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漢陽人문화유적❀

■사돈 申相夏등 18인으로 부터 받은 소정 조성교(韶亭 趙性敎) 선생의 得孫 祝賀詩稿帖 [만농편(晩弄編)] 單帖■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8. 10.
반응형

■사돈 申相夏등 18인으로 부터 받은 소정 조성교(韶亭 趙性敎) 선생의 得孫(조한원趙漢元) 祝賀詩稿帖 [만농편(晩弄編)] 單帖■

경매번호  103-062

<내용> 사돈 등 18인으로 부터 받은 소정 조성교(韶亭 趙性敎) 선생의 得孫 祝賀詩稿帖 [만농편(晩弄編)] 單帖으로 外祖父 申相夏는 生朝와 百日韻 등 2점의 시고가 있다. 상태 양호하다.
<크기> 23×34cm
<참고> 인명록
(1) 조성교(趙性敎), 1818(순조 18)∼1876(고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유(聖惟). 형관(亨觀)의 아들로 형만(亨晩)에게 입양되었다. 1859년(철종 10) 증광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866년(고종 3)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동지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70년 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이듬해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 해 동지사의 정사로 재차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의정부좌참찬·대제학을 지내고 1873년 다시 예조판서로 임명되었다. 이 때 경무대(景武臺)에서 실시된 정시문과의 독권관(讀券官)이 되어 고종에게서 시관으로 공평무사하라는 명을 받들었다. 또한 예조판서 재직 중 최익현(崔益鉉)의 대원군 탄핵상소가 있자, 호조판서 김세균(金世均) 등과 연소(聯疏)하였다. 최익현의 상소 중 국왕에게 개혁을 건의하는 논의가 없다고 한 것은 자신들의 죄였으므로, 처벌을 바란다고 하여 월봉3등지전(越俸三等之典)에 처하여졌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어 당시 극심한 수재로 전주 등 각읍의 민호(民戶)가 피해가 많으므로, 각종 세납물의 상납 기일을 늦추어달라는 장계를 올렸다. 또 전라도에 면포가 부족하므로 병조의 각 군문(軍門)과 각 아문의 번포(番布)를 돈으로 대납할 수 있도록 하여달라는 장계를 올리는 등 선정을 위하여 힘썼다. 1876년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2) 신상하(申相夏), 1839~1906 : 외조부(外祖父)

개항기 의성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계순(繼舜). 호는 구암(矩庵). 생부는 신명호(申命祜), 모친은 김정진(金精進)의 딸 안동 김씨(安東 金氏), 계부는 신인협(申寅協), 계모는 이관발(李觀發)의 딸 영천 이씨(永川 李氏), 조부는 신면목(申冕穆), 증조부는 신만교(申萬敎)이다. 1839년(헌종 5) 5월 7일 경상도 의성현 팔지리(八旨里)[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할아버지 신면구(申冕九)[생부 신명호의 부친]에게서 수학하였으며, 15세 때 고문(古文)과 경전(經傳)을 두루 익혔다고 한다. 1853년(철종 4) 할아버지 신면구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장성하면 유치명(柳致明) 문하에서 공부하라는 유언을 신상하에게 남겼다. 23세가 되자 신상하는 유언대로 유치명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그 문하에서 당대의 명유 이돈우(李敦禹), 김도화(金道和)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1864년(고종 1)에는 봉두산(鳳頭山)[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일대] 남쪽에 강학을 위한 작은 정자를 지었는데, 이후 신상하는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연마하는 데 주력하게 된다. 1891년(고종 28)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이헌영(李永)은 『향약절목(鄕約節目)』을 편찬한 뒤, 도내 각 고을에 배포하며 향약 시행을 권장하였다. 이에 따라 의성 지역에서도 향약 시행을 위한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신상하가 향약장(鄕約長)을 맡았으며, 향교와 구호 서당(龜湖書堂)[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에 위치]에서는 직접 강학(講學)을 하였다. 1893년(고종 30) 인근 군위현(軍威縣)으로 이주하였다가, 1895년(고종 32)에는 풍기군(豊基郡)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1906년(광무 10) 3월 22일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집으로는 4권 2책의 『구암집(矩庵集)』이 전하는데, 1955년 아들 신성환(申成煥)이 간행한 것이다. 『구암집』에 수록되어 있는 「사문일수록(師門日受錄)」은 1861년(철종 12) 5월 7일부터, 18일까지 스승 유치명과 학문에 대해 문답한 것을 기록한 것이며, 「향약절목후(鄕約節目後)」는 1891년(고종 28) 의성에서 향약을 시행할 때 그 의의와 유래 등을 설명한 것이다. 또한 「용학강의(庸學講義)」는 구호 서당에서 강학할 때 여러 문생들과의 문답을 기록한 것으로, 이러한 글들은 성리학에 대한 신상하의 학문적 수준을 가늠케 해준다. 한편, 『구암집』에 수록된 아들 신성환의 유사(遺事)에 따르면, 신상하가 7대조 신우석(申禹錫)[1638~1695]부터 자신 대까지, 선조들의 행록(行錄)과 만뢰(挽誄)를 모아 『단구세적(丹邱世蹟)』 2책을 편찬했다고 한다. 『구암집』의 행장과 유사에는 팔지(八旨)[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에 묘소가 자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3) 신언구(申彦球),
(4) 김현승(金顯昇),
(5) 김한규(金翰圭). 
(6) 임진(林鎭),
(7) 신덕철(申德澈).
(8) 김현국(金顯局).
(9) 이중규(李仲珪).
(10) 정재주(鄭在周).
(11) 정권○(鄭權○).
(12) 송각상(宋覺相), 
(13) 성정영(成貞永).
(14) 한영교(韓瓔敎).
(15) 이민○(李敏○).
(16) 송수홍(宋守洪),
(17) 신상하(申相夏).
(18) 송영식(宋瓔植).
(19) 지창조(池昌朝).
(20) 박강준(朴綱準).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