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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용인시 향토유적 제50호
경기 용인시 기흥구 사은로 161
(우) 17076(지번) 지곡동 615-1
용인시 지곡동(芝谷洞)과 보라동(甫羅洞)은 서로 붙어있는 이웃 동네이다.
조선 중종조(中宗朝-조선 제11대王) 때 지곡동에는 음애(陰厓) 이자(李耔)선생의 한산 이씨가 살았고, 보라동에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한양 조씨가 살았다 한다.
사은정은 중종조의 명현이며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이자 동방사현(東方四賢)중의 한사람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를 비롯하여 유학자로 식견이 높기로 유명한 방은(方隱) 조광보(趙光輔), 기묘명현 회곡(晦谷) 조광좌(趙光佐), 그리고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기묘사화때 연루되어 조광조와 함께 옥에 갇혔다가 화를 당한 음애(陰厓) 이자(李耔:1480∼1533) 선생 등 4현들이 친구를 맺고, 은거하여 노년의 생활을 즐기기 위하여 건립했던 유서깊은 정자이다.
사은정 뒤에 있는 산너머는 바로 민속촌이다. 반듯하게 자리잡고 있는 사은정이 안정된 느낌을 준다.사은(四隱)이라 한 것은 기묘사화시 "은거하면서 밭갈고(耕), 나무하고(薪), 낚시질 하고(釣), 나물캐는(菜) 네가지 즐거움"을 의미하고 있다.
방은(方隱) 조광보(趙光輔)
<출생> 생몰미상. 조선 지사(志士), 호는 방은(方隱), 일명 광보(廣輔), 식견(識見)이 고명(高明)하였으나 미친척하여 이를 감추었다. 연산군 때 임사홍(任士洪)이 권력을 장악하여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송당(松堂) 박영(朴英)으로 하여금 베어 죽일 것을 권하였으나 역적하나만을 죽여 국가의 근심을 풀지는 못한다 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1507년 유생(儒生)으로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박경(朴耕)의 옥사에 연루되어 대궐마당에서 국문을 받을 때 큰 소리로 옛 글을 외우다가 입회한 유자광(柳子光)을 보고 무오년에 현량(賢良)을 모함하여 죽인 소인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르느냐? 고 소리치고 박원종(朴元宗)에게는 폐주 연산군의 나인(內人)을 첩으로 삼은 죄를 추궁하였고 또 성희안(成姬顔)에게도 전에 한훈(韓訓)이 명유라 하더니 어찌 유자광과 같이 일을 하려느냐? 고 비난하고 사관인 강홍(姜洪), 이말(李抹)에게 그 말을 똑똑히 기록하라고 하였다. 계속 매를 맞으면서도 큰 소리를 내어 웃기를 그치지 않자 박원종으로부터 광인(狂人)으로 인정되어 풀려났다. 기흥읍 보라리에 사당
이 있다.
회곡(晦谷) 조광좌(趙廣佐) ?~1521(중종16)
조선의 문신. 자는 계량(季良), 호는 회곡(晦谷), 1507년(중종 2)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으로서 박경(朴耕)·김공저(金公著)의 옥사(獄事)에 연루, 투옥되었다. 1518년 좌랑(佐郞)이 되고 이듬해 지평(持平)으로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조광조(趙光祖)의 일파로 몰려 삭직(削職),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 장살(杖殺)당했다.
1483년(성종 14)∼1521년(중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일명 광좌(光佐). 자는 계량(季良). 도총제 모(慕)의 증손으로, 군수 훈(勳)의 아들이다.
1507년(중종 2) 성균관유생으로서 박경(朴耕)·김공저(金公著)의 옥사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1518년 좌랑, 1519년 지평이 되어 “중종반정시 공신으로 책봉된 자 중에 공이 없이 책봉되어 녹을 받고 있는 자가 매우 많으니, 지금 용단을 내려 가려내지 않으면 뒤에 폐단이 많을 것이다.”라고 간언하였으나 “공의 유무를 다시 확인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이미 공신으로 정하여진 바를 고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하답으로 거절당하였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의 붕당으로 몰려 삭직되었고, 1521년 신사무옥 때 연루되어 장살당하였다. 시호는 회곡(晦谷)이다.
음애(陰厓) 이자(李耔)
이자(李耔:1480∼1533) 선생은 고려말 대석학(大碩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5대손으로 1501년(연산 7년 辛酉) 진사가 되었고 1504년(연산 10년 甲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본관(本貫)은 한산(韓山),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厓), 시호(諡號)는 문의((文懿)이다.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 북경에 다녀온 뒤 이조좌랑(吏曺佐郞)에 승진 하였으나, 연산군의 폭정으로 관직생활에 환멸을 느껴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자청하여 의성현령으로 나갔다.
1506년(中宗 1년 丙寅) 중종 반정 이후 발탁되어 홍문관수찬이 되었고, 1517년(中宗12년 丁丑)에 우승지가 되었다. 이어 한성판윤(漢城判尹)과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찬(右叅贊)에 올랐다.이 무렵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의 신진사류들과 일파를 이루어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1518년(中宗13년 戊寅)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다.이때 정사로 갔던 남곤(南袞)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된 것을 지성으로 간호하여 회복하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그는 기묘사화 후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파(士林派)가 참화를 입게 되자 그도 여기에 연좌되어 파직, 숙청되었다.
용인전음애이자고택
음애 이자(陰厓 李耔)선생 고택(古宅)
경기도 민속자료 제10호(지정일 : 1997.12.26)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297-2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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