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漢陽人문화유적❀

▣12世祖 慕溪公 諱 趙綱 先生 行狀▣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4. 9.

▣12世祖 慕溪公 諱 趙綱 先生 行狀▣

 

선생의 성은 趙(조)요 諱(휘)는 綱(강)이요 자는 叔擧(숙거)요 호는 慕溪(모계)니 한양인으로 고려 左侍中龍城府院君(좌시중용성부원군) 諱(휘) 暾(돈)의 후손이시다. 7대조 휘 인옥(仁沃)은 태조를 도와서 개국공신으로 漢山君(한산군)을 봉하고 諡(시)를 忠靖(충정)이라 하고 太祖廟(태조묘)에 배향하였다. 漢山(한산)께서는 예조판서 諡(시) 節孝公(절효공) 諱 賚(뢰)를 낳으시고 절효공이 이조참의 諱(휘) 順生(순생)을 낳으시니 문장과 氣節(기절)이 있음에도 일세를 숨어지내었다. 단종께서 어리시어 兩大君(양대군) 三大臣(삼대신)과 더불어 뜻을 같이하여 화를 만날 것을 보호하려다 귀양을 갔다가 후에 固城(고성)유배지에서 명을 받았다.(후에 正宗朝(정종조)에 莊陵忠臣壇(장릉충신단)에 배향되었고 純廟朝(순묘조)에는 공주 蓼塘書院(요당서원)에 배향되었다. 吏曹參判(이조참판) 弘文館提學(홍문관제학)에 특별히 추증되었다) 아들은 문과 급제로 병조정랑 諱(휘) 銘(명)인데 또한 錦山으로 귀양갔다. 참의공께서 사사되셨다는 것을 듣고서도 상사에 갈 수 없어서 애통함을 못이겨 운명하시니 이 분이 곧 선생의 고조가되신다. 큰 도량과 큰 덕을 가지셨으며 나이16세에 문과하여 1등으로 발탁되었다. 가슴에 품은 기국을 시험하지도 못하였으니 세상의 탄식하는 바가 되었다. 정랑이 현령 諱(휘) 伯亨(백형)을 낳으시니 처음에 진사가 되었을 적에 참의공의 손자로서 온양에 유배되었다. 마침 세조께서 온양온천을 행차하시자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여러 신하들이 같이 상소해서 특별히 사면하여 그 공신과 벼슬을 회복케 하였다. 이분이 선생의 증조가 되신다. 현령이 또 대호군 휘 璲(수)를 낳으시니 孝友(효우)와 文學으로 復戶(복호)1)의 은전을 받았다. 대호군은 진주유씨 사맹 안수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을 낳으셨는데 그 둘째아들 교위 承胤(승윤)이 곧 선생의 아버지가 되신다. 평양 조씨 진사 황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두 딸을 낳으시고 후사를 이를 아들을 두지 못하여 늘상 후사가 없는 것을 걱정하다가 만년에 선생을 낳으시니 즉 가정 정해(1527) 11월22일이다. 선생이 나면서 바탕이 아름다움이 있어서 어려서도 이미 성인의 법도가 있었고, 남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보면 지적해 말하니 부모가 귀히여겨 사랑하고서 심하게 공부를 권하지 않았다. 나이 7-8세가 됨에 持平 鄭思顯(지평 정사현)에게 가서 공부하였는데 지평이 소학을 가르치면서 말하기를 “후학들이 성공하는 것은 이 글보다 나은 것이 없다 ” 하니 선생이 두루두루 숙독하여 학문공부가 날로 진전하였다. 좀 자람에 강개하여 큰 뜻을 가젔으나 다만 과거의 글에는 뜻을 두지 아니하고 성현의 풍을 사모하여 널리 배우고 힘써 행하여 성공하는데 기약하였다. 나이20에 사마복시에 급제하고 어버이가 돌아가신뒤에는 과거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뒤에 친구들이 권함을 따라서 戊辰(무진 : 선조원년)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이후로는 벼슬에 응시하지 않고 궁벽한 시골에 은거하며 검박하게 살면서 더욱 품행을 닦는데 힘을 다하였다. 小學을 독실하게 읽고 近思錄(근사록)2)을 높이고 숭상하고 여러 경전을 두루 섭렵하였다. 평소에 낮이나 밤이나 의관을 입고 위의를 차려서 혹시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하고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함에 옛 교훈을 상고하고 그 평소의 뜻은 人心을 맑히고 바른 학문을 여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았다. 선조 襄烈公(양렬공)의 절의와 文正公(문정공) 靜菴(정암)의 도학을 따라서 평소에 사랑하고 사모하여 그 가르침을 따르고 항상 작은방에 거하면서 깊이 이치를 연구하고 마음을 잠겨 上帝(상제)를 대하고 본을 함양하는데 각고의 노력을 하니 사람들이 미치지못할 바이더라. 또 東洲 成悌元(동주 성제원) 선생과 圭菴 宋麟壽(규암 송인수)의 문하에 나아가서 학문하는 큰 방법을 갖추어 들었다.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동은 천성에서 나와서 날마다 가묘에 배알함에 비바람을 가리지 아니하고 봉양하고 순성함에 곡진하지 않음이 없었다. 집을 다스림에 바름으로 해서 안과 밖이 절연하고 은혜와 신의가 행하게 되었다. 임자년 여름에 어머니께서 병을 얻어 심히 위험하였는데 선생이 다님에 신을 끌지 않고, 말씀에 사나운 소리를 내지 않고, 갓과 띠를 풀지 않고 밤낮으로 모셔 약을 대접하였다. 어머니께서 들오리고기를 자시고자 하니 여름철인지라 오리를 얻을 길이 없었다. 울며 문밖에 나가서 들과 언덕에서 방황하는 즈음 홀연히 푸른매가 오리를 쳐서 앞에 떨어뜨리는 지라, 가지고 돌아와 어머니께 봉양하니 묵은 병환이 곧 나았다. 사람들이 모두 효도의 감동에서 이룬 것으로서 겨울에 대순을 얻은 맹씨와 얼음에서 잉어를 얻은 왕상과 같은 아름다움이라 하였다3). 당시에 본 고을목사 이증영이 그 행실을 나열해서 조정에 알리어 임금께서 특별히 호역을 덜도록 명하였다. 선생께서는 마치 스스로 용납하지 못할듯하여 몸을 둘 곳을 몰라하였다. 오랜뒤에 龜巖 李公 楨(구암 이공 정)이 본 고을에 부임하여 선생의 이름을 듣고 몸을 굽혀 와서 뵙고는 감탄하며 師友(사우)로서 예를 다하였다. 成先生역시 시를 주시며 장려하시고 칭찬하시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한 때에 공경하고 감복하는 바가 됨이 이와 같았다..어머니상을 당하여 예를 넘어 애통해하였으며 염하기 전에는 물과 미음도 입에 가까이 하지 않고 장사지낸 뒤에는 곧 무덤곁에 여막을 짓고 3년토록 죽을 마시며 피눈물로 날을 지내니 쇠함이 점점 심하여 거의 생을 멸할 지경이었으나 어버이에게 昏定晨省(혼정신성)하는 것을 비록 큰 비와 눈이라 하더라도 폐하지 않았다. 또 아버지상을 당해서도 한결같이 어머니상사와 같이 하였다. 홀로 여막에 거하면서 조석으로 무덤에 절하고 여막을 떠나지 않기를 3년을 하니 사람들이 어려운일이라고 말하였다. 온 고을 사람들이 탄복하지 않음이 없어서 그를 가리켜 말하기를 皐子羔(고자고)4)와 小連(소련) 大連(대련)5)이 다시 나왔다고 하였다. 先朝 임신년(1572)에 선생의 학행과 효성과 청렴으로 해서 관과 향에서 모두 천거해 벼슬을 제수하는 명령이 있었다. (특별히 중부참봉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어버이가 계시지 않음으로 해서 벼슬에 나가기를 뜻하지 아니하여 드디어 나가지 않았다. 기묘년 봄에 또 영릉참봉을 추천되었는데 長老(장노)들의 강권에 의하여 깊이 숙배하고 遺逸(유일)로서 여러 번 천거되어 司憲府掌令(사헌부장령)待講院弼善(대강원필선)에 이르렀다. 기축년에 은진의 목사로 나아가 고을살이하여 다스림과 가르침을 크게 행하였다. 정을 미루어 아래 사람과 더불어 하고 어루만지고 사랑하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武城(무성)의 조화를 이루고자 기약하였는데 方伯(방백)의 꺼려하는 바가 되어 체직되어 돌아오니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은혜를 생각하여 좇아 그리워하기를 마지않았다. 萬曆(만력) 임진의 난리에 선생이 임금께서 파천하신다는 소리를 듣고서 이에 여러 지방을 돌아다녀서 용만에까지 다달아서 상소를 올리고 조회를 행하니 임금께서 비답을 좋게 내리시고 장려하였다. 곧 격서를 가지고 사방에 고하여 의병 수천을 불러 모으고 친히 화살과 돌을 무릅쓰니 의병들이 모두 죽음을 바치는지라. 청주의 송현에서 승첩함을 아뢰게 되었다.(이 일이 연보에 보하였다) 사실이 듣기움에 임금이 가상히 여겨 말씀하시기를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문에서 한다 하더니 이제 과연 그러하도다” 하고 드디어 倡義使(창의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선생의 나이 이미 쇠함에 능히 자력으로 먼 곳까지 달려갈 수 없음으로 奉事(봉사) 鄭若(정약)과 아들 光翼(광익)이 대신 그 무리를 거느려서 竹山에 주둔하고 여러 차례 승첩하였다. 선생이 이를 위하여 식량을 옮겨 공급함에 일찍이 끊기지 않게 하였다. 光翼이 장병을 거느리고 진에 다다를적에 선생이 권면해 말씀하기를 “戰陣(전진)에서 용맹이 없는 것은 효가 아니다. 내가 있다는 까닭으로 해서 진지에 임하여 용맹이 없게 하지 말라” 하니 듣는이가 모두 격절하고 감탄하였다. 무술년에 적세가 더욱 심하여 국가가 군사를 공급하는데 어려운지라 선생이 콩二千석과 쇠二千근을 모집해 얻어서 군사의 쓰임에 공급하니 그 절의의 축적이 크게 상소 속에 나타나 있었다. 임금께서 비답을 내려 말씀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빠른바람에서 굳센 풀을 알 수 있고 어지러운 세상에 충신을 안다 하였는데 오늘날 경과 같은 이를 이름이로다. 충신이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또한 효가 평소에 쌓인 것을 옮긴 뒤에서 볼 수 있다 ”하였다. 성품이 본래 강하고 굳어서 남의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반드시 엄한 말씀으로 책해서 조금도 용납하거나 느긋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골 사람의 착한 자는 그를 공경하고 착하지 못한 자는 그를 두려워 하였다. 평생 산업을 다스리지 않아 집이 극히 가난하여 도시락 밥이 여러번 비어도 편안한 듯 거처하였다. 충효의 대절이 남의 이목으로 들어가는 까닭으로 한 때 교유하던 이가 모두 학행이 있는 名士였다. 제사를 받드는 때마다 반드시 계신 듯이 정성을 극진히 하여 친히 음식하는 것을 살펴서 노비를 시키지 않고 제수의 드림을 정결하게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서모를 대함에도 더욱 독실하게 하여 관에서 얻은 것을 반드시 서모에게 돌려 보내고 털끗만한 물건도 감히 스스로 사사로이 하지 않고 모두 백성들에게 주어서 그 여생을 보호하였다. 과부로 있는 여동생 두 사람이 먼 데 있어서 생계가 어려운지라 선생이 그들을 위해 한 집을 지어주어 누이를 봉양하였으며 자기 재산을 나눠 주어서 그 생을 편안히 하게 하였다. 여동생의 아들 李仁男이 나이 자라면서도 배우지 않는지라 선생께서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마침내 착한 선비가 되었다. 일찍이 계사년 흉년에 친척 모자가 장차 웅덩이에 굴러 들어가려 함에 그 집을 팔고자 하니 선생이 그 값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것을 사고 文券(문권)이 이루어짐에 인하여 거기에 살게 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너의 집을 산 것은 장차 네가 죽는 것을 구원하려는 것이고 문권을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팔지 못하게 한 것 뿐이다”라고 하고서 문권을 도로 주고 그 본 값을 추심하지 않았다. 廚院(주원)에 재직하고 있을때에 곧 종가에 가서 선세의 사당을 알현하다가 그 사우가 기울고 무너지는 것을 보고(종가는 서울에 있었는데 심히 가난하였다. 충정공 신위를 부엌 다락 위에 모시었었다)당형 純(순)(즉 충정공의 嫡長孫(적장손)으로서 벼슬은 內禁府令(내금부령)에 이르렀었다)에게 일러 말하기를 할아버지 사당이 이와 같으니 내 무슨 마음으로 녹을 먹으리오 하고 드디어 봉급을 덜어서 급히 재목과 기와를 사들여서 새로운 사당을 경영해 세우고 옮겨 모신 뒤에 돌아왔다(사실은 유사에 보인다) 그 효도하고 우애하고 화목하는 행동이 실로 천성에서 나와 그러하였다. 청주에 옛날에 서원이 없었는데 선생이 도를 높이고 학문을 향상시키는 정성으로 일찍이 주위 識者(식자)들에게 상의하여 말하기를 “옛적 사람들이 반드시 鄕(향)선생을 사우에 제사지내는 것은 그 높은 행실을 우러러는 것이 깊어서 많은 선비들이 법받게 하려는 것이다. 만일 慶徵君(경징군)과 같은 독실한 학문과 순수한 효도와 朴江叟(박강수)의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갖추어진 이와 宋圭菴(송규암)의 유림의 영수로서도 오히려 높이고 숭상하는 도가 빠졌으니 어찌 儒化(유화)의 일대 흠이 아니겠는가?” 하니 선비들이 모두 같은 말로 그를 따라서 드디어 서원(莘巷書院)을 창립해 세우고서 그들을 높이 받들어서 많은 선비들의 표준의 곳으로 삼게하였다. 이로부터 청주의 인사들이 모두 문학과 행실에 돈독하였고 어리석음을 고쳐 도에 이르게 한 것은 모두 선생의 힘이었다. 어버이를 사모하는 마음은 늙을수록 더욱 도타워져서 나이가 많고 산소가 멀어 조석으로 살필 수 없게 되니 집을 부모의 산소 가까운 곳 시내가로 옮기고 그 시내를 이름하여 말하기를 慕溪(모계)라 하고 인하여 스스로 호를 삼아서 길이 사모하는 마음을 부쳤다. 옛적에 이른 바 종신토록 사모한다는 것은 그 선생을 이름이었다. 나이73세에 졸하시니 선조32년 이었다.(기해 12월17일) 고을 남쪽(양사 서쪽 매봉산 아래에 각삼리 뒤 산마루에 삼위를 합조함) 유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현종 병오에 임진의 충성을 수록함에 좌승지를 증직하고 산소에 제사를 드리게 하고 어필로서 특별히 忠孝節義(충효절의) 4자를 써서 표하였고, 숙종 정해년에 청주 송천에 서원을 세웠다) 선생의 부인 안동 김씨는 참봉 允忠(윤충) 따님이다. 1남2녀를 낳으니 아들은 光翼(광익)이니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의 안성군수가 되었고 딸은 판관 朴嗣賢(박사현)과 진사 金恭謹(김공근)에게 출가하였다. 재취한 진주 정씨는 승사랑 砯(빙)의 따님이시니 아들 光弼(광필) 하나를 낳았다.

 

이 때 나 喜壽(희수)는 郡界에서 머무른지 수 개월에 군수가 찾아와 선생의 행장 지을 것을 청하니 喜壽(희수)가 스스로 생각하건대 비록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지는 못하였으나 선생의 학문 연원과 行義(행의)의 순수하고 독실한 것은 평소에 크게 사모하는 바이라 감히 글 못하는 것으로써 사양치 못하였다. 유적이 남의 이목에 있는 것을 거두어서 한 편을 만들어서 다만 군수의 효성스러운 간청을 조금 말막음 할 뿐이다.

 

만력 임인년에 청송후인 沈喜壽6)는 삼가 글쓰다.

 

< 출처 : 한양조씨충정공파보 上 1999.7, 모계집>

 

1) 復戶 ; 조선조때 군인 양반의 일부 및 궁중의 노비등 특정한 대상자에게 조세나 그 밖의 국가에 내는 부담을 면제하여 주는일

2) 近思錄: 송나라 朱熹,呂祖謙이 편찬한책, 일상생활의 수양에 필요한 六百二十二條를 추려서 十四門으로 분류한책

3) 雪筍氷鯉 : 중국삼국시대 오나라의 효자인 孟宗이 겨울날 숲 속에서 그의 어머니가 즐기는 죽순이 없음을 애탄하자 홀연히 눈 속에서 죽순이 나타났다고 하는 고사와 西晉시대에 太保를 지낸 王祥이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그의 계모가 생선을 먹고 싶어하였을 때 얼음위에 누어 얼음이 녹는 것을 기다려 얼음을 깨고 잉어 두 마리를 얻은 고사를 말한다.

4) 子臯는 공자의 제자로 이름이 이다. 小學고자고가 부모의 상을 집행함에 피눈물을 3년동안 흘려 일찍이 이를 드러내고 웃은적이 없으니, 군자가 어려운일이라고 칭찬하였다.

5) 少連,大連 : 古人의 이름. 小學에 소련과 대련이 거상하기를 잘하여 부모가 죽은지 3일동안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3개월동안 빈소에서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1년동안 슬퍼하였으며 3년동안 근심하였으니 동이족의 자식이었다.라고 하였다.

6) 沈喜壽 : (1548-1622) 조선의 문신, 자는 伯懼, 호는 思齊, 一松 ,水雷, 累人. 본관은 靑松. 벼슬은 부응교,이조판서,양관대제학,우찬성,좌찬성,좌의정. 시호는 文貞이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