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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서울(한양) 탐구05-조선시대 한양(서울)지도, 한양도성(성곽)과 4대문, 4소문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11. 24.

서울(한양) 탐구05-조선시대 한양(서울)지도, 한양도성(성곽)과 4대문, 4소문

새날의 추천 0 조회 339 21.11.23 12:18 댓글 2

[지훈 조동탁 집터]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16길 11
(지번)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60-43
[방우정사] 서울 성북구 성북동 142-1
[정암 조광조 집터]서울 종로구 경운동 42/낙원동 278-4

https://youtu.be/OANnUZVjfLE

국립국악원 추천 음악 - 듣는 모든 이에게 하늘처럼 영원한 생명이 깃들기를. "수제천"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 보려면 클릭, 멈추려면 stop 버튼 클릭.

배경음악이나 영상 보려면 https://www.youtube.com/embed/OANnUZVjfLE<=요걸 클릭

 

* 본문 중에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참조한 주요 링크>

1. 조선시대 서울의 옛지도- https://blog.daum.net/sonsang4/13741884

2. 서울 성곽 일주하기(한 바퀴 돌기):

참조링크2-1: 서울성곽 참조링크2-2 성곽둘레길:서울한양도성

참조링크2-3: 서울의 성곽 상세 참고자료(PDF): 서울의 성곽 -WebViewer (seoul.go.kr)

3. 사대문(四大門) 참조자료3-1: 사대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자료3-2: [조선시대] 4대문-한국역사해설진흥원

4. 사소문(四小門) 참조한 자료 및 내용 출처: 사소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잠깐 퀴즈! -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주요 산, 도성(성곽)4대문, 4소문에 대한 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 퀴즈-D ]

1.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동서남북의 주요 산 이름(조선시대 불렸던 이름)?

북쪽 산 동쪽 산 남쪽 산 서쪽 산

2. 한양도성의 주요 출입구였던 4대문의 이름은? (, 북쪽은 별로 통행하지 않음)

북쪽 문 동쪽 문 남쪽 문 서쪽 문

3. 한양도성의 (4대문 말고) 소규모 출입구였던 4소문의 이름은?

동북쪽 문 동남쪽 문 남서쪽 문 서북쪽 문

 

(알림)

이하 내용은 위에 소개한 참조 링크 및 본문 내용에 링크된 참고 자료에서 가져온 것이며 항목과 내용 일부는 편집, 가감된 것도 있음.

 

조선시대 한양의 모습이 담긴 지도

경도오부 북한산성부도(京都五部北漢山城附圖)-조선 영조 7(1731)년 경,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내용 출처: 조선시대 서울의 옛지도- https://blog.daum.net/sonsang4/13741884

 

경복궁을 비롯한 주요 궁궐, 육조 및 4大門, 4小門 위치, 서울을 둘러싸는 주요 산과 성곽, 외곽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길들이 그려져 있다.

 

도성도(都城圖)(부분) -조선 영조 26(1750)년 경 제작,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도성 안팎의 주요도로는 굵은 붉은 선으로, 간선도로는 가는 붉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북악산과 인왕산 기슭에서 흘러 내려오는 하천들과 다리 명칭들이 표시되어 있다. 석주(石柱)만 남아있는 경회루 등 임진왜란 이후 복구되지 않은 경복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 성곽 일주하기(한 바퀴 돌기): 참조 링크1: 서울성곽 참조 링크2:서울한양도성

참조링크3: 서울의 성곽 상세 참고자료(PDF): 서울의 성곽 -WebViewer (seoul.go.kr)

출처 및 저자: 서울시 간행물-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

 

한양 도성 성곽은 둘레 약 17로 조선왕조가 수도를 방어·수호하기 위해 쌓은 성곽으로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산은 북쪽의 백악산(白嶽山 링크:백악산-오늘날 북악산)을 시작으로 동쪽의 낙산(駱山 링크:낙산-낙타같이 생긴 산),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링크:목멱산-남산의 옛 이름),,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링크:인왕산)이 한양(서울)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한양 도성의 성곽은 이들 4개의 산을 연결한 구간과 숙종 때 축성된 탕춘대성과 북한산성 행궁지 등을 연결한 조선시대 성곽을 말한다. 도심 바깥으로 탕춘대성, 북한산성이 서울을 둘러싸고 있고 홍지문(弘智門)蕩春臺城(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출처:홍지문 및 탕춘대성

 

한양도성 성곽 둘레길

한양(서울)도성 성곽 둘레길

 

- 성곽 둘레길 참조 링크모음 -

[한양도성 백악구간] http://rblr.co/0ZVfb [한양도성 낙산구간] http://rblr.co/0ZVfi

[한양도성 목멱구간] http://rblr.co/0ZXDC [한양도성 인왕구간] http://rblr.co/0ZXDb

[탕춘대성] http://rblr.co/0ZcfR [북한산성 행궁지] http://rblr.co/0ZgmA

 

사대문(四大門) -요약-

조선시대 (한양) 도성에서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북쪽의 숙청문(肅淸門 1523년 이후 숙정문肅靖門으로 개칭) 등 사대문(四大門)이 있다.

 

서울의 4대문과 보신각에 담긴 뜻은 공자의 가르침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홍지문(弘智門)숙정문(肅靖門), 중앙에 보신각(普信閣)이 있다.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로 어질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로움, 신뢰를 말한다.

 

사소문(四小門) -요약-

사소문(四小門)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후에 惠化門, 속칭 동소문), 남서의 소덕문(昭德門, 후에 昭義門, 속칭 서소문),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을 통틀어 이르는 명칭이다. 1457(세조 3) 4소문 외에 남소문(南小門)을 개설하였다가 1469(예종 1) 폐문하였다.

 

조선시대 도성 문 내역(요약표)

4대문(四大門)

이하 내용과 사진은 참조자료1: 사대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참조자료2: [조선시대] 4대문-한국역사해설진흥원 에서 가져 왔다.

 

(동쪽)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흥인지문(=동대문) -사진 출처: 문화재청

 

흥인지문은 태조 때 1397(태조 6)1차 완공되었다. 1451(문종 1)에 중수를 시작하여

1453(단종 1)에 끝냈다. 이 문의 현판은 오행(五行)의 동쪽을 나타내는 인()을 포함하며, 동대문 일대가 서울 도성 안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바로 남쪽에 청계천이 흐르고 있으므로,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1869(고종 6) 개축하면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자를 보강하였다고 한다.

 

흥인문은 주위 지형의 열악한 조건을 보완하고자 옹성을 두른 것이 특징이다. 이 옹성은 문 앞쪽에 반달 모양으로 둥글게 축성되어 옹성 안에 들어온 적을 앞뒤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적이 가장 먼저 입성하였다.

 

(서쪽)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돈의문은 도성의 2차 공사가 끝나면서 다른 성문과 함께 건축되었다. 처음에는 경희궁 서쪽 언덕 지점에 위치하여 서전문(西箭門)이라 불리었다. 그러다가 1422(세종 4) 2월에 도성을 고쳐 쌓게 되면서 서전문을 헐고 그보다 남쪽 지점에 새로 돈의문을 세웠다. 이후로 돈의문은 통칭 새문新門이라 불리게 되었다. 돈의문은 의주(義州) 국도의 관문으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거쳐 중국으로 통하였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지금의 신문로 큰길과 정동에서 평동으로 통하는 길이 교차하는 마루턱에 위치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을미사변에 관련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남쪽)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으로 청계천과 만초천(蔓草川)을 가르는 언덕에 세워져 있다. 도성 8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며 서울의 얼굴 구실을 하였다. 남대문의 건축은 홍예(虹霓 Arch)와 문루 등 그 구조에 특별히 유의하였는데 1396년에 시작하여 1398(태조 7) 2월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1448(세종 30)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 남산과 인왕산의 지맥을 연결시켜 경복궁을 아늑하게 껴안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풍수지리설과 당시의 여론에 따라 다시 건축하였다. 이때의 숭례문이 오늘에 전하는 것인데 1479(성종 10)에 중수되었다. 한편 1962년 개수 공사 때 세종과 성종 때 개축 또는 중수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로 전하는데, 다른 도성문과 다르게 횡액(橫額)이 아니라 종액(縱額-세로로 써진 편액)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오행사상에 따른 것으로 ()’자는 오행의 화()에 해당하는 글자인 까닭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에 따라 세워서 달았다고 한다. 혹은 한양의 조산(朝山)인 한강 건너의 관악산이 오행의 화()에 해당되어 그 불기운이 도성을 범접하게 되므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워 맞불로 도성을 보호하고자 했다는 전설이 있다.

 

(북쪽) 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

숙정문(肅靖門) -사진 출처 : 두산백과

 

숙청문은 한양의 주산(主山)인 북악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였으나 그 규모는 대문의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소문(小門)의 규모였으며 오랫동안 문루마저 갖추지 못하였다. 숙청문의 원래 자리는 지금 자리의 약간 서쪽에 위치하였었다가 1504(연산군 10)에 옮겨졌다. 숙청문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1413(태종 13)에 폐문되었는데, 즉 북쪽은 음()에 해당되어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가 번성하여 도성 안의 부녀자들이 놀아나 풍기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문을 꼭꼭 닫아둔다고 하였다.

 

숙청문은 위치상 통행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았고, 단지 장마가 지면 비 그치기를 기원하는 영제(禜祭), 즉 기청제(祈晴祭)를 여기에서 거행하였다. 또 예종 때부터는 가뭄이 들면 양기가 많은 남대문을 닫고 음기 서린 북대문을 열어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숙청문은 중종 이후 모든 기록에 숙정문(肅靖門)’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 새로 복원한 문루에도 肅靖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이상 내용과 사진은 참조자료1: 사대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참조자료2: [조선시대] 4대문-한국역사해설진흥원 에서 가져 왔다

 

(중앙) 보신각(普信閣) 참조 자료: 보신각-위키백과-

보신각(普信閣) -사진 출처 : 위키백과

 

보신각(普信閣) 또는 종각(鐘閣)은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 종로사거리에 있는 전통 2층 한옥 누각이다. 보신각종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든 것으로 정면 5, 측면 4칸의 구조로 되어 있다. 1396(조선 태조 5) 창건했다가, 1869(조선 고종 6), 19798월에 재건했다. 보신각 터(普信閣址)라는 명칭으로 19971110일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사소문(四小門) 참조한 자료 및 내용 출처: 사소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후에 惠化門, 속칭 동소문), 남서의 소덕문(昭德門, 후에 昭義門, 속칭 서소문),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을 통틀어 이르는 명칭이다. 1457(세조 3) 4소문 외에 남소문(南小門)을 개설하였다가 1469(예종 1) 폐문하였다.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후에 혜화문惠化門, 속칭 동소문)

참조자료1: 혜화문(惠化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자료2: 혜화문-위키백과

혜화문(惠化門)-사진 출처 : 위키백과

 

홍화문((弘化門)은 혜화동에서 삼선동으로 뚫린 길 마루턱에 자리 잡아 도성에서 함경도 등 북방과 직결되는 관문이었다. 1484(성종 15) 창경궁이 완공되어 그 정문을 홍화문이라 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해 1511(중종 6)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 혜화문은 도성의 소문 가운데 하나였지만 대문의 구실을 하였다.

 

즉 경원가도(京元街道)가 여기서 연결되어 있었고, 북대문인 숙청문(肅淸門, 후에 肅靖門)이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행하였다. 그리고 여진(女眞)의 사신이 조공하기 위하여 한양에 입성할 때 이용하던 문이기도 하다.

 

처음 건립하였을 때의 문루는 언젠가 없어지고 1744(영조 20) 어영청(禦營廳)에 명하여 문루를 건축하였다. 이후 일제의 도시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문루는 1928년에 헐리고, 홍예와 석문마저 1939년에 사라진 것을 1994년 길 마루턱 북쪽에 복원하였다.

 

(남서의) 소덕문(昭德門, 후에 소의문 昭義門, 속칭 서소문) 참조자료: 소의문 이야기

소의문(昭義門)= 서소문) -사진출처: 소의문 이야기 -Daum 백과

 

소덕문은 서소문동에서 의주로로 넘어가는 길 마루턱에 위치한다. 1472(성종 3) 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의 시호를 피하여 소의문으로 개칭하였다.

 

이 문은 도성 안 백성들이 죽어서 도성 서쪽으로 운구할 때 이용되는 문이었다. 서소문 밖에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시전의 하나인 칠패시전(七牌市廛)이 있어 발달하던 성업 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1396(태조 5) 건축 당시에는 다른 성문과 같이 문루가 있었으나 언젠가 없어지고 1743(영조 19) 다시 문루를 건축하였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서소문동이라는 지명만 남아 있다.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시구문(屍口門) 참조자료: 광희문

광희문(光熙門= 水口門)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광희문은 1396년 도성 축성 때 건축되었다. 문이름은 광명의 문을 의미하나 개천 수구(水口)에 가까운 곳에 있어 수구문이라 불렀으며, 도성 안 장례 행렬이 동쪽 성 밖으로 나갈 때 통과하는 문이어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하였다.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의 중구 광희동에 있어 남소문이라 할 수 있으나 따로 도성에서 한강 나루터로 바로 통하는 문이 필요하게 되어 세조 때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에 별도의 남소문을 건축하였다.

 

한편 명지대 홍순민 교수는 수구문에 대해서 부근으로 청계천 물길이 나가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고 하는 말이 있으나 이는 억측이다. 청계천 물길은 흥인문이 더 가깝다. 수구문이란 한강으로 출입하는 문이란 뜻이다. 더구나 이 문을 그 부근에 늘 시신이 쌓여 있었다 하여 시구문(屍口門)이라 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악의적 왜곡이다. 참조 링크: () 이름에 숨은 뜻

 

그러나 남소문 건립 후 의경세자(懿敬世子 : 성종의 아버지, 德宗)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풍수 지리적으로나 실용적으로나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12년 만에 폐문되었다.

 

조선 전기 왜국 사신들은 옥수동의 한강 두모포(豆毛浦)나루를 거쳐 광희문을 통하여 인현동에 있던 지정 숙소인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렀다. 1915년경 문루가 자연 붕괴된 이래 홍예(虹蜺 Arch)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서울 성곽을 수축하면서 홍예 석축을 해체하여 남쪽으로 15m 이전 복원하면서 문루 12평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

참조링크1:서울 창의문 자하문(紫霞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링크2:창의문 -위키백과

 

창의문(彰義門)=자하문(紫霞門)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창의문은 의로움을 표창한다는 뜻으로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렸고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도성을 축조할 때 함께 축조되었는데, 1413(태종 13) 지리도참설에 따라 일시적으로 문이 닫히기도 했다. 그러나 1422(세종 4) 숙청문과 함께 군인의 출입문으로 하였고, 궁궐의 담장 축조나 국가의 큰 공사가 있을 때 일시 열어 통행하였다.

 

1623년에는 인조반정의 반정군(反正軍)이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였다가 세검정을 거쳐 이 창의문을 열고 도성에 들어와 광해군을 쫓아냄으로써 인조 정권이 창출되었다. 1741(영조 17) 성문과 문루를 개수하면서 인조반정의 반정공신 1등에서 3등까지의 공신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었으며, 지금도 전해 오고 있다.

 

창의문은 서울 성곽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완형을 지니고 있으며 지금도 성곽의 일부가 연결되어 있다. 창의문 구조의 특징으로, 문 밖의 지세가 마치 지네의 형상과 같아 그 기세를 제압하고자 지네와 상극인 닭의 모형을 나무로 만들어 추녀에 매달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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