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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조보양행장(趙普陽行狀)[弟趙宜陽謹書]■(梧竹齋集) 梧竹齋 趙宜陽의 문집. 6권 3책. 玉川 趙德隣의 시문집. 18권 9책. 목판본.■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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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보양행장(趙普陽行狀)[弟趙宜陽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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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姓趙氏。諱普陽字仁卿漢陽人。高麗僉議中贊諱之壽其鼻祖也。是生諱暉雙城摠管。是生諱良琪。十三從忠烈公金方慶。征日本。元世祖賜錦袍玉帶以奬之。襲封龍城君。是生諱暾。繼世襲封。是生諱仁璧龍源君贈漢山伯。以太祖姊壻。見麗運將訖。隱襄陽。堅不事二姓之節。襄人爲立忠賢祠。是生諱涓入我朝。左議政謚良敬公。至諱琮淸河縣監。避文正公門禍。贅居榮川。於公爲八世。曾祖諱鳴漢進士號竹林。受業金鶴沙門。追服居廬終三年。祖諱鳳徵進士文科縣令。贈禮曹參判號幽溪。從遊於李葛庵門下。考諱元益正憲同知。以宿德重望。見推鄕里。妣贈貞夫人禮安李氏。諱基晩之女。有賢行。博識今古。吾兄弟入學之前。能諳歷代典故。多母氏敎也。有丈夫子五人。公居第二。公肅廟己丑十月十六日未時。生于豐山外氏第。幼時聰穎端詳。篤孝純至。出於天性。自學曾史江鑑。能辨別正閏。區分淑慝。先進見者皆奇之。承先府君命。受學於李小隱景翼。李卽孤山先生門人也。學有淵源。親炙日久。已知內外輕重之別。心近諸書。手自繕寫。不離懷袖。至於朞策大衍河洛之數。無不默會旁通。間嘗質疑于李懶拙齋及權淸臺先生。兩先生深器重之。或以面命。或以書勉。要不出古人爲己之學。公服膺勿失。踐履篤實。俛焉日有孜孜。先府君又以門戶之故。使之傍治擧業。不待連篇累牘而自然有百中之能。自己酉以後。輒擧大小鄕解。而連詘省試。丁卯俱中生進。癸巳同從子承宣君錫晦登第。自上引見。特下著帽踰嶺之敎。直拜典籍。歸榮之夕。先府君年八十餘。諸子列侍。五蓮雙桂。輝暎一庭。亦足爲悅親之資。公之白首應擧。蓋爲親屈也。出身之初。公卿士友慕聲名願交者甚衆。而公乃望望然若將凂焉。雖荊屋間有雅素者。一不與之相接。雖以此見枳宦途。不恤也。已而拜監察。尋拜禮曹佐郞。當參謁時。賊臣厚謙爲參判。以曹郞之未及祇迎杖下隷。公語人曰此人勢焰薰天。輕蔑士流如此。此君子見幾之時也。且白頭郞官。見辱於乳臭小兒。而若復苟簡懷祿。是奴顔婢膝等耳。遂决然舍去。泮中知舊或相挽止。謙賊亦有悔意。使人留行。不顧也。歸路有詩云君親一體意。來去兩難忘。有老人在逆旅。嘲考課時去官曰。此官員亦未免鄕闇。不爾則歸臥林泉。讀書課學。勞農節用。反有勝於薄官。蓋此老人亦隱者流。歸覲堂下。則先府君嘉其勇退之志。謂以善養。勝似以祿養也。公自此家居。專以養親爲事。年過六旬。甘毳之奉。藥餌之需。必躬自調嘗。至如中裙廁牏之物。親自洗滌。不令人代。曰吾親之褻衣衾。吾豈可使人見裏。先府君晩年語澁。傍人皆聽瑩。而公必隨意任使。少無違拂。此非以親心爲心而能然哉。公每以丁巳內囏時斷指未效。爲終天之痛。及戊戌丁憂。恰滿七耋。而歠粥面墨。淡菜終制。一如前喪。古人終身之慕。公殆無愧矣。當宁辛丑。因錫晦入侍。自上問及家閥。有筵臣進曰其叔趙普陽。以先朝禮郞。忤曹長逆謙而投帽歸田矣。上曰。不畏權貴。能遂初服。其志可尙。特命政官。卽除典籍。公以嗣聖卽阼。軫念幽潛。爲一覲耿光之階。而及至都下。移拜騎郞。纔直六日。决歸鄕里。居數日。上命錫晦入侍。問乃叔在否。對曰纔過直番。已出東門。上曰。噫未見斯人而徑歸可惜。自是厥後。永作天放之民。而戊申。以搢紳年八十。陞僉樞五衛將。公之委頓牀笫。已三載矣。竟以是年六月二十七日考終。以十月某日。葬于杜谷丙坐之原。從先兆也。嗚呼悲夫。公天資篤厚。才調孤高。假使晉用於時。則學力見識。優於論思補闕之列。慈良廉謹。裕於撫字拯濟之方。至其諫諍之姿。勁直之節。庶幾鳳朝陽鷹殿上。而不惟進塗之崎嶇。年齡之衰晩。蓋其功名之念。從初淡薄。內無歆羡。外絶矜夸。以是不屑屑於得失榮悴之場。常自激昂曰士君子不于朝則山林而已矣。若早了科業。當結廬泉石佳處。揷萬卷書。種一畦菊。與村秀才。料理舊業足矣。故纔涉世路。遂能脫畧進取。無一毫顧戀之意。晩搆讀書洞數架屋。日處其中。兢存硏索。幽獨得肆之地。而猛加省察之工。稠人廣坐之中。而切戒流注之想。疏食菜羹。人所不堪。而處之裕如。不啻列鼎之甘。盥櫛衣冠。至老易懈。而自持愈嚴。常如端冕之色。一言語之際而心未嘗放也。一起居之間而體未嘗肆也。左右圖書。一室涔寂。常有所事。而有人不及知者。遠近學徒。多聞風而來。必至誠誨誘。使知科目之外。有正己需世之學者。其功效豈淺淺哉。然性本謙讓。未嘗以師道自處。雖親知間傳後文字。必謙不自當。曰世自有人。當時交遊如李大山伯仲。朴南野,李下枝諸公。皆是道義之契。而於大山翁。尤景慕欽仰之不已。聞其喪。爲之食素數日。伯氏鈍巖公。當世大文章也。日與之塤唱篪和。日征月邁。而嘗曰伯氏之文。如打鐵作器。雷轟電掣。聳動人耳目。而細觀或有鍛鍊未盡處。吾之文。雖未能動人耳目。而從容鍛鍊。未有打不過處。蓋公之所嗜。尤在洛閩書。而發之文者亦如是也。愛諸弟。各取其所長而奬進之。每與之談論古今。樂而忘倦。一室中和氣常融如也。嘗謂子弟曰凡人之以孝得名。吾甚耻之。夫孝如曾子。蓋爲職分之當爲而已。何必標之名稱而耀人耳目哉。蓋公之事親。生死葬祭。靡有不盡。而常欿然不自有焉。故其言如是。每中夜起坐。暗誦古書。或經或傳或朱子書或班馬史。非疾病出入。恒如是也。其讀書有會心處。不覺手舞足蹈。至於忠臣烈士殺身成仁處。輒感憤流涕。若其閒居雅趣。則在山水風月松竹梅菊。總之爲八友。以扁其軒。蓋不但爲景物役也。當竢知者知之耳。有集若干卷藏于家。配坡平尹氏。德基之女。贈淑夫人。生長儒素之門。孝謹慈惠。克配君子。當辛亥大侵。一門全活。亦惟夫人是賴也。先公三十二年歾。葬石南渭坊西山乾坐之原。有三男一女。男長勖。次晏,。女適竺山全煕復。餘男錫𥈋。勖無子。以晏子顯湜繼。三女適權若采,李寅爕,孫鎭一。晏有三男一女。男顯湜出繼。顯迪,顯燾出繼。女適柳儒文。有二男一女。男顯佐,顯奎出繼。女適權若度。全煕復有一男鎭垕。顯湜有一男二女。男玉相。女適李彙朝。餘未行。顯佐有一男倚相。宜陽於諸昆弟。最後死。得見公始終獨久。然今耄且病矣。於公日用事行。蓋茫如也。只畧敍其大槩如右。以竢立言君子之采擇云。舍弟宜陽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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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宜陽의 玄孫인 敬泰가 조의양의 유고를 수집, 편차하여 10行 20字 상 중 하 3冊의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柳必永이 序文을 썼고, 宋啓欽이 跋文을 썼다. 趙宜陽이 생전에 詩에 많은 공력을 기울인 까닭에 문집에는 詩가 많았고, 특히 주자와 퇴계의 詩에 次韻한 것이 많았다. 시는 주로 고시체인 漢魏體를 모범으로 하였기 때문에 장편이 많다. 특히 [仍足百韻 詩呈李艮翁夢瑞獻慶]은 1,400字나 되는 대작이며, 賦에는 [白鹿洞賦] [感春賦] [空洞賦]가 있다. 이 문집은 古詩와 樂府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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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양(趙宜陽, 1719-1808), ≪오죽재문집(梧竹齋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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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오재집(守吾齋集)

守吾齋 安敏修의 문집. 4권 2책. 목판본.

발문은 없고 권두에는 1800년(정조 24)에 쓴 豊山 柳의 서문이 있다. 문집의 간행도 대개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문집 안에서 집안이 영쇠함을 여러 차례 토로한 적이 있는데, 그런 연유인지 문집의 편차가 정밀하지 못한 편이다. 즉 목차와 실제 본문의 내용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상세한 편집과 검토가 부족했던 까닭으로 보인다.

저자의 글 가운데 특히 제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문장력이 당시 지역사회에서 인정을 받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 가운데는 병곡 권구와 그 자질들에 대한 제문이 또한 많아서 자신이 병곡의 학맥을 계승한다는 의식이 무척 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일찍부터 안질을 앓아 출입이 부자유스러웠는데 문집에는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는 내용의 글이 많고, 자식들에게 보낸 가서 가운데는 절에 들어가서 공부하는 자식들의 공부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내용도 많다. 특이한 내용으로는 무신란의 진압에 공을 세운 후 영남의 사림들 간에 오갔던 논의와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언급들이 편지 속에 들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번 기회가 영남 남인들이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하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처사형 선비의 고단한 삶을 적은 글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안민수(安敏修)

1724~1790(경종 4~정조 14). 字:訥甫, 號:守吾齋, 本貫:順興, 父:井瑞, 母:安東金氏, 居:安東.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능을 보였으며 14세 무렵인 1737년(영조 15)에 부친의 명으로 屛谷 權榘의 문하에서 배웠다. 병곡은 그의 학문적 기틀이 이미 갖추어졌음을 알고 매우 중시하였다. 병곡이 丸窩의 남쪽에 지은 時習齋에서 사람들을 가르칠 때도 찾아가 배웠다. 1740년(영조 18)에 혼인을 했지만 안질에 걸려 평생의 고질이 되었다.

1749년(영조 25) 겨울에 葛田里로 옮겨가 살았다. 뜰에 온갖 화초와 약용 식물 그리고 반송을 옮겨 심고 아취를 즐겼다. 재실의 이름을 守吾齋라고 붙이고 號로 삼았다. 1790년(정조 14)에 선영에 碣石을 세우는 일로 모든 일을 주선하다가 병을 얻었고, 그 해 10월 초2일에 세상을 떴으니 향년 67세였다. 12월 7일 서후 耳開里에 묻혔다. 부인은 豊山柳氏 통덕랑 潝의 여식으로 서애 선생의 7세손이었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爾宅이고 차남은 爾定이며 딸은 李宗宅에게 시집갔다.

저자는 평생 향리에서 학문과 효의 실천에 힘쓴 처사형 선비였다. 생모와 계모를 한결 같은 정성으로 모셨으며 동생들을 성심으로 보살폈다. 둘째 동생이 먼저 세상을 뜨자 어린 조카들이 학업과 혼인에 때를 놓치지 않도록 보살폈으며 부부관계에서는 손님처럼 서로 공경했다. 친구의 부고를 들으면 친소관계에 따라 처신을 달리했으며 노복이 죽어도 마찬가지로 했다.

의복은 검소하게 하고 거처하는 곳은 정결하게 했으며 비록 병중이라도 함부로 눕지 아니하였다. 잡서를 가까이 하지 않고 긴요한 책 몇 권만 책상에 두고 보았다. 스승인 병곡 권구의 敬·謙·恕 석 자를 좌우명으로 삼았는데, 독서에 있어서는 오직 心身에 비추어 보았으며 단지 사장을 일삼지 않았다. 선현의 문집을 볼 때는 반드시 중요한 부분을 베껴서 스스로 경계로 삼았는데, 병곡 선생의 유사와 가서 수십조를 특별히 중시했으며 다른 사람의 문집과 자별한 맛이 있다고 했다.

평생 동안 경사자집을 두루 공부했지만 그 중에 특히 『중용』과 『대학』을 좋아했다. 새벽이면 「四勿箴」, 「敬齋箴」, 「夙興夜寐箴」과 주자의 「武夷櫂歌」 그리고 퇴계의 「四時吟」을 읊조렸다. 또 퇴계 선생의 自銘詩를 특히 좋아하여 단정히 앉아 장중하게 읊조리지 않을 때가 없었는데 병이 나서 죽기 직전까지 멈추지 않았다.

일찍부터 과거공부를 해서 時文에 있어서도 상당한 이름을 얻었지만 명성에 급급하지 않았고, 38세 무렵에 과거에 실패한 이후로는 응하지 않았고 科名을 이루지도 못하였다. 柳와는 특히 『심경』과 『근사록』에 관하여 10여 조에 걸친 정치한 논변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가 공부한 것은 일용간의 도리였고 그가 지은 문자는 대개 사실적인 것이었다.

 

오죽재집(梧竹齋集)

梧竹齋 趙宜陽의 문집. 6권 3책.

趙宜陽의 玄孫인 敬泰가 조의양의 유고를 수집, 편차하여 10行 20字 상 중 하 3冊의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柳必永이 序文을 썼고, 宋啓欽이 跋文을 썼다. 趙宜陽이 생전에 詩에 많은 공력을 기울인 까닭에 문집에는 詩가 많았고, 특히 주자와 퇴계의 詩에 次韻한 것이 많았다. 시는 주로 고시체인 漢魏體를 모범으로 하였기 때문에 장편이 많다. 특히 [仍足百韻 詩呈李艮翁夢瑞獻慶]은 1,400字나 되는 대작이며, 賦에는 [白鹿洞賦] [感春賦] [空洞賦]가 있다. 이 문집은 古詩와 樂府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1719∼1808(숙종 45∼순조 8). 字:義卿, 號:梧竹齋, 本貫:漢陽, 父:元益, 母:禮安 李氏, 居:安東.

趙宜陽은 正憲大夫로서 同知中樞府事를 지낸 趙元益과 李基晩의 딸 사이에 1719년(숙종 45)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學才가 있어 글을 많이 읽었으나 목이 붓는 병이 있어 조용한 서재에서 종일토록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장성하여 訥隱 李光庭를 찾아 뵙고 詩에 관하여 깊이 배웠다. 또 後村 李守淵에게 師事하였다. 20세가 넘어서는 여러 차례 향시에 급제하였고 장원을 차지한 적도 많았다. 1771년(영조 4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794년(정조 18) 조정에서는 왕후의 장수를 축하하여 慶科 別試를 베풀었는데, 공은 이 시험에 額外로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1807년(순조 7)에는 관찰사의 啓聞에 의해 가선대부를 더하고 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1808년(순조 8)에 90세의 나이로 죽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남달랐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평소에는 겸손하여 무능한 것처럼 하였으나 내적으로는 강건하여 일을 한번 결정하면 남들이 막지 못하였다. 공은 평생 춥고 배고픈 것으로 근심하지 않았으며 다만 옛사람의 서책을 몹시 좋아하여 많은 독서를 하였다. 특히 {周易}에 대해서는 매일 1편씩 읽기를 수십년을 계속하였다. 伯氏인 葵陽이나 仲氏 普陽과는 매일 함께 강설하였다.

공은 평생 동안 詩에 많은 공력을 쏟았다. 海左 丁範祖 艮翁 李夢瑞와 특히 가깝게 교유하였으며, 후세 사람 중에는 梧竹 海左 艮翁 세 사람은 당대 安東지역을 대표하는 시인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朱子와 退溪를 존모하여 양현의 詩에 次韻한 것이 책을 이룰 정도였다. 臥雪 李尙慶 虛舟 李宗岳 南屛 鄭璞 등 安東의 시인들과 함께 詩會를 열기도 하였다. 南屛은 "우리가 죽은 후에는 安東의 풍류가 쓸쓸하리라." 하였다. 공은 중년에 香山洞에 살았는데, 鳳凰城 아래에 梧竹齋를 짓고 自號로 삼았다.

 

玉川 趙德隣의 시문집. 18권 9책. 목판본.

서문과 발문이 없어 간행연대와 경위를 자세히 알 수 없다. 문집에는 방대한 양의 詩와 편지, 그리고 상소문과 행장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저자가 유람하면서 본 경치와 저자의 심회를 읊은 것들도 있지만, 輓詩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아울러 행장도 많이 집필하고 있다. 그가 쓴 만시와 행장을 보면 당시 소론과 남인의 중심인물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는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 이들을 분석해도 마찬가지이다. 洪宇遠, 洪萬朝, 權大運, 李徽逸, 金邦杰, 沈檀, 李眞望, 權榘, 李光庭, 金聖鐸, 李栽 등이 그들이다. 아울러 편지에는 朴師洙·吳命恒·朴文秀 등 무신란을 평정하기 위해 활약하던 정부 관리들과 적정의 동태에 대한 토론과 토벌에 관해 구체적으로 상의한 내용까지 담고 있다. 이외에 저자가 지은 행장과 묘갈명 등을 보면 당시 남인의 주요 인사들과 폭넓게 교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상소는 대부분 사직소인데, 특히 1725년에 올린 「辭司諫院司諫疏」가 주목된다. 이 상소는 이후 중앙정계에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아울러 저자로서는 영욕이 함께한 상소이기도 하다. 소론과 남인 사이에서는 정도를 걸은 인물로 평가되는 반면, 노론 측으로는 극히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처럼 『옥천집』을 보면 노론과 소론·남인 간의 정권교체와 갈등이 극심한 시기에 저자가 차지했던 정치적 위상이 잘 드러나고 있다. (李旭)

1658∼1737(효종 9~영조 13). 字:宅仁, 號:玉川·滄洲, 本貫:漢陽, 父:頵, 母:豊山柳氏, 居:英陽.

어려서 부친이 별도로 지은 學舍에서 맏형과 함께 공부하였고, 葛庵 李玄逸에게 사사하였다. 1678년(숙종 4) 진사에 올라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6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당시 柳世鳴은 당대의 好學者로 저자 형제를 꼽았고, 權大運은 저자를 당대 최고의 학자로 칭송하였다. 이후 설서·교리·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08년 江原道 都事가 되어 현실에 맞는 量田을 감사에게 건의하였다. 1721년 양역변통논의가 진행될 때에는 양역 변통 이전에 재정을 줄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1725년 司諫의 관직을 사양하면서, 저자가 생각하는 당면 과제 10가지 조목을 상소하였는데, 당시 정국과 관련해 민감한 사안(신임의리와 영조의 처신 등)을 다루었다가 종성에 유배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이 일어남으로써 소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에 3년간의 유배가 끝나고 30여세의 나이로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었으나, 서울에 들어와 肅謝한 다음 곧 고향으로 돌아갔다. 1728년 3월 戊申亂이 일어나자 嶺南上道號召使에 제수되어 의병을 규합하였다. 이 공로로 동부승지에 임용되었다. 얼마 뒤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후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滄洲精舍를 짓고 학문에 몰두하자 원근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736년 노론에 의해 다시 한 번 1725년의 상소와 연관되어 탄핵을 받아 추국을 당하였으나 결국 무죄라는 판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제자들이 저자의 무고함을 알리는 상소를 올린 것이 문제가 되어 제주로 유배가던 중 강진에서 졸하였다. 부인 안동권씨와의 사이에 3남 1녀가 있다. 1725년의 상소는 소론들이 재집권을 위해 몇 차례에 걸쳐 일으켰던 亂言·壁書事件의 실마리가 되기도 하였다. 저서로 『玉川集』 18권이 있다.

옥천집 일(玉川集 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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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집 이(玉川集 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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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선생문집권지삼 疏 옥천선생문집권지사 疏 箋文 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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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집 삼(玉川集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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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선생문집권지오 書 옥천선생문집권지육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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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집 사(玉川集 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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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선생문집권지칠 雜著 序 옥천선생문집권지팔 記 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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