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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오죽재(梧竹齋) 조의양(趙宜陽)◑
▣ 오죽재집(梧竹齋集) 상.중.하▣
◐梧竹齋集. 天, 地, 人
표제/책임표시사항 | 梧竹齋集. 天, 地, 人 / 趙宜陽 |
판사항 | 木活字本 |
발행사항 | [刊寫地未詳]: [刊寫者未詳], 1921 |
형태사항 | 3冊; 31.5 ×21.5 cm |
주기사항 | 柳割瘦永, 金浩根 |
■오죽재문집(梧竹齋文集)■
○오죽재집 상(梧竹齋集 上)
○오죽재집 중(梧竹齋集 中)
○오죽재집 하(梧竹齋集 下)
●오죽재 : 경북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 262-1
●경북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 261-2
●기와가 헐려 사라짐!
오동나무와 대나무로부터 봉황을 끌어들이고, 다시 군자의 덕을 끌어들이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매곡리 67-7
[봉황산]
경북 안동시 풍산읍 매곡리 119-1
(도로명)경북 안동시 풍산읍 봉황길 26
일대에 남덕대(覽德臺)가 있었고,
오죽재가 있던 곳 일터~~~
최근에 오죽재는 새로이 짓였던 재실을 몇년에 사라져 버렸네~~~
<오죽재문집서(梧竹齋文集序)>
백년이 넘은 기록을 평론하자면 보고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데 미치지 못한다면 어찌해야 좋을까? 이 또한 방법이 있으니 당시의 인정된 평판을 살펴볼 뿐이다. 몸소 살펴보면 상세히 알 것인데 옛사람의 감식안이 지금보다 한 등급 높았으니 함부로 재단할 수 없고, 특히나 후세에 확실한 것을 전하는 것에 비할 바 아니니, 어찌 후세에 모색하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오죽재(梧竹齋) 조공(趙公)의 세대는 이미 백년이나 오래 되었고, 후생인 소자는 늦게 태어나 이에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였고, 문무에 정통한 지식을 쉽게 엿볼 수가 없던 차에 그 세대를 논하자면 유학이 흥성하여 석학이 빼곡히 늘어섰다. 사사한 분으로는 눌옹(訥翁) 이광정(李光庭, 1674-1756) 선생이 있고, 교유한 분으로는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 1723-1801) 옹,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 1719-1791) 공이 있는데, 삼현은 한 마디로 말하면 천고에 이름을 남길 수 있기에 충분하다. 눌옹은 시는 한위(漢魏) 시를 본 받으라 격려하였고, 간옹은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시에서 추숭하고 힘쓰길 기대함이 지극하였다. 간혹 성난 사자가 돌을 후벼내는 듯하다. 비유하자면 격조와 기세는 간혹 봉황이 오동나무에 깃들고 광채를 비추고 종장이자 거장이라서 모두 한 마디가 이와 같으니, 이와 같은 평판을 주인이 어찌 평판을 고칠 수 있겠는가? 유고 3책이 장차 세상에 널리 퍼질 터인데 문장은 진실로 넉넉하고 완곡하며, 시는 더욱이 고아하고도 힘차고 범상치 않고 강건하며, 소리는 자연과 통하고 흥취가 정신적 소통으로 넘쳐나니 모두가 뜻을 무궁함에 기탁하고 흥을 사물 밖에 맡겼으니 쟁쟁 운문의 궁성(宮聲)과 우성(羽聲)이 석진(石陣)의 북과 깃발에 삼엄하게 벌려놓은 듯하다. 그러하나 시를 모르는 사람은 그 울타리를 살펴보지 못하고 망녕되이 정론하여 오로지 선배의 말로써 그것이 한위의 시일 뿐이자 이백과 두보의 시일 뿐이라고 믿게 되니, 왕세정(王世貞, 1526-1590), 이몽양(李夢陽, 1475-1529)은 더 따질 것도 없다.
공은 쌓은 지식이 풍부하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소시(小試)에 그쳤을 뿐이니 산수가 나의 지난날 약속이요, 경전이 나의 참다운 즐거움이었으며 기이한 책에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고 늙어서는 더욱이 주자(朱子, 1130-1200)와 퇴계(退溪, 1501-1570)의 책을 좋아하여 시집에 차운한 시가 천편에 이르니 수식에만 힘쓰고 많다고 뽐낸 것이 아니다. 경모하여 읊조리는 사이에 황홀하여 음성의 가르침을 따르고 감동하여 흥이 일어나는 실마리를, 어떤 사람은 그것의 오묘함을 알지 못할 것인데, 시를 잘 짓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 다른 날 이 문집이 시인의 운치 밖에서 공을 구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거의 터득할 것이다.
갑인년(1914) 매우절(6, 7월)에 완산 유필영(柳必永) 삼가 씀
尙論百歲以上睹記, 有不及智見, 或未逮, 若之何而可也? 是亦有道, 攷論當時之定評而已. 躬閱親見者, 旣知之詳, 古人鑑識高於今一等, 秤稱不苟, 尤非後世比傳信, 豈由後摸索者之可擬哉. 梧竹齋先生趙公之世, 已百年古矣, 後生小子有生晩, 未及之嘆, 經箱武庫, 未易窺測間常論其世斯文盛際, 鴻碩林立也, 師事有訥翁李先生, 交遊有海左丁公艮翁李公, 三賢一言足以千古. 而訥翁勉以詩效漢魏, 艮翁待以李杜之間推詡期勉至矣. 或以怒猊決石, 譬其格力, 或以瑞羽棲梧, 贊其光彩, 宗匠鉅工, 咸一辭如是, 汝南月朝, 疇人敢改評哉. 遺集三冊, 將廣于世, 文固贍鬯紆餘, 詩尤蒼健奇崛, 聲通於自然, 趣溢於神會, 類皆托意於無外, 寓興於物表. 鏘鏘雲門之宮羽森列石陣之旗鼓. 然瞢於詩者, 未可窺其藩籬, 妄爲論隲, 只以前輩之言, 信其爲漢魏而已李杜而已, 弇峒不足數也.
公蘊蓄宏富, 未時與遇而小試, 則山水, 吾宿契也, 典墳吾眞樂也, 僻書滾帙, 靡不淹貫而晩來尤好朱退書, 詩集次韻, 至累千篇, 非是役藻而誇多也. 景慕吟咏之際, 怳然音旨之聆而感發興起之端, 自有人不及知之妙, 工詩特餘事也. 他日之是集者求公於詩家韻格之外, 庶乎其得之矣.
閼逢攝提格梅雨節完山柳必永謹序
◐눌옹(訥翁) : 이광정(李光庭, 1674-1756)을 가리킨다. 이광정의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이며,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이현일과 이재(李栽), 권두경(權斗經), 권두인(權斗寅)에게 학문을 배웠다. 평생을 학문에 종사하여, 경상 감사를 지낸 조현명(趙顯命)과 김재로(金在魯)가 그를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영남 제일의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 문집으로 ≪눌은집(訥隱集)≫(22권 11책, 한국문집총간), ≪망양록(亡羊錄)≫이 있다.
◐정범조(丁範祖, 1723-1801): 조선 문신이다. 자는 법세(法世), 호는 해좌(海左), 시호는 문헌(文憲),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벼슬은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내고 판서에 이르렀다. 저서에 ≪해좌집(海左集)≫이 있다.
◐이헌경(李獻慶, 1719-1791):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성경(星慶), 자는 몽서(夢瑞), 호는 간옹(艮翁), 백운정(白雲亭), 현포(玄圃) 등이다. 홍명한(洪名漢), 신광수(申光洙)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 ≪간옹집(艮翁集)≫이 있다.
◐노예결석(怒猊決石): 당나라 때 명필 서호(徐浩)가 일찍이 42폭의 병풍을 썼는데, 여기에는 팔체(八體)가 다 갖추어진 데다 초서와 예서가 더욱 뛰어났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 서법을 형용하여 말하기를, “성난 사자가 돌을 후벼낸 듯, 목마른 준마가 샘으로 내닫는 듯하다.(怒猊抉石, 渴驥奔泉)”라고 했다.
◐여남월조(汝南月朝): 여남월단(汝南月旦)과 같은 말로 어떤 인물에 대해서 품평하는 것을 말한다. 여남에 살던 후한(後漢)의 허소(許劭)와 허정(許靖) 형제가 매월 초하루(月旦)에 향리의 인물들에 대해서 평을 했던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後漢書≫ 卷66 <許劭列傳>에 보인다.
◐벽서(僻書):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기이한 내용의 책으로, 기문벽서(奇文僻書)라고도 한다.
◐유필영(柳必永, 1841-1924)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달(景達), 호는 서파(西坡), 안동에서 세거하였다. 아버지는 유정진(柳定鎭)이며, 어머니는 예천권씨(醴泉權氏)로 권교상(權敎相)의 딸이다.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이고, 권연하(權璉夏)·이만각(李晩慤)·김흥락(金興洛)·김도화(金道和) 등과 교유하였다. 집안에 전하여지는 학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14, 15세의 나이로 사서삼경은 물론 제자서(諸子書)에까지도 박통하여 영남의 문맥을 이어받았다는 칭예를 받았다. 후일 유치명에게 수학하고 돌아와서 주서(朱書)를 탐독하고는 학문의 심오한 경지를 터득하였다.
또한, 고조부인 유정원(柳正源)으로부터 전하여져오는 역학(易學)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시경≫에도 조예가 깊어 새로운 주석을 시도하였다. 스승 유치명의 ≪정재집(定齋集)≫ 원집과 속집을 편집하였다.
1919년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영남을 주축으로 한 한국 유림은 독립청원서를 보냈는데, 이때 파리장서에 서명하여 항일 의지를 확고히 밝혔다. 이 거사를 전후해서 남도에는 곽종석(郭鍾錫)이요, 북도에는 유필영이라 하여 ‘남곽북유(南郭北柳)’라고 불렸다. 유필영은 서파정사(西坡精舍)에 몰려드는 후진을 양성하는 방법으로 먼저 시(詩)로써 마음을 발양(發揚)시키고 다음에 예(禮)로써 율기(律己)하도록 하였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호정(戶庭)의 출입도 삼가하였다. 또한 기미년 만세사건에 연루되어 성주에까지 연행되기도 하였다. 저서로 ≪서파문집(西坡文集)≫(26권 13책, 국립중앙도서관)이 있다
◐오죽재(梧竹齋)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志中樞府事) 오죽재(梧竹齋) 조의양(趙宜陽)◑
●오죽재 : 경북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 262-1
●기와가 헐려 살아짐!
◐남덕대(覽德臺) [바위] : 감천면 천향리(泉香里) 오향 남쪽에 있는 큰 바위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남덕대(覽德臺) [亭子] : 감천면 천향리 오향(梧香) 남쪽 봉황산(鳳凰山) 아래에 있는 정자로, 조선 영조 때 한양인 오죽 조의양(梧竹趙宜陽)이 살면서 소요 강학하던 곳이다. 구곡 이중륙(九曲李重륙, 1728-1804)이 시로써 이르기를, "오죽재 운을 차운한다(오향동에 있는 남덕대)// 들리는 말로는 국화절에 마신다 하니/ 술 친구가 어디서 같이 갈런가/ 작년에 수수밭은 도연명과 함께 김 멨는데/ 이 달에 화산으로 출타하고 없다네/ 봉황이 오대(梧臺)에 내리니 마땅히 남덕(覽德)을 보았고/ 사람은 바라지(억창)를 따라서 스승을 찾는구나/ 이별한 때가 되어 나에게 시운을 주니/ 구슬같은 글줄이 비취같이 아름답네//"라고 하였다.(國譯 九曲集 1999, 朝鮮寰輿勝覽 1929, 醴泉郡誌 1939)
◐남덕대(覽德臺) [樓臺] : 감천면에 있는 누대로, 한양인 오죽재(梧竹齋) 조의양(趙宜陽)이 강학하던 곳이다. 후손 조동운(趙東雲)이 관리하고 있다.(醴泉鄕校誌 2004)
◐남덕대 : 조의양(趙宜陽) 봉황성(鳳凰城) 아래에 남덕대(覽德臺)를 세우고, 자호인 ‘오죽재’로 편액하여 걸어 두고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조석시(趙錫時)`조석양(趙錫良)이다. 묘는 예천군 감천면에 있다. 저서로 .../ people.aks.ac.kr/front/tabCon/ppl (daum 2016)
◐남덕대 : 예천의 자랑 2871 : 조원승(감찰)-조원익(입향조)-조은애(선수)-조응(선사)-조의양(동추.../ 작성 장병창/ 오향동 봉황성(梧香洞鳳凰城) 아래 남덕대(覽德臺)를 세우고, 자호(自號)를 오죽재(梧竹齋)라고 하였다. 당시 문장가로 기호 지방에까지 명성이 떨쳤다. 문집(文集) 12책이 있다. 묘는 감천면 부산(芙山) 해좌(亥坐)에 있는데, 묘.../ https://ycg.kr/open.content/ko/participate/free.bulletin/?i=68087
무명자집 (無名子集) |
무명자집 문고 제1책37문 |
오죽재에 대한 기문〔梧竹齋記〕 |
윤기(尹愭) |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志中樞府事) 오죽재(梧竹齋) 조의양(趙宜陽)◑
◐오죽재에 대한 기문◑
[梧竹齋記] 무명자(無名子)윤기(尹愭)
鳳凰之於飛鳥類也。梧若竹之於衆草木亦類也。拔乎云爾。惡得謂非類。然而類之中。有不類者存焉。故鳳凰之棲而食。與飛鳥類也。而其棲而不於枳棘。食而不與雞鶩啄粟則不類也。梧若竹之根於土。枝而葉。與草木類也。而其柯碧玉而實琅玕。爲威鳳之棲而食則不類也。其所以類而不類也相類。則鳳凰之於梧竹。眞不類而類也。故其棲也必以襯榮。其食也必以練實。物猶以非類而以類相感。而况君子之比德。又豈可以非吾類而不以類之乎。古之人之於鳳凰也。必以爲聖德之符而希世之瑞者。盖有取爾也。非爲其鴻前麐後。鸛顙鴛思。五色備擧之不類而已也。是故霽月孤柯。菶菶其容。則想翽翽之于飛。淸飈䟱葉。猗猗其影。則思縹縹之爰止。又非爲其櫜鄂之五乳。雲槊之萬尺。不類於凡卉也。吾聞鳳凰出於東方君子之國。見則天下安寧。飛則羣鳥從以萬數。又曰梧桐生于朝陽。朝陽者山之東也。然則彼翔于千仞。遙增擊於細德之險微。而覽輝下之者。必在於天下之東。而其所止而棲者。又必在於山之東。則豈不以四方之中。東屬於仁。爲君子之國。而有聲相應氣相求之理耶。今趙上舍宜陽氏。安東之賢者也。遊于太學。余獲拜而甚敬之。意其居之必有異也而叩之。則曰吾之居。有山曰鳳凰。有臺曰覽德。因扁吾齋曰梧竹。子盍爲我記之。余惟吾東天下之東而君子之國也。安東又東國中君子之鄕也。天下無鳳則已。有則必在於斯。無乃丹穴九苞之羽。徊翔於山之東臺之下高梧脩竹之間。而又有高世之賢爲之主人。相與和德音於雝雝喈喈之際耶。然則君子之於鳳凰。鳳凰之於梧竹。果爲非類之類而其所以爲類者。盖有所不相期而自然相感之理矣。齋之以是名。不亦宜乎。趙上舍曰。子之言。余惡敢當。余作而曰。上舍之名。固宜於朝陽者也。不佞之言。不可謂不類也。於是謹書以歸之。
◐봉황은 새들과 동류(同類)이고 오동나무와 대나무는 뭇 초목과 동류이니, 특출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동류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동류이면서도 서로 다른 점이 있다. 봉황도 뭇 새들처럼 어디엔가 깃들어 자고 먹이를 먹으니, 이는 다른 새들과 같은 점이다. 하지만 봉황은 탱자나무나 가시나무에는 깃들지 않고 닭이나 집오리처럼 곡식을 먹지는 않으니, 이는 다른 점이다.
또 오동나무와 대나무도 땅에 뿌리를 박고 가지가 뻗고 잎이 돋으니, 이는 뭇 초목과 같은 점이다. 하지만 오동나무는 줄기가 벽옥(碧玉)같아 봉황이 깃들고, 대나무는 열매가 낭간옥(琅玕玉)같아 봉황이 따 먹으니, 이는 다른 점이다.
이처럼 동류이면서 다르다는 점에서 동질성을 찾는다면, 봉황은 오동나무ㆍ대나무와 참으로 ‘다르면서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봉황은 반드시 오동나무에 깃들고 반드시 대나무 열매를 먹는다. 자연물도 이처럼 동류가 아니더라도 뭔가 동질성이 있으면 감응하는 법인데, 더구나 군자가 덕(德)을 빗댈 적에 어찌 자신과 동류가 아니라는 이유로 동질감을 표하지 못하란 법이 있겠는가?
옛사람들이 봉황을 두고 반드시 성인(聖人)의 출현과 함께 나타나는 희귀한 상서(祥瑞)의 징표라고 한 데에는 까닭이 있으니, 봉황의 생김새가 앞은 큰기러기, 뒤는 암사슴, 이마는 황새, 뺨은 원앙 같고 오색찬란한 모습이 다른 새들과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또 맑은 달빛 아래 우거진 한 그루 오동나무의 싱싱한 잎새를 보면 훨훨 날아가는 봉황의 모습이 떠오르고, 맑은 바람 속에 서걱이는 댓잎의 무성한 그림자를 보면 사뿐히 내려앉는 봉황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이것이 오동나무는 다른 초목들과 달리 열매 한 송이마다 꼭지가 다섯 개씩 달리고 거기에 젖 모양의 열매가 맺히며, 대나무는 뭇 초목들과 달리 구름을 찌르는 창처럼 곧고 높게 자란다는 외형상의 다른 점 때문만은 아니다.
봉황은 동방의 군자의 나라에 출현하는데, 봉황이 나타나면 천하가 안정되고 봉황이 날면 다른 새들 수만 마리가 뒤따른다고 한다. 또 오동나무는 햇살 따뜻한 곳에서 자란다고 했는데, 햇살 따뜻한 곳이란 산의 동쪽을 이른다.
그렇다면 천 길 높은 곳에서 빙빙 돌다가 부덕(不德)한 행실의 위험한 징조를 보면 거듭 날갯짓하여 멀리 날아가 버리고, 빛나는 덕행을 보면 내려앉는다는 봉황이 나타날 곳은 분명 천하의 동쪽일 테고, 그중에서도 봉황이 내려앉아 깃들 곳은 또 틀림없이 산의 동쪽일 것이다. 어찌 사방 중의 동쪽은 오륜(五倫) 중의 인(仁)에 속하여 동방의 나라는 군자의 나라이기 때문에 유유상종(類類相從)의 이치상 이와 같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상사(上舍) 조의양(趙宜陽)은 안동(安東)의 현자(賢者)이다. 태학(太學)에서 함께 수학하는 인연으로 뵈었는데, 매우 존경하게 되어 어딘가 특별한 곳에 사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여쭈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사는 곳에 봉황산(鳳凰山)이 있고 남덕대(覽德臺)가 있기에 내 서재의 편액을 오죽재(梧竹齋)라고 하였네. 나를 위해 기문(記文) 좀 써 주지 않으려는가?”
우리 동방은 천하의 동쪽으로 군자의 나라이고, 안동은 또 우리 동국(東國)에서도 군자의 고장이다. 천하에 봉황이 없다면 몰라도 있다면 분명 이곳에 있을 것이니, 봉황산 동쪽 남덕대 아래의 높이 자란 오동나무와 쭉쭉 뻗은 대나무 사이에서 봉황이 날아다니리라. 그곳에서는 세속을 초탈한 현인이 주인이 되어 봉황의 즐거운 노래를 들으면서 조화롭게 교감하며 지내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군자가 봉황에 대해서와, 봉황이 오동나무와 대나무에 대해서는 과연 동류가 아니면서 같은 점이 있으니, 같은 점이란 서로 기약하지 않고도 자연히 감응하는 이치이다. 서재의 이름을 오죽재라 한 것이 참 적절하지 않은가?
조 상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말을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에 내가 일어서서 말하였다.
“상사님의 이름은 ‘햇살 따뜻한 곳〔朝陽〕’에 걸맞으니제 말을 무리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삼가 기문을 써 드린다.
[주-D001] 오죽재에 대한 기문 : 본서의 편차 순서로보아 작자 나이 42세 때인 1782년부터 1784년 사이에 지은 작품으로 추정된다.
오죽재(梧竹齋)는 생원 조의양(趙宜陽, 1719~?)의 서재로, 본문에 따르면 안동 봉황산(鳳凰山,[봉황산] 경북 안동시 풍산읍 매곡리 119-1 (도로명)경북 안동시 풍산읍 봉황길 26) 동쪽 기슭에 있었다고 한다. 조의양은 작자보다 22세 연상이고, 작자보다 2년 먼저 성균관에 들어가서 이 당시에는 11~13년차가 되었다.
이 글은 성균관에서 함께수학하고 있던 조의양의 청에 의해 지어진 기문(記文)으로, 오죽재를 직접 보지는 못하고 지은 것이다. 이름에 들어 있는오동나무와대나무로부터 봉황을 끌어들이고다시 군자의 덕을 끌어들이고, 또 오죽재가 동방(조선) 중의 동방(안동)에 위치했다는 점과 봉황산 기슭에 위치했다는 점을 들어, 조의양의 서재를 ‘오죽재’라고 이름한 것이 적절했음을 말하였다.
말미에서는 조의양의 이름자를 봉황과 연관 지어 재치 있게 마무리하였다.
[주-D002] 벽옥(碧玉):옥(玉)의 일종이다. 옥은 그 안에 섞인 불순물에 따라 녹색ㆍ붉은색ㆍ누런 녹색 등으로 색깔이 달라지는데, 벽옥은 녹색을 띤 것이다.
[주-D003] 낭간옥(琅玕玉):중국에서 나는 경옥(硬玉)의 하나로, 짙은 녹색 또는 청백색의 반투명한 돌이다.
[주-D004] 앞은 …… 모습:원문은 ‘鴻前麐後 鸛顙鴛思 五色備擧’이다. 《시전대전(詩傳大全)》 〈권아(卷阿)〉의 세주(細注)에 인용된 《설문해자(說文解字)》의 내용에서 따온 말이다.
[주-D005] 열매 …… 맺히며:원문은 ‘櫜鄂之五乳’이다. 《시전대전》 〈권아〉의 세주(細注)에 북송 육전(陸佃, 1042~1102)의 《비아(埤雅)》 권14 〈오동나무〔梧〕〉의 내용을 인용하여 “열매꼭지가 모두 다섯 개씩인데, 젖 모양의 열매가 꼭지에 달린다.〔櫜鄂皆五 其子似乳 綴於櫜鄂〕”라고 한 말을 원용한 것이다.
[주-D006] 봉황은…… 한다:원문은 ‘鳳凰出於東方君子之國 見則天下安寧 飛則群鳥從以萬數’이다. 《시전대전》 〈권아〉의 세주(細注)에 인용된 《설문해자》의 내용을 재인용한 것이다.
[주-D007] 오동나무는 …… 이른다:《시경》 〈권아(卷阿)〉에 “오동이 자라니, 저 햇살 따뜻한 곳이로다.〔梧桐生矣 于彼朝陽〕”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집주(集注)에 “산의 동쪽을 햇살 따뜻한 곳이라고 한다.〔山之東曰朝陽〕”라고 하였다.
[주-D008] 천 길 …… 내려앉는다는:원문은 ‘翔于千仞 遙增擊於細德之險微 而覽輝下之’이다. 《문선(文選)》 권60 〈조굴원문(弔屈原文)〉의 “봉황은 천 길 높은 곳에서 빙빙 돌다가 빛나는 덕행을 보면 내려앉고, 부덕(不德)한 행실의 위험한 징조를 보면 멀리서 거듭 날갯짓하여 날아가 버린다.〔鳳皇翔於千仞兮 覽德煇而下之 見細德之險徵兮遙增擊而去之〕”를 원용한 말이다.
[주-D009] 상사(上舍) 조의양(趙宜陽):1719~? 자는 의경(毅卿),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집은 안동(安東)에 있었다. 53세인 1771년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24년 동안 성균관 유생으로 지냈으며, 1794년(정조18)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축하하는 경과 별시(慶科別試)에 응시하였다가 정조의 특명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고, 1807년(순조7)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문집으로 《오죽재집(梧竹齋集)》이 있다.
상사는 성균관의 상재(上齋)에서 기거하는 생원 진사를 이르는 말로, 조의양이 생원이므로 이러한 호칭을 사용한 것이다.
[주-D010] 봉황:원문은 ‘丹穴九苞之羽’이다. ‘단혈산(丹穴山)에 사는 아홉 가지 특징을 지닌 새’라는 이 말은 《전당시(全唐詩)》 권60 이교(李嶠)의 〈봉황새〔鳳〕〉에 “단혈산에 새가 사는데, 이름이 봉황이라네. 아홉 가지 특징을 갖춘 영물(靈物)로, 오색찬란하다네.〔有鳥居丹穴 其名曰鳳皇 九苞應靈瑞 五色成文章〕”라는 시구를 축약한 말이다. 아홉 가지 특징은 《초학기(初學記)》 권30에 나열된 것(一曰口包命 二曰心合度 三曰耳聽達 四曰舌詘伸 五曰彩色光 六曰冠矩州 七曰距銳鉤 八曰音激揚 九曰腹文戶)을 참고할 수 있다.
[주-D011] 상사님의 …… 걸맞으니:상대방의 이름 ‘의양(宜陽)’을 ‘양(陽)에 마땅하다.’라고 풀이하고, 앞에서 오동나무는 ‘햇살 따뜻한 곳〔朝陽〕’에서 자란다고 한 말과 연관 지어 한 말이다.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강민정 (역) | 2013
●조의양(趙宜陽)
자 : 의경(義卿) / 호 : 오죽재(梧竹齋) / 성씨 : 조(趙)
1719~1808(숙종 45~순조 8). 字:義卿, 號:梧竹齋, 本貫:漢陽, 父:元益, 母:禮安 李氏, 居:安東.
趙宜陽은 正憲大夫로서 同知中樞府事를 지낸 趙元益과 李基晩의 딸 사이에 1719년(숙종 45)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學才가 있어 글을 많이 읽었으나 목이 붓는 병이 있어 조용한 서재에서 종일토록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장성하여 訥隱 李光庭를 찾아 뵙고 詩에 관하여 깊이 배웠다. 또 後村 李守淵에게 師事하였다. 20세가 넘어서는 여러 차례 향시에 급제하였고 장원을 차지한 적도 많았다. 1771년(영조 4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794년(정조 18) 조정에서는 왕후의 장수를 축하하여 慶科 別試를 베풀었는데, 공은 이 시험에 額外로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1807년(순조 7)에는 관찰사의 啓聞에 의해 가선대부를 더하고 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1808년(순조 8)에 90세의 나이로 죽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남달랐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평소에는 겸손하여 무능한 것처럼 하였으나 내적으로는 강건하여 일을 한번 결정하면 남들이 막지 못하였다. 공은 평생 춥고 배고픈 것으로 근심하지 않았으며 다만 옛사람의 서책을 몹시 좋아하여 많은 독서를 하였다. 특히 {周易}에 대해서는 매일 1편씩 읽기를 수십년을 계속하였다. 伯氏인 葵陽이나 仲氏 普陽과는 매일 함께 강설하였다.
공은 평생 동안 詩에 많은 공력을 쏟았다. 海左 丁範祖 艮翁 李夢瑞와 특히 가깝게 교유하였으며, 후세 사람 중에는 梧竹 海左 艮翁 세 사람은 당대 安東지역을 대표하는 시인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朱子와 退溪를 존모하여 양현의 詩에 次韻한 것이 책을 이룰 정도였다. 臥雪 李尙慶 虛舟 李宗岳 南屛 鄭璞 등 安東의 시인들과 함께 詩會를 열기도 하였다. 南屛은 "우리가 죽은 후에는 安東의 풍류가 쓸쓸하리라." 하였다. 공은 중년에 香山洞에 살았는데, 鳳凰城 아래에 梧竹齋를 짓고 自號로 삼았다.
해제
오죽재집(梧竹齋集)
梧竹齋 趙宜陽의 문집. 6권 3책.
趙宜陽의 玄孫인 敬泰가 조의양의 유고를 수집, 편차하여 10行 20字 상 중 하 3冊의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柳必永이 序文을 썼고, 宋啓欽이 跋文을 썼다. 趙宜陽이 생전에 詩에 많은 공력을 기울인 까닭에 문집에는 詩가 많았고, 특히 주자와 퇴계의 詩에 次韻한 것이 많았다. 시는 주로 고시체인 漢魏體를 모범으로 하였기 때문에 장편이 많다. 특히 [仍足百韻 詩呈李艮翁夢瑞獻慶]은 1,400字나 되는 대작이며, 賦에는 [白鹿洞賦] [感春賦] [空洞賦]가 있다. 이 문집은 古詩와 樂府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跋
趙宜陽이 朱子 詩에 次韻을 시작한 것은 1792년 11월 27일이고, 다음 해인 1793년 1월 16일에 완성되었다. 조의양은 주자 시 차운의 의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즉 우레 소리를 듣고 시를 짓는 경우, 주자는 천하를 담당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었으므로 군왕의 웅대한 결단을 읊었고, 자신은 산림에 뜻을 두었으므로 時運의 회복을 읊었고 따라서 대상은 같아도 소감은 다르다는 것이다. 주자가 죽은지 5백여년이 지나, 당시는 육왕학이 천하를 뒤덮고 西學도 점차 밀려오고 있어 뜻있는 선비들은 근심이 그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海東의 주자는 바로 退溪이며, 퇴계를 앙모하는 심정으로 주자 시에 차운하였다고 하였다. 1793년에 趙宜陽이 썼다
◐行狀[趙宜陽]
公姓趙氏, 諱普陽字仁卿漢陽人, 高麗僉議中贊諱之壽其鼻祖也. 是生諱暉雙城摠管, 是生諱良琪, 十三從忠烈公金方慶, 征日本, 元世祖賜錦袍玉帶以奬之, 襲封龍城君. 是生諱暾, 繼世襲封, 是生諱仁璧龍源君贈漢山伯, 以太祖姊壻. 見麗運將訖, 隱襄陽, 堅不事二姓之節, 襄人爲立忠賢祠. 是生諱涓入我朝, 左議政謚良敬公, 至諱琮淸河縣監, 避文正公門禍, 贅居榮川, 於公爲八世. 曾祖諱鳴漢進士號竹林, 受業金鶴沙門, 追服居廬終三年. 祖諱鳳徵進士文科縣令, 贈禮曹參判號幽溪, 從遊於李葛庵門下. 考諱元益正憲同知, 以宿德重望, 見推鄕里. 妣贈貞夫人禮安李氏. 諱基晩之女. 有賢行, 博識今古, 吾兄弟入學之前, 能諳歷代典故, 多母氏敎也.
공의 성은 조씨, 휘는 보양(普陽), 자는 인경(仁卿)으로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고려 때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지낸 휘 지수(之壽)는 비조(鼻祖)가 된다. 이 분이 휘 휘(暉)를 낳았으니 쌍성총관(雙城摠管)을 역임하였고 이 분이 휘 양기(良琪)를 낳았으니 13세에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일본에 갔는데 원나라 세조(世祖)가 금포(錦袍: 비단으로 지은 두루마기)와 옥대(玉帶: 옥으로 만든 띠)를 내려 권면하고 용성군(龍城君)에 습봉(襲封)되었다. 이 분이 휘 돈(暾)을 낳았으니 대를 이어 용성군에 습봉되었고, 이 분이 휘 인벽(仁璧)을 낳았으니 (太祖의 부친인 桓祖[1315-1361]의 딸 貞和公主와 혼인하여 1393년에)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에 봉해졌고 한산백(漢山伯)에 증직되었는데, 태조의 손위 자형(姊兄)이기 때문이다. 고려의 운이 장차 다하려는 것을 보고 양양(襄陽: 醴泉의 古號)에 은거하였으니 두 성을 섬기지 않으려는 절개가 확고하여 양양 사람들이 그를 위해 충현사(忠賢祠)를 세웠다. 이 분이 휘 연(涓)을 낳았으니 아조에 들어와서 좌의정을 지내고 시호는 양경공(良敬公)이다. 휘 종(琮)에 이르러 청하현감(淸河縣監)을 지내다가 문정공(文正公) 가문의 화를 피하여 영천(榮川: 榮州의 古號)의 처가에서 살았는데[贅居] 공에게는 팔대조가 된다. 증조인 휘 명한(鳴漢)은 진사(進士)로 호는 죽림(竹林)이니,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김응조가 세상을 떠나자) 추복(追服)하고 여막에서 거처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조부의 휘는 봉징(鳳徵)으로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을 지냈고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유계(幽溪)이니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였다. 부친의 휘는 원익(元益)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오래된 덕망과 두터운 인망으로 향리의 추중을 받았다. 모친은 증 정부인(貞夫人) 예안이씨(禮安李氏)로 휘 기만(基晩)의 따님이다. 행실이 어질고 고금의 역사에 박식하여 우리 형제가 입학하기 전에 역대의 전고를 잘 외울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모친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有丈夫子五人, 公居第二. 公肅廟己丑十月十六日未時, 生于豐山外氏第. 幼時聰穎端詳, 篤孝純至, 出於天性. 自學曾史江鑑, 能辨別正閏, 區分淑慝, 先進見者皆奇之. 承先府君命, 受學於李小隱景翼, 李卽孤山先生門人也. 學有淵源, 親炙日久, 已知內外輕重之別, 心近諸書, 手自繕寫, 不離懷袖, 至於朞策大衍河洛之數, 無不默會旁通. 間嘗質疑于李懶拙齋及權淸臺先生, 兩先生深器重之, 或以面命, 或以書勉, 要不出古人爲己之學. 公服膺勿失, 踐履篤實, 俛焉日有孜孜.
아들[丈夫子] 다섯을 두었는데 공은 둘째이다. 공은 숙종 기축년(1709) 10월 16일 미시(未時)에 풍산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였고 꼼꼼하고 신중[端詳]하였으며, 두터운 효심이 순지(純至)하여 천성(天性)에서 나온 듯 했다. 『증사(曾史)』와 『강감(江鑑)』을 배우고 나서부터 정통(正統)과 윤통(閏統)을 분별하고 선악(善惡:淑慝)을 구분할 수 있었으니 선배들로 먼저 읽은 자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선부군(先府君)의 명을 받고 소은(小隱) 이경익(李景翼)에게서 수학하였는데, 이경익은 곧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 선생의 문인이다. 학문은 연원이 있었고 친히 가르침을 받은 날이 오래되어 이미 내외와 경중을 분별할 줄 알았고 심경과 근사록 등 여러 책들을 손수 선사(繕寫)하여 소매 속에 넣어두며 떼놓지 않았으며, 기책(朞策)과 대연(大衍)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수에 이르기까지 묵묵히 이해해서 두루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따금 난졸재(懶拙齋) 이산두(李山斗)와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선생에게 질의하면 두 선생이 식견이 깊음을 인정하여 (그의 의견을) 중히 여겨 혹은 얼굴을 마주하고 가르쳐주거나 글을 써서 권면하였는데 요지는 고인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공이 마음속에 새겨[服膺] 잊지 않고 실천을 독실히 함을 날마다 부지런히 힘써함이 있었다.
先府君又以門戶之故, 使之傍治擧業, 不待連篇累牘而自然有百中之能. 自己酉以後, 輒擧大小鄕解, 而連詘省試. 丁卯俱中生進, 癸巳同從子承宣君錫晦登第. 自上引見, 特下著帽踰嶺之敎, 直拜典籍. 歸榮之夕, 先府君年八十餘, 諸子列侍, 五蓮雙桂, 輝暎一庭, 亦足爲悅親之資, 公之白首應擧, 蓋爲親屈也.
선부군이 또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일 때문에 부수적으로 과거공부를 하게 하였는데, 쓸데없이 길게 문장을 쓰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백번이면 백번을 맞힐 수 있었다. 기유년(1729) 이후로부터 번번히 크고 작은 향해(鄕解)에는 합격하였으나 성시(省試)에는 잇달아 낙방하였다. 정묘년(1747)에 생진(生進)에 아울러 입격하였고 계사년(1773)에 조카 승선군(承宣君) 석회(錫晦)와 함께 급제하였다. 주상이 인견하여 특별히 어사모를 쓰고 조령(鳥嶺)을 넘을 수 있도록 하교하시고는 곧장 전적(典籍)을 제수하였다. 영귀(榮歸)하는 밤에 선부군의 나이가 여든 남짓이라 아들들이 줄지어 모시거늘 오련쌍계(五蓮雙桂)가 뜰 안을 밝게 비추니 또한 부친을 기쁘게 할 만한 재료로 삼기에 충분했다. 공이 백수에도 과거에 응시한 것은 아마도 부친을 위해 자신의 뜻을 굽혔기 때문이리라.
出身之初, 公卿士友慕聲名願交者甚衆, 而公乃望望然若將凂焉, 雖荊屋間有雅素者, 一不與之相接, 雖以此見枳宦途, 不恤也. 已而拜監察, 尋拜禮曹佐郞, 當參謁時, 賊臣厚謙爲參判, 以曹郞之未及祇迎杖下隷, 公語人曰, “此人勢焰薰天, 輕蔑士流如此, 此君子見幾之時也. 且白頭郞官, 見辱於乳臭小兒, 而若復苟簡懷祿, 是奴顔婢膝等耳.” 遂决然舍去.
출사(出仕)한 초반에 공경(公卿)·사우(士友) 가운데 공의 명성을 흠모하여 교유를 원하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공은 이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 자신까지 더럽혀지는 듯이 여겨 비록 형옥(刑屋)에 평소에 친교가 있는 자라도 한사코 그와 더불어 서로 만나보려 하지 않았으며, 비록 이 때문에 벼슬길에서 해를 입더라도 근심하지 않았다. 얼마 안되어 감찰에 제수되었다가 조금 뒤에 예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참알(參謁)할 때를 당하여 적신(賊臣) 정후겸(鄭厚謙)이 참판이 되어 조랑(曹郞)을 미처 공경히 맞아들이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하급관리를 매질하니 공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자의 세력의 불길이 하늘을 뜨겁게 하고 사류(士流)들을 이처럼 경멸하니 이는 군자가 기미를 보고 벼슬에서 물러나 떠나던 때이다. 또 백발의 낭관으로 젖비린내 나는 어린아이에게 욕을 당하고도 만일 다시 적당히 대처하여[苟簡] 녹만을 생각한다면 이는 종처럼 굽실거리며 아첨하는 것일 뿐이니라.”라 하고는 마침내 결연히 벼슬을 그만두고 떠났다.
泮中知舊或相挽止, 謙賊亦有悔意, 使人留行, 不顧也. 歸路有詩云, “君親一體意, 來去兩難忘.” 有老人在逆旅, 嘲考課時去官曰, “此官員亦未免鄕闇. 不爾則歸臥林泉, 讀書課學, 勞農節用, 反有勝於薄官.” 蓋此老人亦隱者流.
성균관의 벗들이 혹은 서로 말리기도 하고 정후겸도 또한 후회하는 뜻이 있어 사람을 시켜 가는 것을 만류하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에 지은 시에 이르기를 “임금과 어버이의 한결같은 뜻을 체득하니 떠나가고 옴에 둘다 잊기 어렵구나.”라고 하였거늘, 어떤 노인이 역려(逆旅)에 있으면서 고과(考課)를 매길 때 떠난 관리를 조롱하며 “이 관원도 또한 향암(鄕闇)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고향에 돌아가 임천(林泉)에 누워 책을 읽고 학문을 강론하고 농사짓기에 힘쓰며 쓰임을 절약한다면 도리어 하급관리보다는 나은 점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이 노인 또한 은거하는 부류일 것이다.
歸覲堂下, 則先府君嘉其勇退之志, 謂以善養, 勝似以祿養也. 公自此家居, 專以養親爲事. 年過六旬, 甘毳之奉, 藥餌之需, 必躬自調嘗, 至如中裙廁牏之物, 親自洗滌, 不令人代. 曰, “吾親之褻衣衾, 吾豈可使人見裏?”
고향으로 돌아가 당 아래에서 뵈니 선부군께서 공이 용감하게 벼슬에서 물러난 뜻을 가상히 여기시고 ‘부모를 잘 봉양하는 것이 녹봉으로 봉양하는 것보다 나을 듯 하구나.’라고 하셨다. 공이 이로부터 집안에 거처함에 오로지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만을 일삼으셨다. 나이가 60이 넘어도 맛있는 음식[甘毳]으로 봉양하고 약을 마련함에 반드시 몸소 자신이 조제하여 맛을 보았고, 심지어 속옷이나 요강 같은 것은 친히 스스로 빨고 씻어서 남에게 대신하게 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나의 부친의 속옷과 이부자리를 내가 어찌 남에게 속을 보게 한단 말인가?”고 하였다.
先府君晩年語澁, 傍人皆聽瑩, 而公必隨意任使, 少無違拂, 此非以親心爲心而能然哉? 公每以丁巳內囏時斷指未效, 爲終天之痛. 及戊戌丁憂, 恰滿七耋, 而歠粥面墨, 淡菜終制, 一如前喪, 古人終身之慕, 公殆無愧矣.
선부군이 만년에 어삽(語澁)하여 곁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청형(聽瑩)하였으나 공만은 반드시 선부군의 뜻대로-뜻을 따라 일을 처리하고 조금의 어김도 없었으니 이것은 어버이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았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공은 늘 정사년(1737)에 모친의 상을 당했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드시게 하였지만 효험을 보지 못한 것을 종천지통(終天之痛)으로 여겼다. 무술년(1778)에 부친의 상을 당함에 이르러서는 일흔이 다 된 나이인데도 죽을 마시고 낯빛을 검게 하며 싱거운 나물반찬만을 먹고 삼년상을 마쳤는데[終制] 한결같이 지난번의 상례를 치를 때처럼 하였으니 고인의 ‘종신토록 사모한다.’라는 말씀에 있어서 공은 거의 부끄러워함이 없을 것이다.
當宁辛丑, 因錫晦入侍, 自上問及家閥, 有筵臣進曰, “其叔趙普陽, 以先朝禮郞, 忤曹長逆謙而投帽歸田矣.” 上曰, “不畏權貴, 能遂初服, 其志可尙.” 特命政官, 卽除典籍.
당저(當宁) 신축년(1781, 정조 5년) 석회(錫晦)가 입시한 것으로 말미암아 주상께서 가벌(家閥)을 하문함에 이르자 어떤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그의 숙부 조보양(趙普陽)은 선대의 임금 때 예조좌랑으로 조장(曹長)인 역적 정후겸의 심기를 거스르자 관모(冠帽)를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라고 하였다. 주상이 “권귀(權貴)를 두려워하지 않고 초복(初服)을 이룰 수 있었으니 그의 뜻이 가상하도다.”라 하시고는 정관(政官)에게 특별히 명하여 곧장 전적(典籍)을 제수하게 하였다.
行狀
외손자인 柳炳文이 쓴 趙宜陽의 행장이다. 휘는 宜陽이고 자는 義卿이며, 성은 趙씨이고 본관은 漢陽이다. 공의 8대조인 琮이 기묘사화를 피하여 榮州에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또 증조부 鳴漢은 金鶴沙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父 元益은 정헌대부로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母는 宣城李氏이다. 공은 1719년(숙종 45)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글을 많이 읽었고, 특히 목병이 있어 조용한 서재에서 종일토록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자라서 訥隱 李光庭을 찾아 뵙고 經史에 관해 함께 토론하였는데, 공은 특히 詩에 관해 가르침을 청하였다. 訥隱은 공에게 詩를 지음에 반드시 漢魏體를 따르도록 가르쳤다. 또한 李守淵에게 師事하고 더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20세가 넘어서는 여러 차례 향시에 급제하였고 장원을 차지한 적도 많았다. 1771년(영조 4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794년(정조 18) 조정에서는 왕후의 장수를 축하하여 慶科 別試를 베풀었는데, 특별히 노인에게 額外의 은혜를 베풀어 공은 여기에 합격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1807년(순조 7)에는 관찰사의 啓聞에 의해 가선대부를 더하고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1808년(순조 8)에 90세의 나이로 죽었다.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남달랐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평소에는 겸손하여 무능한 것처럼 하였으나 내적으로는 강건하여 일을 한번 결정하면 남들이 막지 못하였다. 공은 평생 춥고 배고픈 것으로 근심하지 않았으며 다만 옛사람의 서책을 몹시 좋아하여 經傳, 子集, 文章史家 등에 관해 널리 통하였으며, 陰符經, 道德經, 參同契 등까지 많은 독서를 하였다. 詩書, 語孟은 매일 읽었고 특히 {周易}에 대해서는 매일 1편씩 읽기를 수십년을 계속하였다. 伯氏인 葵陽이나 仲氏 普陽과는 매일 함께 강론하였다.공은 평생 동안 詩에 많은 공력을 쏟았다. 海左 丁範祖 艮翁 李夢瑞와 특히 가깝게 교유하였으며, 후세 사람 중에는 梧竹 海左 艮翁 세 사람은 당대 安東지역을 대표하는 시인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朱子와 退溪를 존모하여 양현의 詩에 次韻한 것이 책을 이룰 정도였다. 臥雪 李尙慶 虛舟 李宗岳 南屛 鄭璞 등 安東의 시인들과 함께 詩會를 열기도 하였다. 南屛은 "우리가 죽은 후에는 安東의 풍류가 쓸쓸하리라." 하였다. 또 당시 詩로 널리 알려져 있던 李集斗가 安東府使를 지낼 때, 자신이 지은 詩 수백편을 공에게 보여주며 和答詩를 부탁하였다. 공은 선 자리에서 화답시를 지었고, 부사는 "진실로 나의 스승이오." 하였다. 공은 중년에 香山洞에 살았는데, 鳳凰城 아래에 梧竹齋를 짓고 自號로 삼았다.공은 일찍이 "나는 문장가가 되는 꿈을 자주 꾸었지만, 늦게서야 주자와 퇴계의 말씀이 제일임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공이 지은 詩文은 散逸되어 수습되지 못한 것이 십중팔구에 이르고, 겨우 약간이 본가에 가장되어 있다. 初配는 永川 李氏이고, 後配는 安東 權氏이다
遺事
從曾孫 秉相이 쓴 趙宜陽의 遺事이다. 공의 8대조인 琮이 기묘사화를 피하여 榮州에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또 증조부 鳴漢은 金鶴沙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父 元益은 정헌대부로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孝友와 文行으로 사류의 존경을 받았다. 母는 宣城 李氏로 1719년(숙종 45)에 幽洞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5형제 가운데 넷째로서, 鈍巖公 葵陽이 맏형이고 八友公 普陽이 둘째형이다. 어렸을 때 한번은 공이 홀연히 사라져서 집안 사람들이 그를 찾았는데, 나중에 서고에 있는 책 속에서 나왔다. 집안 사람들이 깜짝놀라 물었더니 "우연히 장서들을 읽게 되었는데, 배고픔을 알지 못하겠더라." 하였다.장성하여 山雲으로 장가를 들었는데, 유학자 집안으로 李秀泰가 공에게 장인이 되었다. [五總龜經世文]은 鈍巖公 葵陽이 지은 것인데, 그 내용이 매우 광범하였다. 어떤 사람이 의심스러운 부분에 대해 질의하면, 공이 나서서 막힘없이 대답하였다. 공이 성균관에 있었던 수년 동안, 그의 명성이 서울에까지 퍼졌다. 일찍이 눈오는 날에 訥隱 李光庭을 찾아 뵙고 詩를 논하였다. 訥隱은 [朴孝娘西江女詩]와 [香郎傳]을 주면서 세상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禮安의 선비들이 退溪 李滉의 넷째 형인 李瀣의 諡號를 청하는 상소를 올릴 때, 공을 疏頭로 추대하였다. 또 靑壁 李守淵을 배알하였는데, 가학을 전수하여 당시 儒宗이었던 이수연은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칭찬하였다. 農隱 李級은 공을 박학하고 단아한 군자라 칭하였다. 1785년(정조 9)에 {朱書節要刊補}를 교정하는 일로 廬江에 모였을 때, 李后山 柳東巖 등과 가깝게 교유하였다. 만년에는 주자와 퇴계를 존경하여 비록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양현의 詩를 和韻함으로써 흠모의 정을 대신하였다.공은 자식들에게 과거공부는 비록 폐할 수는 없지만 경중의 구분을 또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檜溪公에서 山谷公에 이르기까지 모두 詩로써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므로 사람들이 漢陽四世詩稿로 칭하였으니, 공의 詩才는 그 뿌리가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輓詞
權訪이 쓴 趙宜陽에 대한 輓詞이다. 선대로부터 아름다운 文才를 이어 받아서 동방에 문화를 꽃피웠으며, 공이 죽고 난 뒤 동방의 풍류가 쓸쓸해졌다고 하였다
又
黃龍漢이 쓴 輓詞이다. 공은 문장에서 으뜸이 되어 90평생 萬수의 시를 지었다고 하였다. 또한 상자 속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시가 많은데, 풍월은 오래 동안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있는 언덕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다.
又
金相溫이 쓴 輓詞이다. 영남의 문장가는 대개 檜溪公의 가문에서 나왔는데, 공은 만년에 유학에 귀의하였다. 풍류객은 87년을 살고 산 속에 누웠다고 하였다.
又
權聖翊이 쓴 輓詞이다. 공이 시문고를 완성하여 그 서문을 요청하였다. 이를 언급하면서, "문장은 이미 완성되었는데, 재주 없는 이 사람이 어찌 서문을 쓸 수 있었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又
姜必孝가 쓴 輓詞이다. 영남에 유학이 성할 때, 공의 이름이 홀로 드높았다. 젊어서는 정계에 나아가 정책을 내었고 늙어서는 벼슬과 영화를 버리고 유학에 몰두하였다고 하였다.
又
張中矩가 쓴 輓詞이다. 영남의 노학자들은 언제나 공을 칭찬하니, 문장을 일으켜서 많은 몽매한 사람들을 깨우쳤다고 적었다.
又
李仁行이 쓴 輓詞이다. 공은 유학의 노선생으로 그는 죽었지만 정신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적었다.
又
朴時源이 쓴 輓詞이다. 한 가문에 진사가 무수하고 양세에 걸쳐 중추부사를 낸 것은 다시없는 드문 경우라고 하였다. 2수의 對聯이다.
又
金在成이 쓴 輓詞이다. 공이 살던 고택에는 슬픈 바람이 일고, 梧竹齋의 빈 뜰에는 해가 져서 서늘하다고 하였다.
又
金龜鍊이 쓴 輓詞이다. 梧竹齋의 선생은 세상을 버렸고 芙蓉山 꼭대기는 서늘하다. 찾아 뵙고 인사하고자 해도 이제 받아줄 선생이 없어 눈물만 흐른다고 적었다. 4수의 對聯이다.
又
權補가 쓴 輓詞이다. 봉황새는 떠나고 집은 비었으나 드높던 기상은 여전하니, 벽오동과 푸른 대는 해가 바뀌어도 그대로라고 하였다.
又
宋文煥이 쓴 輓詞이다. 후생은 선생을 그리며 우러러 보아도 보이지 않고 覽德臺 앞의 달빛만 여전하다고 하였다.
又
辛慶龍이 쓴 輓詞이다. 깊은 마음에는 千家의 말을 담았고 담담한 가슴에는 봄 풍경을 품었다고 하였다. 또한 3대에 걸쳐 영화가 빛났고 한 가문에 존귀함이 연이었다고 하였다.
又
族孫인 淵晦가 쓴 輓詞이다. 高陽의 자제들은 뛰어난 인품을 지녔고 樞府의 벼슬은 대를 이어 내렸다고 하였다. 經學은 李靑壁에게 배웠고 典刑은 李懶拙齋에게 배웠다고 하였다.
又
金綄이 쓴 輓詞이다. 세 사람의 어진이가 남으로써 仁을 가히 경험하였고 一代의 문장은 늙어도 다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祭文
外孫 柳炳文이 쓴 제문이다. 문장에도 능했지만 詩에 더욱 뛰어났다. 한번 붓을 휘두르면 백편의 시가 나왔고 쓸수록 더욱 기이한 작품이 되었다. 늙어서 더욱 공부에 힘을 쏟았고 책상과 상자에는 시가 쌓였다. 만년에는 주자와 퇴계의 글을 좋아하였고 자세하게 차운하여 따로 책을 만들었다. 추워도 두껍게 옷입지 않았고 볼 때는 안경을 끼지 않았으며, 가난으로 근심하지 않았고 효성과 우애로 고을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고 하였다
又
外孫 柳徽文이 쓴 제문이다. 부군께서는 옛사람의 기운과 풍모를 타고났으며, 드물게 세상에 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仲氏인 普陽은 經術에서 뛰어났다. 공은 효성과 우애로써 가풍을 이었고 어버이의 뜻을 공손히 받들었다. 평생 동안 지은 저술은 한 방을 채울 정도라고 하였다.
又
從孫 趙顯汶이 쓴 제문이다. 대과에 급제하고 소과에 급제한 것을 영화로 여기지 않았다. 물러나 芙蓉山 아래에 집을 짓고 覽德齋에서 안빈낙도하였다. 문장과 시에 뛰어나 손을 움직이면 아름다운 글이 되었다. 문체는 漢魏體를 모범으로 하였고, 글은 주자와 퇴계를 따랐다. 장수하고 큰 덕을 이루었으며 양대에 걸쳐 중추부사를 배출하였으니, 세상에 드문 일이고 나라에 상서로운 징조이다.
又
從孫 趙顯佐가 쓴 제문이다. 梧桐나무를 노래하고 綠竹을 읊었으니, 공의 齋號는 바로 여기서 나왔다. 만년에 香山洞에 집을 짓고 살았으니 골짜기가 매우 깊었다. 산을 鳳凰山이라 하였고 臺號는 覽德齋라 하였다. 사람들은 梧翁으로 불렀으며 이제는 地仙이 되었다. 가난해도 병통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늙어서 더욱 강건하였다. 후학을 훌륭하게 양성한 것이 더욱 큰 공이었으니, 어리석고 똑똑함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과제를 부여하여 순순하게 지도하였다. 저자는 10세에 고아가 되어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불행히 돌아가시니 서까래가 부러지고 산이 무너진 것과 같다고 하였다
跋
宋啓欽이 쓴 梧竹齋集에 대한 跋文이다. 梧山夫子(해제자주:梧竹齋 趙宜陽)의 저술은 매우 많지만 상자에 담겨서 이미 백년이 지났다. 우리 영남에서 문장이 가장 성하였던 때는 숙종 정조대였는데, 공이 그 가운데 으뜸이었다. 당시에 申石北 鄭南屛 丁海左 李艮翁 등이 일세를 풍미하였으나 반드시 공을 으뜸으로 쳤다. 南屛翁은 일찍이 탄식하기를, "공이 죽고 난 후에는 安東의 풍류가 장차 쓸쓸해지리라." 하였다. 일찍이 訥隱(李光庭)과 後村(李守淵)에게 사사하여 학문의 요체를 알았다.일찍이 자제들에게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훈계하였고, 학문에 뜻을 두고 있음을 알면 마음 다스리고 몸을 닦는 요결을 알려 주었고, 時文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학문하여 이름을 이루는 대체를 알려 주었다. 후학을 가르치는 뜻은 늙어서 더욱 돈독하였다. 詩는 주자와 퇴계를 모범으로 하였고, 뜻은 周濂溪와 二程을 지향하였다. 鳳凰城 覽德齋를 바라보면 그 풍류를 느낄 것 같지만 불행히 시대를 달리하여 그 가르침을 직접 받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공의 玄孫 泰敬이 마침 공의 글을 간행한다 하기에 자손은 비록 많이 있지만, 사문의 다행이며 공의 뜻을 기리는 좋은 일이므로, 한 마디 말을 말미에 덧붙이다
☞한국고전종합DB 모바일봉황은 새들과 동류(同類)이고 오동나무와 대나무는 뭇 초목과 동류이니, 특출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동류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동류이면서도 서로 다른 점이 있다. 봉황도 뭇 새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576A_0070_000_0370&solrQ=query%E2%80%A0%EB%B4%89%ED%99%A9%EC%9D%80%20%EC%83%88%EB%93%A4%EA%B3%BC%20%EB%8F%99%EB%A5%98(%E5%90%8C%E9%A1%9E)%EC%9D%B4%EA%B3%A0%20%EC%98%A4%EB%8F%99%EB%82%98%EB%AC%B4%EC%99%80%20%EB%8C%80%EB%82%98%EB%AC%B4%EB%8A%94%20%EB%AD%87%20%EC%B4%88%EB%AA%A9%EA%B3%BC%20%EB%8F%99%EB%A5%98%EC%9D%B4%EB%8B%88,%20%ED%8A%B9%EC%B6%9C%ED%95%98%EB%8B%A4%EA%B3%A0%20%ED%95%A0%20%EC%88%98%EB%8A%94%20%EC%9E%88%EC%A7%80%EB%A7%8C%20%EB%8F%99%EB%A5%98%EA%B0%80%20%EC%95%84%EB%8B%88%EB%9D%BC%EA%B3%A0%EB%8A%94%20%ED%95%A0%20%EC%88%98%20%EC%97%86%EB%8B%A4.%20%EA%B7%B8%EB%9F%AC%EB%82%98%20%EB%8F%99%EB%A5%98%EC%9D%B4%EB%A9%B4%EC%84%9C%EB%8F%84%20%EC%84%9C%EB%A1%9C%20%EB%8B%A4%EB%A5%B8%20%EC%A0%90%EC%9D%B4%20%EC%9E%88%EB%8B%A4.%20%EB%B4%89%ED%99%A9%EB%8F%84%20%EB%AD%87%20%EC%83%88%EB%93%A4$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AA$solr_toalCount%E2%80%A01$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BD_ITKC_BT_0576A_0070_000_0370&viewSync=OT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志中樞府事) 오죽재(梧竹齋) 조의양(趙宜陽)◑
●오죽재(梧竹齋) : 경북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 262-1
●재실이 헐려 사라짐!!!
《무명자집(無名子集)》 해제(解題)
- 무명의 선비, 기록으로 말하다 -
강민정 김채식 이규필 이상아
1. 머리말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 1741~1826)는 18세기에서 19세기 초반에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문인이자 독서인이며 선비이다.
유년기에 문재(文才)가 일찍 발휘되어 집안의 촉망을 받았고, 20세에 성호 이익의 제자가 되어 경서와 시문을 질정받았다. 33세에 증광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나 한미한 가문에 올곧은 기질로 사회와 영합하지 못해 문과 급제의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하였다. 52세에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종6품),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종6품)를 시작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정4품), 통례원 우통례(通禮院右通禮정3품)를 거쳐 80세에 정3품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이르렀고, 외직으로 남포 현감(藍浦縣監종6품)과 황산 찰방(黃山察訪종6품)을 역임한 것이 관력의 대략이다.
저자는 평생 관직에 높이 오르지 못하고 미관말직을 전전하였다. 저자 스스로도 지나치게 강한 소신 때문에 세상에서의 성취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탄한 일이 있다.(文稿 冊4 照鏡自贊) 세상의 부조리에 눈감을 줄 모르고 권세가들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아 출세길에 제한이 많았으나, 그의 투철한 선비정신과 비판의식은 《무명자집》의 곳곳에서 정채를 발하고 있다. 국가의 현안에 대해 장편의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고, 과거시험에서 벌어지는 각종 부조리는 물론 청탁과 뇌물로 출세가도를 달리는 관리들의 부패상을 각종 기록으로 남겼으며, 권력자의 횡포와 양반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또한 근 20년을 성균관 유생으로 지내며 직접 견문한 성균관의 모습을 〈반중잡영(泮中雜詠)〉 220수로 읊어냈고, 또 400수의 〈영사(詠史)〉와 600수의 〈영동사(詠東史)〉를 통해 역사의식을 시로 형상화하였으며, 시인의 섬세한 감수성으로 자신의 내면을 묘사하고 자연을 읊었다.
《무명자집》 원본은 후손 윤병희(尹炳曦)씨의 소장본이 유일본으로, 아직 이본이나 다른 저술이 발견되지 않았다. 윤병희씨 소장본을 바탕으로 1977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최초로 영인ㆍ간행하여 학계에 연구자료로 제공하였고, 이후 2000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표점을 찍어 《한국문집총간》 제256집으로 영인ㆍ간행하였다. 두 종의 간행서는 동일본을 저본으로 하였으므로 내용상의 차이는 없다. 이 두 종의 간행서를 계기로 학계에서는 저자의 문학에 대해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간 진행된 연구로는 김병건이 박사학위 논문에서 저자의 생애 및 작품세계를 전반적으로 다루었고, 이후 저자의 사상 및 문학관을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이후 임완혁이 각종 한화(閒話)와 잡기를 대상으로 저자의 산문세계를 분석하였고, 이민홍은 〈반중잡영〉을 대상으로 18세기의 성균관 풍경을 분석하였으며, 이외에도 〈영사(詠史)〉와 〈영동사(詠東史)〉가 영사시의 전통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또한 〈반중잡영〉 220수는 일찍부터 번역되어 대중들에게 읽혔고, 〈성균관스캔들〉이라는 드라마의 주된 자료로 활용되었을 정도로 저자의 저술은 이미 널리 활용되었다.
본 번역서는 2010년에 한국고전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대동문화연구원이 거점번역사업에 선정됨으로써 기획되었다. 대동문화연구원의 번역거점연구소에서는 번역 대상서목으로 서울 및 성균관과 관련이 깊은 《무명자집》을 가장 먼저 번역하기로 방침을 정했는데, 저자가 바로 성균관의 유생이 되어 근 20년간 성균관을 출입하며 보고 느낀 점을 방대한 자료로 남겼기 때문이다.
원저는 시고가 6책, 문고가 13책으로 총 19책에 달하는 거질인데, 이를 3년간의 번역을 거쳐 시고 8책, 문고 8책 총 16책의 번역서로 발간하게 되었다. 이 번역서의 출간을 계기로 그간 알려졌던 무명자의 면모는 물론 그가 추구했던 사회상 및 인간상, 사상 및 문학적 성취를 비롯하여 인간적인 장단점까지 소상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되리라 생각한다.
본 해제에서는 저자의 생애와 교유관계, 《무명자집》의 서지사항, 구성 및 내용을 다루어 본서를 열람하는 데 참고자료로 제공하고 마지막으로 문학적 성취와 학술사적 의의를 소략하게나마 다루어 《무명자집》이 다른 문집과 차별되는 장점을 특기하여 본서의 가치를 드러내고자 한다.
2. 무명자 윤기의 생애와 교유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 1741~1826)의 자는 경부(敬夫)이고, 호는 무명자(無名子)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시조 신달(莘達)로부터 30세손이고, 고려의 명신 윤관(尹瓘)의 후손이다.
저자의 집안은 정정공파(貞靖公波)로 통진(通津) 일대에 세거하였다.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을 배출한 근기남인(近畿南人) 명문으로 대대로 벼슬을 역임한 현달한 가문이었으나, 18세기 남인의 몰락과 때를 같이하여 6대조부터는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여 오직 증조 취리(就履)가 양양(襄陽) 부사를 지낸 것만이 드러난 예이다. 부친 윤광보(尹光普)는 어려서 문명(文名)이 있었으나 끝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윤광보는 전처 원성 원씨(原城元氏)가 일찍 죽어 안동 권씨(安東權氏)를 맞아들였는데, 저자는 안동 권씨 소생이다.
저자의 방계 5대손 윤목구(尹牧九)는 1977년 대동문화연구원 영인본에 쓴 발문(跋文)에서 저자의 출생지를 서울 서문(西門) 밖 냉천동(冷泉洞)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저자가 15세부터 4년 동안 과거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들어갔던 문수사(文殊寺)가 통진 경내에 있었으며 본서의 많은 부분에서 통진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고향에 대한 향수를 표한 점 등으로 보아, 저자의 출생지는 냉천동일지 모르겠으나 저자 스스로 고향으로 인식한 곳은 경기도 통진(通津)이었다.
저자는 몰락해가는 가문에서 태어나 가정에서 부친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5,6세에 한시를 지을 정도로 총명하여 집안의 큰 기대를 받았다.
15세 때부터 4년 동안 통진 비아산(比兒山)의 문수사(文殊寺)에서 과거 공부에 전념하다가 18세에 신광필(辛光弼)의 딸과 혼인하였다. 20세에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문하에 나아가 잠시 문답한 것을 시작으로 4년간 세 차례 왕복하면서 학문에 대해 질의하고 시를 주고받았는데, 이익은 저자에게 《논어(論語)》의 중요성을 강조하는가 하면 저자의 《소학문목(小學問目)》에 대해 자상한 답을 주고 좋은 자품과 재주를 지녔다며 분발을 격려하였다.
저자는 혼인한 뒤로 가난 때문에 주거가 안정되지 못하였다. 혼인 후 4년 만인 22세 경에는 궁핍한 살림으로 인해 가족을 이끌고 처가가 있는 양근(楊根 양평)으로 이거하였다가 그곳에서 편치 않은 일이 생기는 바람에 25세 경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3년간 서강(西江)의 탁영정(濯纓亭)을 빌려 살았으며, 28세 때는 또 낙산(駱山) 아래 의동(義洞)의 오두막으로 옮겨 살았다. 47세 때 비로소 한양 동부(東部) 연화방(蓮花坊) 연화동(蓮花洞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 화와(和窩)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정착하였지만 이마저도 6년 뒤인 53세 때 궁핍한 살림에 못 이겨 남에게 팔고 셋방살이를 해야 했다. 55세 때 남산 기슭으로 우거처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고, 또 80세 때 정동(貞洞)의 친척집에서 살다가 녹봉이 나와 40민(緡)으로 오두막을 사서 이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자의 불안정한 주거는 벼슬살이를 시작한 53세 이후에도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혼인 이후에도 꾸준히 과거 공부를 하여 23세 때 대증광(大增廣) 생진시(生進試)에 합격하였으나 사소한 까닭으로 합격이 취소된 일이 있다. 이후 1773년(33세)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후 근 20년 동안 성균관을 출입하면서 대과(大科)를 준비하여, 51세 때 추도기(秋到記) 제술(製述)에서 장원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자격을 부여받고 이듬해(1792) 식년(式年) 문과 전시(殿試)를 통과함으로써 늦깎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53세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종6품),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종6품)를 시작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예조 좌랑(禮曹佐郞 정6품), 강원 도사(江原都事 종5품),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정5품), 병조 좌랑, 이조 좌랑을 지냈다.
57세에 남포 현감(藍浦縣監 종6품)이 되었다가 100일도 못 채우고 파직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당시 남포현의 유생들이 금령을 어기고 사사로이 주희(朱熹)의 영당(影堂)과 백이정(白頤正)의 사원(祠院)을 건립한 죄를 뒤집어쓴 것처럼 사건이 진행되었으나, 실은 당시의 이조 판서 이병정(李秉鼎)의 비호를 받던 토호의 비리를 원칙대로 엄격히 징치하다가 역공을 당한 것으로 해석된다. 저자는 이 일로 인해 12일간 옥살이를 하였다.
58세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정4품)에 제수되고 59세에 통례원 우통례(通禮院右通禮 정3품)에 제수되었으며, 60세에는 다시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황산 찰방(黃山察訪 종6품)에 임명되어 외직에 나갔다. 재임 기간에 학당(學堂)을 설립하고 간악한 역리를 처단하고 낙동강의 범람을 대비하는 등 공정하게 사무를 처리하고 민생을 살피는 데 주력하였으나, 청탁과 아첨에 능하지 못한 성품으로 인해 관찰사로부터 중고(中考)라는 평가를 받고 1년 4개월 만에 해임되었다.
63세(1803)에는 정조실록 편수관이 되어 65세까지 등록(謄錄)하는 일을 맡아보았고 64세에 군자감 정(軍資監正 정3품)이 되었다. 66세에 통례원 우통례에 제수되고, 67세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정5품), 좌통례(정3품), 우통례 등에 번갈아 누차 제수되었는데, 순조(純祖)의 봉모당(奉謨堂) 전배(展拜) 때 좌통례로서 전도(前導)에 실수가 많다는 이유로 2일 간 구속되는가 하면, 헌납으로서 토역(討逆)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한 달 보름 간 삭탈관작되었다. 이후에 다시 헌납에 제수되고, 68세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정4품), 71세에 사간원 헌납, 80세에 호조 참의(戶曹參議 정3품)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의례적인 제수에 그쳤다. 80세부터는 노인직(老人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에 제수되어 녹봉을 받았다.
69세(1809)에 각종 재해가 겹쳐 발생하자 순조가 이에 대한 대책을 물었는데, 저자는 이에 1만 6366자에 달하는 장편의 응지소(應旨疏)를 올렸다.(文稿 冊10 己巳擬上應旨疏) 그러나 이때 올린 소는 당시 저자가 직명(職名)을 갖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임금에게 주달되지 못하였다. 72세(1812)에는 앞의 응지소를 약간의 윤색을 거친 후 다시 올렸는데, 1만 6956에 달했다.(文稿 冊11 壬申應旨疏) 당시 올린 상소에 저자의 직명이 전 헌납(前獻納)이라 되어 있는데, 이때 비로소 임금에게 주달되어 순조로부터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진달한 말이 모두 절실하니, 유념하도록 하겠다〔省疏具悉 所陳俱爲切實 當皆意矣〕”라는 비답을 받았다.
이후 84세(1824)에 3년 동안 일삼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초사(抄寫)를 마치고 86세(1826)를 일기로 졸하였다.
저자는 정조, 순조 대를 살아가면서 과거에 급제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고, 만년에 당상관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미관말직을 전전하였다. 이는 영ㆍ정조 대가 문운(文運)이 융성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제도의 문란과 색목에 따른 차별이 심한 시기였고, 이어 순조 대는 세도 정권으로 인해 몇몇 가문이 요직을 독차지한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명문세도가의 자제이거나 뇌물을 바치지 않고서는 과거에 급제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고위직에 임용될 기회조차 없었다. 저자의 글 가운데 과거의 타락상과 사회의 부패를 질타하는 글이 많은 것은 저자가 목도한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한 저자의 청렴한 지조와 개결한 성품은 혼탁한 세태와는 서로 맞지 않아 매양 비판적인 태도로 시사(時事)를 개탄하면서 학문저술에 몰두하거나 가슴의 울분을 시로 읊을 뿐이었으니, 그 고단한 일생의 결과물이 바로 이 《무명자집》이다.
저자의 학문 형성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는 부친과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꼽을 수 있다. 저자는 어려서 부친을 통해 학문의 기틀을 쌓았다. 저자는 시고 제4책 〈술회(述懷)〉라는 시에서 “7세에 경서와 역사서 읽을 때, 선친께서 엄한 스승 되셨지……여덟 살에 생각이 조금 자라, 시문이 제법 풍성했네. 아버님이 매양 억제하여, 친지들에게 보이지 말라 하셨네〔七歲讀經史 嚴君作嚴師……八歲思稍長 詩文頗葳蕤 庭敎每裁抑 不以示親知〕”라고 읊어 어려서 부친의 슬하에서 공부하여 제법 성취한 정황을 읊었다. 그리고 백씨인 협(協)에게 자주 질정하였고, 형의 격려와 기대가 큰 힘이 되었음도 술회한 적이 있다. 이로써 어려서의 학문은 가정에서 이루어졌고, 나름의 성과도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호 이익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저자가 성호를 방문한 해는 20세로 당시 성호는 80세의 노인으로 오랜 가르침을 받을 상황은 아니었으나, 이 만남은 저자의 인생에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저자는 4년 동안 겨우 세 차례 성호를 방문하였고,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잠깐 나눈 담소가 전부였으며, 질정(質正)한 것은 《소학(小學)》에서 궁금한 점뿐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평생 마음속으로 선생을 사모하여 우러렀으며, 성호의 학덕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래도 소자는 선생의 후덕한 모습을 직접 뵙고 선생의 말씀과 행동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으니, 선생의 문하에 들지 못하여 유감스러워하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리고 선생의 저술이 매우 많으니, 소자가 그것을 읽고 유학(儒學)의 연원(淵源)과 고명한 의론(議論)을 익힌다면 지난날 밝히지 못한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어찌 큰 행운이 아니겠습니까?”(文稿 冊1 祭星湖先生文)라고 하여 성호가 남긴 저술을 통하여 학통을 이어받았음을 술회하였다.
《성호전서(星湖全書)》에는 저자와 관련된 글이 세 차례 보인다. 〈답윤기(答尹愭) 〉라는 글은 《주역》과 선천도(先天圖)에 대한 저자의 질의에 성호가 뒤늦게 답한 편지이고, 〈답윤기소학문목(答尹愭小學問目)〉은 《소학(小學)》에 대한 질의에 대해 성호가 조목별로 답한 편지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편은 바로 저자가 성호의 영전에 올린 제문인데, ‘문인 윤기(門人尹愭)’라고 명기하여 윤동규(尹東奎), 안정복(安鼎福)과 함께 성호의 문하에 당당히 섰음을 알 수 있다.
교유한 인물로는 목윤중(睦允中), 목조영(睦祖永), 목조눌(睦祖訥), 목만중(睦萬中) 등 사천 목씨(泗川睦氏) 집안이 두드러진다.
목윤중(睦允中, 1742~1816)은 자가 경집(景執), 호는 사남(沙南)으로 저자보다 1년 연하이다. 시와 문장에 능하였고 글씨도 잘 썼다고 하는데 저자의 나이 28세(1768) 때부터 교류한 시가 있다. 저자는 25세 때인 1765년부터 서강 가 탁영정(濯纓亭)에 우거하였는데, 당시 목윤중 역시 서강 가에 살아서 함께 어울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목윤중에 대해 “내 벗은 글 짓는 선비, 평생 생계가 서툴렀지……늘그막이 되도록 서로 교유하는 데다, 집마저 가까이 있게 되어 기쁘네〔吾友文章士 平生活計踈 相從遅暮境 且喜近幽居〕”라고 읊어 목윤중이 문장에 빼어난 선비이고, 평생 교유한 친구임을 읊었다.(詩稿 冊4 贈睦景執) 이 시는 66세에 지은 작품으로 이 시를 지을 즈음 저자는 이미 서대문 밖에 살고 있었고, 목경집이 이즈음 도성 안으로 거처를 옮겨 다시 가까이 살게 되었음을 몹시 기뻐하여 자신의 마음을 시에 담아 목윤중에게 표한 것이다.
목조영(睦祖永, 1734~1810)은 자가 경원(景遠), 호는 경빈(磬濱)이다. 목성유(睦聖有)의 아들로, 역시 남인계의 인물이다. 영조 32년(1756) 정시(庭試)에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병조 좌랑을 거쳐 정조 9년 무렵 문천 군수(文川郡守)로 나갔다. 저자가 58세에 목조영에게 준 시에 “세상 사람들 모두 속된데, 나의 벗 유독 천진하다네. 노경에 의기투합하였고, 올해엔 이웃에 집 샀네.〔吾友獨天眞 世人皆俗態 晩境聊投分 今年遂買鄰〕”(詩稿 冊4 贈睦文川祖永)라고 하여, 천진스런 목조영의 성품과 다소 늦게 어울려 마음을 나누고 가까이 살며 교유한 정황을 읊었다. 이외에도 목조영의 시에 차운한 시가 다수 실려 있다.
목만중(睦萬中, 1727~?)은 자가 유선(幼選), 호는 여와(餘窩)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에 올랐고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무명자가 속한 남인 공서파의 영수이고, 무명자보다 14세 연상이다. 저자는 대간(大諫)으로 있는 목만중이 회혼례(回婚禮)를 올리게 되자 이를 축하하며 “영광은 석명과 같으니 은택이 뒤따랐고, 정성 다해 선조 추모해 제물을 올렸네, 덕 쌓은 가문의 남은 경사 다하지 않아, 벽오동에 난새와 고니가 분분히 춤추네.〔榮同錫命隨恩澤 誠竝追先奉苾芬 餘慶德門應未艾 碧梧鸞鵠舞紛紛〕”(詩稿 冊4 睦大諫重巹宴)라고 읊어, 회혼례에 조정으로부터 총애를 받은 정황과 집안에 경사가 이어지는 모습을 그렸다. 이외에도 시사(詩社)처럼 목만중과 어울린 흔적들이 발견된다.
채홍리(蔡弘履, 1737~1806)는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사술(士述), 호는 기천(岐川)이다. 대제학 채유후(蔡裕後)의 5대손으로, 1766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형조ㆍ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목만중(睦萬中)ㆍ홍의호(洪義浩) 등과 친하게 지냈다. 채제공(蔡濟恭)과 족친임에도 채제공ㆍ이가환 중심의 남인 집권세력을 비판하였다. 저자는 “망형의 맑은 교분 갈수록 친밀해지는데, 달빛 아래 매화 찾을 때 밤조차 좋음에랴.〔淡契忘形意轉親 尋梅步月况良辰〕”(詩稿 冊3 與蔡台弘履夜拈韻同賦)라고 하여 채홍리와 나이도 지위도 잊은 망형지교(忘形之交)를 맺어 평소 그의 보살핌을 많이 입었음을 읊었다. 이외에도 채홍리가 기로소에 들어가게 된 것을 축하하는 시도 있다.
홍주만(洪周萬, 1718~1799)은 본관이 남양(南陽), 자는 문백(文伯)으로 저자와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은 인물이다. 저자보다 20세 이상 연상임에도 상당한 교유가 있었고 수창한 시도 다수이다.
강준흠(姜浚欽, 1768~1833)은 본관이 진주(晉州), 자는 백원(百源), 호는 삼명(三溟)이다. 벽파(僻派)의 일원으로 1801년 윤행임(尹行恁)의 축출에 앞장섰으며, 1813년 정약용(丁若鏞)의 석방을 반대하였다. 부친 강세정(姜世靖, 1743~1818)은 저자와 성균관에서 교유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강준흠이 쓴 저자에 대한 만사(輓詞)에서 저자가 자기 아버지의 친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三溟集 尹參議愭輓) 저자의 장남인 익배(翼培)에게 준 시도 있으므로 세교를 나눈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40대 후반에는 신분은 낮으나 시(詩)와 글씨로 명성이 높아 사대부와 어울렸던 이단전(李亶佃 1755~1790) 등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으며, 종실 이병순(李秉淳, 1746~?)과도 친분이 깊어 그의 증조부 의원군(義原君) 이혁(李爀, 1661~1722)의 행장을 지어주었고 그의 고모부 심사장(沈師章, 1741~1794)과는 동갑내기 벗으로 통하였다.
〈무명자 윤기의 가계도〉
〈무명자 윤기의 가계도〉
삽화 새창열기
(坡平尹氏貞靖公派世譜 참조)
3. 《무명자집》의 서지사항
《무명자집》은 본래 27책에 달하는 거질이었는데, 현재 시고가 6책, 문고가 13책으로 총 19책만이 전해내려 왔다. 후손 윤병희(尹炳曦)씨의 소장본이 유일본으로 추정되며 아직 이본이나 다른 저술이 발견되지 않았다. 윤병희씨 소장본을 바탕으로 1977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최초로 영인하여 간행하였다. 이후 2000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구두점을 찍어 《한국문집총간》 제256집으로 영인 간행한 것이 두 번째이다. 두 종의 간행서는 동일본을 저본으로 하였으므로 내용상의 차이는 없다.
《무명자집》이 어떻게 전래되었는지는 방계 5대손 윤목구(尹牧九)가 1977년에 쓴 발문에 자세하므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1977년 영인본 말미에 한문으로 첨부된 발문)
《무명자집》은 본래 총 27권으로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상자에 보관되어 왔는데, 저자의 증손 윤시영(尹始永, 1855~?)이 간행을 추진하다가 물력이 부족하여 중지하였다. 그 후 윤목구의 부친 시재(是齋) 윤철수(尹喆秀)가 이어 받았으나 역량이 미치지 못해 도모하지 못했다. 그 후 문중에서 문집을 빌려가, 녹문(鹿門) 윤호영(尹鎬永), 진사(進士) 윤세영(尹世永)이 각각 몇 책씩 나눠 소장하였고, 윤목구의 부친이 소장한 것이 12책이었다. 그런데 이분들이 모두 죽고 세상이 변하자 후손들이 문집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 분산되어 있던 여러 책들은 행상들의 손에 넘어가기도 했는데, 오직 윤목구 집안에서 소장한 12책은 동생 윤현구(尹炫九)가 서울로 옮겨왔다. 그리고 다행스럽게 시고 6책이 고씨(高氏)가 운영하는 고서점에 들어와 5책은 1956년에 연세대학교 교수 김동욱(金東旭)의 손에 입수되었고, 1책은 성균관대학교 교수 김종국(金鍾國)의 손에 들어왔다. 그 후 김동욱이 시고에 실린 〈반중잡영〉을 논문에 발표하여 학계의 이목을 끌었고, 김종국은 저자가 누군지 관심을 갖고 수소문하여 윤목구 집안의 윤영철(尹永喆)을 통하여 비로소 윤현구를 알게 되었다. 그후 김종국은 〈반중잡영〉이 성균관의 유사(遺史)가 되므로 이 문집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발의, 윤목구 집안과 김동욱의 찬동을 받아 간행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간행 경비를 마련하지 못하여 수년간 진전을 보지 못하였고,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박사가 대동문화연구원장으로 취임하면서 문집의 간행을 재추진하여 총 18책이 이병도의 집안으로 옮겨졌다. 이병도는 본서가 매우 귀중한 자료임에도 체재가 구비되지 않음을 흠으로 여겨, 윤혁동(尹焃東) 간사와 함께 가장 중요한 기록을 발췌하여 수천 매의 원고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간행 경비를 마련하지 못해 중지되고, 〈반중잡영〉만 따로 떼어 1968년에 《대동문화연구》 제5집에 발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이병도가 정년하면서 이 문집도 이병도의 서재로 옮겨졌다. 그후 윤현구는 오랜 기간 간행을 도모하였으나 끝내 실현을 보지 못하고, 윤목구의 종질 윤병희(尹炳曦)에게 간행사업을 부탁하고 1975년 봄에 죽었다. 윤병희는 선대 문헌의 중요성을 알고 종숙의 유언을 저버리지 못하여 이병도, 김동욱, 윤혁동의 사이를 자주 왕래하며 간행을 도모, 후손 문중에서 간행 경비를 마련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그러던 중에 녹문의 손자 윤철구(尹哲九) 집안에서 문고 1책을 찾아내어 총 19책이 되었고, 최진원(崔珍源) 교수가 대동문화연구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수년 간 간행을 위해 노력한 전말을 듣고서 윤씨 문중과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경비를 분담하여 1977년에 대동고전총서(大東古典叢書) 제35집 《무명자집(無名子集)》으로 영인 간행하였다.
이상이 발문을 통해 읽을 수 있는 본서의 전래 및 영인 과정의 시말이다. 윤목구는 나머지 8책을 찾을 길 없음을 애석하게 여기면서 문집의 본령이 재도(載道)와 기사(記史)인데 그저 음풍농월로 그쳤다면 본서가 후대에 전해질 수 없었을 것임을 지적하여 ‘역사 기록’으로서 본서의 가치를 특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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