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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참봉공파종중▣

정랑봉조명추모비명(正郞峰趙銘追慕碑銘)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17.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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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석곡리 산 44-1

▲정랑봉과 망경대와의 거리: 약6.9km(14리)

[고삿재]

◈正郞峰 : 충남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석곡리 산 44-1

望京臺·山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봉대리 산 1

[獨立記念館]

 

○ 망경산(望京山 385m)은

서쪽으로는 운주산과 동쪽으로는 동림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상에 있는 산이다. 나즈막한 산이지만 북쪽으로 천안 흑성산과 은석산 너머 멀리 한양의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산이라 하여 망경산이라 한다. 전국 여러 곳에 망경산이나 망경대(望京臺) 등의 지명이 분포하는데, 고도는 높지 않지만,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어 얻은 이름으로 보인다.

 

‘경(京)’은 한양 혹은 임금을 상징하며, 나라에 상(喪)을 당하면 한양을 향해 한양인 이조정랑 조명(趙銘)이 망배(望拜)나 망곡(望哭)을 했던 곳이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망경대/산은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의 수신면 백자리와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경계에 위치한 산이며 동쪽에는 동림산과 이어지고 북쪽에 수신면의 기름진 들판이 전개된다.

 

단종이 등극한 후 곧 세조의 찬탈이 이어지자 많은 신하들이 이에 반대하여 죽거나 유배되었고, 당시 이조정랑 조명(趙銘[?~1478])은 부친 조순생(趙順生[?~1454])이 안평대군과 함께 단종복위에 가담하였다 하여 경남 고성의 죽도로 유배를 보내고, 조명은 금산으로 유배되었으며 그 후 세조가 조명을 유배에서 풀어주었는데, 부친 조순생(趙順生)은 고성 죽도에서 순국하였다. 그는 날마다 이 산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고 단종을 그리며 통곡하다가 죽었다.

 

이에 선비들이 그의 충절(趙銘)을 기리기 위하여 이 산봉우리를 그의 벼슬을 따서 정랑봉이라 부르게 되었고, 또 그가 임금이 계신 영월을 항상 바라보았다는 뜻에서 망경대 또는 망경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정랑봉 조명 추모비명 (正郞峰 趙銘 追慕碑)■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석곡리 태양마을 정랑봉에 있는 정랑 조명 추모비는 조명이라는 분이 매일 올라 단종의 능이 있는 영월쪽으로 망곡하였으므로 정랑봉이 되었다 한다. 참판 김경규가 지은 추모비가 수풀과 잡목에 묻혀 잊혀진 것을 천안 향토문화 연구회 김종식의 노력으로 밝혀져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어느 문객이 세상 모두가 세조의 땅인데 이곳 한 봉우리는 단종의 땅이라 칭송했었다. 목천 충렬사에 배향되었던 이 고장의 인물이다.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장

한국문인협의 간사

전) 동남구 문화원 향토연구소 소장

천안시 구성동 476-13 익수당 한의원

 =김종식=

 

정랑봉조명추모비문(正郞峰趙銘追慕碑文)

=인촌(仁村)공 조명(趙銘)=

 

정랑 조명은 조선 단종 조에 살다간(~ 1478년) 이지역의 충신이다. 관향은 한양(漢陽)이며 호는 인촌(仁村)이고 자는 경부(警夫)이다. 태조 배향공신 조인옥(太祖 配享功臣 趙仁沃)은 증조부이며 지돈녕부사 뇌(知敦寧府事 뇌)의 손자이다. 부친 순생(順生)은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세조에 의해 귀향 간 단종 복위를 꾀하다 고성으로 귀향가고 아들 명은 부친을 도운 죄로 금산으로 귀향 갔다.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사정 유용(有容)의 따님이다.

 

귀향에서 풀려난 명은 목천 신기로 이사를 와 집 뒤의 산에 관복에 홀을 잡고 올라 영월과 부친이 귀향 간 고성을 향해 절을 하며 통곡하기를 죽을 때 까지 하니 사람들은 전국이 세조의 땅인데 이 산만이 노릉의 산이다 하니 사람들은 그 산을 정랑봉이라 하니 현재 천안시 성남면에 있다. 노릉은 단종을 말한다.

 

후에 관복에 홀을 잡고 그 산에서 죽으니 인근 병천 용두리 야산에 장사 지냈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이 마을 선비 김경규가 주동 하여, 정랑봉 추모비를 세워 공의 충절을 후세에 전하려 했다. 세월이 유원해저 공신들의 충의가 멀어져 잊혀져, 추모비의 위치가 구전되지 않으니 사람들의 마음에서 멀어져 잊혀졌다. 본인이 이위치를 몇 달 추적하여 학계에 보고하고, 언론에 발표해 공의 충절을 후세에 전하고 기록으로 남겨 전한다.

 

●정랑봉조명추모비명(正郞峰趙銘追慕碑銘)●

[원 문]

==正郎峰 追慕碑==

環東土數千里 群山列立萬千其峰 名稱亦何限而直不過厥初尋常之爲也 惟大麓之 正郞峰則不然 峰在縣南大陽洞 後因故端廟名臣正郎趙公忠孝而著焉

趙公諱銘 號仁村 漢陽世家 莊陵伏節 吏曹參議 坡西先生諱順生之子也 妙年擢第歷踐淸顯 當癸甲之稽一門九竄 公時以正郎 編配錦山及上王遇害 父公受命催痛茹冤 如欲无生後蒙原宥 量移本縣 僦居細城山西 卽所謂大陽洞者是也

痛君父匪命 日三登家後高峰 東拜南號 以爲常 蓋莊寢在寧越 父公後 命 受因固城也 因柴毁而歿 縣人號是峰曰正郎 正郎之稱自此始焉

仁志之士 遊散之客 莫不登臨 想像歌詠其事 縣倅安公鼎福 以正郎峰三字揭試題 繡衣金公履成 有端廟乾坤 只一峰之句 誠曠世之與感也 其曰瞻彼高峰 永世淸風 剛齋宋先生所製祝辭也

峰之東南十餘里許 又有臺曰望京 蓋以公每於吉望具朝衣 朝芴 望拜京華 以展舊君朝儀也 迨仁陵感際 贈公直提學 士林立忠烈祠 以祝之 又後陵祀肅廟展 公所居之村 自其僦居 鄕人稱多 仁村而因稱公號 後改今名大陽地 區現屬天安郡治下 峰巒今爲柳氏家私有 嗚呼 物換星移 滄桑屢變 惟此一芴 靑峰不磨不頹 帶得万千峰 氣象而崒然特立 婦儒之傳誦不? 雲仍之追慕深增依

程子所謂 水不忍廢地 不忍荒之義 建貞珉以表之 其贊劃者后孫炯元也 噫欲觀公之遺躅 斯有峰焉 欲詳名之徵情蓋觀乎此碑也 後千百世 尙有以識公之大節也夫 嗚呼子規?月 白夜公之英靈 其必徜徉乎 其上而恨亦無窮矣 今其遠孫喆衡屬余記之 究論余是峰下居人 每登臨歎賞久矣

吾王考 提學公亦嘗有詩曰 正郎峰在北 追憶趙先生 竊愈感焉 遂書之如右 時端廟後九甲戌中秋也

嘉善大夫 前行奎章閣副提學 安東 金敬圭 撰

前行章陵參奉 完山 李錫永 謹書

景仰 高山慕孝忠 今人詳說 正郎蹤試看當日罔非土 端廟乾坤之一峰 繡衣使 市隱 金履成

梅竹樓前啼蜀禽 望景臺上暮雲深 可憐一片峰頭月長照 孤臣戀闕心 經筵官 峿堂 李常秀 乙亥 春立

 

우리 동토 수 천리 여러 산들이 줄지어 서 있고 만천봉우리가 있으니, 명칭이 얼마나 많을까 마는 역시 그 처음 심상으로 이름 지어진 것에 불과하되, 오직 대록(大麓)의 정랑봉(正郞峰)은 그렇지 않다. 봉우리는 헌의 남쪽 대양동(大陽洞)에 있는데, 후에 단종조(端宗朝)의 명신(名臣)이신 정랑 조공(正郞 趙公)의 충효로써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조공(趙公)의 휘(諱)는 명(銘)이요 호는 인촌(仁村)이며 한양(漢陽)이 세가이다. 단종조(端宗 朝)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 파서(坡西)선생 휘 순생(順生)의 아들이다.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청현을 두루 지내다가 계유정란(癸酉靖難)에 일문이 많은 화(禍)를 당했다. 공이 이때 정랑으로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상왕께서 해를 당함에 부공이 소식을 듣고 애통해 하고 원통해 하며 생에 욕심이 없었다. 후에 정치적 환멸에 본 현으로 이사를 와 정착하여 세성산(細城山) 서쪽에 살았는데 즉 대양동(大陽洞)이 이 곳이다.

임금과 부친(君父)이다 비명(匪命)으로 돌아가심을 애통히 여겨 하루 세 번 집 뒤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항상 동쪽으로 절하고 남으로 울부짓음을 일상으로 삼았다. 장릉(莊陵)은 영월(寧越)에 있는데 부공이 후명으로 고성(父公 後命 固城)에 귀향 가서 얼마나 자주 그렇게 하였는지 그것 때문에 사립문이 달아 없어질 지경이 되었으므로 마을사람들이 이 봉우리를 정랑봉(正郞峰)이라 하니, 정랑은 조공의 관직에서 온 것이며, 산의 명칭은 여기서 시작된다.

인(仁)을 마음에 둔 선비와 유람하는 나그네로 자연에 임하여 마음을 시로 읊지 않음이 없다. 현의 원님인(縣監) 안정복(安鼎福)이 정랑봉(正郞峰) 세 자를 써서 걸었고 어사 김이성(御使 金履成)의 단묘 건곤이 다만 이 한봉우리라는 구절은 진실로 광세의 감흥을 일으킨다. "첨피고봉 영세청풍(瞻彼高峰 永世淸風)"이라는 것은 강재 송선생(剛齋 宋先生)이 축사한 것이다.

봉우리 동남쪽 십 여리 쯤 또 누대가 있는데 망경대(望京臺)라고 한다. 대개 공이 매일 의복을 갖추어 입고 홀기를 잡고 한양(京)을 바라보며 절하며 군신(君臣)의 예의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인조 때에 이르러 공에게 직제학(直提學)을 제수하고 사람들은 충렬사(忠烈祠)를 세워 제사하고 또 후에 숙묘전(肅廟展)에 제사하였다.

공이 살았던 마을은 공이 산 다음부터 마을사람들이 인촌(仁村)이라 칭하였으며 이것이 또한 공의 호가 되었다. 후에 대양(大陽)으로 이름을 고치니 현재는 천안군(天安郡)의 치하에 속한다. 봉우리는 지금 유씨(柳氏)들의 사유지가 되었다.

오라 세월과 강산이 여러 번 바뀌고 변했는데 오직 이 우뚝한 봉우리는 마모되지 않고 무너지지 않아 만천봉의 기상을 띠어 우뚝 솟아 있어 부녀자들과 선비들이 전하며 쇠퇴하지 않아 후손들이 추모함이 깊도다.

정자(程子)께서 이르길 물은 땅을 폐하지 못하고 황폐하게 하지 못하게 하지 못한다고 하신 뜻으로 곧은 비석을 세워 이를 표하노니 그 논의를 주도한 것은 후손 형원(炯元)이다. 아! 공이 남기신 발자취를 보고자 한다면 이 봉우리에 있을 것이며 그 명칭의 자세함을 알고자한다면 이 비석을 볼지어다. 천백세가 지나더라도 이 비석으로 인하여 공의 큰 절개를 알게 될 것이다.

오오라 자규(子規)가 우는 그믐날이면 공의 꽃다운 영혼이 그 반드시 봉우리 위를 배회할 것이며, 한스러움이 또한 무궁할 것이다. 지금 그 먼 후손 철형(喆衡)이 나에게 와서 기문을 부탁하거늘, 나는 이 봉우리 아래 사람이라 매양 이곳에 올라 단식한 것이 오래되었다.

나의 할아버지 제학(吾王考 提學)공께서 일찍이 시를 지어 말씀하시길, 『정랑봉이 북쪽에 있으니 조선생을 추억하노라』하셨다. 가만히 느낌이 있어 드디어 이렇게 쓰노라, 때는 단묘 이후 아홉 번째 갑술년 중추절이었다.

가선대부전행규장각부제학을 지낸 안동 김경규(嘉善大夫前行奎章閣副提學 安東 金敬圭)가 삼가 짓고, 전 장릉참봉 완산 이석영(前 章陵參奉 完山 李錫永)은 삼가 쓰다.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정랑봉추모비(正郞峰追慕碑) :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석곡리 정랑봉(正郞峯)

 

천안하면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선조 충신 조명(趙銘)이라는 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조명에 대해 재 조명해 보자.

조선조 세조(世祖)가 된 수양대군 유(首陽大君 유 字는 粹之)는 권력에 눈이 멀어 나이 어린 조카인 단종(端宗)을 권좌에서 내치고 그도 모자라 사약(死藥)을 먹여 죽였다. 이 때 이 일을 주도한 간신배들이 있는가 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많은 충신(忠臣)들이 분연이 일어나 단종 복위에 목숨을 내놓았다.

조명의 부친인 순생(順生)이 이에 연루 됐다 하여 전라도 고성으로, 그의 아들인 명은 금산으로 귀양을 보냈다.

조명(?~1478) 관향은 한양(貫鄕 漢陽)이며, 자는 경부(字 警夫), 호는 인촌(號 仁村)이다. 부인은 회덕황씨(懷德黃氏)이다.

태조 이성계 묘정(太祖 李成桂 廟廷)에 배향된 개국공신 인옥(開國功臣 仁沃)의 증손이다. 지 돈녕부사(知敦寧府事) 뇌()의 손자이고 이조참판(吏曹參判) 순생(順生)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원주 원씨(原州元氏)로 사정을 지낸 유용(有容)의 따님이다.

명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16세의 어린나이로 과거에 합격해 문과에 급제해서 병조정랑이 있었던 1453년(단종 원년)에 한명회 일당이 일으킨 계유정란 때 아버지 순생과 함께 죄를 물어 금산에 관로로 유배 됐다.

순생은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함께 단종을 지키려다 전라도 고성으로 유배됐고 그도 모자라 사약을 먹고 죽었다.

안평대군 용(瑢)에게 아부해 매일 왕래하면서 한명회 일당이 세운 새로운 왕조 세조에게 역도의 죄를 지었다 해,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자손들은 죄를 물어 귀향, 아녀자들은 재상가의 노비로 삼았다.

세조의 실록엔 조순생의 부인 원주 원씨는 처음에 전 부사직 이몽가(府使直 李蒙哥)의 노비로 보냈다가 임자번(林自蕃)의 노비로 주었다 기록하고 있다.

아들 조명은 아버지 순생(順生)이 귀향 갈 때 연좌제(緣坐制)의 죄를 물어 금산에 유배(流配)됐다. 그러고도 세조 일당들은 불안했던지 당시 계유정란에 가담된 자들에게 모두 사약 먹여 죽였다.

그러던 어느 날에 세조(世祖)가 속리산과 온양에 산양과 온천을 왔을 때 어느 신하가 역도들은 다 죽고 왕좌가 안정됐으니, 역도 조순생의 아들 조명이 적소에 있으니 부자의 죽음으로 한 집안의 대를 끊을 수 없다고 간해 명을 풀어 줬다.

명은 정치에 환멸을 느껴 아버지가 죽은 고성 땅과 단종이 죽은 영월을 돌아보고, 목천 신기(新基)에 정착하게 됐다.

순생의 묘소와 명의 묘소는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있고, 인군(引郡)에 한양 조씨들이 많이 사는 것으로 보아 인근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목천 신기에 살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뒷산에 올라 단종이 승하 하신 강원도 영원을 향해, 또 아버지가 돌아가신 고성을 향해 망배통곡(望拜痛哭) 하기를 폭우뇌성과 북풍한설(暴雨雷聲 北風寒雪)에도 멈춘 날이 없었다. 조명은 16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20살 전후로 정랑에 오른 인재로 그 알량한 왕좌의 싸움에 회생된 조선시대가 낳은 충신중의 충신이다.

▶또 다른 천안의 청량포 ‘정랑봉’= 천안시 성남에 전해오기를 조명이 단종을 추모하며 매일 올라 통곡망배 하던 망향산이 있다는 구전을 듣고, 천안향토회 김종식연구사는 수차례 이곳을 방문해 찾았지만 없었다.

그의 노력끝에 수신면 망경산을 수차례 오르다 석곡리에 정랑봉에 추모비가 있다는 지인의 안내로, 사진작가 이종덕과 함께 올라보니 이곳은 김종식 연구사가 조명의 비를 찾기 위해 수차례 다니며 지나쳤던 곳이다.

향토사학자 김종식과 이종덕 작가는 몇 시간의 노력으로 비석부근에 우거진 나무와 풀을 베어 보니, 정랑봉추모비(正郞峰追慕碑)라는 4자짜리의 작은 비석을 발견했다.

지난 2006년 여름의 일이다. 당시작가 이종덕작가 김종식연구사와 금석문 발굴에 늘 함께한 인물이다. 며칠 뒤, 천안 전통문화 연구회 회원들이 답사, 탁본을 떠 번역을 했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정랑봉 추모비명 (正郞峰 追慕碑)’ 우리나라 땅 수천리에 여러 산들이 줄지어 서있고, 만천봉우리가 있으니 명칭이 얼마나 많을까 마는, 역시 그 처음 심상으로 이름 지어진 것에 불과하되 오직 대륙의 정랑봉(正郞峰)은 그렇지 않다.

봉우리는 현의 남쪽 대양동(縣 南 大陽洞)에 있는데 후에 단종조의 명신(端宗朝 名臣) 정랑 조공(正郞 趙公)의 충효(忠孝)서 이름이 지어지게(作名) 됐다.

조공의 휘는 명(趙公 諱 銘)이요. 호는 인촌(號 仁村)이며 한양이 세가(漢陽世家)이다. 단종 조 이조참의(端宗 朝 吏曹參議)를 지낸 파서선생 휘 순생(坡西 先生 諱 順生之 子)의 아들이다. 어려서 과거에 급제해 청현(淸顯)을 두루 거치고 계유정란(癸酉靖亂)에 일문이 구찬지화(九竄之禍)를 당했다.

공이 이때 정랑(正郞)으로 금산(錦山)에 유배됐다가 상왕(上王 단종을 말함)께서 해(害)를 당함과 부공(父公)의 소식을 듣고 애통하고 원통해 생에 의욕이 없었다.

후에 생의 환멸(還滅)을 느껴 본 현 세성산 서쪽(本 縣 細城山 西)에 살았는데 지금의 대양동(大陽洞)이 이곳이다.

임금과 부친이 비명(匪命)에 돌아가심을 애통히 여겨 하루 세 번씩 집 뒤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항상 동으로 절하고 남으로 울부짖음을 일상으로 했다(東拜南號).

장릉은 영월(寧越有 莊陵)에 있고, 고성(固城)은 후명(後命)으로 부친이 귀향을 가서 사사(賜死)된 곳이다. 얼마나 그러했는지 사립문이 달아 없어질 지경이 됐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이 봉우리를 정랑(正郞)이라 하니 정랑이라는 명칭(名稱)이 여기서 시작된다. 

인에 마음을 둔 선비와 유람하는 나그네로 자연에 임하여 마음을 시로 읊지 않음이 없다. 본 현의 수장(本縣 首將)이신 안정복(安鼎福)이 ‘정랑봉(正郞峰’세자를 써서 걸었고, 암행어사 김이성(暗行御史 金履成)은 “단묘건곤이 다만 이 한 봉우리라는 구절은 진실로 광세의 감흉을 일으킨다.” 그 “첨피고봉 영세청풍(瞻彼高峰 永世淸風)”이라는 것은 강제 송 선생(剛齊 宋先生 祝辭)이 축사(지은 글) 한 것이다.

봉우리 동남쪽 십 여리쯤 또 누대(樓臺)가 있는데 망경대(望京臺)라고 한다. 대개 공이 매일 의복을 갖추어 입고 홀기를 들고 서울을 바라보며 절하며 군신(君臣)의 예의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인조(仁祖) 때에 이르러 공에게 직제학(直提學)을 제수하고 사림(士林)들은 충열사(忠烈祠)를 세워 제사하고 또 후에 숙묘전(肅廟殿)에 제사했다.

공이 살았던 마을은 공이 산 다음부터 마을 사람들이 인촌(仁村)이라 칭(稱)하였으며 이것이 또한 공의 호(公之號)가 되었다. 후에 대양(大陽)으로 이름을 고치니 현재는 천안군의 치하에 속한다. 봉우리는 지금 유씨(柳氏)들의 사유지가 되었다.

아! 세월이 바뀌어 강산이 여러 번 변했는데 오직 이 우뚝한 봉우리는 마모되지 않고 무너지지 않아 만천봉의 기상을 띠어 우뚝 솟아 있어 부녀자들과 선비들이 전하여 쇠하지 않아 후손이 추모함이 깊도다.

장자께서 물은 차마 땅을 폐하지 못하고 차마 황폐하게 하지 못한다고 하신 뜻으로 곧은 옥돌(비석)을 세워 이를 표하노니 그 논의를 주도한 것은 후손 형원(後孫 炯元)이다.

아! 공의 남기신 발자취를 보고자 한다면 이 봉우리에 있을 것이며 그 명칭의 자세함을 알고자 한다면 이 비석을 볼지어다. 천 백세가 지나더라도 이 비석으로 인하여 공의 큰 절개를 알게 될 것이다.

오호라! 자규(서쪽새)가 우는 그믐날이면, 공의 꽃다운 영혼이 반드시, 봉우리 위를 배회할 것이며, 한스러움이 또한 무궁 할 것이다. 지금 그 먼 후손 철형(喆衡)이 나에게 와서 기문(記文)을 부탁하거늘 나는 이 봉우리 아래 사람이라 매양 이곳에 올라 탄식 한 것이 오래 되었다.

나의 조부 제학공(祖父 提學公)께서 일찍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정랑봉이 북쪽에 있으니 조 선생을 추모하노라”하셨다. 가만히 느낌이 있어 드디어 이렇게 쓰노라 이때는 단묘 이후 아홉 번째 갑술년 중추절이다.

가선대부 전행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안동 김경규는 삼가 짓고 전 장릉참봉을 지낸 완산 이석영은 삼가 쓰노라.

(嘉善大夫 前行 奎章閣 副提學 安東 金敬圭 謹撰 前行 莊陵參奉 完山 李錫永 謹書)라고 기록돼 있다.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장

한국문인협의 간사

전) 동남구 문화원 향토연구소 소장

천안시 구성동 476-13 익수당 한의원

=김종식=

===모계집 원본을 소유한 선생님 : 청주여상고 역사선생님===

◎ 인촌(仁村)공의 한이 서린 곳을 찾아가다
===충정공파 (忠靖公派) 조성봉(趙誠烽)===


정랑봉(正郎峯)은 충정공의 증손자인 병조정랑 조명(趙銘)께서 계유정란으로 금산으로 유배되고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어 죽고 아버지인 파서공 (順生)께서 경남 고성으로 유배 되었다 죽임을 당한뒤 나라에서 아버지 시신마져 거두지 못하게 막아 장례도 치르지 못한채 아들인 금구공 (佰亨)의 목숨건 상소로 유배에서 풀리자 갈곳이 없어 생질이 사는 신기리(지금의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신사리)로 와 추거(僦居)하며 서쪽으로 10여리 떨어진 석곡리 뒷산 (사방이 잘보이는곳)에 비가오나 눈이오나 빠짐없이 하루에 세 번씩 올라 장능(단종의묘)이 있는 영월쪽을 보고 4배하고 아버지가 귀양가 돌아가신 뒤 시신마저 찾아오지 못한 남쪽 고성을 향해 망배통호(望拜通號)하며 효도와 충성을 다하는 생활을 계속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모범이 되어 많은 마을 사람들이 이를 본받아 부모에게 효도하며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차차 늘어나 이 마을을 다 인촌(多仁村)이라 부르며 정랑공의 호가 인촌(仁村)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랑공이 매일 올라 망배통호 하던 산 봉오리를 정랑봉 이라 불러 산 이름이 정랑봉이 되었다고한다.


이곳을 가려면 신사리 에서 세종시 전의면 관정리로 넘어가는 성남면 약수로 276 앞 갈림길 에서 석곡리 안길로 따라가다 석곡2리 정곡경로당 에서 석곡4길 28 주택 앞(방축골)까지 올라가면 등산로가 있으며. 차에서 내려 정상까지 올라가는데 약20분 정도 소요되된다.


정랑봉 소재지는 성남면 석곡리 산 44-1번지로 정랑봉정상에 1935년 안동 김경규가 짓고 완산 이석영이 쓴 정랑봉 인촌추모비를 오당 이상수가 세웠으며 천안시에서 추모비 바로아래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쉬어가도록 정자를 지어 놓았다.


또 인촌공은 정랑봉에서 남쪽으로 10여리 떨어진 깍아 지른 절벽위 산봉오리에 축대를 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 공복을 차려입고 이곳에 올라 하루종일 한양을 바라보며 옛 임금을 조례하듯 절을 올리고 남쪽을 향해 망배 통곡하다 몸이 훼손되어 (1478년)죽음에 이르자 부녀자들과 아이들까지 탄식하니 이곳을 망경대라 하였다.(목현지에 쓰여있다.)


공은 그후 순조조에 이르러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겸 경연참찬관 예문관 직제학을 추증 받았으며. 묘지는 병천면 용두리 어머니 묘소 아래 있다.


망경대는 해발 384,2m이며 세종시 전동면 봉대리 산1번지로 세종시에서 2019년 10월 이곳을 넘어가는 등산로를 충신의 길로 명명하여 둘레길을 조성하고 망경대 유래를 담은 안내판을 세웠으며 이 지역에서는 제법 알려진 곳으로 수신면에서 전동면으로 넘어가는 2차선 포장도로 고삿재 고개넘어 30여m 내려가면 세종시 전동면 전동로 539. 공원묘역 상부(국가 유공자 묘역 주차장 길건너)에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으며. 입구에 둘레길 9호 충신의 길 안내판이 있다.


주차장에서 망경대까지 30분정도 걸리는 가까운 곳으로 필자는 하루의 시간을 내어 정랑봉과 만경대를 둘러보며 선조님의 생애를 그려본 것이 한없는 보람으로 생각되며. 일반인들도 찾아보는 망경대와 정랑봉을 적어도 한양조씨 충정공파 인촌공 후손이라면 한번쯤은 찾아가 봄이 어떨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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