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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삼산유록((五老三山遊錄) / 감천면 증거리 蘆川亭(노천정)
放汕處士漢陽趙公遺蹟碑(방산처사한양조공유적비)花石亭(화석정)不亦齋(부역재)
삼호정(三乎亭)
오노삼산선유회유적비(五老三山仙遊會遺蹟碑)
蘆川亭(노천정)/
관란회유적비(觀灆會遺蹟碑)
三乎處士
조동윤의 증조부님이 세곳데 산을 유람한 내용을 한문으로 기록한 책이다.
삼산유록이란 다섯 노선들이(五老)세 개의 산을 유람한 내용을 일기 형식으로 담은 한 달간의 기행문이다. 이 책을 쓴 분은 필자의 증조부이신 방산공(放汕公 鳳遠)이시다. 명산으로 이름난 청화산과 덕유산 그리고 속리산을 무려 한 달간이나 무전여행을 하셨다. 세상 사는 멋과 낭만을 아시는 분들이다. 한문으로 된 원문을 읽고 그 대강을 적어 보고자 한다.
먼저 명산을 유람한 다섯 분은 이세갑(李世鉀)옹, 유동에 살았던 진사(進士)박승진(朴勝振)그리고 필자의 증조부이신 방산공(鳳遠), 현내리의 창고 조진만(鎭萬), 성산 조진우(鎭禹)형제분이다. 이분들이 훌훌 삼산을 유람코자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유동에 사는 치옥(穉玉) 박진사가 그의 사돈 면천(迃川) 이경형(李景衡)과 동행하여 중산(중뫼)의 방산공 초려 불역재(不亦齋)를 방문하였다. 살랑 살랑 부는 삼월의 춘풍이 발길을 밀어 아랫마을 현촌(현내) 봉산서당으로 내려가 이 마을 족질 창고공을 불러냈다. 네 사람이 서당 툇마루에 좌정하고 소담을 나누었다. 문득 박진사와 창고공이 청담을 나누던 중에, 늙음을 한탄하는 한숨을 쉬더니, 우리 이렇게 허송세월 그냥 보낼 것이 아니라 팔도의 이름난 경승지 산수 간을 찾아 유람하자는데 의견이 돌았다.
창고공의 아우 성산공도 함께 따라 갈 것을 간청 하여 기꺼이 다섯 사람이 날을 받아 길을 떠난 날이 경신년(1920)삼월 초하룻날이다.
사람이 늙으면 한탄이 잦다. 한숨은 반드시 찾아오는 황혼병이다. 병이 들면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은 마음에만 있고 실천하기가 어렵다. 1920년 당시만 하여도 교통 통신의 정도는 요즘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을 것이다. 그러니 더욱 팔다리가 성한 육체일 때 구경 가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이분들의 마음을 동요 시켰을 것이다.
딱히 농사를 손수 짓는 어른들도 아닌 분들이고 시간나면 툇마루에 누워 맹자왈 공자왈 하는 어른들이시고, 혹 문사 출입하며 봉제사 접빈객이 소일인 향촌 사회에서 명사의 위치에 있었던 장(丈)인 분들이다. 그러나 이분들의 발상은 더욱 재미있지 않는가. 일정을 잡아 충분한 여비를 가지고 머슴이나 호리병 찬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이 상식일진데, 무전취식하며 낯선 객지의 여행을 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으니 말이다.
60대 노인치고 재미있는 분들이라 더욱 놀라운 일이다. 이분들은 각기 괴나리 봇짐을 손수 메고(하인없이), 현촌에서 민내들을 지나 덕율 만맛을 거쳐 수락대에 다다랐다. 서애선생 장구지소 돈대(돼지바위)에서 산수간의 협곡과 시내와 수석(水石)을 완상하였다. 수락대 이웃마을 남은동(南隱洞:나망골) 林선비 집에서 점심을 한 후, 뇌택(노티기)를 지나 예천읍내를 경유하였다.
양양산(襄陽山:예천의 고명)의 지맥인 굴모리 현산(峴山) 서정 옛터에 올라 큰들을 둘러보면서 양양팔경 시를 읊조렸다. 날씨는 맑았다. 길을 재촉하여 개포면 노포리촌, 금암마을 자연정(함양인 진사 박희문을 기리는 정자)에서, 정자의 옛 주인을 더듬었다. 정자에 현액된 방산공의 방선조 팔우헌공(八友軒公: 영조조 산골 거 조보양)의 기문을 본 후, 근처에 사는 박씨 종택 고가의 박계운(朴繼運)과 그의 사우 한정여(韓靜汝) 집에서 근심을 움츠렸다....
여행을 하면서 오늘은 누구 집에 자고, 내일은 어느 낯모른 양반 집에 들러 통성명을 하고 여행의 목적을 설명 한 뒤 숙식을 해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선 증조할아버지는 매일 매일의 잤던 집과 나눈 대화 지은 시를 기록하였고 걷고 쉬며, 경승지에서는 감상의 소회를 반드시 시로 읊어 적었다.
그달 삼월 금 날에 돌아왔다. 꼬박 한달 간의 무전여행이었다. 지금 그 후손들이 오노 선유계를 잇고 있다. 아! 선조들은 세월 속에 망각의 그늘에 덮여 사시나, 후손들은 조상의 아름다운 뜻을 이어가면서 선의의 친목을 다지고 있다. 수계의 경위는 이렇다. 봉원공의 손자인 해주공 광영(光永)이 현내리 여산공 동규(東奎:전 감천면장)에게 발의하고, 영주 박진사의 후손 박찬국이 동의하여 수계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계모임은 1년에 한번 씩 하였다. 2002년4월28일 오노삼산선유회유적비(五老三山仙遊會遺蹟碑)를 세웠다. 비는 예천군 감천면 증거리 중산 마을 앞 화석정과 노천정 사이에 있다. 현내지(池)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요, 고요히 고인 물의 건너 산은 기암괴석이 노송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 매암대이다. 화석정은 필자의 증조부를 기리는 정자이고 노천정은 필자 10대조이신 노천공 협(悏)을 기리는 정자이다. 노천정의 작은 구비를 돌아보면 오석기념비가 또 있다. 관란비(觀灆契;관란회유적비(觀灆會遺蹟碑))이다. 이 비는 감천면과 인근 용문면 등과 영주등지의 향촌인 400여명이 모은 친목계로 조부대의 동류 들이 모은 계이다. 관란비는 2002년 4월에 蘆川亭노천정 우측 산록에 세웠다. 글씨는 족형 동한(東翰)이 썼다. 화석정 등 제비(諸碑)를 수갈 하는 데는 종숙 해주공(海舟公)의 남다른 애정과 신고(辛苦)가 있었다.
옛날 중국 남북조 시대 종병(宗炳)이라는 화가는 세속에 염증을 느껴 한 평생 산수를 유람하였다. 후에 늙고 병들면 그때 젊은 시절 다니던 명승지의 산수(山水)를 그림으로 그려 방에 걸어두고 지난날 여행 장면을 회상하곤 했다. 늙음과 병이 함께 찾아오면 산수 유람이 어려우니 그림을 걸어두고서 한가로이 누워서 명산을 유람하는, 이른바 와유(臥遊)를 즐겼다. 와유란 누워서 노닌다는 뜻인데 그림을 와유첩(臥遊帖)이라하고 시문을 와유록 또는 장유(壯遊)라 한다.
고려 중엽 이규보는 남행일 일기(南行日 日記)라는 여행기를 썼다. 전주지방을 여행한 기행을 기록하면서, 그 서문에 그때 젊은 시절의 여행기를 노년에 풀어보겠노라고 하였다.
감천면 내고향 중뫼 앞산에 화석정이 있다. 꽃받침 암대에 정자가 있다. 나의 증조부(봉원공)를 기리고자 세웠다. 공은 화석정 기문에서,
당나라 때 재상 이덕유(李德裕)의 별장인 평천장(平泉莊: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함)의 기문(記文) 중에 보이는 "화석(花石)"을 따서 정자 이름을 화석정이라 하고는 학문과 경서로 뜻있는 친구들을 사귀며, 처사를 자처하였다. 김보응(金輔應), 최문경(崔文卿) 제씨들과 용문사와 초간정 그리고 귀학정(龜鶴亭) 등을 둘러보며 시를 읊조렸다.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한탄 하는가 하면, 구국의 길은 배움에 있다는 일념으로 집안과 향리의 후진 양성에도 전념하였다. 수많은 향리민들이 배움을 청했다. 학계가 전한다.
또 하회 북촌댁의 석호(石湖)유도성(柳道性), 문현(文顯)김세락(金世洛), 영노 김낙시(金洛蓍),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영양 청기면 상청리 출신의 벽산(碧山)김도현(金燾鉉)1), 공주군수를 지낸 세경(世卿)유교영(柳喬榮)2), 유주영(柳疇榮)형제, 참봉(參奉)현필(賢弼)유영우(柳永佑), 유시적부터 평생지기로 사귀었던 진사(進士)성필(星弼)박호양(朴鎬陽)3), 진사(進士) 이경린(李慶麟), 김지암(金持菴) 순필(舜弼) 이언소(李彦韶) 등 교류한 분들을 다 열거할 수 없다.
(조동윤)
▼放汕處士漢陽趙公遺蹟碑(방산처사한양조공유적비)
花石亭(화석정)不亦齋(부역재)
▼오노삼산선유회유적비(五老三山仙遊會遺蹟碑)/삼호정
▼삼호정/암글씨
▼오노삼산선유회유적비(五老三山仙遊會遺蹟碑)
▼오노삼산선유회유적비(五老三山仙遊會遺蹟碑)
▼蘆川亭(노천정)
▼蘆川亭(노천정)
▼蘆川亭(노천정) 현판
▼정관비약(靜觀飛躍)
▼오노암(五老岩)
▼관란회유적비(觀灆會遺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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