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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도봉서원(道峯書院)▣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3. 28.

▣도봉서원(道峯書院)▣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산길 90 (도봉동)
[도봉서원과 각석군]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8호(2009.10.22 지정)

도봉서원은 서울에 소재한 현존하는 유일한 서원으로 도봉산 입구 등산길에 오르면 우측 옛 영국사 터에 위치 해 있다. 남언경이 양주목사로 부임하여 1573년(선조6)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광조(趙光祖)의 학문적 사상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창건과 동시에 '도봉(道峰)'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다. 1775년(영조 51) 어필사액을 다시 받아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400여 년간 양주, 파주, 포천, 서울지역에 있는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나 홍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 훼철되었으며 위패는 땅에 묻었다. 1903년 지방유림에 의해 단을 설치하여 봄, 가을에 향사를 지내 오다가 6.25전쟁으로 다시 중단되었다. 1970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 1971년 복원 매년 음력 3월10일(춘향제), 9월10일(추향제)에 전국 유림 및 지역유지가 모여 전통향사를 지내고 있다.

 

❁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10) 조광조를 배향한 도봉서원

조광조(趙光祖)에 이어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하다
필자가 건국대학교박물관에서 관장으로 일하던 시절, 외부 기관에서 가장 많은 대여 요청을 받은 작품이 있다. 바로 「도봉서원도(道峯書院圖)」이다. 도봉서원은 서울시 도봉구 도봉산 입구에 위치한 서원으로,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배향(配享)했다가 뒤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조광조(趙光祖)는 스승에게도 할 말을 다하는 너무나 곧은 사람이었기에 일찍 부러진 표본이었다. ‘선비는 물에 빠져도 개헤엄을 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그의 기질이 꼭 그랬다. 사람들은 그를 곧은 선비의 상징으로 여겼다.

중종에게 왕도정치를 역설하였다. 그는 너무 곧게만 일을 하려 들었고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반대파에게 밀린 혁신정치가로 훈구파의 끈질긴 공격에 마침내 사약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선조 초에 마침내 영의정에 추증(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 그 관위를 높여 줌)되었고 문묘에 배향(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모심)되었다. 조선조 중기에 태어나서 이상을 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이상정치는 후세의 귀감이 되었다. 그의 학문 태도와 현실 대결의식은 후세 선비들의 모범이 된 것이다. 죽어서 되찾은 명예를 되찾았고, 그의 개혁에 대한 정열은 길이 빛났고, 굿굿한 신념은 변절자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송시열(宋時烈)은 조선 후기의 정통 성리학자로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 호는 우암. 주자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으며,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명을 존중하고 청을 경계하는 것이 국가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강상윤리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서 국가·사회 기강을 철저히 확립하고자 했다.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중종의 파격적인 후원 속에 개혁정치의 아이콘이 되었으나,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38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러나 선조 대 이후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고 학계를 지배하면서, 조광조는 사후에 사림파의 영수로 추앙을 받게 되었다.

조광조를 배향한 서원이 서울에 설립되게 된 계기는 조광조가 어릴 때부터 도봉산 영국동(寧國洞:원래 영국사라는 절이 있어서 영국동이라 함)에 있는 천석(泉石)을 좋아하여 왕래하며 즐긴 연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영국서원(寧國書院)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선조 때 사액을 받은 후에 도봉서원이 되었다.

처음 도봉서원의 건립을 주도한 인물은 양주목사(楊州牧使)로 부임한 남언경(南彦經)이었다. 서원 공사의 마무리는 이제민(李齊閔)이 했으며, 1579년(선조 12)에는 이정암(李廷馣)이 중수하였다. 1578년(선조 11)에 조광조의 제자인 백인걸(白仁傑)이 도봉서원의 사액을 받기 위한 상소를 올렸다가 선조가 거부한 사례가 『선조수정실록』에 보인다. 그런데 사액을 받은 후의 이름인 도봉서원이라는 명칭이 『선조실록』 1604년(선조 37)의 기록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1604년 이전에 사액서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근처에 서원을 설치, 자파 정치세력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모습은 광해군 대 북인 집권기에 정인홍과 이이첨 등이 주도하여 북인 학문의 영수 조식을 배향한 백운서원(白雲書院)을 건립한 것으로도 나타난다. 17세기 도봉서원은 서인의 학문적, 정치적 구심점으로서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백운서원의 주체들과 대립했다.

서인이 집권 세력이 된 인조반정 이후에는 특히 그 영향력이 커졌다.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는 “만력 계유년(1573년)에 사옥(祀屋)이 창건되어 마침내 서울 동교(東郊)의 대유원(大儒院)이 되었다. 그런데 그 사체(事體)와 규모가 성균관에 다음가므로, 서울의 선비들이 여기에 많이 모여들었다.”(『한수재집』 권 22, 소광정기(昭曠亭記)라고 하여 당시 도봉서원의 위상이 대단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숙종 때는 송시열이 조광조와 함께 배향이 되면서 도봉서원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정치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정선과 심사정이 그린 도봉서원
도봉서원은 영조 대 노론 집권 시기에 특히 위상이 강화되었다. 1745년(영조 21)에 영조로부터 인쇄한 서적을 제공 받았으며, 1759년(영조 35)에는 영조가 친히 쓴 편액을 하사받아 그 위상을 높였다. 영조는 친히 ‘도봉서원’ 네 글자를 쓰고 치제(致祭)할 때에 게판(揭板)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선조 때에 설립된 이후 400여 년간 양주, 파주, 포천, 서울 지역에 있는 선비들이 찾는 대표 서원으로 역할을 했던 도봉서원. 그러나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의 파고 속에 훼철되었으며, 오늘날의 모습은 1970년의 1차 복원, 2011년의 2차 복원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 도봉추색도(道峰秋色圖)/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 1707-1769)의 도봉서원도(道峯書院圖)

 

도봉서원의 모습은 정선(鄭歚:1676~1759)과 그의 제자 심사정(沈師正:1707~1769)이 그린 그림을 통해 확인이 되고 있다. 정선의 그림은 현재 소장처를 알 수 없이 사진으로만 전하며, 심사정의 그림은 건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선은 인왕산 일대에 거주하면서 김창협 등 노론의 후원을 받아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있는 장소들을 그림으로 다수 남겼는데, 「도봉서원도」도 이 과정에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심사정은 어릴 적 정선에게서 배운 적도 있으나, 문인 화가로서 남종화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룬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심사정의 「도봉서원도」와 정선의 「도봉서원도」가 비슷한 분위를 자아내는 것으로 보아, 심사정이 정선의 그림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진으로 전해지는 정선의 그림을 보면, 우이동 계곡에 위치한 도봉서원을 중심으로 위로는 우뚝 솟아오른 만장봉(萬丈峰)이 보이고, 서원 앞쪽으로는 큰 바위들 사이로 시원하게 흐르는 시냇물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서원 뒤로는 울창한 송림이 서원 건물을 감싸고 있고, 그 위로는 둥글게 솟아오른 산봉우리들이 나타나는데,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이 이 그림에도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심사정의 「도봉서원도」 역시 진경산수화풍으로 그린 작품으로, 산과 계곡으로 형성된 원형의 공간 안에 도봉서원이 포근하게 위치해 있다.

2012년, 문화재청과 서울문화유산연구원 발굴조사단은 도봉서원 터에서 고려시대의 금강령과 금강저를 비롯한 여러 유물들을 발견했다. 발굴된 유물들의 제작 시기는 12세기 이전으로 보이는데, 특히 금강령과 금강저는 그 제작 수준이 매우 뛰어나 국보보물로 지정받을 만하단 평가를 받았다. 서원 터에서 고려시대 불교 유물이 나온 까닭은, 상술한 바와 같이 원래 그 자리에 영국사란 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 사진에 나온 금강저와 금강령을 비롯한 출토품 10점은 2021년 8월 '서울 영국사지 출토 의식공양구 일괄'이란 명칭으로 보물로 지정받았으며, 현재는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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