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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모계(慕溪) 조강(趙綱)의 청주 창의(倡義)는 어디까지 진실인가?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2. 27.

https://blog.naver.com/demon_illu/222109819156

 

조강의 청주 창의는 어디까지 진실인가?

마지막으로 조강(趙綱)의 임진왜란 의병활동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 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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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및 활동사항

처음 정사현(鄭思顯)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성제원(成悌元)과 송인수(宋麟壽)를 사사하였다. 1563년(명종 18) 학행(學行)으로 목사 이증영(李曾榮)이 천거하여 견호(蠲戶)의 은전을 받았다.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합격, 이듬해 성균관에 들어가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1570년 청주의 유림들과 합의하여 신항서원(莘巷書院)을 창건하였다. 1572년 중부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576년 다시 충청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1579년 영릉창봉(英陵參奉)으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내자시봉사(內資寺奉事)가 되고 이어 별제(別提)로 옮겼으며, 1581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가 되었다.

 

1586년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 등을 거쳐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1589년 장령을 지내고 은진현감으로 나갔다가 얼마 뒤 사헌부집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인산과 보은에서 의병 2,000여명을 일으켜 청주에서 적을 격멸, 전공을 세웠고, 의주의 행재소에 수집한 군량미를 바쳤다.

 

그 뒤 청주의 솔재에서 왜적을 대파하였고, 창의사(倡義使)의 호칭을 하사받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도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거두어 배로 운반하여 명나라의 지원군을 도왔다. 뒤에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모계집』이 있다.

 

▣조강(趙綱)의 임진왜란 의병활동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 문집의 관련 내용을 사건 전개의 순서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선조 25년 : 66세]

1) 문인 전 봉사 정약과 함께 인산(회인)ㆍ삼산(보은)에서 의병 2000여 명을 모으고 7월에 창의기병하다.

2) 건의대장인 호서순찰사 윤선각에게 협력의 글을 올리는 한편 청주의 무악에서 병졸들을 크게 먹이고, 조웅으로 하여금 충주에 주둔하게 하고, 박사현은 청주의 작천에 주둔하게 하다.

3) 용만의 행재소에 이르러 병사와 곡식을 모집하는 상소를 올리고, 돌아와 청주와 진천 등지에서 쌀과 콩 910곡, 정철 390근을 모으다.

4) 솔고개전투에서 왜적 수백여명을 목베고, 종사관 김계종으로 하여금 용만에 알리니 창의사라는 호칭을 하사받다[傳 倭塚傳承].

5) 정약을 우의대장으로, 맏아들 광익을 좌의대장으로 삼아 각각 청주와 공주를 방어하게 하는 한편, 죽산전투에서 600여 명의 적을 목베고, 安山 永平전투에 참가하다.

6) 조헌의 금산전몰 소식을 들었으며 맏아들 광익의 군대는 청주로 돌아왔으나, 백기장군 조웅, 사용 김희식의 순절 소식을 듣다.

[선조 26년 : 67세]

1) 순찰사 윤선각의 창의기병 방해에 분노하여 온양 과안사에 모여 항소할 것을 의논하고 충의위에 격문을 보내다.

2) 온양에서 의병 2000여 명을 규합하다.

[선조 27년 : 68세]

​1) 맏아들 광익이 죽산전투의 군공으로 관직을 수여받고, 과거에 급제하다.

[선조 29년 : 70세]

1) 맏아들 광익이 함남의 진무사에 제수되다.

[선조 30년 : 71세]

1) 가을에 소사전투의 천병에 군량미를 보급하다.

[선조 31년 : 72세]

1) 쌀과 콩 3000곡과 정철 3000근을 모집하여 군수품으로 보급하다.

2) 문인과 자식 중에 여섯 사람이 창의하였으니, '일문육창의'라는 명칭을 얻다.

■위의 내용이 임진왜란이 발발한 선조 25년(1592)부터 정유재란이 수습된 선조 31년(1598)까지 조강이 66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문인 정약(鄭若)을 우의대장, 맏아들 광익을 좌의대장, 김계종을 종사관으로 삼아 2000여 명을 모병하여 솔고개 전투에서 적병 수백 명을 물리치는 것을 시작으로 죽산 전투, 안성 영평 전투에서 적병 600여 명을 목베는 등의 혁혁한 전공을 올린 의병활동의 주요 내용이다. 또한 그는 직접 전투를 수행하는 것 이외에도 군수품의 모집에도 힘써 쌀과 콩 수천 석 및 정철 수천 근을 용만의 행재소 및 소사 전투의 천병에 보급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전란 후에는 자식과 문인 중에서 6명이 창의하였기에 '일문육창의'라는 명칭을 얻었으며, 그 자신은 솔고개전투의 전공으로 창의사에 제수되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문집에 전하는 혁혁한 의병활동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후 왜 그의 창의기병 사적은 충분히 선양되지 못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러한 의병활동 사적의 대부분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투와 직접 관련된 사실은 더욱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임진왜란 관련 전공 인정의 가장 기본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선무원종공신녹권』에서 조강의 이름이나 그 맏아들 조광익 및 처종질 김희식 등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정공신 외에 총 9060명을 1등ㆍ2등ㆍ3등으로 구분하여 전공을 녹훈한 『선무원종공신녹권』에서 청주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조헌과 영규를 비롯하여 박춘무ㆍ이시발 및 충주에서 기병한 조웅 등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으나, 조강의 문집에서 기록하고 있는 인물로는 정약 이외에는 그 성명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임진왜란을 맞아 창의기병한 인물 중에는 때때로 녹훈되지 못한 인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광해군의 분조에 참여한 경우에는 그 즉위 이후에야 공신으로 책훈될 수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강의 경우는 그 공적 내용을 통해서 볼 때 『선무원종공신녹권』에 명단이 나오지 않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란 거의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과 관련된 조강의 문집에 기록된 행적은 다소 과장되었다기보다는 군수품의 모집 내지 지원 등의 제한적 범위에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조강의 의병활동 관련 사실은 충분한 자료적 발굴과 상호비교를 통해서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전호수, 「慕溪 趙綱의 學統과 義兵활동 재검토」, 『우암논총』 제2집, 2009, 174~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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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이 임진왜란 당시 청주에서 창의했다는 이야기는 1904년 간행된 『모계집』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강의 생몰년대(1527~1599)와 모계집의 간행 연도는 지나치게 큰 간격이 있고, 근대에 간행된 문집은 흔히 주인공을 선양하기 위한 왜곡이 발생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강의 창의 기록은 분명 의심할 만한 구석이 있습니다. 1913년 저술된『기년편고』에서도 조강의 창의 이야기가 나타나지만 이것은 거꾸로 『모계집』을 근거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애당초 신뢰하기 힘든 저자가 단독원천으로 전하는 교차검증되지 않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교차검증이 가능할까요? 위에 인용한 논문에서는 『선무원종공신녹권』 명단에 조강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고, 이를 근거로 조강의 창의 기록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9060명에 달하는 선무원종공신 가운데 이름이 실리지 않았다는 것은 이야기의 신뢰성에 상당한 타격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중앙 조정에서 조강이라는 의병장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였다면 선무공신 내지 선무원종공신에서 누락된 것을 이해하기에 충분한 가설이 되지만, 『모계집』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창의사(倡義使)라는 호칭을 하사받을 정도로 중앙 조정에 존재를 알렸다면 선무공신 내지 선무원종공신에서 누락된다는 것은 존재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창의사라는 호칭을 김천일에게 하사한 일이 『선조수정실록』에 실릴 정도로 큰 사건이었음을 감안하면 똑같이 창의사의 호칭을 받은 조강의 이름이 실록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교차검증은 후대에 첨가되었을 수 있는 군더더기를 다 떼어내고 '조강이 창의했다'는 이야기의 근간 자체를 뒤집는 선에는 다다르지 못합니다. 중앙 조정에 상소를 올리고, 창의사의 호칭을 받았다는 말은 임경업이 청 태종의 조카를 죽이고(거짓입니다), 그의 수은갑을 노획했다(이것도 거짓)는 것처럼 후대의 윤색으로 생겨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조강이 적어도 얼마간 의병을 이끌었다'는 기본적인 전제마저 부정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혹시 무언가 교차검증이 될 만한 사료가 있지 않을까요?

 

●있습니다!

허목(1595~1682)의 문집인 『기언』에는 "사헌부 감찰 정공 묘표"라는 글이 존재합니다. 이 묘표의 주인공은 정약(鄭若)으로, 위에 인용한 논문에서 조강의 의병진 가운데 유일하게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된 인물로 나온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묘표에는 조강 의병진에 참여한 일이 생전의 행적으로 들어가 있어야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정약의 묘표에는 오히려 『모계집』의 이야기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서술이 나타납니다. 청주에서 의병진을 이끌었던 사람은 처음부터 조강이 아니라 정약이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당시 조강은 80세에 이른 노인이었다고 하는데, 이 말이 맞다면 『모계집』은 정약의 나이부터 조작한 기록이 됩니다.

 

이듬해(1590)에 어머니 이씨(李氏)가 세상을 떠났다. 정씨 선대의 묘소가 모두 상당(청주)에 있었기에 묘소를 지키며 떠나지 않았다. 이때 왜(倭)가 침구하여 군읍이 다 무너지고 적이 연이어 삼경(三京)을 함락하니 나라가 크게 혼란하였다. 주(州)의 부로들이 의병을 일으키길 꾀하는데 향리에 전 군수 조강(趙綱)이 있어 장자(長者)이므로 사람들이 장수로 추대하였다. 조강이 사양하며 말하길 "나는 이미 팔십이니, 늙어 감당할 수 없다. 우리 고을의 정약(鄭若)이 현명해 장수를 맡길 수 있고 또한 명족(名族)이니 장수를 삼고자 하면 이 사람보다 나을 수 없다. 그 사람이 상중이지만 의리로써 강권하여 일으키면 사양하여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라 하였다. 세 번이나 오가며 부탁한 뒤에야 나섰다. 이에 이웃 현의 여러 의병도 많이 일어났다. 군대에 군량이 없자, 공이 앞장서 의속(義粟)을 모아 군량을 공급하니 군세가 더욱 확장되었다. 김여물(金汝岉)이 충주에서 전사한 뒤로 그의 늙은 어머니가 떠돌다가 연산에서 객사하자, 공이 널을 마련해서 염을 하여 돌려보내니 이것을 들은 사람들이 공을 의롭게 여겼다.

허목, 『기언』 별집, "사헌부 감찰 정공 묘표"

■기언 별집 제24권 / 구묘문(丘墓文)

[사헌부 감찰 정공(鄭公) 묘표]

공은 휘는 약(若)이고 자는 순승(順勝)이며, 성은 정씨(鄭氏)이니 그 선대는 본래 진양(晉陽) 사람이다. 고려 때의 명신(名臣) 정길부(鄭吉孚)의 6세손이며 우리 명종 때의 간관(諫官) 정사현(鄭思顯)의 아들이다. 16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니,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유술(儒術)을 좋아하였다. 우리 선조 22년(1589)에 행의(行誼)로 선발되어 재랑(齋郞)이 되었다. 이듬해에 어머니 이씨(李氏)가 세상을 떠났다. 정씨 선대의 묘소가 모두 상당(上黨)에 있었는데, 인하여 묘소를 지키며 떠나지 않았다.

 

당시에 왜구가 쳐들어와 군읍(郡邑)이 모두 무너졌다. 적군이 연이어 삼경(三京)을 함락하니 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고을의 원로들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면서, 고을에 전에 군수를 지낸 조강(趙綱)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장자(長者)인지라, 다들 추대하여 장수로 삼으려 하였다. 조강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나는 이미 여든이 넘어 늙어서 감당할 수가 없다. 우리 고을의 정약(鄭若)은 현능하여 장수를 맡을 수 있고 또한 명문 집안 출신이다. 장수를 삼으려 한다면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 이 사람이 상중(喪中)인데, 의리를 들어 간곡히 부탁을 하면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세 번이나 오가며 부탁한 뒤에야 나섰다. 이에 이웃 고을의 의병들도 많이 일어났다. 군대에 군량이 없자 공이 앞장서서 의속(義粟)을 모아 군량을 공급하니, 군세(軍勢)가 더욱 확장되었다. 김여물(金汝岉)이 충주(忠州)에서 패몰하고 나서 그의 늙은 어머니가 피난 다니다가 연산(連山)에서 객사하였는데, 공이 널을 마련해서 염(殮)을 하여 돌려보내니 들은 사람들이 공을 의롭게 여겼다.

 

계사년(1593, 선조26)에 왜적이 조약을 맺고 나서 바닷가에 진을 쳤다. 겨울에 상이 서울로 돌아왔다. 일이 있어 공이 소명을 받고 서울에 왔다가, 사온서 봉사(司醞署奉事)가 되었다. 이듬해 여름에 특별히 사헌부 감찰에 제배되었다. 공은 이미 병환이 깊었다. 사은도 하기 전에 홍천 현감(洪川縣監)이 되었는데 공이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나이 48세였다. 뒤에 공로를 논하여 포상을 할 때에 공에게 호조 참의를 추증하였다.

 

부인 인천 채씨(仁川蔡氏)는 세자시강원 좌필선 채륜(蔡倫)의 5세손이다. 부인은 시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겨 선행으로 일컬어졌다. 공보다 7년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공이 세상을 떠나자 광주(廣州) 치소 동쪽 석림강(石林江) 가의 언덕에 합장하였다.

 

아들 둘과 딸 셋을 두었는데, 아들은 이겸(以謙)과 이제(以濟)이고, 사위 셋은 찰방 황담(黃澹), 사인(士人) 한일(韓), 구정(具渟)이다. 이겸이 민첨(民瞻)을 낳았다. 민첨은 성균관 생원인데 아들은 없고 사위가 다섯이니 윤계(尹棨), 박홍원(朴弘遠), 박대진(朴大震), 성하적(成夏績), 이광제(李匡濟)이다. 모두 사인(士人)이다. 이제는 민각(民覺), 민일(民逸), 민헌(民獻)을 낳았다. 민헌은 성균관 학유이다. 사위 다섯은 교관 김중영(金重榮), 정시식(丁時栻), 홍처민(洪處敏), 윤징리(尹徵离), 남궁후(南宮?)이다. 한일은 아들이 한유행(韓有行), 한유형(韓有衡), 한유간(韓有衎)이고 사위 둘은 이유징(李幼澄)과 군수 유시성(柳時成)이다. 황담과 구정은 자녀가 없다.

 

[주-D001] 정사현(鄭思顯) : 1509~1564. 자는 백미(伯微)이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에게 수업(受業)하였으며, 진우(陳宇), 김희년(金禧年), 장임중(張任重), 유경인(柳敬仁) 등과 교유하였다.

명종 때에 예문관 봉교, 병조 정랑, 예조 정랑,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아들은 정길(鄭吉), 정곡(鄭谷), 정약(鄭若)이고 사위는 조수준(趙守準), 민덕봉(閔德鳳)이다. 《記言 別集 卷25 司憲府持平鄭公墓陰記, 韓國文集叢刊 99輯》

 

[司憲府監察鄭公墓表]

公諱若。字順勝。姓鄭氏。其先本晉陽人。高麗名臣鄭吉孚之六世孫。而我明宗諫官鄭思顯之子也。十六。先府君歿。事母至孝。好儒術。我宣祖二十二年。以行誼選爲齋郞。明年李氏歿。鄭氏先葬。皆在上黨。因守塜不去。時有倭寇。郡邑皆潰。賊連陷三京。國大亂。州父老謀擧義兵。鄕有前郡守趙綱。長者。衆推以爲將。綱辭曰。吾已八十。老不能。同州鄭若。賢可任將。且名族。欲拜將。無出此人。其人居憂。以義強起之。無辭以拒之也。旣三返。乃起。於是傍縣諸義兵多起。而軍無見糧。公首募義粟。以給軍食。軍勢益張。自金公汝岉敗沒於忠州。其老母奔竄。客死連山。公爲之棺殮以歸。聞者義之。癸巳。賊旣約成。屯海上。冬。車駕還京。有事公召至京師。爲司醞署奉事。明年夏。特拜司憲府監察。公旣病革。未謝爲洪川縣監。已歿矣。年四十八。後論功賞。追爵戶曹參議。夫人仁川蔡氏。世子左弼善倫之五世孫也。夫人事姑有至誠。稱善行。先公七年而歿。及公歿。合葬於廣州治東石林江上之原。有二男三女。以謙,以濟。壻三人。察訪黃澹,士人韓,具渟。以謙生民瞻。成均生員。無子。女壻五人。尹棨,朴弘遠,朴大震,成夏績,李匡濟。皆士人。以濟生民覺,民逸,民獻。民獻成均館學諭。壻五人。敎官金重榮,丁時栻,洪處敏,尹徵离,南宮?。韓生有行,有衡,有衎,有衍。壻二人。李幼澄,郡守柳時成。黃澹,具渟。無子。

한국고전번역원

이제 관건은 『모계집』과 『기언』 가운데 어느 기록에 더 신빙성을 두는지가 됩니다. 앞서 본 것처럼 『모계집』은 근대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주인공을 선양할 의도가 다분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믿기 힘든 자료였습니다. 반면 『기언』은 임진왜란 당시와 시간적 간격이 비교적 가깝고, 정약의 자손을 모두 열거하고 있는 점에서 자료의 원천도 직접적인 증언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이런 자질구레한 가능성보다 더욱 확실하게 『기언』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정약이 청주의 대표 의병장으로 활동하는 모습이 다른 자료를 통해 교차검증이 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가 『선무원종공신녹권』에서 공식적으로 녹훈된 것도 있지만, 조익의 『진사일기』에서도 1592년 9월 당시 청주의 의병진을 실제로 이끄는 사람은 조강이 아니라 정약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주(本州)에 머물렀다. 청주 의병장 정약(鄭若)이 의병 수백 인을 거느리고 와서 읍내에 진을 쳤다. 내가 왔다는 것을 듣고는 와서 만나고 일을 의논하였다.

『진사일기』 임진년 9월 26일

 

물론 허목에게 자료를 제공한 사람이 악의적으로 조강을 지워버리고 정약을 청주 의병진의 주인공으로 삼았을 수도 있습니다. 조익이 당시 청주 의병진의 조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우의대장 또는 우부장(右部將)을 의병장으로 단순히 퉁쳐서 적었을 수도 있습니다. 조선 조정이 선무원종공신을 녹훈하면서 자신이 창의사로 사호까지 했던 인물은 잊어버린 주제에 정작 그 밑에 있던 부장급 인물은 실어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간단하고 합리적인 대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모계집』에 실린 이야기가 그 기초부터 허구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단 조강과 그 아들 조광익(趙光翼)의 실존 여부까지 의심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조강의 존재는 이미 "사헌부 감찰 정공 묘표"를 통해 확인되는 셈이고, 조광익의 이름도 『선무원종공신녹권』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공을 기리는 『청난원종공신녹권』에서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청난원종공신녹권』에서 2등 원종공신의 첫머리를 바로 이 첨정(僉正) 조광익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조광익이 가진 첨정이라는 관직이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니, 어쩌면 조광익은 의병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의병진에 참여한 공으로 첨정의 관직을 받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모계집』의 이야기에서 의병장의 자리만 조강이 아니라 정약으로 바로잡으면 그 휘하에 참여했던 조광익의 군공은 상충되는 또 다른 자료가 나오지 않는 이상 잠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충청 1도는 적의 인후(咽喉)로서, 적들이 청주에 들어간 지 이미 넉 달이 넘었으니, 날마다 우도(右道)를 엿보며 흉독을 부려 우리 복심의 근심이 된 지 오래입니다. 승려 영규가 의(義)를 분발하여 스스로 중들을 많이 모아 성 밑으로 진격하였는데, 제일 먼저 돌입하여 마침내는 청주성을 공략하였습니다. 그 호령을 보면 바람이 이는 듯하여 수하에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고 질타하는 소리에 1천 명의 중들이 돌진하니 뭇 군대가 이들을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고 합니다. 큰 공로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인품과 재기도 심상치 않으니 우선 포상하고 환속하게 하소서. 연기현감 임태(任兌)와 문의현감 남절(南截)은 마음을 다해 적을 방어하였는데 시종 자신을 잊고 해이한 적이 없었습니다. 임태가 으뜸이었다고 하니 임태는 3품으로 초승하고, 남절은 4품에 초승하소서. 조광익(趙光翼)은 시종 분주하다 탄환을 맞고서도 분발하여 적을 쏘았다고 하니 걸맞는 벼슬을 제수하소서. 충의위 이흥종(李興宗)은 향곡의 군사를 취합하여 적을 죽임이 대단히 많은데다가 북문이 무너질 때 홀로 몸을 돌려 적을 쏘아 흉적의 예봉을 꺾었으니 6품의 벼슬을 제수하소서. 그 나머지 군공은 감사가 뒤따라 마련하여 계문하게 한 뒤에 조처하소서.

『선조실록』 임진년 9월 11일

 

[추신]

1904년 간행된 『모계집』보다 앞서서 1871년 『호서읍지』에서 조강에 대한 간단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시간 간격으로 보아 이것은 『모계집』의 기록이 맞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정약의 기의가 조강의 것으로 바뀌고 있는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즉 『모계집』의 기록은 한 개인이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축적된 증언의 왜곡이 최종적으로 반영된 것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청주에는 조강이 세운 신항서원(新巷書院)과 조강을 제향하는 송천서원(松泉書院)이 있었는데, 두 서원이 그에 대한 기억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왜곡이 이루어진 결과 정약 대신 조강을 청주 의병진의 수장으로 상상하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조강(趙綱)]

진사에 합격, 성균관의 천거로 관직이 현감에 이르렀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머니가 병들어 들오리(野鴨)를 먹었던 생각이 난다고 하니, 당시가 여름날이라 이를 구해도 얻지 못했다. 근심하여 곡하던 참에 갑자기 매가 오리를 쳐서 앞에 떨어뜨리니 곧장 이를 가져다 드리자 병이 나았다. 임진왜란에 의병 수천을 창솔(倡率)하여 죽산에 진을 치니 공이 가장 많았다. 무술년에 곡식 수천 곡(斛)을 모으고, 쇠 1천 근을 모아 군수에 보태었다. 피눈물로 상소하길 나라의 치욕을 씻지 못한 것이 자신의 죄라고 청한 상소가 야사에 보인다. 선묘조(宣廟朝)에 신명이 감응한 일을 듣고 특별히 복호(復戶)하였고, 현묘조(顯廟朝)에 좌승지를 추증하였다. 호는 모계(慕溪)

『호서읍지』 청주 인물 (1871)

 

[결론 요약]

ⓐ 『모계집』의 기록은 근대에 이르러 조작된 거짓이다!

ⓑ 1592년 9월 시점에 청주 의병장은 조강이 아니라 정약이었다!

ⓒ 다만 조광익의 전공은 잠정적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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