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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치원崔致遠 ♣
=고운(孤雲), 해운(海雲), 해부(海夫), 문창후(文昌侯)=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 창 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내닫네 |
[시대유형분야]
고대/남북국/통일신라 |
인물/전통 인물 |
역사/고대사 |
목차
[가계 및 성장 배경]
최치원(崔致遠)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지만, 857년(헌안왕 1)에 태어나 908년(효공왕 12) 이후까지 활동하였다. 최견일(崔肩逸)의 아들이자 승려 현준(賢俊[賢儁, 賢雋, 玄準])의 동생으로, 최인연(崔仁渷[崔彦撝]) · 최서원(崔棲遠(崔栖遠))과는 4촌 내지 6촌의 형제 사이였다. 최견일은 861년(경문왕 2)부터 시작되었던 곡사(鵠寺)의 중창 불사에 참여하였고, 현준은 880년대 중반부터 해인사에 머무르며 왕실이 주관하는 불사(佛事)를 맡았다. 최서원은 884년(헌강왕 10) 견당사(遣唐使)의 수행원으로 활동하였고, 최인연은 한때 집사(執事) 시랑(侍郞)을 맡았다. 이들은 관료나 승려로 활동하면서 유교와 불교에 관심을 가졌다.
신라에서 6두품 집안은 유학을 익히거나 불법을 받들어 관료나 승려로 활동하였다. 신라 하대에도 6두품 출신은 유학이나 불교를 익히려 도당 유학하였다. 신라의 대표적인 6두품 집안인 경주최씨(慶州崔氏)는 경문왕~효공왕 대에 파견된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였다. 이들은 유학과 불법을 존숭하면서 숙위학생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경문왕계 왕실과 친밀하였다. 최치원의 입당 유학도 경문왕계 왕실과 관계하였던 집안 분위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자연히 그는 입당(入唐) 유학을 통해 왕실과 가까운 관직으로 진출하려는 성향을 가졌다.
[주요 활동]
[재당 활동]
868년(경문왕 8) 당나라에 들어간 최치원은 동도(낙양)에 자리한 국자감의 태학(太學)에서 습업한 뒤, 874년(경문왕 14) 7월 이전에 예부시랑 배찬(裵瓚) 아래서 빈공의 자격으로 생도시(生徒試)의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그는 진사시에 응시하면서 시부(詩賦) 논책(論策)을 익히는 데 진력하였는데, 그것은 빈공 진사시 급제 이후 동도에 머물면서도 계속되었고, 876년 겨울에 선주(宣州) 율수현위(溧水縣尉)로 나아간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877년 겨울에 그는 율수현위를 사임하고 박학굉사(博學宏詞)에 응시하려고 입산 수학하였다. 박학굉사는 상서이부(尙書吏部)에서 시문 삼편(三篇)을 시험보아 뛰어난 능력의 인물을 선발하는 것인데, 고급 관료가 되려면 이를 통과해야만 하였다. 최치원은 계속 시부를 익히며 좀 더 상위 관직으로 진출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879년에 굉사(宏詞)가 중단된 데다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였고, 황소군(黃巢軍)의 약탈 위협을 받게 되자 수학을 중단하였다.
그는 당시 당 조정의 경제적 기반을 관리하면서 황소군 진압의 중책을 맡아 점차 실세로 성장하며 선주까지 영향력을 미쳤던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을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휘하에서 종사하고 있었던 과거 동년인 고운(顧雲)을 통해 자신의 출사(出師)를 고대하였다.
최치원은 879년(헌강왕 5) 10월 이후부터 충성과 충정을 다짐하는 글을 올려 10월 이후 어느 달 25일에 관역순관(館驛巡官)으로 임명한다는 공첩을 받고, 880년 5월부터 병마도통을 맡은 고변 휘하에서 도통순관(都統巡官)으로 출사하였다. 이후 882년 정월부터는 다시 관역순관을 맡았다가 884년 8월까지 약 4년 동안 감찰과 문한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회남(淮南)은 신라 사신이 입조하는 길목이었다. 884년(헌강왕 10)에 김인규(金仁圭)는 ‘신라국입회남사(新羅國入淮南使)’의 자격으로 회남에 들어왔고, 신라 탐후사인 박인범(朴仁範)은 881년 7월~885년 3월에 서촉(西蜀)에 머물고 있던 희종을 알현하기 위해 회남에 도착하였다. 이때 최치원은 오랜 이국 생활에 지쳐 부모의 안부를 그리던 향수에 빠졌다. 더욱이 고변은 882년 정월에 도통에서 물러난 뒤 황제에게 불만을 토로하였다가 오히려 실권(失權)하여 도교에 침잠해 갔다. 최치원은 당에서 더 이상 자신의 포부를 펼치기 어려웠다.
[귀국 후 활동]
당 황실을 호위하는 번진에서 감찰과 문한을 맡고 있던 최치원의 활약상은 회남에 들어온 신라 사신을 통해 신라 왕실에 알려졌다. 최치원은 다른 도당유학생과 달리 10년의 유학 기간을 넘기면서 당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활약상이 귀국 후의 관직 진출을 보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자부하였다.
당시 신라의 헌강왕은 선왕인 경문왕을 이어 유학을 진흥하고 유학 지식인을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는 재위 5년 이후에 정치 세력을 재편하면서 측근 정치를 강화하였지만, 그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받고 있었다. 향수에 시달리면서 당의 사회상이 급변하고 신라의 정치 상황 역시 파행으로 치닫고 있음을 감지한 최치원은 마침내 884년(헌강왕 10) 8월에 17년 동안 머물며 관직 진출을 이룬 당나라를 떠나 자신의 뜻을 행하고자 금의환향하였다.
885년(헌강왕 11) 3월 신라에 도착한 최치원은 곧바로 국왕의 측근인 시독(侍讀)을 맡았고, 재편된 서서원(瑞書院)의 문한(文翰)에 임명되어 왕실이 주관하는 불사의 발원문과 찬을 작성하였다. 그는 정강왕~진성왕 대에도 여전히 국왕 측근의 문한관으로 왕실 주관 불사의 글을 짓거나 왕명을 받아 비명을 찬술하였다.
귀국 후 그의 활동은 경문왕계 왕실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889년(진성왕 3) 원종 · 애노의 반란을 계기로 전국 곳곳에서 초적이 일어났다. 왕실은 지방 사회를 안정시키는 대책을 모색하면서도 왕실을 거부하는 세력은 철저히 진압하려는 이중적 태도를 취해야 했다.
최치원은 재당 시절에 고변의 막부에서 번진 세력 간의 치열한 세력 다툼과 관할 지역에 대한 절도사의 지배 방식을 지켜보았다. 진성왕은 이러한 최치원의 경험을 살리고자 하였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최치원 역시 자신의 능력을 알리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889년부터 「낭혜비명」을 작성하기 이전인 890년까지 병부 시랑으로 임명되어 반란군 진압과 왕경 방어에 힘썼다. 하지만 지방 곳곳에서 연이어 호족 세력이 크게 일어나자, 최치원은 직접 지방사회를 위무하기 위해 890년에 서서원 학사로 「낭혜비명」을 찬술한 직후에 대산군(大山郡)과 부성군(富城郡) 등의 서해안 일대 지방의 태수(太守)를 자임(自任)하기도 하였다.
893년(진성왕 7) 최치원은 중앙 정계로 돌아와 하정사(賀正使)로 임명되었으나 사행에 실패하였다. 이후 지서서원사(知瑞書院事[知瑞書監])을 맡아 이듬해 2월에 진성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진상하였다. 시무책은 귀족 세력과 호족 세력을 견제 · 응징하여 왕실과 국가를 보전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때문에 그는 진성왕의 즉위에 반발하였던 정치 세력을 비롯한 진골 세력의 견제를 받아 895년(진성왕 9) 헌강왕 서자 요(嶢)의 태자 책봉을 계기로 중앙 정계에 남지 않고 지방 곳곳을 유랑하였는데, 특히 경문왕의 친동생 위홍(魏弘)의 원당(願堂)이었던 해인사에 머물렀다.
신라와 발해의 외교관계가 점차 경직되고, 진성왕이 태자 측근 세력의 심한 견제를 받아 선위(禪位)를 고려하자, 895년 10월 전후부터 898년 정월까지 지서서원사로 발해와 신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진성왕 선위와 효공왕의 계위(繼位)를 당 황제에게 알리는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다.
이어 898년 정월 이후에는 897년(효공왕 원년) 6월 북궁(北宮)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12월에 훙거한 진성왕을 따라 가족을 이끌고 해인사에 옮겨가 정계를 은퇴하였다. 이후 그는 해인사 중창 불사의 기문과 화엄 승전을 찬술하여 신라 국가 재건의 호국 의지를 주장하다가 908년 이후 어느 시기에 삶을 마쳤다.
[저술과 사상]
[저술과 정치적 입장]
최치원은 시문집을 비롯하여 비명 · 승전 · 결사 발원문 등의 불교 관련 저술, 외교 문서, 연표, 시부 등의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특히,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은 현전하는 한국 최고(最古)의 문집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최치원의 저술은 시부와 『계원필경집』에 실린 일부의 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저술이 국왕이나 상관을 대신하여 작성한 것이었다.
최치원은 만당 시기의 주요 인물이었던 고변 휘하에서 문한을 맡았고, 귀국 후에는 국왕의 측근 문사로 활동하였다. 따라서 그의 글은 대찬의 형식으로 작성되었더라도 문장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내용에는 당시 당과 신라의 사회상이 그대로 담겼다.
최치원의 저술은 그의 활동과 관련되어 작성되었다. 저술은 재당 시절은 물론 귀국 후에도 계속 이루어졌다. 『계원필경집』이 재당 시절의 모습을 담았다면, 발원문 · 비명 등의 불교 관련 저술은 귀국 후 문한 직을 맡아 찬술한 것이다. 외교 문서와 연표는 진성왕 말년 이후 신라와 당의 국제 관계는 물론 왕실의 권위가 점차 실추되는 상황 속에서 작성되었다. 화엄 승전은 입산 이후 해인사에 머물며 세상과 떨어져 칩거하면서 쓰여졌다. 시기별로 작성된 저술에는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그의 삶과 활동, 당시의 사회상 등이 고스란히 담겼다.
한편으로, 최치원의 저술은 당시 성행하였던 사상 경향을 반영하였다. 만당의 사상 경향은 『계원필경집』에 반영되었지만, 불교 관련 저술에는 화엄 사상을 중심한 신라 말 불교계의 동향이 소개되었다. 또한 「난랑비서(鸞郞碑序)」 ·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등에는 유교 · 도교 사상과 신라 전통에 대한 이해가 담겼다. 이들 저술은 당시 신라인의 경전 이해 수준을 보여 주고, 사상계의 다양한 변화 과정을 알려 준다.
그의 글은 후대에 전해지면서 일부 윤색되거나 가탁되기도 하였고, 많은 저술이 총류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에 게재된 불국사 관련 글은 최치원과 관련되어 불국사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윤색되었고,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이나 「유설경학대장(類說經學隊仗)」은 신라의 전통을 전하는 과정과 후대 유학의 종조를 숭앙하려는 의도에서 가탁되었다.
이처럼 최치원의 글로 알려진 저술에는 위서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초기까지 그의 저작은 이전부터 알려진 글 외에 또 다른 글도 계속 전승되어 방대한 분량으로 남았다. 특히, 『동문선(東文選)』에는 편찬 이전까지 활동하였던 여느 문인과 유학자에 비해 상당히 많은 195편의 글이 실렸다. 그것은 최치원이 자신의 논조를 정확히 논증하려고 많은 전고를 인용하였고, 사실을 그대로 전하면서 대안을 제시하는 실용적 문장을 구사하였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글이 국왕의 위상을 높이고 백성의 교화에 도움이 되기에, 조선 후기에도 『계원필경집』을 포함한 그의 저술은 후대인들의 주목을 계속 받았다. 최치원의 저작이 후대인의 주목을 받은 것은 그의 정치적 입장에서 비롯되었다.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은 곡사를 중창하는 불사에 참여하였고, 최치원은 곡사와 대숭복사(大崇福寺) 중창의 의미를 담은 「숭복사비명」을 찬술하였다.
경문왕은 책봉을 받은 재위 5년(865)에 곡사를 중창하면서 아버지 김계명(金啓明)을 중심으로 김예(金銳) · 김계종(金繼宗) · 김훈영(金勛榮) · 김수종(金邃宗) 등 왕족에게 실무를 맡겼다. 한편으로 동생 위홍을 중심으로 결언(決言) · 현량(賢諒) · 신해(神解) 등 화엄 승려를 등용하여 자신의 측근 세력을 양성하려고 하였다.
곡사의 중창에는 문성왕 대부터 불사를 이끌었던 측근 세력과 함께 경문왕이 새로 등용한 측근 인물이 참여하였다. 경문왕은 이들을 통해 원성왕의 여러 후손을 왕실을 중심으로 한데 모으려고 하였다. 곡사 중창 이후 경문왕은 새로운 측근 세력을 등용하였다. 그는 김팔원(金八元) · 김함희(金咸熙) · 김일(金鎰) 등 왕족을 중앙의 요직에 중용하며 참여시켰고, 곡사 중창에 참여하였던 김계종 · 김훈영 · 현량 · 신해 등을 참여시켜 재위 12년(872)에 황룡사구층목탑의 중수 불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위홍을 중심으로 경문왕을 옹호하는 측근 세력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계명과 관계하였던 정치 세력은 점차 배제되었고, 경문왕은 왕권을 강화해 나갈 수 있었다.
불사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경문왕의 노력은 헌강왕 대에도 계승되었다. 헌강왕은 선왕이 중용한 여러 왕족 및 승려들이 사망하자, 이전부터 활동한 김일 이외에 김임보(金林甫) · 김순헌(金順憲) 등의 중신과 결언 · 현준 · 최치원 등을 왕실이 주관하는 불사에 새로 참여시켰다. 이들은 진성왕 대까지 왕실 관련 불사에 꾸준히 관여하면서, 조덕(祖德)을 기리는 불사를 통해 왕실의 위상을 높이려는 경문왕계 왕실에 충실히 협조했다.
다만, 왕실에 협조하는 왕족이 점차 줄고 불교계도 왕실이 화엄승려와 가까워지면서 거리를 두었기에, 헌강왕 이후의 경문왕계 왕실은 보다 작은 소가계(小家系)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헌강왕은 정치 세력의 반발이 점차 강해지자, 귀국한 최치원에게 「숭복사비명」을 찬술하라고 명령하였다. 그것은 최치원 집안이 862년(경문왕 2)부터 시작된 곡사 중창에 깊이 관여하면서 경문왕계 왕실의 권위와 위상을 높이는 작업에 참여해 왔기 때문이었다.
헌강왕과 정강왕이 연이어 훙거하고 888년(진성왕 2)에 위홍이 죽은 뒤, 호족 세력의 봉기와 함께 진성왕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논란이 점차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치원은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진성왕의 의도를 받들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890년에 「숭복사비명」을 찬술하였다. 최치원은 왕족인 김준(金峻)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고, 현준을 통해서 왕족 김일과도 계속 인연을 이어갔다. 그는 보다 작은 소가계 중심으로 왕실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경문왕계 왕실과 정치적 행보를 함께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경문왕계 왕실과 정치적 행보를 함께 한 최치원은 당시 신라 사회를 개혁하려는 시무책을 894년(진성왕 8) 2월에 진성왕에게 올렸다.
[유교 · 불교 · 도교에 대한 이해와 삼교 융합]
신라 하대에 6두품 출신은 대개 유학과 불교를 익혔다. 특히, 경문왕대에는 경주최씨를 비롯한 6두품 출신 유학 지식인이 크게 활동하였다. 이들은 경문왕의 명령을 받아 선사의 비명을 지으면서 왕실이 유학 진흥책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던 노력을 은근히 강조하였다. 특히, 이전에 6두품 출신인 녹진(祿眞)이 강조한 인재 등용책의 개선을 부각하며, 국왕 중심의 정치적 질서 확립을 도모하는 유교적 정치 이념을 내세웠다.
최치원은 이전부터 추구되어 온 유교적 정치 이념을 더욱 강조하며 시무책을 제시했다. 최치원은 『계원필경집』에서 군주와 신하가 유교적 정치 이념에 입각하여 군신 상하의 체제와 질서를 확립하면, 덕화정치(德化政治)와 도(道)의 구현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군주가 덕화정치를 추구하고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해야 한다는 ‘군왕 자질론’, ‘군왕 역할론’을 제시하였다. 또한, 군주의 덕화정치 실현과 관련하여 군주는 공적인 경로를 통해 옳고 바른 신하를 선발하여 재능에 따라 임무를 부여하고, 어진 신하의 등용과 출세를 원활히 하기 위해 전형을 중시해야 한다는 ‘인재 등용론’도 강조하였다.
최치원은 귀국한 이듬해 정월에 헌강왕에게 『계원필경집』을 진상하면서 군왕의 자질과 역할, 신하의 도리와 자세를 부각하였다. 최치원은 귀국 직후에 여러 글을 찬술하면서 자신의 유교적 정치 이념을 계속 내세웠다. 특히, ‘사산비명(四山碑銘)’에는 군자국(君子國) 신라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한편, 인과 효가 군왕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질임을 애써 부각하였다.
곧 군왕이 선정을 이루려면 인 · 효에 밝은 군왕 자신의 자질도 중요하고, 능력있는 인재를 공정하게 등용해야 한다고 했다. 때문에 군왕이 유교적 정치이념을 구현하여 군자국을 건설하려면 바로 유학적 소양을 갖춘 6두품 유학 지식인의 등용을 통해야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최치원은 인 · 효 정치를 강조하면서 인재 등용책도 제시하였는데, 경문왕과 헌강왕이 이를 위해 노력한 것을 유독 강조하였다.
특히, 헌강왕은 경문왕처럼 불법을 존숭하고 유학을 진흥하였다. 그는 순행 중에 ‘산해정령(山海精靈)’과 남산신(南山神), 북악신(北岳神), 지신(地神)을 각각 만나 유학 지식인이 왕실을 등지고 반발하는 현상을 막으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 뒤 헌강왕은 유교 교육기관인 국학(國學)을 순행하고, 신하에게 시 1수씩을 지어 바치게 하는 등 유학적 소양을 가진 이를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하지만 왕권 강화에는 언제든지 왕실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에 의해 반발이 일어날 조짐이 잠재되었다. 때문에 최치원은 군주 자질론과 신하 역할론, 그리고 어진 임금과 어진 신하의 조화, 어진 인재 등용의 필요성을 담아 귀국 직후 헌강왕에게 『계원필경집』을 올렸다. 『계원필경집』은 헌강왕의 왕권 강화를 지지하는 이념적인 기반이었다.
하지만 『계원필경집』을 진상한 지 6개월 뒤에 헌강왕이 훙거하고 정강왕도 1년 만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뒤이어 진성왕이 즉위하였지만, 정강왕을 도왔던 준흥(俊興)이 계강(繼康) · 예겸(乂兼)과 함께 효공왕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전환하는 등 왕실은 점차 진골 귀족 세력의 견제와 반발에 직면하였다. 895년 10월에는 비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헌강왕의 서자인 요(嶢)가 태자에 올랐다. 최치원은 효공왕을 지지하는 진골 귀족 세력에 반감을 가졌다.
최치원은 화엄 불교를 중시하는 불교 사상을 가졌다. 화엄 사상은 왕실이 주관한 화엄 결사의 발원문이나 불국사와 해인사 관련 기 · 찬, 그리고 화엄 승려의 전기에 반영되었다. 최치원은 귀국 직후인 885년 3~8월 사이에 지엄과 의상을 추모하는 불사와 헌강왕의 명복을 비는 불사의 발원문을 작성하였다. 특히, 헌강왕 추복(追福) 불사는 왕족과 함께 결언 · 현준 등 해인사 승려가 주관하여 화엄 결사로 설행되었다.
불사는 정강왕 대에도 불국사를 중심으로 계속 설행되어 정토를 비는 결사가 이루어졌으며, 최치원은 결사의 기와 찬을 도맡아 작성하였다. 왕실 불사와 관련된 글을 찬술할 때, 그는 886년 7월부터 893년까지 진감 · 낭혜 · 지증 3명의 선사와 왕실의 원찰인 숭복사에 대한 비명도 작성하였다.
당나라에서 유학을 습업한 뒤 귀국한 그의 저술은 대체로 불사와 관련하여 이루어졌다. 최치원은 895년 7월에 해인사를 지키다 죽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해인사묘길상탑기(海印寺妙吉祥塔記)」를 찬술한 뒤 898년 정월부터 해인사 중창 관련 글을 지었다. 그것은 그가 898년(효공왕 2) 정월 해인사에 들어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형인 해인사 현준을 비롯하여 결언 · 성기(性起) · 승훈(僧訓) · 난교(蘭交) · 희랑(希朗) 등 해인사 승려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현준의 부탁을 받아 901년(효공왕 5)부터 해인사 관련 승려의 전기를 찬술하였다.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의 전기를 쓴 다음에는, 신라와 중국의 화엄 교학을 정립하는 데 공헌한 의상(義湘)과 법장(法藏)의 전기를 지었다. 그의 불교 관련 저술은 당시 해인사의 화엄 사상과 깊은 관계를 가지며 작성되었다.
해인사의 승려인 결언 · 현준 · 성기 · 승훈 · 난교 등은 경문왕계 왕실의 왕명을 받아 결사를 맺거나 사찰을 창건하였다. 현준이 주로 헌강왕 대 말년 이후에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면, 결언은 이미 경문왕 대 초반부터 왕실과 친밀하였다. 다만, 현준은 아버지 최견일을 통해 이미 경문왕 대 초반부터 왕실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승훈과 난교는 해인사가 경문왕의 친동생으로 진성왕의 남편이자 숙부였던 위홍의 원당이 된 이후 경문왕계 왕실과 가까웠다. 그들은 진성왕의 해인사 입산 전후에 해인사의 중창 불사를 주관하였다.
해인사 승려들은 적어도 경문왕 대부터 진성왕 대까지 경문왕계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신라 말에 해인사는 의상계 화엄종을 대표하는 사찰이었다. 해인사 승려인 결언과 현준은 의상의 융섭적(融攝的)인 화엄 사상을 중심으로 유식 사상을 포함한 법장의 화엄 사상을 아우르려는 경향을 가졌다. 최치원은 901~904년 사이에 「석순응전(釋順應傳)」과 「석이정전(釋利貞傳)」, 그리고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을 지어 신라 화엄종의 형성 과정과 의상 화엄 사상을 정리하였다. 904년에는 의상과 가까웠던 중국 화엄종 법장의 전기인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지었다. 그는 「부석존자전」에서 의상과 문무왕의 관계를, 「법장화상전」에서는 법장과 측천무후의 관계를 특기(特記)하였다.
최치원은 화엄 승려의 전기를 지으면서 화엄 승려와 왕실의 관계를 특별히 부각하였다. 원칙을 중시하는 화엄 사상이 신라 왕실을 상징한다면, 차별을 인정하는 유식 사상은 지방 곳곳에 자리한 호족 세력을 의미하였다. 최치원이 불교 관련 저술을 찬술할 때, 신라 사회는 진골 귀족 세력과 호족 세력에 의해 분할되었고, 왕실은 점차 왕경 주변 지역에만 영향력을 미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치원은 화엄 승전을 찬술하면서 융섭적인 화엄 사상을 통해 지방 세력을 인정하면서도, 신라 국가의 지배 질서 안으로 편제하여 신라 국가를 재건하려는 염원을 담았다.
최치원은 재당 시절에 고변을 통해서 금단도(金丹道)를 중심으로 신선도(神仙道)를 이해하였고, 재사(齋詞)를 작성하면서 유교의 ‘좌국부민(佐國扶民)’ 사상과 관련된 도교 사상을 익혔다. 재당 시절 그의 도교 인식은 유교를 중심으로 이해되었는데,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가졌던 도교 의식과 다르지 않았다. 귀국 후에 그는 신선도를 중시하면서 외형보다 내면의 수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도교 사상을 정립해 나갔다. 그것은 금단도의 비판과 도교 사상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보덕전(普德傳)」에 반영되었다. 최치원은 「보덕전」에서 보덕의 『열반경』 40권 강경과 도교 존숭으로 인한 보덕의 고대산 이거 과정을 특기하였다.
유교를 기초로 도교 사상을 이해했던 그에게 도교를 일방적으로 진흥하여 왕권을 억압한 연개소문은 호감을 받을 수 없었다. 최치원은 불교와 관련 없이 옥황(玉皇)을 존숭하는 도교적 신선술을 비판하면서 도교 사상에 대한 이해를 위해 노자(老子)와 『도덕경(道德經)』을 중시하는 경향을 내세웠다. 신라 사회에서는 이미 유학 사상과 관련하여 『도덕경』을 이해하고 있었다. 유학을 익혔던 6두품 출신은 은일적 노장 사상에 심취되어 심신의 수련을 통해 득선(得仙)을 구하려고 하였다.
최치원은 6두품 유학 지식인이 희구하였던 신선사상을 계승하여 내심(內心)을 닦아 사람을 구제하는 수련적 신선사상을 제시하였다. 신라에서 신선사상은 일찍부터 유교 · 불교와 연관되었다. 최치원은 신라 전통에 의지하여 수용된 유교와 불교를 특별히 ‘유(儒)’와 ‘선(仙)’으로 표현하였다. 자연히 불교의 수용과 발전은 신선의 관념과 관련되어 강조되었다.
최치원은 신라 고유의 전통을 중시하며 유교와 불교를 존숭하여 내심을 수련하였던 신라의 왕을 최고의 신선으로 정의하였다. 신선이 머무르는 신라에서 조덕을 추복하였던 경문왕과 헌강왕은 최치원에 의해서 최고의 신선으로 상정되었다. 최치원은 귀국 후 신선사상을 중심으로 도교 사상을 정립하면서 경문왕계 왕실의 위엄을 강조하려고 하였다.
귀국 후 그의 도교 사상은 신라의 유교 · 불교와 관련되어 나타났지만, 특별히 불교적인 기반을 가졌다. 최치원은 불교에 토대를 둔 수련적 신선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불교와 도교를 함께 이해하는 경향을 가졌다. 자연히 불교와 유교를 또한 함께 이해하고자 하였다. 최치원은 불사 발원문에서 죽은 왕실 친족의 혼백이 불보살(佛菩薩)의 가피력(加被力)으로 불국정토(佛國淨土)에 이르게 되기를 염원하였다. 이것은 효 · 우애의 유교적 관념이 불법(佛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염원은 「사산비명」에 주로 반영되었다. 헌강왕과 정강왕, 진성왕의 경문왕계 왕실은 최치원에게 「지증비명」 · 「숭복사비명」 · 「진감비명」 · 「낭혜비명」의 찬술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최치원은 찬술을 명령받은 차례와 관계없이 887년 7월부터 893년까지 약 7년 동안 비명의 체재를 달리하면서 「진감비명」 · 「숭복사비명」 · 「낭혜비명」 · 「지증비명」을 차례로 작성하였다. 비명의 체재를 달리한 것은 최치원이 각 비명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려는 의도를 담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진감비명」에서 유교 · 불교 양교를 구분하여 이해하거나 갈등을 조장하는 당시의 사조를 비판하면서 양교를 함께 이해하는 사상 경향을 제시하였다. 「숭복사비명」에는 유교적 효도의 추구가 불교의 추복(追福)에 의해서 가능함을 제시하여, 유교 · 불교 양교 교의(敎義)의 교섭뿐만 아니라 실천 덕목의 일치를 강조하였다. 「낭혜비명」에는 삼외(三畏)와 삼귀(三歸), 오상(五常)과 오계(五戒)의 조화로운 융화를 강조하면서 불사를 통해서 조덕을 추복하는 호법(護法)이 왕도정치를 구현하는 방편임을 부각하였다. 「지증비명」에는 도헌의 생애를 육시(六是)와 육이(六異)로 정리하면서, 유교 · 불교의 융화를 강조하면서도 유교적 관념을 불교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사산비명」에서 유불 교섭의 사상 경향을 제시하고 호법에 의한 왕도정치를 강조하였다.
최치원은 이전의 유학 지식인이 제시한 유불 교섭의 사상 경향을 수용하였다. 그는 재당 시절은 물론 귀국 직후에 『계원필경집』을 헌강왕에게 진상하면서, 유교를 중심으로 도교와 불교를 이해하였다. 하지만 귀국 직후 불사 관련 글을 작성하면서는 불교를 중심으로 유교와 불교를 함께 이해하는 사상 경향을 보였다. 특히, 신라 사회에 상존하는 유불 교섭 사상의 경향이 신라의 전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었음을 강조하였다. 경문왕계 왕실은 신라 전통을 계승한 유교와 불교를 존숭하고 진흥하였는데, 그것은 호법을 통해 왕도정치를 펴려고 의도한 것이었다.
결국, 최치원은 유불 교섭 사상의 경향을 토대로 호법 왕도론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시무책과 함께 신라 사회를 개혁하려는 또 다른 방안이었다. 또한, 그것은 유교 · 불교와 함께 삼교의 사상적 융합을 도모하는 바탕으로 기능할 소지를 지녔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때 활동하였을 때, 당시 당나라에서 성행한 삼교 융합의 경향을 익혔다. 귀국 후에도 그는 「사산비명」을 찬술하면서 불교를 통해서 유교와 도교를 인식하거나 융합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신라 말 유학 지식인이 가졌던 것이었다.
최치원은 특별히 불교와 연관된 선(仙)에 관심을 가졌다. 귀국 후 그의 삼교 융합론은 신라 사회에 상존하는 신선사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신라 사회에서 신선사상은 일찍부터 제시되었다. 그것은 신라에 수용된 유교 · 불교와 융화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화랑은 유교 · 불교 · 도교 삼교와 관련되었는데, ‘나라의 신선인 국선(國仙)’이라고 불려졌으며, 토착적인 산신의 도움으로 신라에 등장하였다.
자연 삼교는 신라 고유의 신선사상과 관련된 화랑을 통해 융합될 수 있었다. 경문왕은 ‘국선’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즉위 후 요원랑(邀元郞) 등 4명의 국선에게 지지를 받았다. 최치원은 화랑이었던 경문왕이 풍류를 떨치며 삼교를 융합하였다고 내세웠다. 그는 군주인 화랑, 곧 ‘난랑(鸞郞)’인 경문왕을 기리기 위해서 「난랑비서」를 찬술하였다.
최치원은 「사산비명」에서 유불 교섭 사상의 경향과 함께 삼교 융합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유교 · 불교 · 도교를 모두 경문왕계 왕실과 관련하여 이해하였고, 경문왕계 왕실의 권위와 위상을 높였다. 자연 경문왕계 왕실이 몰락한 뒤 신라의 존재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자, 최치원은 신라 재건의 이상을 꿈꾸면서 경문왕계 왕실의 몰락을 아쉬워하였다.
그는 경문왕계 왕실을 연 국선 경문왕을 ‘난랑’으로 부각하고, 그가 신라 고유의 풍류 사상을 통해 삼교를 융합하였음을 애써 강조하였다. 자연히 「난랑비서」는 특별히 화랑 출신이 정국의 전면에 다시 등장하였을 때 찬술되었다. 최치원은 902년(효공왕 6)에 화랑 출신인 효종랑(孝宗郞)이 시중에 오르자, 국선인 경문왕을 강조하려는 뜻을 담아 「난랑비서」를 찬술하였다.
[역사의식]
최치원은 약 17년 동안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익혔다. 하지만 그는 신라 전통을 은연 중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중국과 신라의 왕실을 중심으로 두 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제왕연대력』에 반영되었다. 최치원은 신라를 군자국으로 인식하였다. 그것은 유교적 이상인 인(仁)에 투철하였고, 중국 문화의 기반인 유학을 진흥하여 인을 크게 흥성하였기 때문이었다.
유학 진흥을 강조한 군자국 인식은 최치원뿐만 아니라 신라 하대에 활동하였던 유학 지식인들에게 공유되었다. 최치원 역시 다른 유학 지식인처럼 신라가 중국의 제후국임을 유념하였다. 다만, 그는 자신과 같은 한림(翰林)에 의해서 신라가 중국의 문물과 제도에 투철하여 중국을 개벽할 만큼 중국의 제후국 가운데 가장 뛰어난 나라로 발전하였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러한 발전이 이미 신라가 어진 나라였기에 비로소 가능하였음을 설명하였다. 최치원은 신라를 중국의 제후국으로 위치하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졌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중국 문화의 수용과 발전이 신라의 전통적 토착 문화를 토대로 구현되었음을 부각하는 소중화적 자존의식(小中華的 自尊意識)도 함께 지녔다.
최치원은 선사의 비명과 사찰 관련 글을 작성하면서 신라의 고유 제도나 언어를 제시하였다. 특히, 중국적 세계관을 유념하면서 중국 독자를 염두하여 그 뜻을 세주(細註)로 풀이하였다. 그의 신라 토착 문화에 대한 이해와 언급은 중국 문화와 대비하는 과정 속에서 제시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이전부터 신라 전통으로 전해져 왔던 토속어(土俗語)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불교적 의미를 함축한 고유어에 특별히 유념하였다.
신라 불교의 융성과 승려의 업적을 찬양하면서, 그것이 신라 문화의 발전과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던 요인이었음을 강조하였다. 다만, 신라의 불교와 유학이 동일한 신라 전통에 기반하여 비로소 발전하였음을 특기하였다. 그는 신라를 중국의 제후국으로 상정하는 인식을 유지하면서, 한편으로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 수용하고 유학의 진흥과 불법의 숭상을 통해서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던 경문왕계 왕실의 치적을 강조하였다.
경문왕은 제왕의 권위를 수식하며 치국의 유교적 관념을 담은 금도(琴道)를 중흥하였다. 화랑과 관계하였던 대구화상(大矩和尙)은 유교적 이상을 담은 노래를 지어 금도의 중흥을 꾀한 경문왕의 권위를 제고하였다. 때문에 진성왕 대에 대구화상은 위홍과 함께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하여 신라 전통을 정리하고 부흥하려고 노력하였던 경문왕계 왕실의 권위와 존엄을 국내외에 강조하였다.
886년(헌강왕 12) 북적(北狄)의 침입과 892년(진성왕 6) 견훤의 후백제 건국은 신라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약화시켰다. 경문왕계 왕실의 문한관으로 활동했던 최치원은 신라의 국운이 크게 약화되자, 경문왕계 왕실이 중국의 제후국 가운데 가장 뛰어난 군자국을 만들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자연히 그는 신라의 왕호를 ‘왕’으로 부르면서 화이(華夷) 양국 왕실의 사적을 정리하여 『제왕연대력』을 찬술하였다.
최치원이 활동하였던 당시에 신라는 발해와 외교적인 다툼을 벌였고, 진성왕은 자신의 즉위가 부적당한 것임을 밝히며 효공왕에게 선위하고 북궁으로 물러났다가 곧 훙거하였다. 신라는 국내외에서 여러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였다. 최치원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였고, 그것을 당시 당나라에 보낸 외교 문서에 반영하였다. 최치원은 884년(헌강왕 10) 가을부터 898년(효공왕 2) 정월까지 외교 문서를 집중적으로 작성하였다.
그는 당 황제에게 보내는 표나 장뿐만 아니라 배찬, 이극용(李克用), 고상(高湘) 등 관료에게 보내는 글에서도 발해를 언급하였다. 발해에 대한 언급은 주로 외교 문서에서 제시되었지만, 최치원 개인의 의견이 구체적으로 투영되었다. 최치원은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로 표현하였다. 당시 당나라 사람들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최치원은 숙위학생으로 활동하며 당나라 사람들의 발해에 대한 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신라가 발해보다 먼저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었음을 강조하면서 당 중심의 세계관 속에 신라의 위상을 강조하는 이중적인 발해관(渤海觀)을 가졌다. 최치원은 효공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발해를 부정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발해를 속말갈의 후예로 규정하였고, 이전부터 부르던 ‘북국(北國)’이 아닌 신라의 위계를 받은 ‘적국(狄國)’이라 불렀다. 이를 통해 발해가 신라의 속번으로 애초부터 신라와 비교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또한 신라가 예부터 많은 숙위학생을 파견하여 문덕을 닦아왔고, 여전히 꾸준히 숙위학생을 파견하고 있기에 당나라 문화를 높은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자부하였다.
그는 신라와 발해를 함께 이해하는 발해관을 가졌지만, 신라를 중심으로 한 발해관을 제시하였다. 발해 관련 글을 작성할 때 최치원은 진성왕과 효공왕의 왕위 계승에 관련된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다. 또한 그는 왕위 계승과 관련한 외교 문서를 가지고 897년 6월 전후에 직접 사행을 맡기도 하였다.
그의 발해관은 진성왕과 효공왕의 왕위 계승 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최치원은 신라와 발해의 경쟁이 격렬해지자, 제후국인 신라와 신라의 속번인 발해와의 관계를 당에 구체적으로 알리고자 하였다. 또한, 진성왕과 효공왕의 왕위 계승이 급박하게 전개되고, 효공왕을 둘러싼 정치 세력의 대립이 점차 격렬해지자, 최치원은 왕실의 안녕을 해치는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숙위학생 파견을 통해 군자국 신라를 이룬 경문왕계 왕실의 노력을 애써 부각하였다.
아울러 견훤과 궁예가 나라를 세워 신라 왕실의 권위와 위엄에 도전하자, 그는 호족 세력들에게 신라 왕실이 당의 공식적 인정을 받은 유일한 나라이며, 발해와 비교될 수 없는 뛰어난 문덕을 이룬 나라임을 부각하고자 하였다. 자연히 최치원의 발해관은 어디까지나 신라 중심적, 왕실 중심적인 것이었다.
당시 국내외의 정세를 읽는 최치원의 현실 인식은 어디까지나 신라 사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최치원의 신라 사회에 대한 이해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것은 그의 골품관(骨品觀)과 호족관(豪族觀)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최치원은 6두품을 중심한 골품관을 가졌다. 그는 「낭혜비명」에서 신라의 다섯 신분 가운데 6두품인 득난(得難)이 얻기 어려운 귀성(貴姓)임을 세주를 붙여 강조하였다. 그는 6두품을 중심으로 신라 사회를 이해하려고 하였고, 6두품 중심의 골품관은 신라 사회를 개혁하려는 사회 개혁안에 반영되었다. 사회 개혁안은 6두품의 귀족적 특권을 옹호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므로, 그의 골품관은 왕권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최치원은 왕실의 존엄을 받들고 국가의 안녕을 강조하는 호족관을 가졌다. 국가 체제를 부정하면서 왕실의 위엄을 견제하는 세력은 마땅히 응징해야 할 무리로 인식되었다. 때문에 지방을 근거로 세력을 규합한 호족은 물론 왕실에 대항하는 진골 귀족도 제거되어야 하였다. 최치원은 왕실과 국가의 존립을 부각하였으므로, 왕실과 국가를 보위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호감을 가졌다. 그는 친왕적 · 친국가적 성향을 가진 수창군 호족 이재(異才)와 교유하였다. 6두품 출신인 이재는 불법의 존숭을 통하여 신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신라 말에 신라 사회에는 말세 의식이 자리하였다. 자연히 신라 국가를 재건하는 방향은 이러한 말세를 벗어나는 구원을 얻으려는 것과 관련되었다. 최치원은 자신이 살던 시기를 말세로 규정하였지만, 말세를 구원할 주체로 경문왕계 왕실을 내세웠다. 특히, 경문왕계 왕실과 관계하였던 낭혜를 계족산에서 미륵을 기다리는 가섭으로 비유하였다. 왕실의 교화를 도왔던 낭혜는 동방의 계림에 미륵이 강림하게 하였다. 최치원은 경문왕과 헌강왕이 현세에 미륵의 강림을 도모한 낭혜를 존숭하였음을 강조하면서, 말법을 구원하는 미륵의 덕화는 왕실의 통치를 보좌하면서 실현될 수 있었다.
이재는 전쟁의 폐해를 없애고 나라의 경사를 기원하려고 높은 산에 성을 쌓으면서 등루를 세웠다. 그는 자신을 ‘호국의영도장(護國義營都將)’이라 부르면서 성의 이름을 특별히 ‘호국’이라 하였다. 최치원은 「등루기」를 찬술하면서 호국을 위해 불사를 일으킨 이재를 칭송하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불법 숭상을 통해 신라 국가의 재건을 갈망하였던 자신의 의지를 재천명하려는 것이었다.
최치원은 유교적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 호법을 통해 호국을 강조하며, 신라 고대 국가의 재건과 안녕을 꿈꾸었다. 최치원은 재당 시절에 당나라에 성행하였던 사상적 흐름에 익숙하였다. 그것은 대체로 유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귀국 후에는 화엄 사상을 중심으로 신라 사회에 상존하는 불교에 바탕을 둔 도교 사상, 신라 고유의 전통에서 수용 · 발전한 유불 교섭 사상, 유교 · 불교 · 도교를 아우른 신라 고유의 풍류 사상을 중심으로 삼교를 융합하려 하였다.
그는 원칙을 강조하는 화엄 불교에 익숙하였다. 그리고 도교 사상에서 내심을 닦은 수련적 신선사상을 제시하면서 경문왕계 왕실을 ‘신라 최고의 신선’으로 상정하였다. 또한 유불 교섭 사상의 경향이 유교를 진흥하고 불법을 숭상한 경문왕과 헌강왕 등 경문왕계 왕실에 의해서 진작되었음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국선인 경문왕이 풍류를 통해 삼교를 융합하였다고 부각시켰다.
최치원은 경문왕계 왕실의 권위를 부각하려고 유교 · 불교 · 도교는 물론 풍류 사상을 내세웠다. 삼교 융합 사상과 풍류 사상에 대한 이해는 어디까지나 경문왕계 왕실의 권위와 잉존(仍存)을 고려하여 이루어졌다. 자연히 각 사상에 대한 이해는 깊을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당시 성행하였던 선종 불교가 실천적인 면을 강하게 내세우면서 사회 혼란을 수습해 나갔다. 자연히 최치원이 내세운 왕실 중심의 사상 경향은 당시 사회 상황에 썩 어울리지 않은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왕실을 옹호하며 전통을 강조하는 그의 사상 경향은 은근히 내세워질 수 있었다.
최치원은 관직 진출을 위해 유교적 정치 이념을 익혔다. 그것은 일찍부터 그의 집안이 경문왕계 왕실과 깊이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는 헌강왕의 왕권 강화가 일부 정치 세력의 견제를 받아 흔들리고 있을 때, 자신의 정치적 진출을 도모하려고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에는 왕실 측근의 근시 직에 있으면서 새로 개편된 문한을 맡고, 연이어 중앙 관서의 차관직을 겸직하면서 정국 전면에 나섰다.
그는 불교 관련 글을 지으면서 호법을 통해 왕도정치를 이루려는 경문왕계 왕실의 위상을 내세웠고, 왕권의 강화를 염원하며 신라 사회를 개혁하려는 사회 개혁안을 올리기도 하였다. 특히, 위홍 사후에 진골 귀족 세력이 진성왕에 대해 반발하고, 지방 곳곳에 자리한 호족 세력이 신라를 부정하자, 경문왕계 왕실을 위호하려고 애썼다. 최치원은 6두품 세력을 중심으로 경문왕계 왕실의 위상을 강조하는 존왕적 정치 이념을 제시하였다.
[평가와 추숭]
최치원의 자취는 석각, 사우 또는 서원, 관련 유적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주로 지금의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북특별자치도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사우 · 사원과 유적은 대체로 적게는 4곳에서 많게는 8곳에 이를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석각은 32곳에 남아 있다. 다만, 전북특별자치도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반면,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에 대부분 분포하고 있다. 석각이나 관련 유적은 귀국 후 그의 활동과 관련되어 전승되고 있다.
최치원의 사후에 그를 모시거나 기리기 위해서 건립한 사우와 서원도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모두 24곳의 사우와 서원 가운데 정읍 무성서원, 경주 서악서원, 군산 염의서원 · 현충단․옥산서원 · 진주 남악서원, 김제 벽성서원, 함양 백연서원 등은 최치원 외에 김유신, 설총, 신잠, 고경, 고용현, 이건명, 조태채, 임병찬, 김종직, 김일손, 옥구 선현 14위 등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다. 이들 사우와 서원은 전형적인 선현봉사(先賢奉祀)의 모습을 띠고 있으므로, 유림들이 건립이나 향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셈이다.
반면에 서산 부성사, 광주 지산재, 울진 아산영당, 서천 도충사, 순창 지산사 등은 최청, 최운한, 최형한, 최익현, 최몽량 등의 후손을 배향하고 있다. 광주 지산재, 대구 문창후영당, 포천 청성사, 하동 운암영당, 청도 학남서원, 울진 아산영당 등은 처음부터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사우로 건립되었다. 안동 용강서원, 군산 문창서원, 대구 문창후영당, 포천 청성사, 하동 운암영당, 창원 두곡서원, 청도 학남서원, 합천 가야서당, 익산 단동사, 영덕 모운사, 대구 대곡영각 등도 최치원만 모시고 있다. 후손을 배향하거나 처음부터, 또는 최치원만 모신 사우․서원의 건립과 향사에는 경주최씨 문중의 영향력이 제법 미쳤다.
최치원의 영정은 현재 19곳에 봉안되어 있다. 그것은 대체로 문인풍의 영정과 신선풍의 영정으로 나뉜다. 문인풍의 영정은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관복과 관모를 갖추어 입은 모습이 대부분이지만, 심의(深衣)에 복건을 쓴 유학자의 모습이나 옷과 요대, 관모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문인의 모습으로도 표현되었다. 신선풍의 영정은 모두 계곡이 있는 깊은 산속에 앉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최치원의 영정은 대체로 문인풍이지만, 하동 운암영당의 영정처럼 원래 산신풍의 영정을 문인풍으로 바꾸어 덧칠한 것도 있고, 광주 지산재의 영정처럼 문인풍의 영정에 신선풍이 혼효되어 있기도 하다. 최치원의 영정은 애초에 신선풍으로 제작되었다가 점차 문인풍으로 변화하였다.
최치원을 모시는 사우와 서원은 고려 말에 정읍 무성서원이 건립된 뒤, 1483년에 재건되었고, 1561년부터 숙종 때까지 경주 서악서원, 함양 백연서원, 안동 용강서원, 군산 염의서원과 문창서원 등이 연이어 건립되었다. 1623년에 서악서원이 사액된 다음, 무성서원과 염의서원이 사액되었다. 성종 때 일어난 최치원에 대한 숭모 분위기는 선조 때 부성사가 위패를 모신 문중 사우로 처음 건립되는 데 영향을 미쳤고, 1737년에 광주 지산재가 건립되면서 영정을 모신 문중 사우와 서원이 점차 전국에 건립되었다.
영정을 모신 문중 사우와 서원은 경기도, 경상남도, 경상북도, 광주, 대구, 전북특별자치도, 충청남도 등 거의 전국에 건립된 반면에, 유림이 관여한 서원은 대체로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북특별자치도에만 분포한다. 전북특별자치도에만 무성서원, 염의서원, 현충단, 옥산서원, 벽성서원 등 5곳이 자리하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일대에 자리한 서원은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최치원에 대한 유림의 숭모와 관련되었는데, 이것은 문인풍의 영정이 대체로 호남과 호서 일대의 사우와 서원에 주로 봉안된 것과도 관련된다.
다만 경상남도, 경상북도의 경주최씨 문중에서는 경주 서악서원의 사액을 기점으로, 문중 공동체의 발전과 유지를 위해서 영당의 건립을 확대해 나갔다. 이것은 영남 일대의 사우와 서원에서 대체로 신선풍의 영정을 모신 것과도 연관되었다. 특히, 영남 일대는 최치원이 자연을 벗삼아 노닐었던 말년의 삶과 연고되었으므로, 다른 지역보다도 신선풍의 영정이나 석각의 전승이 특별히 강조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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