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漢陽人문화유적❀

7세조 파서공(諱順生)의 避蹟址(流配地) 경남 고성군 죽도 제향 및 추모비 건립 추진.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4. 9.

◐△다른이가 본 대섬(죽도)의 편집지도◑ 

[김해허씨 정절공 허기선생 유허비 : ▲현실적인 竹島 위치!!!]

고성(固城) 대섬(竹島)은 유년기 삶의 터전이었다 (tistory.com)

▲고성군 재향군인회에서 270m위치에 죽도(竹島)!!!

◐7세조 파서공(諱順生)의 피적(유배)지 고성 죽도 제향 및 추모비 건립 추진◑

2021년 음 9월 14일 충정공 부조묘 제향을 마치고 이사회를 가졌다. 이사회 중 용인 경행씨로부터 파인실기 번역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번역본을 고정을 볼 것을 부탁받아 교정을 2022년 2월 10일 음성군 금왕읍 모 모텔에서 1차 교정을 마치고 파서공의 피적지 경남 고성군 죽도를 한 번 찾아가 보기로 결정하고 날자를 정했다.

 

날자는 3월 21일 오전 8시 금왕읍에서 출발하고 차편은 봉고차를 전세내기로 하고 충정공 총무는 차를 전세내는 것과 참가자를 알아보기로 했다. 그 결과 참가자는 금왕에서 성주, 성추, 용실, 윤형, 덕산 성계, 용인 경행, 청주 성봉, 종희가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가기전 고성군청 문화과로 죽도에 대하여 문의하였으나 잘모른다 하고 고성군 문화원으로 알아보라고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고성군 문화원으로 연락하니 죽도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죽도에 대하여 이야기하길 그곳은 김해허씨유적비만 있다고 했다. 파서공은 그곳에서 처교받은 곳이지 유적이나 산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니 파서공에 대하여 주민들간에 구전으로 내려온 것이 혹시 있으면 알고 싶다고 말하니 자세히 알아보겠다고 했다.

 

자손이 수 백년만에 고성땅을 찾아가면서 술 한 잔을 올리고 싶어 조촐하게 준비하기로 하고 지방과 축문을 작성하여 제사준비를 해 3월 21일 8시에 금왕읍 유포리에서 서로 만나 출발하고 청주 종인은 서청주 아이씨에서 만나 동행했다.

고속도로로 가도 워낙 우리나라 끝이라 도중에 휴게소에 들여 차 한잔씩 나누고 또 출발하여 다음 휴게소에서 쉬었다 갔다. 고성군 죽도는 고성보훈회관 뒤에 있는 곳이라 듣고 보훈회관을 찾아 가니 시간은 오전 11시 40분이다.

 

보훈회관에 들여 차를 주차시키고 그곳에 근무하는 분에게 물으니 친절히 알려주었다. 죽도는 보훈회관에서 500m 밖에 있어 찾아가니 김해허씨 유적비가 장엄하게 서 있었다. 둘레는 성곽처럼 싸여있고 경내는 금잔듸가 깔려 있으며 면적은 약 150평 정도이고 문은 철문이며 잠겨 있지는 않았다.

 

마련한 제상을 차리고 제를 올리기로 했다. 초헌관은 충정공파회장 성계, 아헌관은 중추공회장 경행, 종헌관은 충정공 직전회장 성주, 첨작에 성봉, 독축에 종희, 사준에 용실, 전작에 성추, 로 결정하고 제물은 충정공회장이 사비로 장만하였다고 보고하고 엄숙히 제를 올렸다.

지방은 顯十九代祖考 通政大夫 吏曹參議 府君神位 라 쓰고 축문은

          현십구대조고 통정대부 이조참의 부군신위                      

維歲次 壬寅 二月乙未朔 十九日 癸酉 十九代孫 忠靖公派宗會 會長

유세차 임인 이월을미삭 십구일 계유 십구대손 충정공파종회 회장

成桂 敢昭告于 顯十九代祖考 行 通政大夫 吏曹參議 贈 嘉善大夫 吏曹

성계 감소고우 현십구대조고 행 통정대부 이조참의 증 가선대부 이조

參判 兼 同知經筵義禁府事 弘文館提學 同知春秋館 成均館事 世孫

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 세손

左副賓客 五衛都摠府 副摠管 府君 固城竹島 忠節殊命 五百六十八年

좌부빈객 오위도총부 부총관 부군 고성죽도 충절수명 오백육십팔년

忠節卓異 贈職敎旨後 一百九十二年 諸子孫 伏惟被禍 胸中抑鬱 現地

충절탁이 증직교지후 일백구십이년 제자손 복유피화 흉중억울 현지

踏査 不勝永慕 伏惟尊靈 永世是寧 謹以 淸酌脯果 尙 饗.

답사 불승영모 복유존령 영세시녕 근이 청작포과 상 향

 

죽도는 옛날에는 물로 쌓여 있는 조그만 섬이였지만 지금은 물은 간데 없고 바닷가 육지에 작그만 동산이였다.

점심식사를 바다가 뜸북새라는 식당에서 하며 죽도는 허씨내 개인소유 땅인것 같으니 고성군청에 문화과로 가서 문화공원에 추모비를 세울 수 있도록 간청해 보기로 결정하고 군청 문화과 과장을 찾아가서

고성군청을 찾아온 동기를 말씀드렸다. 과장님 말씀이 군청이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니며, 문화원과 의회가 동의 하여야 한다고 말하며 지금 可,不를 말씀드릴 수 없다고 했다. 명함을 주고 신신당부를 해고 다시 금왕으로 올라오는 도중에 과장님 전화가 와서 받으니 조순생씨에 대하여 자세히 내역을 적어 보내주면 좋겠다고 말하여 귀가 하는 즉시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젊은 과장님이 조상에 대하여 말씀드리니 우리를 좋게 받아드리는 것 같았다. 집에 와서 파서공에 대한 행적을 살펴보고 문서를 작성하여

3월 25일 고성군청 문화관광 과장 김영국씨에게 보냈다.

 

[김과장에게 보낸 문서]

조순생(趙順生)

생졸 : 生. 기록, 무.   卒, 1454년 8월 15일.

본관 : 한양 (漢陽)

호   : 파서(坡西)

활동분야 : 정치

본관은 한양이며 호는 파서이고 조선왕조 개국 일등공신이며 이조판서 한산부원군 시(諡) 충정공이시고 태조묘정에 배향되신 휘(諱)조인옥(趙仁沃)의 손자이며 충청도와 경상도  절제사, 돈령부동지사 병조참판, 평안도관찰사, 자헌대부 한성부판사, 대학사 시(諡)절효공 휘(諱) 뢰(賚)의 아드님이시다.

 

세종 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천거되어 집현전교리에 선발되었으며, 시강원 한림학사이며, 1439년 (세종21) 평안도 경차관(平安道 敬差官)을 거쳐 1441년 대호군으로 궁궐 용품 제작, 개발하였고, 1445년 7월 마정관장 공로를 인정받아 통훈대부제수. 1447년 이조참의로 임명받았고 공은 세종, 문종, 단종 삼조를 섬기였다. 삼정승과 공은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았다. 보국을 맹세하였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여 은혜를 갚고자 하였다.

 

1453년 단종원년 계유년 10월 안평대군과 친밀하다는 이유로 정난에 피화를 당해 고성현 죽도에 안치하고 추탈하여 생전의 위훈을 깎아 내리고(신속장릉지) 갑술년 8월 노비로 삼으라는 명을 내렸다. 대신, 대간들이 치법을 청하니 15일 우의정 정분과 같은 날 처교의  명을 받아 고성현 죽도에서 돌아가셨다. (장릉지유장)

 

또 9월 명(命)을 내려 자식들과 가까운 무리들을 연좌하였다. 두 아들 병랑 명(銘)과 예랑 전(銓)을 함께 금산현에 안치하였다. 큰 손자인 현령 백형(백형)은 온양군에 아우 사직공 효생(효생)은 나주로 종부(종부) 사평공 갱(갱)과 판사공 관(관)은 해남현에 유배 되였다. 봉례 관생의 아들 도사 섬(섬)도 귀양을 보냈다.

 

아들인 휘(휘) 명(명)은 금산현으로 유배당하여 아버지의 처교(처교)소식을 듣고 시신을 수습하기위하여 가려했으나 나라에서 국법으로 가지 못하게 하였다.갑신년 2월 손자 백형(백형)은 온양으로 유배 되여 있을 때 세조가 피부병에 걸려 수안보 온천을 거쳐 온양 온천으로 갈 때 혈서와 단서철권(단서철권)을 올리며 파서공 할아버지의 억울함을 피눈물을 흘리며 사(사)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다. 백형은 개국공신 충정공 조인옥의 적장손(적장손)임을 말했다. 세조는 원훈(원훈)의 자손임을 알고 사(사)하도록 명(명)하고 또 관직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세조 4년 초혼각에 배향, 광무 8년 숙모전으로 선액하여 단종과 여러 절신들을 배향하고 파서공 조순생(조순생)  은 서무에 아들 인촌공 조명(조명)은 동무에 배향되었다. 1791년 2월 영월 장침 옆 조사단에 배향되고, 또한 순조 4년 여름에공주 요당서원에 배향 되었다.

 

서기 1889년 8월 5일 고성부사 조종직(조종직)은 본부에 제단을 설치하고 제(제)을 올렸다. 본 고을의 선비들과 부사 종직, 주서(주서)(정7품) 김의선(김의선). 진사 조일원(진사 조일원). 유생 이보하(이보하). 황학수(황학수) 이진수(이진수)등 유생과 주민이 같이 하였다.

 

1929년에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연정리에 효충사를 설립하고 파서공 조순생. 인촌공 조명과 은진현감 모계 조강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2월 말. 정일과 8월 말, 정일에 향사하고 있습니다.

 

증직교지

교지(교지) 순조조포증(순조조포증)

교지(교지) 조순생(조순생)

통정대부 이조참의 조순생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 세손좌부빈객 오위도총부부총관자.

도광 십년 구월이십구일(서기1830년) (충절탁이 이증사승)

안녕하십니까?

저는 3월 21일 과장님을 찾아뵙고 돌아온 조성계입니다.

과장님의 배려에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고성군민의 행복과 문화적 향상을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하시는

과장님에게 부족한 제가 과장님에게 부탁하여 누를 끼치지 않았나 

걱정이 앞섭니다. 과장님의 하해같은 넓으신 마음으로 부족한 저희의 선조를 위하는 마음을 십분 헤아려 주시여 고성군 문화공원 한쪽에 추모비를 설립 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주시길 일만여 파서공 자손들은업드려 간청합니다. 제가 부족하여 할아버님의 자료를 제대로 수집하지 못하였어도 양해해 주십시오.

고성군의 무궁한 발전과 과장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2022년 3월 24일

 

                          충정공파종회 회장 조 성계 배상   

고성(固城) 대섬(竹島)은 유년기 삶의 터전이었다 (tistory.com)

 

고성(固城) 대섬(竹島)은 유년기 삶의 터전이었다

고성읍 전경 고성(固城) 대섬(竹島)은 유년기 삶의 터전이었다 (경남 고성군 고성읍 수남리 79번지) 고성 대섬(竹島)은, 고성 남포항(철둑) 가는 길 사거리에서, 고성보건소로 가는 길 오른편의 아

akekanfl.tistory.com

고성(固城) 대섬(竹島) : 고성읍 전경

https://akekanfl.tistory.com/8704725

 

고성(固城) 대섬(竹島)은 유년기 삶의 터전이었다

고성읍 전경 고성(固城) 대섬(竹島)은 유년기 삶의 터전이었다 (경남 고성군 고성읍 수남리 79번지) 고성 대섬(竹島)은, 고성 남포항(철둑) 가는 길 사거리에서, 고성보건소로 가는 길 오른편의 아

akekanfl.tistory.com

고성(固城) 대섬(竹島)은 유년기 삶의 터전이었다

(경남 고성군 고성읍 수남리 79번지 일대 : 정절공(貞節公) 호은(湖隱) 허기(許驥) 선생의 유적지)

고성 대섬(竹島)은,

고성 남포항(철둑) 가는 길 사거리에서,

고성보건소로 가는 길 오른편의 아파트 뒤에,

마치 여름철에 몸에 돋아나는 땀띠처럼,

보일까 말까 한 작은 산이다.

이곳은 예전에는 섬이었다.

대나무가 많아서 대섬, 즉 죽도라고 했다.

대섬이 육지로 변한 것은,

일제 강점기 때 고성중앙고등학교가 있는,

이곳 전체를 매립하면서부터이다.

 

이곳이,

섬이었다는 것은 어릴 적에는 전혀 몰랐다가,

이제야 옛 기록을 통해서 알 수가 있었다.

죽도, 일명 열락산이다.

남문 밖에 있으며,

섬 전체가 대나무로 가득하고 낙열정이 있었다고 한다.

이 조그맣고 볼품없는 산을 가리켜,

열락산이라 불렀다니,

예사로운 산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열락이란 환희의 극치가 아닌가!

낙열정이 있었다는 대섬에는,

정자의 흔적은 찾을 길 없고

대신 섬의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산정에는,

고려 말엽에 홍건적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정절공(貞節公) 허기(許驥) 선생의 유허비만,

찾아오는 이를 반가이 맞아줄 뿐이다.

 

이곳에서 쳐다보는,

산 아래 잡다한 건물들은 눈을 어지럽히나,

이곳이 바다였던,

그 옛날에는 정말이지 멋진 풍광이었으리라...

가까운 육지에서 외따로 떨어져,

온통 대나무로 뒤덮인 섬.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되,

그 바다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고 있어서,

바다는 호수 같고 파도는 늘 잔물결 일어,

그 물결 따라,

뭇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니,

여기가 바로 열락이 아니었겠는가!

배고픔 속에서도,

티 없이 유년기를 보낸 대섬...

개구쟁이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유년기의 추억 어린 대섬...

살면서도 몰랐던 어린 시절의 대섬이,

이제 또 삶의 대 변화와 함께,

모든 것이 송두리채 변화한 그곳을,

늘거막에 찾아보았다.

아는 사람이 다 떠나고 없는 그곳을....

 

오늘의 이모저모

옛날 대섬 입구 수남리 남밖 도로 쪽의 풍광

도로가 생기 전의 모습은 이제 오간데 없었다.

옛날 친구집인데 모습이 다르다

그래도 옛터는 남아있어 감회가 새롭다

앞에 보이는 골목사이 끝이

옥골이라 불리 동네 앞으로 중, 고등학교 등하교 길이었다

좌측 담은 천호식품 대표 김영식의 옛날집이다

대섬으로 올라가는 길의 풍광

어릴적에는 꽤나 높은 언덕이었는데

지금 올라보니 그때와 감흥이 다르다.

https://akekanfl.tistory.com/8704725

내가 살았던 옛집 많이도 변하였네!

뒷집, 옆집, 아랫집 친구들의 옛 모습이 떠 오른다

어릴적에 언덕에서 놀다 절벽으로 떨어졌던

큰집 터인데 많이도 변하였다

어렵고 굶주렸으도 그때가 더 좋은 것 같다

개구쟁이 친구들의 아지터

옛날에는 이런게 없었고

아마 뒤늦게

정절공(貞節公) 호은(湖隱) 허기(許驥) 선생의 유적지 주변을

정리하였는가 싶다

유허비 쪽의 풍광

옛날에는 유허비 뒷쪽에 담벽도 없었고

유허비 뒤에 지금 보이는 건물에 큰집이 있었다

이곳에도 집이 있었고

포구나무라 배고플 때 많이 따 먹기도 하였고

이 일대는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https://akekanfl.tistory.com/8704725

유허비 쪽에서 고성 남산쪽을 바라봄

대섬 끝나는 길에서 아래 쪽을 바라봄

멀리 고성 군청 청사가 보인다

대섬 절벽 뒤에도 이렇게 변하였다

대섬 주변에는 전부 논이였고

앞에 보이는 곳은 큰집 논이였다

과거는 흘러가고 아는 사람도 없는 이곳에

붉은 접시 꽃이 늘건 낭객을 반긴다

대섬에서 나와 철둑 가는 길을 바라본다

옛날 친구집을 끝으로

유년기 티 없이 살았던 추억의 길을 걸어보았다

흐르는 곡

고향의 그림자 / 주현미

https://akekanfl.tistory.com/8704725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