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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청휘초(靑彙抄)☞조선시대에 벼슬아치들의 교훈이 될 만한 여러 사실을 모아 엮은 유서(類書)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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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휘초(靑彙抄)

☞조선시대에 벼슬아치들의 교훈이 될 만한 여러 사실을 모아 엮은 유서(類書)

[내용]

서(序)와 발(跋)이 없는 편자 미상의 것이나, 내용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이루어진 듯하다. 앞에 인용서목이 있다. 우리 나라 역사 가운데 훈계가 될 만한 여러 가지 미담 120여 종을 각 권에 분류, 수록하였다.

 

제1책에는 군도문(君道門)·치도문(治道門)·유도문(儒道門)·국사문(國史門)·신도문(臣道門) 등, 제2책에는 신도문의 계속과 함께 인사문(人事門)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제3책에는 인사문의 계속과 함께 이부문(吏部門), 제4책에는 호부문(戶部門)·예부문(禮部門)·병부문(兵部門)·형부문(刑部門)·공부문(工部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각 책은 권별로 분류, 임금의 몸가짐에서부터 하급관리에 이르기까지 체계별로 엮어져 있다. 조선시대의 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서지적 사항]

규장각도서·장서각도서 등에 있다.

 

[識慮]

 

世宗朝有倭數戶欲居三浦上嘉其慕義而許之許稠泣諫曰豈可使鱗介之胡間我衣裳之人後日生齒漸繁必爲國之巨害臨卒亦再三陳啓請及其未盛而刷還之當其時人皆以稠言爲尋常不甚駭至今三浦有蔓延難圖之弊然後服其先見[주:慵齋叢話]

 

金宗瑞初拓北門凡一宴裨將百人皆設牛脚大歲或規其不節公曰將士十年遠戌不若是無以慰之况作事之始不可以凉今雖用一牛脚後數歲則鷄脚亦難贍矣將士謳歌思歸則誰與固圉乎[주:識小錄]

 

安平大君聞成眞逸侃有名邀之公往謁相與賡賦亭中諸詩詩語高絶遂敬待而送之期以後日再會母夫人謂曰王子之道當閉門諱客謹愼無他豈有聚人作朋之理其敗可待汝勿與交其後再三招之竟不往未幾敗一門皆服母夫人之先見[주:名臣錄]

 

世祖朝韓忠成明澮與申文忠叔舟侍宴酒酣上拉文忠之臂曰汝亦拉予臂文忠醉甚於袖裏持上臂上曰疼疼睿宗時在傍色變極歡而去到家韓公謂閽曰泛翁例常雖醉稍醒則必起點燈閱書後乃寢今日則不可汝以吾言止之閽往則果然夜中上酒醒使中人視之則申亦就寢云[주:謏聞瑣語]

 

許忠貞公琮文貞琛昆季俱爲相而德業俱著其娣有文行識鑑享年百歲故門中至今稱之曰百歲祖母焉二公事之甚恭凡朝廷大議二公必就問之成廟將廢尹妣二公咨之姊曰豈有子在儲宮罪其母而國家晏然無故者乎於是忠貞稱疾不往文貞以異議遞職後燕山荒亂悉誅滅當廢者文貞獨免人皆服其卓識云[주:識小錄]

 

成宗賜死廢妃時李世佐以代房承旨持藥而去其夕還家與夫人同室而臥夫人問曰聞朝廷論廢妃不已畢竟如何公曰今已賜死矣夫人愕然起坐曰傷哉吾子孫其無遺類乎母旣無罪而被殺子無報復於他日乎朝廷當置世子於何地而有此擧措乎燕山甲子年間公之子守貞殺死公亦爲東市之慘成廟朝金寒暄宏弼屢薦爲刑曹郞去已數十年來謂我曰余欲絶交而情有不忍問之則曰伯恭[주:南孝溫]百源[주:茂豊正]正中[주:秀泉副正]文柄[주:許磐]

 

皆有晋風晋以淸談爲累不出十年禍在此輩云余誓自今不復來往後皆不保[주:辛永禧師友錄]

 

燕山朝姜渾沈順門爲舍人皆有所眄之妓鄭新堂鵬戒之曰亟去之無貽後悔姜爲去之沈不從其後二妓選入宮中沈竟死非命[주:名臣錄]

 

松堂朴英初登武科爲宣傳官一日燕山手射成廟所養鹿兒帶箭流血而出松堂卽日謝病歸田里當時見幾而作惟松堂一人[주:鵞城雜記]

 

趙文節公元紀有先見之智嘗與甥侄洪議政子美從子趙大憲孝直書曰美之投閑眞男兒事叢怨之地豈敢久處騎虎善下自古所難雖敗亦榮直之被薦喜與憂幷盛名之下其實難副旣有譽之者必有毁之者此古今通患也凡人群居天地之中不可以高飛遠走則必須小同於俗庶免爲爲衆所嫉惟無咎無譽直保身之道也汝之所趨雖不類嚴敦而吾之欲使汝成家業全門戶之意則未始不同於馬將

軍也云云處衰世之道固當如此而孝直方以聖賢事業自期豈以成家保身爲心哉卒使公言有驗則天也[주:稗官雜記]

有隱君子匿跡於皮匠中靜庵知其賢就而問學時或共宿其人曰公之才足以經濟一世然得君而後可爲也今主上雖以名用公實不知公也萬一有小人間之則公必不免矣勸之仕不應終不言其姓名也[주:己卯錄,金堉]

■명심보감 1.계선편 2장 

1) 《三國志》 〈蜀志(촉지) 先主劉備傳(선주유비전)〉에는 “勿以惡小而爲之(물이악소이위지)하고 勿以善小而不爲(물이선소이불위)하라”로 되어 있으며, 
2) 《小學》 〈嘉言(가언)〉에는 “勿以善小而爲之(물이선소이위지)하고 勿以惡小而不爲(물이악소이불위)하라”로 되어 있다.

趙靜庵之赴謫也路遇副提學李思鈞承召上京思鈞執手款語曰子於中庸尙未熟讀况可做唐虞事業乎中庸不言乎愚而好自用賤而好自專生乎今之世反古之道未有不災及其身者也宜乎子之不免也子今年少正好讀書努力自愛[주:栗谷日記]

 

中廟朝黃壯武公衡有田舍在江華燕尾亭嘗植松千餘株或問曰公已垂老何用多種爲公曰後世當自知之及壬辰倡義使金千鎰等入保江都凡舟楫器械皆辦于此用之不盡丁酉楊經理將挾上就江都所取爲行營峙備及庵廬砦柵至是人乃知公先有識[주:識小錄]

 

趙重峰仰觀俯察知有倭亂以石盛饁器中令內子戴之日日上下山坂人問其故則曰吾欲豫習勞以避亂耳辛卯七月登錦山暎碧樓遊賞忽有赤氣起自東方分爲三派一派向北而長亘天一派向西而長半天一派向南而長又半其光燭地先生諦視之曰秀吉之兵已動矣明春必大擧深入當如此氣吾將奉母避其兵于公州壬辰三月自沃川來省先壠操文而告亂將作永訣之意親朋來見者心內不信試問亂果作何地可避先生曰江華磨尼山似可免其言果驗二月母夫人捐世踰月將葬忽聞天際有聲訇然先生大驚謂人曰此天鼓也賊必渡海流涕不已嘗夜觀象緯忽北向拜哭良久乃曰吾以爲禍及行朝更察之二王子之入北者其獲於賊乎門人等誌其日月後驗之果然[주:遺事]

 

趙公憲嘗遊沃川山寺忽通宵悲涕對食棄匙推與房中四僧曰明年有難我當擧義勤王今日共此飯者聞吾起兵可卽來同事僧怪而佯應曰諾後三僧皆與公同死而其一病未赴說道如此云[주:名臣錄]

 

宣廟壬辰駕幸東坡上叩膺曰予何往乎都承旨李恒福曰可且駐駕義州若八路俱陷便可赴愬天朝左議政柳成龍曰不可大駕離東土一步地朝鮮非我有也因與辨論十數西不肯苟合最後柳公厲聲曰今東北諸道如故湖南忠義之士不日蜂起豈可遽論此事李公卽曉其意默而止後柳公見李判書公著曰如見李某可語吾意何輕發棄國之論耶李雖裂裳裹足從死於道路不過爲婦寺之忠此言一聞人心瓦解誰能收拾李公猶未瑩故及到寧邊兩宮始分訛言大播西關人心不可收拾然後始服柳公之先見後因私見拜謝曰倉卒之際誤着一手致壞火勢悔恨而無及柳公笑曰我亦當時不能明辨直曰不可而已不能無失[주:白沙手記]

 

宣廟壬辰播越至義州遼左訛言謂我國導倭入冠兵部尙書石星遣指揮黃應暘請見倭書李白沙在都日已慮及此自齎辛卯倭酋嫚書以來及是以示之應暘疑大釋至拊膺大慟歸以實告東援之議遂決[주:行狀]

 

宣祖壬辰十年前栗谷先生珥與鵞溪李山海東岡金宇顒西崖柳成龍諸公同入經筵栗谷啓曰國勢不振久矣前頭之禍不可不慮請養兵十萬都城二萬諸道各一萬以備緩急不然而恬嬉度日玩愒成習一朝變起不免驅市民而戰則大事去矣及退西崖謂栗谷曰方今太平無事之時經席勸勉當以聖學爲先而軍旅非急務公有何所見而不與吾輩相議徑自陳達若是耶栗谷曰俗儒何知時務笑而不答栗谷卒後當途者惟務逢迎偏黨又陷於逆賊術中以鹿屯屯田海西蘆田徙民玉非子孫推刷爲能事八道人心大叛怨極呼天及壬辰夏四月平酋大擧入冠東萊府使宋象賢死之西崖嘆曰叔獻眞聖人也吾輩當不免萬古罪人矣平時叔獻請備十萬兵吾意以爲迂而沮止之到今大悔咄咄不已[주:隱峰野史]

 

宣朝甲午世子分朝在洪州欲移住保寧之水營使李白沙恒福往審之公還詭對以不可駐或疑之公曰永保亭勝槪冠湖中恐少主居之啓異日侈蕩心識者服其遠識[주:行狀谿谷集]

 

晋州之再被圍也倡義使金千鎰嶺南節度崔慶會湖南節度黃進等兵六萬守之聲勢比前十倍人皆以爲可守有老妓獨憂之千鎰招問其說對曰前者兵雖小將卒相愛號令出一故勝今軍無所統將不知兵兵不習將妾是以憂之千鎰以爲妖言斬之數日而城陷賊憤前敗遂夷其城而去[주:涪溪記聞]

 

癸亥反正後戊申以後貶竄皆放敍時余謫在寧海李叅判命俊謫在盈德聞報卽納會于境上李曰天命重新未知何者爲今日大事也余曰定遠君追崇也李曰主上以旁支入承大統安可追崇私親余曰不然漢宣入繼昭帝而不追尊史皇孫者孝昭未嘗以史皇孫爲子宣帝安敢以己之貴以其父父他人乎今則定遠君乃宣廟子也太廟不可稱位追尊定遠君父子相承而太廟位備固合於禮也李曰然及至京余訪張維金元亮在座曰朴知誡言禮合追崇張力卞其不可余曰此論不出則固善今旣出早晩必行而後已也張曰何爲其然余曰第觀之丙寅春啓運宮昇遐上命殮殯諸禮一依國喪大臣率卿宰與三司爭之不得辛未夏崔相鳴吉上箚請追崇享以別廟上下相議領相吳允謙左相金瑬率卿宰與三司爭之累日余以公事往吳相家吳相言及廷論余曰追崇之必合於禮則吾所不能知漢唐以下帝王無不爲者設令上爲之不過爲觀過知仁之擧也上必欲爲而朝廷固爭之則必示竄黜之威是欲使上無知仁之過而反陷上於大過失未知如何吳相曰聞公之言甚豁然也壬申夏上怒竄司諫權濤等于邊大臣不敢復言遂尊大院君爲元宗享于別廟甲戌秋崔相又上箚請付太廟金相復爲相又與尹相昉及三司廷爭之上怒又遞金相竄臺諫金光炫 李 相 尙 質 尹鳴殷于北塞大司諫兪伯曾大司憲李聖求乃變其前見同辭請祔上從之[주:荷潭錄]

 

仁祖朝李适之以副元帥西出也李原州緯國言於其姑夫朴貞憲東善曰适必叛矣朴公怒呵之曰無妄言及适叛朴公始服其先見曰汝何以知适叛李公曰當擧義時适授北閫節將辭行矣爲其與於大謀徊翔門外不卽發及弘濟之會昇平後期不至諸公推适爲大將以號令軍中事以獲濟微适幾敗矣适旣負大功其所望固不少今但易西門之節而攸 [교정주:假] 以副元帥之號此其心必怏怏所以知叛也[주:西溪集]

 

丁卯虜亂鄭錦南忠信從體察張公西出余送之郊外班荊而語鄭曰此虜今來意在脅和須得和卽去耳余時意不爲然後竟如其言盖鄭習知虜情故也[주:谿谷漫筆]

 

适之叛也安州牧使兼防禦使鄭忠信令肅川府使鄭文翼守安州而自詣張晩請從行晩責其棄城將罪而赦之竟誅适立大勲余嘗從容問曰公聞适叛棄城而遁何也忠信曰吾與李适交若兄弟國人皆知吾亦爲文晦等所告幸蒙上恩得免拿問适叛而我在寧邊近地爲人所疑則我之素心無以自白於天日之下棄城而遁者明吾本心而人自信之也适旣誅晩勅西來諸將俟大駕還京迎拜於江上而忠信獨下歸來辭於李時發時發曰諸將皆留公不可獨歸忠信曰以西路將兵之臣不能卽誅叛賊使大駕播越而逆兵入城其罪大矣何敢自若有功者迎駕於江上退歸本鎭以俟朝廷處分耳上還朝聞忠信還歸特下聖旨召之其明敏如此[주:荷潭錄]

 

金判書時讓丙子前獨能知胡冠之必來其時胡差多於春秋出來一日金公之侄素以戶佐來言明日胡差欲出漢江洗馬將以該曹持帳幕供具先出待候矣公曰汝須出待於三田渡胡差必不往漢江矣佐郞殊未信而翌朝試出待三田渡胡差果馳到大驚曰何以知我倒此佐郞答曰此亦同是漢江故出待矣胡差卽托以馳馬馳十餘里至南漢城底而還佐郞歸問於公公曰胡人有志於我國久矣假托洗馬而欲知近京保障地形勢耳聞者歎服[주:晦隱集]

 

昭顯世子在瀋館淸人將西犯脅與從軍及到錦州兩陣相對矣石如雨世子所處最當其衝從者死相續欲移避數步則虜輒禁之輔德趙公啓遠在瀋時預具葦布囊各數百枚而行人莫測其所用至是布以盛沙積於前輩以盛水灌其上時當冱寒倏成氷城足以防矢石衆皆驚服[주:行狀]

 

孝宗辛卯日桓陰曀金滄洲益凞上疏引先正臣趙憲封事有曰頑雲不解天日常陰是盖宣廟辛卯年間事又引夏侯勝所言洪範傳語爲誡因此謗之者譁然及逆臣自點伏誅人始服焉[주:藥泉集]

 

肅廟戊午尹鐫主魯山復位之論薦紳閭巷莫不爲快首相許積獨以爲難金公錫胄問之許曰非爲不可但東西分黨之後其人敗則必幷其言斥之此論出於尹希仲他日西人復秉政希仲必受禍若與此事而釐改之則其傷國體何如也吾心是其論而不爲贊助者以是耳[주:閑居漫錄]

 

許積少時家甚貧親戚遠來亦不得供飯及至顯達所得恩賜盡歸朋友且於所管府捐出剩餘接濟親舊待以擧火者常不下十餘人實有人所不及者而李相國浣獨曰古人食祿千鍾什九在外者謂以所得常祿分而與之也汝車專欲恤窮愛族不能遵守法度惠及親戚弊歸公家汝車終必以義氣見敗矣至庚申果驗[주:公私聞見]

 

余姊洪夫人承旨瑞鳳之母夫人也壬辰之亂其妻祖黃府院廷或陪王子向北道子承旨赫從焉謂瑞鳳曰擧國波蕩無地着生爾獨奉大夫人安之從我家而北兩家可資各邑以糊口瑞鳳歸告大夫人夫人曰不可國失其守宗社播越王子所向賊鋒攸指况王子失衆心爲怨藪而爾聘家處事多謬妄吾一家寧爲餓鬼不願爲無頭鬼遂入淮陽山谷間其後北民附賊虜二王子與黃公陷賊中洪獨免焉[주:於于野談]

▲기묘록(김육)▲야곡삼관기(조극선)▲속잡록(조경남)

■조야휘언(朝野彙言)장서인영■

자료UCI: RIKS+CRMA+KSM-WZ.0000.0000-20090716.AS_SA_285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교육/문화-문학/저술 | 자부-유서류

· 작성주체 김시민(金時敏, 1681-1747) 편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8冊 : 四周雙邊 半郭 19.6 x 13.6 cm, 有界, 10行22字 註雙行, 內向2葉花紋魚尾 ; 24.2 X 18.3 cm

· 주기사항 書根題: 彙言

一名: 東圃彙言

印: 相信準標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35.3

 

[안내정보]

조선시대에 열람의 편의에 도움이 될 여러 사실을 모은 유서(類書)로, 군도문(君道門)·이부문(吏部門)·호부문(戶部門)·예부문(禮部門)·병부문(兵部門)·형부문(刑部門)·공부문(工部門)·인사문(人事門)으로 문목을 나눈 다음 소주제 별로 관련 자료를 수집한 책.

 

[편저자사항]

『조야휘언(朝野彙言)』의 편찬자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 다른 기록이 전한다. 『조야휘언』의 이본이 다양하게 전하고 있으나 이 이본들의 상관 관계를 알지 못하고 각 이본의 편찬자에만 관심을 집중하면서 기존에 나온 해제에서는 김시위(金始煒), 김시민(金時敏), 김시형(金始炯) 등이 편찬자로 알려지거나 혹은 편자 미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홍재전서』에는 『휘언(彙言)』의 편찬자로 김시위(金始煒), 『연려실기술』에는 『동포휘언(東圃彙言)』의 편찬자로 김시위(金始煒), 『청장관전서』에는 『동포휘언(東圃彙言)』의 편찬자로 김시위(金始煒),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동포휘언(東圃彙言)』의 편찬자로 김시위(金始煒)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대본 『휘언(彙言)』에는 김시형(金始炯) 편집으로 주기되어 있다.

일부 해제에서는 『동포휘언』의 편찬자로 김시민(金時敏)으로 적은 것이 있으나 이는 김시민의 호가 동포(東圃)였기 때문에 『동포휘언』을 동포김시민의 저술이라고 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김시민의 문집인 『동포집』에는 『동포휘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김시민은 『동포휘언』의 편찬자로 보기 어렵다. 김시민(金時敏, 1681-1747)의 자는 사수(士修)‚ 호는 동포(東圃)‚ 본관은 안동으로, 농암(農岩) 김창협(金昌協)과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다.

최근 장서각본 『대동휘찬』에서 ‘자서(自序)’가 남아 있어 광릉거사(廣陵居士) 남태량(南泰良)을 이 휘언류의 저자라고 밝힌 연구도 있다. 그러나 『대동휘찬』이 1910년 이왕직에 의해 구입된 도서이고 당시 구입본 가운데는 후대에 필사하여 납품한 것이 적지 않아 광릉거사 남태량을 편찬자로 확정하기에는 주저된다. 현재 광릉거사 남태량으로 추정되는 인물로는 본관이 의령, 자가 유능(幼能)이며, 경상도관찰사와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광주(廣州)에서 사망한 남태량(1695-1752)이 거론되고 있다. 그런데 자서에는 편찬한 연기를 ‘건륭삼십구년갑오(乾隆三十九年甲午)’ 즉 1774년(영조 50)이라고 적고 있어, 현재 추정하는 인물의 졸년과는 맞지 않는 문제가 있다.

최근 장서각본 『대동휘찬』에서 ‘자서(自序)’가 남아 있어 광릉거사(廣陵居士) 남태량(南泰良)을 이 휘언류의 저자라고 밝힌 연구도 있다. 그러나 『대동휘찬』이 1910년 이왕직에 의해 구입된 도서이고 당시 구입본 가운데는 후대에 필사하여 납품한 것이 적지 않아 광릉거사남태량을 편찬자로 확정하기에는 주저된다. 현재 광릉거사남태량으로 추정되는 인물로는 본관이 의령, 자가 유능(幼能)이며, 경상도관찰사와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광주(廣州)에서 사망한 남태량(1695-1752)이 거론되고 있다. 그런데 자서에는 편찬한 연기를 ‘건륭삼십구년갑오(乾隆三十九年甲午)’ 즉 1774년(영조50)라고 적고 있어, 현재 추정하는 인물의 졸년과는 맞지 않는 문제가 있다.

『홍재전서』와 『연려실기술』 등 옛 기록에 전하는 김시위(金始煒)가 현재로서는 휘언류 편찬자로 가장 유력하다. 김시위(1694-1756)는 본관이 강릉으로, 자는 계문(系文), 호는 동포(東圃)이다. 1730년(영조6) 문과 출신으로,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을 거쳐 흡곡현감, 북평사, 동부승지, 영광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그런데 1738년(영조14) 신도비 중건 논의시 영릉의 신도비를 매몰한 연유를 영조가 하문하였을 때 주서(注書)였던 김시위가 『필원잡기』의 내용을 아뢰어 중건이 중단된 일이 있었다. 이 때 김시위가 영조의 하문에 응한 『필원잡기』의 내용이 『조야휘언』 4책 예부문 능침조에도 전하고 있어, 김시위가 이러한 경험에 의해 책을 편찬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동휘찬』에서 남태량의 ‘자서’가 적힌 연유는 잘 알 수 없으나 김시위의 장인이 남취명(南就明, 1661-1741)이며, 이와 사촌관계인 효명(孝明)의 아들이자, 제명(悌明)의 양자가 남태량(南泰良)이다. 두 집안간의 관계로 볼 때 휘언류가 전해오는 과정에서 혼선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편저자를 옛 자료에 전하는 김시위(金始煒)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구성 및 내용]

본서의 크기는 18.3×24.2cm로, 선장이며, 8책이다. 버클리대본 『조야휘언』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책 : 引用書目 君道門(聖孝, 后妃, 廢妃, 後宮, 嚴宮圍, 儲嗣, 敦親, 宗室儀賓, 戚里, 治道, 勤政, 經筵, 寬仁, 紀綱, 儉德)

2책 : 君道門(斥玩好, 敦敎化, 鎭人心, 輸民隱, 愼賞罰, 惜名器, 待前朝, 崇儒, 養士氣, 斥左道, 褒節義, 禮臣工, 待三司, 優老, 符瑞, 災異, 遇災修省, 悔悟, 官房, 內司, 國史, 靖難)

3책 : 吏部門(講官, 啓沃, 臺閣, 諫諍, 論劾, 宮僚, 輔導, 文任, 湖堂, 方伯, 守令, 吏胥), 戶部門(疆域, 田政, 民賦, 漕運, 良役, 貨幣, 場市, 祿俸, 恤經費, 賑恤, 貨賂)

4책 : 禮部門(廟社, 陵寢, 祭亨, 音樂, 追崇, 國恤, 喪制, 國婚, 典禮故事, 朝體, 朝儀故事, 盛際故事)

5책 : 兵部門(將帥, 兵制, 鍊武詰戎, 征討, 修攘, 邊備, 熢燧, 軍器, 城池, 粮餉, 馬政, 驛路, 戰船, 武科)

6책 : 刑部門(法禁, 刑獄, 恩法屈伸, 竄謫, 籍沒, 離婚, 降號革邑, 伸寃枉), 工部門(制作故事, 建置故事(沿革附), 營建, 第宅, 服飾, 器用, 津船)

7책 : 人事門(學問, 孝友, 制行, 德量, 膽量(定力附), 識慮(先見附), 鑑識, 淸儉, 奢侈, 辭受, 高士, 豪放, 聰明, 夙成, 儀容, 謙退, 愼黙

8책 : 人事門(氏族, 家法, 朋友, 風習, 禍福, 炎凉, 請託, 處變, 嫌路, 復讐, 文章, 書翰, 文集, 碑誌., 靈異, 報應, 雜考)

 

제1·2책에는 군도문, 제3책에는 이부문·호부문, 제4책에는 예부문, 제5책에는 병부문, 제6책에는 형부문·공부문, 제7·8책에는 인사문이 수록되어 있다.

자료는 여러 문헌에서 발췌하여 주제별로 분류·정리하였는데, 인용의 전거는 각 기사의 끝에 소자로 주기하였다. 『조야회통』의 첫머리에는 인용서목이 별도로 기술되어 있는데 이에는 110종에 달하는 책명과 편찬자를 적고 있다. 인용처로는 보감과 같은 관찬 자료도 있지만 대체로 각종 야사·패설류에서 발췌하고 있다. 다음은 인용서목에 수록된 책명이다.

 

國朝寶鑑 宣廟寶鑑 肅廟寶鑑 櫟翁稗說 龍飛御天歌 大平閑話 筆苑雜記 慵齋叢話 彛尊錄 石潭日記 聽天雜記 圃樵雜記 懲毖錄 雲巖雜記 淸江小說 梧陰雜說 月汀漫筆 甲辰漫錄 聞韶漫錄 靑坡劇談 秋江冷話 陰崖雜記 龍泉談寂錄 思齋摭言 稗官雜記 諛聞瑣錄 退溪言行錄 破閑雜記 眉巖日記 東閣雜記 松窩雜記 苔川雜記 寄齋雜記 象村野言 五山說林 丁戊錄 白沙北遷錄 晩雲曰記 識小錄 於于野譚 月窓夜話 芝峯類說 延平日記 柳川箚記 樂全堂漫錄 再造藩邦志 畸翁漫錄 竹窓閑話 荷潭破寂錄 南溪記聞 崇孝錄 日月錄 靑野漫輯 艮齋漫錄 公私見聞 因繼錄 閑居漫錄 感異編 後自警編 涪溪記聞 癸甲錄 隱峯野史 建州聞見錄 長貧胡撰 己卯錄 海東名臣錄 冶谷三官記 閑溪漫錄 眉叟記言 國朝典謨 海東樂府 東儒師友錄 前言往行錄 鵝城雜說 菊堂俳語 雪壑諛聞 晴窓軟談 逸事記聞 續玉露 鯸鯖錄 朝野記問 國朝記事 紫海筆談 亂乘 續雜錄 歷代摠要 歷代摠目 歷代摠錄 瀋陽日記 戊寅記聞 壬辰雜事 蘇齋日記 海平家傳 安氏追錄 辛永禧師友錄 白沙手錄 己丑記事 松江時政錄 喉院便覽 隨錄 野言別集 國朝謨烈 瑣說 亂離日記 大東韻玉 壬癸行朝錄 南官錄 景賢錄 丙辰丁巳錄 玄湖瑣談

 

매 편 끝에 밝힌 전거 가운데는 인용서목에 보이지 않는 책도 있어 첫머리에 기술된 인용서목보다 더 많은 책을 활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서술은 큰 문목을 세운 다음 여러 작은 문목을 배치하는 전통적인 유서 편찬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은 중국의 유서인 『옥해(玉海)』나 조선의 김진(金搢)이 편찬한 『신편휘어(新編彙語)』 등 이전의 유서류에서 시행했던 방식이다.

1책의 군도문에서는 군주가 행해야 할 효행과 우애, 후비·폐비·후궁 등 왕실의 여성과 관련하여 경계해야 할 일, 왕가에서 시행해야 할 법도, 왕이 갖추어야 할 덕망 등을 기술하였다.

2책의 군도문에서는 군주가 행한 선정, 군주로서 행해야 할 정책, 군주의 수신과 관련된 사항,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교양과 도리 등을 기술하였다.

3책의 이부문에서는 역대 명상들의 일화, 관료로서 갖추어야 할 능력, 관료가 행해야 할 간쟁과 논핵, 인물 등용, 방백·수령·이서 등 관료 집단의 모습과 일탈에 대한 경계 등을 기술하였다. 호부문에서는 강역·전정 등 경제적 기반, 민부·조운·양역 등 재정 관련 사항, 화폐·장시 등 유통 관련 사항, 백성에 대한 진휼정책 등 경제적인 사항을 기술하였다.

4책의 예부문에서는 묘사와 능침 등 왕가의 제례(祭禮) 시설, 왕실의 추숭(追崇) 관련 자료, 오례(五禮)의 실행, 외교 관련 사항 등을 기술하였다.

5책의 병부문에서는 장수의 소개, 병제의 변천, 군사의 조련, 군사 관련 시설, 군사 행정, 마정·역로 등 교통 사항, 무과의 설행 등을 기술하였다.

6책의 형부문에서는 법률과 형벌 관계 사항, 유배와 적몰 등 처벌 사항, 읍호의 승강, 법률적인 신원 절차 등을 기술하였다. 공부문에서는 토목 공사에 얽힌 고사, 건축에 관련된 사항, 복식·기용 등에서의 제한 등을 기술하였다.

7책의 인사문에서는 백성들이 일상 생활에서 해야 할 행동, 백성들이 갖추어야 할 수신(修身)에 관련된 사항, 높은 선비로서 가져야 할 습관과 자세 등을 기술하였다.

8책의 인사문에서는 가족제도에 관한 사항,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대한 사항, 문장과 글에 대한 사항, 신령한 이적과 하늘의 보응 등을 기술하였다.

[서지적 가치]

『조야휘언』과 같은 계열의 책으로 『휘언(彙言)』, 『동포휘언(東圃彙言)』, 『포휘(圃彙)』, 『국조휘언(國朝彙言)』, 『동록(東錄)』, 『대동휘찬(大東彙纂)』, 『청휘초(靑彙抄)』 등의 많은 이본이 현존하고 있다. 버클리대본『조야휘언』을 휘언류 가운데 가장 완질에 해당하는 장서각소장 25책의 『대동휘찬』과 비교하면 『대동휘찬』의 9개 부문 171개 항목 가운데 신도문(臣道門)이 『조야휘언』에는 아예 빠져 있는 점, 『대동휘찬』과는 달리 인사문이 공부문 뒤에 배치되어 있는 점, 신도문 외에도 『대동휘찬』의 항목 가운데 이부문(吏部門)의 전법(銓法), 관제(官制), 용인(用人), 억조경(抑躁竸), 대신(大臣), 묘당(廟堂), 예부문(禮部門)의 문묘(文廟), 태학(太學), 서원(書院), 과거(科擧), 시법(諡法), 사가예제(私家禮制) 등 일부 내용이 빠진 점 등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야휘언』은 이러한 휘언류 유서의 전파 과정에서 나타난 변이 양상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규장각 소장 14책본 『동록(東錄)』은 4책의 신도문, 5책의 신도문·이부분, 6책의 이부분 일부와 9책 예부분을 제외하고는 『조야휘언』과 순서가 같다. 또한 『조야휘언』의 표제명을 가진 것으로는 규장각에 8책본이 있으며, 일부 책의 순서는 다르나 버클리대본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적 가치]

『조야휘언』은 여러 문헌에서 자료를 뽑아 세상의 치난(治亂)과 인물의 장부(臧否)를 파악하여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실현하고, 후세에 귀감(龜鑑)으로 삼을 목적 하에 편찬되었다. 주제별로 나누어 이에 해당하는 자료를 수집하여 시간순으로 기술함으로써 일종의 주제별 사전으로서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또한 내용은 주로 조선 관련 기사를 시간순으로 수집하여 조선 당대의 사회적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자료로는 주로 인물과 관련된 사항을 수집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이상의 시대 자료를 끌어 오지 못하여 다양한 자료의 수집이라는 측면에서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또한 항목별 자료의 수집도 양적인 측면에서 풍부하지 못하다. 다만 주제별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뒤에 나오는 관찬 문헌비고나 사찬 지류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동환, 「해제 : 휘언」, 『국학자료』 2, 장서각, 1972.

양승민, 「유서 번역본의 출현과 그 어문학적 의의」, 『정신문화연구』 101,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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