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나무위키 (유튜브) 최태성 1TV - 전설의 한능검 고급 (유튜브) 황현필 한국사 - 조선사
[한양조씨(영흥조씨) 시조단을 찾아서] 글쓴이 --- 정병경.
ㅡ별묘의 배경ㅡ
조상을 받드는 마음은 누구나 같다. 한결같이 후대로 이어가는 것은 의지意志가 있어야 한다. 조상에 대한 예의는 물론 정신력도 필요하다.
음력 7월 28일은 충무공 조영무趙英茂(1338~1414) 선생의 기일이다. 각처에 거주하는 한양조씨漢陽趙氏 후손이 제사를 모시기 위해 양주 별묘別廟에 모인다. 광주학연구소 연구위원 (정기성 소장. 김이동 부소장. 유선영 사무국장)도 행사에 참관하기로 했다.
조영무 선생은 조선초朝鮮初 태조 이성계의 개국을 도운 공신功臣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태종)을 도와 정사定社 1등 공신에 봉해진다. 제2차 왕자의 난 (일명 박포의 난 또는 방간의 난)때도 이방원을 도운 공으로 익대좌명 1등 공신에 봉하게 된다. 이방원의 지지파(조준, 하륜,조영무, 이숙번 등)에 속하는 일등 공신이다.
조영무 선생은 개국공신開國功臣 3등에 오르고 한산군漢山君에 이른다. 최종 계급은 영삼군부사領三軍府事(정1품)이다.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호號는 휴암休巖과 퇴촌退村으로 불린다. 자字는 건야乾也이다.
영삼군부사 때 신병으로 경기도 광주 퇴촌에 내려가게 된다. 77세 되는 해에 병세 악화로 생을 마감한다.
개국 때 일조를 한 조영무 선생은 공신으로서 세종조 때 태종의 묘정에 배향된다. 국가 안녕을 위해 나를 희생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성공은 실패가 따르기 때문이다. 조선 5백년 역사 중 최초 무관 출신이 정승에 오른 인물이다.
양주시청 인접 불곡산이 멀리 보인다. 동남향의 시조단始祖壇은 명당 터로 간주된다(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산238-18). 지령산 줄기에 자리한 2100여 평의 종중 토지는 바람이 적고 아늑한 느낌이다.
시조始祖인 조지수趙之壽의 묘소가 함경남도 영흥군에 있다. 제향이 어려워 종중에서 1990년 현 위치에 시조단始祖壇을 조성하게 된다. 양주시에서 향토 유적 제12호로 지정한다 (1986.4.15).
계유정란(1453년) 이후 한양조씨 충무공파가 양주에 터를 잡아 지금에 이른다.
우측에 휴암묘休巖廟와 좌측에는 숭모사崇慕祠를 배치하여 시조단이 조화롭다.
사당의 규모는 가로 6.9미터와 측면 3.7미터이다. 전통적인 한식 기와의 맞배지붕이다. 건물 면적과 크기는 보통 정도의 사당이다. 제례 참배 인원에 비해 협소한 느낌이 든다.
시조단 양쪽에는 문인석을 세우고 중앙에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우측 하단은 종중에 희사한 헌납비(제단건립추진임원록비.
판도공위토헌성록.단비헌성록)
가 줄지어 있다. 비문에는 종친들의 이름이 빽빽하다.
종회를 위해 희사한 종친 중 현재 생존해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전한다. 선친의 수고로움에 대해 종회의 후손들이 존경스럽게 여긴다.
시조단 바로 아래 3백여 평의 토지는 향후 주차장 부지다. 2021년에 매입했는데 장애자 주차 시설까지 곁들일 계획이다.
ㅡ업적ㅡ
조영무는 시조 조지수趙之壽의 玄孫이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별묘는 본래 150미터 서북쪽에 자리했는데 퇴락頹落해 1914년 현 위치로 이전하게 된다. 충무공(휴암) 조영무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2022년)로 608년째를 맞는다. 제향을 모시는 후손의 정성이 대단함을 발견한다.
충무공파忠武公派 22세인 현 종회 조사선(趙思善) 회장이 올해 미수(88세)를 맞는다. 지난해 장마에 휴암묘休巖廟(사당)의 곡장이 훼손되어 보수하느라 마음 고생을 했다.
지방 향토 문화재여서 종중의 재정으로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재실의 상태가 양호한 것은 종회에서 철저히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1949년에 곡장을 개축한 기록이 있다. 1973년에는 건물 전체를 중수重修하게 된다. 나무 기둥 주춧돌받침(원주)을 1미터 정도 높이로 올렸다. 풍우에 오래 견딜 수 있는 구조다.
본당인 사우祠宇 상단에는 최종건崔鍾健 선생이 쓴 영당기影堂記 현판을 걸었다. 삼문 밖으로는 휴암묘休巖廟현판이 보인다. 동편 언덕 휴암묘 유래비由來碑에서 한양조씨 역사의 흔적을 엿본다.
1989년(단기4322년) 기사己巳 11월, 후손들이 조상의 뜻을 기려 문중에서 시조단비始祖壇碑를 세우게 된다. 2대조 조인재趙麟才, 3대조 조순후趙珣厚, 4대조 한산백공漢山伯公 조세진趙世珍이다.
단비명은 성균관부관장 고부 이수원 (古阜 李壽源이 謹撰) 선생이 짓고, 한국서예협회학술이사 양택동(梁澤東 謹書)선생이 썼다. 2004년 단청 보수 후 사당의 면모를 잘 갖춘 별묘別廟이다.
광주학연구소 정기성鄭基成 소장과 한양조씨 양경공파 종중 회장인 조병노趙炳魯 교수의 주선으로 답사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지난 17일 광주학연구소 임원과 종회 임원(조사선趙思善 회장, 조태학趙泰鶴 사무국장 등)이 함께 면담했다. 제향祭享 때 문화재에 관해 논의하자는 의견이다.
ㅡ제향ㅡ
조영무 선생 영정 사진이 모습을 드러낸다. 후손들은 사시巳時에 사당에서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제사에 참여한다. 비를 맞으며 30여 명이 제복으로 단장하고 정성껏 제향을 올린다.
시조ㆍ 충무공 춘추향사는 년 5회다. 한식 향사享祀는 한식 다음 일요일이다.
충무공 기제사가 음력 7월 28일이다.
추석 향사는 추석 지난 다음 일요일에 지낸다.
음력 10월 초하루는 시조 및 2세ㆍ 3세ㆍ4세 추향제다.(가공인물???)
음력 10월15일은 충무공 조영무 선생의 향사일이다. 이천利川 효산사孝山祠에서 추향제를 올린다.
한양조씨 제향에 관해 문중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조상을 극진히 모신다는 것은 정신력과 정성이다.
제향을 마치고 종친과 함께 자리했다. 숭모사에서 광주학연구소 연구위원들과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다.
조용은趙容殷 25세 대종손과도 함께 종회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행사 때마다 일조를 하는 종부의 공도 포함이다.
한양조씨는 6개 공파로 나뉘며 대략 35만 명이다 (충무공파.검한성공파.충정공파.양절공파.양경공파.가천재공파). 첨단 시대로 바뀌어도 종회를 이어가기 위해 온고지신을 후대들이 새겨야 한다. 종가의 발전을 위해 종친간에 의견 나누는 모습이 화기애애하다.
ㅡ역사 재조명ㅡ
후손들의 바램이 있다. 조상의 공적을 기려야 한다는 이구동성에 귀를 기울인다.
문종文宗의 병세가 위중하자 김종서 황보인 정분에게 어린 단종을 보살펴 주기를 당부한다. 문종이 죽자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고명대신顧名大臣이 단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게 된다. 수양대군이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고명대신과 안평대군을 제거하기에 이른다.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이다.
충무공(휴암)의 장손 지평공持平公(趙完珪)은 고명대신 안평대군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게 된다. 수양대군은 고명대신과 안평대군에게 협력한 지평공을 강원도 회양으로 귀양보낸다. 1454년 8월19일에 안타깝게 사약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