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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팔우헌(八友軒) 조보양(趙普陽, 1709~788)의 문집 책판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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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우헌(八友軒) 조보양(趙普陽, 1709~1788)의 문집 책판

▣팔우헌집(八友軒集) ▣

八友軒 趙普陽의 문집. 7卷 4冊. 1831. 木板本. 四周雙邊, 半郭 20.5×15.3㎝, 有界, 10行20字, 註雙行, 內向2葉花紋魚眉, 29.3×19.7㎝.

문집은 李仁行의 서문과 八友軒 선생의 世系圖로 시작하여, 卷1은 賦 1편‧詩 142수, 卷2는 詩 108수, 卷3은 詩 88수, 書 18수, 卷 4는 序文 2편‧記 14편‧跋 8편, 卷5는 論 2편‧說 2편‧辨 2편‧箴 1편‧銘 4편‧祭文 25편‧卷6은 誄事 6편‧上梁文 2편‧行狀 5편‧墓誌銘 2편‧雜著 7편, 卷7은 附錄 등으로 구성하고 朴時源의 跋文으로 마치고 있다.

저자는 일찍부터 輕重을 알았기에 爲己의 학문에 힘을 쏟았다. 그러기에 과거 공부는 자연히 소홀히 하였다. 저자의 문집 속에 있는 편지, 변설들은 저자의 학문적 깊이를 알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權相에게 分義의 자리를 말함과 李象靖에게 沽名을 염려하고 있는 모습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저자의 눈높이와 당당함을 엿볼 수가 있다. 勿妄勿助‧鳶飛魚躍과 『西銘』‧『中庸』 등의 변에서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는 理의 실체에 대한 窮究의 자세는 저자의 학문적 자세의 투철함을 알게 해준다.

李象靖에게 말하였듯이 成己는 成物의 의지를 깔고 있다. 그러므로 저자도 또한 小科를 보고 늦은 나이에 大科를 보아 족하와 같이 조정에 들어간다. 旣成의 학자였던 저자는 군주나 주변의 동료로부터 많은 신망을 입게 된다. 하지만 당시 조정의 분위기는 저자의 순수함과 달리 특정 세력이 권세를 잡고 있었다. 그러기에 鄭厚謙이 직분의 높음으로 저자에게 모멸감을 주었던 것이다. 知와 行이 어떠한 관계맺음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자자로서는 견딜 수 없었기에 미련 없이 떠날 수밖에 없었다.

『팔우헌집』을 통해 조선 후기 자기 발전의 의지로 충만하였던 영남 선비의 삶을 읽을 수가 있다. 成物의 의지가 꺾일수록 成己의 의지는 강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마지막까지 독서인의 자세를 고수하였다. 아울러 저자는 집안의 후손이나 동리 후배들의 자기 발전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며 글로 남기고 있다.

 

[조보양(趙普陽) ]

1709~1788(숙종 35~정조 12). 字:仁卿, 號:八友軒, 本貫:漢陽, 父:元益, 母:禮安李氏, 居:安東.

1709년(숙종 35) 10월 16일에 豊山의 외가 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자품이 뛰어났으며 역사를 배우자 좋고 나쁨을 구분하였으니 선배들이 기특해 하였다. 小隱 李景翼(1683~1750)에게 나아가 배우니 학문의 연원을 가지게 되었으며 內外 輕重의 분별을 알게 되었다. 懶拙齋 李山斗(1680~1772)와 淸臺 權相一(1679~ 1760)에게 질의를 하였다. 양 선생이 그릇임을 알아보시고 직접 대하거나 편지로서 권면하기를 爲己의 학문으로 하니 공이 가슴에 담아두고 노력하였다. 이후 府君의 바람으로 과거 공부를 하며 자연스럽게 문장력을 키우게 되었다. 그러나 소과에 번번이 실패를 하다가 1747년(영조 23)에 生員‧進士에 모두 합격하였다. 1773년(영조 49)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공이 白首의 처지에도 과거에 응시한 것은 팔십 노부께 기쁨을 드리기 위함이었다.

공이 처음 벼슬길에 나가자 어울리고 싶어 하는 인물들이 많았으나 아무나 만나지 않았다. 禮曹佐郞이 되어 參謁할 때에 참판인 鄭厚謙(1749~1776)이 禮로서 대하지 않으니 스스로 벼슬에 마음을 빼앗겨 욕을 당하고도 참음은 비굴한 행위라고 생각하여 결연히 조정에서 물러났다. 당시 知舊들과 심지어 정후겸마저 말렸으나 공은 마음을 바꾸지 않고 결행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공이 물러나 돌아오자 부군께서 ‘善養이 祿養보다 낫다.’하여 용기 있는 물러남을 가상해 하였다. 이후 부군을 봉양함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심지어 속옷 등을 직접 빨아 올렸다. 1778년(정조 2) 부군께서 돌아가시자 70의 나이에도 모든 절차에 있어 예를 어기지 않았다. 1781년(정조 5)에 從子인 錫晦가 入侍함으로 인하여 정조가 가계를 묻고 공의 일을 알게 되었다. 정조가 權貴의 위세에 굴하지 않았던 공의 자세를 가상히 여겨 곧 典籍에 임명하였다가 공이 도성에 이르자 騎郞을 임명하였다. 육일간 당직을 섰지만 주상을 뵈올 수가 없었기에 향리로 돌아왔다. 이후 정조는 사실을 전해 듣고 만나지 못하였음을 안타까워하였다. 1788년(정조 12)에 僉樞五衛將에 올랐으나 이미 침상에 누운 지 3년이 지나서였다. 이해 6월에 돌아가니 杜谷의 先陵의 곁에 장사를 지냈다.

▣八友軒集序

▣八友軒集序[李仁行] b079_17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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濂溪夫子嘗曰蘊之爲德行發之爲文章夫得於心者德也見於日用者行也攄發其胸中之蘊者文也然德行本也文藝末也夫惟有是德有是行然後其文也爲可傳而其傳也爲可久不爾雖工於組織粲若珠璣無實之文君子

所不取也近世八友軒趙公盖亦審於本末輕重之分者也蚤歲私淑於孤山李公之門得聞古人爲己之學經傳啓蒙諸書無不精通又嘗納拜於懶拙齋李公淸臺權公亟蒙奬詡兄弟四人俱以能文名五蓮一桂榮耀當世公猶

自視欿然對案劬書作冷淡家計坼號之夕英廟嘉其叔姪射策俱中超常調授職使着帽榮歸及入直春曹也厚謙時爲曹長以小禮杖下吏同僚皆隱忍苟容公獨卽日三呈旬浩然長歸正廟初服因公之兄子承宣公入侍詢及

春曹投簪狀特命銓曹調用以騎郞出肅就直六日又辭歸自上至發不及見之歎其恬於名利類此奉養同樞公愛敬備至同樞公壽踰九耋公亦年七十餘中裙厠牏必手自浣濯每事必先意承順其居喪也啜粥茹素哀毁踰制

處昆季勉以征邁教子弟必以義方遠近來學者每告以科目之外自有實地工夫若公其庶乎古之篤行君子矣是以其發而爲詩文辭順理勝不屑爲操觚家雕鎪態盖其山水風月陶寫其性靈松竹梅菊砥礪其志操世間得喪榮

無足以累其胷中而冲澹蕭散之趣自有不能掩者矣公嘗曰吾之文不足以章之身行之世而自示其精神心術之餘公固不覬於傳後而本領旣如是其可傳也何疑獨其旣嘗策名當世頗蒙前後眷注而有時無命不能少試其所蘊是雖

不足以病公而良可爲世道喟也間者公之孫庠生顯佐齎遺卷請余校讐辭不能又要弁卷之作重於屢違略綴數語以見公之文之可傳實有在於文之外也辛卯端陽節眞城李仁行謹書

 

八友軒公諱普陽墓碣銘 並序[柳台佐]

公諱普陽字仁卿趙氏漢陽人高麗僉議中贊諱之壽之后世奕簪纓入我朝左議政良敬公諱涓至諱琮官縣監於公爲八代祖始居嶺南曾祖諱鳴漢進士號竹林遊鶴沙門學邃性理追服廬墓祖諱鳳徵進士文都事贈禮參號幽溪遊葛庵門考諱元益正憲同知宿德重望見推鄕塾妣贈貞夫人禮安李氏士人基晩女有賢行以肅廟己丑十月十六日生公自幼姿稟端詳誠孝篤至聰悟絶人通史初學能該凡例辨正閏見者奇之及長受學於李小隱景翼間又質疑於懶拙李先生束脩於淸臺權先生門下四書六經朱退文字之外如朞三百啓蒙象數之學微發端通大義亟蒙奬詡以正憲公命旁治擧子業與伯氏鈍巖公文章品格世穪難兄難弟而從容鍛鍊自成一體屢中鄕解丁卯兩試司馬癸巳增廣主司者以咬菜根百事可做發策公以無論咬菜食肉立志堅定用意勤苦則天下無不可做之事立論又以朱夫子種得幾畦杞菊一腳出門便不得此物喫証之遂捷東堂與從子承旨公錫晦一榜大闡五蓮雙桂聯芳供歡於九耋春闈例拜典籍遷監察禮曹佐郞時厚謙以該曹亞堂發怒於參謁時未及祇迎杖公所帶隷公浩然决歸不俟終日正憲公嘉其志以爲勝似祿養自是家居專意養親甘毳藥餌躬自調嘗中裙廁牏親執洗滌親老語澁傍聽難辨而承聆無違母夫人疾革碎指垂血暫甦未效以爲終天之痛及正憲公喪哀毁踰禮前後如一時年七十猶啜粥居廬終三年食素遇大風雪中夜號痛曰衣綿處室猶覺寒逼泉壤下體魄得無寒乎正廟辛丑因承旨公入侍上問家閥語及叔姪同榜事一承宣進奏公以先朝禮郞忤逆謙投帽歸田上曰不懾權貴可尙卽命甄典籍移兵曹佐郞一肅恩命六日南歸上聞之曰未見斯人徑歸可惜戊申以朝官八十陞通政僉樞兼五衛將是年六月二十七日卒十月某日葬于杜谷先壠丙坐之原配贈淑夫人坡平尹氏士人德基之女柔婉孝恭先公三十二年歿墓在石南渭坊西山乾坐有三男勖,。一女適全煕復側室男錫𥈋勖三女無子嗣顯湜女適權若采李寅爕孫鎭一晏有三男顯湜出后顯迪顯燾出后一女適柳儒文有二男顯佐生員顯奎出后一女適權若度全煕復一男鎭垕顯湜一男玉相生員二女適李彙朝金禹圭顯迪一男翼相三女適林重稷金近曦金樂龜顯佐一男倚相餘幼不錄公以天得之姿襲家傳之緖行足以矜式鄕邦識足以論思經幄文足以黼黻皇猷才足以蘓捄弊局而蹇連屯邅晩占科第跡屈於郞潛下僚之班官止於大耋天爵之尊其日可見之行不外乎孝親律己讀書課農而所與友者山水風月松竹梅菊八箇物而已雖然晩年出處之大節確然有藉手者日城恣橫氣焰薰天而不受強臣之威福華衮垂奬晉用有階而歸老山野之本分苟非爲己之學實有所得於家庭師友之傳咬菜立志之堅能如是乎是爲之銘銘曰

行源敦孝學由通經文推藝成志勵困亨承受征邁義利重輕南省庭試晩矣奚稱投簪策驢含蘆飛鴻親喜志養聖垂褒隆泉甘宅幽禾畝書櫳婆娑初服壽與德崇緋衣達尊君子有終桐山淮水柳風梧月貞松綠竹雪梅霜菊緬仰遺芬公在世間銘詩詔後庸賁楸原

嘉善大夫原任禮曹參判兼同知經筵敦寧府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豐山柳台佐撰

 

橫城高氏族譜序 b079_25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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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之生久矣。凡今之人。皆始於生民之初。其有能自父祖以上。溯而至於生民之初者乎。書契以前。尙矣

無論。自漢司馬太史所書黃帝以下帝王系譜。已不勝其舛錯。疑也傳其疑可也。無徵闕之可也。嗚呼。苟無徵也。雖孝子慈孫。欲明其所自出。以及乎所不知之後人。亦無如之何矣。此周禮小典小史繼世昭穆之典辨。及族師之官所由設也。先王之考世章倫愛類相仁之義。其不輕而重也如此。而後世不修。故程子嘗以明譜系爲厚風俗之道。張獻公亦嘗眷眷焉。豈無見而然哉。我國雖無族師典辨之政。俗重族書。近世尤盛。凡士大夫之立門戶名世家者。無無譜之家。顧何讓於古昔哉。然而風俗不由是而加厚。舊家

不由是而加興於仁孝。玆曷故焉。噫。所貴乎譜者。欲使後世子孫。得覽於本末之倫。有以感發其尊祖象宗仁親重德之心。而俛焉而歸於厚。此先王設敎之意。而程張二先生之所眷眷者也。今若不務乎此。而爲比俗夸世之歸。則徒文具耳。又何賴焉。况疑而強辨。無徵而不闕。則其弊豈徒太史之疎略而已哉。余於橫城高氏之譜。竊有感焉。高氏本耽羅神明之胄。而闢鴻濛長一方。自羅麗以來。或受封爵。或登仕路。宣著盛大。簪組蟬聯。遂爲望族。本支蕃衍。殆遍東陸。其貫又分而爲三。曰開城曰長興曰橫城。俱以麗朝

勳臣。錫土移封。實同本而殊貫也。橫城之貫。實始於右金吾上將軍花田君。累世燀爀。逮我聖朝。有若贊成公之宿德雅望。爲世推重。繼而芝隱公之志行。翼莊公之勳業。並肩於伯仲之間。則吁亦盛矣。挽近以來。稍若不振。冠冕者少。得姓者多。年代浸遠。支分星散。蘇氏所謂一人路人。亦有不期然而然者矣。高氏子孫。爲是之懼。不顧綿力。務盡誠意。相與合議修譜。明祖宗之肇基。序子孫之分派。以金吾公爲始祖。金吾公以上。則兵火之餘。家乘斷爛。文獻無徵。故寧疑以傳疑。無徵而愼之也。高氏勉之。因其所已能於

傳疑愼重者。而勉其所未然於尊祖象宗仁親重德。則可以無愧於先王之敎。而亦可以少砭比俗而夸世者。斯譜之成。豈獨一家之興孝也哉。嗟呼。上而百世。以至於生民之初而無徵焉。則雖孝子慈孫。亦無如之何矣。下而百世。以至於無竆。則爲高氏孝子慈孫者。因斯譜而可勉也。幹事者高君殷佐達崙甫來。請序於余。余嘉其重本敦族之意。謹以書之。辛丑四月日。謹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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