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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여호와 이레 (창22:6-14) 2025.05.04.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14)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올라간다.
이삭이 번제할 어린양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한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 정상에서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 놓고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위에 놓고 손에 칼을 잡아 그 아들을 잡으려 할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하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만을 경외한다는 사실을 확증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의 뿔이 수풀에 걸려 있음을 보고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으며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다.
하나님의 시험의 본질은 믿음의 중심에 이삭이 있는지 하나님이 있는지를 보고자 하셨다.
내가 받은 축복으로 인해 교만에 빠져 하나님을 버리는 하나님과의 멀어지는 삶이 되지 말라 하신다.
믿음의 우선 순위를 하나님께 두어 하늘의 복을 소유하는자 되라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렵고 힘들어할 때 물질을 부어주시고 질병에 걸려 있을 때 치유하시고 어려운 불편한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지만 교만으로 인해 평안과 축복이 우선이 되고 하나님을 뒷전으로 밀려내는 내가 아닌가 돌아보게 하소서
육의 것을 우선 순위로 하지 말고 하나님을 삶의 우선 순위로 두는 믿음의 사람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순종할 때 나의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모든 시험을 믿음으로 이겨내는자 되기 원합니다.
시험과 함께 피할 길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예배하는 예배자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진실된 마음으로 생명과 삶을 드리기 원하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경험하고 보는 축복의 사람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따라 살면서 나의 길을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여 여호와 이레를 목도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모든 영광을 올려드리기 원하며 내 인생을 책임지시고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14)"
우리는 삶에서 일어난 일들의 원인과 이유를 찾고자 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를 알아야 속이 시원할 때가 있지요. 특히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께 사건 발생의 이유를 묻습니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마치 원인 제공자처럼 대할 때도 있습니다. 필립 얀시의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라는 제목의 책에서는 모든 사건의 원인과 이유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릴 수 있는가에 대한 여러 고민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발생하는 어떠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그 뜻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을 통하여 함께 살펴보고자합니다.

첫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드러난 뜻에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뜻, 혹은 하나님의 의지를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숨겨진 뜻이고, 하나는 드러난 뜻입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뜻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신 선하고 기뻐하신 뜻입니다. 사람에게 드러낼 의무나 이유가 없고, 하나님께서 원하는대로 역사하시는 의지를 가지십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드러난 뜻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명확한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뜻 안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알 수 있는 뜻은 하나님의 드러난 뜻 뿐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드러난 뜻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번제할 양을 친히 준비하시리라”라고 대답했지만, 그에게 준비된 것은 아들 이삭 뿐이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아들을 결박하고 실제로 칼을 치켜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드러난 명령을 따라 아들 이삭을 바치는 것이 아브라함이 해야 할 의무였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정말로 경외하였기 때문에 순종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이삭이 죽지 않도록 막아섰습니다. 이삭이 죽지 않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등장한 뒤에야 아브라함은 비로소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숨겨진 뜻과 드러난 뜻은 서로 충돌하거나 상충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서로 상반된 뜻을 가지시는 것이 아니라, 두 뜻이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단일한 의지를 나타내십니다. 결국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이삭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알 수 없기에, 먼저 드러난 뜻에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정말 어려운 일일지라도 순종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진정한 은혜를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두번째로, 순종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 변화가 생깁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막으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2절 말씀에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아시는 인생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몰랐다가 드디어 알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인정하시고 더 깊은 관계를 맺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은혜가 있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더 깊이 아시고 더 깊은 관계를 맺으신다면, 우리의 삶은 완전하게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신다는 뜻은 하나님이 내 삶을 전적으로 책임지시고 붙드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인정받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더불어 순종할 때에 우리는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가장 적절하고 필요한 것으로 준비해 주실 것입니다. “이레”의 어원은 “보다”라는 의미의 “라아”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모든 순간을 보고 계셨습니다. 보고 계셨기에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것을 준비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지켜 보시고,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를 위하여 좋은 것을 예비해 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길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은 극한의 상황에도 하나님을 경외하여 결국 하나님의 숨겨진 선하신 뜻을 발견하고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때로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 하나님이 준비시켜 주시는 삶이 되길 축복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원합니다. 때로 알지 못할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며 나아가게 하시고, 순종할 때에 베풀어 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정체성,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수 없지만 순종하며 나아갈 때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출처] '하나님의 드러난 뜻과 숨겨진 뜻...'(창 22:6~14)|작성자 js9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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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십자가를 평화롭게_(23.12.10)
본문 | 창22:6~14
6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씨와 칼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둘이서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7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불렀다.
“아버지!”
“얘야! 내가 듣고 있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8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나,
9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놓은 다음,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11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12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게 하지 말아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13 아브라함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숫양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아브라함은 곧 가서 그 숫양을 잡아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다.
14 아브라함은 그 곳을 야훼 이레라고 이름 붙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 하고 말한다.
㉠ 칠십인역을 따랐다. 히브리어 본문은“야훼의 산에 장만되어 있다.”혹은“야훼의 산에서 그가 나타나신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성경전서: 공동번역 개정판
(전자책, 창 22:6–14). (1999). 대한성서공회.
1. 서론: 십자가와 속죄에 대한 다양한 해석
오늘 우리는 십자가와 속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왜 돌아가셨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오랜 기독교 역사에서 다양한 답변을 받아왔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우리가 죄를 지었고, 그 죄의 대가는 죽음이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주로 "대리적 속죄" 또는 "형벌 대속론"으로 불리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의 초기 천년 동안은 다른 해석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승리자 그리스도론"이라고 불리는 이 해석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으며, 따라서 우리도 그 승리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십자가에 대한 해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해 왔으며,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시각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2. 구약 속 인신제사와 하나님의 뜻
오늘의 본문인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려는 장면은 인신제사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이 정말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셨을까요? 아니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것일까요?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관습 속에서 인신제사가 존재했음을 고려할 때, 이 질문은 더욱 복잡해집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는 인신제사를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셨음을 강조하지만,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서는 때때로 인신제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사건은 후에 유월절 양으로 대체되었고,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되며, 예수를 유월절 양에 비유하는 해석으로 이어집니다.
3. 예수의 십자가: 다양한 속죄론의 발전
십자가에 대한 해석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첫 번째 천년 동안은 승리자 그리스도론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중세에 들어서면서 안셀무스의 "만족설"과 함께 형벌 대속론이 점차 힘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해석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신한 속죄의 행위로 이해되며, 이는 교회의 주류적 해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도덕적 감화나 모범으로 보는 해석, 또는 죽음이라는 질병을 치유하는 행위로 보는 해석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속죄론은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과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4. 형벌 대속론의 문제점과 대안
형벌 대속론은 오랜 시간 동안 교회의 주류 해석으로 자리 잡아왔지만, 그 안에 내재된 폭력성과 문제점들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 해석이 폭력적인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특정 집단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됩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이나 다른 사회적 참사에서 "희생"의 의미를 왜곡하여 사람들을 가스라이팅하는 경향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승리자 그리스도론"은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강조하며, 예수님의 십자가가 평화의 상징이 될 수 있음을 제시합니다. 르네 지라르와 같은 학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희생양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평화적 상징이라고 주장합니다.
5. 결론: 십자가에 대한 새로운 논의와 발전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다시 한 번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단순히 죄에 대한 형벌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그 안에 담긴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더욱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이 폭력적이지 않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세상에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설교를 마치며, 여러분과 함께 십자가에 대한 풍성한 대화와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하는 만큼, 우리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나아가길 바랍니다.
[출처] 십자가를 평화롭게_(조요한전도사님)_창22:6-14|작성자 길섶교회
십자가를 평화롭게_(조요한전도사님)_창22:6-14
제목 | 십자가를 평화롭게_(23.12.10) 본문 | 창22:6-14 설교자 | 조요한전도사 6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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