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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충, 효, 열의 본보기가 된 휴암공 변윤중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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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 효, 열의 본보기가 된 휴암공 변윤중

  •  변동빈 기자
  •  승인 2013.11.14 13:41
  • 장성의 숨은 인물을 찾아서…

<충, 효, 열의 본보기가 되다>

정유년 9월에 왜적이 전라도 장성에 쳐들어 왔는데, 그들은 가는 곳마다 집을 부수고, 불 지르며, 만나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 코나 귀를 도려내 자루에 넣어 본국으로 보내는 잔인무도한 살육을 저질렀다. 그런 중에서도 유독 장성 변씨들을 철저하게 찾아 죽이는지라 화차 제작의 총 책임을 맡았던 휴암공은 일가들과 가솔 200여 명을 모아 왜적과 싸웠다.
휴암공을 따르는 의병들은 변변한 무기조차 갖추지 못했지만 지형의 이점을 살려 왜적들과 닷새 이상을 싸우며 왜적 수백 명을 죽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조총으로 무장한 왜적들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장성읍 장안리는 임진왜란 때 화차를 제작한 망암 변이중화차의 발생지이기도 하지만 황주 변씨 일가들이 자자일족을 이루는 마을이었다.
장안리 앞까지 쳐들어온 왜적들과 싸우던 휴암공은 함께 싸우던 가솔들을 잃고, 장안리 뒷산까지 밀리게 되었다.
장안리 뒷산을 넘으면 장성읍 부흥리로 부흥리 앞을 흐르는 황룡강이 장안리 앞으로 휘감아 돌아간다. 옛날에는 부엉바위 밑으로 황룡강이 굽이쳐 소(沼)를 이루며 흘렀으나, 지금은 논으로 변하였다.
몇 명 남지 않은 가솔들과 함께 부흥리 부엉바위까지 밀린 휴암공은 “왜적들을 다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나를 따르던 가솔들마저 잃었으니 내 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구차하게 몸을 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며 “왜적의 칼에 내 몸을 더럽히기 싫다”며 강물로 뛰어들어 순절하고 말았다.
이 때 휴암공의 부인인 함풍성씨(咸豊成氏)가 “남편이 나라를 지키다 죽었으니 나 혼자 살아서 무엇 할 것인가?”라며 휴암공을 따라 강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휴암공의 외아들인 형윤(亨胤)이 부모를 따라 황룡강에 몸을 던지려 하니 그의 부인인 장성서씨(長城徐氏)가 극구 만류하며 “제가 불민하여 아직 집안의 대를 잇지 못하였는데 서방님께서는 부디 살아서 후사(後嗣)를 두어 대를 잇는 것이 부모에 대한 효가 될 것이다. 지금 죽어서 효를 하는 것보다 살아서 대를 잇는 것이 진정한 효가 될 것이니 내가 부모님을 따르겠다”며 갑자기 강물에 몸을 던졌다.
장성읍지에 의하면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덮이고 무지개가 서는 이상한 현상이 계속 나타났다”고 하고 “시신을 건져냈는데 며느리 서씨부인이 시어머니의 손을 꼭 움켜잡고 있었다”고 했다.
임진왜란 때는 자신의 재산을 아끼지 않고, 망암공이 발명한 화차를 만드는데 쓰고, 화차 제작에 직접 참여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일가들과 가솔들을 이끌고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하였으니 휴암공은 나라에 보기 드문 충신이고, 남편을 따라 강물에 몸을 던진 함풍이씨는 열녀가 아닐 수 없으며 남편을 대신해 시부모의 뒤를 따라간 며느리 장성서씨는 지극한 효부가 아닐 수 없다.
나라에서 휴암공에게 통정대부 이조참의를 증직하고 성씨 부인에게는 숙부인으로 하였으며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에 삼강정려를 세우고 비를 세워 후세의 본보기가 되게 하였다.

<도의(道義)를 버리지 않은 휴암공>
휴암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대한 열정이 돈독하였으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가는 데 뜻을 두지 않고, 도의(道義)를 닦아 성(誠)과 경(敬)을 실천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휴암공의 부친이신 여관(汝寬)당 홍(洪)공은 장사랑제용감 참봉을 지낸 것으로 보아 일찍이 이재(理財)에 밝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제용감이 중국으로 보내는 직물(布), 인삼과 회사품(回賜品)인 의복 및 각종 비단, 물감, 염색, 직조 등의 무역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홍공은 지금의 국제무역상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휴암공의 부친은 상당한 재력이 있었고, 외아들인 휴암공은 부친의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기 때문에 고을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휴암공이 종형인 망암공이 발명한 화차를 제작할 때 1만석을 지원했다는 얘기가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러한 집안 내력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재력이 있다고 하여 엄청난 재산을 흔쾌히 내어 놓는 사람도 흔하지 않다. 장관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마땅히 내야할 세금마저도 탈세를 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국민의 의무인 병역을 마치지 않았으며 자식들은 외국 국적을 갖게 해서 군대에 보내지 않은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을 보면 휴암공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재산을 아끼지 않은 이유는 그가 도의(道義)를 배워 성경(誠敬)을 실천하는 진정한 군자였기 때문이다.
정유년에 왜적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을 때 휴암공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따라서 왜적을 피해 일신의 안위를 도모한다고 하여도 그를 탓하거나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휴암공은 마치 이순신 장군이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벼슬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백의종군으로 왜적과 싸운 것과 같이 가솔들을 이끌고 왜적과 싸웠다.
휴암공의 벼슬은 상의원직장에 머물렀고,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고향에 돌아왔지만 임금을 원망하거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외면하지 않았다.
죽는 순간까지 도의를 버리지 않은 휴암공을 진정한 선비요 군자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휴암공의 묘소는 망암공의 조부(祖父)인 좌승지(左承旨) 처정(處楨)공과 망암공의 부친인 좌승지(左承旨) 택(澤)의 묘소 아래에 쓰였으니 종형제 사이의 우애가 또한 어땠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고을의 자랑이 된 삼강정려>
사람이 살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세 가지가 삼강(三綱)이다. 임금과 신하(나라와 백성), 남편과 아내, 그리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사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질서라고 할 것이다.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라도 무너지게 되면 그 사회는 병들게 된다.
충신과 열녀 그리고 효자효부의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휴암공과 그의 부인 함풍성씨, 며느리 장성서씨와 같은 예는 참으로 보기 드물다.
청렴한 관리가 많고, 의로운 선비가 헤아릴 수 없다고 한들 한 집안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목숨을 던지고, 시부모를 따라 세상을 버린 예는 없다.
휴암공의 외아들인 형윤(亨胤)의 아내 서씨부인은 남편에게 부디 후사(後嗣)를 이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마지막으로 황룡강에 몸을 던졌다.
서씨부인의 간절한 염원이 하늘을 감동하게 해서일까? 3대 독자인 형윤은 7남 8녀를 낳았으니 죽어서도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한 것이다.
선무랑(宣務郞)을 지낸 형윤의 7남 중에 큰아들인 수익(受益)은 재종숙인 자하(紫霞)공 경윤의 문인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나 자하공이 낙향한 뒤 그를 다시 조정으로 모시지 못한 것을 분통해하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판관인 호익(好益)은 사계(沙溪) 김장생의 문인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수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딸들은 군수(郡守) 이유인(李有仁)과 무과에 급제하여 만석꾼인 윤광형(尹光衡) 등 출중한 집안으로 출가하였다.
휴암공과 부인 함풍성씨 그리고 며느리 장성서씨의 이야기는 부엉바위와 함께 장성의 전설이 되어 널리 알려졌고, 장성읍지 등에 기록되어 후세에 전하고 있다.

<휴암공에 대한 문인들의 글>
구한말의 문장가로 알려진 홍석희(洪錫憙)는 휴암공의 묘갈명(墓碣銘)에 “공은 소시(少時)에 사촌형님인 망암선생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우애와 경애가 두터운 것이 동기(同氣)나 다름 없었다. 망암이 화차를 만들 때는 가산(家産)을 기울여서 도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공(公)을 위대하게 여겼다”며 “공이 의리(義理)를 판별하여 평상시에 강론하고, 경신(敬信)하신 덕이 규얼(閨闑)에도 영향을 준 것은 밝기가 해와 별처럼 빛나고, 세상을 교화하는데도 보탬이 되니, 아름답도다, 아름답도다”라고 하였다.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하당 (荷塘) 조종필(趙鐘弼)은 삼강정려기에 “사적(事蹟)은 읍지 삼강록에 실려 있는데 일문삼절(一門三絶), 한 집안에 세 절행(節行)이란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며 서씨(徐氏)는 더군다나 효부와 열녀를 겸한 것이 아니었던가?”라며 “휴암은 천척(千尺)이요 용추(황룡강)는 만장(萬丈)인데 바위를 옮길 수 있겠는가? 심연(深淵)을 말릴 수 있겠는가? 이 바위, 이 못과 함께 이 유적(遺跡)이 마땅히 오래도록 변함없이 전해지길 바란다”고 하였다.


노사 기정진선생의 손자로 구한말 의병장으로도 널리 알려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은 “공(公)은 직분이 땅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관직에서 해임되어 집에 있었으니 가족을 거느리고, 왜적의 칼을 피하여도 의리에 손상됨이 없는데, 나라를 위하여 왜적을 친다는 평소의 마음을 이루지 못하고, 수풀의 나무 밑으로 쫓기게 되자 구차하게 사는 것이 욕된다 하여 바로 바위 아래 물속으로 몸을 던지고 죽어도 후회함이 없었으니 옛날 삼장사(三壯士)가 있었고, 육수부(陸秀夫)가 있는데 처지는 다르다 하나 같은 것은 마음이다”고 하였다.
이조참판을 지낸 박봉빈(朴鳳彬)은 “변문의 의열 뿐 아니라 실로 천하만세를 위하여 명교(名敎)를 붙들어 세운 것이니 대단한 것이다”고 하였다.
부모에게 효를 실천하는 방법은 옛날과 지금이 다를 수 있으나 인간 사회가 지속되는 한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도리는 변할 수 없다. 또한 부부의 인연을 맺어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고 믿음을 가지며 가정을 이루는 일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비록 그 방법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부부가 믿음을 갖고 사랑하는 일은 인간의 바탕이요 변할 수 없는 진리다.
휴암공 변윤중은 높은 벼슬을 하지도 않았으며 관직에서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음에도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가산(家産)을 기울여 화차를 제작하는 일을 도왔고, 왜적과 싸우다 끝내 목숨을 던져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지 않았다. 함풍성씨, 서씨부인도 휴암공의 죽음이 의로웠기에 죽음으로 함께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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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衣院直長贈吏曹參議鵂巖邉公行狀

                                                 邉時淵

公諱允中,字公信,鵂巖其號。吾邉貫黃州。高麗泰川伯諱呂是上祖。至諱靜中軍司正。以王室外戚。忤辛旽落南長城。卽公五代祖也。高祖諱孝友敎授。曾祖諱浩生員。祖諱處楨參奉。考諱洪參奉。妣珍原崔氏。縣監崙女。公生有異質。務實篤學。宗族稱其孝。鄕黨師其學。累登薦剡。官至尙衣院直長。壬辰島夷之變。大駕播越。扈從盡瘁。丁酉以事罷歸本第。賊徒數千猝至。遂自誓曰。力弱勢單。家後巖穴足以藏身。然不若殺一賊。何以救國。率家僮數百。出戰數日。殺賊無數。竟投死於鵂巖下大江中。卽九月十八日也。至有雲虹之異焉。公配咸豊成氏。監察起仁女。繼公投水曰。公死於國。我何生爲。公子宣務郞亨胤。又欲繼殉。子婦徐氏請以身代曰。父子幷命。先祀誰奉。後嗣誰托。遂抱祭器。投江而死。亂後拯屍也。徐氏之殞於下流者。溯上在舅姑屍側。其亦異矣。公墓在長城邑扶興里六駄洞亥坐。成氏合窆。宣務公有七子八女。男曰。受益僉樞,好益判官號耻齋出系,舜益武副司果,相益時稱處士,恭益參奉出系,夏益武同樞,萬益武部將。女曰。郡守李有仁,沈見瑞,金光益,安允亨,柳渭龍,金光弼,金起榮,武萬戶尹光衡其婿也。郡守妻則徐氏出也。至高宗壬辰。命太常廣搜。龍蛇之際。忠孝烈卓異之未及襃獎者。以聞。該臣以公,及成氏,徐氏事入啓。贈公戶曹參議,成氏淑夫人。幷命三綱旌閭。盡昭代懿典也。嗚呼盛矣。公卽望菴先生從弟也。素從儒業。不識武備之爲何事。猝當巨創。以一敢死力。捍禦敵鋒。竟辦得熊魚之辨。其忠其烈。可以抗華嵩。而爭日月。望菴之製火車三百兩也。其諸般節度。公傾家捐助。則幸州大捷。公之功亦不尠焉。曷不偉哉。今公諸後孫。將竪石墓道。命余爲謁文之資。烏可以不文終辭。玆敢摭出於邑乘,與趙尙書鐘弼,朴參判鳳彬,奇松沙宇萬諸賢所嘗稱揚者,如右以備立言家之有所考据云。

 

 

尙衣院直長贈吏曹參議鵂巖邉公墓碣銘

                                                     洪錫熹

朝鮮。高宗二十九年壬辰。行尙衣院直長鵂巖邉公。贈通政大夫吏曹參議。命旌閭褒忠節也。宜邇時謁文於名公大家。而顯刻羨門。封揚寵命而未爾焉。後昆齎咨。相與出力。載具樂石。蘄余銘辭曰。國朝鼎遷。損益憲章。文苑蔑圈。薦之太史。山林空旌。招之文德。叙述立言 之責。尙不在於草萊講古之流耶。願資子爲不朽。余以不尊不重。而文下累辭。厥懇彌篤。遂按狀而敍曰。公諱允中,子公信,號鵂巖,黃州邉氏冑于高麗泰川伯諱呂。累世而司正諱靜。以王氏外親。恭愍朝見辛旽擅恣。徙長城家焉。生敎授諱孝友。於公高祖。生員浩,參奉處楨,參奉洪,父祖曾官與諱。妣崔氏籍珍原。縣監崙其父。公禀厚資。而生敦學問勵孝弟。爲有司正聞宣廟朝。官尙衣院直長。及壬辰倭入寇。長驅大進。盡瘁扈駕於乘輿去邠之日。丁酉言事罷歸田里。時賊再猘縱兵劫掠。九月賊兵忽逼公居。公編家僮爲部伍。力戰數日。斬殺者多。衆寡不敵。竟以十八日。殉鵂巖下大江。雲雨忽作而長虹亘空。後人謂公義憤激騰云。公少師從父兄望菴先生。友敬之篤。無異同氣。望菴之造火車也。捐貲助劃。以是人尤偉之。夫人成氏。咸豊人監察起仁女。見公沒而投江。子亨胤亦將殉。其婦徐氏止之曰。父子授命。孰主先祀。因急投死。賊兵退。亨胤拯公遺體。與夫人合兆。長城邑扶興里六駄洞。枕亥而封者是也。亨胤官宣務郞。孫男。僉樞受益判官,好益,武科司果舜益,相益,參奉恭益,武科同樞夏益,武科部將萬益。孫女。適郡守李有仁,沈見瑞,金光益,安允亨,柳渭龍,金光弼,金起榮,武科萬戶尹光衡。嗚呼。龍蛇之變。東邦創有之大亂。而忠義諸公。左右王室。戡難而致中興。列聖朝軫念㫌褒至矣。而猶多見逸如公。立慬大節。湮晦五周甲。而始爲入啓。天官之贈。綽楔之命。哀榮徹于幽明。若妻若媳。幷㫌烈孝。一門三綱。表杲千古。天理無爽。善終不可泯有如此。使公義理之辦講於平常。敬信之德浹於閨闑者。昭如日星。爲補世敎。猗矣盛矣哉。銘曰。英靈不死兮。鵂巖江碧萬古流。毅魄之永托兮。六駄之山嵯峨千秋。黃誥丹楔兮。皇恩優渥樹風聲。鑱辭貞珉兮。其垂永齡。

 

 

三綱旌閭記

            趙鐘弼 甲午季春

我聖上卽祚之二十九年。命太常廣搜宣廟龍蛇之際。忠孝烈卓異之。未及襃獎者以聞。該臣以長城邑西壯安里贈吏曹參議邉允中。其妻烈婦成氏。允中之子亨胤妻孝婦徐氏。三人入啓。特命表其門閭。復其子孫地官。承命奔走募工。鳩材棹楔。而丹靑之。由是而觀者感。聽者聳。過者式。夫孰非爲人臣。爲人子。爲人妻者哉。公字公信,號鵂巖,黃州人。父祖曾以上世蔭本朝。盖湖南名族也。公生有異質。務實篤學。宗族稱其孝。鄕黨師其學。累登薦剡。官至尙衣院直長。値壬辰播越。盡瘁扈從。又當丁酉再猘。在家遘亂。賊酋猝入。擧家奔避於家後鵂巖。臨深淵。公竊料勢難殲滅。義不共天。遂投淵而死。至有雲虹之異焉。公歿而夫人成氏繼之曰。公死於國。妾何生爲。公之子亨胤又將隨焉。其妻徐氏請以身代曰。父子並命。先祀誰奉。後嗣誰託。死則傷孝。生當盡孝。願君子勿爾也。遂抱祭器。挺身投江。亂後拯屍也。徐氏之殞於下流者。溯上在舅姑屍側。事載邑誌三綱錄。一門三節。世所罕有。而徐氏果兼乎孝烈哉。嗚呼。臣而輸之忠。子而篤之孝。妻而效之烈。三綱賴而不墜。五倫隨而復明矣。奚但爲邉氏一家之美蹟而止耳哉。公後孫鎭慶甫。旣積誠籲天。追闡先美。屬不佞以旌閭閣記。余文不足以塞慈孫之望。其於事關倫常。竊嘗景仰欽歎。而亦有厠名之榮不辭。而顧謂邉君曰。鵂巖千尺。龍湫萬丈。巖可移乎。淵可渴乎。是巖是淵。宜是蹟之。與之偕焉。是爲記。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하당 (荷塘) 조종필(趙鐘弼, 공조판서공, 한양조씨대종회초대대종약장)은 삼강정려기에 사적(事蹟)은 읍지 삼강록에 실려 있는데 일문삼절(一門三絶), 한 집안에 세 절행(節行)이란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며 서씨(徐氏)는 더군다나 효부와 열녀를 겸한 것이 아니었던가?”라며 휴암은 천척(千尺)이요 용추(황룡강)는 만장(萬丈)인데 바위를 옮길 수 있겠는가? 심연(深淵)을 말릴 수 있겠는가? 이 바위, 이 못과 함께 이 유적(遺跡)이 마땅히 오래도록 변함없이 전해지길 바란다고 하였다.

 

三綱旌閭記

                      奇宇萬 甲午端陽

旌閭所以樹風聲。邉氏三綱。能樹三百年風聲。無旌而猶有旌。有無不爲加損。早晩又何間然。歲在壬辰。記念死事。諸臣旣致誄焉。又採幽而未白者。以表闕宅。玆邉公諱允中。夫人成氏。及子婦徐氏。並旌於一日也。舍命始末。志行世德。趙侍郞記之。覽可詳矣。第念。處了死爲一副大事。此而不處了。其生爲苟活。見今任方岳。寄守土者。百夫持劒入境。竊着奴隸服。行伍樵牧而逃以辱君命。無他處了死。不得公職。非守土。解官家食。率家避鋒非傷義。而爲國討賊。素心未遂。爲所驅迫於林薄之下。苟活爲辱。乃投巖下水。死而無悔。執此可見。公處了死。在早當時。有三壯士。在古有陸秀夫。所處有不同。所同者心。謂公不死於國。非識時者也。公死於國。夫人死於夫。以知公者。知夫人可也。宣務郞之欲繼父母而殞。孝子所難遏。而徐夫人所言。殉孝於一日。豈若存嗣於百世者。使夫人無死。其心或未白。而又何以動得夫子使不死。然則三死一生。死爲當死。生非苟生。以之生間之死。又豈得宣務心哉。後孫鎭慶。俾余續記。蓋欲發明於一死生也

 

 

         三綱旌閭記

                                         朴鳳彬

族譜之有序。昉於而曰。觀吾之譜。孝悌之心。可以油然而生。今觀邉氏之譜。忠義孝烈之心。不覺惕然而興感也。謹按邉氏系出黃州。自高麗朝。勳閥炳烺。簪組聯翩。逮我穆陵盛際。有若吏議公篤行劬學。屢登公剡。値龍蛇之焚。輸忠扈駕。及還鄕。丁酉再亂。北向誓死。登家後鵂巖深潭。從容就義。公之夫人成氏。公之子婦徐氏。抱祭器與從姊李氏。皆繼而殉焉。何其一門節義之壯也。今春。道臣上其事。特命幷施棹楔而表章之。嗚呼。凡爲人臣爲人子爲人妻而觀此譜。孰無奮發而欽慕者哉。然則此非惟邉門之懿烈。實爲天下萬世樹風聲。扶名敎也大矣。豈止於明允所謂宗族之悅已也。譜有舊本。今其後孫鎭慶甫。又載其事而添修之。屬序於余。余曰派系具家牒。實蹟在邑誌三綱錄。豈待余言而重哉。今君千里齎狀。求所以述其美而顯其光。亦可謂善繼孝矣。是爲之序

 

   

[공의 생애(生涯)]

 

공은 가정(嘉靖) 27(1548, 명종3)에 장성읍(長城邑) 장자동(長者洞)에서 제용 참봉공의 두 아들 중 장자(長子)로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어 실질(實質)에 힘쓰고 학문에 독실하여 종족(宗族)이 그의 효를 칭찬하였으며, 고을이 그의 학문을 본받았다. 누차 천섬(薦剡 천거)에 올라 벼슬이 선무랑(宣務郞) 행 상의원 직장(行尙衣院直長)에 이르렀다.

 

이 무렵 일본이 사신(使臣)을 보내 조선국왕(朝鮮國王)의 입조(入朝)”를 요구하며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병화(兵禍)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하였다.

 

1590, 조정에서는 논란 끝에 정사(正使)에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에 김성일(金誠一)을 통신사(通信使)로 파견하여 일본의 정세를 살피게 하였는데 일행이 일본을 돌아보고 6개월 후인 1591년에 돌아와 바친 답서 중에,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할 터이니 조선은 길을 빌려 달라[정명가도(征明假道)].”라는 글귀가 씌어있었다.

 

서인(西人)이었던 황윤길이 왕께 보고하기를,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兵火)가 있을 것이며 풍신수길(豊臣秀吉)은 눈이 빛나고 담략(膽略)이 있어 보인다.”라고 보고하자, 동인(東人)이었던 김성일이 고하기를, “조선을 침입할 정황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며 풍신수길은 사람됨이 생쥐 눈[鼠目]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라고 정반대로 보고하였다. 이에 조관(朝官)들 간에 황윤길의 말이 옳다는 무리와 김성일의 말이 옳다는 무리로 나뉘어 논쟁이 분분하였다. 이 때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은 동인이었으나, 정사 황윤길과 의견을 같이하였고, 부사 김성일을 수행하였던 황진(黃進)도 분노를 참지 못하여 김성일을 꾸짖었지만, 당시는 동인(東人)의 세상이라, 황윤길의 보고를 묵살하고 김성일의 보고를 받아들여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조정(朝廷)의 입장을 정리하여 방비를 소홀히 하였다.

 

임진년(1692) 4, 일본이 30만 대군을 편성하여 침략을 개시하여 고니시가 인솔한 제1번대가 4 14일에 병선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오전 8시 일본 대포항(大浦項)을 출발하여 오후 5시경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은 적과 맞서 싸우다가 패하여 장렬히 전사하고, 이어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 또한 고군분투(孤軍奮鬪)하다가 전사하였다.

 

고니시의 부대는 그 뒤 거의 조선 관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중로(中路)를 택하여 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을 거쳐 상주에 이르러 여기에서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거느린 조선 관군을 격파하고 조령(鳥嶺)으로 향하였다. 이후 서울을 향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2개월도 채 못 되어 전 국토를 유린하였다.

이에 선조(宣祖)와 세자(世子)가 도성을 버리고 평양으로 피난하였는데 이때에 공이 종형 망암(望菴) 변이중(邉以中)과 함께 호종(扈從)하였다.

 

이후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에서 적을 전멸시켜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고,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크게 이기고, 진주 목사(晉州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진주성에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물리치고, 도처에서 유학자(儒學者), 승려, 농민이 주축이 된 의병이 일어나 지상전(地上戰)을 승리로 이끌어 조선군이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때에 김경수(金景壽)를 맹주(盟主)로 하여 김홍우(金弘宇)기효간(奇孝諫)이수일(李守一) 등이 장성(長城) 남문에서 창의(倡義)하여 격문을 띄우자, 고창(高敞)에서 좌랑 김홍우를 중심으로 하여 그의 두 아우 김광우김덕우와 박안동, 서홍도조여일 등 138명의 의사(義士)와 군량미 59석을 모아 호응하고, 문수사 승려 처한을 비롯하여 16명의 승군(僧軍)이 달려오고, 무장(戊長)에서 김성진, 김기수, 김란, 김경우, 김국서 등 190여 명이 군량미 68석을 모아 달려오고, 흥덕(興德)에서 서연을 중심으로 40명이 군량미 20석을 모아오고, 연기사의 승려 자혜를 비롯한 17명의 승군이 참여하여 고창 지역에서 458명의 의사(義士) 173석의 군량미, 마태(馬太) 21,  11,  5두를 모아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순창 현감(淳昌縣監) 김제민(金齊閔)을 의병장으로 삼아 출전하여 충청도 직산읍(稷山邑)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경기도 안성까지 북상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으며, 소사 전투, 진주성 전투 등 도처에서 타격을 가하였다.

 

이 무렵에 명()나라의 4만여 병력이 도착하여 조명 연합군(朝明聯合軍)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남쪽으로 패주하는 왜군을 추격하였다. 행주대첩에서 패한 왜군이 전열 정비를 위하여 화의를 제의하며, “명나라 황녀(皇女)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보낼 것, 조선반도의 남부 4도를 일본에게 떼어 줄 것, 조선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보낼 것.”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명()나라와 일본 간에 회담이 시작되어 휴전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무렵 난()에 대한 책임 문제로 당파(黨派) 간에 논쟁이 일어났는데, 공은 강직한 성품으로 이 사건과 관련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본가(本家)로 돌아가게 되었다.

 

3년여에 걸쳐 협상을 진행하였으나 결국 결렬되자, 정유년(1597)에 일본이 14만 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침략하였다. 군량미(軍糧米)를 확보하여 서울로 진격할 목적으로 곡창지대인 호남을 공략하여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구례를 거쳐 남원을 점령한 후에 좌우군(左右軍)으로 나누어 좌군(左軍)은 남쪽으로, 우군(右軍)은 충청도로 북진하였다.

 

그해 9, 좌군(左軍) 수천 명이 지난번 행주산성에서 화차(火車) 때문에 패배하고, 남문의병(南門義兵)에게 도처에서 시달린 수모를 설욕하고자 망암(望菴)이 화차를 제작한 곳이며 변씨의 마을인 장성읍(長城邑) 장안(長安) 벌로 들이닥쳐 약탈과 살륙(殺戮)을 벌여 코나 귀를 잘라 본국으로 보냈는데, 그중에도 변씨를 철저히 찾아내어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에 공()이 마침내 스스로 맹서하기를, “힘이 약하고 형세도 고단하니 집 뒤편 바위굴에 몸을 숨길만하다. 그러나 하나의 적()이라도 죽이지 않으면 어찌 나라를 구하겠는가?”하고, 가동(家僮) 수백 명을 거느리고 출전(出戰)하여 여러 날 동안 적을 무수히 죽여 전과(戰果)를 거두었다. 그러나 신식 조총(鳥銃)으로 무장한 적()을 상대하기에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뒷산 부엉바위로 밀리게 되었다. 이에 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왜적을 다 죽이지 못하고, 가동(家僮) 마저 잃었으니 구차하게 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하고, 마침내 바위 아래 강물에 몸을 던져 죽으니, 바로 9 18일로 무지개가 가로지르는 이적(異蹟)이 있기에 이르렀다.

 

공의 부인 함풍 성씨(咸豊成氏)는 감찰(監察) 기인(起仁)의 따님으로, 공을 따라 몸을 던지며 말하기를, “공이 나라를 위해 죽었거늘, 내 어찌 살기를 도모하겠는가?”하였다. 공의 자제 선무랑(宣務郞) 형윤(亨胤) 또한 이어 죽으려하자 자부(子婦) 장성서씨(長城徐氏)가 자신이 대신하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부자(父子)가 함께 죽으면 조상의 제사를 누가 받들며, 후사(後嗣)를 누구에게 부탁하겠습니까?”하고는 마침내 제기(祭器)를 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난리 후에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하류에서 숨진 서씨가 거슬러 올라와 시부모 곁에 있었으니, 그 또한 기이(奇異)한 일이다. 공의 묘는 장성읍(長城邑) 부흥리(扶興里) 육태동(六駄洞) 해좌(亥坐)에 있으며 성씨(成氏)와 합장하였다.

서부인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을 감동케 하였는지 3대독자 선무공(宣務公) 형윤(亨胤) 7(七子) 8(八女)를 두었다. 아들 중에 수익(受益)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호익(好益)은 호를 치재(耻齋)라하며 판관(判官)으로 성윤(聖胤)에게 출계(出系)하고, 순익(舜益)은 무과(武科) 부사과(副司果), 상익(相益)은 당시에 처사(處士)라 칭하였으며, 공익(恭益)은 참봉(參奉)으로 재종숙(再從叔) 태윤(泰胤)에게 출계(出系)하고, 하익(夏益)은 무과(武科)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만익(萬益)은 무과(武科) 부장(部將)이다. 딸들은 군수(郡守) 이유인(李有仁), 심견서(沈見瑞), 김광익(金光益), 안윤형(安允亨), 유위용(柳渭龍), 김광필(金光弼), 김기영(金起榮), 무과(武科) 만호(萬戶) 윤광형(尹光衡)에게 출가하였으며 군수의 처는 서씨(徐氏)가 낳았다.

 

 

[휴암공(鵂巖公)의 사상과 학문]

 

! 성대하도다. 공은 고을에서 손꼽히는 부호(富豪)이며, 바로 망암(望菴) 변이중(邊以中) 선생의 종제(從弟)이다. 평소 유업(儒業)에 종사하여 무비(武備 군비)가 무엇인 줄도 모르고 지내다가 졸지에 거창(巨創)한 일을 당하여 일편단심(一片丹心) 감연히 죽기 살기로 적의 칼끝에 맞서 마침내 웅어(熊魚)를 구분할 줄 알았으니, 그 충성과 그 정렬은 화숭(華嵩)과 겨룰만하고 일월(日月)과 다툴만하다.

 

임진년 10월 망암(望菴)이 전라도 소모사(全羅道召募使)에 제수되어 군병(軍兵), 전마(戰馬), 군기(軍器)를 모집하여 정비하고, 화차(火車)를 발명하였다. 이때 낙향해 있던 공이 사재(私財) 1만석(萬石)을 쾌척하여 망암을 도와 화차 3백량을 제작하였다. 이 화차 4십량(四十輛)을 행주산성(幸州山城) 전투에 지원하여 권율(權慄)장군으로 하여금 대첩을 거두게 하였으니, 공의 공() 역시 작다고는 못할 것이다. 어찌 위대하지 아니한가!

 

필자의 주() : 옛날 상머슴 1년 새경[私耕] 10석이다. 1석은 대략 오늘날 근로자 1개월 급료에 해당하니, 만석(萬石)의 가치를 헤아릴 수 있으리라. 오늘날 부귀영화를 도모하여 농단(壟斷)을 서슴지 않은 당국자(當局者)들은 이 사실을 새겨들어야 할 일이다.

 

갑오년(1894)에 선유(先儒)들이 쓴 삼강정려기(三綱旌閭記)가 있는데, 조종필(趙鐘弼)이 이렇게 기술하였다.

 

우리 성상(聖上) 즉위 29(1892). 태상(太常)이 증() 이조참의(吏曹參議) 변윤중(邉允中)과 그의 처 열부(烈婦) 성씨(成氏), 그의 자제 형윤(亨胤)의 처 효부(孝婦) 서씨(徐氏) 세 사람을 아뢰자, 특명으로 여문(閭門)에 정표(旌表)하고, 그 자손의 관작(官爵)을 회복케 하시니, 명을 받들어 분주히 장인(匠人)을 모으고 재목을 모아 문을 새로 지어 단청(丹靑)하였다. 이에 보는 자 감읍(感泣)하고, 듣는 자 귀를 쫑긋하며, 지나는 자 경례(敬禮)하리니, 저 누가 사람의 신하답고, 사람의 자식답고, 사람의 처답다.’고 아니 하겠는가? -중략-

 

일문 삼절(一門三節)은 세상에 드물게 있는 일이거늘, 서씨는 과연 효열(孝烈)을 겸하였음이여!

, 신하로는 충성을 바치고, 아들로는 효도를 돈독히 하고, 처로는 정렬(貞烈)을 바쳤음 이여!

삼강(三綱)이 힘입어 추락하지 아니하고, 오륜(五倫)이 따라서 다시 밝아졌도다. 어찌 변씨 일가의 아름다운 자취가 됨에 그칠 뿐이겠는가! -중략-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鵂巖千尺 휴암 높이 천척

龍湫萬丈 용추 깊이 만장

巖可移乎 바위가 옮겨가랴

淵可渴乎 연못이 마르랴

是巖是淵 이 바위와 이 연못은

宜是蹟之 의당 그의 자취이니

與之偕焉 더불어 같이 하리로다

 

기우만(奇宇萬)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정려(旌閭)란 풍성(風聲)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다. 변씨(邉氏)의 삼강(三綱)은 능히 3백년의 풍성을 수립하였으니, 정려가 없었지만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있고 없음이 더하거나 손상이 없거늘 빠르고 늦음이야 또한 어찌 흠이 되겠는가?

 

고종(高宗) 임진년(1892).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죽은 이를 기념하는 일에 여러 신하들이 이미 제문(祭文)을 짓고, 또한 숨겨져 밝혀지지 못한 이를 찾아 그 집안을 표창하였다.

 

이에 같은 날에 변공(邉公)과 그 부인(夫人) 성씨(成氏), 자부(子婦) 서씨(徐氏)를 아울러 마을에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목숨을 버린 시말(始末)과 지행(志行)과 세덕(世德)을 판서[侍郞] 조종필(趙鍾弼)이 기록하였으니, 보면 상세하게 알 것이다.

 

생각건대, 죽기로 자처하여 일편단심(一片丹心) 대사(大事)에 부응하였으니, 이편은 목숨을 구차히 살기위하여 자처한 것이 아니요. 오늘날 방백과 수령들은 100명의 적이 검을 지니고 국경을 침입하자, 몰래 종의 복장을 하고 초동(樵童) 목부(牧夫) 사이에 줄지어 도망하여 군주(君主)의 명()을 욕되게 하니, 저들은 죽기로 자처한 자들이 아니다.

 

공은 공직을 맡은 것도 아니고, 수령도 아니며, 벼슬을 그만두고 집안의 곡식을 먹었으니, 가솔(家率)을 거느리고 피난 한들 의리(義理)를 상하는 것이 아닌데도 나라를 위하여 적을 쳤다. 평소의 마음을 이루지 못한 채 숲 아래로 밀리게 되자, 구차하게 사는 것을 치욕(恥辱)으로 여겨 마침내 바위 아래 강물에 몸을 던져 죽어도 미련이 없었으니, 이에 공이 죽기로 자처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에 앞서 3장사(三壯士)가 있고, 옛적에 육수부(陸秀夫)가 있어 처한 바는 달랐을지라도 같은 바는 마음이다.

 

()더러 나라를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말한다면 당시를 알지 못한 자이다. 공은 나라를 위하여 죽고, 부인은 지아비를 위해 죽었으니, 공을 알고자 하는 자는 부인을 보면 가능할 것이다. 선무랑(宣務郞) 형윤(亨胤)이 부모를 이어 죽고자하니, 효자의 작정이라 막기 어려웠는데, 서부인(徐夫人)이 말하기를, ‘한때 목숨을 바쳐 효도하는 것이 어찌 백세(百世)에 후사(後嗣)를 보존하는 것과 같겠나이까?’하였다. 가령 부인이 죽지 않았다면 그 마음이 혹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어떻게 남편을 움직여 죽지 않게 하였겠는가? 그리하여 셋이 죽고 하나가 살게 되었다. 죽음에 마땅히 죽고 삶에 구차히 살지 아니하여 삶 가운데에서도 죽었으니, 또한 어찌 선무공(宣務公)의 마음을 헤아리겠는가?”

 

 

박봉빈(朴鳳彬)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족보(族譜)에 차서(次序)를 두기는 소씨(蘇氏)에서 비롯하였다. 거기에 말하기를, ‘우리 족보를 보면 효제(孝悌)의 마음이 구름처럼 솟는다.’하였는데, 오늘날 변씨 족보(邉氏族譜)를 보니, 충의(忠義)와 효열(孝烈)의 마음이 나도 모르게 척연(惕然)히 일어 감응한다.

 

삼가 살피건대, 변씨의 계파는 황주(黃州)에서 출발하여 고려(高麗) 시대에 훈벌(勳閥)로 찬란히 빛나고, 벼슬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우리 선조임금[穆陵] 성대[盛際]에 이르러 이조 참의공(吏曹參議公) 같은 이는 독행 구학(篤行劬學)으로 누차 천거[公剡]에 올랐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충성을 바쳐 호가(扈駕)하였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유재란(丁酉再亂)에 북쪽을 향하여 죽기로 맹세하고, 집 뒤 부엉바위[鵂巖]에 올라 깊은 못에 조용히 순절[就義]하고, 공의 부인 성씨(成氏), 공의 자부(子婦) 서씨(徐氏)가 제기(祭器)를 안고 종자(從姊) 이씨(李氏)와 함께 이어 순사(殉死)하였으니, 일문(一門)의 절의(絶義)가 얼마나 장한가.

 

금년 봄에 관찰사[道臣]가 그 사실을 아뢰자, ()께서 특별히 명하여 아울러 정문(旌門)을 세워 표장(表章)하였다.

 

, 무릇 사람의 신하 되고, 사람의 자식 되고, 사람의 처 된 자가 이 족보(族譜)를 본다면 누구인들 분발하여 흠모하지 않겠는가. 그러한즉, 이는 변문(邉門)의 의열(義烈)일 뿐 아니라, 실로 천하 만세(天下萬世)를 위하여 풍성(風聲)을 수립하고, 명교(名敎)를 붙듦이 대단하거늘, 어찌 명윤(明允)이 이른바, ‘종족(宗族)과 정친(情親)의 기쁨에 그칠 뿐이겠는가?”

 

구한말(舊韓末) 문장가 홍석희(洪錫熹)는 공의의 묘갈(墓碣)에 이렇게 기술하였다.

 

공은 종형인 망암(望菴)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우애가 동기(同氣)나 다름없었다. 천관(天官)이 정려[綽楔]의 명을 내리니, 슬픔과 영광이 유명(幽明)에 통하도다. 처와 자부를 아울러 열효(烈孝)로 정려하니. 일문삼강(一門三綱)이여! 표하여 천고(千古)에 높이도다. 천리(天理)가 어긋나지 아니하여 끝내 좋아 이토록 민몰(泯沒)되지 않았도다. 공의 의리(義理)를 분변하여 평상시에 강론하고, 경신(敬信)의 덕을 규얼(閨闑)에 무젖게 함이여! 해와 별처럼 밝게 세상을 교화하니, 아름답고 성대하도다.”

 

이에 살피건대,

공은 충효열(忠孝烈)을 몸으로 실천한 유가(儒家)임을 알 수 있다. 공의 종형 망암(望菴)은 율곡(栗谷)의 사상을 계승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정통으로서 성리학(性理學)을 경세적(經世的) 실천 학문으로 전환한 후기 실학(實學)과 가교(架橋) 역할을 한 학자로 예론(禮論)에도 밝은 유능한 전략가(戰略家)였다. 공이 망암과 의기투합하여 어려서부터 바른 길로 출발하여 힘껏 모색하여 연구하며, 밝게 판단하여 돈독히 행하며, 일에 응하고 사물을 접함에 중정(中正)으로 처리하며, 몸을 다잡아 자신에게 행하며, 거동에 예법을 준수하여 안으로는 가정에 효우(孝友)하고, 밖으로는 붕우(朋友)에게 인()()()을 행하니, 사문(斯文)이 의지하였다.

국난(國難)을 당하여 충절을 바쳐 순사(殉死)함에 부인이 순사하고, 공의 자부(子婦)가 순사하고, 공의 종자(從姊)가 순사하여 의열(義烈)이 세상에 빛나거니, “군자(君子)는 집을 나서지 않고도 가르침을 온 나라에 이룬다.고 하는 말이 새삼 생각난다.

                                 역문 : 우당 노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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