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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6世祖 ▣司評公諱賡靖節壇碑銘▣[判事公貫追慕碑銘]◈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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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縣 監 公 諱 瑞 / 進 士 公 諱 元 基 ◑ 

●사평공 현감공파 7祖瑞
하여하고으로하다

 원기
으로일찍 하여하시다

 

6세조사평공조갱정절단비명

▣6世祖 司評公諱賡靖節壇碑銘▣

 

嗚呼昔我莊陵癸甲之禍尙忍言哉此可使千古之志士慟泣而不知死所也 誠以人之秉彝極天罔墜雖欲掩諱其可得乎 國之南咸平郡多尙節慕義之士相與語曰 士君子不幸而値革命之際則當竭性命保護其主繼之以死不得所則自靖以求盡吾心己矣 然則死與去其迹雖殊其義則同是以陶先生之靖節於潯陽與西山之餓東海之蹈固無二致粤在莊光禪受之日司評趙公爲故主靖節於海陽者雖謂之陶先生後一人不爲過語凡在後生後學斷宜尊慕有所而世相後也 地相遠也且夫國祚變遷世敎弛廢按地立祠非敢擬議今其後孫群居於咸務兩郡若信陵之大梁邱墓范氏之吳中宗族則不害爲綠情而起義迺於咸平箕穎之北築土立碑各之曰海陽靖節趙公之壇功旣訖徵文於一元所求乎 一元者謂吾與公同其自出而兼有尊慕性也亶其然乎吾嘗渡南海之露梁津詩以寓慕曰此江同守孤臣義萬析東流不復還此不過一時感古之作而似若有待於今日托名壇碑則榮固萬焉敢不如之也 公諱賡我十八世從祖父忠靖公諱仁沃之子溯其上同 我龍城先祖以上四世而歷職司評於掌隷院者 世宗朝所賜也兄子坡西公諱順生與三相公皇甫仁金宗瑞鄭笨同受文宗顧命保護端廟功 冲反被奸黨之名卒受後命於固城也 公坐親黨連累之律與弟判事公貫同謫海陽卽今之南海時甲戌九月也 當是時一門九竄吁其慘焉而粤丁丑聞上王遇害慟哭嘔血幾絶復甦者屢矣在謫凡十有五年光廟戊子始蒙全釋 公不自幸不忍舊主之慟誓不復入漢師乃使弟貫歸守先墓獨椄遲於露梁之濱雜於漁樵而每東望寧越輒鳴咽不成語縞衣終身而人莫知其所終此之謂海陽靖節也 嗚呼皇朝永樂之變同一氣數未知爲太孫靖節亦有如公者否盖謫而宥人所爲喜者然公獨不然仍舊行吟與屈大夫之蘭同枯於澤畔而遺香至今襲人人之所以築壇鐫石者爲其傳芳於後也 世之相論者皆以爲莊陵忠臣莫尙於六臣公之自靖雖不若 六臣之殺身然其所以盡爲臣之道則一也 此可而軒天地輝日月永有辭於百世而六臣則朝家褒之士林尊之國人至今慕誦公則湮沒四百年名不稱焉其所以傳於後者無過縣誌家秉及東鶴誌而今始有多士之私議若有司之公褒然設壇記蹟此亦顯微闡幽之有其時也歟吾知此擧不特不朽公也 可使世之販君賣國者懼之豈不誠大有補於扶植網紀也 吾雖不能揄揚公於是乎觀感而書此自叙景仰之餘意抑又爲南方諸君子謝之

 

端廟二年甲戌八週甲夏四月己亥

成均進士 漢陽 趙一元謹識

 

▣[6세조 사평공 정절단 비명]▣

오호라. 옛적 우리나라 단종 시 계유갑술년의 화는 차마 어찌 말로 다하랴. 이는 가히 천고의 지사로 하여금 슬퍼 죽을 바를 알지 못하노라. 진실로 사람이 지켜야 할 본성으로써 하늘이 다하도록 없어짐이 없어 비록 가리고 숨기고자 하나 그 가히 할 수 있으랴. 나라의 남쪽인 함평군에 절개를 숭상하고 의리를 사모하는 지사가 많아 서로 말하여 가로되 사군자가 불행하게도 혁명의 때를 만난 즉 마땅히 생명을 다해 그 주인을 보호하여 죽음으로써 이를 계속하고 죽을 바를 얻지 못한 즉 자기 스스로 몸을 닦아 내 마음의 다함을 구할 지로다. 그러므로 죽어가는 것이 그 자취는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그 의리인 즉 같을지니 이는 도연명의 심양강 정절과 백이숙제의 수양산 아사(굶어죽음)와 제나라 노중연의 도가 진실로 한 가지 두 가지 이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 있어 단종 세조간의 왕위를 주고 받는 날 사평공이 고주 단종을 위하여 해양에서 정절함이 비록 도연명 선생후 한 사람뿐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대범 후생 후학이 있어 단연코 높이 숭상할 곳이 있어야 할 것인데 세상이 서로 오래되고 땅이 서로 멀어 이렇게 하지를 못하였다. 또 대체 나라 명맥이 변천하고 세교가 해이 퇴폐하여 땅을 찾아서 사우 세우기를 공히 논의 못하였더니 지금 기 후손들이 함평 무안에 모여 사는 것이 꼭 위나라 신릉군의 대양위국수도에 있는 선산과 오나라에 범 씨의 종족들이 모여 사는 것과 같은 칙정을 연하여 의리를 세우는데 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함평 기영 북쪽에 흙을 쌓고 비를 세워 해양 정절 조공(海陽靖節趙公)의 단이라고 이름하고 그 사업이 다 끝남에 글을 일원에게 지어 달라고 청하니 이 일원에게 구할 바는 내 공과 더불어 그 스스로 남을 같이하고 겸하여 존모의 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일까? 내 일찍이 남해 노량진을 건널 때 시 한 수를 지어 존모한 마을을 붙여 가로되 이 강과 같이 고신의 의를 지킴이요 만 가지로 꺾여 동으로 흘러 다시 돌아오지 않도다. 이는 일시 감고의 작에 지나지 않으나 이것이 만일 오늘 있을 것을 기다려 자기의 이름을 이 단비에 남겨 놓을 것 같은 즉 흥망성쇠가 여러 번 이었을 것인데 어찌 공히 그렇다 할 수 있으랴. 그럴 수는 없도다. 공의 휘(諱)는 갱(賡)이니 실로 우리 십팔세 종조 (十八世 從祖) 충정공 휘 인옥의 아들인지라. 그 위로 올라가면 우리 선조 용성부원군 이상 4세(四世)가 같고 장예원 사평 벼슬을 역직 함을 세종대왕께서 주신바다. 형의 아들 파서공 휘 순생이 삼상공(三相公)인 황보인 김종서 정분과 같이 문종의 고명을 받아 단종의 어릴 때를 보호하였는데 그것이 도리어 간당의 이름을 입게 되어 마침내 고성 땅에서 사형을 받게 됨에 사평공도 친당 연계의 법률에 연좌케 되어 동생 판사공과 같이 해양 땅으로 귀양 가게 되니 때는 갑술년 구월이라. 이 때를 당하여 한 집안에서 구(九)명이 귀양 가게 되니 아! 슬프도다. 그 이듬해 정축년에 단종께서 피해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다 피를 토하여 거의 기절되었다 다시 살아남이 여러 차례인지라. 십오년 동안 귀양살이 하시다가 세조 무자년에 처음으로 석방이 되셨으나 사평공께서는 스스로 다행하다 생각지 않고 단종의 슬픔을 참지 못하여 다시는 서울로 들어가시지 않을 것을 맹서하고 이에 동생 관(貫)으로 하여금 돌아가서 선묘를 지키게 하고 홀로 노량가에서 두핍 하면서 어부들과 같이 살고 항시 동쪽 단종이 계시던 영월을 바라보아 어찌 슬프든지 말을 못하고 백의 옷으로 일생을 마치니 사람마다 그 종신하였음을 모르더라. 이것을 해양정절이라 이르도다. 오호라! 명황 영락황제가 명태조의 손이요 영락의 조카인 건문을 쫓아내고 황위를 뺏은 사변(事變)에 동일한 기수로되 미지라 태손(명태조 손건문 황제)을 위하여 정절이 또한 사평공과 같음이 있지 않으냐. 대개 귀양 갔다가 풀려 나오는 것은 사람마다 기뻐하나 공은 홀로 그렇지 않네. 옛 그대로 돌아다니며 글이나 읊고 함이 굴대부가 난초와 더불어 택반에서 고사함과 같고 그 유향이 지금까지 사람에게 젖어 있으니 사람이 단을 축(築)하고 돌에 각(刻)하는 것은 그 방향을 후세에 전하기 위함이다. 세상에 말하기를 모두 단종을 위한 충신이 사육신만 같은 이가 없다고 하되 사평공의 정절이 비록 사육신의 살신 과는 같지 못할지나 그러나 그 충성을 다함은 똑같도다. 이는 가히 써 천지에 닫고 일월이 빛나 길이 백세에 말을 전할 수 있는 일이거늘 육신은 조정에서 포상하고 사림들이 존경하여 나라 사람이 지금 육신을 흠모 보송하되 사평공은 돌아가신지 사백년에 이르되 이름이 들어나지 않고 그 후세에 전하는 것이 다만 읍지나 가승이나 동학지에 불과하더니 지금에 비로소 처음으로 다사(多士)의 의논이 있고 또는 국가기관에서 공포하온 뒤에 설단하고 사적을 기록하니 이 또한 미미한 것을 나타내고 깊숙이 묻혀 있는 것을 밝혀냄이 그것도 때가 있음인가. 내가 알기를 이 행사가 공의 사적을 썩혀 버리지 않으려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에 임금을 팔고 나라를 팔아먹는 자들로 하여금 이를 두렵게 함이니 어찌 진실로 크게 강기를 부식함에 있다 아니하리오. 내 비록 공을 들어 들쳐 내지는 못할지니 이에 보고 느껴서 이 글을 써 스스로 존경하는 마음을 서술하고 또 돌이켜서 남쪽 여러 군자에게 사하노라.

 

단종묘 2년 갑술후 8주 갑하 4월 기해(端宗朝 二年 甲戌後 八周甲夏 四月 己亥)에 성균관 진사 한양 조일원(成均館進士 漢陽 趙一元) 삼가 기록합니다.

 

 

[6세조 ▣判事公貫追慕碑銘▣]

 

公의 諱는 貫이며 本貫 姓은 漢陽趙氏니 朝順大夫 僉議中書事 諱之壽로 爲始祖요 高祖 諱暉는 元나라 雙城摠管이며 曾祖 諱良琪로 十三歲에 摠管職 副元師가 되어 日本征伐의 功을 세워 元世祖로 부터 錦袍와 玉帶를 下賜받고 祖 諱暾은 高麗朝 禮儀判書 龍城府院君되고 父 諱仁沃은 朝鮮朝 開國元勳 吏曹判書로 漢山府院君에 封君되어 諡忠靖이며 太祖 廟廷에 配享하고 公은 四兄弟中 넷째로 出生했다 世宗朝에 文科에 及第하여 集賢殿 校理에 올랐고 그후 中樞府 判事(從一品)에 이르렀다 淸廉儉素하여 宰相의 자리에서도 私慾이 없고 人品이 高邁하여 淸白吏라 稱하였다 一四三十年 十月 判內瞻寺事로 北京에 갔다가 다음해 種馬管押使로 돌아왔다 一四四五年(世宗二七年) 僉知中樞院事의 벼슬을 내렸다 이어 全州府尹으로 삼았다 一四四八年(世宗三十年) 또다시 中樞院副使로 一四五十年(文宗元年) 表文을 주어 中國에 謝恩使로 다녀왔다(一四五一年 )漢城府尹으로 계시다 遞職되었다 一四五三年(端宗一年) 癸酉靖難에 安平大君의 一員으로 몰려 舍姪 順生이 吏曹參議로 在職때 首陽大君이 端宗에 忠誠을 다한 三政丞 慘殺할때 禍를 입고 一門이 모두 流配되었다 이때 公은 自願付處로 셋째兄인 司評公 賡과 從孫인 都事 銛과 함께 南海로 流配되니 때는 一四五四年 九月 舍姪 順生의 罪目에 緣坐되어 叔父된 公의 아들 副司直 肅生이 上께 아뢰기를 臣이 願從功臣 二等이 되었으니 응당 散官한 資級을 생각하면 臣의 아비 趙貫의 나이 七四歲인데 조카 趙順生의 緣故로 緣坐되어 귀양갔습니다 빌고 바라옵건대 子孫의 벼슬을 더하지 마시고 臣의 老父를 釋放하여 주소서 하니 上께서 命하여 釋放하게 하였다 一四五七年(世祖三年) 十月 端宗이 죽음을 당하자 公은 北쪽 하늘을 우러러 哀慟하셨다 一四六五年(世祖十一年) 勤政殿에서 元老大臣들을 모아 養老宴을 베풀어 公은 檢校工曹判書 身分으로 入侍하온데 公은 老人 班首로 술을 올렸다 一四六七年(世祖十三年)世祖는 功臣宴을 하는데 開國功臣 趙仁沃의 아들 趙貫이 가장 年老하시어 술을 내려주고 宦官의 부축을 받아 가시도록 하였다 一四六八年(世祖一四年) 上께서 崇祿大夫를 賀資하였다流配에서赦免되자 셋째인 兄 司評公의 소청으로 父 墓所를 侍墓케 하여 楊州 西山에 隱居하였다 公에 대한 事蹟은 莊陵誌와 東鶴誌에도 記錄되었는데 詩句 一節이 坡仁實記에 보인다(한줄기西山에 떨치신 忠節바람은 오늘도 무심히 부는고야 오 애닯고 아까워라) 公의 墓는 南楊州市 長興面 山 三上里의 忠靖公墓所 南쪽 언덕 庚坐이며 한때 公의 墓所 不明이나 一九0九年(純宗三年)公의墓所에서 誌石이 發見되어 살폈더니 成化 五年(一四六九年) 四月葬이라 새겨졌다 一九九九年 大同面 雲橋里 一二0五~一番地 畓九0二坪을 祭畓으로 하고 公의 追慕碑는 勿論 兄 司評公 壇碑도 判事公 宗會에서 建立하고 公은 靖節祠에 兄 司評公과 奉安하여 享祀日은 陰三月 初三日에 奉行하니 이 子孫들은 世世토록 孝誠과 和平으로 祖上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 家門을 빛내며 子子孫孫 永遠히 保全하리라.

 

西紀二0十三年四月十二日

可泉 靑松後人 沈東植 謹撰 幷前面書

判事公派宗會長(二十代孫) 誠根 謹竪

●任員 : 有衡 淙煥 康湜 轍玉 羽紀 炫誠炫 壯絃 成根 英熙 殷奭 明道 紀完 大慶 相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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