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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려공원(草廬公園)초려기념관(草廬紀念館) 내삼문 연영문(延英門)주련]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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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려역사공원근린공원

 

[초려공원(草廬公園) 외삼문 주련]

己欲立而立人(기욕립이립인)

내가 어느 수준에 다다르고 싶다면 남을 먼저 다다르게 해주어야 하며,

己欲達而達人(기욕달이달인)

내가 서고자 하는 자리가 있다면 남을 먼저 세워 주어야 한다!

[초려기념관(草廬紀念館) 내삼문 연영문(延英門)주련]

徒善不足爲政(도선부족위정)

선함 만으로는 정사를 다 할 수 없고,

徒法不的自行(도법부적자행)

법이나 제도만으로 저절로 정사가 행해질 수 없다!

 

갈산서원(葛山書院)을 중앙에 두고 오른쪽에는 서원의 서재로 교육공간인 몽양재(夢養齊)가 왼쪽에는 서원의 동재로 장서각인 도산재(道山齊)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몽양재(夢養齊)의 주련]

貳百家中立蒙齋(이백가중립몽재)

200 호 정도의 마을이라면 반드시 몽제(서당)을 짓고,

莫論士庶拾歲入(막론사서십세입)

선비의 자제나 서민의 자제나 구별하지 않고 열살이 되면 입학를 시키고,

生進爲師公養待(생진위사공양대)

부임 전 생원, 진사를 스승으로 모셔 학생들을 가르쳐 15세가 되어 학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이 있는 학생은

成童進升學且校(성동진승학차교)

성균관으로 보내 다시 공부를 시키고 그렇지 못한 학생은 소질에 맞게 나아가게 한다'

[도산재(道山齊) 주련]

禮合不祧國有法(예합부조국유법)

불천지위의 예로 모심은 합당한 국법이 있고,

典欠崇褒事違天(전흠숭포사위천)

현인 포상과 숭배의 예가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寓摹羹墻左右在(우모갱장좌우재)

선생을 흠모하는 뜻이 좌 우에 있어 다르지 않고,

罙感霜露萬千年(미감상로만천년)

감회는 서리와 이슬에까지 미쳐 천년만년 길이 빛나도다!

[갈산서원(葛山書院)주련]

務實尋眞白衣從事(무실심진백의종사)

참됨에 힘쓰고 진짜를 찾으려면 벼슬 없이 일을 하고

格君正俗蒼生爲憂(격군정속창생위우)

군자의 품격은 풍속을 바라잡고 백성을 걱정하는 것이라

開來繼徃用行舍藏(개래계왕용행사장)

미래를 열고 과거를 계승하고 필요가 있을 때 나가 행하고 버릴 때 물러나 숨으며

經世濟民內修外攘(경세제민내수외양)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위해 스스로를 다스리고 보여짐을 멀리하라

敬居簡行物來順應(경거간행물래순응)

공경하고 대쪽같이 행하며 다가오는 모든 것에 순응하며

日乾夕惕動察靜存(일건석척동찰정존)

날마다 근면하고 행동을 살펴 조심한다면

可以大工包容諸家(가이대공포용제가)

가히 큰 인물도 품을 수 있으며

玆由中和導率萬人(자유중화도솔만인)

이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루어져 만인을 이끌 것이다.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선생은?

1607년(선조 40) 아버지 유학자 이서(李曙), 어머니 청풍김씨(淸風金氏) 사이의 다섯 아들 가운데 셋째로 충청남도 금산군 노동리에서 태어났다.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의 천거로 1634년(인조 12)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고 이어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대군사부[大君師傅 임금의 적자(嫡子)를 가르치는 일을 맡아보던 종9품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효종 9년(1658년)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의 천거로 지평(持平 조선시대 사헌부 정5품 관직)이 되고, 이듬해 시강원 진선·집의를 거쳐 현종 즉위 후 공조참의·동부승지를 역임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요 학자인 이유태(李惟泰)는 1660년(현종 1) 복제시비 때 호군으로 있으면서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옹호하였다.

 

뒤 이어 효종 말년 이래 적어두었던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를 논하고 구민(救民)·구국(救國)의 대책을 제시, 왕이 비변사로 하여금 검토하게 했으나 제대로 채택되지 않자 실망해 사직, 1663년(현종 4) 귀향하여 공주시 중동(지금의 상왕동)으로 이주한 뒤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사송서재(四松書齋)와 용문서원(龍門書院)를 세웠다. 이후 공주시 상왕동은 이유태의 후손들이 대대로 삶은 이어온 경주이씨 집성촌이 되었다.

 

그 뒤에도 이조참의·동부승지·우부승지·이조참판 등이 제수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고 1674년의 갑인예송(甲寅禮訟) 때 복제를 잘못 정했다는 남인 윤휴 등의 탄핵을 받아 다음 해 영변에 유배되었다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죄가 풀려 호군에 서용되었으나 숙종 초부터 사이가 벌어진 송시열과 그 계통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유현(儒賢 유학에 정통하고 언행이 바른 사람)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채 당시 막강한 세력을 구축했던 송시열 측과 끝내 화해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 선생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廬). 시호(諡號 - 죽은 이의 삶이나 업적을 평가하고 기리기 위한 호칭) 문헌(文憲)으로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산천재, 노서 윤선거(山川齋, 魯西 尹宣擧)· 시남 유계와 함께 호서산림 오현(湖西山林 五賢)의 한 사람이다. 

 

초려 이유태 선생의 흔적을 찾자면 공주시에도 유허지가 있지만,초려선생의 묘소가 있는 초려역사공원은 연기군 시절인 2004년 초려 선생 묘역이 문화재적 보전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군청에서 충남도에 문화재 지정을 신청했으나 연기군이 신행정 수도 건설 개발 부지에 포함되면서 특별법에 묶여 무기한 연기되었고, 오히려 공사장에 포함되어 버린 묘소를 옮겨야 할 입장이 되었다.

 

이에 전국의 유림 중 1만 5000여 명이 묘역 보존을 위한 서명운동에 나서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오랜 협의 끝에 2013년 초려선생 묘역 성역화(역사 공원) 및 정비에 합의하면서 세종특별자치시 행복도시에는 초려 이유태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묘소 일원에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따 갈산서원과 함께 2015년 11월 완공되어 초려공원, 초려역사공원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박은주 기자 / silver5195@hanmail.net

초려기념관을 이어주는 샛문인 일각문(一角門) 이명문(離明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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