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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참봉공파종중▣

♣한양조씨 삼수당(三秀堂)종택[학초정(鹤樵亭)]♣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17.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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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조씨 삼수당(三秀堂)종택[학초정(鹤樵亭)]♣

영양군 영양읍 감천 2리 591-1,2번지, 조선 효종 때 삼수당(三秀堂) 조 규(趙頍,1630~1679)가 지은 정자와 살림집으로 당시 정자를 삼수당이라 하였으나 1910년 경에 소유주가 바뀌면서 학초정(鶴樵亭─正寢)으로 부르고 있다. 박종만이 소유·관리하고 있으며, 삼수당은 잔디가 빛이 나서 일년에 3번씩 아름답다는 뜻이다.

 

학초정(鹤樵亭)영지동천(英芝洞天)수성인하(壽城烟霞)

 

 

 

 

♣한양조씨 삼수당(三秀堂)종택[학초정(鹤樵亭)]♣

blog.daum.net/kil0930/1034

 

학초정 및 정침 이야기

명 칭 : 학초정 및 정침(鶴樵亭 및 正寢) 소 재 지 :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 591-2번지 건축시기 : 1600년대 소 유 자 : 박종만 문 화 재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4호 건축 이야기 학초정(鶴樵亭)은 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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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학초정(鶴樵亭)은 원래 한양 조씨 문중에서 건립한 삼수당(三秀堂)이었으나, 근래에 소유자가 밀양 박씨로 바뀌면서 학초정으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 삼수당은 조규(趙頍, 1630~1679)가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정자와 살림집이었다. 이곳은 갓등산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반변천이 흐르는,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 서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건축 특징

학초정은 3칸 반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방형의 토석담장을 두른 별도의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정자 뒤에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침(正寢)이 배치되어 있는 구조로, 전체적인 건축양식은 조선 중기의 400년된 고식을 담은 ‘중간설주’라는 문짝 중앙을 구획하는 중갓부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건축 구성

학초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누각형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좌측칸 전체를 온돌방으로 구성한 뒤 우측 2칸을 대청으로 꾸몄다. 정자의 네 면에는 모두 툇마루를 둘렀고, 전면과 우측면에 계자난간을 세웠다. 특히 대청의 후면과 오른쪽의 판벽 사이의 문틀 가운데에 문설주를 세운 고식의 기법을 간직하고 있다.
정침은 정면 9칸, 측면 6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 평문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우측에 고방과 외양간, 온돌방을 두었고, 좌측에는 사랑 공간을 배치하였다. 전면의 좌측,우측 2칸은 좌우로 돌출하여 양날개집[兩翼舍]의 형상을 이루었다. 안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6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건너방과 웃방을, 우측에는 안방과 웃방을 두었는데, 안방의 전면에 부엌을 연접시켜 우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안대청은 개방된 구조로 정면 3칸이 안마당 폭과 같으며 우물마루를 깔았다.
중문칸 우측에는 반 칸 크기의 통로가 설치되어 부엌과 앞마당을 직접 연결하였다. 이러한 출입구는 독특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소슬문이 달린 대문채는 대문칸의 좌측에 마구간 한 칸이 설치되었고, 우측에는 부엌과 방이 들어있다.

현판
학초정(鶴樵亭)
영지동천(英芝洞天)
학초정창운계원록(鶴樵亭唱韻?員綠)
차학초정 : 김두철 등 4인(次鶴樵亭 : 金斗喆)
몽증학초정주인 : 용초 조병일(夢贈鶴樵亭主人 : 蓉樵 趙秉馹)

 

누정 이야기
- 누정이야기
학초정은 한양 조씨 문중에서 건립한 삼수당(三秀堂)에서 이름이 바뀌게 된 정자이다. 현재 소유자는 밀양 박씨 문중이다. 그러나 학초정이 된 과정을 참고할 문헌이 남아있지 않아「삼수당기」를 가지고 누정 이야기를 얽어본다.

삼수당은 조규(趙?, 1630~1679)가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정자와 살림집이다. 밀암(密菴) 이재(李栽)는 <삼수당기>를 써서, “산을 등지고 물과 가까운 곳에 여러 가지 화초를 심었고, 높고 맑으며 앞이 탁 트인 밝은 땅이라 경치가 매우 뛰어난 곳”이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삼수’라고 이름 붙인 의미를 풀어 놓았다.

“옛날에 회암(晦庵) 주자께서는 일찍이 여기에 느낌이 있어 ‘금단은 한 해가 저물도록 소식이 없네’라는 구절을 지어 참동계(參同契) 뒤에 붙였다. 이것이 또 어찌 굴원(屈原)이 지은 <원유>부에 느낌이 있어 세상에 오래도록 살아 있겠다는 설에 뜻을 부친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저 ‘빛나는 영지(靈芝)는 1년에 세 번 줄기를 뻗도다. 덧없이 빠른 백 년 인생 그 얼마나 되느냐. 뜻을 가지고 이루지 못하였네.’라는 구절에 여기에 느낀 바가 깊었을 것이다. 이제 만약 다만 이로 인해 이름에 뜻을 부쳤다는 것은 알되 주자가 쓴 <운당포(??浦)를 지나며 지은 시>에서 느낌은 알지 못하고, 비록 운당포 벽에 지은 시에서 뜻을 취했다는 것을 알아도 참동(參同)의 설에 거듭 느낌이 있어 지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만 오히려 선생께서 당시에 품은 뜻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이재, 「삼수당기」

세월이 흘러 삼수당의 풍류와 흥취를 즐기던 고인들은 모두 떠났다. 다만 건물과 풍광이 남아 요란하지 않으면서 빼어나게 아름다운 모습을 묵묵히 보여주고 있다. 현재는 학초정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 나름의 멋으로 역사를 이어갈 것이다.

◐三秀堂移刻 約山堂題詠記◑

維我趙氏。自漢陽。三遷至英陽。其里曰元塘。其居曰約山之堂。我先祖贈公寔來甫。踰冠卒。有二子嗣

居。而其季於我爲高祖。南州高士高公應陟所謂東海二老者。是也。實主斯堂。與一時諸名勝遊。多有扁詠留壁上。世亂逸不傳。餘若干篇。至孫處士公愛縣南山水之勝。徙居之。傳子上舍公。更拓而恢大之。營立屋宇。取坊名芝坪。牓其燕居之堂曰三秀。彈琴讀書其中。以終老。上舍公有孫曰裖。恪守先業。不敢怠遑。首新其廟宇。加輪奐焉。每日晨。謁于廟門之外。旣揭三秀之扁于堂。而移刻約山堂。題詠置壁間。問記於余。余作而言曰。吾先麗鮮之舊家也。其義烈垂子孫。勳庸在史氏。後世中衰。絶於余乎。爾旣克自敬勤。

修先人緖業。罔有墜失。吾宗有人。敢不樂而記之。惟是約山名堂。意其有謂。而諸賢之詠。亦各言其志。掇而施之。三秀之堂。無乃非宜乎。然記曰。樂樂其所自生。禮不忘其初。昔濂溪夫子卜遷廬阜。而寓古里之號。朱夫子寄居閩中。而用紫陽之章。俱有前賢古事。况今古址荒蕪。新居鼎成。殘篇短詠。得於收拾之餘者。猶是吾家之舊物。而三秀之堂。又是子孫之宅。則於焉揭之。禮亦宜然。不然。濂溪之水。何取於蓮峰之下。紫陽之山。胡爲乎潭溪之上。而兩夫子之惓惓於此者。豈非樂其所生而不忘其初者乎。若吾叔父名

堂之義。則蓋取夫煌煌靈芝一年三秀之語。而朱夫子題其詩後。有重歎篔簹壁上詩之句。則吾叔父之取里名寓堂號。其所以自警省而示後人也。其旨不旣深且遠歟。爾居是堂而歌哭。聚族於斯。思先祖之盛烈豊功。銘之鍾彝。潛德葆眞。形於詠歌。而跬步造次。不忘其初。華扁新揭。顧名思義。則亦體朱子篔簹之詩。而心鄕往之。念爾祖貽後之意。而無忝所生。斯其爲堂構之美而繼述之大者也。奚但盛刻畫。遮屋壁爲觀而已哉。裖拜曰。敢不蚤夜此堂。以無忘斯語。遂爲之記。

관련인물
- 조규(趙?, 1630~1679)
자는 자면(子冕)이고, 호는 삼수당(三秀堂)이며, 본관은 한양이다. 석문(石門) 조정헌(趙廷헌)의 아들로, 1630년(인조8)에 임천동에서 출생하였다. 조규는 어려서부터 재질이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읽은 내용을 곧장 암송하였다. 1660년(현종1)에 생원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여러 생도들이 그를 아끼고 존중하며 ‘남주거사(南州居士)’로 불렀다. 중년에 집안이 부유하여 감천리에 땅을 사서 정자를 짓고 이거하니 빈객이 끊이지 않았다. 만년에 주자와 퇴계를 즐겨 읽고, 유유히 스스로 즐거워하며 일생을 보냈다.

 

주변경관
- 주변경관
학초정[구 삼수당]은 반변천이 휘감아 돌고 햇볕 좋은 곳에 고아한 모습으로 서있는 정자와 살림집이다. 문 앞을 지키는 소나무 또한 그 세월을 보여주며 눈길을 끈다. 정자 앞을 흐르는 반변천은 늘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는 경치가 좋은 곳이다. 반변천 자락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감천마을에는 이밖에도 역사적 시간을 되볼아 보기 좋은 공간이 산재해 있다.

우선 근처 절벽에는 천연기념물인 측백나무 숲이 바위틈에서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고 있다. 측백나무 숲은 석벽에 붙어사는 희귀종으로, 현재 천연기념을 제114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영양읍내로 들어오는 31번 국도변 가까이, 측백나무를 마주보는 강 건너편에 연소정이 있는데, 소 위에 뜬 연꽃 봉우리[蓮沼]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반변천이 흐르는 밭두둑 경계지점에 세워져 있어 잠시 들러 소요하기에 좋다. 또한 항일시인이었던 오일도(吳一島)를 기리기 위해 1899년에 세운 시비가 국도변에 조성되어 있어 감천1리 마을 안에 자리한 오일도 생가와 함께 찾아볼 수 있다.

감천 마을에는 낙안 오씨들이 세운 화수재(花樹齋)와 송산재(松山齋) 등 여러 채의 문중 재실이 있고, 최근에 마을 안쪽에 오일도 시인의 비석 공원을 조성하여 아름다운 쉼터로 탈바꿈하였다.
화수재는 낙안오씨 감천 입향시조인 오원로(吳元老)를 기리기 위해 1687년에 건립한 재실이다. 오일도 생가 뒤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약 5백여 년 동안 화수촌을 이루고 있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송산재도 낙안오씨 문중 재실로,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아담한 팔작기와집이다.
송산재 뒷편에는 운곡서원(雲谷書院) 옛터 표지석이 서있다. 운곡서원은 1780년(정조 4)에 주자와 우암 송시열을 배향하였고, 서원의 품격을 갖추며 지방의 풍교에 공헌을 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뒤로 터만 남게 되었다. 이에 2007년에 표지석을 세워 간략한 내용을 기록하고, 기념하고 있다.

마을이야기

영양 > 영양청기권 > 영양읍 감천리

- 영양읍 감천리는 뒷산이 청기리와 연접해 있고, 31번 국도에서 맞은 편 산기슭에 자리한다. 큰 시냇물이 마을 앞을 흐르기 때문에 감들내 혹은 감내,감천(甘川)이라고도 부른다. 본래 영양읍 읍내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 남면의 지평동과 하풍동을 합쳐 감천동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오일도 시인의 시비(詩碑)와 범바위 위에 있는 폭포, 근처의 절벽과 천연기념물인 측백나무 숲이 어우러진 곳이다. 오일도 시비는 국도 앞 동산에 마련되어 있어 왕래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폭포는 마을의 서편 산 위, 백여 척 되는 범바위 안에 있다. 또한 마을의 동남쪽에 있는 바위 절벽 주위에는 측백나무가 무리지어 숲을 형성하고 있다. 이 측백나무 숲은 절벽의 바위틈에 신기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는 천연기념물 제114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절벽 아래에는 깊은 소가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5개의 자연 마을이 감천리 한 동으로 묶여 있다.

가짓들,지평골,지평(芝坪)은 토질이 비옥하고 살기 좋아 가짓들이라 불린다. 한양조씨 문중의 조규(趙?)가 입암면 연당리 임천에서 이곳으로 집을 옮겨와 가짓들을 사서 집과 묘우를 세워 삼수당(三秀堂)이라고 하였다. 조규가 삼수당을 지은 뒤부터 마을 이름을 지평이라 불렀다고 한다.

감내,감들내,동곡(桐谷),지곡(地谷)은 큰 시내가 마을 앞을 감돌아 흐르는 모양에서 이름을 땄다. 처음에는 지곡이라 불렀는데, 4백년 전 오시준(吳時俊, 1527~1613)이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동곡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 뒤 산기슭에 맛이 단 물이 솟는다고 하여 감천(甘泉)이라고 부르다가 감천(甘川)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괴박골,괘벽(掛壁)은 바위가 벽에 걸려 있다는 뜻이다. 감천 1리의 뒤쪽 골짜기로, 현재 대여섯 가구가 흩어져서 살고 있다. 이곳에 깨밭이 많아서 ‘깨’가 ‘개’나 ‘괘’로 비슷하게 발음한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는 설도 전해온다.

진마골(陳馬谷),진막곡(鎭幕谷),김막곡(金幕谷)은 마을 입구 오른쪽 능선에 있는 산성에서 마을명이 유래한다.

하풍(河豊),합풍(合風)은 가짓들 아래쪽에 있고, 입암면과 경계를 이룬다. 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며, 바람도 이곳에 머물렀다 가는 좋은 산세를 지녀 합풍이라도 한다. 높은 산기슭에 자리하면서 샘이 풍부하여 하풍으로 부르기도 한다.

 

-鶴樵亭은 원래 三秀堂이였으나 -일제시대 盈德郡의 親日派- 문명기[日本에 전투기를 헌납한 대표적인 親日派] 손에 넘어갔다가[강제?사기?우리 집안의 주장]소유권 재판에 져서[일제 시대에 친일파와 재판에 이길 수가 없어서-집안어른들 말씀]빼았겼다가 다시 밀양朴氏의 所有-鶴樵亭-이 되었다는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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