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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팔우헌공의 山居八詠(산거팔영)】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8. 5.

◐팔우헌(八友軒, 휘 普陽, 17세, 양경공-병참공파)공의 묘비가 오랜 세월 마모로 읽을 수 없게 되어 지난해 11월 20일 후손들이 뜻을 모아 새로 제작(사진)하였다. 구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보존하고 새로 제작한 비는 묘 우측에 세우고 고유하였다.

◐팔우헌 한양 조공(보양)  묘갈명◑

공의 휘는 보양(普陽)이요 자는 인경(仁卿)인데 조씨니 한양인이다. 고려 첨의중찬 휘 지수(之壽)의 후손으로 대마다 벼슬아치가 계승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휘 연(涓)이 우의정으로 시호는 양경공이다. 휘 종(琮)의 벼슬이 현감이니 공에게는 八대조인데 비로소 영남에 살았다. 증조의 휘는 명한(鳴漢)이니 진사로 호는 죽림(竹林)인데 학사(金應祖)의 문하에서 종유하여 성리학에 깊었으며 양부의 추복을 입고 三년간 여모살이를 하였고 조의 휘는 봉징(鳳徵)이니 진사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도사로 증예조참판인데 호는 유계(幽溪)니 갈암(李玄逸) 문하에서 종유하였다. 고의 휘는 원익(元益)이니 정헌대부동지중추부사인데 숙덕중망(宿德重望)으로 향리의 추종을 받았다. 비(妣)는 증 정부인 예안이씨니 선비 기만(基晩)의 따님으로 착한 행위가 있었다 숙종 기축(一七○九) 十월 十六일에 공을 낳으니 어려서부터 자품이 단정 안상(端正安詳)하며 효성이 지극하고 총명영민함이 사람에게 뛰어나서 통감을 처음 배우는데 능히 범례에 해박(該博)하고 정통(正統)과 정통아님을 분변하니 보는이 들이 기특히 여기었다. 자라서 이소은 경익(景翼)에게서 수학하고 또 난졸재 이선생(山斗)에게 의심스러운 것을 질문하고 청대 권선생 상일(相一)에게 폐백을 드리고 문하에게 사서 육경 주자문 및 퇴계문집외에도 기삼백 계몽 상수학의 미세한 발단까지 대의를 통함으로 자주 칭찬을 받았다. 정헌공의 명으로 과거공부를 곁드려 공부하였다. 백씨 둔암공(鈍巖)과 더불어 문장과품격을 세상에서 난형 난제라 일컬었고 조용히 공부를 거듭하여 스스로 한 문채를 이루었다.여러번 향해에 합격하고 정묘(一七四七)에 사마 양시에 합격하였다. 계사(一七七三) 증광시에서 시험관이 『교채근백사가주(咬菜根百事司做) 나물 뿌리를 먹는자는 모든 일을 가히 지을수 있다』라 책문 글제를 내었다. 공이『나물을 먹거나 육식을 하는 것을 논할 것 없고 입지(立志)가 견고하며 정신차려 부지런히 신고하면 천하에 못할 일이 없다고 논하고 또 부자가 몇고랑의 구기자와 국화를 심고 한걸음 문밖을 나와 문득 이것을 먹지 않은 증저가 있었으되 드디어 동당(東堂)에 합격했다』고 하였다. 좌승지공 석회(錫晦)와 동방에서 이름이 드러났으며 다섯 진사와 두 급제가 나란히 九十세에 가까운 아버님 앞에 즐거움을 바치었다. 선예에 따라 전적에 배명하였다가 감찰로 옮겼으며 예조좌랑으로 옮겼을 때에 후겸이 그 조의 참판으로서 공이 왕을 뵈오려 갈 때 미쳐 그를 공경히 맞이하지 않았다고 노(怒)하여 공이 거느리는 하예들을 권장(權杖)으로 치게하니 공은 호연(浩然)히 집으로 돌아 가기로 결심하여 그날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정헌공이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관록(官祿)으로 나를 기르기보다 낫다』 하였다. 이로부터 집에 거하여 봉친에 전념하되 맛좋은 음식과 약다림등은 몸소 행하며 맛을 보고 속중의에 오물이 묻은 것은 친히 빨았으며 아버님이 노래에 말씀이 어둔해져서 곁에서 듣는 이는 무슨 말씀인지 분간을 못하지만 공은 잘 알아 들었다. 모부인의 임종시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리었으나 잠시 소생하실 뿐 효과가 없었음을 마지막 아품으로 삼았다가 정헌공의 상에 임해서 애통하며 몸을 돌보지 않음이 예에 넘쳤고 전상과 여일하였다. 그때에 나이가 七十이 돼 죽을 마시고 여막에 계시면서 三년을 마치도록 소찬으로 지냈으며 태풍이 불고 대설이 내릴 때는 밤중에 통곡하면서 『솜옷을 입고 실내에 거해도 한기가 드는데 지하에 계시는 체백이 춥지나 않으실까』 하였다. 정조 신축(一七八一년)에 승지공이 입시(入侍)할때에 왕이 가벌을 묻는데 숙질이 동방급제하여 함께 조정에 있었다고 승지공이 주달하기를 『공이 전왕때 예조의 낭관으로서 후겸을 미워서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권귀(權貴)를 두려워하지 않았음이 가상(可尙)하다』 하시며 곧 전적에 명하시고 병조좌랑에 옮기었는데 한번 왕의 은혜에 감사하며 명에 응하였다가 六일만에 퇴직하였다. 왕이 듣고 이르기를 『이 사람을 보지 못하고 곧 돌아간 것이 가석하다』 하시었다. 무신(一七八八년)에 조관(朝官) 八十세로서 통정대부 첨지 충추부사겸 오위장에 승급하고 이해 六월 二十七일에 졸하여 十월 어느날 두곡 선영국내 병좌에 안장했다. 배위는 숙부인 파평윤씨니 사인 덕기(德基)의 따님이니 유순(柔順) 완용(婉容) 효순(孝順) 공손(恭遜)하였고 공보다 三十二년 먼저 세상을 뜨시었다 묘소는 석남 위방에 서쪽 산 건좌에 있다.
四남 二녀가 있으니 욱(勗) 안(晏) 집(집)

) 석우(錫우)이며 一녀는 축산 전희복(全熙復)이고 욱(勗)은 三녀이고 아들이 없기에 현식(顯湜)으로 뒤를 이었고 녀는 권약채(權若菜) 이인섭(李寅燮) 손진일(孫鎭一)에게 출가하였고 안(晏)이 三남이나 현식(顯湜)은 출후하고 현적(顯迪)이며 현도(顯燾)도 출후하였고 一녀는 류유문(柳儒文)에게 출가하였다. 집(집)

)은 二남이니 현좌(顯佐)는 생원이오 현규(顯奎)는 출후하였고 一녀는 권약도(權若度)에게 출가하였다. 전희복이 一남이니 진구(鎭垕)이다. 현식이 一남이니 옥상(玉相)은 생원이고 二녀는 이휘조(李彙朝) 김우규(金禹圭)에게 출가하였고 현적(顯迪)이 一남이니 익상(翼相)은 생원이고 三녀는 임중직(林重禝) 김근희(金近曦) 김낙구(金樂龜)에게 출가했고 현좌(顯佐)가 一남이니 의상(倚相)이오 나머지는 나이가 어려서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하늘에서 받은 자질로 가정 전래의 사업을 승습하여 행검을 족히 향당의 모범이 될만하고 학식은 족히 경악(經幄)에서 논란만하고 문장은 족히 황유(皇猷)를 빛낼만하고 재주는 족히 폐국(弊局)을 구제할 만하되 가기에 괴로워 머뭇거렸으나 늦게서야 과거에 급제하였으되 행적은 낭관하료의 반열에서 허리를 굽혔으며 벼슬이 수로써 통정계자에 그쳤으나 그날 가히 알만한 행의는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몸을 규률있게 함에 지나지 않고 글 읽으며 농사를 과업으로 삼아 산수(山水) 풍월(風月) 송죽(松竹) 매국(梅菊) 八개 물로 더불어 벗할 뿐이었다. 비록 그러나 만년 출처의 대절이 있어 확연히 남을 도와 줄 수가 있었으니 일성(日城)이 방자를 횡행하며 그 기세가 하늘을 찌릇듯 해도 강신(强臣)의 압박을 받지 않았다 왕께서 포장히성 벼슬에 등용하였으되 늙어서 산야의 본문으로 돌아왔으니 진실로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실로 가정과 스승에게서 얻은 바가 있어서 나물 뿌리를 씹으며 입지를 견고히 함이 아니라면 어찌 능히 이같겠는가. 이것이 칭송할만 하기에 명하노니


행실의 근원인 효성이 독실하고 학문은 경서에 통함이었네
학문을 미루어 문예가 이루어졌고 뜻은 곤하고 형통함에 힘썼네
일정월매를 이어받아 이를 가벼히 하고 의를 중히 하셨습니다.
성지에서나 정시에서 급제함을 어찌 늦다 이를겠습니까
나귀를 타고 벼슬길에 나갔다가 갈잎 물고 나르는 기러기었지요
어버이는 지양(志養)을 기뻐하고 성상은 포장을 하시도다
샘물은 달고 집은 그윽한데 고랑에는 벼 난간에는 서책일세
초복(初服)으로 돌아와서 수(壽)와 더불어 덕(德)이 높았네
고관(高官)의 관복으로 군자(君子)가 고종명 하셨도다
동산의 산 회수의 물 버들의 바람 오동의 달
정조있는 솔과 대나무 설중의 매화 서리후 국화에 끼친 향기 우두커니 우러르면 공이 세간에 계시는 듯 합니다.
송덕의 글 후세에 알리니 영역의 도리송 빛나리이다


■가선대부 원임 예조참판겸 동지경연사 돈령부사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풍산 류이좌(柳台佐) 지음■

▣墓碣銘 並序 [柳台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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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普陽字仁卿趙氏漢陽人高麗僉議中贊諱之壽之后世奕簪纓入我朝左議政良敬公諱涓至諱琮官縣監於公爲八代祖始居嶺南曾祖諱鳴漢進士號竹林遊鶴沙門學邃性理追服廬墓祖諱鳳徵進士文都事贈禮參號幽溪遊葛

庵門考諱元益正憲同知宿德重望見推鄕塾妣贈貞夫人禮安李氏士人基晩女有賢行以肅廟己丑十月十六日生公自幼姿稟端詳誠孝篤至聰悟絶人通史初學能該凡例辨正閏見者奇之及長受學於李小隱景翼間又質疑於懶拙李先生束脩於淸臺權先生門下四書六經朱退文字之外如朞三百啓蒙象數之學微發端通大義亟蒙奬詡以正憲公命旁治擧子業與伯氏鈍巖公文章品格世穪難兄難弟而從容鍛鍊自成一體屢中鄕解丁卯兩試司馬癸巳增廣主司者

以咬菜根百事可做發策公以無論咬菜食肉立志堅定用意勤苦則天下無不可做之事立論又以朱夫子種得幾畦杞菊一腳出門便不得此物喫証之遂捷東堂與從子承旨公錫晦一榜大闡五蓮雙桂聯芳供歡於九耋春闈例拜典籍遷監察禮曹佐郞時厚謙以該曹亞堂發怒於參謁時未及祇迎杖公所帶隷公浩然决歸不俟終日正憲公嘉其志以爲勝似祿養自是家居專意養親甘毳藥餌躬自調嘗中裙廁牏親執洗滌親老語澁傍聽難辨而承聆無違母夫人疾革碎指垂血暫甦未效以爲終天之痛及正憲公喪哀毁踰禮前後如一時年七十猶啜粥居廬終三年食素遇大風雪中夜號痛曰衣綿處室猶覺寒逼泉壤下體魄得無寒乎正廟辛丑因承旨公入侍上問家閥語及叔姪同榜事一承宣進奏公以先朝禮郞忤逆謙投帽歸田上曰不懾權貴可尙卽命甄典籍移兵曹佐郞一肅恩命六日南歸上聞之曰未見斯人徑歸可惜戊申以朝官八十陞通政僉樞兼五衛將是年六月二十七日卒十月某日葬于杜谷先壠丙坐之原配贈淑夫人坡平尹氏士人德基之女柔婉孝恭先公三十二年歿墓在石南渭坊西山乾坐有三男勖

一女適全煕復側室男錫𥈋勖三女無子嗣顯湜女適權若采李寅爕孫鎭一晏有三男顯湜出后顯迪顯燾出后一女適柳儒文有二男顯佐生員顯奎出后一女適權若度全煕復一男鎭垕顯湜一男玉相生員二女適李彙朝金禹圭顯迪一男翼相三女適林重稷金近曦金樂龜顯佐一男倚相餘幼不錄公以天得之姿襲家傳之緖行足以矜式鄕邦識足以論思經幄文足以黼黻皇猷才足以蘓捄弊局而蹇連屯邅晩占科第跡屈於郞潛下僚之班官止於大耋天爵之尊其日可見之行不外乎孝親律己讀書課農而所與友者山水風月松竹梅菊八箇物而已雖然晩年出處之大節確然有藉手者日城恣橫氣焰薰天而不受強臣之威福華衮垂奬晉用有階而歸老山野之本分苟非爲己之學實有所得於家庭師友之傳咬菜立志之堅能如是乎是爲之銘銘曰

行源敦孝學由通經

文推藝成志勵困亨

承受征邁義利重輕

南省庭試晩矣奚稱

投簪策驢含蘆飛鴻

親喜志養聖垂褒隆

泉甘宅幽禾畝書櫳

婆娑初服壽與德崇

緋衣達尊君子有終

桐山淮水柳風梧月

貞松綠竹雪梅霜菊

緬仰遺芬公在世間

銘詩詔後庸賁楸原

嘉善大夫原任禮曹參判兼同知經筵敦寧府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豐山柳台佐撰

 

◐선조님 시심◑

【팔우헌공의 山居八詠(산거팔영)】

♤右山 산●

推不去呼不來(추불거호불래) 밀어도 가지 않고 불러도 오지 않으니

氣深穩態偃蹇(기심온태언건) 깊고도 고요한 기상 우뚝 솟은 모양이네

不關秋葉春花(불관추엽춘화) 가을단풍 봄꽃을 상관하지 않으니

可愛天然眞面(가애천연진면) 자연 그대로의 참다운 모습 사랑할만하네

♤右水 물●

去去何時到海(거거하시도해) 흐르고 흘러 언제 바다에 이르는가?

潺潺日夜不已(잔잔일야불이) 졸졸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르네

旣浥餘波濯面(기읍여파탁면) 흘러내리는 잔물결에 얼굴을 씻으니

更得淸音盈耳(갱득청음영이) 다시금 해맑은 소리 귓가에 가득하네

♤右風 바람●

不知何去何來(불지하거하래) 어디로 가고 어디서 오는지 모르지만

有時盈軒滿室(유시영헌만실) 때때로 난간과 방에 가득 불어오네

來看松竹分披(래간송죽분피) 바람 불면 송주기 흩날림을 볼 수 있고

去認琴書靜寂(去認琴書靜寂) 불고가면 금서(琴書)가 고요해짐을 알겠네

♤右月 달●

天下誰家不照(천하수가부조) 세상에 뉘 집인들 비추지 않으리

最是得意吾盧(최시득의오노) 우리 집을 가장 비추고 있네

不怕白髮分明(불파백발분명) 백발이 분명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獨臥藜牀看書(독와려상간서) 홀로 여상에 누워 글을 읽네

♤右松 소나무●

始從毫末微妙(시종호말미묘) 처음엔 털끝처럼 작다가

終得拂雲干霄(종득불운간소) 나중엔 구름에 닿을 듯 하늘을 찌르네

若不支了明堂(야불지료명당) 명당을 받치지 않을 것 같으면

便要雲鶴來巢(편요운학래소) 구름 위에 학이 와서 둥지를 틀겠지

♤右竹 대나무●

不須渭上千畝(불수위상천무) 위수(渭水) 가에 천 이랑은 바라지 않아도

自愛園中數叢(자애원중수총) 동산 속에 몇 떨기를 절로 사랑하네

歲暮不改顔色(세모불개안색) 한해가 저물어도 그 모습 변치 않으니

留帶采薇淸風(유대채미청풍) 채이(采薇)의 맑은 기풍을 띠고 있네

♤右梅 매화●

栽汝故近幽軒(재여고근유헌) 짐짓 그윽한 집 가까이 너를 심으니

何所獨無芳草(하소독무방초) 어딘들 유독 방초가 없었겠는가

年年一番春雨(년년일번춘우) 해마다 한 번의 봄비에

要我巡簷共笑(요아순첨공소) 내게 처마를 따라 함께 웃게 하겠지

♤右菊 국화●

屈餐英陶汎杯(굴찬영도범배) 굴원의 떡잎 먹고 도잠이 술잔에 띄움은

取其趣非爲食(취기취비위식) 그 정취를 취함이지 먹기 위함이 아니라네

若使只爲口腹(야사지위구복) 만약에 다지 배를 채우려 하였다면

合種數畝藜藿(합종수무려곽) 몇 이랑의 여곽을 심는 것이 합당하겠지

【해 설】

위 시는 팔우헌(八友軒, 휘 普陽, 17세, 양경공파)공이 권신의 횡포에 사직한 후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며 자연을 벗 삼아 살며 산, 물, 바람, 달,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 등의 아름다움을 6언 시로 8수를 노래하였는데 대종보 제109호에 앞 두 수만 소개한데 이어 나머지 6수를 소개합니다.

공께서는 영조 23(1747)년 생원·진사 양시에 입격한 후 1773년 중광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을 거쳐 병조좌랑이셨다. 외척 예조 참판 정후겸(鄭厚謙)이 공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종을 데려다 매질을 함에 숙배(肅拜) 후 사직하셨고, 이후 첨지중추부사와 오위장에 승직되셨으나 부임하지 않으셨다.

귀향 후에는 천곡서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며 청빈한 생활을 하셨으며, 박손경, 이상정, 이상진 등 당대의 문사들과 교류하셨다.

『八友軒文集(팔우헌문집)』 7권 4책과 한문 단편 모음집으로 서당 교재로 쓴 『汨童錄(골동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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