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漢陽人문화유적❀

▣광해군의 동서인 무첨정(武僉正) 조국필의 사촌 여동생, 현령공 조국신의 여동생이었다.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6. 5.
728x90

▣광해군의 동서인 무첨정(武僉正) 조국필의 사촌 여동생, 현령공 조국신의 여동생이었다.

●제15대 광해주(광해군)의 후궁
●궁인 한양조씨(宮人 漢陽趙氏, ?년-?년)
▣14세조 조국신의 딸은 "전주인, 행 좌참찬 공판공 향파(香坡) 이익한(李翊漢) 配(부인)" 

궁인 한양조씨(宮人 漢陽趙氏, ?년-?년)은 조선 중기의 제15대 광해주(광해군)의 후궁으로 본관은 한양이다.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가천재(嘉川齋) 조사(趙師)의 8대 손녀이며, 현령(縣令) 조맹발(趙孟發)의 7대 손녀이다. 증 승지(承旨) 문응교(文應敎) 동래백(東萊伯) 조광언(趙光彦)의 현손녀이고, 증 좌찬성(左贊成) 정익공(貞翼公) 금재(琴齋) 조변(趙汴, 1500년-1582년)의 증손녀이며, 증 좌찬성(左贊成) 조수린(趙壽麟)의 손녀이다. 아버지는 증 영의정(領議政) 호성공신(扈聖功臣) 무지사(武知事) 조의(趙誼, 1548년-1621년)이며, 어머니는 안동인(安東人) 권침(權琛)의 딸로 증 정경부인 안동권씨(貞敬夫人 安東權氏)이다. 외조부는 강리공(姜利恭)이다. 남동기(男同氣)로는 무첨정(武僉正) 조국필(趙國弼), 현령(縣令) 조국신(趙國信), 첨지(僉知) 조국현(趙國賢), 무과(武科) 조국언(趙國彦, 1595년-?년), 여동기(女同氣)로는 감찰(監察) 파평인(坡平人) 윤계(尹啓)에게 출가, 첨지(僉知) 안동인(安東人) 권이중(權以中)에게 출가, 현령(縣令) 연안인(延安人) 이여항(李汝恒)에게 출가, 한도제(韓道濟)에게 출가하였다.

궁인 한양조씨는 언제 궁에 들어온지는 알 수 없지만 광해군에게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양조씨 족보에서도 궁인 한양조씨에 대해 찾을 수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에 나오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1617년(광해 9) 9월 28일 조국철이 아버지의 추록을 청하다.

내금위 조국철(趙國哲)이 상소하여, 그의 아버지 조의(趙誼)가 무신년에 이진(李珒, 왕자 임해군)을 체포할 때 첫째 공이 있었는데 훈록(勳綠)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소송하면서, 추록(追錄)해 줄 것을 청하였다.

【조국철은 바로 조국필의 종부제(從父弟)이고, 그의 사촌누이(조국필 여동생)는 광해군의 후궁으로 들어가 총애를 받았다】

▣현령(縣令) 조국신(趙國信, ?년-?년)

●조국신(趙國信, ?년-?년,14권7편)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양, 휘는 국신(國信)이다.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가천재(嘉川齋) 조사(趙師)의 8대손이며, 현령(縣令) 조맹발(趙孟發)의 7대손이다. 증 승지(承旨) 문응교(文應敎) 동래백(東萊伯) 조광언(趙光彦)의 현손이고, 증 좌찬성(左贊成) 정익공(貞翼公) 금재(琴齋) 조변(趙汴, 1500년-1582년)의 증손이며, 증 좌찬성(左贊成) 조수린(趙壽麟)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증 영의정(領議政) 호성공신(扈聖功臣) 무지사(武知事) 조의(趙誼, 1548년-1621년)이며, 어머니는 안동인(安東人) 권침(權琛)의 딸로 증 정경부인 안동권씨(貞敬夫人 安東權氏)이다. 외조부는 강리공(姜利恭)이다. 남동기(男同氣)로는 형 무첨정(武僉正) 조국철(趙國哲), 동생 첨지(僉知) 조국현(趙國賢), 무과(武科) 조국언(趙國彦, 1595년-?년), 여동기(女同氣)로는 감찰(監察) 파평인(坡平人) 윤계(尹啓)에게 출가, 첨지(僉知) 안동인(安東人) 권이중(權以中)에게 출가, 현령(縣令) 연안인(延安人) 이여항(李汝恒)에게 출가, 한도제(韓道濟)에게 출가하였다. 광해군 후궁 한양조씨도 있다.

증 영의정 조의(趙誼)의 2남으로 탄생하여 현령(縣令)을 지내고, 1623년(인조 1) 7월 27일 이신(李愼)ㆍ유응형(柳應泂)ㆍ유응시(柳應時)의 고변(告變)으로 궐정추국(闕廷推鞫)을 도총부(都摠府)에 설치하고 본부(本府)는 동소(東所)로 옮겼다. 고변한 사람들이 문서 한 통을 바쳤는데, 잡힌 자는 파총(把摠) 권대진(權大振) 등 33인이고, 문관으로는 기자헌ㆍ유집(柳潗)ㆍ유약(柳瀹)ㆍ이광유(李光裕)ㆍ최전(崔佃)ㆍ허직(許稷)이라 한다. 그리고 밖에서 잡힌 자는 60여 인이라 한다. 기자헌은 합사의 밀계(密啓)로 잡혔는데, 이신 등이 고변하였던 것이다. 전교하기를, “대신 및 추관을 명초하라.” 하였다.

기자헌의 상소에 비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보고 경이 순격의 잘못을 몰랐던 것을 잘 알았소. 소를 올리지 않더라도 내가 이미 알고 있었소. 경에게는 조금도 대명할 일이 없으니, 모름지기 안심하고 조리하오.” 하였다.

합사의 비밀 계에 비답을 봉하(封下)하였는데, 기자헌의 일이라 한다. 금부가, 죄인 기자헌ㆍ이광유(李光裕)ㆍ정침(鄭沈)ㆍ채겸길(蔡謙吉)ㆍ허직(許稷)ㆍ신대지(申大枝)ㆍ유집(柳潗)ㆍ유약(柳瀹)ㆍ이광철(李光哲)ㆍ양응심(梁應深)ㆍ이명길(李命吉)ㆍ조익도(趙益道)ㆍ윤수겸(尹守謙)ㆍ최수선(崔秀善)ㆍ옥지(玉只)ㆍ최전(崔佃)ㆍ한창국(韓昌國)ㆍ이광호(李光澔)ㆍ이홍지(李弘社)ㆍ이수경(李守敬)ㆍ형 조국철(趙國哲)ㆍ조국신(趙國信)ㆍ채흥효(蔡興孝)ㆍ위정철(魏廷哲)ㆍ이기(李耆)ㆍ최성립(崔成立)ㆍ권대진(權大振)ㆍ유홍원(柳弘遠)ㆍ노사준(盧士俊)ㆍ오영길(吳永吉)ㆍ박길선(朴吉瑄)ㆍ신훈(申櫄)ㆍ이양(李壤)ㆍ유흥원(柳興元)ㆍ최유건(崔有建)ㆍ한흥국(韓興國)을 잡아다 국문하였다.

인조 1년 계해(1623) 7월 27일(을묘) 하루 종일 흐리고 비 옴

01-07-27[06] 의금부가 죄인 기자헌 등을 나국하였다

의금부가 죄인 기자헌, 이광유(李光裕), 정침(鄭沈), 채겸형(蔡謙亨), 허직(許稷), 신대시(申大時), 유약(柳瀹), 유집(柳潗), 이선철(李先哲), 양응심(梁應深), 이명길(李命吉), 조익도(趙益道), 박수겸(朴守謙), 최수선(崔守善), 옥이(玉伊), 최전(崔沺), 한창국(韓昌國), 이광호(李光澔), 이홍지(李弘祉), 이수경(李守敬), 조국철(趙國哲), 조국신(趙國信), 채흥효(蔡興孝), 위정철(魏廷喆), 이기(李耆), 최성립(崔誠立), 권대진(權大振), 유홍원(柳弘遠), 노사준(盧士俊), 오영길(吳永吉), 박길선(朴吉瑄), 신훈(申櫄), 이양(李壤), 유흥원(柳興元), 최유건(崔有建), 한흥국(韓興國)을 나국하였다.

[주-D001] 신훈(申櫄) : 신훈의 ‘훈’자가 이날 기사에는 ‘櫄’으로, 28일 기사에는 ‘熏’으로, 30일 기사에는 ‘薰’으로 표기가 혼재되어 있고, 《인조실록》 및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는 ‘

’으로 표기 되어 있다.

승정원일기 2책 (탈초본 1책) 인조 1년 7월 27일 을묘 5/13 기사 

1623년  天啓(明/熹宗) 3년 義禁府에 拿鞫된 罪人들의 명단

○ 禁府拿鞫罪人奇自獻·李光裕·鄭沈·蔡謙亨·許稷·申大時·柳㵸·柳潗·李先哲·梁應深·李命吉·趙益道·朴守謙·崔守善·玉伊·崔沺·韓昌國·李光澔·李弘祉·李守敬·趙國哲·趙國信·蔡興孝·魏廷喆·李耆·崔誠立·權大振·柳弘遠·盧士俊·吳永吉·朴吉瑄·申櫄·李壤·柳興元·崔有建·韓興國。


이 사건으로 별세 한 것으로 보인다. 한양조씨 족보에 생몰년, 관직, 부인, 자녀, 묘소 기록이 없어 내력은 알 수 없다.

딸은 제14대 선조대왕의 사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현손이자 종실 밀산군(密山君) 정혜공(靖惠公) 이찬(李澯)의 장남 증 좌참찬(左參贊) 행 이조참판(吏曹參判) 향파(香坡) 이익한(李翊漢)에게 출가하여 자녀로는 4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통덕랑(通德郞) 이홍우(李弘遇)는 첨정(僉正) 성원(成遠)의 사위, 차남은 진사(進士) 이홍규(李弘逵)는 사과(司果) 윤류(尹瑬)와 유장경(柳長庚)의 사위이자 종실 밀성부정 이면의 아들 부사과(副司果) 이진한(李振漢)에게 출계하여 종실 밀성부정 사손이 되었다. 3남은 군수(郡守) 이홍정(李弘廷)은 부제학(副提學) 오탄(梧灘) 심유(沈攸)의 사위, 4남은 성균진사(成均進士) 이홍진(李弘進)은 이조판서(吏曹判書) 북정(北汀) 홍처량(洪處亮) 사위, 장녀는 숙인 전주이씨(淑人 全州李氏)은 군수(郡守) 이열(李悅)에게 출가, 2녀 증 정부인 전주이씨(貞夫人 全州李氏)는 증 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량(韓聖亮)에게 출가, 3녀 증 정부인 전주이씨(貞夫人 全州李氏)는 증 이조참판(吏曹參判) 행 사포서 별검(司圃署 別檢) 윤하명(尹夏明)에게 출가하였다.

덕흥사적연구회장 이학주 씀.

 

   ▣이익한[전주인, 공판, 李翊漢치흠(稚欽), 향파(香坡)]▣   

조선
1609년(광해군 1)
1668년(현종 9)
통천군수, 충청도관찰사, 공조참판
인물
문신
현감죽계조응록묘비문(縣監竹溪趙應祿墓碑文)
역사/조선시대사
전주(全州)

조선후기 통천군수, 충청도관찰사,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 ▲ 이익한의 간찰, 혼례에 쓸 기름과 꿀을 부탁하며 보낸 편지.  =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흠(稚欽), 호는 향파(香坡).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4대손이며, 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당은군(唐恩君) 이인령(李引岭)이다. 아버지는 밀산군(密山君) 이찬(李澯)이며, 어머니는 이유훈(李有訓)의 딸이다. 配는 한양조씨 가천재공-현령공파 14세 조국신(趙國信, ?년-?년)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참봉으로 1651년(효종 2)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통천군수가 되었으나 김세룡(金世龍)의 처의 일로 파직되었고, 1655년에는 금성현(錦城縣)에 있는 경현사(景賢祠)의 일로 참의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661년(현종 2) 판결사가 되어 가선대부에 올랐다. 1664년 2월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서천(舒川) 천방사(千房寺)의 승려가 일으킨 폭동을 공주영장(公州營將) 양일한(楊逸漢)으로 하여금 자기 소관이 아닌 한산(韓山)·임천(林泉) 등지에 파견하여 승려들을 체포하고 진압한 사실이 뒤에 조정에 보고되지 않은 것이 알려져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공조참판이 되고, 1667년 동지사의 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북경에서 죽었다. 글씨에 능하였는데, 특히 송설체(松雪體)로 일가를 이루었다. 글씨로는 「현감죽계 조응록 묘비문(풍양조씨, 縣監竹溪趙應祿墓碑文)」 등이 있다.

https://blog.naver.com/madangca/221006945280

 

(문신) 향파 이익한, 정부인 한양조씨 -전주이씨-

이익한(李翊漢, 1609년 - 1668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종실 정혜공 밀산군(密山君) 이찬(...

blog.naver.com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