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영흥조씨(법적으론:한양조씨) "同性同本異族"시조단을 찾아서...] 글쓴이 --- 정병경.ㅡ별묘 숭모사(崇募祠):경기 양주시 백석읍 부흥로419번길 43-8(우) 11502(지번) 백석읍 연곡리 238-18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11. 12.

*문복희 초우문학: 정병경의 문화유적 답사 후기.

https://cafe.daum.net/ksh1250/D9se/5018?q=%ED%95%9C%EC%96%91%EC%A1%B0%EC%94%A8%EC%9E%AC%EC%8B%A4+%EA%B0%95%EA%B2%AC%EC%82%AC&re=1

 

한양조씨 시조단을 찾아서.

[한양조씨 시조단을 찾아서]   정병경.ㅡ별묘의 배경ㅡ  조상을 받드는 마음은 누구나 같다. 한결같이 후대로 이어가는 것은 의지意志가 있어야 한다. 조상에 대한 예의는 물론 정신력도 필요

cafe.daum.net

조선사
 

조선사

 

www.youtube.com

https://youtu.be/BPNkHYiVP0k?t=4태종 이방원의 심복 조영무 : 킬방원 앞이라도 할 말은 했던 상남자의 일생은?!(역사, 국사, 조선왕조실록, 왕자의난)

 

구독자 14.1만명가입구독2.8천공유오프라인 저장Thanks
조회수 284,543회 2022. 3. 13.

채널에 가입하여 혜택을 누려보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vQ6...

태종 이방원이 왕이 되는 길은 매우 험난했습니다.

그때마다 위기에 빠진 이방원을 구해준 인물은
아버지 이성계의 부하였던 무신 조영무!

정몽주를 처단할 때,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결정적인 한방이 필요할 때 마다
조영무는 이방원의 편에 서면서
그의 충실한 심복이 되었습니다.

삼촌과 조카뻘의 나이차가 있었지만
태종은 조영무를 무한 신뢰했고,
조영무는 태종을 하늘처럼 섬겼죠.

이처럼 태종을 받들어 모셨던 조영무였지만
자신의 뜻과 어긋날 때는
그 무서운 피의 군주 이방원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던 강단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자신과 의견대립을 했던 이미 제거된 정도전.

하지만 태종이 본인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죽은 정도전을 깍아내리자
그것은 아닌거 같다며 그를 변호했던 조영무.

이를 보면 공과사, 잘된것과 잘못된것에 대해
나름 철칙을 가지고 올곧게 행동한 인물 같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조선왕조 최초로
무신에서 공신반열에 오리게 된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여인이라는 큰 장애물이 있었으니...
할말 다하면서 청렴하고 똑부러지게 생활하던 그에게
탄핵이라는 핵폭탄을 터뜨린 관음이라는 여인과의 일화까지~

태종 이방원이 너무나 아끼고 총애해서
자신에게 톡쏘는 말을 해도
무조건 아끼고 좋아했던 조영무에 대한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조선왕조실록 #킬방원 #태종이방원 #왕자의난
-------------------------------------------------------------------------------------------------

※참고 드라마
- 용의 눈물
- 정도전
- 태종 이방원
- 대왕 세종
- 옷 소매 붉은 끝동

https://youtu.be/hrktyswMWm4?t=7

챕터 3. 태종 이방원

3-6. 태종이 조영무와 하륜을 끝까지 살려준 이유 [역주행의 조선왕조실록]

구독자 12.1만명
 
구독
조회수 928,155회 2021. 10. 20.
우리의 역사 조선왕조실록을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전달하기 위해서 애니메이션을 활용해 영상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영상을 제작하면서 실제 내용을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 이해를 돕기 위해 축약하거나 추가한 부분이 있으니 그 점 양해 바랍니다.

[BGM]
메이플스토리 BGM 호영 - 괴력난신
메이플스토리 BGM 호영 - 선유산기슭
메이플스토리 BGM 아랫마을 - 금지된 절벽
메이플스토리 BGM 고스트파크 - 고스트하우스
메이플스토리 BGM - 까막산
메이플스토리 BGM - 미남법사의 사원
메이플스토리 BGM - 퀘스트 중 긴급상황
거상 BGM - 조선 필드
BGM팩토리 - 보드게임의 세계 - 장기

[참고서적]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 박시백 / 휴머니스트
'조선국왕 이야기' - 임용한 / 혜안
'조선왕조실록 1 태조~세종 편' - 이성무 / 살림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박영규 / 웅진지식하우스
'1분 조선왕조실록 1: 태조~태종' - 정명섭 / 21세기북스
'왕, 왕비, 참모로 산다는 것' - 신병주 / 매일경제신문사

[참고자료]
나무위키
(유튜브) 최태성 1TV - 전설의 한능검 고급
(유튜브) 황현필 한국사 - 조선사

 

 

[한양조씨(영흥조씨) 시조단을 찾아서] 글쓴이 --- 정병경.

ㅡ별묘의 배경ㅡ

조상을 받드는 마음은 누구나 같다. 한결같이 후대로 이어가는 것은 의지意志가 있어야 한다. 조상에 대한 예의는 물론 정신력도 필요하다.

 

음력 7월 28일은 충무공 조영무趙英茂(1338~1414) 선생의 기일이다. 각처에 거주하는 한양조씨漢陽趙氏 후손이 제사를 모시기 위해 양주 별묘別廟에 모인다. 광주학연구소 연구위원 (정기성 소장. 김이동 부소장. 유선영 사무국장)도 행사에 참관하기로 했다.

 

조영무 선생은 조선초朝鮮初 태조 이성계의 개국을 도운 공신功臣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태종)을 도와 정사定社 1등 공신에 봉해진다. 제2차 왕자의 난 (일명 박포의 난 또는 방간의 난)때도 이방원을 도운 공으로 익대좌명 1등 공신에 봉하게 된다. 이방원의 지지파(조준, 하륜,조영무, 이숙번 등)에 속하는 일등 공신이다.

 

조영무 선생은 개국공신開國功臣 3등에 오르고 한산군漢山君에 이른다. 최종 계급은 영삼군부사領三軍府事(정1품)이다.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호號는 휴암休巖과 퇴촌退村으로 불린다. 자字는 건야乾也이다.

영삼군부사 때 신병으로 경기도 광주 퇴촌에 내려가게 된다. 77세 되는 해에 병세 악화로 생을 마감한다.

개국 때 일조를 한 조영무 선생은 공신으로서 세종조 때 태종의 묘정에 배향된다. 국가 안녕을 위해 나를 희생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성공은 실패가 따르기 때문이다. 조선 5백년 역사 중 최초 무관 출신이 정승에 오른 인물이다.

 

양주시청 인접 불곡산이 멀리 보인다. 동남향의 시조단始祖壇은 명당 터로 간주된다(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산238-18). 지령산 줄기에 자리한 2100여 평의 종중 토지는 바람이 적고 아늑한 느낌이다.

 

시조始祖인 조지수趙之壽의 묘소가 함경남도 영흥군에 있다. 제향이 어려워 종중에서 1990년 현 위치에 시조단始祖壇을 조성하게 된다. 양주시에서 향토 유적 제12호로 지정한다 (1986.4.15).

계유정란(1453년) 이후 한양조씨 충무공파가 양주에 터를 잡아 지금에 이른다.

 

우측에 휴암묘休巖廟와 좌측에는 숭모사崇慕祠를 배치하여 시조단이 조화롭다.

사당의 규모는 가로 6.9미터와 측면 3.7미터이다. 전통적인 한식 기와의 맞배지붕이다. 건물 면적과 크기는 보통 정도의 사당이다. 제례 참배 인원에 비해 협소한 느낌이 든다.

 

시조단 양쪽에는 문인석을 세우고 중앙에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우측 하단은 종중에 희사한 헌납비(제단건립추진임원록비.

판도공위토헌성록.단비헌성록)

가 줄지어 있다. 비문에는 종친들의 이름이 빽빽하다.

 

종회를 위해 희사한 종친 중 현재 생존해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전한다. 선친의 수고로움에 대해 종회의 후손들이 존경스럽게 여긴다.

 

시조단 바로 아래 3백여 평의 토지는 향후 주차장 부지다. 2021년에 매입했는데 장애자 주차 시설까지 곁들일 계획이다.

ㅡ업적ㅡ

조영무는 시조 조지수趙之壽의 玄孫이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별묘는 본래 150미터 서북쪽에 자리했는데 퇴락頹落해 1914년 현 위치로 이전하게 된다. 충무공(휴암) 조영무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2022년)로 608년째를 맞는다. 제향을 모시는 후손의 정성이 대단함을 발견한다.

 

충무공파忠武公派 22세인 현 종회 조사선(趙思善) 회장이 올해 미수(88세)를 맞는다. 지난해 장마에 휴암묘休巖廟(사당)의 곡장이 훼손되어 보수하느라 마음 고생을 했다.

 

지방 향토 문화재여서 종중의 재정으로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재실의 상태가 양호한 것은 종회에서 철저히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1949년에 곡장을 개축한 기록이 있다. 1973년에는 건물 전체를 중수重修하게 된다. 나무 기둥 주춧돌받침(원주)을 1미터 정도 높이로 올렸다. 풍우에 오래 견딜 수 있는 구조다.

 

본당인 사우祠宇 상단에는 최종건崔鍾健 선생이 쓴 영당기影堂記 현판을 걸었다. 삼문 밖으로는 휴암묘休巖廟현판이 보인다. 동편 언덕 휴암묘 유래비由來碑에서 한양조씨 역사의 흔적을 엿본다.

 

1989년(단기4322년) 기사己巳 11월, 후손들이 조상의 뜻을 기려 문중에서 시조단비始祖壇碑를 세우게 된다. 2대조 조인재趙麟才, 3대조 조순후趙珣厚, 4대조 한산백공漢山伯公 조세진趙世珍이다.

 

단비명은 성균관부관장 고부 이수원 (古阜 李壽源이 謹撰) 선생이 짓고, 한국서예협회학술이사 양택동(梁澤東 謹書)선생이 썼다. 2004년 단청 보수 후 사당의 면모를 잘 갖춘 별묘別廟이다.

 

광주학연구소 정기성鄭基成 소장과 한양조씨 양경공파 종중 회장인 조병노趙炳魯 교수의 주선으로 답사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지난 17일 광주학연구소 임원과 종회 임원(조사선趙思善 회장, 조태학趙泰鶴 사무국장 등)이 함께 면담했다. 제향祭享 때 문화재에 관해 논의하자는 의견이다.

ㅡ제향ㅡ

조영무 선생 영정 사진이 모습을 드러낸다. 후손들은 사시巳時에 사당에서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제사에 참여한다. 비를 맞으며 30여 명이 제복으로 단장하고 정성껏 제향을 올린다.

 

시조ㆍ 충무공 춘추향사는 년 5회다. 한식 향사享祀는 한식 다음 일요일이다.

충무공 기제사가 음력 7월 28일이다.

추석 향사는 추석 지난 다음 일요일에 지낸다.

음력 10월 초하루는 시조 및 2세ㆍ 3세ㆍ4세 추향제다.(가공인물???)

음력 10월15일은 충무공 조영무 선생의 향사일이다. 이천利川 효산사孝山祠에서 추향제를 올린다.

한양조씨 제향에 관해 문중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조상을 극진히 모신다는 것은 정신력과 정성이다.

 

제향을 마치고 종친과 함께 자리했다. 숭모사에서 광주학연구소 연구위원들과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다.

조용은趙容殷 25세 대종손과도 함께 종회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행사 때마다 일조를 하는 종부의 공도 포함이다.

 

한양조씨는 6개 공파로 나뉘며 대략 35만 명이다 (충무공파.검한성공파.충정공파.양절공파.양경공파.가천재공파). 첨단 시대로 바뀌어도 종회를 이어가기 위해 온고지신을 후대들이 새겨야 한다. 종가의 발전을 위해 종친간에 의견 나누는 모습이 화기애애하다.

ㅡ역사 재조명ㅡ

후손들의 바램이 있다. 조상의 공적을 기려야 한다는 이구동성에 귀를 기울인다.

 

문종文宗의 병세가 위중하자 김종서 황보인 정분에게 어린 단종을 보살펴 주기를 당부한다. 문종이 죽자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고명대신顧名大臣이 단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게 된다. 수양대군이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고명대신과 안평대군을 제거하기에 이른다.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이다.

 

충무공(휴암)의 장손 지평공持平公(趙完珪)은 고명대신 안평대군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게 된다. 수양대군은 고명대신과 안평대군에게 협력한 지평공을 강원도 회양으로 귀양보낸다. 1454년 8월19일에 안타깝게 사약을 받는다.

 

장자長子 어모공禦侮公(趙範)과 차자次子 중추공中樞公(趙篩)을 성주로 귀양보낸다. 아우 판관공判官公(趙完珠)은 여주로 귀양이다.

지평공의 사촌 아우 월계당공月溪堂公(趙宗敬)은 화순, 사촌 아우 세마공洗馬公(趙以敬)은 평산으로 귀양가게 된다.

 

연좌제緣座制로 한양조씨 집안에 여섯 명이 죽고 귀양가는 일문육절一門六節을 겪는다. 조씨 일족이 멸문지화滅門之禍에 이르게 되니 문중에서는 참담한 심정이다.

 

개국 후 왕권 선위禪位 시기에 먹구름이 스친다. 공적을 쌓아온 한양조씨 가문에 파란이 일어난다. 어렵사리 지금까지 지혜롭게 명맥을 이어온 것은 문중의 인내와 의지력이다.

 

충무공(휴암) 조영무 선생의 묘는 경기 광주시 퇴촌면 광동리 산17에 안장했다. 1414년부터 지금까지 잠들어 있는 음택은 역사의 뒤켠에 서 있을 따름이다.

 

후대와 역사를 교류하며 안착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조상을 기리는 후손의 마음도 헤아려야 한다. 구호에만 그칠 일이 아니다. 조선 개국 때 일조한 공을 재조명해야 할 시점이다.

2022.08.25.

*문복희 초우문학의 문화유적 답사 후기.

https://cafe.daum.net/ksh1250/D9se/5018?q=%ED%95%9C%EC%96%91%EC%A1%B0%EC%94%A8%EC%9E%AC%EC%8B%A4+%EA%B0%95%EA%B2%AC%EC%82%AC&re=1 

 

한양조씨 시조단을 찾아서.

[한양조씨 시조단을 찾아서]   정병경.ㅡ별묘의 배경ㅡ  조상을 받드는 마음은 누구나 같다. 한결같이 후대로 이어가는 것은 의지意志가 있어야 한다. 조상에 대한 예의는 물론 정신력도 필요

cafe.daum.net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