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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기왓장 아래 찌든 몽상▣속 빈 종가의 답답한 사정을 누가 알리..........◐경북의 종갓집◑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11. 20.

▣기왓장 아래 찌든 몽상▣

 

요즘 어찌 되다보니 내가 나서 자란 집의 이야기가 가끔 신문에도 나오고 텔레비전에까지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관광지도 같은 것을 보아도 우리 집 충효당이 표시되어 있다. 내가 누구 집의 누구라고 하면 남들이 비교적 쉽게 알아주니까 좀 우쭐하여질 때도 더러는 있다.

 

그러나 때때로 그 때문에 남들이 나를 어떤 선입견이나 틀 안에 넣어놓고 바라보는 눈초리를 대할 때가 있어 씁쓸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대개 “부모 잘 만나서 잘 살고 있겠지 라는 식이다. 물론 내가 부모님을 잘 만난 것도 사실이고 지금도 그렇게 못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와 비슷한 나이 대에 속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다고는 하지만, 나도 어릴 때 남보다 궁티가 더하면 더했지 결코 편하고 귀하게만 자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점에서는 딴 사람들보다 더 말 못할 고초를 격어 가면서 자랐다고도 할 수 있다. 내가 종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속 빈 종가의 답답한 사정을 누가 알리..........

 

중략

 

종가는 맏아들인 종손 한 사람만 중시하지 둘째, 셋째, 막내는 종손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것이 사실이다. “야 이놈들아! 종가의 지차는 그저 부지런해야 하느니라!” 이 말은 집안 어른들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다. 이러한 말씀 속에는 종가의 지차는 부지런히 종손을 도와서 종가가 잘 되도록 하여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말하자면 지차가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종손의 보조자로서의 몫이 강조되는 것이다.

 

재령이씨 17대 지차 씀

 

◐경북의 종갓집◑

 

“대저 종가란 무엇이냐? 그것이 단지 큰집이라는 말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조상 윗대 아득한 현조 이래로 그 어른의 장자에 장자로만 이어온 한 가문의 맏이 집안이 곧 종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찌 한갓 태어난 순서나 혈통만을 이르는 것이겠느냐, 거기에 깃든 정신의 골격도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종가란 흔히 큰집에 4대만 모여도 종가라고 하고, 종손이라 한다. 하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불천위를 모신 집이 진짜 종가이다.

 

종가란 종가 사람들의 터전인 종택과 불천위 조상을 모신 사당, 또 이들을 지켜나가는 종손이 있어야 종가라 할 수 있다. 유림이나 나라에서 내리는 불천위가 있는 가문은 바로 그 “가문의 영광”인 것이다. 위대한 조상을 모시게 될 경우, 그 종가의 후손들은 큰 자부심을 갖게 될 뿐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종가로 인정받게 된다. 종가는 본가로서 계속되어 온 대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종가를 다시 대종(大宗), 소종(小宗)으로 나눈다. 몇 백 년 세월이 고스란히 고여 있는 종가가 불러일으키는 자긍심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경북의 종가는 대체로 통혼과 학맥으로 형성된 문화적 공간이다. 주로 퇴계의 학통을 잇고 명망가와의 교류와 통혼을 통해 재지사족으로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일례로 퇴계 학통을 이은 학봉 종가의 종부는 퇴계가 출신이고 하회마을 서애종가(충효당)의 종부는 경주 최씨가 출신으로 유력가문 간의 통혼인 것이다. 뛰어난 조상과 내세울 만한 종가가 없다는 것은 후손의 불행이며 명문가가 없다는 것은 그 국가의 불행이다. 멋스러운 문화의 향취와 대쪽같은 선비정신이 스며 있는 종가, 그 꼿꼿한 지조와 청빈한 삶의 향취가 못내 그리운 현실이다.

 

일찍이 “경상감사 자리보다 퇴계 종손 자리가 낫다” 고들 했다. 이 말처럼 퇴계 종가는 영남 유림의 구심이자 마음의 고향이다. 그만큼 종손의 힘도 막대했다. 퇴계 이황의 윗대 조상들은 두루 마을에 살았는데 두루 마을에서 온해로 옮겨온 것은 이황의 조부인 이계양 때이다. 이계양은 노송정공이라 불리웠는데, 노송정은 집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이계양의 호이다. 노송정공이 온혜에 정착하니 이는 진성 이씨 온혜종가가 된다. 노송정공은 무엇보다 후손교육에 힘을 기울여 빈한한 가문이던 진성이씨를 일약 반열에 올리는 디딤돌 역할을 한다. 온혜종가는 퇴계가 태어난 태실이다.

 

안동의 종가를 이야기할 때 가장 오래된 종가가 있는 마을이 소산동이다. 청음 김상헌이 소박하고 근검하게 사는 마을이라 해서 소산이라 이름 했는데 소산에는 안동 김씨 비안공파(신 안동김씨)와 상락 김씨 판관공파(구 안동김씨) 종가가 함께 있다. 신 안동 김씨의 종가인 양소당과 구 안동김씨 종가인 삼소재가 있다. 이곳의 신 안동 김씨는 병자호란 때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강화도가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폭한 김상용과 척화를 주장하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라는 시조를 남기고 청나라로 잡혀간 김상헌 형제가 있다 조선후기 순조ㅡ헌종ㅡ철종 3대에 걸쳐 세도 정치를 통해 권세를 떨치는 이들은 신 안동김씨들이다.

 

이들은 주로 서울에 이거한 청음 김상헌의 후손인 장동파로 크게 번성하여 장동 김씨라 따로 부르기도 한다. 소산과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는 가일 마을엔 안동권씨 가일 종가인 시습재가 있다 학식과 덕행으로 불천위에 재향된 병곡 권구의 당호이다. 이 마을에는 수곡종가도 있다. 1792년 권조가 할아버지인 수곡 권보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종가이다. 사랑채의 지붕이 화려한 팔작지붕이 아니라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데 도학에 전념하면서 검소를 실천한 수곡의 뜻을 담은 것이다. 수곡은 병곡의 셋째아들로 평생 도학에 전념했다.

 

하회는 풍산 유씨가 세거한 아름다운 곳이다. 대종가인 양진당(입암고택)은 서애의 형 겸암 유운용의 종가이고 충효당은 서애의 종가이다 하회에는 귀촌 류경심의 불천위 위폐를 모신 풍산 류씨 귀촌파 종가도 있다. 오미동의 풍산김씨 유연당종가가 있다. 오천에는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인 탁정청종가라 한다. 도산면 분천에서 옮겨온 영천이씨 농암종가는 조선 강호 문학의 서장을 연 이헌보 선생의 종가이다. 일직면 망호리에는 한산 이씨 수은 종가가 있다. 수은은 한산 이씨 17세손 안동 입향조인 이홍조를 말한다.

 

이 가문은 안동에 내려온 지 4대째에 이르러 퇴계 학맥을 잇는 영남 최고의 학자인 대산 이상정, 소산 이광정 형제를 낳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내앞(川前)리는 의성 김씨 대종가와 작은 종가가 있다. 대종가는 청계 김진(1500~1580)을 불천위로 모시는 종가이다. 청계는 자녀 교육에 전념하여 아들 다섯을 모두 과거에 급제시킬 만큼 교육에 힘쓴 인물로 오자 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 부른다. 그 넷째 아들이 조선시대의 거유였던 학봉 김성일인데 그는 대종가가 불타 없어지자 이를 재건하였다.

 

대종가의 옆은 청계의 아들 귀봉 김수일이 건립한(귀봉종가, 운천종가) 것으로 조선중기 전형적인 종가 양식을 띤다. 귀봉의 장자(운천 김용)는 임난때 선조 임금을 수행하여 호종일기를 남겼다. 무실과, 박실에는 전주 유씨가 모여 살던 곳이다. 이들은 임하댐 건설로 수곡 이주단지와 선산 해평으로 집단 이주하였다. 무실에는 무실유씨 라고 불리며 퇴계학통으로 학문적 기틀을 마련하고 임난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유복기와 유우잠이 기반을 확립하였다. 또 퇴계 학통의 정맥을 잇는 정재 류치명의 정재종가도 있다.지례엔 지례 입향조인 지촌 김방걸의 의성김씨 지촌 종가도 있다 모두 학문을 잘해서 포항공대총장 김호길, 한동대 김영길총장, 시인 김종길, 김원길 등 걸출한 인물이 배출 되었다. 풍산 하리에는 예안 이씨 종택인 충효당이 와룡엔 진성 이씨 두류종가와 광산김씨 유일재공파 종가가 있다.

 

안동댐 수몰로 예안면 도목동에서 송천동으로 이건해 400여년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흥해 배씨 백죽당종가도 있다. 상주 우산리에는 우복종가가 있다 이곳은 우복(정경세)이 선조와 인조 때 성심봉공한 것을 치하하여 영조가 남북 10리와 동서5리를 하사해 5세손인 정주원 때부터 세거한 곳이다. 상주 승곡리엔 풍양조씨 호군공파 사충의 후손들이 산다. 풍양조씨는 조선 말기 세도를 떨쳐 그 세력이 안동김씨와 쌍벽을 이루었다. 이곳엔 종가인 오작당과 정신적 구심점인 양진당이 있다. 양진당은 검간(黔澗趙靖1555~1636)선생이 지은 살림 집이다. 조정은 유성룡의 제자이자 학봉 김성일의 조카 사위로 퇴계 학통을 이었다.

 

임난때 의병을 일으켰고 도남서원(영남수서원)을 세우고 향악을 실시 향촌사회의 질서를 바로 잡았다. 양진당은 99칸 집이었는데 안채만 남았어도 거대한 고택이다. 일명 고상형이라 일컬어지는 “높음마름집“ 이다. 중동면 우물리엔 풍산 유씨 우천파 수암 종가가 있다 류성룡의 셋째 아들 유진이 1700년대에 건립한 일명 대감댁이다. 예천군 용문면에는 예천권씨 종가가 있다. 별당인 ⌜초간정⌟과 ⌜대동운무군옥⌟의 초간 권문해로 대표되는 예천의 명문사족이다. 산북면 대하리에는 장수 황씨종가가 있다. 또 외래귀화 성씨인 연안 이씨 종가가 있다. 호명면 송곡리 연안이씨 별좌공종가가 그것이다.

 

조선중기에 지은 사고(沙皐) 이덕창의 종택이다. 김천 상원리에도 연안이씨 부사공파일가가 형성한 마을이있다. 조선시대 관영숙소인 상좌원이 있어 ⌜원터⌟라 불리던 곳이다. 한국 전쟁으로 99칸 종가는 파괴되고 다행히 방초정과 작은 종가가 남아있다. 영주 수도리는 강물이 마을을 에돌아 흐르는 그림같은 곳이다. 이곳은 반남 박씨와 예안(선성)김씨 집성촌으로 고택이 즐비하다. 반남박씨 판관공파의 종가인 만죽재 고택이 있다. 영주 장수 화기리에는 인동 장씨 종가가 세월과 더불어 서있다. 이산면 신암리에는 선성김씨 두암종가도 있다. 정침은 두암 김우익(광해때 한성부윤)이 건립한 것이다.

 

청송에는 청송을 한때 도호부로까지 승격시킨 청송 심씨의 고장이다. 대표적인 심씨가는 송소고택이다. 송소 심호택이 영조때 99칸으로 지었다고 하며 덕천리 심부자집으로 경주 최씨와 더불어 영남 부자의 쌍벽을 이룬다.

영양 주실마을엔 한양조씨 주실파 종가인 호은종택과 옥천종택이 있다. 조광조 후손이 사화를 피해 들어와 정착하게 되면서 마을을 이루었고 입향조인 호은공 조전이 터를 잡아 세거한 곳이다. 이집은 태실이 따로 있어 한말 의병장 조승기 6,25때 자결한 조지훈의 조부 조인석.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태어난 곳이다. 호은 종가는 재물, 문장,사람을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의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또 하나의 종가인 호은공의 증손자인 옥천 조덕린의 종택이 있다. 영양읍 하원리에도 한양조씨 사월 조임이 선조35년에 세운 사월종택가 있다.

 

석보면 원리는 재령 이씨 집성촌으로 대학자 이시명의 석계종가 등 고택이 줄비하다. 소설가 이문열씨도 이곳 출신이다. 석보면 원리는 김령김씨오류종가가있다. 지중추부사 김두행(1705~1785)의 살림 집이다. 충의공 백촌 김문기 선생의 13대손으로 후원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도연명을 따라 오류정이라 하였다. 봉화는 안동만큼 종가가 많고 골기와집이 즐비하다. 해저의 의성김씨, 유곡의 안동권씨, 법전의 진주 강씨, 거촌의 광산 김씨, 오록의 풍산 김씨 등 골마다 옛 마을이 즐비하다. 자연 불천위종가가 일곱이나 될 정도로 뼈대 있는 고장이다. 닭실은 충재 권벌의 후손이 모여 사는 곳인데 안동권씨 닭실종가가 있다.

 

충재 권벌이 매우 번창했기에 유곡 권씨로 따로 칭하기도 한다. 거촌리에는 광산 김씨 담양공파(쌍벽당파) 종가인 쌍벽당이 있다. 쌍벽당 김언구의 부친인 죽헌 김균이 연산군 때 영구 보자손적지로 택해 이곳에 세거하게 된다. 거촌에는 의성 김씨 황전종가도 있다. 가평리엔 창녕 성씨 집성촌이다. 조선 중기에 계서 성이성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400여 년 된 고택이다. 성이성은 남원부사를 지낸 부용당 성안의의 아들로 4번이나 어사로 등용되었으며 춘향전의 실존 인물로 알려져 있다. 법전에는 법전 강씨 종가가 있다. 도은 강각이 병자호란으로 왕이 삼전도에서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친형인 잠은 강흡과 함께 이곳에 은거하며 충절을 지키던 곳이다. 지금은 법전 강씨 정경공파 종택으로 보존되고 있다.

 

봉화를 관향으로 하는 상운면 문촌리는 봉화 금씨 집성촌이다. 퇴계의 비문을 쓴 매헌 금보 같은 이도 있다. 영해는 소안동 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곳이다. 영남 사림의 큰 줄기를 형성해 안동을 우습게 볼 정도라 하여 소안동이라고도 했다. 영양 남씨, 재령 이씨, 무안 박씨, 안동 권씨가 집성촌을 이루었고 안동일대의 사림과 인척관계를 맺으며 토착사족으로 위세를 떨쳤다. 나라골이라 불리는 인향리에는 많은 종가가 있다 칠보산에 이어진 산줄기가 학이 날개를 펼친 것 같은 명당이다.

 

나라골은 영해 사림의 본거지인 재령 이씨, 영양 남씨, 대흥 백씨,무안 박씨,안동 권씨,등 5대 성을 비롯 운학종가, 길암종가, 우계종가, 용암종가 등의 8종가를 자랑하는 곳이다. 재령 이씨 영해파 종가인 운학 종가는 영해 입향조 이애가 성종 연간에 건축한 것을 손 되는 운학 이함이 뒤쪽으로 이건하여 충효당이라 한다.

 

또 퇴계선생의 성리학을 계승해 영남유학을 중흥시킨 길암 이현일의 길암종가도 있다. 운학 종가의 17대 종손은 삼보컴푸터 이용태 회장이다. 우계종가는 운학 이함의 아들인 우계 이시형이 살던 집이다. 영해 일대 안동 권씨 큰 종가인 오봉헌, 영양남씨 종가인 처인당, 영천이씨 종가인 삼벽당, 서산 김씨 종가인 용암 종가가 있다. 용암 종가는 병조참의를 지낸 용암 김익중의 고택이다. 원두들에는 나라골에서 분가한 무안 박씨 종가인 경수당이 있다.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종가는 선조 3년 박세순이 지은 것이다. 축산면 도곡리는 임난때 경주성 전투에서 공을 세운 무의공의 종택이다. 원두들에는 영양 남씨 큰종가인 구고현과 난고종가도 있다.

 

영해 옥금리(원구2리)는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국이라 옥금이라 부른다. 명당인 이곳에 안동 권씨 옥금종가가 있다. 괴시리는 전통 마을 답게 고가가 즐비하다. 고려 말 삼은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의 외가가 있던 곳이다. 17세기 말 남봉익이 지었다는 영남남씨 괴시파 종가가 있다. 또 괴사리엔 안동 권씨 영해종가인 대은종가도 있다. 지품면 눌곡리에는 경주 이씨 아천공파의 종가인 눌곡종가가 있다. 이처럼 골골마다 대종가와 소종가 전통마을이 번성해 사부항을 이루던 곳이 영해이다.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에는 평해황씨 종가인 해월헌이 있다. ”사동골댁“ 이라고 하는데 이 집터는 풍수가들이 강능 이남에서는 제일 좋은 집터라고 한다. 광해군때 길주목사를 지내고 이조참판으로 증직된 해월 황여일의 후손들이 거주한다. 경주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전통을 이어온 유서 깊은 반촌 마을이다. 입향조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공을 세운 손소의 둘째 아들인 우참찬을 지낸 우재 손중돈이며 딸은 여강 이씨 이번에게 출가하여 출가하여 두아들을 낳았고 그 맏이가 회재 이언적이다. 이언적은 동방5헌의 한사람으로 해동부자로 불리는 뛰어난 도학자이다.

 

월성 손씨 대종가는 서백당이다. 명문가의 대종가 치고는 소규모이며 단순하게 구성돼 있다. 외손인 회재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여강 이씨 대종가는 무첨당이다. 무첨당은 회재의 맏손자 이의윤의 호를 딴 것으로 조상을 욕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또 파종가로 여강 이씨 향단파 종가인 향단과 월성 손씨 파종가인 관가정이 있다. 향단은 손씨의 관가정에 대응하여 외척인 이씨의 입지를 높이고자 세운 것이다. 경주 최씨는 신라의 석학 최치원을 시조로 한다. 교동 경주 최씨 최부자집 종가는 원래는 99칸의 집이었다고 한다. 집안에 전해오는 법주로 유명하고 대대로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않는다는 것과 만석꾼이었지만 사방 100리 안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였다는 것으로 이름나 있다.

 

경주 내남 이조리에는 경주 최씨 사성공파 최진립 종가가 있다. 이곳은 잠와 최진립 장군의 사당을 모신 대종가이다. 10진사 10대만석꾼의 경주 최부자집 선대이고 동학 창시자 수운 최재우,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도 이곳 후손이다. 안강에는 고려말 명신이요 문장으로 드높았던 익재 이재현 선생의 9세손 청와 이경한의 불천위를 모신 청하공종가가 있다. 대구 달성의 달성서씨, 월성동의 단양우씨, 본리동의 남평 문씨, 둔산동의 경주 최씨 계산동의 경주 이씨 등이 세거한 곳이다. 둔산동 경주 최씨 광정공파 백불암종가는 1616년경 최동집이 입향조로 조선시대 전형적인 사대부가로 대구에서 가장오래된 집이다.

 

문익점을 중시조로 하는 남평 문씨 본리종가는 18세기 초부터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곳으로 문희갑 전 대구시장도 이곳 출신이다. 월촌의 단양 우씨 집성촌은 택지개발로 사라졌지만 월곡역사박물관에 그족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계산동 일대의 경주 이씨가는 시인 이상화, 독립운동가 이상정, 체육인 이상백 등 걸출한 인물을 낳은 가문이다. 현풍 솔례마을은 현풍 곽씨 집성촌 이곳엔 현풍곽씨 종가가 있다. 임란 때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를 비롯하여 숱한 충열지사를 배출한 집안이다. 현풍면 지리(못골)에는 서흥 김씨 한원당 김굉필 종가가 있다. 흔히 묘골로 불리는 달성군 하빈면 묘동은 사육신의 한사람인 순천 박씨 박팽년의 후손이 모여사는 집성촌이다.

 

단종 복위운동으로 멸문의 화를 당할 때 박팽년의 며느리가 우여곡절 끝에 비밀리에 키워 후일 사면를 받고 대를 잇게 된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다. 그가 묘골에 99칸의 종택을 지으니 현재 종가는 육신사가 들어선 곳에 있다. 성주를 관향으로 하는 성씨가 많은데 벽진면 흠실마을은 벽진이씨 집성촌으로 이곳에 종가가 있다. 성주 한개마을은 성산 이씨 세거지이다. 세종 때 진주목사 이우가 입향하여 터를 열었다.

 

이곳 인물로는 사도세자의 참변에 낙향하여 대의를 지킨 돈재 이석문, 성학(性學)으로 대표되는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수립한 응와 이원조(대감댁), 숙부인 응와의 학문을 계승하여 퇴계의 성리학을 완성한 한주 이진상(한주종택) 대가면 사도실에는 양강(한강, 동강)의 한 사람으로 숭상하는 동강 김우옹의 후손,의성 김씨 심산종가가 있다. 선조 때 대사성을 지낸 김우옹의 13세손인 심산 김창숙은 그 아들과 며느리 모두가 항일의 전선에 몸 바친 명문 중의 명문이다. 왜관 매화낙지형국인 매원동에는 광주 이씨 묵헌종가가 있다.

 

고령군 우곡면 도전리는 고령 박씨 집성촌이다. 15세기 초 박형이 세조 공신이 되어 실직사족이 된 고령지방을 대표하는 강력한 재지사족으로 성장하였다. 고령에는 점필재종가와 죽유종가도 있다. 점필재종가는 선산 김씨 문충공파의 종가이다. 영남학파의 종조가되었으며 사림파의 초석을 놓은 그는 성리학적 개혁정치를 추진하였고 ⌜조의재문⌟을 지어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창 오씨 죽유공파 종가는 고령 3.1운동의 본거지였으며 6.25때 노동당 사무실로 쓰이는 등 역사적인 애환이 서린 곳이다. 군위는 양반이 없는 고장이라 하여 ”무반향“ 이라 불렸지만 부림 홍씨로 이름난 한밤마을과 행주 은씨로 이름난 불로리마을이 있다.

 

영천지방은 이곳을 본관으로 하는 이, 최, 윤, 황보 씨의 4대 문중이 주반으로 세거해 온 고장이다. 조선시대에는 영일 정씨, 창녕 조씨, 안동 권씨 문중이 번창한 곳이다.

 

영천은 정몽주로 대표하는 영일(오천) 정씨가 많다. 영천시 대전동에는 영일 정씨 종가가 있다. 임난 때 의병장인 호수 정세아의 장손인 정호례가 건립했다. 임고면 일대는 영일 정씨의 집성촌, 매산종가가 있다. 임고면 황강리에는 경주 김씨 지사공종택이 있다. 금호읍 오계리는 창녕 조씨의 씨족마을로 종가인 만취당에는 보기 드문 체천위별묘가 있다. 청도 금천 신지리는 밀양 박씨 집성촌인데 운강 종가를 비롯 명종고택, 운남고택 등 밀양 박씨 고택이 줄비하다. 경산 용성면 곡란리에 영천 최씨 난포종가가 있다.

 

종가가 몇 백 년간 구심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은 가진 자의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인 ”노불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 ”공자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 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며 노구를 이끌고 만주로 독립운동을 떠난 석주 이상룡이나 남 먼저 신 사상을 받아들이고 안동지역을 변혁시킨 동산 유인식 같은 이들의 혁신적 자세는 오늘을 사는 종손들이 참고해야 할 모범이다. 과거와는 달리 권한은 사라지고 봉제사 접빈객의 의무만 남은 것이 오늘의 종손이다.

 

종가를 결속시키고 종손의 삶을 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문중을 의식하면 몸가짐 하나라도 달라지고 가문을 욕보이지 않으려고 스스로 노력하게 된다”. 던 어느 종손의 말처럼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올곧게 살아가게 하는 힘이 아닐지. 전통을 이어온 종가엔 나름의 멋과 세월의 향기가 올올이 스며 있다. 종가를 보존 계승하는 일은 이제 남은 우리들의 몫일 터, 모두 머리를 맞대고 깊이 고민할 일이다. 퇴계종가에는 종부 역할까지 하는 차종손을 생각하면 왠지 씁쓸한 생각이 든다. 학봉종택엔 87세의 종손 김시인 씨가 종택을 지키고 있다. 안동 금계마을에 위치한 학봉종가는 멀리서 바라만보아도 집 자체가 한국을 대표하는 종가다운 품격을 간직하고 있었다. 학봉종가는 유교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종가라 할 수 있다. 퇴계 학통의 정맥을 두 번이나 받은 집안이기 때문이다. 학봉 김성일 선생이 한번 받았고 이어 11대 종손이자 19세기 대유학자였던 서산 김흥락 선생이 다시 한 번 이어받은 것이다. 요즘도 학봉 선생 불천위 제사를 모실 때는 퇴계선생이 직접 글씨를 쓴 열 폭 병풍이 차려진다. 임금 앞에서도 할 말을 했던 강직함으로 유명한 학봉 김성일 선생의 뜻은 후손들의 삶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 결과 학봉 후손들은 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지 않는다“. 는 정신으로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가풍은 일제 시대에 의병대장 김희락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 배출로 새삼 증명되었다. 정부에서 인정 받은 독립유공자만 29명이 배출되었으니 한 집안이 배출한 독립유공자 수로는 전국 최대 규모다. 서산 선생의 제자 중에서도 많은 독립운동가가 나왔는데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이 그러한 이들이다. 학봉 집안 사람들의 독립운동사를 말할 때 13대 종손인 김용환의 삶도 빠뜨릴 수 없다. 일제시대 그는 집안의 재산을 노름으로 말아먹은 파락호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그는 파락호가 아니었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벗어나기 위해 철저하게 노름으로 위장하였고 실제로는 대대로 내려오던 전답을 모두 독립군 자금으로 보냈다. 당시 그가 독립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처분한 문중 땅만도 18만 평으로 현 시가로 180억에 이른다고 한다. 김용환은 1946년 임종에 그 비밀을 밝히기를 거부하고 죽었다 한다. 정부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1995년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그런데 김용환 대에서 학봉종택은 재산이 바닥났고 더구나 그에게는 딸만 하나 있어 보종을 위해선 양자를 들여야 했다. 양자로 삼은 이가 당시 종택에서 100리 정도 떨어진 지례에 살았던 현 종손 김시인 씨이다. 당시 김시인 씨 생가에서는 아들을 양자로 보내는 걸 반대하였다 한다. 문중 사람들은 종손으로서의 좋은 자질을 두루 갗추었던 김시인 씨를 양자로 데려오기 위해 생가를 찾아서 10명씩 조를 짜서 생가 앞에 멍석을 깔아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득과 간청을 반복하였는데 간청은 무려 7개월간 이어졌다. 그렇게 해서 김시인 씨는 1946년 29세의 나이에 학봉종가의 14대 종손이 되었다.

 

김시인 씨는 일제시대를 지나며 살림이 궁색해진 종가를 복원하는 데 전 생애를 쏟았다. 지금 위치에서 100미터 떨어진 소계서당 자리에 원래 위치로 종택을 옮겨오는 복원공사를 한 사람도 김시인 씨었다. 습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집터를 2미터 정도 흙으로 돋우는 등 김시인 씨는 집의 주추 하나 올리는 일까지 몸소 해내, 문화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오늘날의 종택을 일으켜 세웠다. 종가를 일으키는 데는 종부인 조필남 할머니의 역할도 컸다.

 

1960년대 만 해도 사랑채에는 10명이 되는 과객들이 머물렀는데 종손과 종부는 아무리 살림이 어려워도 문중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았다. 손님을 보낼 때도 줄게 없으면 호박 한 덩어리라도 손에 쥐어주는 정을 냈다. 그 결과 문중 사람들도 종가를 보존하는 보종사업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보종계를 조직해서 십시일반으로 차종손들의 학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학업을 마친 차종손 김종길 씨는 최고경영자가 되었고 성공시대란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였다.

 

1993년 종부가 돌아가자 안동에서 먼 거리인 대구의 꽃가게 꽃들이 동이 났다는 이야기는, 학봉종부가 생전에 쌓은 덕을 보여주는 상징적 일화라 할 수 있다. 학봉 종손으로서 전 생애를 사리에 합당한 언행으로 문중 사람들에게 ”종손 할배의 말은 그대로 법“ 이라고 한다. 김시인 씨는 학봉종가의 전통이 올곧게 이어지는 비결을 묻는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효를 강조하였다. 하회마을에 있는 서애 류성룡 선생의 충효당을 지키고 있는 종손 류영하 씨 그는 종손의 자리를 기꺼이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하면서도 오늘날의 세상살이에서 종손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도 인정하였다. 물론 외지에 사는 차종손도 훗날 기꺼이 종손의 역할을 할 준비를 하고 있지만 그는 차종손과 손주에 대해서 일말의 안쓰러움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아직 자신이 종택을 지키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에서는 차종손이 현실 세계에서도 꿈을 원없이 이뤄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묻어 나왔다. 그러한 태도에선 수백 년 전통을 이어온 한국 명문가 종손의 긍지와 자부심이 느껴졌다. ·수백 년을 터 잡고 이어 내려온 종가엔 그 무엇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세월의 기품이 느껴진다. 그 집에 살면서 온갖 사연을 담아냈을 때묻은 살림살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만감이 교차하게 만든다. 값으로 따진다면 얼마나 될까마는 물건 하나하나에 담긴 종가의 품격과 체통으로 따진다면 값으로는 감히 논할 수 없는, 한 가문의 정신을 읽어낼 수 있다.

 

종가하면 먼저 생각하는 것이 제사다. 조상들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을 모신 종갓집에서는 매년 10여 차례 이상의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제사 살림이 엄청나다. 보는 이의 가슴을 숙연하게 해줌과 동시에 안살림을 맡아서 하는 여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후유~ 하고 한숨부터 나온다. 저 많은 살림을 보면 안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사를 치를 때 사용하는 제기들도 종가에서 볼 수 있는 진귀한 물건이다. 유기와 목기로 만들어진 제기들은 어느 종가나 방 하나를 가득 차지할 만큼 많다. 깨끗이 닦아 바짝 말려 보관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곧 녹이 나버려 손질하기가 어려운 그 많은 제기를 담당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종부다.

 

조선 중종 때 충신이며 학자였던 충재 권벌 선생의 봉화 닭실마을의 종가 고택은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빼어난 경관 속에 자리한 고택은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사적 및 명승지로 지정되어 있다. 그곳에는 17대 종손 권정우(80) 할아버지와 종부 류한규(81) 할머니, 맏아들 종목(59) 씨와 차종부 손숙(57) 씨가 종가를 지키고 있다. 2대 종부와 종손이 나란히 종가를 지키고 있는 모습은 경북 지방에서는 흔치 않는 모습이다. 종손과 사별한 종부만 남아 있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많고 많은 종택이 점차 비워지고 있는 요즘 이런 훈훈한 모습을 보니 참 반가웠고 괜히 감사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살기에도 너무나 불편하고 그렇다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을 텐데 그런 모든 불편을 감수하고 종택을 지킨다는 그 정성과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거대한 버팀목 「종가」에서 발췌

◐굼을 원없이 이뤄보기를 바라는(풍양인 조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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