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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 임보신(任輔臣)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4. 16.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 이칭(異稱): 병정록(丙丁錄)

저자: 임보신(任輔臣)

제작시기: 1556년(명종 11), 1557년(명종 12)

 

『병정록(丙丁錄)』이라고도 한다. 성종에서 중종 때의 정치사의 뒷이야기이면서 주로 사림파(士林派) 인물들의 평소언행·성품·시·추모시 등을 비롯하여 사화(士禍)에 얽힌 일화 등을 인물별로 간략하게 적었다.   서술대상이 된 인물은 김안로(金安老)·정용(鄭容)·남효온(南孝溫)·홍여경(洪餘慶)·기준(奇遵)·손순효(孫舜孝)·정운정(鄭雲程)·최수성(崔壽城)·조광보(趙廣輔)·박영(朴英)·어세겸(魚世謙)·이목(李穆)·신잠(申潛)·이연경(李延慶)·김수온(金守溫)·박상(朴祥)·정광필(鄭光弼)·장세호(張世豪)·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이자(李耔)·허종(許琮)·허항(許沆)·정백욱(鄭伯勗)·김식(金湜)·성종(成宗)·허씨문중(임보신의 외가) 등이다.   저자는 『소학』의 보급과 실천을 주장하고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불교진흥정책을 반대하는 등 사림파 인물이었으므로 김안로와 그 부류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였고, 현실도피적인 인물들에 대해서도 다소 비판적인 반면, 사림파 인물들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조광조의 실권(失權)을 아깝게 생각하였다.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수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대동야승』에서 채집된 『해동야언(海東野言)』·『해동잡록(海東雜錄)』의 주요 인용서 중의 하나이다.

註: 임보신(任輔臣)의 자는 필중(弼中), 호는 포초(圃樵), 본관은 풍천(豐川)으로 임추(任樞)의 아들이다. 중종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저작(著作)ㆍ박사(博士)를 거쳐 교리(校理)ㆍ장악원 정(掌樂院正)ㆍ전라도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고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은 임보신이 타계전인 병진(1556)년과 정사(1557)년에 자신이 쓴 사화집(史話集)이다.

● 중종(中宗) 신묘(1531)년에 김안로(金安老)가 귀양살이에서 돌아오자 먼저 이복고(李復古.이언적)ㆍ박언주(朴彦冑.박소) 등을 몰아내고, 정용(靜容.임권)도 배척을 받아 물러났다. 이는 곧은 말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꺼려서 그렇게 한 것이다. 정유년에 김안로가 복죄한 뒤로는 여러 어진 사람들이 차차 등용되었다. 정용이 일찍이 연석상에서 아뢰기를, “김안로가 조정에 있을 적에 소인의 무리들이 당을 지어 악한 짓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오나 전하께서도 그들과 어울려 악한 일을 하는 것을 내버려두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였더니, 중종은 대답하기를, “내가 그 책망을 면할 길이 없도다.” 하였다. 장하도다. 임금의 이 말씀이야말로 참으로 만대 제왕의 본보기이다. 남의 곧은 말을 받아들이어 자신의 죄로 돌리니, 이것은 한꺼번에 두 가지의 선(善)을 갖춘 것이라 하겠다. 임금으로서 만약 스스로 옳게 여기고 바른 말을 듣기 싫어한다면, 누가 말을 하여 화를 당하기를 즐거워하리오. 모난 것을 깎아서 둥글게 하고 바른 말을 못하고 그저 “예 예” 하기만 하게 만든다면, 그 기세를 꺾어 아첨만 하게 하여 차츰 그 세력을 이루어 위태롭고 망하는 데 이를 것이니, 어찌 두려워할 일이 아니겠는가.

 

● 추강(秋江.남효온)이 금강산(金剛山)에 노닌 기록에, “설악령(雪岳嶺) 위 돌 사이에 팔분(八分.글씨체의 한 가지)으로 쓴 절구 한 수가 있는데,

단군 무진년을 앞서 났고 / 生先檀帝戊辰歲

보기는 기자가 마한을 일컫던 때에 미치도다 / 眼及箕王號馬韓

우연히 영랑과 더불어 수부에 노닐다가 / 偶與永郞遊水府

또 봄술에 끌려 인간세상에 머물도다 / 又牽春酒滯人間

하였다.

 

먹 자국이 아직 새로운 걸 보니 반드시 쓴 지 오래되지 않은 것이리라. 세상에 선인(仙人)이 없으니, 이 어찌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사람의 거짓 시(詩)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정자(程子)는 국운이 영명(永名)하기를 하늘에 빌고, 평범한 사람이 성인(聖人)에 이르는 것을 수련(修鍊)에 따라 장수한 데에 비유하였으니, 깊은 산 큰 못 속에도 그런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 시를 읽으니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세속을 벗어난 느낌을 가지게 한다.” 하였다. 이는 공(公.추강)의 친구 홍유손(洪裕孫) 여경(餘慶)이 추강이 영동에 놀러온다는 말을 듣고 미리 이 시를 써놓고 그를 기다린 것이니, 홍여경도 세속을 벗어난 선비로 일찍이 청한자(淸寒子.김시습)를 따라 놀았고, 시문을 짓되 옛 사람의 투에 따르지 않았다.

● 기 장령(奇掌令) 준(遵) 자경(子敬)은 기묘년의 명사인데, 일찍이 꿈에 지은 시를 기억하여,

낯선 땅의 물과 산이 고향과 같은데 / 異域江山故國同

하늘가에서 눈물 흘리며 높은 봉우리에 기대었네 / 天涯垂淚倚孤峯

물결 소리 처량히 강가의 관문은 닫히었고 / 潮聲寂寞河關閉

쓸쓸히 낙엽지는 성곽은 텅 비었도다 / 落葉蕭條城郭空

들길은 가을 풀 밖으로 가늘게 뻗치었고 / 野路細分秋草外

인가는 옹기종기 석양 속에 있구나 / 人家多住夕陽中

만리에 출정한 배 돌아오는 돛대 없으니 / 征帆萬里無廻棹

아득한 푸른 바다에 소식 통하지 못하네 / 碧海茫茫信不通

하였다. 뒤에 공이 온성(穩城)으로 귀양가는 길에 길주(吉州)에 이르렀을 때, 불현듯이 이 시가 모두 오늘의 일을 뜻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 병신년 무렵에 어떤 사람이 갈원(葛院) 벽 위에 쓰기를,

뭇 소인들이 조정에 그득하여 태평이라 속이니 / 衆小盈朝誣太平

이 몸은 일찍 돌아가 밭갈기나 함이 합당하나 / 此身端合早歸耕

감히 임금을 생각하여 가벼이 물러나지도 못하니 / 愛君不敢輕休退

항아리 속에서 모기들(조정의 관리들) 우는 소리 도무지 우습구나 / 都笑蛇虻甕裏鳴

하였다. 이 글의 뜻을 보건대 반드시 조정에서 뜻을 같이하지 않던 자가 지은 것이 분명하다. 바야흐로 삼흉(三兇.김안로 채무택 허항)이 정권을 휘두를 때에 참혹한 형벌과 준엄한 법으로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다스려, 심지어 머리 깎은 중들까지도 그 해독을 입어서, 온 나라가 두려워하여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발도 마음대로 못 놀려서, 감히 의논하지도 못했으므로 이런 사람이 있어 감히 불평을 크게 써놓았으니, 인심을 속일 수 없음이 이와 같다. 이듬해 정유년에 삼흉들은 귀양가서 죽었다.

● 성종(成宗) 때에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는 연산(燕山)이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을 알고, 하루는 어탑(御榻.임금이 앉는 자리)으로 올라가 임금의 용상을 어루만지면서 청한 일이 있으므로, 대간이 그것을 죄 주자고 청하고 또 성종에게 몰래 아뢴 것이 무슨 일인가를 듣고자 하니, 성종은 말하기를, “내가 색을 좋아한다고 경계했을 뿐이다.” 하고, 마침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정운정(鄭雲程) 선생은 영남 사람인데, 생김새가 우뚝하고 키가 8척이나 되었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마침내 정묘한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논어》같은 글은 내가 오랑캐들에게 가르쳐도 능히 대의(大義)를 알게 할 것이다.” 하였다. 연산 초년에 벼슬하였는데, 하루는 다른 사람에게, “내 꿈에 문묘(文廟)의 위패가 절간으로 옮겨졌다……” 하였다. 뒤에 연산이 거칠고 음란해지면서 성균관(成均館)을 술마시고 노는 곳으로 만들고, 위패는 남산의 암자 속으로 옮기고 또 태평관(太平館)으로 옮겼다가 또다시 장악원(掌樂院)으로 옮기니, 자리의 차례가 없고 제사도 오랫동안 끊기어 신(神)과 사람의 노여움이 극도에 달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문묘가 헐려버릴 것을 공이 미리 짐작한 것인데, 아마 꿈을 핑계한 것이리라.” 하였다. 그때 강혼(姜渾)ㆍ심순문(沈順門)이 사인(舍人)으로 있으면서 두 사람이 모두 눈여겨둔 기생이 있었는데, 선생은 두 사람에게 경고하기를, “기생을 멀리하여 후회를 남기지 말라.” 하니, 강혼은 곧 버렸으나 심순문은 듣지 않았는데, 그뒤 두 기생이 뽑히어 궁중으로 들어가 연산의 사랑을 극진히 받았으므로, 심순문은 마침내 비명에 죽으니,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 추강(秋江)은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일찍이 청한자(淸寒子.김시습)를 스승으로 섬기고 세상 밖에서 놀아 세속에 관계하지 않았다. 18세 때에 성종에게 글을 올려 소릉(昭陵)의 복위를 청하였다. 매양 세상 일에 비분하여 가끔 무악(毋岳)에 올라가서 통곡하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과격한 논조로 바른 말을 하여 비록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일이 있어도 꺼림이 없었다. 대유(大猷.김굉필)와, 백욱(伯勗.정여창)이 경계하고 말렸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두 분이 성리학을 강론하고 지조와 행실을 《소학》으로써 다스렸으며, 실질을 숭상하는 것이 추강과는 달랐으나 교분은 서로 두터웠으니, 이야말로 이른바 지초(芝草)와 난초(蘭草)가 서로 향기가 같다는 것이다.

● 최수성(崔壽城)의 호는 원정(猿亭)인데, 어려서부터 세속 밖에 뜻이 있어 19세에 속세를 피하여 멀리 돌아다니며 유명한 산수(山水)를 두루 관광하였다. 그의 시는 표연히 속세를 떠난 듯한 느낌을 주고, 또 서화(書畫)에도 뛰어나 참으로 절세의 기재(奇才)였다. 중년에 친척의 모함에 빠져 무고한 죄로 벌을 받았다. 평소에 함께 놀던 이연형(李連亨)이 발[簾]로 공의 시체를 염습하여 빈 골짜기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밤에 그 옆을 지키고 있었는데, 꿈에 원정이 와서 절구 한 수를 읊기를,

이 무덤을 뉘라서 찾아오리 / 玄室誰相訪

처량한 원숭이 소리나 친하련다 / 淸猿獨可親

발에 싸여 골짜기에 온 뒤로는 / 自從簾谷後

멀리 주검 덮어준 그 사람을 생각하노라 / 遙憶盖骸人

하였다. 친척이란 승지 최세절(崔世節)을 가리키는 것인데, 최세절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조카 수성이 은퇴하지 않는다고 나를 책망했으므로 조정 사람들이 미워하여 그를 죽였다.” 하였다.

● 처사 조광보(趙廣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식견이 고명했으나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스스로를 감추었다. 연산조를 당하여 임사홍(任士洪)이 정권을 농단하자, 조정이 어지러워져서 이미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하루는 분노하여 송당(松堂.박영)에게 말하기를, “너는 무부(武夫)로서 이런 놈을 목베어 죽이지 못하느냐. 죽이지 않으면 내 너를 죽이겠다.” 하였더니, 송당이 말하기를, “한 역적을 목베어서 국가의 근심을 푼다면 진실로 달게 여길 바이지만, 후세 역사에 임사홍을 도살(盜殺.암살)하였다고 쓰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처사가 웃고 말았다.

 

● 송당의 성은 박(朴)이요, 이름은 영(英), 자는 자실(子實)인데, 젊었을 때에 성품이 호방하고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나, 곧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기절(氣節)을 꺾고 독서하였다. 정(鄭) 선생 운정(雲程.정붕)이 성리서로 그를 가르쳤는데, 만년에 매우 뜻이 맞아 서로 돕는 즐거움을 가졌고, 덕성을 갖춘 얼굴과 순수한 인품이 매우 순후하였다. 후진을 권고하여 깨우침에 있어서는 후진이 스스로 체득함을 위주로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지은 시와 글은 모두 깨달음을 유도하는 말이었다. 또 의약에도 마음을 써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렸는데, 아마 그것은 또한 사마공(司馬公)의 뜻이리라. 벼슬이 절도사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는데, 이복고(李復古)가 다음과 같은 만시(挽詩)를 지어 그를 애도하였다.

하늘이 유학을 없애지 않았으니 / 天不喪斯文

동국에 아직 인재가 있도다 / 東隅尙有人

이 학문의 근원을 터득했으니 / 淵源元有自

영특하고 뛰어났다네 / 英邁又超倫

높은 벼슬은 뜬구름같이 여기고 / 軒冕浮雲外

흐르는 물가에서 시를 읊조리네 / 吟哦流水濱

이치를 궁구함은 끝까지 다하였고 / 窮探極遐妙

높은 행실은 참되고 순수하네 / 高步入眞純

바람과 달은 가이없는 경계요 / 風月無邊境

천지는 눈 가득히 봄이로다 / 乾坤滿眼春

근원은 드넓고 아득하며 / 一源觀浩渺

만물은 다 화창한데 / 萬物摠熙淳

조용히 천 권 서적을 펼쳐 보고 / 幽討書千卷

조촐히 두루미 술을 즐기네 / 淸歡酒一樽

약으로 중생을 살리고 / 活人憑藥餌

의술 또한 경륜을 감추었도다 / 醫國祕經綸

늙어가매 세월은 태평하고 / 遲暮時逢泰

풍운은 다시 머물렀는데 / 風雲道更屯

단심은 북극에 치솟고 / 丹心天北極

백발은 동해가에 흩날리네 / 素髮海東漘

능란한 일솜씨 펴보지도 못한 채 / 未展陶鎔手

늙어가며 더욱 정정한 신하로구나 / 寧同矍鑠臣

선비들께 전할 말 있으니 / 有言傳士類

복 없는 백성을 한탄하노라 / 無福嘆生民

어리석은 내가 깨우침을 받았으나 / 愚魯蒙曾擊

멀리 떨어져 직접 배우지 못했도다 / 乖離炙未親

덕스러운 그 얼굴 가끔 잠깐 뵈었으나 / 德容時暫接

좋은 가르침 자주 듣기 어려웠네 / 嘉訓聽難頻

마을에서 남다른 대접받았으며 / 村野逢殊欸

산당에서 만나 인연도 맺었다네 / 山堂會有因

속세에서는 도리어 위축되었으나 / 囂塵還跼蹐

양약은 모순을 고쳤도다 / 良藥更矛盾

한 번 이별에 그대 모습 멀어지니 / 一別儀形隔

꿈에나 볼 기약이 새로워지네 / 幽期夢想新

저승길 멀단 말 문득 듣고 / 忽聞仙路遠

이제 마지막 감을 통곡하노라 / 長慟大淪煙

신묘한 가락 이제부터 끊기니 / 妙絃從此絶

이내 회포 누구에게 풀리요 / 幽懷向誰陳

늦가을 남행 길에 / 秋晩南行路

석 잔 술로 수건을 적시노라 / 三杯但沾巾

하였다.

● 정승 어세겸(魚世謙)은 그 성품이 호방하고 고매하여 작은 예절에 구애되는 일이 없었다. 정승 자리에 있을 때에 친상을 당하였는데, 성종이 연로하다 하여 고기를 먹으라고 했는데, 손님을 대할 때에도 마음대로 먹어 비난을 많이 샀다. 공이 그 비난하는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고기 먹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저 혼자 있을 때에는 먹으면서 사람을 대할 때에는 안 먹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그 옳고 그름을 가릴 수가 없다.” 하였다. 그때에 김탁영(金濯纓.김일손) 계운(季雲)이 상주 노릇을 하면서 몸이 쇠약해져서 목숨을 잃을까 싶어, 남이 권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닭을 잡아 먹었다. 이에 말하기를, “내가 한림원(翰林院)에 있을 적에 한 재상이 상주로 있으면서 고기를 먹은 잘못을 말한 일이 있는데, 오늘은 내 자신이 도리어 거기에 빠지게 되었다.” 하였다.

● 이목(李穆)은 태학에 있을 때 윤필상(尹弼商)을 간악한 귀신이라고 지목하여 논죄하기를 상소하였고, 조순(趙舜)도 정언으로 있을 때에 노사신(盧思愼)을 논박한 일이 있었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윤필상과 노사신 두 사람이 재상이 되었는데, 이목이 전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유로 모함하여 죽였다. 또 노사신에게, “조순도 죽여야 할 것이오.” 하니, 노사신이 말하기를, “그것이 무슨 말이오.” 하고, 끝내 듣지 않았다. 이목이 임금 앞에서 귀(鬼) 자를 풀이하기를, “윤필상의 소행이 이런데도 사람들이 모르게 감쪽같이 하였으니 귀신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니, 사람들이 그 풀이에 탄복하고 임금도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원량(元亮)은 문장에 능하고 서화도 잘하여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으며, 풍도와 아량이 있어 인망이 자자하였다. 계해년 진사(進士)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기묘년에 현량과(賢良科)에 뽑히어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으나. 얼마 뒤에 파방(罷榜)되어 홍패(紅牌.붉은 종이에 쓴 과거 급제증)를 거두어 가고, 마침내 백패(白牌.흰 종이에 쓴 진사 합격증)마저 잃어버리자, 절구 한 수를 읊기를,

홍패는 이미 거두어 가고 백패마저 잃고 보니 / 紅牌已收白牌失

한림 진사가 모두 다 허명이로다 / 翰林進士摠虛名

이제부터는 높은 산 밑에서 살고자 하니 / 從此嵯峨山不住

‘산옹’두 글자야 어느 누가 다투리 / 山翁二字孰能爭

하였다. 후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세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는데 모두 이름이 났었다.

● 용탄자(龍灘子) 이연경(李延慶) 장길(長吉)도 현량과에 급제한 군자이다. 기묘년에 파직된 후 집을 짓고 물러가 살면서 전원 생활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렸다. 그때 친척을 방문하려고 서울에 왔었는데 어떤 사람이 시 한 편만을 던지고 보지도 않고 바로 가버렸는데, 그 시에,

도시의 티끌이 어찌 몸을 덮으랴 / 城市風塵豈被身

녹문의 높은 절개가 사람을 놀라게 하니 / 鹿門高節正驚人

음애의 지하에 정령이 있다면 / 陰崖地下精靈在

왕량의 연연해함을 부끄러워하리라 / 應媿王良屑屑頻

하였는데, 아마 공의 뜻을 모르는 자일 것이다. 을사년에 인종(仁宗)의 유명(遺命)으로 그를 불렀으나 끝내 나오지 아니하였다.

● 우리 조정의 어진 재상으로서는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를 으뜸으로 삼는다. 세종을 보좌하여 나라를 다스린 업적은 국사에 실려 있으므로 사람마다 모두 아는 바이다. 다만 두 분이 모두 전조에 등용된 사람이므로,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를 부족하게 여겼다.

● 허 문경공(許文敬公.許稠)의 형은 이름이 주(周)인데,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고, 가법이 있어 제사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따랐으므로, 자제가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하고 벌을 주었다. 일찍이 병이 들어 몸소 제사를 지내지 못하여, 문경공에게 대행하게 했더니, 전날의 제도를 조금 변경하였다. 판서공이 그 말을 듣고, “작은 아들이 맏아들 집에서 내려오는 제도를 멋대로 변경했으니, 이것은 맏아들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하고, 노하여 만나보지도 않고, 또 문지기로 하여금 거절하게 하였다. 문경이 황공하여 새벽에 그 문에 가서 해가 저물도록 앉아 기다렸으나 들어가지 못하였다. 저녁에 다시 가서 밤이 깊도록 기다렸다. 이렇게 하기를 며칠 동안을 계속한 뒤에야 비로소 만나볼 수 있었으니, 이렇듯 가법이 엄하였다. 그 아우 척(倜)이 음관(蔭官)으로 벼슬이 2품에 이르러 일찍이 지평이 되었다. 세종 말년에 불교를 받드는 행사를 종종 하여 절에서 기제(忌祭)를 친히 모시려고 하였다. 공이 간했으나 듣지 아니하자 곧 아전들을 거느리고 와서 차려놓은 제사상을 부숴버리어 그 행사를 못하게 하고는, 도망쳐 숨었다가 임금의 노여움이 풀리기를 기다려 나왔다. 허조의 아들은 삼재(三宰) 후(詡)인데 계유년에 죽고, 후의 아들은 수찬 조(慥)인데 정축년에 죽었다. 그 자손은 귀양가고 금고되고 하여 지금은 벼슬하는 이가 별로 없는데, 부윤(府尹) 허계(許誡)는 곧 척의 아들이요, 나의 외조부 한산공(韓山公)의 아버지시다. 문장에 능하고 비파를 잘 탔다. 풍덕(豐德.개성) 농막에 은거하면서 항상 소를 타고 도롱이에 갈삿갓을 쓰고 낚시를 낙으로 삼았다. 성종이 여러번 불러 승지ㆍ부제학 등의 벼슬을 주었으나 3년을 머물러 있은 적이 없었다. 남추강(南秋江.남효온)이 일찍이 평하기를, “기이한 선비이다. 사람됨이 호탕하고 얽매이지 않으며, 세도와 명리(名利)에 덤덤하여 허씨의 풍도가 있다.” 하였다.

● 성종 때의 조지서(造紙署.종이 만드는 관청)의 별좌(別坐) 아무개가 관청의 종이 한 장을 그의 정부(情婦)에게 주었으므로 장물죄로 옥에 가두었다. 수년 후에 임금이 문득 생각하기를 종이 한 장을 훔친 죄는 가벼운데 종신 금고의 법은 너무 무겁다 하여 놓아주려고, “송(宋) 아무개가 이제는 그 계집을 버렸느냐.”고 물었더니, 좌우가 버리지 않았다고 대답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한 계집으로 말미암아 누명을 썼으니, 사람다운 마음을 가진 자라면 마땅히 뉘우쳐 빨리 고쳐야 할 것인데, 아직도 그렇지 못하다 하니 이는 허물을 고치는 데 용감하지 못한 자로다. 어찌 기용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용서하지 않았다.”

● 김괴애(金乖崖.김수온) 문량공(文良公)이 청한자(淸寒子.김시습)에게 보낸 시에 이르기를,

유(공자)를 버리고 묵(묵자)으로 돌아감은 이 무슨 마음인고 / 舍儒歸墨是何心

이 길은 본래 물외(物外)에서 찾을 것이 아니로다 / 此道元非物外尋

유ㆍ묵 두 문의 단적인 뜻을 알고자 하면 / 欲識兩門端的意

청하건대 《논어》에서 자세히 찾아보라 / 請看論語細參尋

하였더니, 청한자가 그 운에 의하여 답시를 쓰기를,

갈림길은 다르나 양심(심성을 기름)은 하나이니 / 岐路雖殊只養心

양심은 부질없이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로다 / 養心不必漫他尋

일함에 있어 혼연히 거리낌 없으니 / 但於事上渾無碍

찌꺼기를 어찌 역력히 찾으리오 / 糟粕何須歷歷尋

하였는데, 절구시에서 같은 자로 압운한 것은 옛 법도가 아니다. 이제 보건대, 청한자가 감개한 일을 만나 마침내 법의(法衣)를 입고 중이 되어 산수에 방랑하였는데, 그가 중이 된 것은 그 자신이 뜻이 아닐 것이니, 어찌 그의 허물이겠는가. 문량공이 점잖은 재상으로서 그의 어머니를 화장하려는 것은 유자(儒者)의 이름으로 묵자(墨子)의 도를 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어찌 남을 책망하기는 쉽되 자신을 책망하기는 어려움이 아니겠는가.

● 눌재(訥齋) 박상(朴祥)은 성품이 단순하고 강직하여 용납하는 일이 적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은 그의 천성에서 우러나왔었다. 이 때문에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고 여러번 쫓겨났으나 끝내 고치지 않았다. 정승 심정(沈貞)이 양천(陽川.김포)에 소요정(逍遙亭)을 짓고 두루 당대 작가들의 글을 청하여 현판에 썼다. 공의,

산허리에는 잔치상 널려 있고 / 半山排案俎

가을 골짝에는 그릇 소리 시끄럽도다 / 秋壑閣樽盂

하는 구절이 있었는데, 심 정승이 자기를 비방한 것임을 알고 마침내 빼어버렸다.

● 세상에 전하기를, 정운정(鄭雲程)이 일찍이 귀양갈 때, 무령군(武寧君) 유자광(柳子光)이 평소에 공을 미워했으므로, 독약을 주머니 속에 넣어 보내면서 말하기를, “공의 이번 걸음이 아마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자결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하니, 공이 받아 간수하였다. 그뒤에 공은 풀려나 돌아오고, 유자광이 죄를 지고 귀양가게 되자 간수해 두었던 독약 주머니를 그에게 돌려주면서, “이것은 그대가 전일 나에게 준 것인데, 귀양가는 데 필요한 것이므로 지금 돌려준다.”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아마 이것은 전하는 사람의 잘못이리라. 손영숙(孫永叔)에게 물었더니 그는 말하기를, “남이 나에게 거슬리는 일을 하였다고 해서 그것을 잊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해 두는 것은 군자가 할 일이 아니다. 설사 정직으로 원수를 갚는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자는 사훈(士勛)인데, 근대의 명재상이다. 중종 때에 김안로가 정권을 잡게 되자 공은 영남으로 귀양갔다. 정승 이행(李荇)의 자는 택지(擇之)인데, 그도 또한 관서(關西)로 귀양갔다. 김안로가 두 사람에게 글월을 보내어, “조정의 뜻을 보건대, 반드시 대우해 줄 것 같지 않으니 차라리 일찌감치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니, 이택지는 폭음(暴飮)하다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으나,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조정에서 늙은 나에게 죄가 있다고 하여 하루아침에 죽인다면 마땅히 국법을 받아 일벌백계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는 것인데, 안로가 어찌 나를 죽인단 말이냐.” 하며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김안로가 패하자 공을 서울로 불러 올리게 되었다. 종들이 조보(朝報.관보)를 가지고 급히 달려가 밤중에 귀양지에 당도했는데, 발이 부르트고 입이 말라 쓰러진 채 말을 못하므로, 공의 자제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주머니 속을 뒤져보니, 길한 소식이었다. 곧 공에게 아뢰었더니, “그러냐.” 하고는, 코를 골면서 달게 자고 이튿날 아침에서야 그 글을 보았다.

● 찬성 이복고(李復古)는 본래 청렴하고 가난하였다. 정미년에 귀양가 있을 때에 마침 추운 겨울을 당하였는데, 옷이 얇아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동지(同知) 장세호(張世豪)가 연경(燕京)에 갔다 돌아오는 도중에 그를 만났는데,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이 비록 조정에 죄를 지었으나 귀양살이에 그치는 것이지 그를 어찌 얼어 죽게야 하겠는가.” 하면서 여우털 갖옷을 벗어주었더니, 공은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그때 죽거나 귀양간 사람들은 모두 이복고의 죄가 왕실에 관계되었기 때문에 친척이나 친구 사이라도 감히 서로 찾아보지 못하고, 화가 자기에게 미치지 않을까 두려워할 뿐이었는데, 장공은 무관으로서 공과 안면도 없는 터인데, 능히 옛 사람도 못하였던 어려운 일을 하였으므로, 이복고도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여 그의 아름다운 처사를 이루게 한 것이다.

● 《눌재집》에, “갑술년 9월 28일 밤, 추성(秋城)의 관사에 있을 때 꿈에 목은(牧隱) 선생을 보고 시 한 편을 지었는데 그 절반은 잊어버렸다. 수일 전에 항충(亢冲.김정)과 함께 이 노인(목은)의 심사를 논의하여 그 실속을 알아냈다.” 하였다. 그 시에 이르기를,

목은 선생 한산군은 세대가 이미 멀었지만 / 先生韓山世已遼

인간 세상에서 썩지 않고 우뚝 솟아 있네 / 人間不朽挺嶢嶢

사가가 잡는 붓의 공정함이 어디 있는가 / 史家秉筆公何在

새 조정의 능연각에는 그림자도 외로워라 / 昭代凌煙影獨遙

고사리 캐던 백이 숙제 무왕(武王)을 업신여겼고 / 孤竹蕨薇輕聖武

강도의 재상들은 모두 어질도다 / 江都冠盖盡神堯

가을 밤에 만나 선꿈을 깨우니 / 秋宵邂逅警殘夢

다정한 그 목소리 순임금의 부름을 듣는 듯하여라 / 晤語鏘然聽舜韶

하였다. 이른바 ‘사가의 공정함이 어디에 있는가.’ 한 것은 전왕의 아들을 바꾸어 세운 일을 가리키는 것인데, 공이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으면서 목은이 일찍이 사람들에게, “옛날 진(晉) 나라 원제(元帝)가 들어와 대통을 이어받을 때 치당(致堂) 호씨(胡氏)가 말하기를 ……” 한 말을 인용하고, 이어 말하기를, “지금 이색이 신씨(辛氏.신우)를 세우는 일에 있어 감히 이론을 가지지 않은 것도 이런 뜻일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본다면 이런 눌재의 기록이 어찌 목은의 심사라 하겠는가. 이런 것은 대개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일찍이 듣기에 정인길(鄭仁吉)이 말하기를, “원주(原州)에 그 선조 원천석(元天錫)의 유고(遺稿)를 가지고 있는 원씨(元氏)가 있는데, 원천석은 공민왕 때의 사람으로 벼슬하여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목은 등과 서로 왕래하면서 당시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후세에서 아직 알 수 없었던 신우(辛禑)가 공민왕의 진짜 아들이라는 것까지 말하였다. 남사화(南士華)도 말하기를, “혁명 당시의 역사 기록이라는 것은 진실로 다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 대사헌 조광조(趙光祖)의 자는 효직(孝直)인데, 학문이 순수하고 바르며 지조와 행실이 고결하여 유학(儒學)의 영수가 되어, 사도(斯道)를 맡길 만한 사람이었다. 중종의 신임을 받았으므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요순(堯舜)의 정치를 직접 볼 수 있는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이다 하고, 초야에 묻혀 있던 어진 선비들을 널리 불러들여 동지를 모았는데, 김정(金淨)ㆍ김식(金湜)ㆍ윤자임(尹自任)ㆍ기준(奇遵)ㆍ박훈(朴薰)ㆍ이자(李耔)ㆍ김안국(金安國)ㆍ김정국(金正國) 등등의 인물이 조정에 벌여 있으면서, 임금을 경연에 가까이 모시고서 아는 것은 모두 말하고 할 말은 끝까지 다하였다. 사사로운 길을 막으며 공명한 길을 활짝 열어놓았다. 선비에게는 자신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도리를 가르치고, 백성에게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을 공경하는 인륜을 가르쳐, 흐린 것은 씻어버리고 맑은 기풍을 진작하여, 악을 고쳐 선으로 나아가게 하였으므로 3ㆍ4년 동안에 풍속이 크게 변하였다. 그런데, 이를 어찌하랴. 악한 소인배들이 다람쥐같이 엎드려 엿보며 노리고 있다가 마침내 교묘하게 죄를 씌워 일망타진되었으니, 아, 원통한 일이로다. 조효직이 임금을 섬긴 지 수년 만에 관작이 뛰어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는데, 이런 일은 삼대(三代. 하 은 주)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주초의 예언(走肖.조광조 일파를 제거하려고 나뭇잎에 과즙으로 走肖爲王 이란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 궁녀로 하여금 이것을 따다가 왕에게 바치게 하였다)도 그 술법이 역시 졸렬한 것이니, 세상 사람들이 이로써 중종의 의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 조효직이 처음에 호남으로 귀양갔다가 이윽고 사사(賜死)되었는데, 고사에 의하면 한 나라의 재상에게 죽음을 내림에 있어 어보(御寶)도 없이 다만 왕명만으로 시행하였다고 한다. 금오랑(金吾郞)이 적소에 와서 교지를 펴보이니, 조효직은 말하기를, “국가에서 대신을 이렇게 허술하게 대접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폐단이 장차 간신이 득세하였을 때에 그가 미워하는 사람은 마음대로 죽이게 할 것이다.” 하고, 한 마디 임금에게 아뢰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목욕한 후 의대(衣帶)를 정제하고 조용히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39세였다. 눌재 박창세(朴昌世.박상)가 시를 지어 애도하기를,

지난 날의 영화를 말하지 말라 / 不謂南堂舊紫衣

수레가 시름없이 고향으로 돌아오네 / 牛車草草故鄕歸

언젠가 서로 만날 저승길 / 他年地下相逢處

인간 만사 그르다고 말하지 말라 / 莫話人間萬事非

하였고, 또 짓기를,

일찍이 잡은 손 원전에서 헤어졌는데 / 分手院前曾把手

그대 황각에서 주애에 떨어졌도다 / 怪君黃閣落朱崖

주애ㆍ황각을 가리지 말라 / 朱崖黃閣莫分別

이제 구천에 왔으니 등차 없도다 / 方到九原無等差

하였다.

●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자는 국경(國卿)인데, 판서로 있다가 파직되어 여흥(驪興)으로 돌아와 호를 은일(恩逸)이라 하였다. 성품이 부지런하고 치밀하여 천한 일도 꺼리지 않았으며, 시종일관 변치 않았다. 추수를 감독할 때에는 한 이삭도 떨어뜨리지 않고, 한 알도 마당에 흘려두게 하지 않았으며, 쌀을 찧을 때에는 싸라기와 쌀겨도 모조리 저장했다가 춘궁기에 굶주린 백성을 먹이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하늘이 만물을 낼 때에 모두 쓸 데가 있도록 마련한 것이니, 마구 없애버리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비웃으니 공은 웃으면서, “성인은 마음이 세밀하니라.” 하였다. 일찍이 경상 감사가 되어 교화를 급선무로 삼아 관하 각 고을 향교에서 《소학》을 가르치게 하고 시를 지어 권고했는데, 함양(咸陽) 학도들에게 권하는 시에,

김공이 다스린 교화요 정공의 고을이라 / 金公治化鄭公鄕

학도들이 감화를 받아 모두 선량하구나 / 庠塾薰風盡善良

모름지기 《소학》 공부에 더욱 힘쓰라 / 小學工夫更勉力

두 분 현량이 끼친 모범을 어찌 잊으랴 / 兩賢遺範詎宜忘

한 것이 있다. 점필재(佔畢齋) 선생이 일찍이 이 고을의 원으로 있은 일이 있고, 안음(安陰.함양 안의)의 정여창(鄭汝昌)이 이 고을 사람인데, 모두 성리학에 정통한 유림(儒林)의 종사(宗師)이다 또 선산(善山) 학도들에게 권고하는 시에,

일찍이 점필재의 교화를 거쳐 / 治化曾經佔畢公

지금까지 순후한 풍속이 남아 있도다 / 至今惇厚有遺風

염락의 가르침을 더하기 바라나 / 願添濂洛淵源敎

학도들은 《소학》 공부를 먼저 엄하게 하라 / 庠塾先巖小學功

하는 것이 있다. 또 현풍(玄風) 학도들에게 권고하기를,

김 선생의 학문은 세상이 으뜸이니 / 金先生學世推宗

염락의 여풍을 해동에서 떨쳤도다 / 濂洛餘風振海東

고을에서 직접 배워 얻음이 있을 것이니 / 鄕邑親薰應有得

앞으로 《소학》을 더욱더욱 연구하라 / 須將小學益硏窮

하였다. 김굉필 선생이 먼저 성리학을 주창하여 오늘날의 학자에 이르러 추향(趨向)을 알고 정주학(程朱學)을 배우기를 원하게 된 것이 모두 선생의 힘이다. 또 안음현의 학도들에게 권고하기를,

성리학의 연원은 정 선생이니 / 淵源性理鄭先生

당시에 이룩하신 교화를 우러러 생각하네 / 欽想當時政化成

남기신 풍속에 따라 덕행을 돈독히 하고 / 餘俗定應敦德行

모름지기 《소학》을 더욱 닦고 밝히라 / 須將小學益修明

하였다. 다른 고을에도 모두 이런 시가 있었다. 사간 박소(朴紹) 언주(彦冑)가 문준(文濬)과 함께 해인사에서 독서하다 모재에게 말을 청하였더니, 써 보내기를,

제생이 나에게 물어도 할 말이 없네 / 諸生叩我無他語

미곡촌이 겨우 10리 사이라오 / 未谷村纔十里間

듣건대 이곳이 김공이 거처하는 곳 / 聞有金公書築處

가야산이 응당 무이산이로다 / 倻山應是武夷山

하였다. 김공이란 곧 대유(大猷.김굉필)이다. 대개 포은(圃隱.정몽주) 이후 우리 나라의 성리학은 실로 선생으로부터 주창되었는데, 뜻을 같이하는 이로는 정백욱(정여창) 선생이다. 대유는 이(理)에 정통하고 정백욱은 수(數)에 능하였지마는 아깝게도 때를 만나지 못하여 비명에 죽었다. 푸르디푸른 하늘이여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중종 때 모두 우의정을 추증하고 가묘에 제사지냈다. 모재가 여흥(驪興)에 있을 때에 일찍이 범사정(泛槎亭)에 춘첩(春帖.입춘방)을 써붙이기를,

정자 밑 긴 강이 한강에 닿았는데 / 亭下長江接漢津

동풍에 풀린 강물 푸르게 출렁이네 / 東風新泮綠粼粼

이내 단심이 물 따라 임금께 가지 못하니 / 丹心未逐朝宗去

멀리서 대궐을 향하여 만세를 축수하네 / 遙向楓宸祝萬春

하였다. 재상으로서 산림에 한가히 살면서 맑은 복을 누린 것이 18년이었다. 정유년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또 춘첩을 지어 아이들을 시켜 벽에 써 붙이기를,

은일정에서 맞는 열 아홉 해 봄이로구나 / 恩逸亭中十九春

여생에 임금님 뵈올 줄 생각인들 했으랴 / 餘生何意覲中宸

크신 은혜로 나아가고 물러남이 다 명이니 / 鴻恩進退皆淪骨

태평성대에 성수를 비는 백성의 정성이 깊어라 / 堯日誠深祝聖民

하였다. 공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조정에 나아가서나 초야로 물러나서나 임금을 잊지 않는 사람이라 하겠다. 뒤에 벼슬이 찬성에 이르고 문형(文衡.대제학)이 되었는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의 자는 국필(國弼)인데, 모재(김안국)의 아우이다. 기묘년에 파직된 후에 고양(高陽)의 농막으로 돌아가서 호를 은휴(恩休.임금의 은혜로 쉰다는 뜻)라 하였다. 고아한 선비로서 후생들의 모범이 되니, 당시 사람들이 그 형제를 가리켜 이난(二難.난형난제)이라 했다. 모재가 아우에게 다음과 같은 절구 3수를 지어 보냈다.

은휴와 은일이 서로 뜻이 같은데 / 恩休恩逸意相同

아우는 서쪽 고을 형은 동쪽에 살도다 / 弟在西州兄在東

임금 향한 붉은 마음 피차 다름이 없어 / 拱北丹心無彼此

구중 궁궐 향하여 늘 고개 조아리네 / 時時稽首向瀛蓬

그대가 휴라 함은 바로 임금의 은혜가 무거움을 감사함이요 / 子休正感君恩重

나의 일이라 함도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기는 마찬가지로다 / 我逸銜恩亦復然

휴하고 일이 평생에 할 일이 무엇인고 / 休逸百年何所事

격양가와 화축으로 태평성대를 춤추려 하노라 / 衢謠華祝舞堯天

일일 휴휴 아우와 그 형 / 逸逸休休弟與兄

희희 호호(백성들이 화락하게 지내는 모습)하게 여생을 즐기세 / 熙熙皥皥樂餘生

임금의 은혜는 크기가 하늘 같아서 / 聖恩自是天同大

쓰러진 나무 순도 우로의 은혜받아 영화롭네 / 顚蘗猶沾雨露榮

하였다. 그리고 또 서문에 쓰기를, “우리집 형제가 모두 변변하지도 못한데, 임금의 사랑을 너무 받아 이루 다 갚을 길이 없도다. 나라에 지은 죄가 큰데도 죽이지 않고, 성은으로 너그러이 용서하여 스스로 편안히 전원에서 놀면서 여생을 즐기게 하시니, 충심으로 몸둘 바를 모르겠다.” 하였다. 사는 곳의 작은 정자를 은일(恩逸)이라 불렀고, 그 아우도 은휴를 정자의 이름으로 삼았다. 그것이 모두 은거하는 신하가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고 잊지 않으려는 뜻이라 하였다. 사재(思齋)가 차운하기를,

영화로움과 휴일함이 은혜 입기 일반인데 / 芬榮休逸被恩同

형제가 서로 동서에 떨어져 삶을 어찌 한하리오 / 敢恨鴒原西隔東

한가한 맛을 늙어서 더욱 깨달으니 / 閑到暮年尤覺味

인간 세상에도 오히려 선경이 있도다 / 人間還有一壼蓬

아우는 쉬고 형은 평안하여 남은 소원이 없으니 / 弟休兄逸餘無願

가고 머무름을 어찌 계연에게 물으랴 / 行止寧須問計然

오가며 휴와 일 밖에 것을 자랑하며 / 來往相誇休逸外

임금의 은혜를 받들어 태평세월 송축하네 / 銜恩長頌太平天

쉬는 아우의 심정 평안한 형과 똑 같아서 / 休弟心情同逸兄

일우 일락으로 여생을 보내도다 / 一憂一樂送餘生

한가로이 살면서 임금의 은혜가 무거움을 세삼 깨달으니 / 居閑更覺君恩重

임금의 은혜가 영화로운 벼슬만이라 말하지 말라 / 莫說君恩只官榮

하였다.

● 이음애(李陰崖.이자)의 상우당(尙友堂.허종)의 시 발문에 이르기를, “우리 조정의 이름 높은 재상으로는 세종 때의 황희와 허조이다.” 하였다. 선릉(宣陵.성종) 때에는 허종(許琮)을 치는데, 허공의 자는 종경(宗卿), 호는 상우당이다. 처음에 벼슬하였을 때에 불교를 업신여기다가 노여움을 사, 세조가 위협하여 그 지조를 시험해 보았으나 그는 태연자약하여 의범(儀範)을 잃지 않았으므로 도리어 벼슬을 올려주었다. 이로부터 명성이 날로 떨치어 계급을 거치지 않고 뛰어넘어 재상이 되었다. 그는 용모가 위대하고 풍채가 장엄하여 위엄이 가을 하늘, 겨울날과 같아 바라보기에도 씩씩하였으나 가까이 대하여 보면 온화하였다. 성리학을 좋아하여 마음을 가라앉혀 골몰히 연구하여 스스로 터득한 것이 많고, 잔 것이나 따지고 이목을 꾸미는 사람들과는 비길 바가 아니다. 또 역대의 역사에도 널리 통하였는데, 주문공(朱文公.주자)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열람하여 20일 동안에 마치니, 그 부지런하고 민첩함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그가 처리하는 일들은 모두 모방하여 본받을 만하였다. 성종(成宗)의 지우(知遇)를 받아 그의 덕을 원수(元首)에 비기어 조정에 들어가서는 고기(皐蘷)가 되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방소(方召)가 되어 기쁘고 흐뭇하여 큰 그릇이 되기를 기대했으나, 갑자기 죽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리오. 그가 시와 글을 지은 것도 그 덕과 같아서 연마하지 않아도 혼후(渾厚)하고 단정 성실하여 저절로 성률(聲律)에 맞았다.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진실한 말이 있는 법이니 어찌 믿지 아니하리오. 공은 평소에 성격이 호방하고 남다른 기절이 있어 집안 사람이 생업을 일삼지 않아 거처하는 방이 좁고 누추하였으나 태연하였다. 매양 녹봉을 받으면 즉시 친척 중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친족의 자제에게 친절하게 글읽기를 권하고, 가르침에 게으른 일이 없었으며, 권세를 좋아하지 않아 집으로 사사로이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재상이 된 지 수 년 만에 큰 뜻을 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그의 손자 허항(許沆)은 김안로에게 아부하여 소행이 개돼지 같았는데, 일찍이 경연청(經筵廳)에서 눈물을 흘리며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은 허종의 손자이오니 아마 임금을 속이고 저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소인의 태도가 이같이 심했으니, 한충유(韓忠猷) 공에게만 탁주(佗冑)와 같은 손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 정백욱(정여창) 선생이 젊어서 두류산(頭流山.지리산) 기슭에 자리를 골라서 집을 짓고 거기에서 늙을 계획을 하였는데, 성종이 불러 소격서(昭格署.해와 달ㆍ별에 지내는 제사를 맡아보던 관청) 참봉으로 삼으려 하니, 굳이 사양했으나 허락하지 않아 그 벼슬을 맡았다. 선생은 몸을 다스리기를 매우 엄하게 하여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었고, 한여름에도 처자들에게 살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시 짓기를 좋아하지 않아 오직 한 편이 있을 뿐인데, 그 시는 이렇다.

바람에 냇버들 새록새록하니 / 風蒲獵獵弄輊柔

4월의 화개(하동 화개면)는 벌써 보리 가을이로다 / 四月花開麥已秋

두류산 온 봉우리를 모두 돌아보고 / 看盡頭流山萬疊

외로운 배 다시 강물 따라 내려오도다 / 孤丹又下大江流

하니, 가슴속에 쇄락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는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 정백욱 선생이 젊었을 때 술을 좋아하여 하루는 친구와 함께 실컷 마시고 취하여 들 가운데 쓰러져 밤을 새고 돌아왔다. 선생의 어머니가 책망하기를, “너의 아버님이 이미 돌아가시고, 홀어미가 믿을 것이라고는 너뿐인데, 지금 네가 이 꼴이니 나는 누구를 믿고 살란 말이냐.” 하였다. 선생은 깊이 자책하여 공부에 힘쓰고, 임금이 내리는 때나 음복할 때 이외에는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 김노천(金老泉.김식)이 효직(孝直.조광조)ㆍ원충(元冲.김정)ㆍ대유(大柔.김구) 등과 더불어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 최수성(崔壽城)이 별안간 밖에서 들어오더니 인사도 아니하고 한참 섰다가 갑자기 노천을 부르면서, 술 한 그릇을 달라 하므로 곧 주니, 진한 술을 단숨에 죽 들이키고 나서 하는 말이, “내가 파선되는 배에 탔다가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하였다. 놀라서 가슴이 두근거리더니 이제 술을 마시니 풀린다.” 하고, 간다는 말도 없이 바로 가버렸다. 좌중이 괴상하게 여기니 효직이 말하기를, “파선되는 배라고 한 것은 우리들을 가리킨 것인데 자네들이 알아듣지 못한 것이네.” 하였다. 노천이 일찍이 말하기를, “장자(莊子)는 기발(奇拔)하면서 바르고, 맹자는 바르면서 기발하다.” 하였는데, 그는 현량과(賢良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는데, 기묘년에 귀양가 얼마 안 되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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