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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海月亭 襄烈公 趙仁璧(1330 ~1393-태조 2년)▣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2. 28.

▣조인벽(趙仁璧) (1330 ~1393-태조 2년)▣

(호는 우계, 海月亭,  시호  襄烈公)

1. 성장과정

  조부가 중국 주나라 목왕이 서언(徐偃)왕을 정벌할 때 큰공을 세워 조성(趙城)에 봉함으로써 그 이름을 따서 조씨라 정하고 중국에서 고려에 귀화하여 용진(덕원)에서 대대로 살았다. 조인벽은 고려 충숙왕 17년 판도판서, 예의판서를 지낸 조돈의 아들로 출생하여 덕원에서 자랐고, 배우자는 하동정씨와 정화공주 두분이시다. 정화공주는 환조의 따님으로 태조 이성계의 누이이다.   


2. 업적

  선생은 고려 29대 충목왕 이하 5대에 걸쳐 평생을 국토방위와 국가 치안에 전력을 바친 문무 겸비한 노 재상으로 왜구 퇴치와 홍건적(중국 원나라 말기 하북지방 도둑의 무리) 격퇴 등으로 무공을 많이 세웠고 학문에도 뛰어났다.

고려 공민왕 5년(1356) 26세 때 아버지와 함께 쌍성회복에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를 도와 이성계 등과 협력하여 많은 공을 세워 호군이 되고 공민왕 11년(1363) 김용(金鏞)토벌에  공을 세워 수복경성(收復京城) 2등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공민왕 20년(1372년) 판사겸 만호로써 가주의 난동자들이 지방관리를 죽이는 일이 있자 그들을 토벌하였으며, 함주․북청에서 복병으로 왜구를  대파하여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랐다.

  우왕 1년(1375)밀직부사로서 충혜왕의 아들을 자칭한 중 석기(釋器)를 잡는데 공을 세우고 다시 동북면 원수로 출정하여  왜구를 토벌했고 1377년 신주․옹진․문화지방에 침입한 왜구룰 공격하였으나 적세가 완강하여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판밀직(判密直))으로서 화포를 사용하여 수군을 훈련시켰고 1379년에는 강릉도원수(江陵都元帥), 다음해엔 강릉도상원수가 되어 왜구를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다.

1383년에 문화찬성사로서 동북면 도체찰사가 되고, 1385년에는 사도도지휘사(四道都指揮使)가, 그리고 곧이어 교주도원수(交州道元帥)가 되었다.   

우왕 13년(1388)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회군(回軍)에 가담하여 삼사좌사(三司左使)를 거처 고려 공양왕 1년 판의덕부사(判懿德府使)가 되고 공민왕 2년 (1390) 위화도 회군의 공으로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1393년 용원부원군에 봉해진 것은 환조(이성계의 아버지)의 딸 정화공주(貞和公主)와 결혼하였기 때문이다.

  고려말엽 장차 혁명이 임박했음을 짐작한 여러 현인들이 은퇴할 의사가 농후할 때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모든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포은 정몽주 선생과는 나이가 7세나 위이지만 왜적을 격퇴하는데도 내치와 외교에서도 또한 시우(詩友))로서도, 넷째 아들 조사의 스승이고 생사고락을 같이한 막역한 사이였다. 이런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일당의 자객에 의해 피살되자 이를 무한히 슬퍼하며 같은 의지를 가졌던 제현들과 숙의하고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모든 관직을 버리고 젊은 시절 소장으로 근무할 때 은혜를 베풀었던 인연이 있는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로 낙향하여 이곳에 동명서원을 설립하고 글을 읽고 시를 지으면서 후생들을 가르쳤다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하고 태조가 되어 매부인 선생에게 지난날 동고동락하던 의리를 생각하여 여러번 조정에 복귀할 것을 권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선생은 이 곳에서 지방사림은 물론 과거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문덕으로 순화하면서 계도하여 무수한 인재를 배출하였다.  본래 호를 우계라고 하였으나 이곳 해당에 정자를 짓고 해월정이라고 현판하고 자신의 아호도 해월정이라 하고 시우 월촌(月村) 정만, 강해 이장년, 도사 혜선 등과 시를 짓고 뜻을 풀며 시흥으로 소일하였다.  강해는 말하기를 「나의 벗 조인벽의 시는 질탕(跌蕩)하고 호매(豪邁)하여 속세의 먼지가 묻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며 혜선 도사는  「조선생은 인간세계 사람이 아니라 그 절개가 고귀하기가 진나라 도연명에 비유된다.」 고 하였다. 

그 당시 이 고장은 왜구를 방어하는 군관들의 수자리(국경울 지키던 일) 촌락으로 지극히 영세한 곳으로서 풍속과 문물이 크게 폐허화되었다. 

조인벽이 학문과 도덕을 일깨워서 풍속을 순화시키면서 자신도 시예로 소일하기도하고 혹은 짝지 집고 산수간에도 거닐며 때로는 도롱이를 걸치고 낚시를 하기도 하며 세상을 잊은 듯이 지냈다.

그리하여 수 백년 후에까지  선생의 덕망이 전해져 오고 있다.       

조인벽 선생의 시 한수가 낙산사 의상대에 있던 것을 동명서원으로 옮기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내용 또한 선생의 마음과 생활을 잘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海月亭遺詩(해월정유시)◑

蝶翊勳名簿   공훈과 명예는 나비 날개와 같이 얇기만 하고
龍惱富貴輕   용뇌 같이 여기는 부귀는 가볍기만 하더라. 
萬事驚秋夢   모든 일은 싸늘한 가을 밤 꿈에 놀다 깨는 것이니
東窓海月明   다 잊고 동창에  비칠 바다의 달이나 쳐다보세.
淡淡西山月   서산에 걸친 달은 히꾸무레하고
靄靄空中雲   공중에 구름이 길게 뻐쳤네
山人不畏虎   산사람이 범도 두려울 것 없어
永野不庵門   밤새도록 문도 닫지 않네. 


이렇게 탈속하고 대자연과 함께하는 시예는 한폭의 그림과 같고 음악과 같다고 하였다.

  선생의 집터 앞을 흐르는 물을 魯連灘(노연탄)이라 하였으니 물이 흘러 바다로 가면 중국의 산동 옛날 공자가 학문을 일으킨 노나라에 통한다는 뜻을 붙인 것이며 흥학(興學)의 결심을 표시한 것이며 바닷가의 바위를 도취석(陶醉石)이라 하였으니 도연명이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사를 읊으며 술 마시던 심정이 상통한다는 뜻을 붙인 것이다.

현재의 조산리를 자상촌(紫桑村)이라 한 것은 도연명이 살던 중국의 산서성 자상산을 뜻한 것으로 모든 물욕과 명예를 버리고 후생교육에 힘쓰고 절개와 지조를 지키면서 낙천으로 생을 마쳤다. 조인벽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고려말 정몽주, 이색, 길재 등 3은과 함께 숭앙되고있는 선비의 귀감이다. 

이태조가 고려말 충신에게도 충절을 표창할 때 선생은 사망 후였는데

추성양절익위보이우공신보국숭녹대부문하좌정승판도평의사사영경연사한산백(推誠亮節翊衛輔理佑功臣輔國崇祿大夫門下左政丞判都評議司事領經筵事漢山伯)이라 하고, 시호를 양렬(陽烈)이라 하였다.

선생은 충의, 도덕의 모범이 됨으로 서원에 모시고 관리와 유림으로 하여금 춘추로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는데 아마 선생의 뜻이라면 아마도 사양하고 받지 않았을 것이다.

3. 동명서원(東冥書院)

   조인벽 선생 사후 200년이 지난 인조 6년(1628) 양양 도호부사로 부임한 조위한이 교육을 우선 치무로 결심하고 학단 설치를 물색하던 차에 마침 대포영(大浦營-지금의 양양 조산)의 군용 건물이 비어 있어 만호와 상의하여 학사로 전용하여 지방학도들의 교학장으로 하였다. 그 당시 양양 지방만이  서원이 없어서 조부사도 서원 설치를 하고 싶었으나 고장에 연고가 있는 선현을 향사하므로써 서원제도에 따르게 되어 지방의 정언, 노경복과 지방유림 대표 최정립, 이현일이 협력하여 강당 뒷편에 사당을 짓고 양열공의 위패를 봉향하고 충현사(忠賢祠)라 하고 강당과 아울러 동명서원이라 재현판한 것이 그 창건경위이다.

조부사는 학도들과 유생들의 식사 제공을 위하여 전답과 소금 굽는 가마와 어선 한 척을 전속시켜 서원 운영을 자급하도록 마련해 주었다. 또 서원의 재산에는 세금도 면제되었고 학도들에게는 부역이나 병역까지도 면제해 주어 공부에만 열중하도록 하였다.  

그후 넷째 아들인 조사(趙師) 선생도 동명서원에 배향(配享)으로 모시게 되었으니 조사 선생은 이성계의 생질로서 통정대부 검지중추부사의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단호히 사양하고 아버지를 따라 양양 조산리에 와서 지극한 효행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지방 후생들을 가르치는데 전력을 하다가 조인벽 선생이 사망한 후에는 치악산 가치천(嘉致川) 근처에서 원경곡․원천석과 오래도록 함께 지내면서 호를 가천제(嘉川齊)라 하였다.

조사는 정몽주의 제자로 선생이 임종시에 유언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포은 선생의 무덤 근처에 장사하여 지하에서라도 따라 놀게 하여 달라.」라고 하였기에 자손들이 그대로 실행하였다.

그후 화재로 동명서원이 소실되어 복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정조 10년(1786)에 순흥 와란에서 옛날 4백년 전에 조인벽 부자에게서 공부한 유림들의 후손들이 힘을 모아 양양, 봉화 등지의 유림들이 합의하여 와란에 동명서원을 옮겨지었는데 현재의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와란)이다.

고종 8년(1871)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려 전국 700여 서원 중에서 사액서원(賜額書院) 47개만 남기고 철폐할 때 동명서원도 옮겨 세운지 85년만에 헐리게 되었다.

광무 2년(1898) 강원도 관찰사 조종필이 양양에 순찰차 왔다가 옛날 동명서원이 없어진 것을 애석하게 여겨 동명서원을 창건했던 조산리 옛터에 유허비를 세워 고현의 유덕을 기리고 후일에 서원을 복구할 기대를 걸고 비문에 표시하였는데 그후 70여년이 지난 뒤 양양의 유림들이 향론으로 서원을 복구할 것을 합의하여 1974년에 복구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고 한양 조씨들도 협력하여 1982년 사당과 강당을 준공하였다.

충현사는 솟을대문을 지나면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고 강당은 충현사와 수직되게 배치하여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퇴청과 실내에 마루를 깔았다.

  1982년 5월 2일 경향 각지의 사림과 후손들이 모여 성대한 봉안식을 거행하고 폐철 당시 봉화 후손들이 영주, 순흥, 와란으로 모셨던 원 충현사 구현판을 모셔다 현판하였다.

4. 관련 행사 :

  유적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 동명서원

  행사 : 매년 춘계(음력 3월중 丁日)과 가을 두 차례  양양의 유림들과 한양조씨들이 모여 제향을 올리고 조인벽 선생의 뜻을 기리며 얼을 본받으려고 하고 있으며 매월 삭망일 (1일, 15일)분향하고 있다.

5. 교육적인 본받을 점

  젊어서부터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김용의 난을 평정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왜적과 홍건적을 물리치는데 힘써 유비무환의 가르침을 주었으며, 또한 바쁜 국토방위의 임무중에도 지역 백성을 배려하고 풍속과 문물을 일깨워 수 백년 후에도 덕만이 전해졌으며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정으로 모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우리 고장의 후생들을 가르치고 풍속을 순화시키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처남이자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부름에도 나가지 않고 욕심을 버리고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면서 여생를 마치었다. 이는 후세 사람들이 나라에 충성을 다하며 옳지 않은 일이면 따르지 않고 물욕을 버리고 자연을 벗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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