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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우헌(八友軒) 조보양(趙普陽, 1709~1788)의 문집 책판
▣팔우헌집(八友軒集) ▣
八友軒 趙普陽의 문집. 7卷 4冊. 1831. 木板本. 四周雙邊, 半郭 20.5×15.3㎝, 有界, 10行20字, 註雙行, 內向2葉花紋魚眉, 29.3×19.7㎝.
문집은 李仁行의 서문과 八友軒 선생의 世系圖로 시작하여, 卷1은 賦 1편‧詩 142수, 卷2는 詩 108수, 卷3은 詩 88수, 書 18수, 卷 4는 序文 2편‧記 14편‧跋 8편, 卷5는 論 2편‧說 2편‧辨 2편‧箴 1편‧銘 4편‧祭文 25편‧卷6은 誄事 6편‧上梁文 2편‧行狀 5편‧墓誌銘 2편‧雜著 7편, 卷7은 附錄 등으로 구성하고 朴時源의 跋文으로 마치고 있다.
저자는 일찍부터 輕重을 알았기에 爲己의 학문에 힘을 쏟았다. 그러기에 과거 공부는 자연히 소홀히 하였다. 저자의 문집 속에 있는 편지, 변설들은 저자의 학문적 깊이를 알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權相에게 分義의 자리를 말함과 李象靖에게 沽名을 염려하고 있는 모습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저자의 눈높이와 당당함을 엿볼 수가 있다. 勿妄勿助‧鳶飛魚躍과 『西銘』‧『中庸』 등의 변에서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는 理의 실체에 대한 窮究의 자세는 저자의 학문적 자세의 투철함을 알게 해준다.
李象靖에게 말하였듯이 成己는 成物의 의지를 깔고 있다. 그러므로 저자도 또한 小科를 보고 늦은 나이에 大科를 보아 족하와 같이 조정에 들어간다. 旣成의 학자였던 저자는 군주나 주변의 동료로부터 많은 신망을 입게 된다. 하지만 당시 조정의 분위기는 저자의 순수함과 달리 특정 세력이 권세를 잡고 있었다. 그러기에 鄭厚謙이 직분의 높음으로 저자에게 모멸감을 주었던 것이다. 知와 行이 어떠한 관계맺음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자자로서는 견딜 수 없었기에 미련 없이 떠날 수밖에 없었다.
『팔우헌집』을 통해 조선 후기 자기 발전의 의지로 충만하였던 영남 선비의 삶을 읽을 수가 있다. 成物의 의지가 꺾일수록 成己의 의지는 강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마지막까지 독서인의 자세를 고수하였다. 아울러 저자는 집안의 후손이나 동리 후배들의 자기 발전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며 글로 남기고 있다.
[조보양(趙普陽) ]
1709~1788(숙종 35~정조 12). 字:仁卿, 號:八友軒, 本貫:漢陽, 父:元益, 母:禮安李氏, 居:安東.
1709년(숙종 35) 10월 16일에 豊山의 외가 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자품이 뛰어났으며 역사를 배우자 좋고 나쁨을 구분하였으니 선배들이 기특해 하였다. 小隱 李景翼(1683~1750)에게 나아가 배우니 학문의 연원을 가지게 되었으며 內外 輕重의 분별을 알게 되었다. 懶拙齋 李山斗(1680~1772)와 淸臺 權相一(1679~ 1760)에게 질의를 하였다. 양 선생이 그릇임을 알아보시고 직접 대하거나 편지로서 권면하기를 爲己의 학문으로 하니 공이 가슴에 담아두고 노력하였다. 이후 府君의 바람으로 과거 공부를 하며 자연스럽게 문장력을 키우게 되었다. 그러나 소과에 번번이 실패를 하다가 1747년(영조 23)에 生員‧進士에 모두 합격하였다. 1773년(영조 49)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공이 白首의 처지에도 과거에 응시한 것은 팔십 노부께 기쁨을 드리기 위함이었다.
공이 처음 벼슬길에 나가자 어울리고 싶어 하는 인물들이 많았으나 아무나 만나지 않았다. 禮曹佐郞이 되어 參謁할 때에 참판인 鄭厚謙(1749~1776)이 禮로서 대하지 않으니 스스로 벼슬에 마음을 빼앗겨 욕을 당하고도 참음은 비굴한 행위라고 생각하여 결연히 조정에서 물러났다. 당시 知舊들과 심지어 정후겸마저 말렸으나 공은 마음을 바꾸지 않고 결행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공이 물러나 돌아오자 부군께서 ‘善養이 祿養보다 낫다.’하여 용기 있는 물러남을 가상해 하였다. 이후 부군을 봉양함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심지어 속옷 등을 직접 빨아 올렸다. 1778년(정조 2) 부군께서 돌아가시자 70의 나이에도 모든 절차에 있어 예를 어기지 않았다. 1781년(정조 5)에 從子인 錫晦가 入侍함으로 인하여 정조가 가계를 묻고 공의 일을 알게 되었다. 정조가 權貴의 위세에 굴하지 않았던 공의 자세를 가상히 여겨 곧 典籍에 임명하였다가 공이 도성에 이르자 騎郞을 임명하였다. 육일간 당직을 섰지만 주상을 뵈올 수가 없었기에 향리로 돌아왔다. 이후 정조는 사실을 전해 듣고 만나지 못하였음을 안타까워하였다. 1788년(정조 12)에 僉樞五衛將에 올랐으나 이미 침상에 누운 지 3년이 지나서였다. 이해 6월에 돌아가니 杜谷의 先陵의 곁에 장사를 지냈다.
▣八友軒集序
▣八友軒集序[李仁行] b079_177a
濂溪夫子嘗曰蘊之爲德行。發之爲文章。夫得於心者德也。見於日用者行也。攄發其胸中之蘊者文也。然德行本也。文藝末也。夫惟有是德有是行。然後其文也爲可傳。而其傳也爲可久。不爾雖工於組織。粲若珠璣。無實之文。君子
所不取也。近世八友軒趙公。盖亦審於本末輕重之分者也。蚤歲私淑於孤山李公之門。得聞古人爲己之學。經傳,心,近,啓蒙諸書。無不精通。又嘗納拜於懶拙齋李公,淸臺權公。亟蒙奬詡。兄弟四人。俱以能文名。五蓮一桂。榮耀當世。公猶
自視欿然。對案劬書。作冷淡家計。坼號之夕。英廟嘉其叔姪射策俱中。超常調授職。使着帽榮歸。及入直春曹也。厚謙時爲曹長。以小禮杖下吏。同僚皆隱忍苟容。公獨卽日三呈旬。浩然長歸。正廟初服。因公之兄子承宣公入侍。詢及
春曹投簪狀。特命銓曹調用。以騎郞出肅。就直六日又辭歸。自上至發不及見之歎。其恬於名利類此。奉養同樞公。愛敬備至。同樞公壽踰九耋。公亦年七十餘。中裙厠牏。必手自浣濯。每事必先意承順。其居喪也。啜粥茹素。哀毁踰制。
處昆季。勉以征邁。教子弟。必以義方。遠近來學者。每告以科目之外。自有實地工夫。若公其庶乎古之篤行君子矣。是以其發而爲詩文。辭順理勝。不屑爲操觚家雕鎪態。盖其山水風月。陶寫其性靈。松竹梅菊。砥礪其志操。世間得喪榮
辱。無足以累其胷中。而冲澹蕭散之趣。自有不能掩者矣。公嘗曰吾之文不足以章之身行之世。而自示其精神心術之餘。公固不覬於傳後而本領旣如是。其可傳也何疑。獨其旣嘗策名當世。頗蒙前後眷注。而有時無命。不能少試其所蘊。是雖
不足以病公。而良可爲世道喟也。間者公之孫庠生顯佐齎遺卷。請余校讐。辭不能。又要弁卷之作。重於屢違。略綴數語。以見公之文之可傳。實有在於文之外也。辛卯端陽節。眞城李仁行謹書。
▣八友軒公諱普陽墓碣銘 並序▣ [柳台佐]
公諱普陽字仁卿。趙氏漢陽人。高麗僉議中贊諱之壽之后。世奕簪纓。入我朝。左議政良敬公諱涓。至諱琮官縣監。於公爲八代祖。始居嶺南。曾祖諱鳴漢進士號竹林。遊鶴沙門。學邃性理。追服廬墓。祖諱鳳徵進士文都事。贈禮參號幽溪。遊葛庵門。考諱元益正憲同知。宿德重望。見推鄕塾。妣贈貞夫人禮安李氏。士人基晩女。有賢行。以肅廟己丑十月十六日生公。自幼姿稟端詳。誠孝篤至。聰悟絶人。通史初學。能該凡例辨正閏。見者奇之。及長受學於李小隱景翼。間又質疑於懶拙李先生。束脩於淸臺權先生門下。四書六經朱退文字之外。如朞三百啓蒙象數之學。微發端通大義。亟蒙奬詡。以正憲公命。旁治擧子業。與伯氏鈍巖公。文章品格。世穪難兄難弟。而從容鍛鍊。自成一體。屢中鄕解。丁卯兩試司馬。癸巳增廣。主司者以咬菜根百事可做發策。公以無論咬菜食肉。立志堅定。用意勤苦。則天下無不可做之事立論。又以朱夫子種得幾畦杞菊。一腳出門。便不得此物喫証之。遂捷東堂。與從子承旨公錫晦。一榜大闡。五蓮雙桂。聯芳供歡於九耋春闈。例拜典籍。遷監察,禮曹佐郞。時厚謙以該曹亞堂。發怒於參謁時未及祇迎。杖公所帶隷。公浩然决歸。不俟終日。正憲公嘉其志。以爲勝似祿養。自是家居。專意養親。甘毳藥餌。躬自調嘗。中裙廁牏。親執洗滌。親老語澁。傍聽難辨。而承聆無違。母夫人疾革。碎指垂血。暫甦未效。以爲終天之痛。及正憲公喪。哀毁踰禮。前後如一。時年七十。猶啜粥居廬。終三年食素。遇大風雪。中夜號痛曰衣綿處室。猶覺寒逼。泉壤下體魄得無寒乎。正廟辛丑。因承旨公入侍。上問家閥。語及叔姪同榜事。一承宣進奏公以先朝禮郞。忤逆謙投帽歸田。上曰不懾權貴可尙。卽命甄典籍。移兵曹佐郞。一肅恩命。六日南歸。上聞之曰未見斯人。徑歸可惜。戊申以朝官八十。陞通政僉樞兼五衛將。是年六月二十七日卒。十月某日。葬于杜谷先壠丙坐之原。配贈淑夫人坡平尹氏。士人德基之女。柔婉孝恭。先公三十二年歿。墓在石南渭坊西山乾坐。有三男勖,晏,。一女適全煕復。側室男錫𥈋。勖三女無子。嗣顯湜。女適權若采,李寅爕,孫鎭一。晏有三男。顯湜出后。顯迪,顯燾出后。一女適柳儒文。有二男。顯佐生員,顯奎出后。一女適權若度。全煕復一男鎭垕。顯湜一男玉相生員。二女適李彙朝,金禹圭。顯迪一男翼相。三女適林重稷,金近曦,金樂龜。顯佐一男倚相。餘幼不錄。公以天得之姿。襲家傳之緖。行足以矜式鄕邦。識足以論思經幄。文足以黼黻皇猷。才足以蘓捄弊局。而蹇連屯邅。晩占科第。跡屈於郞潛下僚之班。官止於大耋天爵之尊。其日可見之行。不外乎孝親律己讀書課農。而所與友者。山水風月松竹梅菊八箇物而已。雖然晩年出處之大節。確然有藉手者。日城恣橫。氣焰薰天。而不受強臣之威福。華衮垂奬。晉用有階。而歸老山野之本分。苟非爲己之學。實有所得於家庭師友之傳。咬菜立志之堅。能如是乎。是爲之銘。銘曰。
行源敦孝。學由通經。文推藝成。志勵困亨。承受征邁。義利重輕。南省庭試。晩矣奚稱。投簪策驢。含蘆飛鴻。親喜志養。聖垂褒隆。泉甘宅幽。禾畝書櫳。婆娑初服。壽與德崇。緋衣達尊。君子有終。桐山淮水。柳風梧月。貞松綠竹。雪梅霜菊。緬仰遺芬。公在世間。銘詩詔後。庸賁楸原。
嘉善大夫原任禮曹參判兼同知經筵敦寧府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豐山柳台佐撰。
橫城高氏族譜序 b079_251c
民之生久矣。凡今之人。皆始於生民之初。其有能自父祖以上。溯而至於生民之初者乎。書契以前。尙矣
無論。自漢司馬太史所書黃帝以下帝王系譜。已不勝其舛錯。疑也傳其疑可也。無徵闕之可也。嗚呼。苟無徵也。雖孝子慈孫。欲明其所自出。以及乎所不知之後人。亦無如之何矣。此周禮小典小史繼世昭穆之典辨。及族師之官所由設也。先王之考世章倫愛類相仁之義。其不輕而重也如此。而後世不修。故程子嘗以明譜系爲厚風俗之道。張獻公亦嘗眷眷焉。豈無見而然哉。我國雖無族師典辨之政。俗重族書。近世尤盛。凡士大夫之立門戶名世家者。無無譜之家。顧何讓於古昔哉。然而風俗不由是而加厚。舊家
不由是而加興於仁孝。玆曷故焉。噫。所貴乎譜者。欲使後世子孫。得覽於本末之倫。有以感發其尊祖象宗仁親重德之心。而俛焉而歸於厚。此先王設敎之意。而程張二先生之所眷眷者也。今若不務乎此。而爲比俗夸世之歸。則徒文具耳。又何賴焉。况疑而強辨。無徵而不闕。則其弊豈徒太史之疎略而已哉。余於橫城高氏之譜。竊有感焉。高氏本耽羅神明之胄。而闢鴻濛長一方。自羅麗以來。或受封爵。或登仕路。宣著盛大。簪組蟬聯。遂爲望族。本支蕃衍。殆遍東陸。其貫又分而爲三。曰開城曰長興曰橫城。俱以麗朝
勳臣。錫土移封。實同本而殊貫也。橫城之貫。實始於右金吾上將軍花田君。累世燀爀。逮我聖朝。有若贊成公之宿德雅望。爲世推重。繼而芝隱公之志行。翼莊公之勳業。並肩於伯仲之間。則吁亦盛矣。挽近以來。稍若不振。冠冕者少。得姓者多。年代浸遠。支分星散。蘇氏所謂一人路人。亦有不期然而然者矣。高氏子孫。爲是之懼。不顧綿力。務盡誠意。相與合議修譜。明祖宗之肇基。序子孫之分派。以金吾公爲始祖。金吾公以上。則兵火之餘。家乘斷爛。文獻無徵。故寧疑以傳疑。無徵而愼之也。高氏勉之。因其所已能於
傳疑愼重者。而勉其所未然於尊祖象宗仁親重德。則可以無愧於先王之敎。而亦可以少砭比俗而夸世者。斯譜之成。豈獨一家之興孝也哉。嗟呼。上而百世。以至於生民之初而無徵焉。則雖孝子慈孫。亦無如之何矣。下而百世。以至於無竆。則爲高氏孝子慈孫者。因斯譜而可勉也。幹事者高君殷佐達崙甫來。請序於余。余嘉其重本敦族之意。謹以書之。辛丑四月日。謹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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