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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1.주일예배]<부모의 자녀 훈육방법>





[좋은 이웃 축복송]
1. 엄마를 만난건 주님의 축복이죠
엄마의 사랑의 섬김이 날 감동케하죠
엄마를 만난건 주님의 큰 은혜죠
엄마의 손길을 통하여 주님을 느껴요
2. 아빠를 만난건 주님의 축복이죠
아빠의 사랑의 섬김이 날 감동케하죠
아빠를 만난건 주님의 큰 은혜죠
아빠의 손길을 통하여 주님을 느껴요
사랑해요 감사해요
우리 함께잡은 두손을 언제까지나 놓지 말아요
사랑해요 감사해요
우리 함께했던 그 약속 영원토록 지켜나가요
3. 그대를 만난건 주님의 축복이죠
그대의 사랑의 섬김이 날 감동케하죠
그대를 만난건 주님의 큰 은혜죠
그대의 손길을 통하여 주님을 느껴요
사랑해요 감사해요
우리 함께잡은 두손을 언제까지나 놓지 말아요
사랑해요 감사해요
우리 함께했던 그 약속 영원토록 지켜나가요

◐주안에서 부모공경하라 (엡6:1~3)◑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매년 저는 어버이주일에 부모공경에 대한 주제로 설교합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부모공경에 대한 설교를 꼭 하려는 이유가 있습니다.
부모공경이 중요한 이유
첫째는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함입니다. 기독교를 불효의 종교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해입니다.
이런 오해가 발생한 것은 제사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계명에 하나님외에 다른 것에게 절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제사를 드리면 십계명을 어기는 죄를 짓는 것이라 하여 기독교는 제사를 금지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제사문제로 인해 예수를 거부하거나 박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지금 천주교는 제사문제보다 영혼구원이 더 우선이다 하여 제사를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제사는 효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죽은이의 영이 다시 찾아와 차려놓은 음식을 먹는다는 개념은 없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와 그의 부하들이 사람들을 현혹하기 위해 죽은 부모인척 거짓으로 속이며 나타납니다. 영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이에 속아 넘어갑니다.
기독교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영은 하나님 앞에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이 심판에서 영생과 영벌이 결정됩니다. 영벌은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고, 영생은 영원한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준다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제사는 다른 영(귀신,마귀)에게 절하는 종교의식입니다. 이것은 효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잘할 것을 강조합니다.
둘째로 부모공경이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열쇠입니다. 좀 전에 십계명 이야기를 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지켜야 할 열 가지 계명입니다. 십계명중 1~4계명은 하나님사랑의 계명입니다. 6~10계명은 이웃사랑의 계명입니다.
십계명의 중심인 다섯 번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연결하는 다리가 부모공경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이 부모공경을 통해 이웃사랑을 배웁니다. 반대로 보이는 이웃과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이점을 예수님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당시 유대인들의 전통가운데 ‘고르반’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고르반이란 하나님께 드렸다라는 뜻입니다. 고르반 하며 하나님께 드렸다 하면서 부모에게 드리지 않는 것은 문제라 하셨습니다.
이것을 지금씩으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렸으니 부모님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라 하셨습니다. ‘말로는 나를 공경한다 하지만 나를 거역하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부모공경과 하나님 사랑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 잘하려면 부모공경을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공경을 오늘 설교합니다. 여러분은 기독교 신앙에서 부모공경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부모가 많습니다. 공경할 부모가 안계신 분들도 많습니다. 그래도 부모공경에 대해 설교합니다. 부모가 계신 분들은 말씀을 듣고 부모님께 공경하며 신앙이 건강해지길 바랍니다. 부모님이 안계신 분들은 자녀에게 부모공경을 가르쳐주시길 바랍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중 하나가 부모공경입니다. 잠언22:6절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딤전5: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셋재 부모공경을 잘하는 것이 자녀가 복 받는 길입니다. 엡6:2~3절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하나님이 계명을 주시면서 축복의 약속을 담아주신 것이 부모경공의 계명입니다. 부모에게 잘한 사람이 잘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준 성경이 룻기입니다. 룻의 가족은 흉년을 맞아 고향을 떠나고, 집안의 남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절망하며 룻에게 떠나 네 살길을 찾으라 합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하며 끝까지 함께합니다. 그 뒤 룻은 보아스와 재혼하고 그 사이에서 오벳이란 아이를 낳습니다. 이 아이가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선조가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잘되길 바라신다면 부모공경을 가르쳐주시길 바랍니다.
주안에서 순종하라
어떻게 부모공경해야 할까요?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주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에 대해 주석에서는 ‘우리가 순종해야 할 부모는 그리스도인 부모를 전제로 한다’로 해석합니다. 왜 이렇게 해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부모가 예수 믿지 마라라고 말했다면 순종해야 하는지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순종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를 거역하라는 것 아니면 부모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라’ 이렇게 주안에서 순종하라를 부모공경의 범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안에서’는 부모공경의 방법도 됩니다. 참된 효도가 예수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부모를 향해 마음을 닫고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교인들 가운데도 부모와의 관계가 깨어진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저희 부모님도 단절된 상태로 10년을 살아오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다 장로이고, 할머니 어머니 다 권사입니다. 그런데 관계가 나빴습니다.
원인을 따져보면 다 할말 있습니다. 어머니경우는 어려운 시절에 지독한 시집살이로 시집에서 뛰쳐나왔습니다. 어머니 말로는 아버지를 거의 머슴처럼 부려먹었다 합니다. 할 수 없이 시집에서 나와 처가로 갔습니다. 처가에서 사는동안 저의 작은형이 죽고 작은형이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이 모든 불행이 시부모님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나 재산문제로 크게 다투었고 그렇게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런세월 10년만에 저희 부부가 결혼하고 화해시켜드렸습니다. 그렇게 화해하고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는 아직 살아계십니다.
힘든세월 살다보면 오해하거나 작은 것들이 쌓여 갈등이 됩니다. 부모자식 관계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모가 존경받을만 해서 존경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설령 그렇지 못하다 할지라도 주안에서 존경하라 합니다.
‘주안에서 존경하라’이 말씀은 부모를 볼 때 예수를 바라보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부모를 볼 때 예수를 생각하면 부모님에게서 예수님이 보일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손에서 예수님의 못 자국난 손이 보입니다. 부모님의 등에는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부모님이 나를 대신하여 나를 위하여 당하셨던 고난, 희생이 보입니다.
내가 잘해서 산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피 눈물로 내가 살게 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에게서 부모님이 보이고, 부모님에게서 예수님이 보입니다.
예수안에서 부모를 바라보면 이렇게 보입니다. 효자에게는 어떤 부모도 다 좋은 부모라고 했습니다. 효자의 눈에는 부모의 허물은 보이지 않고 감사할 것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거듭난 성도에게도 부모는 좋은 부모가 됩니다. 부모님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부모에 대하여 할 말이 많을지라도, 예수의 사람이 되고 나면, 부모님은 오직 감사와 사랑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때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할 눈이 뜨이고 능력이 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예수 안에서 천국가정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주안에서 부모공경하는 가정이 되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복음에 담겨있는 부모공경의 은혜가 여러분가정에 충만하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주안에서 부모공경하라 (엡6:1~3)|작성자 사방스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에베소서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에베소서 6:1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 얻기를 원합니다. 종에게 크신 또 권능을 부여해 주셔서 선포할 때 하나님의 그 마음을 펼치게 하여 주시고, 우리 하나님의 생각을 말하게 하여 주시고, 또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 받을 때 정말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력으로 받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결코 한쪽 귀로 듣고 또 다른 쪽 귀로 흘려 내버릴 수 있는 그런 식의 것이 아닌 참 영적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말씀 중 하나이며, 또한 오늘도 우리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 중에 한 가지 우리에게 익숙한 것으로서는 바로 이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너희 부모를 순종하라.’ 오늘 본문, 에베소서 6장 1절의 말씀이며, 또한 2절의 말씀인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단지 하나의 좋은 의미로 건네는 권유의, 어떤 제안, 소위 이제 ‘덕담’이라고 할 수 있는 좋은 말 나눔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하고 또 상대방에게 권하지만은, 상대방이 그리 실천하지는 않더라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 하면 좋은데 아쉽지만 안 하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식의 말씀? 그냥 슬쩍 떨어뜨려 버릴 수도 있는 말씀같이 여기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이 말씀이 주어져 있는 이 상황, 우리가 처하고 있는 이 상황을 보면 이것은 그냥 덕담으로 치부하고 끝낼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일단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굳이 명령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 상황적으로 보면 ‘무의미하게 주는 말씀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업으로 부르심 받은 우리
일단 이런 면들을 다시 검토해 볼까요? 지금까지 에베소서를 쭉 보니까 첫 장부터 해서 얼마나 말씀들이 심각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오하고 뜻깊은 영적 진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너무나 꽉 차 있습니다. 사실 거의 숨 막히게 쭉 달려온 이 에베소서 말씀에는 단어 하나하나가 매우 엄선돼 있습니다. 그리고 문장 하나하나가 굉장히 밀도 있게 아주 꽉꽉 눌러서 짜여져 있어요. 단어 하나를 보더라도 그냥 아무렇게나 한번 어떤 표현하기 위해서 그냥 묘사적인 글을 하나, 한 단어를 넣는 거? 이런 거 하나도 없습니다. 그다지 의미 없이 추가된 단어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게 얼마나 굉장히 보석같이 꽉꽉, 굉장히 밀도 있게 짜여져 있는, 이런 상황을 5장까지 다 했는데, 6장에서 ‘이렇다 할 의미가 없이 그냥 추가되었다’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무려 4절에 해당하는 말씀인데.
또한 앞에서 보면, 인류의 운명에 대해서,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 대략적인 그림이지만은 명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도대체 이 우주를 어떻게 하시려는 것인가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원한 비밀을 통하여 우리가 알게 되었죠.
그럼으로써 우리가 정말 태초부터 태초 끝까지를 거의 한눈에 일단 쭉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도 그냥 싼 값에 한참 들여다본 것이 아니라 거의 직설적인 이런 말씀을 통해서. 굉장히 급박한 움직임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들어왔는데, 이 서신이 마무리가 된 부분에서, 6장이 마무리입니다. 여기에서 갑자기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을 무려 4절을 ‘쓱’ 하고, ‘쓱’ 그냥 추가로 주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냥 추가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말씀들의 중요성을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네 부모를 순종하라’ 이게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이건 분명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대하여 좀 정확하게 우리가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참 의미를 잘 분석하고, 그 분석하는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해야 됩니다. 특히 부모 된 자 또 자녀 된 자, 우리 모두에게 해당될 터인데 양쪽이 다 새겨듣고, 이제 영생으로 인도하는 우리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를 받아서 순종하고 달려갈 수 있도록 결심해야 될 것입니다.
일단은 우리가 여기에서 가장 이제 우리 앞에 크게 나타나 있는 이 문제를 대해봐야 될 것입니다. 가정 생활의 문제입니다. 왜 하나님이 가정생활의 문제를 이렇게 좀 상당히 깊이 다루었을까?
우리 인생에 있어서 부부의 생활, 부부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죠. 이것은 이미 우리가 익히 서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또 중대한 문제가 있는데 바로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 역시 대단히 중요한 문제고 인생은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다닙니다. 우리가 자녀였을 때는, 누구나 자녀이고 부모 동시일 수 있지만은, 우리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을 때에도 역시 자녀로서 이 문제를 갖고 씨름을 했고 또 부모가 된 자들은 이번에는 부모의 입장에서 또 계속 씨름해 가는데 굉장히 힘든 문제입니다. 해결하려 해도 시원스럽게 해결되지 않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런데 혹시 여러분 이렇지 않습니까? 자녀에 대한 얘기를 한다. 부모들끼리 와서 자녀의 얘기를 한다 할 때 뭐가 관심 있습니까? 이런 얘기를 굉장히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우리 애는 도저히 말을 안 듣는데 저기 누구네 집은 참 말 잘 듣고 애가 하네.’ 그래서 자식이 자기에게 말 잘 듣는 거, 자녀는 부모의 무조건 말 잘 듣는 거. 이런 거는 되게 좋아하고, 이게 공식처럼 돼 있습니다. 이거는 뭡니까? 이거는 완전히 이기적인 거죠. 이것은 이슈가 아닙니다. 누구 말 잘 듣고 안 듣고, 순종하냐 안 하냐는 이슈가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부모이기 때문에 무조건 순종하는 거, 이건 이슈가 아니고, 중요한 이슈는 바로 ‘자녀는 부모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열어줘야 되는 절대적 대상이다’ 하는 바로 이 점입니다. 그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사역 대상이에요. 부모는 자녀가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돼. 만나게 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런데 우리는 워낙 이 세상 환경에 익숙해져 있는 탓인지, 자녀의 문제는 신앙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다 ‘개인의 문제다.’라고 보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세상의 가치관에 많이 영향을 받은 탓이에요.
세상의 그 가치들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신앙생활 문제인데도 이걸 받아들여서 이걸 해석하는 그런 도구로 삼고 있습니다. 이게 뭔가 잘못돼 있죠. ‘자녀의 문제는 다 자기가 알아서 해야 되고, 신앙의 문제도 다 자기가 믿음으로 와야 된다.’ 이거는 ‘개인의 삶의 문제다.’ 이렇게 치부하는 거잖아요. 그러나 이거는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굉장히 제일 중요한 문제가 하나는 자녀의 삶, 자녀의 삶의 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기업에 속해 있는 부분이에요.
그래서 이 점을 간과하고 우리가 마구 자녀 문제를 판단하는 기준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 잣대를 마구 휘두르면서 결정하고, 또 판단하고 또 시행하고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이 말씀에서도[1], 우리 처음부터 말씀 봤는데, 에베소서의 거의 처음부터 봤는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게 우리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what we are, 이게 우리라는 존재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근데 우리는 원래 처음부터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선한 일’이라는 것은 ‘선한’, 딱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부하신 일들이에요, 우리가 하도록 하는. “이 일은”, 선한 일이에요, 선한 일.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선한 일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우리를 통하여 그가 예비하신 일을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존재에 주어진 우리의 운명적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문제, ‘예수 믿는 문제’ 할 때 이것은 개인적으로 대해야 되는, 개인적으로 대하는 문제라는 것에 대해서 너무 익숙해져 있어요. 그래서 매사에 신앙 문제는 다 ‘개인적인 거.’ 이렇게 우리가 너무 성격 짓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다 믿음에 관한 것, 개인적인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강조해 왔기 때문에 ‘이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생각하고, 자녀의 문제, 자녀의 신앙 갖는 문제도 ‘니가 해야 된다.’라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문제라는 것을, 즉 하나님 자신이 힘써서 이루시려는 일이라는 것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단히 근시안적이고요, 좀 미련한 것이죠. 근시안적이고 옳지 않은 자세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어떤 한계 지은 이런 상황 속에서는 이해할 수 있어요.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을 위해서 죽으신 거 맞습니다. 우리 각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가 죽으셨고, 각 사람을 일일이 다 부르셨어요, 구원으로. 다 구원하시고, 각각 다른 시간에, 모든 인간이 다 자기 구원받은 시간이 다른 시간이 있어요. 또 예수께서 부활하셨는데, 우리 모두를 위해서, 또 각 사람을 위해서 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효과적으로 보자면은. 그래서 그가 부활하심으로 우리 각 사람을 천국문으로 다 들어가도록 각 사람에게 약속을 주었어요. 천국에 대한 소망을, 인간으로 치면 그의 맹세를 보장을 하셨어요.
그러나 거기서 머물고서는 “어, 다 끝났네.” 하고서 뒤돌아서면 안 되죠. 하나님의 그 웅대한 계획에 대해서 여기서 고려하지 않고 “아, 다 끝났네.” 하고 가면은 자기는 하나님의 일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질 자세가 아니고, 예수의 제자라면 너무 근사한 그 타이틀은 정말 어울리지도 않는 것이죠. 예수의 제자의 자세는 전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주신, 열어주시고 시작하게 해 주신, 우리를 세워주신 또 구원하실 때 우리를 새로이 태어나게 하셨는데, 그럼으로써 천국 시민이 되었고요,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로서 “아, 하나님의 일에는 나는 관심은 없습니다. 아버지가 알아서 하시겠죠.”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아, 그건 관심이 없다.’
우리는 주께서 일일이 각 사람을 다 구원하셨지만, 그들을 함께 모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인했잖아요. 그는 모든 믿는 자들을 다 모아서 함께 하나가 되어서 주의 일을 위하여 평생을 헌신하여 살도록 하셨습니다. 자신들을 바치도록 했어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바치는 자들입니다. “넌 날 따르겠느냐?” “아이, 나 아버지 먼저 부양하고 그다음에 아버지 돌아가시면 따르겠습니다.” “아이, 지금 비즈니스가 있어서 다 하고 따르겠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을 것을 각오하고 따라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에요. 누구는 이렇게 하고, 누구는 저렇게 하고가 아닌 것이죠.
사실은 우리 모두가 예수 믿을 때, 침례 받을 때 육은 죽고 영으로는 살아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육신은 죽이고 영은 영생을, 약속을 받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는 것이고요. 이거를 내놓지 않으면, 위에서 준 거를 받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둘 다 가질 수는 없어요. 이게 그리스도인이며 신자이고, 이게 새 이스라엘이며, 정말 새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영접하고 구원받을 때에 신앙 문제를 다 끝낸 것이 아니라 비로소 시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의 우리의 삶, 다 다른 어떤 근본적 사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주신 사명, 헌신하여 그를 위해 쓰여지는 이 부르심의 삶에 모두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에 맡기신 기업, 인간들,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신 이 부르심의 삶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 각자 부름을 받았고 이 부르심을 받아서 임하는 기업은 공통의 기업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이해하기 어려운데 ‘꼭 그렇게만 아니겠지.’라고 생각하지만은, 눈을 밝혀서 볼 수 있다면, 우리에게 주신 소망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비전,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안다면은 이 기업이 뭘 말하는 것인지,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 그때서 알게 될 것이다.[2] ‘우리가 각 사람이지만 우린 하나다.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 받았느니라[3].’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평소에, 다 담을 수는 없잖아요. 평소에 머리에 담아두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 규모가 엄청 크고 무겁고요, 또 그가 일을 시행하는 데 필요한 시간도 정말 상당히 광범위한, 긴 시간의 규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의 전체 영혼들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게 하여 그들로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기 가서 만들자? 여기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날 임할 때는 완성의 날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분량을 완성하고 가야 돼요. 하늘나라를 만들어야 됩니다.
근데 이 일을 가만히 두고,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하신 거니까 잘 되고 있겠지.’ 세상에의 그런 거잖아요. 여기 휴지 떨어져 있으면 ‘에이, 그냥 누가 줍겠지.’ 하고 그냥 지나가는 거. 여기는 내가 주워야 되거든요? 바로 하나님의 나라 일은 성령이 내게 시키셔야 돼요. 나를 능력 주시고, 나를 사용하셔야 돼요. 내게 능력이 없다면 잘못된 것이죠. 하나님은 내게 관심이 없으신 것이죠. 그런 상황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내게 능력 주시고 날 사용하셔야 됩니다.
우리는 충성된 마음으로 함께 순종하여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나라의 일을 우리는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삶은 개인적인 삶이 더 이상 아닌 거예요, 예수 믿는 순간부터는.
타격 받은 가정의 질서와 평온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바로 가장 하나님 나라에서 위기이며, 가장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가 이겁니다. 바로 가정의 문제. 다시 말하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은 부분은 바로 이 ‘가정’입니다.
좀 구체적으로는 남자와 여자의 갈등부터 일단 들을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부부의 문제이죠.
그러나 이와 또 거의 동등하게 또 다른 문제 그러나 유사한 문제는 바로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은 이런 문제를 또한 함께 품고 있습니다. 바로 자녀들로 하여금 신앙을 갖게 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문제, 바로 이것이죠. 남편과 아내의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주까지 다 마쳤고, 오늘은 자녀와 부모 간의 관계에 대한 말씀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는 ‘자녀들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할 것인가? 쉽지 않구나.’ 이 일에 대한 어려움이 우리가 겪는 바로 문제점인 것이죠.
자녀들로 하여금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할까?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게 할까? 그들에게 주어진 영적인 본분, 영원히 그를 위하여 하나님이 준비하신 본분을 실행하게 할까? 신자의 길을 어떻게 가게 할까?
이제 이게 문제인데, 자녀들을 신자가 되게 하려면 어떻게 어떤 것이 중요할까요? 이 토대가 제일 중요합니다. 토대, 어떤 토대 있잖아요, 파운데이션(foundation), 이거 있어야 쉽죠. 이거 없으면 너무 어렵고. 자녀에게 “니가 커서 알아서 니가 해. 네가 나가서 성장하고 고등학교 나오고 이렇게 나중에 그렇게 돼서 니가 스스로 이겨가. 니가 예수 믿어. 알아서 해. 예수 믿는 게 좋을 걸? 안 하면 혼나.” 뭐 이런 식으로 나중에 하면은 이거 안 됩니다. 이건 하나님 방법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방법론이 완전히 하나님과는 정말 상반되는 것이죠. 이렇게 하면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뭘까요? 인간처럼 ‘니가 알아서 다 하겠지.’ 이게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은 우선적으로 아기가 세상에 나오면서, 나오면서부터 양육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훈련하기 시작해요. 근데 왜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하지? 왜 그럴까요? 첫째, 세상의 타락성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 그래요? 타락하지 않도록? 아, 그건 근데 왜 그러죠?
두번째로, 그리함으로써 비로소 이제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자로서 섬길 수 있는 훈련을 받기 때문에. 일단 이건 뭘 말하냐면, 첫째는 아이가 세상의 타락에 물들지 말아야 되고, 세상의 타락을 자기에게도 갖고 오지 말아야 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이제 필요한 양육을 받게 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도 확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해 버리면 교육 자체가 안 되니까. 어두움에서 계속, 어두운 자가 와서 계속 어둠에서 ‘뭐가 보인다는 말이냐?’라고 답답해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부터 그렇게 하는 이유는 중요한 이유가 있어요. 바로 죄의 성질, 사람이 몸에 갖고 태어나는 죄의 성질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성은 굉장히 골치 아파요. 이 죄성은 죄를 계속 우리 몸에 계속 불러오고 꾀하고, 범하도록 꾀하고, 또 죄 속에 사람을 계속 머무르게 하고 있다가 그다음에 세상에 조금 물든 사람들을 보면, 계속 죄에 대한 말이 계속 쏟아져 나와요. 생각이 계속 거기 있는 거죠. 그렇게 되면 영원히 멸망으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성이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가야 될 영혼들로 창조된 원래 인간의 본질적 그런 존재를 무력하게 해 왔죠. 영혼들의 마음을 빼앗고, 생각을 빼앗고 그다음에 기능을 못하게 하고. 기능 먼저 마비시키고 권리를 자꾸 빼가요. 슬쩍슬쩍 자꾸 빼가요. 나중에는 자기가 아무것도 없는 걸 느끼게 되죠. 그래서 자기는 그냥 통제 받은 대로, 조정 받은 대로만 행하죠. ‘이게 나야.’ 하지만은 자기가 아니죠, 더 이상. 이거 되게 극심하게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해롭고, 굉장히 그 동기가 굉장히 사악하고, 위험합니다. 여기 말려들면 죽어요. 죽는데 얼마큼 죽느냐? 영원히 죽어. 이거 매우 심각한 경계심을 가지고 대해야 할 요소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나요. 각 사람은 죄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대단히 불편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는 거죠. 이 위기 속에서 태어나는 거예요. 아이가 태어날 때 “이야~ 축하한다!”가 아니라 위기는 시작된 거죠. 그 시간에.
그래서 ‘언젠가 믿으면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무서운 문제를 갖고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절대 그렇게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때뿐만 아니라 오늘도 절대 그렇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옛날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또 모세를 통하여 직접 이렇게 말을 하도록 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강단에서 하고 또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저들을 역사하시기 때문에 다른 점은 그것이죠.
옛날에 어떻게 했을까? 이스라엘을 그 세상의 타락으로부터 어떻게 보존했을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어떻게 기르시는 것일까? 이렇게 기르세요. 처음에는 어떻게 했느냐? 이게 시초가 이렇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자를 찾아요. 아브라함은 선한 사람이에요. 아브라함은 간사하지 않아요. 진실해. 아브라함도 죄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아브라함도 더러울 수 있어요. 아브라함도 실패를 많이 해요. 그러나 그만한 사람이 없어요, 그래도. 신실해요. 이 사람을 보고 하나님도 놀랬어요. 그중에서 제일 낫다고 보신 거죠.
착한 이 사람에게 축복을 명하니까 이게 몇천 년을 가게 되었습니다, 축복이. 하나님의 축복은 반드시 아브라함이라는 뿌리를 통해서 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까지 쭉 가서 이제 한 백성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원래 가정에서 시작했습니다. 자손을 낳고 하니까 가정이 가정으로 또 이렇게 연결되어서 또 물려주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몇 대를 가니까 좀 많아졌고, 전부 가정들이 일개 교회가 다 되어서 그것이 또 이렇게 모여지는 이런 모양이 됐습니다. 가정들이 모인 거예요. 그리고 이 가정 단위로 계속 훈련이 됐고, 이것이 하나의 백성을 이루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교회입니다. 오늘 주님의 몸을 이루는 우리들.
왜 무슨 이유로 하나님은 그들을 훈련하셨는가? 첫째,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애초에 타락했을 때 저주가 들어왔죠. 그 다음부턴 세상은 계속 썩어요. 이 저주 때문에 그 다음에 계속 나빠질 뿐이죠. 이 온 세상에는 골목골목마다 다 잘못되게 돼 있습니다. 이것이 활개를 치면 인생은 정말 엄청 무의미한 데다가 고난만 갖고 보내게 될 것입니다. 이걸 차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주가 활개치지 못하도록 하는 필요는 절대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느껴야 합니다. 저주가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극복해야 될 대단히 엄중하고 굉장히 힘겨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가정에서 또 교회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아는 훈련을 이렇게 해 나가야 됩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그렇게 했고 우리는 새롭게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과 근본적으로는 다름없이 이스라엘 시대와 우리 시대와 다름없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목적을 같은 방법으로.
그래서 이 조직은 뭐죠? 교회와, 이 가정의 조직? 점조직 같은 것입니다. 그냥 하나가 완성돼 있어요. 완성된 세포가 또 하나의 세포를 분열시키고 또 양성하고 이렇게 해서 빽빽히 짜여진 통일된 한 일체인 거죠.
축복의 통로
그래서 이렇게 해서 발생되는 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거하는 거예요, 거기.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는, 그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리스도인이 자녀를 갖는 것은 그가 주시는 축복을 다루는 그 통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자녀를 갖는 것은 축복의 통로가 생겨난 거예요. 하나님은 그의 축복의 통로를 확보하시려고 합니다. 가정을 통하여 부모가 먼저 이걸 갖고 그다음에 자녀에게 또 이 자리를 주어야 되죠. 축복을 전하는 요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냐면, 이 두 가지 의미가 있죠. 축복을 다루는데 축복이라는 것은 pass(패스), pass가 아니라 내가 축복을 받고 전하는 거예요. 통로라는 것이. 축복이 오면 내가 “어, 잘 가.” “축복 보내세요.” 하고서 ‘휙’ 해서 “가세요.”라고 비켜주는 게 아니라 나를 통과해 가야 되는 거죠. 축복받지 않은 사람이 축복, 자녀에게 “이삭아, 내가 너를 축복하노라. 내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리라. 내가 받은 복을 너희가 가지리라!” 이거 할 수가 없어요. 당신이 복을 받았어요? 받았으니까 하죠. 그래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업이 잘 되도록 한 것은 바로 우리가 축복에 통과되는 이 방법, 바로 같은 작업인 것입니다.
사단이 다 이 세상 망쳐 놓고 모든 것이 망국으로 이렇게 향하게 하고, 총체적으로 다 붕괴시키고 있고 조직적으로 파괴하고 있고. 이 세력이 여기 있을 때에 우리가 온전한 원래의 상태대로,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서, 온전히 회복하여서 다시 세워진 나라로 해서 아버지께 드려야 됩니다. 망쳐 놓은 것을 회복시켜야 돼.
그래서 에베소서 1장 3절, 매우 이른 시점에 이미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4] 여기에 너무나 은혜로운 내용들이 포함돼 있지만은 바로 이거를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부터 늘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복으로 복받는 우리의 현실에서의 삶. 우리의 섬기는 우리 열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복된 삶.
이렇게 볼 때 불신자들의 삶은 우리 것과는 굉장히 다르죠. 불신자들은 뭘까요? 불신자들이 자녀를 갖는다. 어떤 불신자가 자녀를 갖는다. 이건 상황적으로 뭘까요? 바로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자를 따르는 순서를 이제 갖고 시작하는 그 영혼을 맞아들이는 거죠.
불순종의 아들들한테서 역사하는, 사단의 통제를 받는 한 영혼이 세상에 “응애!” 하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혼은 불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하나님의 영향을 받기에 굉장히 불리한 대로 방치되고 세상의 영향에 그냥 완전히 노출시켜서 과다한 세상의 영향을 받고 자라나게 됩니다. 세상에서 맞부딪혀서 이미 다 저주에 찌드는 사람들에게서 직접적으로 이걸 다 영향을 받죠. 배우고. 이들은 하나님의 계획에서는 너무 너무나 멀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예쁘고 귀한 아기라고 하지만은, 하나님의 계획에서는 너무나 너무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존재들인 거죠.
그런 반면에 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는 자신에게 구원하는 힘이 가까이에 있어요. 하나님의 돕는 영향력이 가까이에 준비돼 있어요. 좌우에 다 있어. 환경에 이렇게 둘러싸여 있어. 영혼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강렬히 역동하고 있고, 자기 부모의, 아빠의 심령 속에 성령의 의지가 뜨겁게 돌고 있고, 엄마에게서도 뜨겁게 돌고 있어. 이 환경 안에 있어요. 이 거룩한 자기장 안에 이렇게 둘러싸여 있죠. 가정에 능력이, 하나님이 주시려고 그러고, 성경에서 ‘능력 주시리라, 능력 주시리라.’ 가정에 하나님이 저를 보호하는 힘이, 또 아이로 하여금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주도록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는 세상을 이기는 힘이 넉넉합니다. 물론 세상에서 때리고 그러면 맞고, 세상에 찌르고 그러면 찔려야 되고 이렇지만,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고꾸라지는 것 같지만 완전히 고꾸라지지 않고, 죽는 거 같지만 진짜 죽는 게 아니죠.
설령 세상에서의 보는 눈으로는, 세상 풍조의 입맛으로는 이 아이가 렇게 성공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공은 그것이 아닌 것이죠. 그 영혼의 성공은 하나님이 영원토록 그를 잘 되게 하시려는, 당신의 꿈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살게 하고, 이 사람이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을, 하나님의 가까이서 하는 하나님의 은총, 저를 향한 하나님의 애정과 관심이 그에게 있는데 세상에서 뭘 좀 잘 안 된다고 해서 그 사람은 절대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를 지원하는 힘이,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오히려 강력한 힘이 되죠. 영혼이 잘 돼야 세상 일도 잘 돼요.
이 축복은 가정을 통해서 전파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축복으로 정말 만족해야 되고 축복을 만끽하고 자녀에게 또 나눠줘야 돼요. 전달해 줘야 되죠. 분량 전체를. 그래서 가족마다 원래는 증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아, 저 이스라엘 유대 시대에는 그냥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여기서 증인이 나타난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증인은 이스라엘이에요. 처음부터 증인입니다. 바로 부모가 증인이 되어서 자녀들을 순종하는 자로 만들게… 해 놓고 그다음에는 순종하는 자가 돼야 되는데, 자녀가 부모를 순종해야 돼. 이걸 먼저 해야 교육이 되죠. 그래서 순서는 원래 그렇게 됐는데, 이건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어요. 1차적 목적이.
타락한 인류의 고난의 삶과의 사투
우리가 이걸 알아야 됩니다. 지금 저주를 이기는 문제에 대한 건데, 인류의 타락 때부터 가정은 모든 종류의 문제들로 괴로움을 당해왔어요. 죄성이 세상에 들어오고 함께 저주가 들어온 다음에 이 세상의 삶은 너무나 힘겨운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단 가정의 그 기반을 약하게 하고 가정을 흔들고 또 위협하여서 망하게 하는 데 대단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런 첫째 원인은, 왜 이 저주가 그렇게 힘들게 할까? 바로 죄의 성질이, 우리에 있는 죄의 성질이 거기에 맞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죄의 성질 때문에 이런 저주의 삶이 더욱더 힘든 거예요.
죄와 저주가 함께 들어왔죠. 그래서 나타나는 것은, 지난번에 우리가 말씀을 나누었다싶이, 남성의 우월주의, 이런 것들. 온 세상이 그냥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남성이 이미 지배하고 있어서 여성이 이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원래부터 그냥 세상의 남자 우월주의. 그다음에, 여자들이 남자의 위치를 찬탈하려고 하는 그런 움직임. 이게 저주거든요? 그냥 계속되고 있어요. 뭔지도 모르면서.
그 다음에 세번째로는 이제 자녀들이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거. 자녀들이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비슷하게 네번째로는 또 부모들이 자녀들을 학대하는 거. 이거 많이 있어요. 부모들이 자녀 학대하는 거, 이거 진짜 심각해요. 이거 저주받은 건데 저주를 그대로 가정에서 확장시키고 있는 거예요. 가정에서 더 배양해 가지고 더 강력하게 하고 있어요. 이거 되게 나쁩니다.
또 이 가정의 두번째 원인은, 그 죄성 그다음에는 뭐냐면, 이 세상 시스템은 사탄의 시스템.
하나님의 계획은 우주적으로 하고 있죠. 우주적인 이 하나님의 사업은, 기업은 가정으로부터 시작하죠. 그런데 이 가정부터 깬다는 걸 말씀드렸는데, 가정부터 깨는 건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사단은 멀리서부터 역사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부터 역사합니다. 바로 제일 가까운 사람부터 괴롭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쇠약하게 만들고, 쇠약해진 다음에는 멸망하는 건 너무 쉽습니다. 그냥 KO 직전에, 한 방이면 끝나는데 그냥 놔둬요. 그냥 이렇게 하고 쓰러지고 있는데 딱 멈추게 하고 그냥 놔둬요. 이미 멸망한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살짝 밀면 쓰러지니까.
사단은 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죠. 착한 수단, ‘내가 너를 공격할게~ 준비해~’ 이러고 공격하지 않습니다. 온갖 거짓으로 하죠. 모든 입으로 하는 거, 사람에게서 거짓으로 해서 응하게 하고 도장 찍게 하고 이렇게 해서 따라오게 하고.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사람에게 주입시켜요, 거짓말로 해서. 이런 일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이 세상 체제의 그 틀 속으로, 이 거푸집 속으로 자꾸 밀어 넣습니다. 그러면, 그냥 따라 들어가다 보면, 유혹받아 들어가다 보면 어두운 데에 가두어지게 돼서 그다음부터는 나올 수가 없어요. 그렇게 되면 이제 가정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 가정에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정들을 잠식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의 틀은 굉장히 위험하고… ‘뭐 다 현대적이고 문화 발전적이고 도덕적인 거, 이런 거 다 고려해서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말합니까?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인간의 욕심을 다 맞춰가면서 왔던 것이고, 그리스도인에게 맞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그 시스템은 원래 그리스도인에게 완전히 잘 맞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처음 등장하자마자 처음 세워지고 난 다음부터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 물들지 마라. 너희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너희를 분리시켜라!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5].’ 했습니다.
이거예요. 나라의 선언이고, 제1호 법안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는 거, 오염되지 않고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예요, 여기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사회의 발전
또 세번째로 우리가 이 저주에 찌들은 이 세상에서 더욱더 힘들 수밖에 없는 원인은 바로 인본주의적인 철학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인본주의 철학이 영향을 미치는 바로 이것이 세번째 파괴적 요소입니다.
인본주의 철학은 대체로 동서양 함께… 원래 전통적인 어떤 형태에서, 큰 그림에서 말하는 건데, 벗어난 어떤 새로운 이전에 없던 다른 모양을 자꾸 지향합니다.
가정에 관해서 보면, 어떤 정통적인 가정 윤리? 이런 것에서 자꾸 벗어나서 제안하는, 어떤 대안을 자꾸 추구해요. 그래서 성에 대한 그런 해방이라든지, 이런 식으로 이렇게 쭉 이렇게 옵니다.
그런데 그 뒤에는 무신론적인 토대로 해서 계속 연결이 어떤 무실론적인 기반으로부터 시작돼요. 이렇게 발전하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 체제인데, 신이 없는 것에서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 안의 따뜻한, 가정 안의 유대, 사랑, 희생, 서로 의지하는, 이게 기반이 되는 이런 거를 완전히 거기서 ‘왜 유대? 유대? 가족 간의 유대? 왜 사랑?’ 이것부터, 없이부터 시작하죠. 다른 계산으로부터 합니다.
이래서 가정에 대한 유대관계를 굉장히 낮게 여깁니다. 자녀와 부모의 역할, 그들의 관계에서의 역할, 가정에서도 따뜻한 관계, 이거를 굉장히 무시하고요, 가치를 낮게 여기고, 심지어 그 관계들을 해칩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를 해치더라도 사회주의 체제가 원하는 것을 더 거기에 채워갑니다. 그래서 결국 가정의 제거라는 것도 이제 발생하게 되죠. 점점 그런 쪽으로 결국 구체적인 목적지가 될 것입니다. 가정의 해체.
그래서 이런 것을 할 때 자녀들에게 일단 미끼를 던져요. ‘너희의 자유 위한 것이야. 너희는 마음대로 해도 돼.’ 이래서 좋게 들리고 ‘어, 이거 좋은 거구나.’ 하고서 그 미끼를 물게 되면 그것으로 잡히게 되죠. 다음부터는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죠.
이렇게 해서 사람들을 잠식해 가는 것인데, 바로 부모와 자녀의 유대가 약해지는 이런 세상이 그렇게 오게 되는 것이고, 이미 사회주의 체제가 그렇게 해 왔습니다. 이미 사회주의 체제는 옛날 80년대 이때에 이미 다 망했어요. 다 사회 체제가 다 망했고, 그게 그렇게 이론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다 증명이 됐는데, 그래도 세상에 여전히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또 다시 또 계속 움직임을 하고 있죠.
개구리가 있어요. 실험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개구리를 과학 실험실에서 실험하는데, 개구리를 이제 냄비에다 넣고 물을 좀 채워서 밑에서 열을 가했습니다. 냄비에 담겨진 개구리에게 열을 가합니다. 물에 열을 가합니다. 개구리는 이거 감지하지 못해요. 그 평온, 그 수온에 익숙한 개구리가 물이 어느 정도 더워졌는데도 느끼지를 못해요.
이거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 빨리 적응하는 것입니다, 재빨리. 물을 더 데웁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불편한 듯하는데 잠시뿐이죠. 얼른 적응합니다. ‘이거 더워지는데?’ 하고서 뭔가를 해야 되는데, 거기다가 뜨거워지고 있는데도 금방 적응해. 나중에는 살이 익고 있는데도 빨리 적응되었습니다. 죽기 일보 직전, 다 익어 가지고 의식을 잃는 상황까지도 적응이 되어 있어요.
사회의 변화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사회 변화도 원수 사단이 마구 역사하는 거를 막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가정에 침투하여 들어와서 아무도 눈치 못 챕니다. 내 가정을 보니까 벌써 너무 어려운 상태가 돼 있어. 눈치를 못 챘던 거죠, 우리는.
그러나 우리는 교회가 일단은 그런 불행을 미리 알고 움직여야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영적인 일이니까, 마귀, 사탄이 하는 일은 영적으로 해서 ‘우리가 보이지 않는 데서 ‘웅’ 하고 끝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죠. 아닙니다. 이 세상을 이렇게 해서 정치적으로, 영적인 양상으로 채워,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와서 싸우고, 나라와 나라가 싸우고 해서 끝나게 됩니다, 이 세상은. 마귀와의 싸움은 싸움으로 최후에 양상을 나타내요, 전쟁으로.
가정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그의 백성으로 불렀을 때 그가 하시는 건 이거예요. ‘너희를 통하여 모든 세상의 가정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6].’ 이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말씀인데,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너 때문이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발견하시고 그를 사랑하셔서 ‘너, 자손들 이후에 나타난 그들이 너 때문에 복을 얻을 것이다. 너를 그대로 옮겨줘. 너의 나를 섬기는 마음을 그대로 옮겨줘[7].’ 그렇게 하여 아까는 ‘너를’ 그랬는데 이제는 ‘너와 네 자손이’라고 해서,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그래서 임무를 주었습니다. 너 and 너 다음에. after you, you’ re children. 이렇게 그다음에는 너 아들이 해야 된다. 그래서 부모가 성직자면 자손이 성직자 하는 거예요, 원래는. 하나님의 법이죠.
시내산에서 이렇게…. 이제 그 나라의 출범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출범할 때 이렇게, 그러니까 정치적 출범이라기 보다는 이제 그 나라를 진짜 구성해서 이제 ‘시작!’할 때에 이렇게 위임했습니다. ‘너희는 제사장 나라다.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다[8].’
제사장은 몇 명일까요? 제사장이 유대 예루살렘 성전에 몇백 명 되겠죠? 많아야. 보통 이제 생각하기에 그냥 몇십 명 정도 일하는 정도라고 봐지는데, 온 나라가 다 제사장이라는 거예요. 그건 뭘 말하느냐? 그들은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제사장이니 그들은 증거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이런 상황에 있는 거죠. 그들은 진리와 그 축복을 저장하고 있다가 ‘이거 비밀인데, 이거 까지 마.’ 하고서 자손에게 전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행복을 전해주는 거죠, 통로입니다. 축복을 전파하는 통로, 진리를 전파하는 통로. 그리하여 무엇을 얻기 위하여서? 온 세상에 함께 이 말씀이 전파되어 함께 나눠지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자녀들에게는 이 진리를 알리기 위해서 이렇게 첫걸음이 이렇게 됐습니다. ‘가정에 자녀가 생기면, 그다음에 애가 조금 알아들을 수 있게 하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 이것부터 해라. 무조건 부지런히 하되, 집에 앉아 있든지, 길에 걷고 있든지, 누워 있든지, 일어날 때든지 이 말씀을 계속 가르치라[9].’ 부모에게 시키는 거예요.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해서 알도록.
또 부모가 말하지 않을 때도 그 무언가는 계속 그에게 증거하고 있어야 돼요. 어떻게? 여기다 붙이고, 팔에다 붙이고 해가지고 볼 때마다 하나님 말씀이 다 여기저기 있어, 다[10].
그럼 부모가 죽으면 어떻게 해여? ‘아유, 말씀 전하던 분이 갔으니 이제 말씀 없겠네?’ 그게 아닙니다. 집에 가면 문설주에 붙어 있어, 말씀이[11]. 그렇게 나를 보존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는 그리스도의 가정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념하는 훈련이 옛날부터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말로 또 시각적으로 항상. 우리는 지금도 하고 있죠. 우리는 다 큰 사람들이 교회에 와요. 그러나 가정에서는 하지 않잖아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데, 이 계획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자는, 사용하시는 그 에이전트는 누구냐? 그 대리인은 누구냐? 요원은 누구냐? 가정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기르는 책임
우리에게 자손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복이죠. 성경은 ‘자식들은, 어린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신구약을 통해서 아이들은 주님의 선물인데, 소중히 여겨야 되고, 진실함으로 대해야 되고, 감사함으로 대해야 되는 그들인데, 근데 애들이 막상 태어나면 착하지만은 않습니다. 순진하고 이렇긴 한데, 공격적인 것도 같이 있어요. 이기적이고. 굉장히 이기적이라서 “뭘 줘.” 그래도, “이거 안 돼.” 그러면 공격성까지 보입니다. “아아악!” 이러고서 막 부셔요. 자기중심적인, 충동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들이 자녀를 돌보지 않고 있다가 어느 날 보니까 자녀들이 완전히 어디서 다 주워 왔어. 그래서 어떤 세상적 철학과 거기서 진행하는 모든 것들을 갖고 있어요. 보니까 정말 이젠 대화가 안 돼. 이젠 다른 세계에 있어, 걔네들은. 몸은 있는데 다른 세계에 있어. 너무 놀라죠. 애들은 선악을 구분을 못 해요. 이 세상의 선악을 구분을 못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일수록 이 세상 문화에 대한 흡수성이 굉장히 빠릅니다. 강합니다. 어느 날 보니까 다른 애가 집에 있어. 이거 그때는 너무 늦었죠. 그래서 말씀 안에 교육을 해야 됩니다. 어릴 때부터.
성경은 이미 2천 년 전에 완성돼서 최소한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백성을, 또 하나님의 교회를 보존하는 방법이 있어요, 이미.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았고, 또 영적 전쟁은 하나의 큰 한 덩어리입니다. 하나의 큰 전쟁이에요. 많은 전투들이 있지만 하나의, one grand war, 하나의 전쟁이에요. 하나님은 하나의 전쟁에 임하셨어요.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았고, 지금도 변하시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초월하여 오늘도. 오늘 우리가 가진 모든 문화권도 큰 그림에서 하나님의 임하시는 전쟁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어떤 것인지를 오늘 바로 우리가 이제 대하기 시작하는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 대한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계획하시는 모든 계획 안에 있어서 하나님이 귀한 축복과 진리의 증인들 다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오늘 말씀을 다 전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다 같이 기도합시다. 기도할 때 우리 하나님, 우리를 역사하시고 능력 주셔서 이제 우리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귀한 가정을 세상으로부터 지키고 저들에게 하나님을 연결하여 하나님께 갈 수 있고, 하나님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저장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또 전파하는 우리 가정, 정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도와주시옵소서, 다 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에 주님의 분부하신 말씀을 순종하여 성찬을 들을 것입니다. 오늘 성찬을 들을 때 모두가 우리 주님이 죽으시러 가시기 전에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으로서 주신 언약을 하신 것을 생각하게 하여 주시고,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음을, 또한 그가 우리를 하늘에서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소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주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모든 사랑을 기억하는 자, 회개하는 자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자녀는 부모의 ‘거울’…올바른 훈육법 4가지
입력 2018.09.03 14:51 헬스경향 유대형 기자
자녀양육에 있어 ‘훈육’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자신의 판단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가르쳐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소아기를 거쳐 청소년기까지 올바른 방법으로 자녀를 훈육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관성과 단호한 자세 유지
훈육에서는 ‘일관성’이 중요하다. 아이에게 가장 나쁜 부모의 유형은 일관성 없이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다.
부모는 훈육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을 설정하고 아이를 대해야 한다. 아이가 옳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에는 정해둔 기준에 따라 아이행동을 고쳐줘야한다.
이때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부드럽게 하되 결정된 것에 대해서는 일관성 있는, 단호한 자세를 취해야 아이가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된다.

자녀양육에 있어 훈육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아이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을 기반으로 꾸준히 노력한다면 자녀는 훌륭한 성인으로 자랄 것이다.
■화난 채로 훈육은 ‘금물’
화가 나 있을 때는 절대 체벌해서는 안 된다. 화로 인해 체벌까지 준다면 본래 목적을 벗어나 감정적으로 변하게 되고 결국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다.
훈육 시 나쁜 감정을 배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부정적인 상태로 훈육에 임하면 안좋은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 대신 아이와 함께 있지 말고 잠시 자리를 벗어나 화를 식힌 다음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춘기 훈육법은 다르게
청소년기 자녀를 훈육할 때는 이전과 다른 훈육태도를 가져야한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나이에 따른 발달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기 아이들에게서 반항적인 태도는 일반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이를 강압적으로 막거나 심하게 꾸짖는 것은 자녀들을 더 반항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삼가야한다.

자녀의 행동이 사회규범에서 크게 어긋나거나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자유와 반항을 허용하는 것이 좋다.
이때 부모는 자녀와 충분히 대화하고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여야한다. 청소년기 자녀의 개성을 충분히 존중해야하며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무작정 비난하거나 지적하는 것은 삼가야한다.
고대구로병원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이문수 교수는 “청소년기 자녀와 부모 사이의 갈등은 주로 서로에 대한 비난에서 나온다”며 “자녀의 행동이 사회규범에서 크게 어긋나거나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자유와 반항을 허용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
예로부터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는 부모를 보고 따라하기 때문에 화가 나더라도 소리지르거나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 대신 화나거나 당황스러울 때 침착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줘 자녀에게 올바른 대처법을 알려주는 것이 좋다.
이문수 교수는 “올바른 훈육에는 부모의 합리적인 사고와 자녀의 성장시기에 따른 적절한 인내와 노력이 뒷받침돼야한다”며 “아이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을 기반으로 꾸준히 노력한다면 아이는 알맞은 반응을 보여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혼 및 가족 관계 과정의 개요▣
가: 결혼 생활 강화
제1과: “가족은 창조주께서 마련하신 계획의 중심임” 후일의 선지자들이 결혼과 가족의 영원한 중요성을 선포한다. 영원한 결혼은 이 생애와 영원을 통해 기쁨과 큰 축복을 가져온다. ‘결혼 및 가족 관계’과정은 우리가 가족 관계에서 기쁨을 찾도록 계획되었다. 우리의 가정을“반석이신 구주”위에 세울 때, 우리의 가정은 작은 천국이될수 있다.
제2과: 결혼 생활에서 단합을 증진시킴 주님께서는 남편과 아내에게 하나가 되라고 명하셨다. 남편과 아내는 동등한 동반자로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보완하기 위해 개인의 성격과 능력을 인정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충실해야 한다.
제3과: 결혼 생활에서 사랑과 우정을 키움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키워야 한다. 애정을 표현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결혼 생활에서 사랑과 우정이 식지 않게 해 준다. 결혼 생활에서 올바른 애정 행위는 사랑의 표현이다. 부부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인 자애를 지니도록 노력해야 한다.
제4과: 결혼 생활에서 생기는 문제에 대처함 모든 부부는 어려운 문제를 겪을 것이다. 남편과 아내가 결혼을 성약의 관계로 본다면 어떤 문제도 헤쳐 나갈 수 있다. 문제가 발생할 때, 우리는 좌절과 분노보다는 인내와 사랑으로 대처하는 쪽을 택해야 한다.
제5과: 긍정적인 대화를 통해 문제에 대처함 모든 부부는 어느 정도 의견 차이를 보일 수 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서 훌륭한 자질을 찾아야 한다. 긍정적인 대화는 어려움을 예방하고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제6과: 신앙과 기도로써 결혼 생활을 강화함 남편과 아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는 함께 기도할 때 축복을 받는다.
제7장: 용서의 치유력 남편과 아내 사이의 용서하는 마음은 평화와 신뢰와 안정을 가져온다. 남편과 아내는 결점에 대해 용서를 구하면서 발전해 나가도록 진지하게 노력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용서해야 한다.
제8과: 가정 재정 관리 적절한 재정 관리는 행복한 결혼 생활에 필수적이다. 남편과 아내는 금전 관리의 기본 원리를 지키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

나: 가족을 강화하는 부모의 책임
제9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영의 자녀들을 지상의 부모에게 맡기셨다. 부모는 자녀의 개인적인 필요 사항을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 자녀 학대는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자녀는 부모의 삶에 큰 기쁨을 가져온다.
제10과: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성한 역할 (제1부: 아버지의 역할) 부모는 자녀들이 저마다 신앙의 방패를 가지도록 협력해야 한다. 아버지는 사랑과 의로움으로 다스려야 한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생활 필수품을 마련하고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
제11과: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성한 역할 (제2부: 어머니의 역할) 어머니는 하나님의 사업에 참여한다. 어머니의 주된 책임은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등한 동반자로서 서로 도와야 한다.
제12과: 자녀들을 모범과 훈계로써 가르침 부모는 자녀를 가르칠 책임이 있다. 부모는 영감을 받아 자녀를 가르칠 수 있다. 부모는 모범과 훈계로써 가르친다.
제13과: 자녀들에게 복음의 원리를 가르침(제1부) 부모의 가르침은 자녀들이 신앙 안에 굳건히 머무는 데 도움이 된다. 부모는 자녀에게 복음의 첫째되는 원리와 의식을 가르쳐야 한다. 부모는“자녀에게 기도할 것과 주 앞에서 올바르게 생활할 것을 가르쳐야”한다.
제14과: 자녀들에게 복음 원리를 가르침(제2부)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는 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동정심과 봉사하는 정신을 가르쳐야 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정직과 다른 사람의 소유를 존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정직한 노동의 대가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도덕적인 순결을 가르쳐야 한다.
제15과: 자녀들이 결정을 내릴 때 그들을 인도함 자녀들은 결정을 내릴 때 인도를 받아야 한다. 부모는 자녀들이 선택의지를 의롭게 행사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부모는 자녀들이 현명하지 못한 결정의 결과를 통해 교훈을 얻도록 해야 한다. 부모는 빗나간 자녀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야 한다.
제16과: 가족 기도, 가족 경전 공부 및 가정의 밤 가족 기도, 가족 경전 공부, 가정의 밤은 모든 후기 성도 가족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가족이 함께 기도할 때 큰 축복을 받는다. 가족 경전 공부는 가족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가정의 밤은 가족이 세상의 영향력에 맞서 스스로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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