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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집 제2권 / 기(記), 稼亭 字 이중보(李中甫) 가정(稼亭) 이곡(李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
■금강산(金剛山) 보현암(普賢菴) 법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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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4년 무인년(1338) 가을 8월 초하루에 어떤 사문(沙門) 하나가 내 집을 찾아와서 고하기를,
“소승은 보현암의 주지 지견(智堅)입니다. 원나라 조정의 규장공(奎章公)이 태정(泰定) 연간에 일이 있어서 왕경(王京)에 왔다가 마침내 풍악(楓嶽)을 유람하면서 여러 난야(蘭若)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소승이 그때 본암(本菴)을 중수하고 있었는데, 공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 경치를 좋아한 나머지 소승을 앞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이 산은 천하의 명산인데, 이 산의 승지는 이곳이 또 최고이다. 스님은 우선 공사를 빨리 진행시키도록 하라. 내가 단월(檀越 시주 )이 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은 조정으로 돌아갔고 소승도 10여 년 동안 산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지원 병자년(1336, 충숙왕 복위 5)에 본암의 비구인 달정(達正)이 대도(大都)에 들어가자, 공이 그를 보고는 기뻐하면서 저폐(楮幣)를 출연하여 이보새(伊蒲塞)의 찬수(饌需)에 충당하게 하였는데, 돈꿰미로 계산하면 5000민(緡)이 넘었습니다. 그리고는 공이 말하기를 ‘스님은 우선 이 돈을 가지고 가라. 내가 계속해서 시주하겠다. 지견은 이미 내가 잊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보현암의 정경은 지금도 나의 마음과 눈 속에 들어 있는데 스님이 오는 것이 본시 늦었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해에 달정 스님이 돌아왔고, 그 이듬해 여름에 선열회(禪悅會)를 처음 개최하였습니다. 그리고 금년에는 더욱 규모를 확대해서 치류(緇流 승도 ) 300여 명을 불러들여 가사와 바리때를 새로 주고 큰 불사를 거행했는데, 4월 초파일에 시작해서 7월 15일 우란분절에 마쳤습니다. 이는 모두가 위로는 임금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아래로는 중생의 무궁한 복을 빌기 위한 것으로서, 이미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공의 마음에는 아직 미진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공의 뜻을 기록으로 남겨서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면 좋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신의야말로 사람 노릇을 하는 데에 중요한 덕목이 된다고 들었다. 신하가 되어서 신의가 없으면 충성을 바칠 수가 없고, 자식이 되어서 신의가 없으면 효성을 바칠 수가 없으니, 신의가 없이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공이 도덕과 절의를 지니고서 천자의 팔과 다리 역할을 수행하는 신하가 되었으니, 공을 우러러 바라보며 그 은총을 기대하고 그 은택을 소망하는 천하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리고 공의 입장에서도 상의 은혜를 베풀어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소원을 이루게 해 주려고 생각하노라면, 하루 종일 부지런히 힘쓰더라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걱정을 떨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여 년 전의 언약을 반드시 실천하려고 노력하면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뜻이 더욱 독실해지기만 하였으니, 그 신의가 과연 어떻다고 하겠는가. 이를 통해서 공이 임금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받들고 부처에게 정성스럽게 귀의하고 있다는 사실과 공이 부귀를 누릴 수 있는 것도 오직 신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감히 재배(再拜)하고 삼가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의 이름은 사라반(沙剌班)으로, 지금 규장각태학사 한림학사 승지(奎章閣大學士翰林學士承旨)이다. 부인 기씨(奇氏)는 선경옹주(善敬翁主)의 소생이다. 동한(東韓)의 명족인 본국의 정순대부(正順大夫) 좌상시(左常侍) 기철(奇轍)이 부인의 친족이기 때문에 이 법회를 실제로 주선했다고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6
[金剛山普賢菴法會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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至元四年戊寅秋八月朔。有一沙門踵門而告曰。釋普賢菴主智堅也。元朝奎章公。於泰定間因事到王京。遂游楓嶽。訪諸蘭若。堅時脩葺本菴。公喜其奇絶。召堅而前曰。此山名天下。而山中勝地。此又爲之最。師姑督工。吾其爲檀越。公旣還朝。堅亦不出十餘年。至元丙子。本菴比丘達正入都。公見而喜之。出楮幣俾供伊蒲塞之饌。以緡計者五千有奇。因謂曰。師且將去。吾當續施。智堅已謂吾忘也。普賢至今在心目。師來自遅耳。其年。正師歸。以明年夏。肇開禪悅會。又以今年。益延緇流三百餘指施衣鉢。作大佛事。始于四月初八。終于七月十五。凡所以上壽一人。下福羣生者。旣盡其誠而致其極矣。於公之心。猶未已也。請記公之志。以告方來。余聞信之於人大矣。爲臣而無信。不能忠。爲子而無信。不能孝。未有無信而能爲人者也。公以道德節義。股肱天子。天下之人。顒顒然望其光希其澤者幾何。抑公之所以思布上恩。使天下之人皆得其欲者。亦猶惟日不足。而猶必踐十數年前之言。愈久愈篤。其爲信何如也。是知公之事君忠。奉親孝。歸佛誠。而能享富貴者惟信而已。余敢不再拜敬書。公名沙剌班。今爲奎章閣大學士翰林學士承旨。室奇氏。善敬翁主出。東韓名族。本國正順大夫左常侍奇轍。以其親而實幹玆會云。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0
[주-D001] 상도(上都)에 …… 호종(扈從)하였다 : 상도는 지금의 내몽고(內蒙古) 지역에 해당하는 난하(灤河) 북안(北岸)의 개평부(開平府)를 말한다. 원나라 때 대도(大都)인 연경(燕京)과 병칭하여 양도(兩都)로 일컬어졌는데, 1년에 한 번씩 천자가 순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가정집 제3권 / 기(記)
■금강산(金剛山) 도산사(都山寺) 창건 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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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의 산수는 천하에 이름이 나 있는 바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금강산의 기막힌 경치는 첫손에 꼽히고 있는 터이다. 게다가 불서(佛書)에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주재(住在)한다는 설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마침내 인간 정토(人間淨土)라고까지 말하게 되었다. 그래서 천자가 내린 향과 폐백을 받들고 오는 중국의 사신들이 끊이지 않고 길에 이어지는가 하면, 사방의 사녀(士女)들이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서 소에 싣고 말에 싣고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는 불승(佛僧)을 공양하기 위해 서로 줄을 잇고 있는 실정이다.
금강산 서북쪽에 고개가 있는데 비스듬히 깎아지르고 험준하여 마치 하늘에 올라가는 것과 같으므로 사람들이 이곳에 이르면 반드시 한참 동안 배회하며 휴식을 취하곤 한다. 또 이 지역은 궁벽해서 거주하는 백성도 극소수이기 때문에 풍우를 만나기라도 하면 노숙하느라 애를 먹기 일쑤이다.
지원(至元) 기묘년(1339, 충숙왕 복위 8)에 쌍성총관(雙城摠管) 조후(趙侯)가 산승 계청(戒淸)과 상의한 뒤에 요충(要衝)인 임도현(臨道縣)에 몇 경(頃)의 땅을 매입하여 불사(佛寺)를 창건하고는 임금을 축원하는 도량으로 삼았다. 그리고 봄과 가을에 선박으로 곡식을 수송하여 출입하는 자들을 먹이는 한편, 그 나머지를 산속의 여러 사찰에 분배해서 겨울과 여름의 식량에 충당하게 하고는, 해마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규례를 정하였다. 그래서 그 사원의 이름을 도산(都山)이라고 내걸게 되었다.
조후가 이 절을 경영할 적에 경내의 승도(僧徒)에게 명령하기를 “부도(浮圖 승려 )가 된 자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고 있다. 위로는 사은(四恩)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삼도(三塗)를 제도(濟度)한다고 하지 않는가.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는 절학무위(絶學無爲)의 경지에 오른 자가 상등인(上等人)이요, 열심히 강설하면서 쉬지 않고 교화하는 자가 차등인(差等人)이요, 머리 깎고 편히 거하면서 부역을 피하고 재산이나 모으는 자는 하등인(下等人)이라고 할 것이다. 승려가 되어 하등인으로 전락한다면, 이는 불씨의 죄인이 될 뿐만이 아니라 국가의 유민(游民 일정한 직업이 없이 놀고먹는 백성 )이 되고 마는 것이다. 너희들이 이미 관가의 부역에도 응하지 않으면서 나의 일을 돕지도 않는다면 처벌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승려들이 한편으로는 부끄러워하고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 서로 다투어 각자 기예를 바치려고 모여들어, 도끼를 잡은 자는 도끼질을 하고 톱을 가진 자는 톱질을 하고, 깎고 다듬고 바르고 맥질하였다. 그리하여 조후가 자기 집의 곡식을 운반하여 그들을 먹이고, 자기 집의 기와를 걷어 내어 지붕을 덮으면서, 백성의 힘을 빌리지 않고 금세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공사가 일단 마무리되자 사람을 나에게 보내 기문을 써 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조후와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가 현능(賢能)하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무릇 어떤 일을 행하든 간에 만물에 이롭고 사람에게 편리하도록 도모해야 마땅하니, 자기만을 위해서 복을 구하는 것은 하찮은 일이라고 할 것이다. 대저 임도현은 한 산의 요해지이다. 그래서 여기에 사찰을 경영해서 출입하는 자들을 편하게 해 주려고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쌍성(雙城)도 한 지방의 요해지이니, 이 마음을 미루어서 정사를 행한다면 인민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근래에 동남쪽 변경의 백성들이 유랑하다가 그 경내로 들어오자, 조후가 그 사유를 힐문하여 책망하고는 거절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말하기를 “그대들은 항산(恒産)이 없어서 항심(恒心)이 없게 된 까닭에 이처럼 유랑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항심이 없으면 어디를 간들 용납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이 일을 통해서 조후의 사람됨을 더욱 알게 되었다. 그러니 어찌 감히 기문을 써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후의 이름은 임(琳)이다. 일찍이 본국의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하다가 선왕을 수행하여 연경(燕京)에 가서 5년 동안 체류하였다. 그 공을 인정받아 세 번 옮긴 끝에 대호군(大護軍)이 되었고, 다시 승진하여 검교 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가 되었으며, 지금은 가업을 계승하여 쌍성등처군민총관(雙城等處軍民摠管)으로 있다. 성품이 유교와 불교를 좋아하고 유람이나 사냥은 좋아하지 않으며, 시서에 통하고 예의를 숭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점을 훌륭하게 여기고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6
[刱置金剛都山寺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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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東山水名於天下。而金剛山之奇絶。又爲之冠。且以佛書有曇無竭菩薩所住之說。世遂謂人間淨土。天子之使。降香幣絡繹于道。而四方士女。不遠千里。牛載馬馱。背負首戴。供養佛僧者踵相躡也。山之西北有嶺。橫截峻險若登天然。人之至此。必盤桓休息。地旣僻。居民絶少。或値風雨。病于露宿。至元己卯。雙城摠管趙侯謀于山僧戒淸。卽其要衝臨道縣。買地數頃刱佛寺。爲祝聖道塲。春秋舟粟以飯出入者。散其餘山中諸蘭若。資冬夏食。歲以爲率。故揭名都山。侯之經營是寺也。令其境內僧徒曰。爲浮圖者吾知之矣。其不曰上報四恩。下濟三塗乎。若飢餐渴飮。絶學無爲者上也。勤勤講說。孜孜化誘者次也。髡而家居。逃賦而營產。斯爲下矣。僧而爲下。不惟佛氏之罪人。亦國家之游民也。爾旣不役於官。而又不吾助者罰。於是衆髡且慚且喜。爭執藝事以來。斧者斧之。鋸者鋸之。撲斲之塗墍之。侯輸家粟以食之。撤屋瓦以蓋之。不借民力。不日成之。工旣畢。使來請記其事。余雖不識趙侯。聞其賢久矣。凡爲事。當利於物而便於人。爲己而求福者末也。夫臨道一山之要害。故營是寺。以便其出入者。雙城亦一方之要害也。推是心以行其政。其便於人民者必多矣。近有東南邊民流入彼境。侯則詰責所由。拒而不納曰。爾無恒產。因無恒心。故流徙耳。人無恒心。焉往而能容哉。余於是益知趙侯之爲人也。敢不爲之記。侯名琳。甞入仕本國。從先王在都下五年。以功三轉大護軍。陞檢校僉議評理。今承家業。爲雙城等處軍民摠管。性好儒釋。不喜游畋。通詩書尙禮義。人以此多之。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0
●가정집 제6권 / 비(碑)
■금강산(金剛山)의 장안사(長安寺)를 중건한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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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천자(聖天子)가 즉위하신 뒤로 7년째 되는 해에 황후 기씨(奇氏)가 원비(元妃)의 신분으로 황자(皇子)를 낳았다. 그리고 얼마 뒤에 중궁의 위의를 갖추고서 흥성궁(興聖宮)에 거처하였다. 이에 내시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내가 숙세(宿世)의 인연으로 은혜를 입어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황제와 태자를 위해서 하늘에 영원한 명을 기원하려고 하는데, 불승(佛乘)에 의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복전(福田)이 되고 이익이 된다고 하는 일이라면 거행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금강산 장안사가 가장 수승(殊勝)하다는 말을 듣고는, 복을 축원하여 위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이곳과 같은 곳은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지정(至正) 3년(1343, 충혜왕 복위 4)에 내탕(內帑)의 저폐(楮幣) 1000정(定 정(錠) )을 출연(出捐)하여 사원을 중건할 자금으로 삼고 길이 상주하게 하였으며, 다음 해에도 그렇게 하고, 또 그 다음 해에도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승도 500명을 모아 그들에게 의발을 시주하고 법회를 열어 낙성식을 거행한 다음에, 궁관인 자정원사(資政院使) 신(臣) 용봉(龍鳳)에게 명하여 이 일에 대한 본말을 돌에 기록하게 하였다. 이에 그가 조서(詔書)를 받들고 얼마 전에 와서 마침내 신 곡(穀)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삼가 상고해 보건대, 금강산은 고려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서 왕경(王京)으로부터 500리쯤 떨어져 있다. 이 산의 승경은 천하에 이름이 났을 뿐만 아니라, 실로 불서에도 기재되어 있으니, 《화엄경(華嚴經)》에서 설한 “동북쪽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는데, 그곳에서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1만 2000보살과 함께 항상 반야(般若)를 설법하고 있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옛날에는 동방 사람들이 당초 그런 줄을 알지 못하고서 단지 선산(仙山)이라고만 지칭하였다. 그러다가 신라 시대에 탑묘(塔廟)를 증보(增補)하고 수식(修飾)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선감(禪龕)이 벼랑과 계곡 가까이에 잔뜩 들어서게 되었는데, 장안사는 그 산기슭에 자리를 잡고서 이 산의 도회(都會) 역할을 하였다.
대개 이 사찰은 신라 법흥왕(法興王) 때에 창건되었고, 고려 성왕(成王) 때에 중건되었다. 아, 법흥왕 뒤로 400여 년이 지나서 성왕이 새롭게 할 수 있었는데, 성왕으로부터 지금 또 400여 년이 되어 가건마는 아직도 흥복(興復)하는 자가 있지 않았다. 비구(比丘) 굉변(宏辨)이 퇴폐한 사찰의 모습을 보고서 동지와 함께 이른바 담무갈보살에게 서원(誓願)을 세우기를 “이 사찰을 새롭게 하지 못할진댄, 이 산이 두고두고 증거하리라.”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그 일을 나누어 주관하며 인연 있는 중생들을 널리 모집하였다. 산에서 재목을 베어 오고 사람에게서 식량을 구해 모았으며, 그 고을 사람들에게 품삯을 주고 인부로 고용하여 돌을 다듬고 기와를 구웠다. 먼저 불우(佛宇)를 새롭게 하고 나서 빈관(賓館)과 승방(僧房)의 공사를 그런대로 차례차례 마무리해 가던 차에 계속해서 비용을 댈 수 없게 되자, 또 탄식하기를 “세존(世尊)이 기원(祇園)을 지을 적에 고독(孤獨)이 황금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이라고 해서 어찌 그런 사람이 없기야 하겠는가. 다만 우리가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서쪽으로 경사(京師)에 갔는데, 그 일이 중궁에게 알려졌고, 또 고 자정(高資政)이 극력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성취하게 된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건축(乾竺 인도(印度) )의 종교는 시대에 따라 흥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예전에 우리 세조황제(世祖皇帝)가 이 종교를 존숭하고 신봉하였는데, 그 뒤로 열성이 이를 서로 이어받아 빛나게 하고 크게 하였으며, 지금의 황제 역시 그 뜻을 계승하고 그 사업을 이으면서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대개 성인의 호생(好生)의 덕(德)과 불자의 불살(不殺)의 계(戒)는 똑같은 하나의 인(仁)과 애(愛)요, 똑같은 하나의 자(慈)와 비(悲)라고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중궁이 보고 느낀 것도 그 유래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옛날에 덕을 천하에 펼친 분으로는 오제(五帝)와 삼왕(三王)만 한 분이 없고, 후세에 가르침을 드리운 분으로는 공자(孔子)만 한 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살펴보면 오제와 삼왕 가운데에 묘식(廟食)을 향유하는 분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공자의 경우는 비록 사당이 있다고는 하나 예제(禮制)의 제한을 받는 관계로 제수를 진설하여 올리는 것도 모두 일정한 수가 있으며 그 무리가 생활하는 것도 겨우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면 다행인 형편이다. 반면에 부도씨(浮圖氏)의 경우는 그 사원이 중국과 타국을 막론하고 바둑돌처럼 분포되어 있고 별처럼 나열되어 있는 가운데, 전폐(殿陛)의 엄숙함과 금벽(金碧 단청(丹靑) )의 휘황함이 왕자(王者)의 거처와 맞먹는가 하면, 향화와 복식의 봉공이 봉읍의 수입과 대등한 실정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점이 실로 깊고 넓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니, 이 사원이 중건된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사원의 건물을 칸수로 계산하면 120여 개에 달하는데, 불전(佛殿)ㆍ경장(經藏)ㆍ종루(鍾樓)ㆍ삼문(三門)ㆍ승료(僧寮)ㆍ객위(客位)는 물론이요, 취사장이나 목욕간과 같은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지없이 규모가 크고 화려하게 하였다. 상설(像設)을 볼 것 같으면, 비로자나(毗盧遮那)와 좌우 노사나(盧舍那)와 석가문(釋迦文)이 외연(巍然)히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가운데, 미래의 1만 5000불(佛)과 과거의 53불(佛)이 주위를 겹겹이 에워싸며 정전에 도열해 있고, 관음대사(觀音大士)의 천수천안(千手千眼)과 문수보살(文殊菩薩)ㆍ보현보살(普賢菩薩)ㆍ미륵보살(彌勒菩薩)ㆍ지장보살(地藏菩薩)이 선실(禪室)에 배치되어 있으며, 아미타(阿彌陀)와 53불과 법기보살(法起菩薩)과 좌우 노사나가 해장궁(海藏宮)에 안치되어 있는데, 모두 장엄하기 그지없다. 장경(藏經)은 모두 4부가 봉안되어 있는데, 그중에 은으로 서사(書寫)한 것이 바로 황후가 하사한 것이다. 《화엄경(華嚴經)》 3본(本)과 《법화경(法華經)》 8권을 모두 황금으로 서사하였으니, 이 또한 지극히 아름답게 꾸민 것이다.
그리고 예전부터 소유한 전지를 국가의 법도에 의거하여 결수(結數)로 계산하면 1천 하고도 50결에 이른다. 그중에 성열현(成悅縣)과 인의현(仁義縣)에 각각 200결이 있고 부령(扶寧)과 행주(幸州)와 백주(白州)에 각각 150결이 있고, 평주(平州)와 안산(安山)에 각각 100결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성왕(成王)이 희사한 것이다. 통주(通州) 임도현(林道縣)에 염분(鹽盆)이 한 곳 있고, 개성부(開城府)에 경저(京邸)가 1구(區) 있고, 시전(市廛)에 가게를 만들어 남에게 대여한 것이 30칸 있다. 기타 전곡과 집기의 숫자에 대해서는 이를 담당한 자가 따로 있으니, 여기에서는 기재하지 않는다. 태정(泰定) 연간에 이 사원을 중건할 때부터 참여한 단월(檀越)로는 중정사(中政使) 이홀독첩목아(李忽篤怗木兒) 등의 제가(諸家)가 있는데, 그들의 명씨(名氏)를 비의 뒷면에 나열하여 기록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산 하나 있어 뼈를 드러낸 채 / 有山露骨
바위가 깎아 세운 듯 우뚝 솟았나니 / 嶄嵒突兀
그 이름 바로 금강이로세 / 名金剛兮
패서에도 기록되었듯이 / 貝書所著
보살이 머물러 설법하는 곳 / 菩薩住處
청량산에 버금간다네 / 亞淸涼兮
안개와 구름을 숨쉬고 내뿜나니 / 吹虛烟雲
하늘과 땅의 기운이 한데 뒤엉켜 / 輪囷絪縕
신령스러운 광채를 발하누나 / 發神光兮
새와 짐승도 순하게 길들여지고 / 鳥獸其馴
벌레와 뱀도 어질게 바뀌고 / 蟲蛇其仁
풀과 나무들도 향기롭도다 / 草木香兮
석가의 제자들이 세운 암자들 / 釋子卓菴
공중에 다리 놓고 바위에 얹혀 / 梯空架巖
멀리 서로들 바라다보이누나 / 遙相望兮
장안이라 이름 붙인 불교 사원은 / 長安精舍
산 아래 기슭에 자리를 잡은 / 居山之下
불도들의 커다란 도량 / 大道場兮
신라 때 창건된 뒤로 / 肇基羅代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반복하면서 / 屢其成壞
시대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어라 / 時不常兮
하늘이 성신에게 길을 열어 주어 / 天啓聖神
우리 세조황제의 후손들이 / 世祖之孫
만방에 군림하게 되었도다 / 君萬方兮
호생지덕(好生之德)이 넘치는지라 / 德洽好生
함령을 따뜻이 품어 주며 / 煦濡含靈
공왕을 흠모하였도다 / 慕空王兮
슬기로운 우리 황후께서는 / 於惟睿后
땅의 후덕함을 몸에 간직하고 / 體坤之厚
하늘의 강건함을 받드시는 분 / 承乾剛兮
신독국(身毒國)의 불교에 귀의하여 / 歸心身毒
그 오묘한 복을 취해 와서 / 取彼妙福
우리 황제를 섬기려 하였다네 / 奉我皇兮
생각건대 복된 이 지역은 / 惟此福地
신선과 부처의 은밀한 오지(奧地)로서 / 仙佛奧秘
많은 상서를 다투어 내는 곳 / 紛産祥兮
한 사람에게 경사가 있으면 / 一人有慶
하늘이 그에게 거듭 명해서 / 天其申命
수명이 끝이 없게 해 주고말고 / 壽無疆兮
두 개의 밝음이 이괘(離卦)를 이뤘나니 / 明兩作籬
왕업의 터전을 굳게 다져서 / 永固鴻基
하늘과 함께 길이 이어지리라 / 與天長兮
우리 황후가 내신에게 이르기를 / 后謂內臣
저 법신불의 교화가 / 惟彼法身
환히 드러나게 하라 하셨다네 / 其化彰兮
그리하여 불전을 다시 새롭게 하였으니 / 旣新其宮
그 공을 기록하여 잊지 않게 하는 것이 / 宜紀其庸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 俾無忘兮
이에 높다랗게 비석 하나를 / 有石峨峨
산언덕 위에 우뚝 세우고서 / 于山之阿
명문을 이렇게 새기게 되었다네 / 勒銘章兮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6
[金剛山長安寺重興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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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天子龍飛之七年。皇后奇氏以元妃生皇子。旣而備壼儀居于興聖之宮。顧謂內侍曰。予以宿因。蒙恩至此。今欲爲皇帝太子祈天永命。非託佛乘。其何以哉。凡其所謂福利者靡所不擧。及聞金剛山長安寺最爲殊勝。祝釐報上。莫玆地若也。越至正三年。出內帑楮幣一千定俾資重興。永爲常住。用明年又如之。又明年如之。集其徒五百。施衣鉢作法會以落其成。廼命宮官資政院使臣龍鳳載本末于石。以詔方來遂命臣糓爲之文。謹案金剛山在高麗東。距王京五百里。玆山之勝。非獨名天下。實載之佛書。其華嚴所說東北海中有金剛山。曇無竭菩薩與一萬二千菩薩常說般若者是已。昔東方人未之始知。而指爲仙山。爰自新羅增餙塔廟。於是禪龕逼於崖谷。而長安寺居其麓。爲一山之都會也。盖刱於新羅法興王。而重興於高麗之成王。噫。後法興四百餘年。而成王能新之。自成王至今亦將四百年矣。而未有能興復者。比丘宏辨見其頹廢。與其同志。誓於所謂曇無竭曰所不新玆寺者。有如此山。卽分幹其事。廣集衆緣。取材於山。鳩食於人。僦面雇夫。礲石陶瓦。先新佛宇。賓館僧房。以次粗完。而費猶不給。則又嘆曰。世尊作祗園。孤獨側金。今豈無人。顧不遇耳。遂西游京師。事聞中宮。而高資政主之又力。故其成就如是。竊惟乾竺之敎與時興替。昔我世祖皇帝是崇是信。列聖相承而光大之。今上皇帝繼志述事。尤致意焉。盖聖人好生之德。佛者不殺之戒。同一仁愛。同一慈悲也。中宮之觀感有所自矣。且古之施德於天下者莫如五帝三王。垂敎於後世者莫如孔子。以今觀之。帝王之廟食者幾希。孔子雖有廟。而限於禮制。籩豆薦奠。皆有常數。其徒之食。僅取足焉。惟浮圖氏。其宮在夷夏者碁布星列。殿陛之嚴。金碧之餙。視王者之居。香火服食之奉。視封邑之入。是其感動于人者實深以廣。玆寺之興宜也。凡爲屋以間計之。一百二十有奇。佛殿經藏鍾樓三門僧寮客位。至於庖湢之微。皆極其輪奐。像設則有毗盧遮那左右盧舍那釋迦文巍然當中。萬五千佛五十三佛周匝圍繞居正殿焉。觀音大士千手千眼與文殊,普賢,彌勒,地藏居禪室焉。阿彌陁五十三佛法起菩薩翊盧舍那居海藏之宮。皆極其莊嚴。藏經凡四部。其一銀書者。卽皇后所賜也。華嚴三本。法華八卷皆金書。亦極其賁餙。至若舊有之田。依國法以結計之。千有五十。其在成悅,仁義縣者各二百。扶寧,幸州,白州,各百五十。平州安山各一百。卽成王所捨也。塩盆在通州林道縣者一所。京邸在開城府者一區。其在市廛。爲肆僦人者三十間。凡其錢糓什器之數。有司之者。不載。自泰定間重興檀越如中政使李忽篤怗木兒諸家。列其名氏于碑陰。銘曰。
有山露骨。嶄嵓突兀。名金剛兮。貝書所著。菩薩住處。亞淸凉兮。吹虗烟雲。輪囷絪縕。發神光兮。鳥獸其馴。 蟲虵其仁。草木香兮。釋子卓菴。梯空架巖。遙相望兮。長安精舍。居山之下。大道塲兮。肇基羅代。屢其成壞。時不常兮。天啓聖神。世祖之孫。君萬方兮。德洽好生。照濡含靈。慕空王兮。於惟睿后。軆坤之厚。承乾剛兮。歸心身毒。取彼妙福。奉我皇兮。惟此福地。仙佛奧祕。紛產祥兮。一人有慶。天其申命。壽無疆兮。明兩作籬。永固鴻基。與天長兮。后謂內臣。惟彼法身。其化彰兮。旣新其宮。宜紀其庸。俾無忘兮。有石峩峩。于山之阿。勒銘章兮。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0
●가정집 잡록
■가정기(稼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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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군 중보(李君中甫)는 대대로 삼한(三韓)의 산양(山陽)에서 살아왔다. 거주하는 곳에 뽕과 삼과 벼 곡식 등이 넉넉해서 손님 접대와 혼인과 잔치와 제사 등의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정자를 가(稼)라고 이름 짓고는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삼한은 경사(京師)에서 수천 리 떨어진 곳에 있다. 강과 산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는 가운데, 바다 모퉁이 외진 변두리에 취락을 형성하고 있다. 기름진 들판에서 도롱이를 걸친 채 밭을 갈고 김을 매면서, 아침과 저녁을 살펴 일하고 그치며, 추위와 더위를 살펴 가꾸고 수확하는데, 때에 알맞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논밭에서는 갑절이나 더 곡식이 생산된다. 이처럼 경보(警報)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리는 일 없이 집에서 편안하게 즐기고 있으니, 그렇다면 이런 낙을 누리게 된 그 이유를 알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더군다나 쟁기를 손에서 놓고서 수레를 타고 관을 쓴 벼슬아치라면 더더욱 그 이유를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성조(聖朝)는 해내와 해외 어느 곳이든 신첩(臣妾)으로 삼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는 은덕으로 모두 포용하여 보살펴 주고 은택으로 적셔 길러 주면서, 그 풍성과 교화가 세계 끝까지 번져 가고 입혀지게 하였다. 자기 밭을 갈아서 밥을 먹고 자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는 자들이야 원래 초목, 곤충과 똑같이 태화(太和)의 기운 속에서 유영하면서 왜 그렇게 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선비로서 수레를 타고 관을 쓴 벼슬아치가 된 자라면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대저 왕사(王事)는 오직 농사를 제대로 짓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는 바이다. 왜냐하면 제사에 올리는 자성(粢盛)이 여기에서 나오고, 생활하게 하는 물자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아, 이렇게 함으로써 협동하고 화목하는 기풍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요, 아, 이렇게 함으로써 돈후하고 순일한 풍속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천조(天朝)에 대한 의리를 사모할 줄 아는 자라면 바로 여기에 입각해서 보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저 번방(藩邦)에서 광주리에 담고 전대에 싸서 배를 띄우고 부교(浮橋)를 건너 조공하는 직분을 수행하는 것은 단지 위를 섬기는 일상적인 의전(儀典)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따라서 반드시 쇠로는 낫이나 호미 등 농기구를 만들게 하고 무기는 만들지 말게 해야 할 것이요, 백성들은 밭에서 일하는 것을 숭상하고 그 이외의 말기(末技)는 수치로 여기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선비의 경우는, 아직 벼슬하지 않았을 때에는 농사를 경건하게 여기며 힘쓰고, 일단 벼슬한 뒤에는 반드시 백성의 힘을 아끼고 백성의 농사철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곡록(穀祿)이 돌아올 때에는 김매고 거두어들인 농부의 수고를 생각해야 할 것이요, 사람들에게 정령(政令)을 행할 때에는 논밭의 이해관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엄한 법도로 자신을 단속하면서 사람들을 이롭게 해 주려는 정신으로 일을 행한다면 거의 옳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보(中甫)는 당초에 향리에서 녹명(鹿鳴)을 부르며 올라왔다. 그리하여 춘관(春官 예부(禮部) )에서 기예를 겨루고 천자의 뜰에서 책문에 응한 결과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승사랑(承事郞)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을 제수받았다. 그리고 조금 뒤에 장고 휘정원(掌故徽政院)으로 옮겨졌으며, 얼마 있다가 정동행승상부 원외랑(征東行丞相府員外郞)에 발탁되었다. 아름다운 시대를 만나 그동안 배운 실력을 발휘하면서 시종으로 들어왔다가 번방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이 또한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말할 만하다. 그리고 그가 정자를 이름 지은 것을 보건대, 장차 밭두둑 위에서 김매는 농부나 꼴 베는 늙은이와 서로 어울려 지낼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니, 그렇다면 농사짓는 어려움 같은 것이야 어찌 잊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만하면 보답할 바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지원(至元) 3년(1337, 충숙왕 복위6) 9월 보름에 승직랑(承直郞) 국자감 박사(國子監博士) 왕기(王沂)는 신주(神州)의 관사(官舍)에서 쓰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7
[稼亭記[王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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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君中甫世家三韓山陽。居有桑麻秔稌之饒。賓婚燕祭之用取具。題其亭曰稼。請余記。三韓去京師數千里。重江複關之阻。海隅障徼之聚。襏襫鉏耒於衍沃之野。視晨昕以作止。候寒暑以發斂者。風雨時若。田出以倍。抱鼓之警不聞。室家之樂怡如也。可不知其所自耶。而况釋耒耟而軒冕者。又可不知其所自耶。聖朝薄海內外。罔不臣妾。德之所幷容徧覆。恩之所涵煦生養。聲敎之所漸被。田畊井飮者。固與草木昆蟲游泳太和。莫知其然。士而軒冕者。可不知所以報耶。夫王事惟農是務。粢盛於是乎出。供給於是乎在。於以興和協輯睦。於以成敦厖純固。夫知慕義於天朝。可不出於此歟。彼籯齎槖負。航浮手筰。以修貢職。特事上之常典耳。必也鐵以鎛釤鉏斸而不以兵。民尙田作而恥末技。士之未仕。其恪恭于農。旣仕。必嗇民力。必重民時。糓祿受於己。其思耨穫之勤勞。政令加諸人。毋忽田壄之利病。以繩墨自馭。以愛利爲行。庶乎其可也。中甫始由其鄕歌鹿鳴而來。戰藝春官。策于天子之庭。中乙科。授承事郞翰林國史院檢閱官。已而遷掌故徽政院。未幾。擢征東行丞相府員外郞。逢辰休嘉。方施其所學。入從出藩。亦可謂榮矣。視其名亭。若將與耘夫蕘叟相從於隴畒之上。庸詎不忘民事之囏。其知所以報者夫。至元三年秋九月望。承直郞國子博士王沂。書于神州之官舍。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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