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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행사자료❀

▣강진군 옴천면 주봉서원 춘향제례 봉행▣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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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효공 3자 사직공파◑

▣강진군 옴천면 주봉서원 춘향제례 봉행▣

김영미 기자

|승인 2011.05.06 10:20

지난 4월 22일 (陰3.20) 옴천면 영산리에 위치한 주봉서원에서 선조의 은덕을 기리는 제례가 봉행됐다.

 

이날 주봉서원 제실에서 봉행된 제는 관내 유림, 한양조씨문중 종손, 친인척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됐다.

 

제례는 이정희씨의 집례로 초헌관 원용호 전문화원장, 아헌관 관대유 도암면 유도회지부장, 종헌관 백종일 옴천면장 등이 제관을 맡아 진행됐다.

 

초헌관이 향을 피우고 폐백을 올리는 전폐례를 시작으로 계음 조팽년, 덕립 조규운 위패 앞에 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는 의식인 초헌례가 있었다.

 

이어 아헌례, 종헌례, 분헌례, 음복례 등의 의식을 거쳐 축문을 불사라 재를 땅에 묻는 망요례 등의 전통방식으로 제가 치러졌다.

 

■임진왜란과 계음공(溪陰公)■

●문사(文辭)와 절행(節行)으로 나라를 빛냈으며 효도는 감물(感物)에 이르렀으니 호걸지사(豪傑志士)라!

[조정근(趙丁根, 26세, 충정공-참의공파)]

 

계음공(溪陰公, 휘 彭年, 13세, 1549~1612)은 충정공(忠靖公, 휘 仁沃, 5세)의 8대손으로 절효공(節孝公, 휘 賚, 6세), 사직공(司直公, 휘 孝生, 7세)에 이어 1549년 전남 강진군 옴천면 황곡에서 아버지 세걸(世傑)공과 어머니 김해김씨 사이에서 출생하셨다.

 

자는 경로(景老), 호는 계음(溪陰)으로 1573년 소과에 이어 1576년 대과에 입격하여 홍문관(弘文館) 박사(博士),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 여산(礪山) 군수 등을 역임하고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셨다. 수많은 저작(著作)을 남기셨고 강진 주봉서원에 배향되셨다.

 

부모의 병환을 보살핌에 주야로 지극정성을 다하니 꿩이 주방까지 날아 들어와 부모님께 보양(補陽)하였으며 병환이 위독하자 단지주혈(斷指注血)하여 생명을 연장케 하였다. 부모 상(喪)을 당하여 묘소에 여막(廬幕)을 짓고 조석으로 곡(哭)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1586년 승문원 검교(檢校)에 부임하여 임진왜란이 급박함에 도성방어책을 상소하였고, 동년 4월 중종(中宗) 능을 참예(參詣)하고 돌아와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가 파천(播遷)하였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재촉하여 평양(平壤)에 이르러 예조(禮曺)를 거쳐 검교(檢校)에 제수되었다. 명나라 구원병을 요청할 때 대제학 윤근수(尹根壽)가 진문(秦文)을 지어 공께 보이니 수구(數句)를 바로잡아주었다.

 

형조 정랑(正郞)에 올라 김경공이 왕은(王恩)을 믿고 상인을 장살(杖殺)하고는 노복이 죽였다고 핑계함에 공이 분개하여 형조 판서 정곤수(鄭崑壽)에게 “국가의 운명이 탕진되어 명령을 이행치 않으니 법에 따라 처치(處置)해야 인심이 평온할 것이며 이 또한 국난회복의 기회가 될 것이다.”라고 항언하여 올바른 시형(施刑)을 하였고 임금이 자주 서천과 평양을 행행(行幸)하면서 명나라 장수를 예접할 때 공은 통례관(通禮官)을 대리하면서 진퇴(進退)에 법도가 있고 응답에 막힘이 없으니 임금이 기뻐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까다로워 그들의 뜻을 거스르고 기를 꺾으면 비록 높은 자리에 있는 자라도 그들의 군영정(軍營庭)으로 끌려갔으나 공께서 응접을 잘 처리하고 동작이 기민하니 군문 형개(荊芥)가 유성룡(柳成龍)에게 “동국은 마땅히 쫓아갈 수 없도다. 조모(趙某) 같은 분이 아직도 말직에 체류하여 있다니”라고 하였다.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백의종군할 때 등용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왕명을 받고 이순신의 거점인 남해에 어사로 내려가 장군으로서 역량을 살핀 후 보고 하였으며 이 복명자료가 백의종군을 면하는데 기여하였다.

 

어렵고 험난한 시대에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원하였으나 시인(時人)들과 문사(文士)는 무략(武略)에 능하지 못하여 시용(施用)치 못하니 이를 한탄하였다. 난(難)이 점차 평정됨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금성(나주) 제독관(提督官)으로 1594년 귀향하였다. 1598년 여산군수로 부임하여 “새로운 정치를 크게 세워 소생케 하고 난을 겪은 후라 백성들이 법을 알지 못하니 이를 바로잡을 위엄이 마땅하다.”라며 지방 호족 수삼족의 부정을 다스리다가 죄상조서(罪狀調書)를 던져버리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1604년 호종공신(扈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주육(酒肉)을 금하고 내방취침(內房就寢)을 폐지하고 3년 복상을 마치셨으며 1612년 1월 24일 돌아가시니 승정원 좌승지로 추증되셨다.

 

일찍이 학문에 힘써 문사(文辭)와 절행(節行)으로 나라를 빛냈으며 효도는 감물(感物)에까지 이르렀으니 호걸지사(豪傑志士)라 할 것이다. 왕사(王事)에 충성하여 기선(羈線)을 짊어지고 임금을 호종(扈從)하여 간과(干戈)를 무릅쓰고 만사에 위험을 돌보지 않고 충의에 분발하여 사람들을 감격케 하였다. 그러나 쌓은 경륜을 다 펴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은 아쉬운 일이다.

 

공이 의주에 있을 때 옷이 낡아 임금이 염려하여 필백(疋帛, 비단옷감)을 하사하니 받지 않고 “내 한 몸 추운 것은 미미한 일이외다. 원컨대 남쪽에서 싸우는 장수들의 옷을 만드소서.”라 함에 임금이 정철(鄭澈)에게 일러 “경은 일찍이 청백(淸白)과 충의(忠義)로서 자부하더니 모(某, 공의 이름을 일컬음)공은 자못 경에게 버금가도다.”라 하였다.

 

생전에 남기신 유고 중 촌초헌부(寸草軒賦)는 공의 효성을, 용만술희부(龍灣述懷賦)는 공의 충성을 알 수 있게 한다.

<<참고문헌>>宣祖實錄

 

[계음집(溪陰集(조팽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 조팽년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 조팽년(趙彭年)의 시문집. 6권 2책. 목활자본. 1899년 후손 창하(昌河)·면형(冕衡) 등이 편집, 박정양(朴定陽)의 후원으로 간행하였다. 권두에 기우만(奇宇萬)의 서문과 권말에 면형의 후서가 있다.

 

이 문집은 권1∼3에 시 272수, 부 15편, 권4·5에 논 2편, 전 2편, 표 1편, 문 1편, 서(書) 3편, 기(記) 1편, 잡저 1편, 권6은 부록으로 행장 1편, 묘표 1편, 호성공신도감정문(扈聖功臣都監呈文) 2편, 전지(傳旨) 1편, 주봉서원축문(胄峰書院祝文) 1편, 금릉창의록부(金陵倡義錄附)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의 〈용만술회 龍灣述懷〉와 〈남귀부 南歸賦〉에는 임진왜란 당시 대가(大駕)를 호종하여 의주까지 갔을 때 느낀 참혹한 정경과 비참한 피란생활이 잘 묘사되어 있고, 뒤에 서울로 돌아올 때의 상황과 보고 듣고 느낀 감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강개한 우국충정이 담겨 있다.

 

〈상이통제 上李統制〉는 이순신(李舜臣)에게 올린 시로, 나라의 어려움을 당하여 왜적을 무찌른 공로를 찬양하고 더욱 힘써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장량(張良)과 제갈량(諸葛亮) 등 옛날 중국의 명장들을 제목으로 삼아 지은 시에는 그들의 충성심을 간접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그 밖에도 〈역수비가부 易水悲歌賦〉라든가 〈범순인론구채확론 范純仁論救蔡確論〉에서는 나라를 위하는 단심을 비유하여 묘사하고, 인간의 허물을 용서하는 데도 공사가 있어 공에서는 사가 개입될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잡저인 〈독서강요〉에서는 학문을 하는 방법은 독서에 있고, 독서의 근본은 경(敬)을 위주로 하고 심지를 확고히 가지는 데 있음을 밝히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上李統制舜臣(상이통제순신)

상리통제:이통제(이순신)에게 올리다

 

喪亂孤殘兩可傷。對公便覺意差強。

상란고잔량가상。대공편각의차강。

친상과 국란 두 일이 슬프나

만나니 문득 든든함을 알았네

 

傍船彩鷁隨風舞。橫海長鯨見劒藏。

방선채익수풍무。횡해장경견검장。

뱃머리 깃발 바람에 춤추고

바다의 왜적 칼머리 보고 숨네

 

塞上水軍飛俊鶻。腰間羽箭射天狼。

새상수군비준골。요간우전사천랑。

변경의 수군 매가 날듯

허리춤 화살 천랑성을 쏘겠네

 

從今要續浯溪頌。莫笑書生迂且狂。

종금요속오계송。막소서생우차광。

이제 긴요한 것은 나라 구한 송덕비니

서생이 우활하고 미쳤다고 웃지를 마소

 

 

<전남 강진군향토문화유산 제5호로 지정된 주봉서원 안내문>

 

<주봉서원입구에서 함께한 조경철 계음공 19대종손>

[차동차 사고로 인하여 운명 하셨음!]

<주봉서원현판>

<주봉서원강당>

 

 

<주봉서원>

 

<주봉사 외삼문 : 계음공(유문집)과 덕림공(유문집) 배향>

 

<주봉서원과 사당 주봉사>

 

<주봉사>

 

<사당 주봉사>

 

<주봉사현판>

 

 

<사당안의 계음공위패>

 

<사당안의 덕림공위패>

 

 

 

 

 

 

 

 

 

<주봉서원에서 바라다 보이는 조경철 종손댁>

<도로에서 바라본 주봉산과 서원전경>

 

최초 서봉서원 건립, 작천 박산으로 옮겨

운영 관리 어려움 폐허위기 서원 많아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에게 조언을 한 조팽년을 향사하는 주봉서원 모습. 옴천면 기좌리에 있다.

 

1. 선현을 기리는 서원

 

서원(書院)은 역사 교과서에 나온다. 향사적 기능을 겸하면서 사설 교육기관으로 등장했다. 관학인 향교와 함께 지방교육의 중추기관이었다. 출발은 그러했으나, 후대로 갈수록 교육기능을 수행한 곳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우(祠宇)처럼 유명 인물에 제사지내는 곳이 대다수였다. 문중들이 자기 문중의 위세를 떨치기 위해, 당파들이 자기 당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자기 문중이나 자기 당파의 유력 인물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건축물은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과, 선현의 뜻을 받들어 교육을 실시하는 강당과, 원생들이 숙식하는 동재⋅서재, 문집이나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 등으로 구성된다. 위치도 풍수와 지세를 감안해서 정해진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서원은 건축사적인 의미와 정치세력의 동향 외에 지역 인물의 탐방공간이 되기에 충분하다.

 

서원이 처음 등장한 때는 16세기이다. 1542년(중종 37)에 풍기 군수 주세붕이 경상도 순흥에 안향을 모시기 위해 지은 백운동서원이 최초이다. 이황의 요청으로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 되니 이를 최초의 사액서원이라고 한다.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려는 사림파의 문화운동이어서 호응이 좋아 전국에 확산되었다. 호남 최초의 서원은 1564년(명종 19)에 김굉필을 배향하는 옥천서원이 순천에 설립되었고, 최초의 사액서원은 1601년에 사액을 받은 고경명을 배향하는 광주의 포충사이다.

 

강진 최초의 서원은 옥천서원보다 26년 뒤진 1590년(선조 23년)에 건립된 서봉서원(瑞峯書院)이다. 서봉서원은 서기산 아래 강진읍 서산리 월곡마을에 이후백을 배향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이후백은 문과 급제 후 대사헌, 대제학,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사림파의 주요 멤버로 활약했다. 창건 후 그의 제자로 당대 최고 문인이었던 백광훈과 최경창이 추배되었다. 전라도 유생이 청액을 요청했으나 관철되지 못했다.

 

강진에서 유일하게 청액 상소가 올라간 서원이다. 장의 1인, 유사 2인, 원생 15인이 있었다고 하니(「금릉읍지」), 교육기능도 발휘하고 있었다. 강진 최고의 서원이었는데, 대원군의 훼철령으로 철거되고 말았다. 이후 유림들이 이후백의 외가 마을인 작천면 박산으로 옮겨 복설하고서 이름을 박산서원이라고 했다.

그 다음 서원이 1624년에 건립된 주봉서원(冑峰書院)이다. 주봉서원은 옴천면 기좌리 주봉 아래에 조팽년을 향사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조팽년은 임진왜란 때에 국왕을 호위하거나 이순신에게 조언하는 등의 공을 세웠다. 창건 후 효행과 학덕이 높은 그의 현손 조덕림이 추배되었다. 훼철 이후 영산리로 옮겨 복설되었다. 1686년에는 군동면 벽송리 금천에 금호사(錦湖祠)가 창건되었다(벽송에 있어 벽송사라고도 했다).

▲조경철종손이 농사용경운지를 운전하다 사고로 숨져, 10년전에 고인이 되였다!

여기에는 호남에 많은 제자를 두었던 사림파 인물 최부, 학문과 효성이 높았던 최극충, 임진왜란 때에 군량을 모집하여 전장에 보낸 김응정, 후금 정벌에 참여하여 포로가 되어서도 기개를 굽히지 않은 오신남이 배향되어 있다. 1백여년 후 군동면 덕천리로 옮기고서 이름을 덕호사라고 했다. 덕천리는 오씨들의 세거지이다. 1789년에는 성전면 월남리 월강마을에 월강사(月岡祠)가 창건되었다. 여기에는 문과 급제 후 내외관직을 역임했으며 사림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던 이빈,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도세자의 총애를 받았던 이의경이 배향되었다. 훼철 이후 복설되지 않고 있다.

 

2. 서원은 강진의 인물 창고

 

4개에 불과하던 서원이 19세기에 접어들자 급격하게 늘어나게 된다. 1800년에 군동면 풍동리에 이순신 외에 명랑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에 큰 공을 세운 강진 출신의 무장 김억추를 배향하는 금강사(錦江祠)가 창건되었다. 훼철 이후 강진읍 영파리로 옮겨 복설되었다. 1803년에는 중국 주자, 충청도 출신 송시열, 광주 출신 박광일이 배향된 남강사(南康祠)가 창건되었다. 처음에는 기사환국 때에 제주 유배가던 중 송시열이 머물며 강학했던 것을 기리기 위해 백련사에 자리를 잡았다가 현재의 강진읍 교촌리로 옮겨졌다.

 

훼철 이후 남강서원으로 복설되었으며, 남당포 앞 바다에 떠밀려 온 주자갈필목판(지방유형문화재 제114호)이 보관되어 있다. 1804년에는 강진에 살고 있는 경주 이씨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대인 고려말 학자 이제현, 선조대의 명신 이항복을 배향하기 위해 구곡사(龜谷祠)를 창건했다.

 

1820년에는 성전면 수양리 동령마을에 수암서원(秀巖書院)이 창건되었다. 여기에는 세종 때의 명신 이선제, 학식이 높은 이조원, 전라 관찰사를 역임한 이중호, 동인의 영수로 활약하다 기축옥사 때에 목숨을 읽은 이발과 그의 동생 이길 등 광산 이씨들이 배향되어 있다. 이들은 광주에서 나고 자란 동인계 핵심인사들이다. 따라서 서인계 영수 송시열을 기리는 남강사가 창건되자, 그에 맞불을 놓기 위해 등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할 수 있다. 역시 1820년에는 작천면 군자리 행정에 행정사(杏亭祠)가 창건되었다.

 

행정사의 제향 홀기. 제사 순서를 적어 놓은 문서이다.

 

여기에는 이후백 등과 성리학을 연구한 김량, 이괄의 난 때에 반란군을 진압하다 순절한 김호광과 그의 동생 김신광이 배향되어 있다. 김량을 흠모하여 원근의 학자들이 운집하여 대촌을 이루니 마을 이름이 군자리로 불리었다고 한다. 훼철 이후 복설되면서 군자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823년에는 군동면 화산리에 정유재란 때에 순절한 윤신, 윤치경, 운이경, 윤익경, 윤동철 등 해남 윤씨 5인을 기리는 화암사(花岩祠)가 창건되었다.

 

윤신은 아들 윤동철, 조카 윤치경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성삼재 밑에서 왜군과 싸우다 함께 순절했다. 1858년에는 옴천면 척동 상곡에 문옹, 문빈, 문구연 등 남평 문씨를 배향하는 상곡사(上谷祠)가 창건되었다. 문옹은 세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고위직에 올랐고 도학으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문빈과 문구연은 각각 문옹의 아들이고 손자이다. 특히 문구연은 양팽손, 조광조 등과 학문을 토론한 사림파 인물이다. 1860년에는 대구면 계율리에 조정통, 조응룡, 조한용, 조몽린 등 창녕 조씨 4인을 배향하는 대계사(大鷄祠)가 창건되었다. 조정통은 고려 말기에 문하시중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이 조응룡과 조한룡이다.

 

3. 남설, 훼철, 복설, 방치의 반복

 

이처럼 강진 땅에는 1590년에 처음 등장한 서원이 1860년에는 12개로 불어났다. 이는 한마디로 정상을 이탈한 남설이었다. 이런 남설 현상은 전국적이었다. 당파간 정쟁이 그것을 부추겼다. 그래서 그 지역 출신도 아닌 사람들이 서원에 배향되었다. 강진 서인⋅노론계 사람들이 남강사를 창건하여 송시열을 배향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또한 문중간 경쟁도 한 몫을 했다.

 

강진 최초의 서원인 서봉서원(현재 박산서원)에 향사된 청련 이후백의 문집.

 

그래서 사회적으로 별 유명하지도 않은데, 또는 원래 그 지역 출신도 아닌데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하여 그 조상을 서원에 배향했다. 그러다 보니 인물을 숭상하던 숭고한 정신에서 출발한 서원이 어느덧 국가재정 잠식, 당론 조성, 대민 작폐 등의 폐단을 자아내는 원흉이 되고 말았다. 문제가 아닐 수 없어 숙종 때에는 금설령이 내려졌고, 영조 때에는 철폐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마침내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잡자마자 양반들의 반발을 무릎 쓰고 1864년에 훼철령을 내려 전국 1천 5백개 가운데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했다. 그 가운데 호남 지방에는 광주의 포충사, 장성의 필암서원, 정읍의 무성서원 등 3개만 남게 되었다. 이때 강진에 있던 서원도 모두 철폐되었다.

 

대원군이 1873년에 10년만에 권좌에서 물러나자 복설 움직임이 나돌다가, 조선의 운명이 위태로운 19세기말에서 일제식민 지배 초기인 20세기 초에 많은 서원들이 복설되었다. 그와 함께 새로운 서원들도 적지 않게 신설되었다. 이런 현상은 유교국가 가운데 우리나라가 가장 강하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강진도 마찬가지이다. 강진 서원들도 대부분 복설되었는데, 그대로 복설된 것이 있는가 하면 복설될 때 장소와 이름이 바뀐 것도 있다. 하지만 월강사처럼 지금까지 복설되지 못한 것도 있다. 그리고 김천일을 향사하는 금산원, 최사전을 향사는 강덕사, 김희조를 향사는 둔덕사, 마천목을 향사하는 충정사, 박기현을 향사하는 용전사, 조종근을 향사하는 남전사, 김조를 향사하는 관암사, 고영정을 향사하는 장춘사 등이 새로이 창건되었다. 이리하여 전통시대 강진을 대표하는 인물은 거의 모두 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형편이다.

 

문제는 이렇게 다시 불어난 서원이 방치되어 폐허의 위기에 몰려 있다는 것이다. 한 때는 위세의 상징이었지만, 이제 귀신나게 퇴락한 곳도 많다. 다들 떠나 고향을 지키는 사람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기 살기로 문중 일만 하는 시대가 퇴색해가는 세태도 무시할 수 없다. 이제 고물이 되어가고 있는 이 서원을 어떻게 재활용 할 것인가가 숙제이다. 지역민들에게 다양한 용도로 개방해야 한다. 금이냐 옥이냐로 쥐고 있으면 곧 다 죽는다. 공동생활이나 교육문화 공간 등으로 되돌려야 한다. 국민의 혈세 지원을 받는 곳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래야 인물을 숭상했던 우리의 미풍양속이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를 수 있다.

<김덕진/ 광주교대 교수>

출처 : 강진일보(http://www.nsori.com)

,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조팽년, 주봉서원

주봉서원(胄峰書院):강진군 향토문화유산 제5호(2004.11.01)

전남 강진군 옴천면 장강로 1785-3 (영산리 381-16)

 

주봉서원(胄峰書院)은 옴천면 영산리 계원마을에 있다. 조선시대 암행어사를 지낸 정치가요 문장가인 계음(溪陰) 조팽년(趙彭年, 1549∼1612) 선생과 정조 때 성균관 교수를 지냈던 덕림(德林) 조규운(趙奎運, 1725∼1800) 선생을 제향하고 있다.

 

주봉서원은 1624년(인조 2년) 도내 유림들이 주봉산 아래에 있는 기좌리 좌척마을에 세웠었으나 1868년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유림들의 발의로 1965년 다시 터전을 마련하게 됐다.

 

옴천면 황곡에서 태어난 조팽년 선생은 1593년 임진왜란 때 암행어사로 지방을 순찰하던 중 상소를 올려 억울한 누명을 쓴 이순신을 장군으로 다시 등용케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조팽년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런 저런 모함에 휩싸여 백의종군하고 있을 때 임금의 명을 받고 암행어사가 되어 전장으로 내려갔다. 선생의 임무는 이순신을 제거해야 할지 아니면 중용해야 할지 최종 결정을 하기 위해 현장을 탐문해서 그 결과를 조정에 올리는 것이었다.

 

선생은 이순신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남해로 몰래 내려와 여러 정황을 통해 이순신의 인품과 장군으로서의 역량을 조사했다.

공은 이순신의 됨됨이를 제대로 살핀 후 “능력이 크고 일을 잘 처리하는 재간과 국량(局量)이 있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평생 이순신을 아끼고 지원했다는 서애 유성룡도 공의 보고를 근거로 임금께 이순신의 중용을 청했고 이순신은 다시 전장의 지도자가 되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주역을 담당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조팽년공이 없었다면 성웅 이순신 장군도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훌륭한 분이라 할 수 있다.

- 웹사이트-

주봉서원 안내판.

주봉서원 앞에 세워진 석비 3기.

溪陰集卷之一

14次韓景洪

夜久忽愁生寒風遠樹聲島夷方點驁何日見哀鳴

21辭賜紬有感

微臣當此天傾日未有絲毫可紀功聖主忽念寒透骨輕紈一匹出行宮

臣拜受之思結草物非爲美美人貽一身寒凍猶微事願作南征將士衣

27上李統制 舜臣

喪亂孤殘兩可傷對公便覺意差強傍船彩鷁隨風舞橫海長鯨見劒藏塞上水軍飛俊鶻腰間羽箭射天狼從今要續浯溪頌莫笑書生迂且狂

주봉서원.

주봉서원 현판.

훼손된 마루.

주봉사(胄峰祠) 삼문.

주봉사(胄峰祠)

주봉서원 입구에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2017.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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