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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행사자료❀

■임진왜란과 계음공(溪陰公)■●문사(文辭)와 절행(節行)으로 나라를 빛냈으며 효도는 감물(感物)에 이르렀으니 호걸지사(豪傑志士)라!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1. 12. 30.

■임진왜란과 계음공(溪陰公)■

문사(文辭) 절행(節行)으로 나라를 빛냈으며

효도는 감물(感物)에 이르렀으니 호걸지사(豪傑志士)!

 

[조정근(趙丁根, 26세, 충정공-참의공파)]

 

계음공(溪陰公, 휘 彭年, 13세, 1549~1612)은 충정공(忠靖公, 휘 仁沃, 5세)의 8대손으로 절효공(節孝公, 휘 賚, 6세), 사직공(司直公, 휘 孝生, 7세)에 이어 1549년 전남 강진군 옴천면 황곡에서 아버지 세걸(世傑)공과 어머니 김해김씨 사이에서 출생하셨다.

 

자는 경로(景老), 호는 계음(溪陰)으로 1573년 소과에 이어 1576년 대과에 입격하여 홍문관(弘文館) 박사(博士),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 여산(礪山) 군수 등을 역임하고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셨다. 수많은 저작(著作)을 남기셨고 강진 주봉서원에 배향되셨다.

 

부모의 병환을 보살핌에 주야로 지극정성을 다하니 꿩이 주방까지 날아 들어와 부모님께 보양(補陽)하였으며 병환이 위독하자 단지주혈(斷指注血)하여 생명을 연장케 하였다. 부모 상(喪)을 당하여 묘소에 여막(廬幕)을 짓고 조석으로 곡(哭)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1586년 승문원 검교(檢校)에 부임하여 임진왜란이 급박함에 도성방어책을 상소하였고, 동년 4월 중종(中宗) 능을 참예(參詣)하고 돌아와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가 파천(播遷)하였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재촉하여 평양(平壤)에 이르러 예조(禮曺)를 거쳐 검교(檢校)에 제수되었다. 명나라 구원병을 요청할 때 대제학 윤근수(尹根壽)가 진문(秦文)을 지어 공께 보이니 수구(數句)를 바로잡아주었다.

 

형조 정랑(正郞)에 올라 김경공이 왕은(王恩)을 믿고 상인을 장살(杖殺)하고는 노복이 죽였다고 핑계함에 공이 분개하여 형조 판서 정곤수(鄭崑壽)에게 “국가의 운명이 탕진되어 명령을 이행치 않으니 법에 따라 처치(處置)해야 인심이 평온할 것이며 이 또한 국난회복의 기회가 될 것이다.”라고 항언하여 올바른 시형(施刑)을 하였고 임금이 자주 서천과 평양을 행행(行幸)하면서 명나라 장수를 예접할 때 공은 통례관(通禮官)을 대리하면서 진퇴(進退)에 법도가 있고 응답에 막힘이 없으니 임금이 기뻐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까다로워 그들의 뜻을 거스르고 기를 꺾으면 비록 높은 자리에 있는 자라도 그들의 군영정(軍營庭)으로 끌려갔으나 공께서 응접을 잘 처리하고 동작이 기민하니 군문 형개(荊芥)가 유성룡(柳成龍)에게 “동국은 마땅히 쫓아갈 수 없도다. 조모(趙某) 같은 분이 아직도 말직에 체류하여 있다니”라고 하였다.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백의종군할 때 등용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왕명을 받고 이순신의 거점인 남해에 어사로 내려가 장군으로서 역량을 살핀 후 보고 하였으며 이 복명자료가 백의종군을 면하는데 기여하였다.

 

어렵고 험난한 시대에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원하였으나 시인(時人)들과 문사(文士)는 무략(武略)에 능하지 못하여 시용(施用)치 못하니 이를 한탄하였다. 난(難)이 점차 평정됨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금성(나주) 제독관(提督官)으로 1594년 귀향하였다. 1598년 여산군수로 부임하여 “새로운 정치를 크게 세워 소생케 하고 난을 겪은 후라 백성들이 법을 알지 못하니 이를 바로잡을 위엄이 마땅하다.”라며 지방 호족 수삼족의 부정을 다스리다가 죄상조서(罪狀調書)를 던져버리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1604년 호종공신(扈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주육(酒肉)을 금하고 내방취침(內房就寢)을 폐지하고 3년 복상을 마치셨으며 1612년 1월 24일 돌아가시니 승정원 좌승지로 추증되셨다.

 

일찍이 학문에 힘써 문사(文辭)와 절행(節行)으로 나라를 빛냈으며 효도는 감물(感物)에까지 이르렀으니 호걸지사(豪傑志士)라 할 것이다. 왕사(王事)에 충성하여 기선(羈線)을 짊어지고 임금을 호종(扈從)하여 간과(干戈)를 무릅쓰고 만사에 위험을 돌보지 않고 충의에 분발하여 사람들을 감격케 하였다. 그러나 쌓은 경륜을 다 펴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은 아쉬운 일이다.

 

공이 의주에 있을 때 옷이 낡아 임금이 염려하여 필백(疋帛, 비단옷감)을 하사하니 받지 않고 “내 한 몸 추운 것은 미미한 일이외다. 원컨대 남쪽에서 싸우는 장수들의 옷을 만드소서.”라 함에 임금이 정철(鄭澈)에게 일러 “경은 일찍이 청백(淸白)과 충의(忠義)로서 자부하더니 모(某, 공의 이름을 일컬음)공은 자못 경에게 버금가도다.”라 하였다.

 

생전에 남기신 유고 중 촌초헌부(寸草軒賦)는 공의 효성을, 용만술희부(龍灣述懷賦)는 공의 충성을 알 수 있게 한다.

<<참고문헌>>宣祖實錄

 

[계음집(溪陰集(조팽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 조팽년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 조팽년(趙彭年)의 시문집. 62. 목활자본. 1899년 후손 창하(昌河면형(冕衡) 등이 편집, 박정양(朴定陽)의 후원으로 간행하였다. 권두에 기우만(奇宇萬)의 서문과 권말에 면형의 후서가 있다.

 

이 문집은 권13에 시 272, 15, 4·5에 논 2, 2, 1, 1, () 3, () 1, 잡저 1, 6은 부록으로 행장 1, 묘표 1, 호성공신도감정문(扈聖功臣都監呈文) 2, 전지(傳旨) 1, 주봉서원축문(胄峰書院祝文) 1, 금릉창의록부(金陵倡義錄附)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의 용만술회 龍灣述懷남귀부 南歸賦에는 임진왜란 당시 대가(大駕)를 호종하여 의주까지 갔을 때 느낀 참혹한 정경과 비참한 피란생활이 잘 묘사되어 있고, 뒤에 서울로 돌아올 때의 상황과 보고 듣고 느낀 감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강개한 우국충정이 담겨 있다.

 

상이통제 上李統制는 이순신(李舜臣)에게 올린 시로, 나라의 어려움을 당하여 왜적을 무찌른 공로를 찬양하고 더욱 힘써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장량(張良)과 제갈량(諸葛亮) 등 옛날 중국의 명장들을 제목으로 삼아 지은 시에는 그들의 충성심을 간접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그 밖에도 역수비가부 易水悲歌賦라든가 범순인론구채확론 范純仁論救蔡確論에서는 나라를 위하는 단심을 비유하여 묘사하고, 인간의 허물을 용서하는 데도 공사가 있어 공에서는 사가 개입될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잡저인 독서강요에서는 학문을 하는 방법은 독서에 있고, 독서의 근본은 경()을 위주로 하고 심지를 확고히 가지는 데 있음을 밝히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上李統制舜臣(상이통제순신)

상리통제:이통제(이순신)에게 올리다

喪亂孤殘兩可傷。對公便覺意差強。

상란고잔량가상。대공편각의차강。

친상과 국란 두 일이 슬프나

만나니 문득 든든함을 알았네

傍船彩鷁隨風舞。橫海長鯨見劒藏。

방선채익수풍무。횡해장경견검장。

뱃머리 깃발 바람에 춤추고

바다의 왜적 칼머리 보고 숨네

塞上水軍飛俊鶻。腰間羽箭射天狼。

새상수군비준골。요간우전사천랑。

변경의 수군 매가 날듯

허리춤 화살 천랑성을 쏘겠네

從今要續浯溪頌。莫笑書生迂且狂。

종금요속오계송。막소서생우차광。

이제 긴요한 것은 나라 구한 송덕비니

서생이 우활하고 미쳤다고 웃지를 마소

 

<전남 강진군향토문화유산 제5호로 지정된 주봉서원 안내문>

 

<주봉서원입구에서 함께한 조경철 계음공 19대종손>

<주봉서원현판>

<주봉서원재실>

 

 

<주봉서원>

 

<주봉사 외삼문 : 계음공(유문집)과 덕림공(유문집) 배향>

 

<주봉서원과 사당 주봉사>

 

<주봉사>

 

<사당 주봉사>

 

<주봉사현판>

 

 

<사당안의 계음공위패>

 

<사당안의 덕림공위패>

 

 

 

 

 

 

 

 

 

<주봉서원에서 바라다 보이는 조경철 종손댁>

<도로에서 바라본 주봉산과 서원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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