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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행사자료❀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이 신정(양력설)을 쇠는 이유 : 실학사상, 동학 천도교과 신간회 영향!◑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2. 4.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이 신정(양력설)을 쇠는 이유 : 실학사상, 동학 천도교과 신간회 영향!◑

■영양군 주곡마을의 양력설과 조헌영의 신간회 활동

 

-조헌영의 생애와 삶(1)

[탁암 심국보_진주시교구]

 

●조헌영은 경북 영양군 일원면 주곡리에서 1900년 태어났다. 어릴 때는 의병대장이던 할아버지 승기와아버지 인석으로부터 사서삼경과 한학을 익히고 대구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북고)를 다닌 뒤 일본 와세다대한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7년 2월 서울에서 신간회가 창립되고, 신간회 지회가 일본 동경에서 1927년 5월 설립되었다. 이때 조헌영은 일본 동경의 신간회 초대 지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귀국하여 1927년 11월 18일 천도교에 입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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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기(1836-1913)는 1895년 을미사변(민비가 왜놈들에게 살해된 사건)때 의병을 일으킨 독립유공자.

그 아들은 조인석(1879-1950)으로 조헌영의 부친이다. 조인석은 1900년 경 서울에 올라가 개화가 대세임을 목격하고 신학문을 가르치는 영진의숙을 설립했다. 단발, 양력사용, 제사간소화, 국한문혼용을 권장했고, 주실마을 전체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1950년 6.25때 이십 대의 젊은이들이

“이 영감 아들 어디에 있어?”하며 자신을 피팍하는 등 인륜이 무너지는 것을 개탄하여 자결하였다.

※지훈문학관 해설; 조용헌, 《한국의 명가명택》, ‘경북영양의 시인 조지훈 종택’

조헌영의 천도교 입교는 중앙종리원에서 1927년 11월 18일이었다. 당시 신간회는 천도교와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하고 있었고 조헌영은 신간회 활동을 통해 천도교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을 것이며, 일본에서 귀국하자 천도교에 입교했을 것이다. 조헌영의 천도교관련 기록은 입교기록 외에 더 이상 찾지 못했다. 다만 조헌영은 신간회 활동을 같이했고, 1945년 광복 이후 국회의원으로 함께 활동하였던 이종린과 매우 친밀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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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린(1883-1950) 서산출신. 성균관박사. 한말 ‘대한협회월보’ ‘대한민보’ 주필. 1907년5월 권동진·오세창을 통해 천도교입교. 3.1운동때 ‘조선독립신문’ 발행으로 3년간 옥고. 천도교회월보 개벽사 사장 등 역임. 신간회 참여. 1940년 교령. 제헌의원·제2대국회의원. 6.25때 납북 중 환원. 이종린의 손자되는 이동초 선생의 증언

 

• 영양군 일원면 주곡리의 양력설

 

주목할 것은 조헌영이 천도교에 입교한 다음해인 포덕69년(1928)부터 그의 고향 동네에서에서는 양력설을 쇠기 시작한 것이다. 양력설은 고종 때인 1896년 1월 1일부터 시행했다. 조선은 양력을 수용했지만, 설날은 그대로 음력으로 이어졌다.

190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양력과세를 강요했고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양력설을 신정이라 하여 명절로 여겼다. 1985년부터 음력설은 ‘민속의 날’로 지정되어 하루를 쉬다가 1989년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설날’로 명칭이 바뀌며 신정·구정 논란은 사라졌다.

 

천도교에서 양력을 사용한 것은 1909년부터다. 그 전 해(1908년) 5월 발표된 종령6호(1908.5.1.)는 청수봉전, 양력사용 등 지금의 천도교의식을 잘 보여준다.

 

“청수는 봉전하고 등은 밝히되, 분향 과일 등 제수는 폐지. 상오11시 성화회를 시작하여 12시에 마치며 하오 1시에 다과회를 연다. 천일은 양력 4월5일, 지일은 양력 3월10과 양력6월2일로 하되 금년(1908)은 음력으로, 명년(1909년)부터 양력날짜로 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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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백과사전, 천도교종령집(조기주편저,1983) 89쪽, 천도교회종령존안(이동초편저,2005) 137쪽

 

지일은 처음에는 수운대신사와 해월신사의 기일로 했으나, 지금은 해월신사께서 도통전수를 받은 8월14일을 지일로 기념하고 있다. 지난 여름 영양군 일원면 주곡리의 ‘지훈문학관’을 방문했다. ‘지훈문학관’은 조헌영 아들인 시인 조지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지훈문학관에서는 주실마을의 야학과 근대화 유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실마을이 선택한 근대의 길: 조병희가 독립협회에서 활동할 무렵 서울의 개화 바람을 보면서 고향의 청년들을 서울로 데리고 와서 신문명을 접하게 하고 개화시켰는데 이 개화 청년들의 다음 세대들은 도쿄, 베이징,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이런 개화운동의 중심지는 마을의 월록서당이었다. 1900년에는 단발을 시행하였으며, 1910년에는 종부의 개가를 허용하였고, 1911년에는 노비를 해방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1928년 신간회 운동이 한창이던 무렵에는 양력을 사용하였다.

 

주실마을의 야학: 주실마을은 인재교육, 특히 신교육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1920년대 이후 영진의숙, 배영학당, 동진학교 등의 야학을 열어 인재를 키웠다.”

 

영진의숙: 의병장 만주 조승기의 장남이자 종손인 인석이 호은종택에 문을 연 학교. 이곳에서 마을 청소년들에게 신문을 가르치기 위해 서적을 구입하고 강사를 초빙하였다.

 

배영학당: 한말 이래 월록서당에 조석기가 세운 학교로 당시 청년운동, 노동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1927년 조선농민사로부터 모범 약학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동진학교: 부녀자를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곳으로 가사를 짓고 무궁화 열세 송이로 우리나라를 수놓기도 하였다.

 

배영학당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본다. 1926년 1월에 영양군 일월면 청년회가 결성되어 면내 11개 동리마다 농민야학이 설치되어 ‘무궁한 자미’를 느끼는 교육이 진행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주실 마을의 배영학당이 얼마나 잘 운영되었던지, 1927년에는 조선농민사로부터 모범야학으로 표창될 정도였다. 《조선농민》 제3권 11호(1927년 12월호)를 보면 '제1회 농촌교육자표창'이라는 제목 아래 함흥·의주·간천·영양 지역의 농민 야학 상황을 실은 글이 있는데, 영양 주실의 '일월면 주곡 노동야학'도 여기에 소개되어 있다. 이 노동야학이 바로 배영학당으로, 남자 생도가 31명이요 지도자로는 조석기·조보영·조종호·조종석·조응성 등 5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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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양 주실마을: 유교문화권 전통 마을②》,안동대학교 안동문화구연구소 지음, 예문서원, 2001.

 

양희 現지훈문학관장과 조동호 이장에게 주곡리 마을의 양력설의 유래를 물었더니, 잘 모르고 있었다. 다만 조동호 이장은 윗대에서부터 양력설을 쇠니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주실마을의 양력설 쇠는 것은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다.

 

주실마을의 조씨 가문이 양력설을 쇠기 시작한 것은 1928년. 이중과세 폐지론이 일고 음력설이 '민속의 날' 로 지정되는 등 설날이 도마에 오를 때도 이들은 신정을 고집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1900년대 초 실학사상으로 무장한 조상이 양력 1월 1일이 '진짜 새해'라고 생각했지요. 서양의 문물을 익힌 개화파 어르신들이 합리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결정을 따르고 있는 겁니다.”

동태(52.한국섬유개발연구원 섬유정보팀장)씨의 설명이다.

 

양력설을 쇠는 게 일제의 영향을 받은 것 아니냐는 물음에는 “항일단체인 신간회에서 활동한 어른이 많았고, 주실마을 주민 모두가 창씨개명을 거부했는데 어떻게 일제의 정책에 동조했다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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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2006.1.2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양력설을 많이 쇠지 않지만 주실마을 한양 조씨 집안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양력설을 쇤다. ‘1928년 신간회 운동이 한창이던 무렵에는 양력을 사용’ 했다는 지훈문학관의 설명대로, 양력설을 쇠는 것이 일제의 영향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양력사용과 신간회 활동을 연관하는 것으로 보아 조헌영 등의 영향력으로 양력설을 쇠게 되었을 것이다. 다만, 지훈문학관의 설명에는 양력설 사용을 천도교의 양력 사용과는 연결하지는 않고 있다. 조헌영이 천도교에 입교했지만 고향 주실마을에 제대로 거주하지 않았고 주실마을은 전통있는 유학적 마을이기에 천도교가 이 동네에서 뿌리내리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동진학교: 부녀자를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곳으로 가사를 짓고 무궁화 열세 송이로 우리나라를 수놓기도 하였다.”는 구절도, 또 지훈문학관에 전시된 13주 염주도 눈에 들었다. 열셋이라는 숫자가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의 13을 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조헌영의 아들 시인 조지훈의 동학천도교에 대한 깊은 관심도 단순한 것으로 여길 수 없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조헌영은 신간회 활동이후 한의약부활을 위해 노력했고 조선어학회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해방이후 경북영양에서 제헌의원, 제2대의원에 당선된 정치인이기도 하였다. 6.25때 납북되어 북한에서는 동의학 발전에 기여하였고 1988년 환원하였다.

 

우리 사회는 납북된 분들에 대해 인색하다. 충남 서산에서 제헌의원·2대의원으로 당선되었다가 납북 중 환원한 이종린(1883-1950), 경남 창녕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었던 구중회(1898-?) 이 분들은 모두 천도교인이었지만 납북되면서 많은 활동이 여태껏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해도 된다.

 

조헌영 역시 두 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신간회활동, 조선어학회 활동, 한의학부활동 등 우리 근대사에 남긴 공로가 지대하지만 납북되었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시인 조지훈의 아버지 정도로만 검색되며 한의학계에서나 조금 기억될 뿐이다. 조헌영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 조헌영의 신간회 활동

조헌영의 천도교 입교와 신간회 활동은 매우 밀접하다. 신간회는 1920년대~30년대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두 흐름을 하나로 묶어 항일운동의 전선을 강화했다. 민주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 세력의 민족협동전선이 신간회였다. 1927년 2월 15일부터 1931년 5월 16일까지 존속한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2만~4만 명에 이른 일제하 가장 규모가 컸던 반일사회운동단체였다.

 

신간회 동경지회09)는 1927년 5월 7일 조헌영, 전진한, 강소천, 한림 등이 중심이 되어 와세다대 스콧트홀에서 조직되었다. 서울지회가 설립된 것이 7월 10일이니 신간회 동경지회의 설립이 최초의 지회설립이라 할 수 있다. 동경지회 초대지회장은 조헌영이었다.

동경지회에 이어 교토, 오사카, 나고야에 지회가 결성되었다. 신간회 동경지회는 1927년 11월 경 회원이 약 250명이었으며, 1929년 말에는 350명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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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회 동경지회 활동은 《지역과 역사》 제18집(2006.4)에서 ‘산수 이종률의 민족운동과 혁명론’을 주로 참고하였다.

 

동경지회 창립에 관여한 인물들은 학우회계통 8명, 협동조합운동사계열 6명,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계열 5명, 신흥과학연구회 관련 7명, 뒤에 조선공산당사건에 관련 (중복) 5명의 계열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런데 일제는 신간회 동경지회의 설립 당시 주도권을 전진한을 중심으로 한 협동조합계열에서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 정도로 동경지회설립에는 사회주의계열의 활동가들보다 민족주의계열 인물들의 활동이 더 활발했음을 뜻한다. 동경지회의 활동은 대부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조선인단체협의회 등 다른 단체와 공동으로 전개했다. 1927년 12월 18일 신간회 동경지회 제2회 대회는 다음과 같은 활동을 보고하고 있다.

 

1927년 5월 창립된 신간회 동경지회는 1927년 그해 주요사업으로 반동단체 ‘민중회’ 박멸운동, 震災당시 학살동포 추도회, 조선총독부 폭압정치 반대운동, 조선공산당사건 암흑공판 반대운동, 작고반제티 사형처분반대운동, 중국시찰단 조선대표 파견운동, 국치일 기념운동, 러시아혁명 기념운동, 재만조선인 추방반대 조선인대회소집, 서신전서西神田署고문사건항의 등을 주요사업으로 하였다. 동경지회의 이러한 사업들은 당시 국내의 신간회지회에서 추진했던 각종 사업과 상당 정도 차이를 갖는 것이었다.

 

조헌영은 귀국하여 1927년 7월 신간회 전국 순회강연에 참가한다. 경기도에는 조병옥과 안재홍, 평안도에는 이병헌과 안재홍, 함경도에는 이종린과 이병헌, 강원도에는 이병헌과 조헌영이 파견되어 순회 강연하였다. 그리고 충청 호남지역에는 이승복, 인천에는 정칠성과 박호진, 경상도에는 안재홍과 조병옥이 파견되었다. 이때 조헌영은 강릉 안동 김천에서의 강연내용으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조헌영은 1929년 7월21일 천도교기념회관에서 열린 신간회 경성지회 임시대회에서 서기장을 맡게 된다. 이때 경성지회 임시 집행부는 의장 이종린, 부의장 김교영, 서기장 조헌영, 서기 정종명, 김섬, 사찰 김세진 외 18명이었고, 회의 결과 조병옥이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신간회는

“①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구한다.

②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③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는

강령을 내건 합법 단체로 전국적으로 지회 조직,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정치·사회 단체로 성장하였고, 강연회 등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지원,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지원, 여성 자매단체인 근우회 결성 등 많은 성과를 내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내부 이념의 대립으로 1931년 5월 해산한다.

 

신간회 활동에는 조헌영뿐만 아니라 그 아우 조준영도 역시 신간회 영양지회 총무로 일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헌영의 아들 조지훈은 1943년 중매로 신간회 영주지회장 김성규의 장녀 김위남(행정명:김난희)과 결혼하였는데, 집안끼리 잘 아는 사이여서 당시의 관습대로 사진만 보고 혼인을 하게 되었다. 조지훈의 장인 김성규는 영주군 문수면 무섬마을 출신으로 신간회지회장과 청년동맹집행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일경에 체포돼 8개월간 옥고를 치른 바 있는 독립운동가였다.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된 뒤 조헌영은 한의학 연구에 몰두하여 동양의약사東洋醫藥社를 개설했다. 이때의 연구로 근대한의학을 개척하여 현재 우리나라 한의학의 기초를 수립했다는 말을 듣는다. 조헌영이 한의학에 정통하게 된 것은 일본 유학시절 병에 걸린 친구를 치료한 결과라고 하며, 조헌영의 한의학 연구는 어릴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익힌 결과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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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과사회》제18집:

 

한편 조선 국내에서의 신간회 활동은 주로 생활․생존권 수호운동, 언론출판 결사의 자유, 각종 억압 법률의 철폐, 단결권, 파업권, 웅변대회, 연설회, 야학의 운영, 미신타파, 문맹퇴치, 흑의(黑衣)착용, 조혼금지, 매춘과 풍기문제, 호세(戶稅)인하, 수리조합설치반대 등을 주요사업으로 채택했다. 이처럼 동경지회는 국내보다 정치적 여건이 나았기 때문에 정치투쟁의 성격이 짙은 사업들을 실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11) 이동초, 《천도교민족운동의 새로운 이해》

(2010,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72쪽

12) 이동초, 《천도교중앙대교당50년이야기》

(2008,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314-315쪽

 

조준영은 광복 직후 대한임시정부 환영준비위원장을 맡았고, 문경 경찰서장을 시작으로 관계에 투신, 경북 도경국장까지 승진했다가 1950년 4월 사임하였고, 6.25 발발후 조병옥 내무장관의 특명으로 경북 도경국장에 재임명돼 대구사수작전을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한다. 또한 자유당 독재가 심화되자 민주당에 입당 1958년 초대 민선 대구시장으로 선출되었고, 4.19이후에는 민선 경북도지사를 역임했다.

 

● 조지훈의 아들 조광렬의 증언, 지훈문학관 해설.

●14)김삼웅, 《지조의 시인 논객 조지훈평전》

https://cafe.daum.net/krcho45

●15) 한의신문(202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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