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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12世祖慕溪公諱趙綱先生行狀▣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 15.

  ▣ 12世祖慕溪公諱趙綱先生行狀 ▣  

●선생의 성은 趙(조)요 諱(휘)는 綱(강)이요 자는 叔擧(숙거)요 호는 慕溪(모계)니 한양인으로 고려 左侍中龍城府院君(좌시중용성부원군) 諱(휘) 暾(돈)의 후손이시다. 7대조 휘 인옥(仁沃)은 태조를 도와서 개국공신으로 漢山君(한산군)을 봉하고 諡(시)를 忠靖(충정)이라 하고 太祖廟(태조묘)에 배향하였다. 漢山(한산)께서는 예조판서 諡(시) 節孝公(절효공) 諱 賚(뢰)를 낳으시고 절효공이 이조참의 諱(휘) 順生(순생)을 낳으시니 문장과 氣節(기절)이 있음에도 일세를 숨어지내었다. 단종께서 어리시어 兩大君(양대군) 三大臣(삼대신)과 더불어 뜻을 같이하여 화를 만날 것을 보호하려다 귀양을 갔다가 후에 固城(고성)유배지에서 명을 받았다.(후에 正宗朝(정종조)에 莊陵忠臣壇(장릉충신단)에 배향되었고 純廟朝(순묘조)에는 공주 蓼塘書院(요당서원)에 배향되었다. 吏曹參判(이조참판) 弘文館提學(홍문관제학)에 특별히 추증되었다) 아들은 문과 급제로 병조정랑 諱(휘) 銘(명)인데 또한 錦山으로 귀양갔다. 참의공께서 사사되셨다는 것을 듣고서도 상사에 갈 수 없어서 애통함을 못이겨 운명하시니 이 분이 곧 선생의 고조가되신다. 큰 도량과 큰 덕을 가지셨으며 나이16세에 문과하여 1등으로 발탁되었다. 가슴에 품은 기국을 시험하지도 못하였으니 세상의 탄식하는 바가 되었다. 정랑이 현령 諱(휘) 伯亨(백형)을 낳으시니 처음에 진사가 되었을 적에 참의공의 손자로서 온양에 유배되었다. 마침 세조께서 온양온천을 행차하시자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여러 신하들이 같이 상소해서 특별히 사면하여 그 공신과 벼슬을 회복케 하였다. 이분이 선생의 증조가 되신다. 현령이 또 대호군 휘 璲(수)를 낳으시니 孝友(효우)와 文學으로 復戶(복호)1)의 은전을 받았다. 대호군은 진주유씨 사맹 안수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을 낳으셨는데 그 둘째아들 교위 承胤(승윤)이 곧 선생의 아버지가 되신다. 평양 조씨 진사 황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두 딸을 낳으시고 후사를 이를 아들을 두지 못하여 늘상 후사가 없는 것을 걱정하다가 만년에 선생을 낳으시니 즉 가정 정해(1527) 11월22일이다. 선생이 나면서 바탕이 아름다움이 있어서 어려서도 이미 성인의 법도가 있었고, 남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보면 지적해 말하니 부모가 귀히여겨 사랑하고서 심하게 공부를 권하지 않았다. 나이 7-8세가 됨에 持平 鄭思顯(지평 정사현)에게 가서 공부하였는데 지평이 소학을 가르치면서 말하기를 “후학들이 성공하는 것은 이 글보다 나은 것이 없다 ” 하니 선생이 두루두루 숙독하여 학문공부가 날로 진전하였다. 좀 자람에 강개하여 큰 뜻을 가젔으나 다만 과거의 글에는 뜻을 두지 아니하고 성현의 풍을 사모하여 널리 배우고 힘써 행하여 성공하는데 기약하였다. 나이20에 사마복시에 급제하고 어버이가 돌아가신뒤에는 과거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뒤에 친구들이 권함을 따라서 戊辰(무진 : 선조원년)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이후로는 벼슬에 응시하지 않고 궁벽한 시골에 은거하며 검박하게 살면서 더욱 품행을 닦는데 힘을 다하였다. 小學을 독실하게 읽고 近思錄(근사록)2)을 높이고 숭상하고 여러 경전을 두루 섭렵하였다. 평소에 낮이나 밤이나 의관을 입고 위의를 차려서 혹시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하고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함에 옛 교훈을 상고하고 그 평소의 뜻은 人心을 맑히고 바른 학문을 여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았다. 선조 襄烈公(양렬공)의 절의와 文正公(문정공) 靜菴(정암)의 도학을 따라서 평소에 사랑하고 사모하여 그 가르침을 따르고 항상 작은방에 거하면서 깊이 이치를 연구하고 마음을 잠겨 上帝(상제)를 대하고 본을 함양하는데 각고의 노력을 하니 사람들이 미치지못할 바이더라. 또 東洲 成悌元(동주 성제원) 선생과 圭菴 宋麟壽(규암 송인수)의 문하에 나아가서 학문하는 큰 방법을 갖추어 들었다.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동은 천성에서 나와서 날마다 가묘에 배알함에 비바람을 가리지 아니하고 봉양하고 순성함에 곡진하지 않음이 없었다. 집을 다스림에 바름으로 해서 안과 밖이 절연하고 은혜와 신의가 행하게 되었다. 임자년 여름에 어머니께서 병을 얻어 심히 위험하였는데 선생이 다님에 신을 끌지 않고, 말씀에 사나운 소리를 내지 않고, 갓과 띠를 풀지 않고 밤낮으로 모셔 약을 대접하였다. 어머니께서 들오리고기를 자시고자 하니 여름철인지라 오리를 얻을 길이 없었다. 울며 문밖에 나가서 들과 언덕에서 방황하는 즈음 홀연히 푸른매가 오리를 쳐서 앞에 떨어뜨리는 지라, 가지고 돌아와 어머니께 봉양하니 묵은 병환이 곧 나았다. 사람들이 모두 효도의 감동에서 이룬 것으로서 겨울에 대순을 얻은 맹씨와 얼음에서 잉어를 얻은 왕상과 같은 아름다움이라 하였다3). 당시에 본 고을목사 이증영이 그 행실을 나열해서 조정에 알리어 임금께서 특별히 호역을 덜도록 명하였다. 선생께서는 마치 스스로 용납하지 못할듯하여 몸을 둘 곳을 몰라하였다. 오랜뒤에 龜巖 李公 楨(구암 이공 정)이 본 고을에 부임하여 선생의 이름을 듣고 몸을 굽혀 와서 뵙고는 감탄하며 師友(사우)로서 예를 다하였다. 成先生역시 시를 주시며 장려하시고 칭찬하시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한 때에 공경하고 감복하는 바가 됨이 이와 같았다..어머니상을 당하여 예를 넘어 애통해하였으며 염하기 전에는 물과 미음도 입에 가까이 하지 않고 장사지낸 뒤에는 곧 무덤곁에 여막을 짓고 3년토록 죽을 마시며 피눈물로 날을 지내니 쇠함이 점점 심하여 거의 생을 멸할 지경이었으나 어버이에게 昏定晨省(혼정신성)하는 것을 비록 큰 비와 눈이라 하더라도 폐하지 않았다. 또 아버지상을 당해서도 한결같이 어머니상사와 같이 하였다. 홀로 여막에 거하면서 조석으로 무덤에 절하고 여막을 떠나지 않기를 3년을 하니 사람들이 어려운일이라고 말하였다. 온 고을 사람들이 탄복하지 않음이 없어서 그를 가리켜 말하기를 皐子羔(고자고)4)와 小連(소련) 大連(대련)5)이 다시 나왔다고 하였다. 先朝 임신년(1572)에 선생의 학행과 효성과 청렴으로 해서 관과 향에서 모두 천거해 벼슬을 제수하는 명령이 있었다. (특별히 중부참봉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어버이가 계시지 않음으로 해서 벼슬에 나가기를 뜻하지 아니하여 드디어 나가지 않았다. 기묘년 봄에 또 영릉참봉을 추천되었는데 長老(장노)들의 강권에 의하여 깊이 숙배하고 遺逸(유일)로서 여러 번 천거되어 司憲府掌令(사헌부장령)待講院弼善(대강원필선)에 이르렀다. 기축년에 은진의 목사로 나아가 고을살이하여 다스림과 가르침을 크게 행하였다. 정을 미루어 아래 사람과 더불어 하고 어루만지고 사랑하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武城(무성)의 조화를 이루고자 기약하였는데 方伯(방백)의 꺼려하는 바가 되어 체직되어 돌아오니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은혜를 생각하여 좇아 그리워하기를 마지않았다. 萬曆(만력) 임진의 난리에 선생이 임금께서 파천하신다는 소리를 듣고서 이에 여러 지방을 돌아다녀서 용만에까지 다달아서 상소를 올리고 조회를 행하니 임금께서 비답을 좋게 내리시고 장려하였다. 곧 격서를 가지고 사방에 고하여 의병 수천을 불러 모으고 친히 화살과 돌을 무릅쓰니 의병들이 모두 죽음을 바치는지라. 청주의 송현에서 승첩함을 아뢰게 되었다.(이 일이 연보에 보하였다) 사실이 듣기움에 임금이 가상히 여겨 말씀하시기를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문에서 한다 하더니 이제 과연 그러하도다” 하고 드디어 倡義使(창의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선생의 나이 이미 쇠함에 능히 자력으로 먼 곳까지 달려갈 수 없음으로 奉事(봉사) 鄭若(정약)과 아들 光翼(광익)이 대신 그 무리를 거느려서 竹山에 주둔하고 여러 차례 승첩하였다. 선생이 이를 위하여 식량을 옮겨 공급함에 일찍이 끊기지 않게 하였다. 光翼이 장병을 거느리고 진에 다다를적에 선생이 권면해 말씀하기를 “戰陣(전진)에서 용맹이 없는 것은 효가 아니다. 내가 있다는 까닭으로 해서 진지에 임하여 용맹이 없게 하지 말라” 하니 듣는이가 모두 격절하고 감탄하였다. 무술년에 적세가 더욱 심하여 국가가 군사를 공급하는데 어려운지라 선생이 콩二千석과 쇠二千근을 모집해 얻어서 군사의 쓰임에 공급하니 그 절의의 축적이 크게 상소 속에 나타나 있었다. 임금께서 비답을 내려 말씀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빠른바람에서 굳센 풀을 알 수 있고 어지러운 세상에 충신을 안다 하였는데 오늘날 경과 같은 이를 이름이로다. 충신이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또한 효가 평소에 쌓인 것을 옮긴 뒤에서 볼 수 있다 ”하였다. 성품이 본래 강하고 굳어서 남의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반드시 엄한 말씀으로 책해서 조금도 용납하거나 느긋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골 사람의 착한 자는 그를 공경하고 착하지 못한 자는 그를 두려워 하였다. 평생 산업을 다스리지 않아 집이 극히 가난하여 도시락 밥이 여러번 비어도 편안한 듯 거처하였다. 충효의 대절이 남의 이목으로 들어가는 까닭으로 한 때 교유하던 이가 모두 학행이 있는 名士였다. 제사를 받드는 때마다 반드시 계신 듯이 정성을 극진히 하여 친히 음식하는 것을 살펴서 노비를 시키지 않고 제수의 드림을 정결하게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서모를 대함에도 더욱 독실하게 하여 관에서 얻은 것을 반드시 서모에게 돌려 보내고 털끗만한 물건도 감히 스스로 사사로이 하지 않고 모두 백성들에게 주어서 그 여생을 보호하였다. 과부로 있는 여동생 두 사람이 먼 데 있어서 생계가 어려운지라 선생이 그들을 위해 한 집을 지어주어 누이를 봉양하였으며 자기 재산을 나눠 주어서 그 생을 편안히 하게 하였다. 여동생의 아들 李仁男이 나이 자라면서도 배우지 않는지라 선생께서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마침내 착한 선비가 되었다. 일찍이 계사년 흉년에 친척 모자가 장차 웅덩이에 굴러 들어가려 함에 그 집을 팔고자 하니 선생이 그 값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것을 사고 文券(문권)이 이루어짐에 인하여 거기에 살게 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너의 집을 산 것은 장차 네가 죽는 것을 구원하려는 것이고 문권을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팔지 못하게 한 것 뿐이다”라고 하고서 문권을 도로 주고 그 본 값을 추심하지 않았다. 廚院(주원)에 재직하고 있을때에 곧 종가에 가서 선세의 사당을 알현하다가 그 사우가 기울고 무너지는 것을 보고(종가는 서울에 있었는데 심히 가난하였다. 충정공 신위를 부엌 다락 위에 모시었었다)당형 純(순)(즉 충정공의 嫡長孫(적장손)으로서 벼슬은 內禁府令(내금부령)에 이르렀었다)에게 일러 말하기를 할아버지 사당이 이와 같으니 내 무슨 마음으로 녹을 먹으리오 하고 드디어 봉급을 덜어서 급히 재목과 기와를 사들여서 새로운 사당을 경영해 세우고 옮겨 모신 뒤에 돌아왔다(사실은 유사에 보인다) 그 효도하고 우애하고 화목하는 행동이 실로 천성에서 나와 그러하였다. 청주에 옛날에 서원이 없었는데 선생이 도를 높이고 학문을 향상시키는 정성으로 일찍이 주위 識者(식자)들에게 상의하여 말하기를 “옛적 사람들이 반드시 鄕(향)선생을 사우에 제사지내는 것은 그 높은 행실을 우러러는 것이 깊어서 많은 선비들이 법받게 하려는 것이다. 만일 慶徵君(경징군)과 같은 독실한 학문과 순수한 효도와 朴江叟(박강수)의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갖추어진 이와 宋圭菴(송규암)의 유림의 영수로서도 오히려 높이고 숭상하는 도가 빠졌으니 어찌 儒化(유화)의 일대 흠이 아니겠는가?” 하니 선비들이 모두 같은 말로 그를 따라서 드디어 서원(莘巷書院)을 창립해 세우고서 그들을 높이 받들어서 많은 선비들의 표준의 곳으로 삼게하였다. 이로부터 청주의 인사들이 모두 문학과 행실에 돈독하였고 어리석음을 고쳐 도에 이르게 한 것은 모두 선생의 힘이었다. 어버이를 사모하는 마음은 늙을수록 더욱 도타워져서 나이가 많고 산소가 멀어 조석으로 살필 수 없게 되니 집을 부모의 산소 가까운 곳 시내가로 옮기고 그 시내를 이름하여 말하기를 慕溪(모계)라 하고 인하여 스스로 호를 삼아서 길이 사모하는 마음을 부쳤다. 옛적에 이른 바 종신토록 사모한다는 것은 그 선생을 이름이었다. 나이73세에 졸하시니 선조32년 이었다.(기해 12월17일) 고을 남쪽(양사 서쪽 매봉산 아래에 각삼리 뒤 산마루에 삼위를 합조함) 유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현종 병오에 임진의 충성을 수록함에 좌승지를 증직하고 산소에 제사를 드리게 하고 어필로서 특별히 忠孝節義(충효절의) 4자를 써서 표하였고, 숙종 정해년에 청주 송천에 서원을 세웠다) 선생의 부인 안동 김씨는 참봉 允忠(윤충) 따님이다. 1남2녀를 낳으니 아들은 光翼(광익)이니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의 안성군수가 되었고 딸은 판관 朴嗣賢(박사현)과 진사 金恭謹(김공근)에게 출가하였다. 재취한 진주 정씨는 승사랑 砯(빙)의 따님이시니 아들 光弼(광필) 하나를 낳았다.

이 때 나 喜壽(희수)는 郡界에서 머무른지 수 개월에 군수가 찾아와 선생의 행장 지을 것을 청하니 喜壽(희수)가 스스로 생각하건대 비록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지는 못하였으나 선생의 학문 연원과 行義(행의)의 순수하고 독실한 것은 평소에 크게 사모하는 바이라 감히 글 못하는 것으로써 사양치 못하였다. 유적이 남의 이목에 있는 것을 거두어서 한 편을 만들어서 다만 군수의 효성스러운 간청을 조금 말막음 할 뿐이다.

만력 임인년에 청송후인 沈喜壽6)는 삼가 글쓰다.

< 출처 : 한양조씨충정공파보 上 1999.7, 모계집>

< 출처 : 한양조씨인터넷족보, 15권12편>

●綱 使   使 使
●강자숙거호모계중종정해생종사송규암문창명리학위세유종무신진사의조임신리문성공이거학행관유천효렴선유일력필선현감임신진소룡만행조의파적우청주송령사호창의사정무재난모미철이보국군자수기해졸유문집일송심희도찬행상성손사성종시술갈오세손봉례학주서현종병오증좌승지어서충효절의사자이장지숙종을해향청주송천서원고종을축훼철설단후팔년임신사림인련정유지후록립효충사사지배안동김씨부참봉윤충조부사언방증조생원수진외조군수진주하팽노배진주정씨부승사낭영조현감례형증조고사호묘양사각삼리후유좌삼합폄

註 1) 復戶 ; 조선조때 군인 양반의 일부 및 궁중의 노비등 특정한 대상자에게 조세나 그 밖의 국가에 내는 부담을 면제하여 주는일

註 2) 近思錄: 송나라 朱熹,呂祖謙이 편찬한책, 일상생활의 수양에 필요한 六百二十二條를 추려서 十四門으로 분류한책

註 3) 雪筍氷鯉 : 중국삼국시대 오나라의 효자인 孟宗이 겨울날 숲 속에서 그의 어머니가 즐기는 죽순이 없음을 애탄하자 홀연히 눈 속에서 죽순이 나타났다고 하는 고사와 西晉시대에 太保를 지낸 王祥이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그의 계모가 생선을 먹고 싶어하였을 때 얼음위에 누어 얼음이 녹는 것을 기다려 얼음을 깨고 잉어 두 마리를 얻은 고사를 말한다.

註 4) 子臯는 공자의 제자로 이름이 柴이다. 『小學』에 “고자고가 부모의 상을 집행함에 피눈물을 3년동안 흘려 일찍이 이를 드러내고 웃은적이 없으니, 군자가 어려운일이라고 칭찬하였다.

註 5)少連,大連 : 古人의 이름. 『小學』에 소련과 대련이 거상하기를 잘하여 부모가 죽은지 3일동안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3개월동안 빈소에서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1년동안 슬퍼하였으며 3년동안 근심하였으니 동이족의 자식이었다.라고 하였다.

註 6: 沈喜壽 : (1548-1622) 조선의 문신, 자는 伯懼, 호는 思齊, 一松 ,水雷, 累人. 본관은 靑松. 벼슬은 부응교,이조판서,양관대제학,우찬성,좌찬성,좌의정. 시호는 文貞이다.

●임란 倡義使(창의사) : 조선왕조실록 결과내 인물

1. 선조실록 27, 선조 25628일 병진 4번째기사 /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경상우도 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치계하였다. "신은 죄가 만 번 죽어도 마땅한데 특별히 천지같은 재생(再生)의 은혜를 입어 형벌을 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등이 뒤에 비록 창의사(倡義使)로 이름하였지만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실제로는 재우이며 왜적들이 감히 정암진(鼎巖津)을 건너 호남(湖南)으로 가지 못하게 한 것도 바로 재우의 공이다....

2. 선조실록 28, 선조 25720일 정축 3번째기사 / 비변사의 회계에 따라 김천일을 창의사라고 호칭하다

전교하기를, "김천일의 칭호에 대한 일을 의계(議啓)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이런 급난한 때를 당하여 진실로 칭호가 없으면 체통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어렵습니다. 김천일은 창의사(倡義使)로 칭호함이 타당합니다. 공조 참의 고경명은 이미 김천일과 함께 동시에 창의(倡義)하였으니, 사신(使臣)이라는 칭호에는 다른 점이 없을 듯합니다. 초토사(招討使)...

3. 선조실록 28, 선조 25724일 신사 4번째기사 창의사 김천일의 장계를 가져온 곽현 등을 인견하여 전라도 의병 상황을 묻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그의 막하(幕下) 군사 양산숙(梁山璹곽현(郭賢) 등에게 장계를 주어 행재소로 보내었다. 상이 곽현·양산숙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승지(都承旨) 유근(柳根), 가주서(假注書) 강욱(康昱), 봉교(奉敎) 기자헌(奇自獻). "그대들은 어느 곳으로 왔는가?" 하니, 현이 아뢰기를, "풍천(豊川)에서 삼화(三和 ) 큰 나루를 ...

4. 선조실록 31, 선조 251013일 기해 1번째기사 / 강원도에 우상을 보내는 일과 최원의 군사에게 의복을 지급하는 일을 논의하다

상이 정원에 전교하기를, "우상을 강화로 보내야 하겠지만 강화에는 이미 도순찰사(都巡察使) 권징(權徵)이 있고 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있다. 우상을 가게 한다 하더라도 용이하게 조처할 만한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강원도는 꼴이 말이 아니어서 감사는 달아나버리고 병사마저 없으니 우상을 그 곳으로 보내면 어떻겠는가? 또 듣건대 최원(崔遠)의 군사 가 모두...

5. 선조실록 32, 선조 251116일 임신 4번째기사 / 조현범이 소혜 왕후의 위판을 가져왔다고 김천일이 보고하자 군직 제수를 명하다

서리(書吏) 조현범(趙賢範)이 소혜 왕후(昭惠王后)의 위판(位版)을 보관했다가 친히 가지고 왔다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이 아뢰니, 상당한 군직(軍職)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처음 도성을 출발할 때에 묘사(廟社)의 신주만 싣고 떠났으며 원묘(原廟)의 위판은 땅속에 묻었는데 적이 입성(入城)하여 파내 땅에 깔려 있는 것을 도성의 유식한 사람들이 거두어 보관하였다....

6. 선조실록 34, 선조 26110일 을축 7번째기사 / 비변사가 창의사 김천일이 수사 이빈에게 귀탁할 계획을 세웠다고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었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상소하여 스스로 몸에 중병이 있어 버티며 보전하기 어려울 듯하다면서, 수사(水使) 이빈(李蘋)과 함께 일하기를 청하여 의려(義旅)를 귀탁(歸托)시킬 계획을 하는데, 이는 틀림없이 정세(情勢)가 절박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천일이 바야흐로 대사(大事)를 도모하고 또 기회를 만났으니 병으로 사양하여...

7. 선조실록 34, 선조 26111일 병인 15번째기사 / 각도에 있는 병마의 숫자

답보(答報)하면서 헤아려 개진한 것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 강화부(江華府)에 주차(駐箚)한 전라도 절도사 최원(崔遠)의 군사 4천 명, 경기도 순찰사 권징(權徵)의 군사 4백 명,...권징(權徵)의 군사 4백 명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군사 3천 명, 의병장(義兵將) 우성전(禹性傳)의 군사 2천 명, 수원부(水原府)에 주차한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의 군사 4천 명, 양주(楊州...

8. 선조실록 34, 선조 26122일 정축 4번째기사 창의사 김천일이 도성 공격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고 치게 하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치계하였다. "경도(京都)의 백성들이 이미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다투어 내응(內應)하기를 바라는데, 그 수효가 수천 명에 이를 것입니다. 비록 적이 진치고 있는 데 대응하여 대략 부오(部伍)를 나누고 각기 그 장수를 정하긴 하였지만 합당함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그 가운데 조금 나은 자를 차출하고 가끔 신임할 ...

9. 선조실록 35, 선조 26217일 임인 5번째기사 / 비변사가 경성 수복 때에 도체찰사의 지휘를 받도록 장수들에게 하서하라고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지금 들으니 고언백(高彦伯)과 이빈(李蘋)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최전방에 있고 전라 감사(全羅監司)는 고양(高陽) 해포(醢浦)에 머물고, 충청 감사...고양 심악(深嶽)에 있고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은 도로 강화에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 등이 의논하기를 중국군의 위엄에 의지하여 이 여러 장수를 합하여...

10. 선조실록 35, 선조 26226일 신해 5번째기사 / 호조가 수령에게 잡곡 등을 나누어 주어 기민을 구제하게 하라고 청하다

호조가 아뢰었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干鎰)이 장계하여 난을 만나 굶주린 백성들이 도로에 엎어져 있는 정상을 극진히 진달했는데 보기에 참혹하였습니다. 중국군이 오래 머물러 공궤(供饋)가 많아 앞으로 기민 구제하는 데에 비록 특출한 방책은 없으나 거의 죽어가면서 먹을 것을 바라는 백성을 또한 무심히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수령으로 하여금 피곡이나 잡곡을...

11. 선조실록 36, 선조 26310일 을축 8번째기사 창의사 김천일이 정부의 은인을 올려 보내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干鎰)이 정부의 은인(銀印) 하나를 올려 보냈다. 난리가 난 처음에 잃어버린 것을 지금에 와서 성 안에서 찾았기 때문에 천일이 올려보낸 것이다.

12. 선조실록 37, 선조 26415일 기해 10번째기사 / 비변사가 수령의 독촉으로 민폐가 심하다며 안집시킬 대책을 강구하라고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었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장계를 보건대, 경기 각 고을은 전란이 풀리지 않은 데다가 기근(飢饉)이 계속되어 노약자들은 굶어죽어 시체가 구렁에 뒹굴고 젊은이들은 모여서 도적이 되었다고 하는데도, 국가에서는 다시 수습할 대책이 없으니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수령들은 근래 중국군 지공(支供) 때문에 잡물(雜物)까지 거두어들이는데 그 종 류가...

13. 선조실록 40, 선조 26710일 임술 9번째기사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의 방어 준비 상황을 보고하다

창의사(倡義使) 판결사(判決事) 김천일(金千鎰)이 치계하였다. "신이 이달 14일에 진주성(晉州城)에 도착하였는데,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이 중국군 지대(支待)하는 일로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왔습니다. 그와 함께 변란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일을 상의하여 결정하였습니다. 15일에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 충청 병사 황진(黃進), ...

14. 선조실록 40, 선조 26715일 정묘 9번째기사 / 서성이 진주성의 상황, 유정의 반응 등을 보고하다

접반관(接伴官) 성균 직강(成均直講) 서성(徐渻)이 치계하였다. "함안(咸安)이 분궤(奔潰)된 뒤로는 적의 형세가 매우 성하여 살육(殺戮)의 화가 전년(前年)보다 심합니다....관찰사(右道觀察使) 김늑(金玏)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급함을 알리는 통보(通報)가 하루에 34차례씩이나 이릅니다. 도원 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이 총병(總兵)에게 품첩(稟帖)하여 군사를...

15. 선조실록 40, 선조 26716일 무진 4번째기사 / 황해 방어사 이시언이 정로위 인발의 말로 진주성 함락을 보고하다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李時言)이 치계하였다. "신들이 진주를 외원(外援)할 목적으로 삼가(三嘉) 고현(古縣)에서 진군(進軍)하였는데, 척후장(斥候將)인 안인무(安仁武김억린(金億麟)...제장(諸 將)으로는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청 병사 황진(黃進), 본주 판관(本州判官) 성수경(成守慶),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

16. 선조실록 40, 선조 26716일 무진 5번째기사 / 629일 함락된 진주성 싸움의 자세한 경과

당초에 적추(賊酋)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제추(諸酋)의 군대를 합치면 30만이라고 하였는데 어떤 자는 78만 명이라고 하였다. 왜적이 수륙(水陸)으로 함께 나아가 진주를...이때 변보(邊報)가 매우 위급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서 624일 진주로 달려 들어갔고, 충청 병사 황진(黃進)7백 명,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5백 명, 의병...

17. 선조실록 40, 선조 26722일 갑술 2번째기사 / 관찰사 김늑이 진주성의 수성 절차, 사망자, 패전 후 상황을 보고하다

경상우도 관찰사 김늑(金玏)을 치계하였다. "신이 처음 진주의 사태가 급하다는 것을 듣고는 사람을 보내어 모든 수성(守城) 절차와 사망한 경외(京外)의 장사(將士)와 군인의...병사의 군사가 97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군사가 60, 복수 의 병장(復讐義兵將) 전사의(全士義)의 군사가 50, 적개 부장(敵愾副將) 이잠(李潛)의 군사가 50, 표의병(彪義兵)...

18. 선조실록 41, 선조 2687일 무자 2번째기사 / 비변사가 진주성에서 죽은 이들에게 휼전을 거행하는 일을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진주에서 국가를 위해 싸우다가 죽은 장사(將士)들에게 포증(褒贈조제(弔祭)하는 휼전(恤典)은 대간이 아뢴 바로 인하여 승전(承傳)을 받들었습니다. 그러나...뒤이어 죽었다. 비록 창의사(倡義使) 김천일, 절도사(節度使) 최경회·황진·이종인 같은 이들이 힘을 다하여 국가를 위해 죽으려는 정성이 있었고 김준민·장윤이 활을 잘 쏘아 적을 막는 용맹이...

19. 선조실록 41, 선조 26824일 을사 3번째기사 / 덕양령 이충윤이 정릉의 일에 관해 공초하다

덕양령(德陽令)과 이준경(李峻慶)에 대한 추안(推案)으로 입계(入啓)하기를, 【*. "덕양령·이준경 등의 공사(供辭)가 이와 같으니, 일단 이홍국(李弘國)을 추문(推問)한 뒤에...다음과 같다. "신은 창의사(倡義使)의 진중(陣中)에서 시종 종군(從軍)하고 있었는데, 금년 4월에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의 참변을 처음 들었습니다. 주장(主將) 김천일(金千鎰)이 종실(宗室)...

20. 선조실록 45, 선조 26년 윤1114일 갑오 2번째기사 / 임금이 남별궁에 나아가 유성룡을 인견하고 중국 사신에 관한 일 등을 의논하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나아가 막차(幕次)에서 영의정 유성룡을 인견하였는데, 도승지 심희수(沈喜壽), 주서 남이신(南以信), 대교 김상준(金尙寯), 검열 박동선(朴東善)이 입시하였다....많이 있습니다. 이를테면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첨지 중추부사 고경명(高敬命),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 거제 현령 김준민(金浚民), 충청 절도사 황진(黃進), 경상우도...

21. 선조실록 48, 선조 2728일 정사 3번째기사 / 심유경이 우리 나라의 4도를 왜에게 할양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하다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이 아뢰기를, "신이 심 참장(沈參將)에게 가니, 심은 척() 장군의 처소에 갔고 왕명호(汪鳴胡)라는 자가 있었는데 천문(天文)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진주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창의사(倡義 使) 김천일(金千鎰)에게 성을 비우고 피하라고까지 극력 말하였다. 나는 다만 사실대로 말을 했을 뿐이다. 적이 평양과 서울에 있을 적에도 나는 한 조각의 땅도...

22. 선조실록 49, 선조 27320일 무술 1번째기사 / 중국에서 식량과 군병을 지원받는 문제·흉년으로 백성이 식인하는 문제 등을 대신 등과 의논하다

상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 및 비변사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 도사(張都司)의 자문(咨文)을 보니 산동(山東)의 양곡을 지급하지 못한다고...하였는데 행조(行朝)에서는 창의사(倡義使)라는 호칭을 하사하였다. 김천일은 평생동안 충의의 마음을 지켜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으니 어려운 일이라고 할 만하다. 몽기(蒙倛) 도깨비. 하였다. 이덕형이...

23. 선조실록 180, 선조 371020일 병인 4번째기사 / 임진란 때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의 포상을 의논하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장만(張晩)이 아뢰기를, "도내(道內)의 나주 생원(生員) 강위호(姜渭虎) 58인이 정서(呈書)하였는데, 그 대략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은 호남의 석유(碩儒)로 지난 임진 왜란 때 왕성(王城)이 함락되어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하고 적세(賊勢)가 맹렬하여 남북이 횡분(橫分)되었으므로 모두들 국사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고 할...

24. 선조수정실록 26, 선조 [수정실록] 2561일 기축 41번째기사 / 호남 의병장 김천일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다

호남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였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무너진 뒤로부터 기내(畿內)가 완전히 살육과 노략질을 당했는데, 적에게 붙좇아 도성에...임명하는 동시에 창의사(倡義使)라는 칭호를 내렸다. 천일의 군사가 수원(水原)에 이르러 독산(禿山)고성 (古城)에 웅거하여 적에게 붙좇은 간민(奸民)을 찾아내어 목을 베니, 돌아와 따르는...

25. 선조수정실록 26, 선조 [수정실록] 2581일 무자 7번째기사 / 상이 유생 양산숙을 공조 좌랑에 임명하고 호남·영남에 유시하는 교서 2통을 내리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이 유생 곽현(郭玄양산숙(梁山璹)을 보내어 바닷길을 따라 관서(關西)에 들어가 행조(行朝)에 일을 아뢰었다. 양산숙이 또 상소하여 계책을 올리니, 상이 자주 인견(引見)하여 위유하며 공조 좌랑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호민(李好閔)으로 하여금 교서(敎書) 2()을 짓게 하여 양산숙에게 부쳐 보냈다. 하나는 호남에 유시하 는 것으...

26. 선조수정실록 27, 선조 [수정실록] 2621일 병술 10번째기사 / 관군의 공격으로 기세가 꺾인 적을 치고자 하였으나 제독이 따르지 않다

당시 관군(官軍)이 기내(畿內)에 나누어 웅거하면서 권율의 군사를 위시하여 들락날락하며 적을 치니, 적이 멀리 나가서 땔나무를 할 수 없었다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전라 수사(全羅水使) 이빈(李蘋), 충청 수사(忠淸水使) 정걸(丁傑)이 수군을 이끌고 경강(京江) 어구에 진격하였으며, 하삼도(下三道)의 관군과 의병이 적의 길을 차단하니 적의 기세가 점점 꺾였다....

27. 선조수정실록 27, 선조 [수정실록] 2661일 갑신 3번째기사 / 왜장이 진주를 공격하니, 원수가 관군과 의병에게 방비하게 하다

왜장(倭將)이 군사를 연합하여 진주를 공격하였다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이 성에 들어가서 굳게 지키니, 청정·평의지(平義智)가 군사를 다 동원하여 진주로 향했는데 30만으로 일컬었다. 송 경략이 심유경에게 서신을 보내 꾸짖기를, "너는 이미 왜()를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고 왕자를 데리고 오겠다고 자임하였는데 적이 오히려 둔거(屯據)하여 노략질을 마지않고...

28. 선조수정실록 27, 선조 [수정실록] 2661일 갑신 5번째기사 / 왜적이 진주를 함락시키자 김천일·최경회 등이 전사하다

왜적이 진주를 함락시켰다. 김천일·최경회 등이 전사하였다. 당시 진주에서 급변을 보고하니, 이여송이 경성에서 열둔(列屯)의 제장(諸將)인 유정(劉綎오유충(吳惟忠낙상지(駱尙志) 등에게...적이 창의사(倡義使)가 지키는 서쪽과 북쪽 성문은 병력이 미약하다는 것을 알고 이에 대군을 모아 힘을 다해 공격해 올가가니, 창의군(倡義軍)이 제대로 버텨 내지 못하였다....

29. 선조수정실록 27, 선조 [수정실록] 2661일 갑신 7번째기사 / 순성장 황진의 졸기

황진(黃進)은 고상(故相) 황희(黃喜)5대손으로서 용맹 건장하고 활을 잘 쏘았으며 엄중하고 충신하여 기절(氣節)이 남보다 뛰어났다. 통신사(通信使)를 따라 일본에...말하기를, "나는 이미 창의사(倡義使)와 더불어 공약(公約)을 하였으니 저버릴 수 없다." 하였다. 왜란이 있는 이후로 모든 장수 가운데 행군에 법도가 있고 사졸에 솔선하여 옛날 명장(名將)의 풍도가 있는...

30. 현종실록 22, 현종 1574일 병인 4번째기사 / 파직된 문무 관원들의 서용을 의논하다

이때에 대신이, 파직된 문무 관원들을 별도로 서용할 것을 청하였다. 이날 김수흥이 명단을 가지고 상의 앞으로 나아가 차례로 읽으면서 윤경교(尹敬敎이상(李翔)을 서용하자고 청하였으나..."지난 임진년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과 함께 국사를 위해 죽었는데, 김천일에게만 시호를 내리지 않았으니 소급해 포상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31. 현종개수실록 28, 현종 [개수실록] 1575일 정묘 1번째기사 / 김수흥이 신역 변통 문제를 놓고 여러 재상들과 상의 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 재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신이 신역(身役) 변통 문제를 놓고 여러 재상들과 상의하였더니, 신포(身布)의 법이 시행할 만한...아뢰기를, "임진 왜란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고경명(高敬命조 헌(趙憲)과 함께 절의에 죽은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천일 만이 시호 추증이 빠져 있어 추장(追奬)의 은전이 있어야 할...

32. 숙종실록 12, 숙종 7925일 갑술 1번째기사 / 성수침·송준길·김천일의 시호 개정, 이이 등의 문묘 종사, 원로 유신의 초빙, 녹봉의 감액 등에 관한 논의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우의정(右議政) 이상진(李尙眞)이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김수항이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성수침(成守琛)의 시호(諡號)...말하기를, "창 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은 바로 선묘조(宣廟朝)의 유일(遺逸)의 선비입니다. 그러나 학문이 매우 독실(篤實)하여 당시 여러 현인(賢人)들이 추앙하고 정중하게 여기는 바가...

33. 영조실록 16, 영조 4319일 기사 2번째기사 / 송인명과 박사수를 가선의 자급으로 올리고 비국 당상으로 차임하다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과 대사성(大司成) 박사수(朴師洙)를 가선(嘉善)의 자급으로 올리고는 아울러 비국 당상(備局堂上)으로 차임하였다. 또 형조 참의(刑曹參議) 윤용(尹容)...청주 우후(淸州虞候) 창의사(倡義使)로 삼으니, 이는 박사수가 일찍이 박민웅이 장재(將才)가 있다 하여 별천(別薦)한 바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어영 대장 조문명(趙文命)이 다 시 임금께...

34. 영조실록 16, 영조 4327일 정축 5번째기사 / 청주 수복과 신천영 등을 복주하다

청주(淸州)를 수복하고, 위병사(僞兵使) 신천영(申天永) 등이 복주(伏誅)하였다. 본주의 장교 등이 상당성(上黨城)에 남아 있는 적을 토벌하기를 꾀하고 있는데,...등을 포박하고는 창의사(倡義使) 박민웅(朴敏雄)을 청해 와서 의논하니, 박민웅이 말하기를, "적의 뒤가 염려되니, 살려 두어서는 안된다." 하여, 모두 참하였다. 호서 좌도 소모사(湖西左道召募使 )...

35. 영조실록 71, 영조 26325일 무진 4번째기사 / 경상 병사 최경회에게 시호를 내리다

경상 병사 최경회(崔慶會)에게 시호를 내렸다. 임진년에 왜구가 진주(晉州)를 함락시켰을 때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충청 병사 황진(黃進) 및 최경회가 함께 죽었다. 삼충(三忠) 중에서도 최경회가 수립한 공이 더욱 두드러졌는데, 김천일과 황진은 모두 찬성에 증직되고 시호를 내렸으나, 최경회는 그 자손이 미약한 탓으로 미처 시호를 청하지 못하였는데 영부사...

36. 정조실록 25, 정조 1231일 계해 1번째기사 / 무신년의 충신·공신을 추록하고 자손들의 서용과 치제를 명하다

윤음을 내려 무신년의 충신과 공신을 수록(收錄)하라 하였다. 과거 영묘(英廟) 무신년에 역적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 등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하여 적신(賊臣) 김일경(金一鏡)...높여 증직(贈職)하라.  창의사(倡義使) 박민웅(朴敏雄), 고 군수 김정운(金鼎運)은 그 공이 탁월하니 증직하도록 하라. 진천(鎭川)의 선비 조중관(趙重觀)은 적의 원수(元帥)를 잡았으니 그...

37. 정조실록 32, 정조 15122일 정유 4번째기사 / 사직 신기경이 상소하여 당면한 문제 12조항을 올리다

사직(司直) 신기경(愼基慶)이 상소하여 당면한 문제 12조항을 올렸다. 첫째는 영남의 조선(漕船)을 경강(京江)에 이속시켜 세곡을 운반하게 하자는 일이고, 둘째는 수원(水原)...병자년의 난리 때 창의사(倡義使) 우성전(禹性傳)이 의리를 제창하여 공훈을 세웠고 고 병사(兵使) 김준룡(金俊龍)은 오랑캐를 섬멸하여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상주어 장려하자는 일이고, 다섯째는...

38. 정조실록 49, 정조 2291일 신유 4번째기사 / 임란 때의 충신인 충장공 제말을 성주의 충렬사에 제향토록 하다

예조가 아뢰기를, "경상도 유학(幼學) 김완찬(金宛燦) 등이 상언(上言)하여, () 충신 증 이조 참판 유복립(柳復立)과 증 병조 판서 제말(諸沫)과 증 병조 참판...촉석(矗石)에 있지 않고 보면 창의사(倡義使)의 사원(祀院)에 추후로 배향하는 것은 실로 의의가 없는데, 성산(星山) 의 죽림(竹林) 사이를 붉은 옷 차림으로 떠돌면서 그 충성스럽고 굳센 혼백이 아직도 답답하게...

39. 고종실록 27, 고종 27117일 계유 2번째기사 / 무신년 공신들인 조문명 등 25명의 사당에 치제하도록 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무신년(1788)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과 공로 있는 사람으로서 제사를 지내주어야 할 사람들과 벼슬을 추증한 사람의 대를...판관(判官) 이석인(李錫仁), 창의사(倡義使) 박민(朴敏雄), 고 군수(郡守) 김정운(金鼎運), 증 절충 장군(贈折衝將軍) 조중관(趙重觀)은 모두 지방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주었습니다. 증 대사헌(贈大司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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