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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영월군선생안(寧越郡先生案)] 영월부사 10세조 ▷ 조공(趙珙) 을축년(乙丑年, 1529년, 중종 24) 5월 초 2일에 부임하였다.조공(趙珙)선생 유배지:전남 장흥!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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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世 寧越府使公 諱珙 記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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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군선생안(寧越郡先生案)]

▷ 심호(沈灝)

천순(天順)254) 임오년(壬午年, 1462년 세조 7) 10월 29일에 부임하였다.

▷ 김우무(金雨畝)

성화(成化)255) 을유년(乙酉年, 1465년 세조 10) 10월 25일에 부임하였다.

▷ 윤사유(尹師有)256) 정해년(丁亥年, 1467년, 세조 12) 6월 19일 부임하였다.

▷ 최응현(崔應賢)257) 임진년(壬辰年, 1472년, 성종 3) 8월 초 9일에 부임하였다. ▷ 윤보상(尹甫尙)

정유년(丁酉年, 1477년, 성종 8) 12월 초 4일에 부임하였다.

▷ 박계금(朴繼金)258) 임인년(壬寅年, 1482년 성종 13) 12월 22일에 부임하였다. ▷ 허지(許芝)

정미년(丁未年, 1487년 성종 18) 2월 22일에 도착하여, 같은 해 5월 24일에 세상

을 떠났다.

▷ 박시행(朴時行)259)

 

254) 중국 명나라 영종의 연호이다. 중국서는 건국기년(建國紀年)으로 일관하여 그 왕조의 연도를 기록하지 않고 군주의 재위에 따라서

해를 세었는데, 군주를 상속하면 새 군주가 즉위한 이듬해는 그 원년(元年)으로 하여 기록하였다. 최초의 연호는 주(周)나라 때인

BC 114년에 사용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이다.

255) 명나라 헌종의 연호이다.

256) 『세조실록』20년 5월 25일자

이조(吏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윤사유(尹師有)등 모두 원종 3등 공신(原從三等功臣)에 기록하라” 하였다.

257) 본관은 강릉으로 자(字)는 보신(寶臣), 호(號)는 수재(睡齋)로 1428년에 출생하였다. 1454년(단종 2) 증광 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

정자에 제수 되었으나 노모 봉양을 위해 강릉 훈도를 자원하였다. 그 후 사성, 집의, 승문원 참교, 이조와 호조의 참의, 동부승지, 충

청도 관찰사, 경주부윤 등을 역임하고 1495년(연산군 1) 대사헌이 되었다. 1499년 동지성균관사가 되어 1502년 한성부 좌윤에 이

어 공조, 형조, 병조의 참판을 지냈다. 강릉의 향사에 제향되었다.

258) 『세조실록』8년 10월 13일

종부시주부(宗簿侍主簿) 박계금을 개성에 보내어 발병부(發兵符)를 주어 징병(徵兵)하게 하였다.

259) 『성종실록』24년 1월 8일

제2부 영월군읍지 / 영월군 선생안 • 90

정미년(丁未年) 5월 29일 부임하였다.

 

▷ 황진손(黃震孫)260)

홍치(弘治)261) 경술년(庚戌年, 1490년 성종 21) 9월 초 9일에 부임하였다.

▷ 신숙근(申叔根)262)

을묘년(乙卯年, 1495년 연산 1) 9월 22일에 부임하였다.

▷ 한근(韓謹)

경신년(庚申年, 1500년 연산군 6) 10월 10일에 부임하였다.

▷ 윤상노(尹尙老)263)

 

조문숙(趙文琡)을 조산대부(朝散大夫)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박시행(朴時行)을 조산대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허집(許輯)을 봉훈랑(奉訓郞)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으로 삼았다.

『성종실록』24년 1월 8일

안우건(安友騫)을 통정대부(通政大夫)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박시행(朴時行)을 조산대부(朝散大夫)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으로, 이유청(李惟淸)을 조산대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남세담(南世聃)을 승훈랑(承訓郞)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으로 삼았다.

260) 『연산일기』3년 1월 12일

선공감(繕工監) 제조 이세좌 등이 아뢰기를, “공신문(拱辰門) 밖에 담장을 쌓도록 명하였는데 역사가 적지 않습니다. 우선 유위(留衛)하는 군사에게 돌을 모으게 하소서. 또 선공감 정(正) 황진손(黃震孫)은 나이가 늙어 그 소임에 적당하지 않으니 갈아 주소서.”하니, 그대로 좇았다.

261) 명나라 효종의 연호이다.

262) 『성종실록』13년 4월 23일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기사관(記事官) 신숙근(申叔根)은 아뢰기를, “대신들이 모두 사유(赦宥)가 지나서 ‘신임을 잃을 수 없다’고 하나, 신정은 이미 원훈(元勳)의 아들이고 자신도 또한 친공신(親功臣)인데 기망(欺罔)의 죄를 스스로 지었으니, 이를 주살(誅殺)하는 것은 바로 신의(信義)를 굳게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신임을 잃는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대저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죄는 사유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임금은 신하의 벼리[綱]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정이 임금을 속였으니, 실로 이는 강상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어찌 사유(赦宥) 전으로 논(論)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의 신하 된 자가 어찌 임금을 기망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세좌에게 이르기를, “승지의 마음이 그러하나, 다른 승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각기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고, 홍문관 관원에게도 의논하게 하였다.

263) 본관은 파평으로 자는 상경(商卿), 호는 뇌헌이다. 우의정 호(壕)의 아들이며, 성종의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오빠로 1486년(성종17) 무과(武科)에 장원,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이 되었다. 1498년 우익위(右翊衛)가 되고, 1505년 동반직(東班職)에 기용되어 공조참의(工曹參議)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채청사(採靑使)로 지방

에 내려갔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고 대간(臺諫)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의 특지로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이 되었다. 다음해 이과(李顆)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다시 정난공신(定亂功臣) 1등으로 파천군(坡川君)에 봉해졌으며, 팡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영평(靈平)이다.

제2부 영월군읍지 / 영월군 선생안 • 91

임술년(壬戌年, 1502년 연산군 8) 10월 27일에 부임하였다.

 

▷ 신숙권(申叔權)

을축년(乙丑年, 1505년 연산군 11) 3월 15일에 부임하여, 그 해 11월에 세상을 떠

났다.

▷ 장승조(張承祖)264) 을축년(乙丑年) 11월 16일에 부임하였다.

▷ 김몽남(金夢男)

정덕(正德, 명나라 무종의 연호) 병인년(丙寅年) 11월 26일에 부임하였다.

▷ 김려(金勵)

무진년(戊辰年, 1508년 중종 3) 10월 8일에 부임하였다.

▷ 신괘(辛詿)

을사년(乙巳年, 1509년 중종 4) 11월 17일에 부임하였다.

▷ 이각(李殼)265) 임신년(壬申年, 1509년 중종 7) 3월 초 6일에 부임하였다. 영월부사로 재임 중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 신렴(申濂)

정축년(丁丑年, 1517년 중종 12) 3월 초 2일에 부임하였다.

264) 『중종실록』1년 10월 2일

의정부가 이∙병조 당상과 함께 의논하여, 제주목사(濟州牧使) 육한(陸閑), 안동부사(安東府使) 홍경창(洪慶昌), 장단부사(長湍府使) 박숭엽(朴崇燁), 인천부사(仁川府使) 이성정(李成楨), 황주목사(黃州牧使) 이열(李烈), 선산부사(善山府使) 남경(南憬), 회양부사(淮陽府使) 이잠(李箴), 경원부사(慶源府使) 성순동(成順仝), 종성부사(鍾城府使) 권중신(權仲愼), 마전군수(麻田郡守) 한세보, 풍기군수 권민(權愍), 수안군수(遂安郡守) 박효남(朴孝南), 영월군수(寧越郡守) 장승조(張承祖)를 도태시키고, 이어 아뢰기를, “고령(高嶺)∙동관(潼關)은 북방의 큰 진(鎭)이므로, 조종 조부터 당상관을 차견(差遣)하였습니다.”

하니, ‘아뢴대로 하라’ 전교하였다.

265) 『중종실록』11년 3월 27일조

이조가 아뢰기를 “영월군수 이각, 평양서윤(平壤庶尹) 윤형(尹衡)은 모두 자궁(資窮, 자질이 낮은) 문과출신으로 만일 ‘대전’대로 준직을 서임한다면 이들이 마땅히 고쳐져야 하는데, 근자에 정은 과하여 그 직을 낮추어 서임함이 준례이니, 이 사람들의 일을 어떻게 하리까? 농사철인데 가족을 이끌고 다니게 되면 폐단이 대단할 것이니, 가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체직하기 바랍니다.

제2부 영월군읍지 / 영월군 선생안 • 92

 

▷ 오세창(吳世昌)266)

무인년(戊寅年, 1518년 중종 13) 2월 22일에 부임하였다.

▷ 홍사원(洪士源)267)

▷ 유경조(柳敬祖)268)

경진년(庚辰年, 1520년 중종 15) 8월 17일에 부임하였다.

▷ 맹종인(孟宗仁)269)

 

266) 본관(本貫)은 해주(海州)로 자(字)는 번경(蕃卿)이다. 중종 1년(1506)에 별시(別試) 병과4(丙科4)에 급제하였다. 영월군수와 사정(寺正)벼슬을 지냈고, 품계(品階)는 통정대부(通政大夫)였다. 『중종실록』6년 5월 8일 헌부(憲府)가 송관(訟官)과 수령에 불합한 사람들의 제목(題目)을 써서 아뢰기를, “경연은 간교로 아첨하여 정직하지 못하고, 정광좌(鄭光佐), 유응대(柳應臺) 등은 시비를 현혹(眩惑)하게 하고, 이사겸(李思謙), 오세창(吳世昌) 등은 용렬하고 혼암하여 과단성이 없고, 남적윤(南嫡胤)은 부박하여 실지가 없습니다. 김세희(金世熙)는 교망(驕妄) 잔혹(殘酷)하고, 오예손(吳禮孫)은 나약하고 암매(暗昧)하며, 이양필(李良弼)은 탐렴(貪斂)하여 백성을 병들게 합니다.”

267) 『중종실록』36년 7월 11일조, 영월읍지 선생안에는 기록이 없음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영월군수 홍사원은 전에 수령으로 있을 때 잘못한 일이 많았으니 갈아야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성종실록』23년 12월 19일

유자광(柳子光)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개성부(開城府)에 새로 쌓은 성(城)이 일곱 군데가 허물어졌는데 지금 선전관(宣傳官) 홍사원(洪士源)이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고 왔습니다. 만약 내신(內臣)을 보내어 유수(留守)와 더불어 같이 살피면 허실(虛實)을 알 수 있습니다. 성(城)을 쌓는 것은 큰일인데 지금 쌓는 대로 따라서 허물어지니, 신은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유수가 만약 또 사실대로 아뢰지 아니하면 신이 마땅히

분변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만약 경(卿)의 말과 같으면 선전관(宣傳官)이 죄가 있다. 그렇지 아니하면 경에게 말한 자가 죄가 있다.”

하고, 곧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권유(權瑠)를 보내어 다시 살펴보게 하였다.

268) 본관은 문화(文化)로 자(字)는 윤보(胤甫)로 중종(中宗) 1년(1506년), 별시(別試) 정과2(丁科2)로 급제하였다. 영월군수와 오위 위장(五衛衛將)을 역임하였다.

『중종실록』8년 6월 29일

헌부가 아뢰기를, “육순이 육경(六卿)에 합당치 못한 것과 우윤공의 탐포(貪暴)를 이미 다 아뢰었으니, 곧 개정하소서.”하고, 간원이 아뢰기를, “조한필(曹漢弼)은 6월에 별천(別薦)으로 거관(去官)하여 갑자기 좌랑(佐郞)으로 제수하였는데, 이력이 있고 나서야 제수하는 것이 옳으니 곧 개정하소서. 장세필(張世弼)은 좌랑이 된 지 20삭(朔)이 못되어 올려서 함경도사(咸鏡都事)로 삼았는데, 삭이 찬 뒤에 승서(陞敍)하는 것이 법이므로 요즈음 30삭의 기한에서 3~4삭만 차지 않아도 체직을 논집(論執)하는 것은 법을 중하게 여겨서이니, 세필도 개정해야 합니다. 형조좌랑(刑曹佐郞) 유경조(柳敬祖)는 그 직임에 맞지 않으니, 체직하소서.”

하였으나, 유허하지 않았다.

제2부 영월군읍지 / 영월군 선생안 • 93

 

▷ 심광손(沈光孫)270) 가정(嘉靖)271) 갑신년(甲申年, 1524년, 중종 19) 8월 초 3일에 부임하였다.

■조공(趙珙)선생 유배지:전남 장흥!乙丑年 1529년 중종24 5월2일부임, 11월달 10일쯤, 6월만에 전남 장흥으로 유배를 당함!!!

 

■장흥군유배지에서의 고을원님과 유배인으로 만난 문과 동방■

■고을원님과 유배인으로 만난 문과 동방, 1644년 長興■

晴峯集卷之一 / 七言絶句

月夜。適與長興士人相對。士人占題。應呼輒成。

[DCI]ITKC_MO_0831A_0020_020_1090_2009_B025_XML DCI복사 URL복사

歸路迢迢夜未長。一年離別九回腸。雙星淚逬銀河水。曉色偏驚上太陽。右七夕

水火金木土相生。陰陽至理本無聲。天人鑽燧神b025_319a功大。食我烝民萬國城。右燧人氏鑽火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6

[고을원님과 유배인으로 만난 문과 동방, 1644년 장흥]

-김희태-

비난과 칭찬 어지러우니 내 어찌해야 하나

(毁譽紛紛我奈何 훼예분분아내하)

본래 공론은 애정과 증오가 많은 것이어늘

(本來臺論愛憎多 본래대론애증다)

어버이 뵈며 효도치 못해 마음은 먹색되니

(省親非孝淸爲墨 성친비효청위묵)

지금 세상에 어질어 다른 무엇이 있을소냐

(今世惟良果孰他 금세유량과숙타)

 

비난과 칭찬의 어지러움. 공론의 애증. 효도못해 타는 마음. 어질다 한들......

무언가 대비된다. 한탄도 있다. 후회도 있다. 그렇다고 다 궂은 것만 말한 것 같지는 않다.

언제 때 누구의 일을 형상화 한 것일까.

 

 

때는 1644년(인조 22) 8월께. 전라도 장흥에서 만난 두 사람. 오섬(吳暹, 1587~?)과 청봉 심동구(晴峯 沈東龜, 1594~1660). 그들은 문과 동방(同榜)이다. 조선시대 500년 역사를 유지하는데 핵심 기능을 했던 지식인 관료집단. 문과시험 합격자. 그 중에서도 한날 함께 입격한 사람들이라면 “동방”으로서 평생의 교류가 이어진다. 한데 한양과는 동 떨어진 천리길 장흥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우랴. 그런데도 행간에는 반가움만은 아니다. 왜 그럴까. 장흥도호부사와 유배객의 처지로 만났기 때문이다. 오섬은 장흥도호부사를 지내다 이임을 앞두고 있고, 청봉 심동구는 유배된지 넉달여. 반가움도 잠깐, 서로가 헤어질 무렵이다.

 

‘오퇴이와 이별하며(別吳退而)’라는 유배객 심동구의 시. 퇴이는 오섬 부사의 자이다. 우선, 그 시상을 헤아려 보자.

 

조공(趙珙)

기축년(己丑年, 1529, 중종 24) 5월 초 2일에 부임하였다.

■11월11일에 김안로가 다시 등용되면서, 기묘사화의 정암 조광조 선조님 종친들을 관직자는 대부분 유배를 보내서 조공 선조님도 영월부사 직에서 6개월만에 장흥으로 유배를 보냄.

 

▷ 유문함(柳文咸)

을축년(乙丑年, 1529년, 중종 24) 11월 12일에 부임하였다.

▷ 안서(安諝)

계사년(癸巳年, 1533년, 중종 28) 11월 20일에 부임하였다.

▷ 주의(朱懿)

을미년(乙未年, 1535년, 중종 30) 11월 초 8일에 부임하였다.

▷ 박수(朴燧)

무술년(戊戌年, 1538년, 중종 33) 5월 20일에 부임하였다.

▷ 박세호(朴世豪)

경자년(庚子年, 1540년, 중종 35) 정월 27일에 부임하여, 신축년(辛丑年, 1541)

정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269) 본관은 신창(新昌), 자(字)는 자안(子安)으로 중종 2년(1507)에 식년시(式年試) 병과 9(丙科9)에 급제하였다. 부정(副正)을 역임하였다.

『중종실록』19년 1524년 6월 28일조

대간과 헌부가 아뢰기를 “영월군수 맹종인은 혼망(昏忘)하여 백성을 다스리기에 맞지 않습니다.”라고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월읍지 선생안에는 이름이 없다.

270) 『중종실록』15년 8월 25일

대간(臺諫)이 여악(女樂)∙이맥(李陌) 등의 일을 아뢰고, 헌부(憲府)가 아뢰기를, “부평부사(富平府使) 조현범(趙賢範)은 지난해 12월의 고과(考課)에 중등을 받았으므로 당하관(堂下官)의 하등과 같은데, 이처럼 빨리 서용(敍用)하면 하등을 받은 자가 누가 징계되겠습니까? 호조정랑(戶曹正郞) 심광손(沈光孫)은 인물이 나약하고 태만하므로 전에 공조정랑(工曹正郞)과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이 되었을 때에 다 직임을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호조는 일이 많은 곳인데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예조좌랑(禮曹佐郞) 황유중(黃有中)은 인물은 모르겠으나, 예조는 관계되는 바가 중한데 그 조상이 장사까지 했다 하니 매우 미천하므로 육조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정언(正言) 심희전(沈希佺)은 언관(言官)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모두 가소서.”하니, 상이 심희전은 갈라고 명하고 나머지는 다 윤허하지 않았다.

271) 명나라 세종조의 연호이다.

제2부 영월군읍지 / 영월군 선생안 • 94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조공선조님의 행적]

1. 중종실록 47권, 중종 18년 4월 10일 신사 2번째기사 / 박소·조공·손부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소(朴紹)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조공(趙珙)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손부(孫溥)를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로 삼았다.

2. 중종실록 51권, 중종 19년 8월 29일 신유 7번째기사 / 홍언필·윤지형·소세량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홍언필(洪彦弼)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윤지형(尹止衡)을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소세량(蘇世良)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이환(李芄)·허관(許寬)을 장령(掌令)으로, 심언광(沈彦光)·조공(趙珙)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3. 중종실록 51권, 중종 19년 9월 1일 임술 1번째기사 / 간원이 아뢴 대로 지평 조공을 갈게 하다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지평(持平) 조공(趙珙)은 여론에 맞지 않으니, 가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4. 중종실록 83권, 중종 32년 1월 26일 병오 1번째기사 / 간원이 진하사를 보내지 말 것과 조공을 체직하도록 건의하다

간원이 진하사를 멈출 것을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은 직무가 선원(璿源)을 맡고 으레 춘추관(春秋館)의 벼슬을 겸하는데, 첨정 조공(趙珙)은 겸춘추(兼春秋)에...겸하는데, 첨정 조공(趙珙)은 겸춘추(兼春秋)에 맞지 않을 뿐더러 그 인물이 늙고 병들어 정신이 흐리므로 직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제 《선원록(璿源錄)》을 수정할 때를 당하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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