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漢陽人문화유적❀

◈팔우헌집(八友軒集)◈◐八友軒集序[李仁行]◑◐冶谷先生集序[尹東洙]◑▣삼봉집 제2권 / 사(詞) 癸酉▣▣강지수사(江之水詞) 계유▣▣학봉선생문집 서 / 서(序)▣학봉선생문집 서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8. 7.
728x90

=『골동록(汨童錄)』소재 일화의 서술 양상과 그 의미=

◾Abstract

The record and description of the Social Underdogs in the Pil-Gi-Jib of the late Joseon Dynasty - a focus on Gol-Dong-Rok - Han Eui Soong This paper focuses on the shape and description of the socially disadvantaged in Fil-gi-jip, one of the classical prose materials, and considers the educational meaning it has. The text that I've noticed in this paper is Gol-Dong-Rok, a Pil-Gi-Jib the collection of various forms of writings by Cho, Bo-Yang, known as a Nam-In in Yeong-Nam Province in the 18th century. Gol-Dong-Rok usually consists of short narratives such as discussions on writing poems, anecdotes, thoughts on historic events, and logical arguments like other Pil-Gi-Jib compiled during the Joseon Dynasty. However, Gol-Dong-Rok attracts attention as it contains many anecdotes of the socially disadvantaged in Joseon society such as blind people, women, monks, and fortune tellers. They were not noticed in Joseon society and were ordinary base people who were not often mentioned as historical beings, but they were also members of the Joseon society as they were strictly alive. Although they were socially disadvantaged people captured by Cho, Bo-yang's gaze, it is important that they were called alive as one of the various members of the Joseon society of the time. The social underdogs captured in the Gol-Dong-Rok were basically moving within the structure of medieval ideology. However, it was shaped as a person who tried to realize compassion in an oppressive structure or practiced consideration and inclusion. In order to effectively reveal this, the character's narrative style was borrowed to highlight its presence, and it was described and captured as a lively being through the 'talking' method. The figures of the socially disadvantaged figures recorded in the Gol-Dong-Rok are relatively diverse compared to the contemporary Pil-Gi-Jib. In addition, attention and records on the various figures are at least partially recognized as members of Joseon society. Of course, it is hard to say that this has completely transformed the socially disadvantaged into a proud  subject of history. However, it is meaningful in that it aims to capture existence and dynamics of the socially disadvantaged by staring at and recording them. In particular, the presence of the socially disadvantaged converging on these classical prose materials proves that the Pre-modern Society was also a society where various people coexist. And this material can help shed light on the meaning of diversity in our society, which calls for disgust, exclusion, and discrimination, through the literature records of the Pre-modern Society. Therefore, the educational use of classical prose texts needs to start from escaping one-sided view of pre-modernity in looking at the data. Key words: ■Gol-Dong-Rok, 18th century, Nam-In in Yeong-Nam, Social Underdogs, shape, description, Pil-Gi-Jib, Classical prose

◈팔우헌집(八友軒集)◈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1214537&menuNo=200025

 

『팔우헌집(八友軒集)』은 조보양(趙普陽, 1709-1788)의 문집이다. 조보양은 본관이 한양(漢陽), 자는 인경(仁卿), 호는 팔우헌(八友軒)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원익(元益)이며, 어머니는 예안이씨(禮安李氏)로 기만(基晩)의 딸이다. 이경익(李景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당시 학자로 명성이 높던 권상일(權相一)의 인정을 받았다. 1747년(영조23) 진사시를 거쳐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그 뒤 예조좌랑에 올랐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1781년(정조 5)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으나 6일 만에 사직하였으며, 1788년 첨지중추부사와 오위장(五衛將)에 승직되었으나 나이가 많아 부임하지 못하였다. 첫머리에 李仁行의 서문이 있다. 권1-3에는 賦 1편, 詩 442수, 書 21편, 권4에는 序 2편, 記 14편, 跋 8편, 권5에는 論 2편, 說 2편, 辨 2편, 箴 1편, 銘 4편, 祭文 28편, 권6에는 誄辭 3편, 上樑文 2편, 行狀 5편, 墓誌銘 2편, 雜著 등이 실려있다. 雜著 중 「鏡對」는 집에 전해오는 古鏡을 닦은 뒤 거울과의 대화형식을 빌려 마음의 수양과 자연의 조화를 나타낸 글이다. 「形影問答」도 「鏡對」과 같은 형식으로 쓰여진 것으로, 몸과 그림자의 형태를 빌려서 주인과 從子와의 관계를 묘사하였다. 문집 끝에는 朴時源의 발문이 있다.

 

 

http://db.mkstudy.com/ko-kr/mksdb/e/korean-literary-collection/book/reader/9227/?sideTab=toc&contentTab=text&articleId=1477491

◐八友軒集序[李仁行]◑

濂溪夫子嘗曰蘊之爲德行。發之爲文章。夫得於心者德也。見於日用者行也。攄發其胸中之蘊者文也。然德行本也。文藝末也。夫惟有是德有是行。然後其文也爲可傳。而其傳也爲可久。不爾雖工於組織。粲若珠璣。無實之文。君子所不取也。近世八友軒趙公。盖亦審於本末輕重之分者也。蚤歲私淑於孤山李公之門。得聞古人爲己之學。經傳,心,近,啓蒙諸書。無不精通。又嘗納拜於懶拙齋李公,淸臺權公。亟蒙奬詡。兄弟四人。俱以能文名。五蓮一桂。榮耀當世。公猶自視欿然。對案劬書。作冷淡家計。坼號之夕。英廟嘉其叔姪射策俱中。超常調授職。使着帽榮歸。及入直春曹也。厚謙時爲曹長。以小禮杖下吏。同僚皆隱忍苟容。公獨卽日三呈旬。浩然長歸。 正廟初服。因公之兄子承宣公入侍。詢及春曹投簪狀。特命銓曹調用。以騎郞出肅。就直六日又辭歸。自上至發不及見之歎。其恬於名利類此。奉養同樞公。愛敬備至。同樞公壽踰九耋。公亦年七十餘。中裙厠牏。必手自浣濯。每事必先意承順。其居喪也。啜粥茹素。哀毁踰制。處昆季。勉以征邁。教子弟。必以義方。遠近來學者。每告以科目之外。自有實地工夫。若公其庶乎古之篤行君子矣。是以其發而爲詩文。辭順理勝。不屑爲操觚家雕鎪態。盖其山水風月。陶寫其性靈。松竹梅菊。砥礪其志操。世間得喪榮辱。無足以累其胷中。而冲澹蕭散之趣。自有不能掩者矣。公嘗曰吾之文不足以章之身行之世。而自示其精神心術之餘。公固不覬於傳後而本領旣如是。其可傳也何疑。獨其旣嘗策名當世。頗蒙前後眷注。而有時無命。不能少試其所蘊。是雖不足以病公。而良可爲世道喟也。間者公之孫庠生顯佐齎遺卷。請余校讐。辭不能。又要弁卷之作。重於屢違。略綴數語。以見公之文之可傳。實有在於文之外也。辛卯端陽節。眞城李仁行謹書。

 

冶谷先生集序[尹東洙]

http://db.mkstudy.com/ko-kr/mksdb/e/korean-literary-collection/book/reader/9031/?sideTab=toc&contentTab=text&articleId=1397088

昔黃勉齋論爲學之道曰。眞實心地。刻苦工夫。盖工夫能刻苦而後。可以進德修業。日造乎高明。心地能眞實而後。可以篤志務實。不騖乎虗僞。此易之所以自強不息爲乾之德。而君子之所以必誠之爲貴也。余以勉齋之訓。求之近世。先輩之學。惟冶谷趙先生庶幾乎。先生自少時。慨然有志於學。每日未明而起。盥櫛衣冠。端拱正坐。終日無惓怠之意。非六經四書。不讀。見朱子書。心誠好之。手抄而口誦。其他性理之書。靡不誦究。且記平日所得於耳目心思者。名曰三官記。又抄古人言行之善者。名曰常目編。晨誦庸學一遍。臨卧誦西山夜氣箴。日以爲常。篤學力行之功。老而匪懈。先生之於工夫。可謂刻苦矣。先生資禀篤厚。性行誠愨。宅心則以浮僞爲戒。飭躬則以忠信爲本。盖其所受於天賦。所存於身心者。已可謂純誠無僞之君子。而先生又以浦渚趙先生。潛冶朴先生爲師。則其敎曰。學者須當以毋自欺爲先。又曰。仰不愧。俯不怍。是功效。曰近思錄。四子堦梯也。先生一依其訓。尊信服習。表裡如一。幽顯不貳。卒以是成德。先生於心地。可謂眞實矣。迹其一生用功本末。深有合於黃氏八字旨訣。則宜其德之厚。業之大。存而爲上下之所尊敬。歿而爲士林之所景慕也。先生之於文辭。不甚屑意。而蘊乎內者發之言。辭達而義該。語圓而理暢。不可與徒尙華藻者比。信乎有德者必有言也。東洙生也晩。不及供灑掃之役於先生之門。而我曾王考魯西先生。與先生契義至厚。我祖考農窩公。累甞獲拜於先生。所以誦服先生之行義者甚深。余之所聞於家庭者如此。而余之妹婿李君思齊。亦篤行之士也。居在先生之遺里。盖慕先生之德而興起者也。又能道先生之細行甚備。故甞有高山景行之慕。而恨不摳衣於凾丈之間也。又先生是浦渚趙先生之門人。則浦渚。卽我之外高祖也。我從祖明齋先生常曰。牛,栗兩先生後。力於學問之功。唯浦翁爲最。而先生小少師承。則其淵源所漸。尤可知矣。浦翁甞以先生學行薦聞於朝。實用司馬君實劉器之故事也。於此。尤可見先生之學之德之眞可尊而可敬也。先生之曾孫敬煕。裒收遺文。並三官記。繕寫成編。藏于家。又相與謀付剞劂。而持以示余辱徵弁卷之文。敬受而讀之。則一言一字。皆出悃愊。無一毫矯餙之意。至於三官記。見聞不遺。思索皆精。反身自修之實。有異於口耳之學。以實心做實功者。盖可驗矣。明齋先生甞亟稱三官記曰。此皆公實用功處。觀乎此。可知其踐履之篤矣。噫。先生之文。余何敢言。雖托名卷末。爲後學之幸。而昧識陋文。誠有不敢當者。累辭而終不獲。遂以平日之所耳聞。中心之所誠慕者。書以歸之。

 

崇禎後再丙午。後學坡平尹東洙再拜謹序。

 

 

 

▣삼봉집 제2권 / 사(詞) 癸酉▣

▣강지수사(江之水詞) 계유▣

 

[DCI]ITKC_BT_0024A_0050_040_0010_2002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조선 문하시랑(門下侍郞) 삼봉 선생의 소작이다. 선생이 금릉(金陵)에 봉사(奉使)하여 만 수천여 리를 왕반하는 동안 산길로 뱃길로 온갖 고생을 다하고 돌아와서 동행인 노동지(慮同知)ㆍ조부추(趙副樞) 및 한성 윤(漢城尹) 이공(李公)ㆍ평양 윤(平壤尹) 조공(趙公)과 함께 대동강(大同江)에서 뱃놀이하였다. 선생은 술이 반쯤 취하자 산천의 절승과 풍경의 아름다움을 관람하고서 개연히 감회를 일으켜 마침내 〈강지수〉의 노래를 지어 스스로 그 뜻을 보였다.

【안】 이 소서(小序)는 아마도 바로 한산군(漢山君) 조인옥(趙仁沃)의 기술인 듯하다.

 

 

강의 물이여 유유도 하이 / 江之水兮悠悠

목란 배를 띄워라 중류에 비끼었네 / 泛蘭舟兮橫中流

피리소리 떠들썩하고 노랫소리 퍼져가니 / 高管噭噪兮歌聲發

빈객은 잔치 즐겨 술잔이 오락가락 / 賓宴譽兮獻酬

이따금 펄펄 뛰는 건 금잉어요 / 或躍兮錦鯉

날아드는 건 하얀 갈매기라오 / 飛來兮白鷗

연기는 아득아득 막바지 개울이요 / 煙沈沈兮極浦

탐스러운 풀 우거져라 꽃다운 강둑일레 / 草萋萋兮芳洲

시물을 구경하고 스스로 즐김이여 / 覽時物以自娛兮

돌아갈 줄 모르고 서성대누나 / 謇忘歸兮夷猶

해그림자 바삐바삐 서쪽으로 달림이여 / 景怱怱兮西馳兮

물은 콸콸 달려가서 저물지 않네 / 水沄沄兮逝不留

환락이란 언제고 얼마 못 가서 / 曾歡樂之未幾兮

가슴속에 남모르는 근심 품었네 / 隱予心兮懷憂

아, 성년은 다시 오지 않음이여 / 嗟哉盛年不再至兮

늙음이 닥쳐오니 다시 무얼 구하리오 / 老將及兮夫焉求

헌면이란 어쩌다가 오는 것이요 / 軒冕兮儻來

부귀는 구름처럼 둥둥 뜬 물건 / 富貴兮雲浮

군자가 소중한 건 오직 의뿐이라 / 惟君子所重者義兮

천추만대 이름이 남는 거라오 / 名萬古與千秋

술 한 잔을 들어서 서로 권하노니 / 擧一杯以相屬兮

옛 어진이 바라보며 닦아 나가자꾸나 / 庶有企兮前修

 

江之水詞 朝鮮門下侍郞三峯先生所作也。先生奉使金陵。往返萬數千餘里。跋涉阻深。辛勤來歸。與同行盧同知,趙副樞及開城尹李公,平壤尹趙公。泛舟于大同江。先生酒半酣。觀覽山川之勝。風景之美。慨然興感。於是賦江之水詞以自見其志焉。○按此小序。疑卽漢山君趙仁沃所識。○後奉使雜錄○癸酉

[DCI]ITKC_MO_0024A_0050_040_0010_2003_A005_XML DCI복사

[江之水兮悠悠。泛蘭舟兮橫中流。高管噭噪兮歌聲發。賓宴譽兮獻酬。或躍兮錦鯉。飛來兮白鷗。煙沈沈兮極浦。草萋萋兮芳洲。覽時物以自娛兮。謇忘歸兮夷猶。景忽忽乎西馳兮。水沄沄兮逝不留。曾歡樂之未幾兮。隱予心兮懷憂。嗟哉。盛年不再至兮。老將及兮夫焉求。軒冕兮儻來。富貴兮雲浮。惟君子所重者義兮。名萬古與千秋。擧一杯以相屬兮。庶有企兮前修。]

 

次韻 按公使還日。作江之水詞。鏤揭大同江樓。公之曾孫文炯按節箕甸時。次韻仍竝揭。

 

江之水兮悠悠。亘萬古兮長流。我祖兮有辭調高。千載兮無人酬。古今兮明月。浩蕩兮江鷗。麟馬去兮雲窟。鸚鵡歸兮芳洲。想天孫兮旣遠。撫往事兮夷猶。江山兮如昨。悲逝波兮不留。始感時兮興歎。終重義兮忘憂。孰非善而可樂。孰非義而可求。彼死生之往來兮。羌若休而若浮。惟文章道義之不泯兮。垂令譽兮幾秋。誦斯語於後世兮。期世世而增修。

 

▣학봉선생문집 서 / 서(序)▣

학봉선생문집 서

[DCI]ITKC_BT_0210A_0010_010_0010_2004_001_XML DCI복사 URL복사

금상(今上) 20년(1642) 늦은 봄에 사신으로 갈 만한 사람이 없어서 내가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일본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 마침 경상 좌도(慶尙左道)를 지나게 되어 김학봉(金鶴峯) 선생의 《해사록(海槎錄)》을 선생의 후손에게서 빌려 보았다. 이를 배를 타고 가면서 날마다 몇 편씩을 읽었는데, 상쾌한 마음에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느라 배가 바람에 흔들려 거친 파도 속으로 빠질듯 말듯 하는 줄도 몰랐다.

그로부터 7년 뒤에 학사(學士) 김효징(金孝徵)이 《학봉전집(鶴峯全集)》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서문을 지어 주기를 간청하였다. 나는 문업(文業)에 있어서는 서문을 지을 만한 적임자가 못 되나, 평소에 선생을 존경하고 사모하여 직접 한번 모시고 싶었던 터였다. 이에 감히 서문을 짓는 바이다.

선생께서는 곧기가 쪽 곧은 노끈과 같았고, 굳세기가 정련한 순금과 같았으며, 특출하게 뛰어난 모습은 산골짝에 우뚝 솟은 낙락장송이나 잔솔밭의 큰 곰과 같았으니, 이는 선생의 타고나신 천품(天稟)이다. 용감하게 곧게 나가는 기질을 호연지기(浩然之氣)로 수양하였고, 효도로 말미암아 충성으로 들어가는 성품을 의로운 길로 행하셨으며, 거울처럼 맑고 저울대처럼 공평하여 마음속에 티끌만 한 사사로움도 지니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가 선생께서 배워서 얻은 것이다.

선생께서는 퇴도 노선생(退陶老先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시면서 아주 일찌감치 도(道)를 들었다. 처음부터 문학(文學) 방면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었다. 그런데도 글을 짓고 말을 꾸미는 데 있어서 화려한 문체를 절로 가릴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경악(經幄)에 있었던 10여 년 동안에 올린 차자는 그 당시의 학사(學士)들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오직 선생께서 아뢴 수천 마디의 말들은 모두 폐부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임금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는 일들이었다.

《해사록》에 이르러서는 선생께서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지은 것이다. 몇 치밖에 안 되는 부드러운 붓끝을 가지고서 간사한 왜인들의 교활한 술책을 꺾은 것이야 논할 것도 없으며, 동행한 사람들과 주고받은 글은 논의가 당당하여 제아무리 분육(賁育)이라 하더라도 그 뜻을 빼앗지는 못할 것이다. 이 어찌 선생께서 본디부터 온축(蘊蓄)한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임진년의 일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모두 선생께서 봉춘군(奉春君)처럼 오랑캐들의 정상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허물을 하고 있으며, 임금께서도 역시 곡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선생께서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었다. 위태롭고 어지러운 즈음에 명을 받고, 피폐해진 뒤끝에 군사를 끌어모아 호남과 영남을 지키면서 한창 기세가 오른 왜적을 막은 다음에야 선생의 충절이 저절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피로가 쌓인 나머지 병을 얻게 되었는바, 마침내 큰 별이 떨어지게 된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다.

나는 선생께서 지으신 《임진록(壬辰錄)》을 읽으면서 선생의 충성스러운 모의에 발분(發奮)하였고, 군사들을 효유한 글에서는 선생의 참뜻을 알았으며, 임금께 아뢴 논의에서는 선생의 은근함과 간절함을 느꼈다. 그러니 어찌 무릎을 치면서 찬탄만 할 뿐이겠는가. 나는 이에 외람스럽게도 선생의 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한다.

선생께서 올린 상소와 차자는 동 강도(董江都)나 유 중루(劉中壘)와 같으며, 주의(奏議)와 초유문(招諭文)은 육경여(陸敬輿)와 같다. 그 밖의 사부(詞賦)나 시율(詩律) 역시 모두 평이하면서도 범위가 넓고 뜻이 잘 통하여 한유(韓愈)나 구양수(歐陽脩)와 나란히 하기에 충분하다. 서애(西厓) 유 상공(柳相公)이 일찍이 말하기를, “사순(士純)이 지은 《해사록》은 족히 후세에 전할 만하다.” 하였는데, 나는 《학봉전집》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다고 하겠다.

선생의 휘(諱)는 성일(誠一)이고, 자는 사순(士純)이며, 학봉(鶴峯)은 호이다.

무자년(1648, 인조 26) 8월 하순에 후학 한양(漢陽) 조경(趙絅)은 삼가 서(敍)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1998

 

鶴峯先生文集序[趙絅]

[DCI]ITKC_MO_0210A_0010_000_0010_2002_A048_XML DCI복사

上之二十年春。乏使。不侫以貳价奉使海外。路過嶺左。貣海槎錄於金鶴峯先生后孫所。柁樓上日讀數篇。擊節愉快。不知舟颿風上下。出沒於鯨濤鮫窟之中也。後七年。金學士孝徵氏手鶴峯全集來。請不侫序引甚勤。不侫於文業。縱非其人。生平慨然慕先生之爲人。願爲執鞭則有之。遂作而稱曰。其直如朱絲。其剛如鍊鏐。其特立如出壑長松。深叢孤罷。則先生天得也。勇往直前之氣。養之以浩然。由孝移忠之性。行之以義路。鑑空衡平。肚裏不着一毫私。則先生學得也。先生游退陶老先生門。聞道最早。固已不屑於文學之科矣。而其發而修辭者。亦不得自掩文質之彬彬。故處經幄十有餘年。凡所陳箚。同時學士。無不袖手。惟先生所爲。娓娓累千言。擧皆刳肝瀝血。格君補闕之事也。至若海槎錄。則先生奉使日本時所著也。亡論持數寸柔毫。摧折狡倭之鬼膽。其往復同行中。論議堂堂。雖自謂奮育不能敓者。豈非先生素所蓄者耶。逮乎壬辰。人咸咎先生不能如奉春君之先覷虜情。雖君父。亦爲之投杼。於是時也。先生出入人鬼關者。間不髮矣。受命於危亂之際。紏旅於靡爛之後。萆遮湖嶺。沮遏方張之賊。而后忠節自著。戁先生之勞勩成疾。終致大星之隕者蓋亦以此。不侫今讀先生壬辰錄。奮發乎其忠謀也。有味乎其喩衆也。懃懇乎其奏議也。奚亶擊節而已乎。不侫猥以是評騭先生之文曰。先生疏箚。似董江都劉中壘。奏議招諭立文。似陸敬與。其佗詞賦詩律。亦皆平鋪洪暢。優入韓歐之室。西厓柳相公嘗稱。士純海槎錄。足以傳後。不侫於全集亦云。先生諱誠一。字士純。鶴峯。號也。

 

戊子八月下浣。後學漢陽趙絅。謹敍。

 

[DCI]ITKC_MO_1049A_0090_010_0020_2012_B079_XML DCI복사

公諱普陽字仁卿。趙氏漢陽人。高麗僉議中贊諱之壽之后。世奕簪纓。入我朝。左議政良敬公諱涓。至諱琮官縣監。於公爲八代祖。始居嶺南。曾祖諱鳴漢進士號竹林。遊鶴沙門。學邃性理。追服廬墓。祖諱鳳徵進士文都事。贈禮參號幽溪。遊葛

 

庵門。考諱元益正憲同知。宿德重望。見推鄕塾。妣贈貞夫人禮安李氏。士人基晩女。有賢行。以肅廟己丑十月十六日生公。自幼姿稟端詳。誠孝篤至。聰悟絶人。通史初學。能該凡例辨正閏。見者奇之。及長受學於李小隱景翼。間又質疑於懶拙李先生。束脩於淸臺權先生門下。四書六經朱退文字之外。如朞三百啓蒙象數之學。微發端通大義。亟蒙奬詡。以正憲公命。旁治擧子業。與伯氏鈍巖公。文章品格。世穪難兄難弟。而從容鍛鍊。自成一體。屢中鄕解。丁卯兩試司馬。癸巳增廣。主司者

以咬菜根百事可做發策。公以無論咬菜食肉。立志堅定。用意勤苦。則天下無不可做之事立論。又以朱夫子種得幾畦杞菊。一腳出門。便不得此物喫証之。遂捷東堂。與從子承旨公錫晦。一榜大闡。五蓮雙桂。聯芳供歡於九耋春闈。例拜典籍。遷監察,禮曹佐郞。時厚謙以該曹亞堂。發怒於參謁時未及祇迎。杖公所帶隷。公浩然决歸。不俟終日。正憲公嘉其志。以爲勝似祿養。自是家居。專意養親。甘毳藥餌。躬自調嘗。中裙廁牏。親執洗滌。親老語澁。傍聽難辨。而承聆無違。母夫人疾革。碎指垂血。暫甦未效。以爲終天之痛。及正憲公喪。哀毁踰禮。前後如一。時年七十。猶啜粥居廬。終三年食素。遇大風雪。中夜號痛曰衣綿處室。猶覺寒逼。泉壤下體魄得無寒乎。正廟辛丑。因承旨公入侍。上問家閥。語及叔姪同榜事。一承宣進奏公以先朝禮郞。忤逆謙投帽歸田。上曰不懾權貴可尙。卽命甄典籍。移兵曹佐郞。一肅恩命。六日南歸。上聞之曰未見斯人。徑歸可惜。戊申以朝官八十。陞通政僉樞兼五衛將。是年六月二十七日卒。十月某日。葬于杜谷先壠丙坐之原。配贈淑夫人坡平尹氏。士人德基之女。柔婉孝恭。先公三十二年歿。墓在石南渭坊西山乾坐。有三男勖,晏,

 

 

。一女適全煕復。側室男錫𥈋。勖三女無子。嗣顯湜。女適權若采,李寅爕,孫鎭一。晏有三男。顯湜出后。顯迪,顯燾出后。一女適柳儒文。有二男。顯佐生員,顯奎出后。一女適權若度。全煕復一男鎭垕。顯湜一男玉相生員。二女適李彙朝,金禹圭。顯迪一男翼相。三女適林重稷,金近曦,金樂龜。顯佐一男倚相。餘幼不錄。公以天得之姿。襲家傳之緖。行足以矜式鄕邦。識足以論思經幄。文足以黼黻皇猷。才足以蘓捄弊局。而蹇連屯邅。晩占科第。跡屈於郞潛下僚之班。官止於大耋天爵之尊。其日可見之行。不外乎孝親律己讀書課農。而所與友者。山水風月松竹梅菊八箇物而已。雖然晩年出處之大節。確然有藉手者。日城恣橫。氣焰薰天。而不受強臣之威福。華衮垂奬。晉用有階。而歸老山野之本分。苟非爲己之學。實有所得於家庭師友之傳。咬菜立志之堅。能如是乎。是爲之銘。銘曰。

行源敦孝。學由通經。文推藝成。志勵困亨。承受征邁。義利重輕。南省庭試。晩矣奚稱。投簪策驢。含蘆飛鴻。親喜志養。聖垂褒隆。泉甘宅幽。禾畝書櫳。婆娑初服。壽與德崇。緋衣達尊。君子有終。桐山淮水。柳風梧月。貞松綠竹。雪梅霜菊。緬仰遺芬。公在世間。銘詩詔後。庸賁楸原。

 

嘉善大夫原任禮曹參判兼同知經筵敦寧府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豐山柳台佐撰。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