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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참봉공파종중▣

◐約山堂 世譜의 槪要◑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1.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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約山堂 世譜의 槪要◑

영양의 한양 趙氏는 서울[漢陽]에 세거하다가 -기묘사화 -[1519년] 문정공 [휘 ;光祖. 호 靜菴. 시호 文正. 10世]이 유학과 문치에 뜻을 둔 중종[中宗]에게 각별한 대우를 받아 성리학에 의거한 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왕도 정치를 구현코자 하다가 士禍를 당하여 一族에게 큰 화가 미치니 이를 피하여 일족 모두가 전국에 散居하게 되었다.

 (대종손가 회장이란 자는 소설쓰지 말라고 미친놈 소리만 함) 

 

*현감공[9世]은 이시기에 문정공[10世]의 삼종숙으로 老母와 子女孫을 모두 인솔하여 외가[전주 이씨]와 처가[평해 황씨] 곳인 영천[榮川; 現 영주시]으로 落南하게 되었다.

*참의공[10世 .휘 亨琬 .증 參議]은 육 형제 중 막내 자제로 妻鄕인 안동시 풍산읍에 移居하였다.[배위; 청주 정씨]

 

*참판공[11世. (증) 공조참판. 휘 源.1511~1550]은 참의공의 막내아들로 英陽의 함안 吳氏 문중의 滭[부장. 교위]의 따님과 혼인하여 영양군 상원리에 와서 살게 되어 英陽 入鄕祖가 되었다. 참판공은 기묘사화 전에 출생했으며 상원리에서 晝耕夜讀으로 自手成家하여 가문의 기반을 마련했으나 아들 형제를 두었고 일찍이 卒했다.

 

*참판공의 아들 두 형제-長男 光仁[12世. (증). 한성 판윤].次子 光義[12世. (행)장예원 판결사. 당호. 約山堂]은 열 살 안 밖의 두 형제는 어머니와 외숙 [오익수. 민수]의 훈도 아래 장성했다.

두 형제가 40 대 전후로 장성하였을 무렵인 1570 년대에 안동에 살던 김진[청계공. 의성 김씨. 내앞 ]이 말년에 영양군 청기면에 자리를 잡고 살 때에 영양이 문한이 어둡다고 1577년에 영산 서당[英山書堂]설립을 발기할 때 16인 창립 발기인으로 외숙 형제 분과 함께 등록함을 볼 때 입향조 이래로 2대만에 鄕里 士族 위치에 섬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또 당대의 명사인 고응척[南州高士. 취병[翠屛].성균관 司成]영양에 머물면서 형제분을 동해이로[東海二老]라고 칭송한 시[詩]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로 보아 당대에 재덕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로 동해이로는 두 형제의 별호가 되었다고 한다.

영양의 한양 조씨 가문을 설명할 때 흔히 입향 3대째인 4 파[수월공파. 사월공파. 연담공파. 호은공파]라고 한다.

 

*아래 도표 참조

*참판공[11世.영양입향조]

-1*판윤공.[12世.光仁]-

1자-수월공파[휘儉. 水月.13世]

2자-사월공파[휘.任 沙月.13世.]

-2*약산당공.[12世. 光義]-

1자-연담공파[휘.健. 蓮潭.13世.]

2자-호은공파[휘.佺.壺隱.13世.]

 

*약산당공[12世 1543~1608]은 백씨인 판윤공[12世]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장질 형제와 아들 형제 4 종반을 책임지는 家長으로서 교목세가[喬木世家-이름 있는 집안]자제로 키우는 책임을 다했다. 약산당공이 세상을 떠나자 조카인 사월공이 -제[祭 ]숙부 판결사공문[文]에서-

 

‘가문의 명예가 중요함을 일깨우고, 효도와 우애를 실천토록 하고, 가정 일보다 나라가 먼저 임과 주위가 거친 것을 탓하지 말고, 바꾸는데 힘써라. 일은 복잡하게 하지 말고 간요하게 하라. 학업을 개을리 하지 말라. 세업을 열심히 닦아라.’ ‘우뚝하시고 모든 것을 갖추시고 우리들을 돌보심이 종반을 차별 없이 키우셨다. 우리 남매 혼수와 분재와 모든 결정은 공의 뜻에 따랐다.’

는 등 자상하고 철저한 가르침과 구구절절한 삼촌의 인품과 덕망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약산당공은 長姪 형제가 20세 전후로 성장할 무렵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자 나라가 위급함을 보고 분연히 창의하여 몸소 4종반과 가솔. 군량미. 말...군수품을 가지고 머나먼 포산[苞山-宜寧]망우당 곽제우 진영에 참여하였다. 임란 당시 안동 아니 전국에 어느 班家가 倡義 하지 않았을까마는 이렇게 전 가솔이 참여한 예는 적을 것이다. 그때 기록은 대구 망우당 공원 임란창의군 명단과 약산당과 아랫대 4종반이 위패가 모셔져있다.

 

전후에는 창의에 동참한 우복[鄭經世-서애학파의 적통]월간[李㙉] 창석[李埈] 휴옹[趙翼] 하은[申輯]등 많은 거유가 벽촌 영양을 찾아와 연상의 약산당공과 교유하면서 읊은 詩가 남아 있다.

 

*約山堂공은 석계 이시명의 묘갈명에는 관직을 처음에는 음보로 수위부위...적순부위를 거처 임신년[1572년]에는 내금위 임란 때에는 군자감 직장이었다. 임란 후에 장예원 판결사[정삼품. 당상관]을 제수 받고 부임하여 몇 달 후에 신병으로 물러나 무신년[1608년. 선조41년]66세로 卒하였다.

임란 시에 선산에서 창의한 전주 최씨[崔山立; 문과[갑과]급제자]따님과 약산당공의 2子호은공[13世. 주실 마을 입향조. 직장]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는 전쟁을 통해 두 가문이 존중과 신뢰가 인연으로 맺어졌다고 전한다.

 

약산당공의 사후[1608년] 5년 뒤에는 장자인 연담공[13世. 1570~1613]이 세상을 떠났는데 후사가 없었다. 호은공은 1子 정형[14世.進士公].2子 정환[14世. 石門公] 있는데 2子 정환을 백씨 앞으로 출계하였다. 2子를 系子하였음으로 兩家가 다 주실의 호은공 자손이다.

 

*진사공[14世. 휘는 정형. 자는 鳴卿 1596~1660년]은 호은공의 장자로 원당리에서 출생하여 외숙[崔喆-여헌 장현광의 문인]에 수학하고 영덕에 귀양 온 하담 김시양[시호; 충익 이조판서. 4도 관찰사]에게도 배움을 구하고 석계 이시명에게도 사사했다. 경오년[1630년]진사에 오르고 성균관에 유학할 때 이이첨의 전횡과 당쟁을 보고 향리 주실로 돌아와 ‘내가 병이 있어 나가지 못 한다’하고 환로를 접고 학문과 자녀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손자 대에 이르러 사마시 4인. 문과2인을 배출했다.

 

*석문공[14世.휘는 정환. 자는 獻卿 1612~1663년]큰집으로 출계

여 어릴 때는 父君에게 수학하고 석계공에게 사사하였으며 16세에는 석문 영방[鄭榮邦. 후일 동래 정씨 연당리 입향조]의 따님과 혼인하고 빙부인 공에게도 배워 향시에 입격도 하였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므로 환로를 뜻을 접고 임천[입암면 연당리]에 이거하여 가사를 돌보며 花朝月夕하며 지냈다. 맑고 밝고 성품이었으며 깨끗한 용모였다고 死後에 공과 교유한 20 여명이 보낸 輓詞가 증거해 준다. 지금은 간혹 金石文에서 공의 글이 전할 뿐이다. 스승인 석계공은 공을 ‘문무를 겸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재주를 숨기고 스스로 명예를 끊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약산당공 세보에 실은 계보- 12세부터 16세까지-

*약산당[12世]-1.연담공[13世]-석문공[14世]1-삼수당[장자.휘;규.世]

2-처사공[차자.휘;옹.15世]

-2.호은공[13世]-진사공[14세]1-장사랑공[장자.휘;군.15世] 1-호봉공[장자. 휘; 덕순.16世]

2-옥천공[차자. 휘; 덕린;16世]

2-처사공[차자.휘;병.15세] 1-생원공[장자. 휘; 덕후.16世]

2-임악공[차자. 휘; 덕구.16世

............................................*27世 趙渭植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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