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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팔우헌집(八友軒集)조보양(趙普陽)1709년(숙종 35)~1788년(정조 12)■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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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우헌집(八友軒集)조보양(趙普陽)1709년(숙종 35)~1788년(정조 12)■

行狀(趙宜陽 撰), 墓碣銘(柳台佐 撰), 趙鳳徵ㆍ趙元益行狀(趙普陽 撰), 漢陽趙氏大同世譜 등에 의함.

저자의 遺文 상태에 대한 최초의 단서는 저자의 아우 趙宜陽이 지은 행장에 보인다. 조의양은 행장에서 “문집 약간 권이 家藏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저자의 몰년이 1788년이고 조의양의 몰년이 1808년임을 고려할 때, 저자의 유문은 저자 사후 수집 정리되어 집안에 보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작성시기가 불분명한 朴時源(1764~1842)이 찬한 발문에 “공의 손자인 處士 趙顯湜과 上舍 趙顯佐가 유문을 裒輯하고 정밀하게 산정하여 길이 전해지게 할 것을 도모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수집 정리의 주체는 손자인 조현식과 조현좌로 판단되며, 1831년에 李仁行이 찬한 서문에 “공의 손자 庠生 현좌가 遺集을 가지고 와 교정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능력이 부족하여 사양하였는데, 다시 서문을 요청하므로 누차 청을 어길 수 없어 지어 주었다.”는 말로 보아 문집을 校讎한 주체 역시 이들로 보인다. 본 문집의 정확한 간행 연도는 확정할 수 없으나 서문의 작성 시기인 1831년 이후에 목판으로 간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초간본》 이 본은 현재 규장각(古3428-651),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72-65), 장서각(D3B-1954)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831년 이후에 목판으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行狀(趙宜陽 撰), 序(李仁行 撰), 跋(朴時源 撰), 本集內容 등에 의함

 

 

구성과내용

 

 

본집은 7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卷首에 李仁行이 1831년에 지은 序, 世系圖, 目錄이 있다.

 

권1~3의 중반부까지는 賦(1), 詩(337題)이다. 賦는 江淹의 〈恨賦〉를 擬作한 〈擬恨賦〉로 중국의 인사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亡國王, 충신, 열사, 문인, 열녀들의 恨을 소재로 다룬 것이 특징이다. 詩는 시체와 상관없이 편차되어 있는데, 일부 시에는 저자의 自註와 幷序가 달려 있어 작시 경위를 파악할 수 있다. 저자는 일생의 대부분을 鄕里에서 보낸 관계로 시 역시 향리의 공간과 인물들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대다수이다. 여타 재야인사들과 마찬가지로 저자의 작품 역시 閑居 중에 느낀 정회를 담박하게 읊은 것들이 많으나, 〈古松行〉, 〈山苗〉, 〈古琴〉 등과 같이 재주를 지니고도 때를 만나지 못한 不遇의 심정을 담아낸 작품들도 있다. 저자의 신상과 관련하여 〈次江左權公萬韻〉은 1747년 저자 나이 39세 때 생진시에 합격하고 지은 시이며, 〈山居八詠〉은 저자의 호 八友軒의 유래인 ‘山水風月松竹梅菊’의 8가지 사물을 읊은 6언시이다. 또한 〈癸巳春曹入直〉은 1773년 저자 나이 65세 때 예조 좌랑이 되어 입직할 때 지은 것이며, 〈歸鄕韻二絶〉과 〈歸到漢上〉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할 때의 심정을 읊은 것이다. 이 밖에 〈遊淸涼山蓮臺寺 ……〉, 〈遊小白山十三景〉, 〈敬次陶山十八詠韻〉, 〈上天淵臺 ……〉 등 인근의 승경을 읊은 작품들도 있으며, 〈題裵烈士寅吉遺事後〉, 〈讀文忠公西厓先生文集 ……〉, 〈題宇宙菴遺集〉, 〈題鄭丈成仲所藏退溪逸稿後〉 등과 같이 다른 사람의 문적을 보고 느낌을 읊은 작품들도 있다.

 

권3의 후반부는 書(22)이다. 權相一에게 보낸 편지는 권상일의 進退에 대한 조언과 卷1의 〈敬次淸臺先生皇曆韻〉을 짓게 된 경위 설명이 되어 있다. 李象靖의 진퇴문제, 저자의 先祖 문집을 열람해 줄 것에 대한 요청, 자제 교육 부탁 등이 그 내용이다.

 

권4는 序(2), 記(14), 跋(8)이다. 序는 安窩 柳後賢의 「安窩詩帖」, 「橫城高氏族譜」에 대한 것이다. 記는 迂溪書院의 君子堂, 甘川의 水落臺, 冶谷에 지은 齋舍, 저자 집 인근의 鈍巖, 雙梅堂의 重修, 小白山 유람 등에 대한 것이 있으며, 1773년 문과 합격 후 임금을 알현한 일 및 관료들과의 교유, 관직 수행, 鄭厚謙과의 마찰 등 저자의 당시 행력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追記癸巳聞榜後春曹入直時事〉가 있다. 跋은 鶴沙 金應祖가 결성했던 九僊會의 重修, 李象辰 家藏 「近思錄」, 金應祖가 발문을 쓴 바 있는 寒暄堂 金宏弼 등 5인의 契會圖, 尹의 旅死祭輓錄 등에 대한 것이다.

 

권5는 論(2), 說(2), 辨(2), 箴(1), 銘(4), 祭文(28)이다. 변의 〈勿忘勿助與鳶飛魚躍同意辨〉은 程子가 「맹자」의 ‘勿忘勿助’와 「중용」의 ‘鳶飛魚躍’의 뜻이 동일하다고 한 것에 대해 논변한 것이다. 제문은 권상일, 李山斗, 金弘運, 金應濂, 內從兄 李敏迪, 이상정, 長子 趙勗, 從孫 趙顯洙 등에 대한 것이다.

 

권6은 誄辭(3), 上樑文(2), 行狀(3), 墓誌銘(2), 雜著(7)이다. 뇌사는 張泰集, 李仲賓, 孫國顯에 대한 것이다. 상량문은 鳳山書院, 牧溪精舍의 講堂에 대한 것이다. 행장은 郭𡺽, 조부 趙鳳徵, 부친 趙元益에 대한 것이다. 묘지명은 徐聖耉, 동생 趙得陽에 대한 것이다. 잡저 중 〈伯夷傳註解〉는 「史記」 〈伯夷列傳〉의 구절들에 대해 저자가 직접 註解를 단 것이다.

 

권7은 附錄으로 저자의 아우 趙宜陽이 지은 행장, 柳台佐가 지은 묘갈명, 趙錫晦 등이 지은 제문 8편이 있다.

 

권미에 朴時源이 지은 跋文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승현(李承炫) | 2011

조보양(趙普陽) : 1709(숙종 35)-1788(정조 12) 字는 견경(見卿)ㆍ인경(仁卿), 號는 팔우헌(八友軒), 本貫은 漢陽, 유학(幼學) 조원익(趙元益)의 2자, 규양(揆陽)의 동생, 득양(得陽)ㆍ의양(宜陽)ㆍ몽양(夢陽)의 형, 주손가(胄孫家)에 "양계초려(陽溪草廬)''''라는 현판

 

댁의 생활철학이 담겨져 있는 ‘陽溪艸廬’와 ‘八友軒’ 그리고 ‘泉谷書堂’의 공간적 특징으로 ‘陽溪艸廬’에서 안빈낙도의 마음(心)과 ‘팔우헌’에서 객(客)들과 고상한 풍류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마음(心)으로 그리고 ‘천곡서당’에서는 사람을 사람답게 키우고자하는 마음(心)을 읽었기 때문에 이 댁 공간의 철학을 ‘三心空間’의 구성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양계초려(陽溪草廬)'' : 양계천(영주시 장수면, 예천군 감천면 미석리, 예천군 보문면 독양리옥계천/우곡천/)이 흐르고 산수가 수려하여 오두막을 짖고 사는 집!

 

八友軒先生文集卷之七 / 附錄

行狀[趙宜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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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姓趙氏。諱普陽字仁卿漢陽人。高麗僉議中贊諱之壽其鼻祖也。是生諱暉雙城摠管。是生諱良琪。十三從忠烈公金方慶。征日本。元世祖賜錦袍玉帶以奬之。襲封龍城君。是生諱暾。繼世襲封。是生諱仁璧龍源君贈漢山伯。以太祖姊壻。見麗運將訖。隱襄陽。堅不事二姓之節。襄人爲立忠賢祠。是生諱涓入我朝。左議政謚良敬公。至諱琮淸河縣監。避文正公門禍。贅居榮川。於公爲八世。曾祖諱鳴漢進士號竹林。受業金鶴沙門。追服居廬終三年。祖諱鳳徵進士文科縣令。贈禮曹參判號幽溪。從遊於李葛庵門下。考諱元益正憲同知。以宿德重望。見推鄕里。妣贈貞夫人禮安李氏。諱基晩之女。有賢行。博識今古。吾兄弟入學之前。能諳歷代典故。多母氏敎也。有丈夫子五人。公居第二。公肅廟己丑十月十六日未時。生于豐山外氏第。幼時聰穎端詳。篤孝純至。出於天性。自學曾史江鑑。能辨別正閏。區分淑慝。先進見者皆奇之。承先府君命。受學於李小隱景翼。李卽孤山先生門人也。學有淵源。親炙日久。已知內外輕重之別。心近諸書。手自繕寫。不離懷袖。至於朞策大衍河洛之數。無不默會旁通。間嘗質疑于李懶拙齋及權淸臺先生。兩先生深器重之。或以面命。或以書勉。要不出古人爲己之學。公服膺勿失。踐履篤實。俛焉日有孜孜。先府君又以門戶之故。使之傍治擧業。不待連篇累牘而自然有百中之能。自己酉以後。輒擧大小鄕解。而連詘省試。丁卯俱中生進。癸巳同從子承宣君錫晦登第。自上引見。特下著帽踰嶺之敎。直拜典籍。歸榮之夕。先府君年八十餘。諸子列侍。五蓮雙桂。輝暎一庭。亦足爲悅親之資。公之白首應擧。蓋爲親屈也。出身之初。公卿士友慕聲名願交者甚衆。而公乃望望然若將凂焉。雖荊屋間有雅素者。一不與之相接。雖以此見枳宦途。不恤也。已而拜監察。尋拜禮曹佐郞。當參謁時。賊臣厚謙爲參判。以曹郞之未及祇迎杖下隷。公語人曰此人勢焰薰天。輕蔑士流如此。此君子見幾之時也。且白頭郞官。見辱於乳臭小兒。而若復苟簡懷祿。是奴顔婢膝等耳。遂决然舍去。泮中知舊或相挽止。謙賊亦有悔意。使人留行。不顧也。歸路有詩云君親一體意。來去兩難忘。有老人在逆旅。嘲考課時去官曰。此官員亦未免鄕闇。不爾則歸臥林泉。讀書課學。勞農節用。反有勝於薄官。蓋此老人亦隱者流。歸覲堂下。則先府君嘉其勇退之志。謂以善養。勝似以祿養也。公自此家居。專以養親爲事。年過六旬。甘毳之奉。藥餌之需。必躬自調嘗。至如中裙廁牏之物。親自洗滌。不令人代。曰吾親之褻衣衾。吾豈可使人見裏。先府君晩年語澁。傍人皆聽瑩。而公必隨意任使。少無違拂。此非以親心爲心而能然哉。公每以丁巳內囏時斷指未效。爲終天之痛。及戊戌丁憂。恰滿七耋。而歠粥面墨。淡菜終制。一如前喪。古人終身之慕。公殆無愧矣。當宁辛丑。因錫晦入侍。自上問及家閥。有筵臣進曰其叔趙普陽。以先朝禮郞。忤曹長逆謙而投帽歸田矣。上曰。不畏權貴。能遂初服。其志可尙。特命政官。卽除典籍。公以嗣聖卽阼。軫念幽潛。爲一覲耿光之階。而及至都下。移拜騎郞。纔直六日。决歸鄕里。居數日。上命錫晦入侍。問乃叔在否。對曰纔過直番。已出東門。上曰。噫未見斯人而徑歸可惜。自是厥後。永作天放之民。而戊申。以搢紳年八十。陞僉樞五衛將。公之委頓牀笫。已三載矣。竟以是年六月二十七日考終。以十月某日。葬于杜谷丙坐之原。從先兆也。嗚呼悲夫。公天資篤厚。才調孤高。假使晉用於時。則學力見識。優於論思補闕之列。慈良廉謹。裕於撫字拯濟之方。至其諫諍之姿。勁直之節。庶幾鳳朝陽鷹殿上。而不惟進塗之崎嶇。年齡之衰晩。蓋其功名之念。從初淡薄。內無歆羡。外絶矜夸。以是不屑屑於得失榮悴之場。常自激昂曰士君子不于朝則山林而已矣。若早了科業。當結廬泉石佳處。揷萬卷書。種一畦菊。與村秀才。料理舊業足矣。故纔涉世路。遂能脫畧進取。無一毫顧戀之意。晩搆讀書洞數架屋。日處其中。兢存硏索。幽獨得肆之地。而猛加省察之工。稠人廣坐之中。而切戒流注之想。疏食菜羹。人所不堪。而處之裕如。不啻列鼎之甘。盥櫛衣冠。至老易懈。而自持愈嚴。常如端冕之色。一言語之際而心未嘗放也。一起居之間而體未嘗肆也。左右圖書。一室涔寂。常有所事。而有人不及知者。遠近學徒。多聞風而來。必至誠誨誘。使知科目之外。有正己需世之學者。其功效豈淺淺哉。然性本謙讓。未嘗以師道自處。雖親知間傳後文字。必謙不自當。曰世自有人。當時交遊如李大山伯仲。朴南野,李下枝諸公。皆是道義之契。而於大山翁。尤景慕欽仰之不已。聞其喪。爲之食素數日。伯氏鈍巖公。當世大文章也。日與之塤唱篪和。日征月邁。而嘗曰伯氏之文。如打鐵作器。雷轟電掣。聳動人耳目。而細觀或有鍛鍊未盡處。吾之文。雖未能動人耳目。而從容鍛鍊。未有打不過處。蓋公之所嗜。尤在洛閩書。而發之文者亦如是也。愛諸弟。各取其所長而奬進之。每與之談論古今。樂而忘倦。一室中和氣常融如也。嘗謂子弟曰凡人之以孝得名。吾甚耻之。夫孝如曾子。蓋爲職分之當爲而已。何必標之名稱而耀人耳目哉。蓋公之事親。生死葬祭。靡有不盡。而常欿然不自有焉。故其言如是。每中夜起坐。暗誦古書。或經或傳或朱子書或班馬史。非疾病出入。恒如是也。其讀書有會心處。不覺手舞足蹈。至於忠臣烈士殺身成仁處。輒感憤流涕。若其閒居雅趣。則在山水風月松竹梅菊。總之爲八友。以扁其軒。蓋不但爲景物役也。當竢知者知之耳。有集若干卷藏于家。配坡平尹氏。德基之女。贈淑夫人。生長儒素之門。孝謹慈惠。克配君子。當辛亥大侵。一門全活。亦惟夫人是賴也。先公三十二年歾。葬石南渭坊西山乾坐之原。有三男一女。男長勖。次晏,。女適竺山全煕復。餘男錫𥈋。勖無子。以晏子顯湜繼。三女適權若采,李寅爕,孫鎭一。晏有三男一女。男顯湜出繼。顯迪,顯燾出繼。女適柳儒文。有二男一女。男顯佐,顯奎出繼。女適權若度。全煕復有一男鎭垕。顯湜有一男二女。男玉相。女適李彙朝。餘未行。顯佐有一男倚相。宜陽於諸昆弟。最後死。得見公始終獨久。然今耄且病矣。於公日用事行。蓋茫如也。只畧敍其大槩如右。以竢立言君子之采擇云。舍弟宜陽謹狀。

 

八友軒先生文集卷之七 / 附錄

墓碣銘 並序 [柳台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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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普陽字仁卿。趙氏漢陽人。高麗僉議中贊諱之壽之后。世奕簪纓。入我朝。左議政良敬公諱涓。至諱琮官縣監。於公爲八代祖。始居嶺南。曾祖諱鳴漢進士號竹林。遊鶴沙門。學邃性理。追服廬墓。祖諱鳳徵進士文都事。贈禮參號幽溪。遊葛庵門。考諱元益正憲同知。宿德重望。見推鄕塾。妣贈貞夫人禮安李氏。士人基晩女。有賢行。以肅廟己丑十月十六日生公。自幼姿稟端詳。誠孝篤至。聰悟絶人。通史初學。能該凡例辨正閏。見者奇之。及長受學於李小隱景翼。間又質疑於懶拙李先生。束脩於淸臺權先生門下。四書六經朱退文字之外。如朞三百啓蒙象數之學。微發端通大義。亟蒙奬詡。以正憲公命。旁治擧子業。與伯氏鈍巖公。文章品格。世穪難兄難弟。而從容鍛鍊。自成一體。屢中鄕解。丁卯兩試司馬。癸巳增廣。主司者以咬菜根百事可做發策。公以無論咬菜食肉。立志堅定。用意勤苦。則天下無不可做之事立論。又以朱夫子種得幾畦杞菊。一腳出門。便不得此物喫証之。遂捷東堂。與從子承旨公錫晦。一榜大闡。五蓮雙桂。聯芳供歡於九耋春闈。例拜典籍。遷監察,禮曹佐郞。時厚謙以該曹亞堂。發怒於參謁時未及祇迎。杖公所帶隷。公浩然决歸。不俟終日。正憲公嘉其志。以爲勝似祿養。自是家居。專意養親。甘毳藥餌。躬自調嘗。中裙廁牏。親執洗滌。親老語澁。傍聽難辨。而承聆無違。母夫人疾革。碎指垂血。暫甦未效。以爲終天之痛。及正憲公喪。哀毁踰禮。前後如一。時年七十。猶啜粥居廬。終三年食素。遇大風雪。中夜號痛曰衣綿處室。猶覺寒逼。泉壤下體魄得無寒乎。正廟辛丑。因承旨公入侍。上問家閥。語及叔姪同榜事。一承宣進奏公以先朝禮郞。忤逆謙投帽歸田。上曰不懾權貴可尙。卽命甄典籍。移兵曹佐郞。一肅恩命。六日南歸。上聞之曰未見斯人。徑歸可惜。戊申以朝官八十。陞通政僉樞兼五衛將。是年六月二十七日卒。十月某日。葬于杜谷先壠丙坐之原。配贈淑夫人坡平尹氏。士人德基之女。柔婉孝恭。先公三十二年歿。墓在石南渭坊西山乾坐。有三男勖,晏,。一女適全煕復。側室男錫𥈋。勖三女無子。嗣顯湜。女適權若采,李寅爕,孫鎭一。晏有三男。顯湜出后。顯迪,顯燾出后。一女適柳儒文。有二男。顯佐生員,顯奎出后。一女適權若度。全煕復一男鎭垕。顯湜一男玉相生員。二女適李彙朝,金禹圭。顯迪一男翼相。三女適林重稷,金近曦,金樂龜。顯佐一男倚相。餘幼不錄。公以天得之姿。襲家傳之緖。行足以矜式鄕邦。識足以論思經幄。文足以黼黻皇猷。才足以蘓捄弊局。而蹇連屯邅。晩占科第。跡屈於郞潛下僚之班。官止於大耋天爵之尊。其日可見之行。不外乎孝親律己讀書課農。而所與友者。山水風月松竹梅菊八箇物而已。雖然晩年出處之大節。確然有藉手者。日城恣橫。氣焰薰天。而不受強臣之威福。華衮垂奬。晉用有階。而歸老山野之本分。苟非爲己之學。實有所得於家庭師友之傳。咬菜立志之堅。能如是乎。是爲之銘。銘曰。

行源敦孝。學由通經。文推藝成。志勵困亨。承受征邁。義利重輕。南省庭試。晩矣奚稱。投簪策驢。含蘆飛鴻。親喜志養。聖垂褒隆。泉甘宅幽。禾畝書櫳。婆娑初服。壽與德崇。緋衣達尊。君子有終。桐山淮水。柳風梧月。貞松綠竹。雪梅霜菊。緬仰遺芬。公在世間。銘詩詔後。庸賁楸原。

嘉善大夫原任禮曹參判兼同知經筵敦寧府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豐山柳台佐撰。

 

祖考贈嘉善大夫禮曹參判同知義禁府事五衛都捴府副捴管行奉列大夫黃海道都事府君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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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鳳徵字休仲漢陽人。始祖諱之壽高麗僉議中書。子諱暉雙城摠管。子諱良琪。子諱暾居北邊。連世襲爵。子諱仁璧龍源府院君謚襄烈。子諱涓入本朝。以佐命功臣封漢山伯左議政謚良敬。子諱憐兵曹參判。子諱云從直長。子諱琮淸河縣監。自京徙居榮川。子諱智琬通德郞。高祖諱涵。曾祖諱光虞。祖諱德秀贈司僕正。無子。取從父兄進士諱貫之子鳴漢爲嗣。進士贈左承旨。是爲公考。配豐山金氏。別座時忱之女。參判榮祖之孫。以崇禎後二十四年丁酉十二月二十七日。生公于葛山里第。幼從進士公。出居于龍宮大竹里。甫十歲。進士公下世。母夫人以客土無親戚。且乏師友。恐其失敎。挈歸葛山舊居。從師就學。文辭日進。壬戌魁鄕試。與伯氏聯中司馬。自是益勵志勤業。夙宵不懈。丁丑丁內艱。殯殮葬祭。一從文公家禮。晨昏哭奠。雖疾病不廢。三年不食蔬果。闋制遊太學。諸名士皆與之遊。戶屨恒滿。讀書務要存心。每章或讀已過半。而心有走作則必舍而從頭改讀。寢食之頃。記誦有程。殿講比較。以賦辭居魁。而爲有力者所擠。其明年癸酉釋褐。甲戌除昌樂丞。丙子遷義禁府都事。七月棄官而歸。公嘗愛幽洞泉石之勝。戊寅築室而徙居之。扁之曰幽溪草廬。因以爲號。閒居無事。日與溪翁野老。吟嘯歌詠。淡然忘世。性不喜飮酒。有客則必設之。懶齋李公東標,松沙李公適意,寒水權公斗紀其友也。有麗澤之益焉。庚寅春。除黃海都事。是年有慶。設春秋科。公再掌試。一道以公正穪。其時使相甚器重之。每事必諮諏焉。一日邀道內守令之能詩者六七人。與之賦詩。公詩先就。一座皆推轂焉。蓋公之詩。不事雕刻。流出性情。冲淡有餘而不屑爲也。或有遣興之作而輒逸之。不以示人。乙未三月。除固城縣令。政尙寬裕。吏民俱安。丙申三月。以疾罷歸。道卒于㓒谷高坪之旅舍。享年纔六十。以其年五月日。葬于幽洞水口酉坐之原。其後五六十年當宁壬辰。以子老職。推恩贈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初配昌寧曺氏。承旨友仁孫。通德郞時孟女。無子。次配禮安金氏。進士堣女。生一男一女。次配豐山柳氏。謙庵雲龍曾孫。從仕郞世馨女。後公三十六年卒。男元益同知中樞府事。女適生員李守仁。元益有五男一女。長葵陽生員。次普陽佐郞。次得陽。次宜陽生員。次夢陽生員。女適士人朴師虎。李守仁有二子。長世臣次世靖。葵陽有五男一女。長錫範。次錫晦注書。次錫忠次錫商次錫景。女適士人孫時璞。普陽有三子一女。長勖次晏次。女適士人全煕復。得陽有三男。長錫昌次錫明次錫。宜陽有二男二女。長錫時次錫良。女適士人柳萬休。次適士人全是杓。夢陽一女一男。女適士人柳胖休。男錫晄。錫範有五男二女。男顯澤,顯漳。女適士人申應堯。餘幼。錫晦四男五女。男顯洙。女適士人張泰久。餘幼。錫忠三女二男。女適士人權休復。餘幼。錫商二女一男。女適士人李龜祜。餘幼。勖三女。長適士人權若采。餘幼。晏三男二男皆幼。錫昌二男。長顯洛次幼。內外孫曾八十餘人。幼少不能盡記。嗚呼。公誠孝出天。每痛不及事先考。當華美之饌。必泫然出涕。後喪斷指。至末年刀痕猶在。臨絶示子姪曰吾誤犯曾夫子。而今免夫之誡。今無以啓示汝輩。且曰吾幸蒙國恩。官至令宰。而先考墓表不樹。死且不瞑。其神志之不亂。孝思之冞篤如此。隱伯氏早沒。撫視諸孤。一如己子。性儉約。不營生產。所居環堵蕭然。卒之日。衣不給殮。棺槨賣所乘馬而具焉。平居必明著衣冠。不設惰慢之容。待人接物。都是一團和氣。聞人之善。若己有之。聞人之惡。輒愀然不樂。非大故不輕絶之。知舊皆愛敬而服其德焉。公內著德美而外務鞱晦。不肎求知於人。夫人之知不知。無加損於公。而爲子孫者。心懼其世代寢遠。潛德幽光。遂湮沒而無傳也。謹次世系及履歷行蹟。就當世秉筆之君子而聽其筆削焉。

 

先考正憲大夫同知中樞府事府君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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府君諱元益字伯謙漢陽人。高麗僉議中書事諱之壽其始祖也。子暉以東北面兵馬使。封雙城摠管。子良琪。子暾連世襲封。子仁璧漢山伯襄烈公。以麗朝舊臣。避地通川。郡人俎豆之。子涓入本朝。左議政漢平府院君。歷數世至諱琮淸河縣監。始居榮川草谷里。高祖諱光虞隱不仕。曾祖諱德秀贈司僕正。無子取從父兄進士諱貫之子爲嗣。諱鳴漢進士贈左承旨。考諱鳳徵贈禮曹參判行都事。初配昌寧曺氏。通德郞時孟之女。次配禮安金氏。進士堣之女。是實生府君。次配豐山柳氏。從仕郞世馨之女。俱贈貞夫人。府君以戊辰六月初八日。生于榮川葛山里第。質性貞固有執守。不肎與羣兒嬉戲。未嘗隨人俯仰。九歲丁內憂。時參判公以郵官在海西。府君與婢僕數人在家。無他看護之人。猶不廢朝夕哭。戊寅春。參判公移卜于安東府幽洞里。府君年十一。與從兄殿中公聯業。口強不能讀。然每有述作。參判公必稱善。少多疾病。且鮮兄弟。參判公未嘗督課曰使我有後足矣。參判公有起居出入之節。必趨而扶持之。稍長漸喜讀書。又勤抄諸書至累十卷。自是出遊文場。多居前茅。稍稍有聞於士友間。丙戌參判公患腳疽。證甚危篤。府君晝夜侍疾。目不交睫。首尾五六月。藥餌必親嘗。飮膳必親調。未嘗一息懈。庚寅參判公以金吾郞留京邸。府君因科便趨侍。至則參判公以海西掌試都事。發程已數日矣。府君出場後卽向海西。謁于神光寺。乙未春。參判公莅固城。府君以道路痘梗。未卽跟隨。七月始往侍。以海鄕水土爲憂形於言色。參判公曰吾意亦然。但幽洞非久居之地。若營一區菟裘。當以明春賦歸耳。其年十月。參判公始有潮熱往來之證。猶力疾視事。至丙申正月。證候寢重。府君夙夜憂煎。邀醫療治。靡不用極。而僻鄕無善藥。二月始圖罷。三月初輿疾還歸。以春寒未解。日行不過數十里。旬餘始到㓒谷高坪驛。不得前進。十八日。遂至大故。喪在客土。行槖如洗。至賣坐馬以爲之柩。而附身附棺之物。必誠必愼。無憾於禮。中路多忌疾。諸從及親舊皆欲迂路而行。公不可曰吾先人行不由徑。且以此路之官。今以何路歸乎。遂直行到家。旣殯。府君寢苫枕塊。不離殯次。時春寒尙峭。地氣上濕。人皆危之。府君堅執不動。至五月克葬而後。始居廬次。府君體素羸弱。且積月侍病。因有攀躃之痛。顚踣道路。氣力澌敗。若不保朝夕。貞夫人柳氏憂之勸之肉。府君涕泣不從。食素三年。終無疾病。旣除喪。府君念新遭大慽。家事無津。諸子皆幼。若不勤農勤敎。無以立家門奉賓祭。遂刻意敎誨。非有疾病賓客。不廢勸課。與用事僮僕同苦樂。以故雖逢㐫歲。未至乏絶。不肖等得辨魚魯者。皆府君之敎也。癸卯夏。不肖等困于暑。暫臥納凉。時雨新晴。月初升。蛙蟈亂鳴。府君蹴起責曰吾嘗勸汝讀。汝輩不從。彼蛙有誰勸之鳴。而若是不撤也。不肖等感懼。始知勤業。丙午秋。府君廢擧。時年三十九。親友皆勸之起。府君曰吾年至不惑。且自知不才。豈可與年少才藝。爭名於場屋。况兩兒容有可望。其將代予。甲子以後至辛卯前後五六榜。四男連中司馬。府君瞿然曰我以不識字耕田一夫。見四子得小成。得無懼乎。壬辰以八十五。蒙朝家例恩。批望受點。超授同知。推恩三世。癸巳普陽與兄子錫晦。僥倖得大闡。府君愀然不樂曰吾德薄。恐不足以承當。飾喜告事之日。其無用樂。丙申長子葵陽沒。府君哭數聲。卽收淚曰吾之至今不死幸耳。渠今年七十一。復何悲也。其達理如是。篤於奉先。忌日必先期齋戒。祭需各品。必盡心預備。必務精潔。未嘗臨時窘窄。生家宗兄失業。以曾祖考妣祭祀托於府君。流離客土三十年不返。府君奉祭盡誠。宗兄歸後始返之。戊戌春。府君謂普陽曰吾豈久於世耶。今限至矣。恐無以追孝於父祖。私家祫祭非禮也。然欲合祭高曾以下于一室。通于宗家。使來助祭。紙榜設位。日則用寒食。費則吾已措置矣。遂以其日行祀。府君不能拜起。設席于門外。使子孫將事。祭畢卽命餕于親戚隣里。以及奴僕曰吾之不留神惠。止於今日矣。觀者或至感泣。五月初。孫亡。家人不以告。至夕府君忽扶杖而出。東望涕泣曰其死矣。解衣而使之斂。神志之不亂。非凡人所及。六月旬間。感微疾卻食。臨終之夕。無一言及於他事。惟平日所藏先世遺稿榜目及若干文書。一一點檢然後返之舊所。遂終。時六月二十一日也。用其年八月二十五日。葬于醴泉東面杜谷村南癸向原。新卜也。嗚呼。府君以堅固之質。端潔之行。明透之識。出言必謹愼。臨事必恐懼。小心翼翼。務在儉約。未嘗有侈大矜肆之心。故居家而身以修。處鄕而人不非。子弟或於文會及鄕試。偶得參額。則必戒之曰孝弟本也。文藝末也。汝輩雖從事科場。內外輕重之分。不可不知。且不耻鄙事。繩綯莞簟之屬。必手自親之。子弟憫其勞苦。則曰天生四民。各食其業。人旣不能爲士爲農賈。而暖衣飽食。遊談博奕者。天民之蠧也。晩年喜讀中庸。讀至萬遍。猶不已曰吾聞祖先有讀萬遍書者。子孫必生文章。蓋不欲以讀書自處也。少不喜爲詩。中年以後。手抄唐律鼓吹及靖節放翁詩。常目在之。過五六年後始爲詩。不令子孫見之曰吾死汝輩出視。可取取之。不可取無取。旣葬出見所藏書冊。得曾祖考檜溪公詩若干首。祖考竹林公詩若干首。先考幽溪公詩一卷。釐爲上卷。府君所爲詩三百餘篇爲下卷。總二卷藏于家。配禮安李氏。高麗太師諱棹之後。政丞文莊公諱混之幾世孫。處士諱基晩之女也。贈貞夫人。夫人生于儒素之家。多所見聞。雖不事文字。而凭聰明。古今治亂興亡。人物邪正賢否。無不記識。不肖等或有疑晦。輒仰質之。則責之曰汝輩讀書而不知此事。科第何可望也。治家有法。盡心賓祭。人未嘗知其艱乏。敎子孫必以義方。少有過失。告于府君。不肎掩覆。慈敎之嚴。無異嚴君。丁巳臘月。以宿患添別證。臨終召諸子諸婦訣之曰吾年六十。汝等幾盡成立。汝之父親氣力猶不衰。吾無恨矣。更有一言告汝。其明聽之。人家兄弟爭狠小故。至於失和者。皆由婦人之言。男子剛腸者幾人。汝等無墜吾言。死且瞑目矣。言訖而終。享年五十五。生於癸亥九月二十三日。卒于丁巳十二月二十一日。越明年正月初十日。葬于榮川陳月寺東麓巽向之原。從先兆也。有子五人女一人。

 

어문론총 제63호

한국문학언어학회 2015.03.

■골동록(汨蕫錄) 소재 일화의 서술 양상과 그 의미■

*1)한 의 숭*1)

<차 례>

1. 머리말

2.골동록(汨蕫錄) 소재 일화의 서술 양상

2.1. ‘기록’에 중심을 둔 인물형상의 특징적 국면 포착

2.2. 골계(滑稽)적 성향의 노출

2.3. 소설(小說)적 성향이 강화된 일화 기술

3.골동록(汨蕫錄)의 편찬의식과 그 의미

4. 맺음말

 

[국문초록]

본고는 18세기 영남지역에 거주했던 팔우헌(八友軒) 조보양(趙普陽, 1709~1788)에 의해 편찬된 필기집인 골동록(汨蕫錄)의 수록 일화를 중심으로 서술 양상을 분석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골동록에 수록된 일화의 경우 주로 인물에 대한 특징적 국면을 포착하여 기록한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편찬자인 조보양의 출신 지역 및 인근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기록한 견문잡기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

골동록소재 일화의 서술양상은 3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수 있다.

첫째, 견문기록이긴 하나 구전된 것을 기록하는 것에 있어서도 명확한 기록의식이 저변에 깔려있음과 아울러 편찬자의 주관적 의식이 뚜렷하게 개입된 양상을 띄고 있다. 둘째, 골동록에 수록된 일화의 경우 골계(滑稽)를 지향한 작품이 확인되며, 이들의 경우 하층민에 의해 골계가 구사된 일화를 통해 서사적 지향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전기(傳奇), 전등신화(剪燈新話)등 중국문언소설 및 ‘전기수’관련 기록 등을 통해 편찬자가 소설을 접하고, 이를 바탕으로 〈윤용 일화〉와 같은 한문단편소설을 수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골동록에 수록된 일화는 골계나 신이적 성향을 띤 것도 있으며, 서사적 윤색이 가미된 작품도 보인다. 그러면서도 지역과 주변에 대한 기록을 강화한 로컬리티의 성향 또한 발견된다. 때문에 골동록 전반에 걸친 의식지향은 주변과 일상 등 ‘나’를 중심으로 한 기록정신이 반영되어 있으면서 병세인에 대한 ‘따뜻한 공유’ 또한 지향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통해 18세기 영남 남인이 가지고 있었던 의식 지향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학맥(學脈)이라는 폐쇄적 관점으로 해석할 것이 아닌 ‘로컬리티’의관점으로 시각을 전환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그랬을 경우 국지적 개별 양상이 아닌 경향성을 가진 유의미한 학술 전통으로 인정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Joe-Bo-Yang(1709~1788)조보양趙普陽 『Goal-Dong-Rok』『골동록: 汨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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