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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春日山齋次 白鶴山房韻(登松石園)=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春日山齋次白鶴山房韻)-소정(韶亭)조성교(趙性敎)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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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大東詩選1918년 장지연이 우리나라의 역대 시가(詩歌) 모아 엮은 삼국 시대의 고가(古歌) 비롯하여 40여 명의 역대 문인들의 각체시(各體詩) 분류하여 편찬한12권 6책으로  시선집(詩選集)이다.

■조수삼(趙秀三)의 본관은 한양(漢陽, 한풍군파). 초명은 경유(景濰). 자는 지원(芝園)·자익(子翼), 호는 추재(秋齋)·경원(經畹). 아버지는 가선대부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부부총관(漢城府左尹兼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된 조원문(趙元文)이다. 여항시인 조경렴(趙景濂)의 동생이고, 조선 말기의 화원(畫員)인 조중묵(趙重默)은 그의 손자이다.

 

구자균(具滋均)은 『한국평민문학사(韓國平民文學史)』에서 조수삼의 신분은 서리(胥吏)일 것이라고 추정하였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대개 역과중인(譯科中人)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수삼은 신분의 제한으로 1844년(헌종 10) 8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핵심적인 인물로 활동했으며 정이조(丁彛祚)·이단전(李亶佃)·강진(姜溍)·조희룡(趙熙龍)·김낙서(金洛瑞)·장혼(張混)·박윤묵(朴允默) 등 여항시인과 사귀었다.

 

그리고 김정희(金正喜)·김명희(金命喜)·조인영(趙寅永)·조만영(趙萬永)·한치원(韓致元)·남상교(南尙敎)·이만용(李晩用) 등 당시의 쟁쟁한 사대부 문인과도 친하게 지냈다. 특히, 조인영·조만영은 풍양 조씨 세도정치의 중추인물이다. 이들은 조수삼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관직에 나간 이력이 없는 조수삼의 삶은 여행으로 특징지어 진다. 1789년(정조 13) 이성원(李性源, 1725-1790)을 따라 처음으로 중국에 간 이래로 여섯 차례나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이때에 당대 중국의 일류문사인 오숭량(吳崇梁)·유희해(劉喜海)·강련(江漣)·주문한(朱文翰) 등과 사귀었다. 그리고 전국에 발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국내 각지를 빠짐없이 여행하며 많은 시를 남겼다.

 

조수삼의 시는 대개 전기·후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전기에서는 생활주변이나 자연을 소재로 하여 대상과의 조화를 추구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후기로 올수록 사회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 많아진다. 또 장편시도 눈에 뜨이게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김정희는 두보(杜甫)의 시풍과 근접한다고 평하고 있다.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서구도올(西寇檮杌)」, 관북지방을 여행하면서 당시의 민중의 비참한 생활상을 묘파한 「북행백절(北行百絶)」 은 조수삼 시가 지니는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밖에도 「석고가(石鼓歌)」·「억석행(憶昔行)」·「병치행(病齒行)」 등도 장편거작으로 인구에 회자되던 작품이다.

 

그리고 당시의 도시하층민들의 생기발랄한 모습을 산문으로 쓰고 칠언절구의 시를 덧붙인 형식으로 되어 있는 「추재기이(秋齋紀異)」, 중국 주변의 여러 나라에 대한 짧은 산문과 시의 결합으로 구성된 「외이죽지사(外夷竹枝詞)」 등은 한문학사상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저서로는 『추재집』 8권 4책이 있다.

▣春日山齋次 白鶴山房韻(송석원에 올라 (登松石園))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

☞북쪽 개울 맑은 그늘 저녁에 오르니,

꽃잎 질펀히 날려 푸른 이끼에 점 찍혔네.

☞인간 세상 봄빛이 어디에서 끝나는가,

온 세상의 영웅이 곧 이 잔에 있거늘.

☞온갖 곳이 희미하여 안개 노을이 쌓였는데,

한 세상 쓸쓸히 석양이 지는구나.

☞수양버들이 물을 쓸고 꾀꼬리는 우는데,

동호의 옛 낚시터가 꿈속에 있네.

◐北澗淸陰晩始開。북간청음만시개。

◑飛花狼藉點蒼苔。비화낭자점창태。

◐人間春色終何處。인간춘색종하처。

◑海內英雄卽此杯。해내영웅즉차배。

◐萬境依迷烟霞積。만경의미연하적。

◑一生怊悵夕陽來。일생초창석양래。

◐垂楊拂水幽鶯囀。수양불수유앵전。

◑夢在東湖舊釣臺。몽재동호구조대。

(大東詩選 卷9)

이 시는 조수삼(趙秀三)이 1786년(정조10)에 결성했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옛터를 찾아 자신의 감회를 읊은 칠언율시로 회(灰)운이다. 봄날을 맞아 송석원에 올라서 호기로운 기분과 한가롭게 지내고 싶은 소망을 드러냈다. 수련은 송석원의 봄 풍경이다. 인왕산 기슭의 송석원 옛터에 저녁에 오르니 개울의 맑은 그늘에 꽃잎이 날려 이끼 위에 떨어진다고 했다. 위항시인들이 모여 시를 겨루던 곳을 방문한 감회다. 함련은 봄날의 취흥이다. 온 세상에는 봄빛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세상의 영웅호걸이라도 한 잔 술의 기분만 하겠느냐고 호방한 기분을 드러내었다. 세도정권의 중심인물이었던 김좌근의 아들로 승승장구했던 이력으로 보아 이런 호기를 부렸을 만하다. 경련은 앞날의 어두움이다. 저녁이 되자 사방이 안개와 노을로 희미해지고 쓸쓸하게 석양이 진다고 하여, 날이 저물어 감을 뜻할 뿐 아니라 자신의 처지도 암울해 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미련은 자신의 소망이다. 송석원 옛터에는 수양버들이 물에 늘어지고 꾀꼬리가 우는데 꿈결인양 동호의 옛 낚시터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한가로운 전원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다.

■조성교(趙性敎,1818,순조18∼1876,고종13, 고사공파)는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자는 성유(聖惟)이고 호는 소정(韶亭)이며 본관은 한양이다. 1859년(철종10) 문과에 급제하여, 1861년 홍문록에 들고, 이듬해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1863년 부사과, 1865년(고종2) 공조참의, 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우승지, 대사성, 이조참의, 1867년 좌승지, 병조참판, 도승지, 이조참판이 되고, 동지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도승지, 대사헌, 1870년 형조판서, 제학, 예조판서, 이듬해 좌참찬, 1872년 대제학을 지내고, 이듬해 예조판서, 대사헌, 전라감사를 역임하고, 1876년 대사헌이 되었다.

[대제학·예조판서 조성교(趙性敎)/공조판서 조종필(趙鍾弼) 납골묘]

 

▣봄날 산의 서재에서 백학산방의 운에 따라 (春日山齋次白鶴山房韻)-소정(韶亭)조성교(趙性敎,1818,순조18∼1876,고종13)

☞공관은 맑기가 처사의 집 같은데

☞야채와 고사리로 생활이 담박하네.

☞바위 문은 적적하여 오는 사람 없고

☞봄날 온갖 꽃이 피어남을 깨우치네.

◐公舘淸如處士家。공관청여처사가。

◑野蔬山蕨澹生涯。야소산궐담생애。

◐巖扉寂寂無人到。암비적적무인도。

◑領得三春萬樹花。영득삼춘만수화。

(大東詩選 卷10)

이 시는 봄날 산방에서 지은 칠언절구로 가(佳)운과 마(麻)운을 통운했다. 산에 지은 서재가 공관인 듯한데 거기서 적적히 근무하며 봄날의 느낌을 적었다. 기구는 공관의 소개다. 공관이 산재인 관계로 마치 처사의 집처럼 맑다고 하여 공관인데도 불구하고 찾는 사람도 없고 살림도 가난하여 처사처럼 깨끗하다는 것이다. 승구는 산재의 생활이다. 야채와 고사리로 끼니를 이을 만큼 그 생활 형편이 쪼들리고 있다. 이런 형편을 담박하다고 표현했다. 전구는 고적함이다. 산속에 지은 서재인지라 입구인 바위 문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하루 종일 적적할 뿐이다. 결구는 봄꽃의 감상이다. 시인은 긴 봄날에 적적하게 홀로 앉아 온갖 꽃들을 감상하며 그 의미를 음미하고 있다. 봄날의 은총으로 꽃들이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것은 마치 임금의 은택으로 벼슬아치들이 영화를 누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승지를 지낼 만큼 성실성을 인정받았을 것이므로 남다른 충성심을 지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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