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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사재실기발〔思齋實記跋〕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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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재선생실기(思齋先生實紀)권1~3 1책  序: 崇禎後三辛巳(1761)...朴聖源 跋: 崇禎四庚辰(1820)...宋穉圭   ●剛齋集 卷六 / 跋

[思齋實記跋]

嗚呼!今去己卯士禍,餘二百年,而譚之者爲之傷衋,如隔晨然。知其爲己卯名流,則不待考其實蹟,而莫不賢之。豈不以靜菴趙先生實道學大儒,而爲領袖故耶?思齋先生安公處順,從遊於靜菴者也。乞養爲求禮縣監。己卯訪靜菴及自菴金公于謫所。旣而棄官,大爲羣小所慍。其免于禍,特幸耳。一日其後孫思訥,以《思齋實記》來示余曰:“編成者,吾族祖也;考訂者,渼湖金公也;序之者,廣巖朴公也;鳩財募工,並諸賢手筆而剞劂之者,吾祖也。力綿未克印出。藏板于先祖書院,藏之未得其善,板多腐朽刓缺,而獨手筆最完,若有神扶者。吾大懼吾祖爲先之誠,毁于旣成,使後之人,無所考於吾先祖徽蹟,遂謀于諸族及院儒,而拮据財力,將改腐朽之板而印行之。不可無跋語,敢以爲請。” 余敬受而讀之,殊不勝固陋之幸。於己卯名流,而復得詳其本末,則所以起欽者,爲如何哉?竊念序文之引重而發揮之者,已無餘蘊。以余荒拙,復何敢贅一辭?第嘉安君紹述之美,亦以托名爲榮,略書此以歸之。

●사재실기발〔思齋實記跋〕

아! 이제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 해로부터 2백여 년이 흘렀으나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 일을 애통해하여 마치 어제 일 말하듯 한다. 기묘년(1519, 중종14)의 명류(名流)라는 것을 알면 그 실제 자취를 살펴보지도 않고 어진 사람으로 여기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정암(靜菴) 조선생(趙先生조광조(趙光祖))이 실로 도학대유(道學大儒)이고 영수(領袖)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재(思齋) 선생안처순(安處順)공은 정암과 교유한 사람이다. 걸양(乞養)하여 구례 현감(求禮縣監)이 되었다. 기묘년에 정암과자암(自菴)김공(金公)을적소(謫所)에 가서 방문하였다.얼마 안 되어 관직을 버렸는데 여러 소인배들에게 크게 노여움을 샀다. 공이 재앙을 면한 것은 특별한 행운이다. 어느 날 공의 후손인 사눌(思訥)이 《사재실기》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편성(編成)한 사람은 나의 족조(族祖안극효(安克孝))이고 고정(考訂)한 사람은 미호(渼湖) 김공(金公김원행(金元行))이며 서문을 쓴 사람은 광암(廣巖) 박공(朴公박성원(朴聖源))입니다. 재물을 모으고 인부를 뽑아 여러 현인들이 손수 쓴 글씨를 한데 모아 판각한 사람은 저의 할아버지입니다. 재력이 부족하여 인쇄를 할 수가 없어 판목을 선조의 서원에 보관하여 왔는데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 썩거나 닳아 없어진 판목이 많지만 오직 손수 쓴 글씨만은 가장 완정하니 마치 귀신이 도운 것 같습니다. 나는 선조를 위하는 내 할아버지의 정성이 이미 다 만들어놓고도 훼손되어 후세 사람이 내 선조의 아름다운 자취를 고찰하게 못하게 될까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에 여러 친족 및 서원의 유자(儒者)들과 도모하고 힘써 재력을 주선하여 썩은 판목을 다시 고쳐서 간인하고자 합니다. 발어(跋語)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감히 요청을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정중하게 받아 읽어보고 나서 고루한 사람에게 찾아온 행운을 이기지 못했다. 기묘명현(己卯名賢)에 대해서 그 본말을 다시 자세하게 알 수 있었으니 존경심이 일어난 것이 어떠했겠는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서문이 중요한 내용들을 끌어다가 이미 남김없이 발휘하였으니, 나의 서투른 글솜씨로 다시 무슨 사족을 감히 달겠는가. 다만 안군이 이어받아 행하는 노력의 아름다움을 가상하게 여기고 또 내 이름을 적어두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 대략 이 글을 써서 돌려준다.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노재준 박해당 권민균 (공역) | 2015

 

▣반곡서사기〔盤谷書社記〕▣

[盤谷書社記]

昔我先祖尤菴文正公門下,有梅隱堂許公璜瑩叔居于陽城之白雲山下盤谷里。旣沒八十有餘年,邑之章甫,惜其芳躅蕪沒,合力鳩材,構屋數架於其講亭遺址,爲講學肄業之所,名曰“書社”,以寓景慕之意。苟非公所存之實,何以使人興感於久遠,而其置社會講,思有以闡揚前輩徽蹟,亦可見諸章甫所尙之正也。公性質溫雅,篤於孝友。幼而聰悟,文藝夙就。旣永感,遂廢擧業,專意於爲己之學,往來師門,不憚徒步。文正公嘉愛其志尙之篤、見解之精,手書“志伊尹、學顔淵”六字以勉之。其進省於謫所也,與之講《心經》,而告之以直字心法。又以“海東一士雄”之句,送其歸。大賢之門,得此期許之重,夫豈偶然哉?公爲近師門,搬寓於溫陽之梅谷,自號梅隱,先生爲之記。楚山禍後,撤歸故里,杜門屛跡,溫理經籍。每於和煦,率後生講習於門外槐樹下,此卽人之指爲講亭者。雖更化後,不變所守,以終其身。公貞靜之操,殆晦翁所謂“得于天而成于學”者,而宜爲鄕黨之所欽誦不衰也。嗚呼!世之談公者,必擧所謂“木儒尼通事”。蓋公與尹拯有十餘年同門之誼。其以“江都俘奴,豈合享祀”之說,傳告于先生,實有所不韙於木儒者,而先生亦以惡習斥之。拯也反欲掩諱本事,而歸先生於造言之科,則其徒投疏誣詆,謂:“公無其人矣。” 公不勝痛惋,遣其子擊鼓對辨,終使聖主洞察其情狀。此雖所關不細,亦可以見公事一之誠。顧非公平生大致,則以是而知公者,豈不爲淺之爲知也?公之玄孫諗以余爲師門之後,來致諸章甫之意,而請記之甚勤。余以不文辭,不獲。遂略敍其立社顚末,而並書所感于心者,以告來遊於社者焉。

옛날 나의 선조이신 우암(尤菴) 문정공(文正公) 문하에는 매은당(梅隱堂) 허황(許璜) 공 영숙(瑩叔)이 계셨는데 양성(陽城 경기도 안산)의 백운산(白雲山 원곡면 소재) 아래 반곡리(盤谷里)에 거처하셨다. 이미 돌아가신 지 80여 년이 되었는데 읍에 사는 유생들이 그의 아름다운 자취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서로 힘을 합해 목재를 모아다가 강정(講亭)이 있던 유지(遺址)에 몇 칸의 집을 지어 학업을 익히는 장소로 삼고 서사(書社)라고 이름을 붙이고서 우러르고 그리워하는 뜻을 담았다. 진실로 공이 마음에 담아두었던 실질이 아니라면 어떻게 사람들이 오래고 먼 일에 대해 감동을 일으키겠는가마는 서사를 세워 함께 모여 강습하면서 옛 선배들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널리 드러낼 것을 생각한 점에서는 또 여러 유생들이 숭상하는 바의 올바름을 엿볼 수도 있겠다. 공은 성품이 온아(溫雅)하고 효성과 우애를 도타이 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문예(文藝)가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부모 두 분이 다 돌아가시고 나서 드디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여 사문(師門)을 드나들었는데 걸어서 다니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문정공이 그의 독실한 이상과 정밀한 견해를 훌륭하게 여겨 ‘지이윤학안연(志伊尹學顔淵 이윤에 뜻을 두고 안연을 배움)’ 여섯 글자를 손수 써 주며 격려하였다. 귀양지로 안부를 여쭈어보러 갔을 때에는 그와 더불어 《심경(心經)》을 강독하면서 직자심법(直字心法)을 알려주었으며 또 ‘해동일사웅(海東一士雄 해동의 영웅다운 선비)’이라는 말로 돌아가는 길을 배웅하기도 했다. 대현(大賢)의 문하에서 이렇게도 무거운 기대와 인정을 받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공은 사문과 가까이 있기 위해 집을 온양(溫陽)의 매곡(梅谷)으로 이사하고 스스로 매은(梅隱)이라고 불렀는데 선생이 그를 위해 기(記)를 써 주었다. 초산(楚山)의 화를 당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두문불출하고 경서를 복습하고 정리하였다. 매번 날씨가 화창하고 따뜻할 때에는 후생들을 거느리고 문 밖의 홰나무 밑에서 강습하였으니, 여기가 바로 사람들이 강정(講亭)이라고 하는 곳이다. 비록 세상이 다시 바뀐 뒤에도 지조를 바꾸지 않고 그 삶을 마쳤다. 공의 곧고 맑은 지조는 거의 회옹(晦翁 주자(朱子))이 말한 ‘하늘에서 얻고 학문으로 완성한’ 사람이니, 향당에서 끊임없이 공경하고 칭송하는 것도 당연하겠다. 아아! 세상에서 공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른바 ‘목천(木川) 유생이 윤증(尹拯)에게 통보한 일’을 거론한다. 공은 윤증(尹拯)과 10여 년간의 동문(東門) 우정이 있다. 그가 강도(江都 강화도)의 포로였는데 어찌 향사(享祀)에 합사(合祀)할 수 있겠는가라는 설을 선생에게 전하여 알린 것은 실로 목유(木儒 목천 유생)에게도 옳지 않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고 선생 또한 나쁜 악습이라고 배척하였다. 윤증은 도리어 그 본사(本事)를 가리고 숨기면서 말을 조작했다는 죄목 속에 선생을 빠뜨려 허물을 돌렸고, 윤증의 무리가 소(疏)를 올리고 비난하면서 “공에게는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말하였다. 공이 괴로움과 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아들을 보내 격고(擊鼓)하여 맞서 명백하게 분별하게 하였으며, 마침내 성주(聖主)께서 그 실상을 통찰케 하셨다. 이 일은 비록 관련된 것이 작지 않지만, 또한 섬김이 한결같은 공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다만 공이 평생에 크게 이룬 것이 아니니, 이것을 가지고 공을 안다고 한다면 어찌 천박한 앎이 되지 않겠는가. 공의 현손(玄孫) 심(諗)이 내가 사문의 후손이라 하여 여러 유생들의 뜻을 전하면서 기(記)를 써 줄 것을 매우 간절하게 요청하였다. 나는 글솜씨가 없다는 말로 사양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에 서사를 세우게 된 전말을 대략 쓰고 아울러 마음속의 느낌을 적어 서사에서 교유하는 사람에게 알린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노재준 박해당 권민균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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