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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한양조씨 대종파 지추공 500년 세거지 홍성!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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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번역문)

▣한양 조씨 종중 강회서(漢陽趙氏宗中講會序)

나는 병오년(1906) 봄에 ≪조씨세가(趙氏世家)≫ 2백질을 인쇄하여 경향 각지의 여러 문중에 분산하여 놓았고, 나머지 쌓아둔 것으로 아직 4,50질 남아있다. 무릇 인쇄한 본뜻은 장차 그것을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쌓아두었다가 사용할 것이다.

정미년(1907) 10월에 홍주(洪州) 노은동(魯隱洞) 선영에서 제사를 지낼 때 문중의 청년으로 하여금 경서를 암송하게 하거나 문장을 짓게 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를 뽑은 세 사람에게 ≪조씨세가≫ 한질씩 상으로 내렸다. 다음 달 화수회(花樹契) 자리에서 대종손 병한(炳漢)이 소리 높이 외치며 말하기를, “강회의 일은 후배들을 격려하는데 있어 이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영구한 방법과 책략을 도모하여 시행하면 좋을 듯하지만, 이와 같은 물건(≪조씨세가≫)이 있은 연후에 실제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병한이 먼저 1환을 상납하였고 여러분들께서 힘닿는 대로 재물을 기부하여 도움으로써 완성할 수 있길 바랐다. 우리 종중은 처음 시작한 성대한 일을 두고 모두가 승낙하여, 혹자는 1환을 내고 혹자는 반(半)환을 내서 이를 모두 모으면 수십 여 환이 될 것이다.

오호라! 이로부터 교육은 집집마다 배움이 흥성할 것이고 사람마다 진보할 것이니 우리 문중이 장차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또한 병한은 식견이 높고 원대하며 나이가 젊은데도 조정에 일찍 진출하였다. 진실로 우리 조 씨의 유능한 인재라고 말할 수 있으니 기쁘고도 즐거움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이에 그 경과를 기록하여 후세 자손에게 알리노니 힘쓰고 힘쓸지어다.

 

융희(隆熙) 2년(1908) 11월 일 문목공(文穆公: 趙克善) 8세손 종호(鍾灝) 삼가 씀

 

[규칙]

1. 종중 후배의 학업을 권장하기 위하여 강회(講會)를 설립할 것

2. 강회 날짜는 매년 10월 10일 거행하되 제사 후에 시행할 것

3. 25세 이하부터 7,8세에 이르기까지 자원하여 들어오면 허락하고 이들로 하여금 경서를 암송하거나 문장을 짓고 혹은 심오한 뜻을 변론하게 하여 통달한 사람을 확정하여 시상할 것

4. 족인 가운데 나이가 많고 학문과 예학에 밝은 선비를 뽑아 강장(講長)이라 칭하고 그로 하여금 경서 암송을 듣게 할 것

 

[연조기(捐助記: 기부자 명단 및 액수)]

 

대종손 병한(炳漢) 종하(鍾夏: 여춘(汝春)) 제원(悌元: 우형(友兄))

종파문장(宗派門長) 인교(仁敎) 종년(鍾䄵: 영서(永瑞)) 제원(濟元: 경숙(敬叔))

도유사(都有司) 종호(鍾灝) 종록(鍾祿: 선여(善汝)) 동원(東元)

종형(鍾衡: 응칠(應七)) 종식(鍾式) 승원(昇元)

두원(斗元: 경칠(敬七)) 종하(鍾夏: 덕오(德五)) 도원(道元: 덕여(德汝))

각각 10냥 종규(鍾奎) 봉원(鳳元)

종석(鍾錫: 경장(敬長)) 종하(鍾夏: 사흥(士興)) 병희(炳熙: 관일(寬一))

각각 7냥 종진(鍾辰: 경옥(敬玉)) 병규(炳奎)

범교(範敎: 흥백(興伯)) 종식(鍾軾: 성여(成汝)) 병기(炳夔: 명일(命一))

홍교(弘敎: 원모(遠模)) 종대(鍾大) 각각 5냥

창교(昌敎: 순일(順日)) 성원(性元: 명여(命汝))

춘교(春敎: 민항(敏恒)) 극원(克元: 여준(汝峻))

정교(正敎) 태원(泰元: 덕동(德東))

 

=한풍군파 대호군 18대손 김제공파 문학박사 조성환 번역=

 

●한양조씨의 8세 대종파(종손파)인 지추공(자헌대부 지중추부사.조증)파의 500년 세거지인 홍성(조선시대 홍주)은 충절과 역사의 고장이다.

이곳에 2004년 4월 17일 한양조씨 시조 중서공이하 5세조의 단소와 재실 세령재(世靈齋)가 들어섰으니 명실공히 한양조씨의 성지이며 마음의 고향이 된 곳이다.
서울에서 천안을 지나면 온천으로 유명한 온양과 도고를 지나고,사과로 이름난 예산을 30분 정도 지나면 충절과 역사의 고장인 홍성에 다다른다.

충남 서북부의 행정,교통,교육의 중심지인 홍성은 수많은 충신,열사를 배출한 유서깊은 고장이다.고려말 충신인 최영장군(사당과 생가가 지추공 묘소 뒷편에 있음)을 비롯하여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 선생(최영장군 사당 옆.성선생을 기리던 노은서원터에 노은단을 설립해 제향을 받들고 있으며,우암 송시열이 찬한 유허비가 있음)과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독립운동사상 일대 금자탑을 이룩한 김좌진 장군(동상이 홍성 관문에 있으며 갈산면에 생가와사당이 있음)과 민족시인이며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인 만해 한용운 선사(동상이 보령가는 길옆에 있으며 결성면에 생가와 사당이 있음)와 독립운동가 김복한,의병지도자 이광륜 등 국사에 빛나는 인물이 수 없이 많다.

우리 문중이 홍성과 인연을 맺은 것은 7세조 한풍군(자헌대부(정2품) 지중추원사 봉 한풍군.조완)께서 가선대부(종2품) 판 홍주목사로 부임하여 장남인 지추공을 홍성의 유지인 중직대부 전라도 감목관을 지낸 김화의 따님과 결혼시켰다.
홍북면 대인리 노은동 매산에 대종파의 세장지가 있는데 이곳은 매화낙지형(梅花落地.매화가 땅에 떨어져 씨앗을 뿌리기 때문에 자손의 숫자가 많다는 지형)으로 지추공의 묘소가 있으며 50여 미터 옆에 지추공의 장인 장모 묘소가 있다.
지추공의 장인은 아들이 없어서 지추공의 배우자인 정부인 영덕김씨 생존시까지만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으나 후손들이 500여년간 대대로 시제를 모시고 있다.

지추공은 5자를 두셨으니 노은 5파로 분파된다.지추공의 장자 승지공(윤선.도호부사 역임.좌승지 추증.종파)은 묘소를 실전하여 지추공의 묘소 계단 아래에 설단하였고,2자 예안공(윤찬.어모장군 행 예안현감.정산파) 묘소는 지추공 우백호에,3자 어모공(윤영.어모장군 행 용양위 부사직.평촌파)은 어모공 이하 묘소가 산재하여 어느분 묘소인지 구분이 안가서 4대설단하였으며,4자 면천공(윤상.중훈대부 행 면천군수.면천공파)묘소는 지추공묘소 우백호에 있으며,5자 사직공(윤수.오위 사직.당진파) 묘소는 지추공 묘소 계단 아래에 있었는데 자손들이 당진으로 이장하였다.
지추공의 묘 계단 아래에는 지추공의 재실[매산제각]이 있으며,재실에는 작년에 봉안한 지추공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좌청룡 언덕을 넘어가면 지추공의 2자파 정산파의 재실[숭모재]가 있다.

지추공의 조부이신 양절공의 부조묘 사당이 충남 청양군 비봉면 녹평리에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1970년대에 헐려졌다.양절공 부조묘 사당을 복원하려 하나 거금이 들어가기 때문에 검토중이며,현재 장손인 지추공 재실[매산제각]에서 음력 5월 19일에 부조묘 제향을 모신다.
8세 대종파인 지추공파는 홍성에서 서산,태안,예산,당진,청양,보령으로 세를 확장하였으며 현재는 대부분의 인구가 도시로 이주하듯이 우리 대종파도 본관지인 한양,즉 서울로 귀향(歸鄕)을 많이 하였다.

지추공파는 문목공 조극선을 비롯하여 충신,열사,독립운동가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사사(賜死) 또는 귀양을 간 분이 한명도 없이 무난하게 500여년을 이어오고 있으니 지추공의 음덕이라 아니할 수 없다.

홍성은 삼한시대 감계비리국,백제시대에는 고막부리,통일신라때는 운주라 하였고,고려때는 홍주로 지명을 바꾸어 주지사를 두었고,1371년 목으로 승격하여 5군 14현을 다스렸고,조선 고종 32년(1895)에는 홍주부를 두어 인근 22개군(평택-장항)을 관할하다가 1896년 홍주군으로 개편,1914년에 홍성군으로 개칭된이래 현재 2읍 9개면을 관할하고 있다.

홍성은 도명(道名)에서도 나타나 충청도를 청홍도(청주 홍주 앞글자를 따서 도명을 나타냄),공홍도(공주,홍주),홍청도(홍주,청주) 등으로 부르기도 했으니 도내에서 홍성의 비중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홍성은 옛부터 행정의 중심지로 그 시가지가 서울의 축소판이다.서울의 남대문격인 조양문이 시내 한복판에 우뚝하게 서 있고,광화문격인 홍주아문(홍주동헌의 외삼문)이 있으며,이 문을 지나면 현대식 건물인 홍성군청이 있는데(이 자리는 원래 내삼문이 있었는데 기미독립운동때 일본군이 철거함) 이는 일전에 철거한 구 조선총독부와 견줄 수 있다.군청건물 뒤에는 경복궁의 근정전격인 안회당(홍주목사가 집무하던 동헌)이 있는데 옛날의 수려하고 당당하던 모습은 간데 없을 뿐더러 홍성군청에 눌려 초라하기 짝이 없다.구 조선총독부를 철거하고 옛모습을 지키려고 하는 터에 떡하니 안회당을 가로막고 있는 홍성군청은 언제나 철거되어 이곳에 있던 내삼문을 복원할 수 있을는지....그나마 경회루 격인 여하정과 호수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울 뿐이다.

지난 1978년 강도 5의 지진으로 붕괴된적이 있는 홍주성곽은 백제시대때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개축되어 여러 전란을 겪었다.예로부터 풍수들이 홍성을 천고낙지(天鼓落地)형,하늘에서 천둥이 땅으로 떨어지는 지형이라 해서 그랬는지 병화가 자주 있었다.백제와 고려의 대전을 위시하여 16차에 걸친 왜구의 침공,최항의 반란,이몽학의 난,동학난,항일의병전이 그것이다.그같은 와중에서도 홍주성은 의연하였는데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였을때 홍성에 이주한 일본인이 1913년에 서문을 철훼하였고,1915년에는 북문을 철훼한 다음 동문이자 정문인 조양문 마져도 철훼하려고 하였으나 그때마다 홍성사람들의 강경한 반발이 있어 오늘에 이만큼 보존하게 되었다.그러나,성곽은 곳곳에서 헐리기 시작해 총연장 1,772미터 중 810미터만 남아 있다.

홍성고교 옆에 위치한 홍주의사총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항거한 의병들이 홍주성 탈환전에서 일본군과의 접전끝에 순국하여 묻힌 곳으로 유해 900기를 모셨다 하여 일칭 900의총이라 불리운다.

홍성읍에서 예산가도를 반리쯤 가다보면 금마천변에 굉장히 큰 무덤이 있다.전설에 의하면 고려말 충신이요 명장이었던 최영장군이 무예연습을 하다가 하루는 그의 가장 사랑하는 준마인 금마를 타고 말하기를"내가 활을 쏠터이니 화살이 떨어지기전에 달려가 내가 쏜 화살을 받도록하자,만일 네가 군령을 어길 때에는 군법에 의해 처단할 것이니 명심하라."하고 마상에 앉아 화살을 쏘고 달려가 보니 화살이 보이지 않았다.장군은 말에서 내려"군령을 어겼으니 마땅히 군법에 의해 처단하리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창을 들어 목을 치자 그때서야 화살이 날아왔다.장군은 창을맞고 쓰러진 애마를 붙들고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치면서 통곡하며 말을 묻으니 이것이 바로 금마총(金馬塚)이다.그후 금마총의 이름을 따서 그 옆에 흐르는 내를 금마천이라 하고 마을 또한 금마면이라 부른다.
이밖에 홍주향교,결성향교,결성동헌 등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충남 서북부의 용봉산은 용봉사와 보물355호로 지정된 입불로 유명하다.암석에 양각된 이 입불은 높이가 25척이며 그 기법이 정교하다.이 밖에도 백제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마애석불을 비롯한 많은 문화유적이 있다.용봉산은 산세가 용의 형상과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 하며,그 경치가 뛰어나 많은 등산객이 즐겨찾고 있다.

충남 서북부 지방엔"관청많은 홍성에서는 아는체 하지 말고,물산이 풍부한 예산에서는 옷 잘입은체 하지 말고,삽다리에서는 주먹자랑 하지 말고,광천에서는 돈자랑 하지 마라."는 말이 있다.그리고,팔자가 사납다고 하는 여인들이 푸념으로"광천독배(어항)로 시집못간 내팔자야."라는 말들을 하곤 한다.광천읍에는 육젓이라고 부르는 새우젓 시장이 유명하다.한 때는 이곳 광천에서 전국 새우젓의 50%를 충당할 정도로 많은 양을 도매하여 흥청댔으나 지금은 어항에 하천의 퇴적물이 쌓여 큰배가 들어오지 못하는 바람에 새우젓배가 인천,군산으로 든다.때문에 그 양은 줄었으나 새우젓을 담그는 기술만은 여전해 토굴속에서 익힌 새우젓의 맛과 빛깔이 일품이라 아직도 전국에서 광천새우젓을 최고로 쳐준다.그러니 광천독배로 시집가야 팔자가 핀 달밖에....

홍성 인근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수덕사 대웅전과 지구에서 나오는 우유라 하여 지구유(地球乳)라 별칭이 붙은 덕산온천,윤봉길의사 사당인 충의사,흥선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면암 최익현선생 묘,추사 김정희 고택과 무덤,천연기념물인 백송,전국에서 제일 큰 예당저수지,대천,만리포 해수욕장,대중가요로 더 많이 알려진 칠갑산 등 많은 명승지와 볼거리가 산재해 있다.                                               (당시 사무총장 조병헌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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