 6칸의 정자를 짓다가 물력이 부족하여 정지하였다.

 

花石亭記 27
감천현 중산리에 있는 花石亭의 위치와 연혁에 대하여 지은 기문이다. 중산리는 저자의 증조부와 조부가 노닌 곳인데, 1897년 바위에 梅巖臺라는 글자를 새겼고 1915년에 그 위에 화석정을 건립하였다. 또 화석정 주변에 不亦齋, 可笑軒, 退暑壇, 雲靜溪, 下士坊, 進士里라는 명칭을 새롭게 정하였다. 특히 저자가 거처하는 不亦齋는 放汕齋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煙霞와 水石사이에 종적을 놓아두고 늙도록 살겠다는 의미라고 하였다.

 

放汕子記 28
放汕翁이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저자가 도연명의「오류선생전」을 모방하여 불우한 시대를 만나 산수에 숨어사는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자신은 평소 산수를 매우 좋아하여 북쪽으로 단양의 도담과 구담을 유람했고, 서쪽으로 계룡산을 유람했고, 남쪽으로 금오산을 유람하였고, 동쪽으로 청량산을 유람하였다. 아직 삼한의 여러 유적을 모두 보지 못했지만 두루 유람할 뜻이 있으므로 방산자라는 호를 지니고 살겠다고 하 였다.

 


心病說 29
心病에 대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친 글이다. 세상 사람은 몸에 병은 치료할 줄 알지만 마음에 병은 치료할 줄 모른다. 그것은 몸에 병은 한 곳을 따라 원인을 알 수 있지만 마음의 병은 원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의 병은 도리어 몸과 후세 자손에까지 병통을 남기기 때문에 마음의 병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梅巖臺水石誌 30
감천현 중산리에 있는 梅巖臺의 산수와 연혁에 대하여 1904년에 기록한 것이다. 저자의 증조부 趙顯常이 처음 중산리에 정착한 뒤 매암대 위에서 빼어난 산수를 감상하였고, 조부 趙徽榮은 거처하는 집에 梅巖幽居라는 편액을 걸고 매암대의 풍광을 시로 표현하였다. 저자는 1897년 바위에 梅巖臺라는 글자를 새기고 그곳에서 노닐며 선조들이 남긴 유촉지를 잘 보전하여 그 뜻을 계승하려고 하였다.

 


丹山安烈婦傳 31
丹山黔水가에 무덤이 있는 烈婦 순흥안씨 열행을 드러내기 위하여 지은 전기이다. 열부는 임자년 1월 21일 남편 權應麟이 병들자 손을 잘라 입에 피를 넣어 몇 번 소생시켰고 남편이 죽자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르고 시부모를 안심시킨 후 4월 14일 밤에 남편의 묘소에 가서 함께 따라 죽었다. 삼강오상이 땅이 떨어진 요즘에 이러한 열행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교화에 도움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하였다.

 

放汕子傳 33
放汕조봉원의 자전적 전기이다. 이것은 도연명의 「오류선생전」을 모방한 것이다. 淸癯蹇 屯者가 감천면 중산리에 은거하는 장부에 대하여 묻고 저자가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산인은 중도를 얻지는 못하였지만 고인을 사모하고 지금을 슬퍼하며 술과 시를 좋아한다. 또 평소에 산수를 매우 좋아하여 조선[汕] 의 산수에 노닐면서 늙음이 이르는 것도 모르니, 사람들이 방산이라고 칭한다고 하였다.

 

附錄
行狀 35
宣城 李準英(1897∼1977)이 趙光永의 부탁을 받고 찬술한 저자의 행장이다. 이준영의 자는 자는 順哉, 호는 硏庭, 본관은 예안이다.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며, 병산서원 및 도산서원 등 향내 여러 서원의 원장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硏庭遺稿 가 전한다.

 

墓碣銘 38
선성인 睡山金思鎭(1878~1954)이 아들 趙鎭鶴의 부탁을 받고 찬술한 저자의 묘갈명이다.

 

墓誌銘(1975) 41
淵民李家源(1917~2000)이 손자 趙光永의 부탁을 받고 1975년에 찬술한 저자의 묘지명이다.

 

跋(1975) 43
조봉원의 손자인 趙光永이 1975년 10월 초순에 쓴 방산문집의 발문이다. 저자는 불우한 시대를 만나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산림에서 시문창작과 강학활동으로 일생을 보냈다. 조만영이 저자의 유고를 정리하다가 별세하자, 당질 조동수, 조동호, 조카 조동기 등이 교정하여 간행하였다.

(金周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